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라, 알라딘이 자꾸만 나의 과거를 떠오르게 하네, 흐흐

대학에 들어가, 스스로 정한 두가지 소박한 목표가 있었다.

1. 3.0 밑으로 떨어지지 않기
2. F안맞기

남들은 4.0 넘고 막 이런 게 목표일 때, 나의 목표는 정말 너무나도 저렴해주신 관계로, 나는 저 목표를 매번 달성했다. 학보사 생활을 함께 병행했던 나는 자랑스레 학고를 맞았다고 하는 선배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학고가 열심히 신문사 생활을 했던 것의 반증이라는 양. 신문사 장학금은 2.0이 넘어야만 주어졌는데, 나는 신문사를 너무 열심히 하느라, 학고를 맞아 장학금도 못받았다,라는 호기가 은근한 자랑이던 시절. 나는 꿋꿋이 매학기 장학금을 타냈다.

첫학기, 풋풋한 마음으로 좋아하던 신문사 동기와 참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방학이 되고, 서로 집이 멀어 만날 수는 없었지만 거의 매일 통화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던 날들 중 언젠가 첫 성적표가 나왔고 우리는 서로의 학점을 공개했다. 우리의 학점은 딱 0.1점 차이. 하지만 그 친구는 2.95, 나는 3.05 으하하하하하! 같이놀고 비슷한 학점을 받았으나, 0.1 더받아서 나는 3점대다,라며 무지무지 뿌듯해 했던 기억. 대학시절 받았던 학점 중 저 하한선과 가장 가까운 학점이다. 3.05라니, 아슬아슬! 그 이후로는 거의 비슷한 학점을 받았던 것 같다. 4학년이 되어 신문사를 그만두기 전까지. 점점 올라가긴 했지만.

신문사를 그만두고, 나는 학생이고 싶었다. 그러니까, 공부만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4학년 1학기 때, 굉장히 많은 과목을 수강했다. (실은 학점을 적게 들었던 관계로 이래야 졸업이 가능했다 ㅋ) 전공 수업을 다섯개쯤 들었고, 진짜 교양도 좀 들었고, 언정(우리학부-언론정보문화학부)애들이 와서 맨날 죽쑤면서 꿋꿋이 와서 듣는다고 놀려대던 경경 애들이 재수없어서 마케팅 수업도 교양으로 들었다. 그래서 온전히 학생으로 한 학기를 보냈다. 남들 다 하는 취업 준비도 1년 내내 거의 안했다. 대책 없어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내가 학생일 수 있는 그 마지막 1년을 빡빡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취업이 좀 늦어지긴 했지만- 다시 그 때로 돌아간대도, 나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4학년 1학기 성적표는 경이로웠다. 태어나서 그런 성적표는 받아본 적도 없었다. 4.5/4.5 게다가 경경 애들이 놀려대던 그 마케팅 수업은 1등이었다. (우리학부는 등수를 알려주는 수업이 없는데 경경 수업은 등수도 알려주는 게 좀 신기하긴 했다) 아무도 나의 비장한 각오를 몰라주긴 했지만, 그냥 나는 혼자 통쾌했다. 우리 학부 무시하기만 해봐라, 흥! 

그런데 사람들이 참 간사한 것이, 2학기가 되니 사람들이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같이하자고 몰려든다. 학교에는 또 막 이상한 소문이 돈다. 쟤가 엄청 똑똑한 애였다더라, 막 이런 거. 실은 그래봤자 내 총 평점은 3.7을 겨우 넘는 수준임에도 말이다. 그래도, 나도 간사하니까- 그런 것쯤은 살짝 이용해줬다. 이제와 밝히는거지만 사실 운이 좋았다. 내가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봤자. 늦잠자느라 수업 빠지고 이런 것들은 해결이 안되는데, 같은 수업 듣는 친구가 노트필기를 워낙 꼼꼼히 하는 애라, 걔한테 다 배우고 시험을 봤는데 턱걸이로 A+ 나온 과목들이 몇개 있었다.

아, 쓰다보니 좀 재수가 없어지긴 했는데 더 재수없어지기 전에 두번째 목표 이야기로.

두번째 목표는 F 안맞기였는데, 이 목표를 향한 나의 행보는 매우 처절했다. 하하하 ㅠㅠ

2학년 1학기 때 비주얼베이직 수업을 듣는데 이게 1교시였던 데다가, 프로그래밍은 워낙 잼병이라 이 수업이 F의 위기에 놓였다. 같이 듣던 신문사 동기 H양은 이 수업을 포기하고 F를 맞았다. 하지만 난 성젹표에서 도무지 F라는 글자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여, 수없이 많이 지각을 하고, 뭔지 하나도 모르면서도 수업과 시험은 꼭 가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난 처절하게 이 과목에서 D+을 맞았다. 그리고 다음학기 바로 재수강.

2학년 2학기 때 성경의 이해 수업을 듣는데, 꼭 졸리거나 햇볕이 쨍쨍한 시간, 공부 죽어도 하기 싫은 시간이 이 수업 시간이어서, 나는 결석을 좀 많이 했다. 나와 함께 수업을 듣던 아까 그 H양은 역시 포기하고 F를 맞았다. 하지만 나는 또 성적표에서 도무지 F와 조우할 자신이 없었다. 하여 기말고사의 순간, H양은 가지 않았고, 나는 백지를 내는 한이 있어도 갔다. 이 수업은 한학기에 4권의 서평을 내야 하는 수업이었는데, 나는 황금같은 기말고사 기간에 책 4권을 한꺼번에 읽고 서평을 쓰느라 거의 좀비가 됐다. 그래도 난 꿋꿋이 4권의 서평을 다 내고 D를 맞았다. 사람들은 도무지 나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선택에 후회가 없다. F는 안맞았으니까. 물론 4학년 2학기 때 H양과 함께 나란히 재수강.

