음주페이퍼...히...나도 꼭 써보고 싶었다. 흐흐흐흐 ^^ 늘 집이 멀어 올 때쯤이면 께니까, 맨정신이었는데, 오늘은 집에서 마셨기 때문에 알딸딸한 상태가 유지된 가운데 써볼 수 있다. 아 좋아라.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원래 무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빠기에, 이런 건 꼭 내가 나서서 챙겨야 한다. 퇴근 길에 와인 한병과 케잌을 사왔다. 실은 우리집은 워낙 신실함을 표방하는 가정인지라(! -_-) 가족끼리 술한잔 마실 일도 없는 데다가 와인은 더더욱 마실 분위기가 안된다. 글라스는 저쪽 어디 구석에서 찾아 먼지 쌓인 걸 닦아서 마셨다. 트리오메를로를 사오려고 했는데 돈을 아낀다고 비슷한 맛으로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뻬르아 슈발이라는 생떼밀리옹을 추천 받았다. 가격 차이는 7천원 밖에 안났는데 맛의 차이가 좀 많이 나서 속상했던.
실은 집에서 가족들이랑 와인을 마신 게 처음이라 코르크를 처음 따봤는데, 아!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나 코르크마개 짱 잘연다. 완전 통쾌하다. 밀려올라오는 코르크가 주는 그 희열이라니. 흐흐흐흐흐.
엄마 아빠는 꼭 29년을 살았다. 넉넉하고 풍요롭게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한테 감사한 건 나를 넉넉하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늘 키워주셨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돈이 없다'는 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그게 인격 형성 과정에서 컴플렉스가 돼버린 사람도 많은데, 엄마 아빠는 일단 돈이 없어도 '가오를 잡느라' 그랬는지, 최대한 자식들 앞에서는 티를 안내려고 애쓰셨다. 그래서 내가 좀 철이 없이 자란 면도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난 내가, 마음만은 여유롭게 자랄 수 있어서 참 감사하고 감사하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구속에 주눅들어 자란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또 자유롭게 자랄 수 있었으니 고맙다. 방목당했다고 말하고 다니기도 하고, 엄마는 날 정말 편하게 키운 거라며 말도 안되는 생색을 내기도 한다. 이유는 "나는 가출을 안했잖아" 뭐 이런 생뚱맞은 것들 -_- 하지만 실은 나는 엄마가 나를 키운 것처럼 내 자식을 키우고 싶다. 엄마 아빠가 내게 허락했던 자유로 인해 내가 조금이나마 넓어질 수 있었다.
나를 이렇게 키워온 것이 쉽지 않았을 거라는 걸 요즘 들어 더욱 느끼고, 그래서 더더욱 감사하다. 거기에 뭐 플러스 알파로 몇가지 욕심이 더 나긴 하지만, 나중에 자식을 낳더라도 기본은 엄마가 나를 키웠던 방식을 중심으로 키우고 싶다. 물론 나의 깜냥으로는 플러스 알파는 커녕 엄마 아빠가 나를 키운 만큼 키우는 것도 가능할런지 모르겠다. 쓰다보니 내가 디게 잘 자랐다는 말 같아서 좀 재수없다. 그런 의도는 아니다. -_- 그냥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 있을 때도, 최선을 다해 키워주신 게 고맙다는 순수한 의도로 부디 읽어주시길.
앞으로 엄마 아빠의 결혼 기념을 몇번이나 더 챙겨드리게 될까. 우리집은 내가 안챙기면 아무도 안챙기는데. 나중에 내가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그 전에 아빠 매너교육 좀 시켜드려야 할텐데, 도무지 경상도 남자라 재미나 아기자기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그래도 같이 한자리에 모여 이런저런 얘기하며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니 참 좋다. 나로 인해 가족이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나도 가족에게 내 시간 내주는 것도 아까워하는 이기적이고 쪼잔한 가족 구성원이다. 엄마에게 옷이나 화장품을 사주는 일이 엄마와 함께 영화 한편을 보는 것보다 더 쉬운, 마음을 내는 일보다 돈을 내는 일이 더 쉽고 편한.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참 싫지만 참 더럽게도 안변한다. 엄마가 나에게 무심하다고 일곱번쯤은 시위해야 영화 한편을 보러 귀찮은 발걸음을 뗀다. 종종 엄마와 얘기하다 보면 내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 일부러 그런 자리를 피하기도 한다. 그런 스스로를 볼 때면 참, 남한테 하는 것보다도 못하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든다.
암튼, 엄마는 술을 사는데 돈을 많이 썼다며 불만을 표했고, 한잔 마시고서는 달달한 맛도 없다며 더 불만을 표했지만, 아빠는 맛있게 드셔주셨다. 오늘 마신 와인은 내가 생각해도 좀 불만족스러웠다. 마시다보니 또 은근 매력이 있긴 했지만, 몇천원 더 주고 살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과의 정치 얘기는 어쩐지 껄끄러워 피해만 왔는데 오늘은 아빠가 누구를 찍을 건지 물어본다. 아직 결정을 못했다고 얘기한다. 경상도 출신인 아빠는 당연히 이명박을 지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권영길이 제일 잘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다. 물론 안될 것 같아서 찍지는 못하겠다고 하신다만, 나로서는 굉장히 의외다. 아빠를 또 너무 내 잣대로만 봤나보다. 아빠가 이명박을 지지할 거라는 생각은 거의 확고했는데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아빠, 플러스 백점. 역시 대화를 해야 이런 것들도 알게 되는데 나는 지레 짐작하고 묻지도 않고, 충돌할테니 물어보지도 말아야지, 해버리고 말아왔다. 앞으로는 한달에 한번이라도 이런 자리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
죽어라 타이핑을 하다보니 술이 점점 깬다. 알딸딸함도 사라진다. 아무래도 이런 알딸딸함을 사랑하다가 내년 한해 알콜중독에 시달리는 건 아닌지. 그럼 알딸딸 중독, 알콜중독에, 알라딘 중독. 왠 알브라더스의 트리플 콤보 공격 맥스로 인한 시너지효과 창출이란 말이냐. 이런 유치한 발언 역시 알딸딸함이 주는 선물. 술 더 깨기 전에 얼른 잠들어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