그 때 F를 맞고 다른 과목에 주력했다면 성적이 더 높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 어차피 재수강할 거. 하지만 난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역시, 다시 학교로 돌아가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난 4년 내내 F가 없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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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2-08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F는 없지만 D 맞아도 재수강은 안 했어요. 난 최선을 다했고 결과가 안 좋았던 것뿐이라며 배짱 부렸던... 졸업하고 후회가 되던걸요. 학점 관리 좀 더 해줄걸...하고요. 뭐, 어쩌면 지금 다시 그렇게 하라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지만요^^

웽스북스 2007-12-08 00:37   좋아요 0 | URL
근데 둘다 재수강하면서 너무 재밌었어요- 비주얼베이직은 다시 들으면서 그나마 프로그래밍이 뭔지 프로세스 정도라도 알게 되서, 지금 일하는데 도움이 살짝, 매우 살짝 되요- 그니까, 개발자 앞에서 원리 정도는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랄까요 ㅋㅋ 물론 개발자 입장에서는 우스울지도 몰라요- 성경의 이해 수업은 4학년 2학기 때 다시 들으면서 진정 행복했던 수업이라지요- 저녁시간에 들었던 수업인데 뉘엿뉘엿 해지는 길을 걸어 수업들으러 가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답니다. 유일하게 재수강한 게 저 두과목이에요 ^^

깐따삐야 2007-12-08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교적 고루고루 들으셨당. 저는 거의 인문학 쪽으로 쏠려 있었는데. 물론 그 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도 또 다시 그럴 것 같긴 하지만요. 그리고 웬디양님 화끈하신 데가 있군요.^^

웽스북스 2007-12-08 00:39   좋아요 0 | URL
전산쪽은 의무였어요 12학점. 제가 듣고 싶어서 들은 게 아니라는 사건. 마케팅은 오기로 들었고 ㅋㅋ 저도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인문학 쪽 수업을 더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지금 주어진다면 더더욱 그렇구요-
그나저나 이렇게 소심하면서 화끈하기도 쉽지 않죠, 그래도 전 F가 없습니다 하하하하하 ㅋㅋㅋㅋ

마늘빵 2007-12-08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F도 없고 D도 없지만 총학점은 높지 않다는. 고만고만하게 다녔다는 이야기. 그치만 학점은 낮은데 졸업등수는 3등이었다는. 이로부터 추측가능한 결론, 교수님들이 학점을 짜게 줬다. -_- 내 학점으로 3등을 하다니.

웽스북스 2007-12-08 00:42   좋아요 0 | URL
아니 아프님 D도 한번 안맞아봤단 말이에요? 이거이거 대학생활 헛하신거 아니에요? 막 이러고 ㅋㅋ
전 먼저 졸업한 친구가 우등상을 받아서 대학교도 우등상을 준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이 먼저 졸업한 친구는 쿨함을 지향하는 C양, 이 한정된 인간관계 ㅋㅋ) 미리 알았으면 나도 공부 열심히 했을텐데, 막 이랬다지요 ㅋㅋㅋ 졸업식에 가기 싫어서 다른 친구한테 너 1등해서 앞에나가서 우등상 받으면 갈게,라고 했는데, 그 친구 진짜 1등해버려서 졸업식에 결국 가족 다 끌고 갔던 슬픈 추억도 ㅠ_ㅠ 아프님도 3등이면 우등상 받으셨겠네요 ^^ 부럽다, 나 꼭 받아보고 싶었는데 ㅋㅋㅋ

마늘빵 2007-12-08 00:53   좋아요 0 | URL
우등상 그런건 안주던데... -_- 전 몰랐어요. 제가 3등이었는지. 나중에 성적증명서 보고 알았어요. 25명중 3등. 워낙에 철학과는 인원이 적은데 졸업인원은 더 적어서. 근데 어떻게 내 학점이 3등이야. -_- 교수님들 너무해 막 요러고.

웽스북스 2007-12-08 01:04   좋아요 0 | URL
우등상 아무도 안줬어요? 아니면 1등만 줬나? 우리학교만 우등상이 있었나? 근데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니 성적이 살짜쿵 궁금해지는데요? 흐흐흐흐

순오기 2007-12-0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설문에선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 순위를 물었는데, 10대부터 60대까지 모두 1순위는 '공부를 열심히 할 걸!'이었다는군요. 결과야 어쨋든 나름대로 열심히 했으면 자존심 팍~ 서는 일 아닌가요? 난, 대학원 갈려고 C는 봐줘도 D는 절대 용서못해...이랬는데, 아직도 대학원은 문턱에도 못갔다는...ㅠㅠ

웽스북스 2007-12-08 00:45   좋아요 0 | URL
전 공부를 열심히할 걸!이 아닙니다 ㅋㅋㅋㅋ 공부엔 이제 별 미련이 없습니다. 다만 그 외 다른 것들에 열심을 내지 못한 게 좀 후회되긴 해요.
순오기님은 대학원에서 뭘 공부하고 싶으셨는지, 궁금하네요 ^^ 얼마전에 탔던 택시기사아저씨 부인은 나이 50에 지금 또 대학에 가셔서 열심히 공부하신다던데, 순오기님도 화이링이에요! ^^

라주미힌 2007-12-08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런 우등생들... 내가 못 볼 것을 보았도다...
b 맞은거 재수강해서 d 맞고 열받아서 삼수강 해서 간신히 C 맞은 아름다운 추억이 있죠 ㅡ.ㅡ;
그것도 1학년과목... 상대평가로 바뀌는 바람에.. 1학년들이 취업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하는 줄 몰랐음...

웽스북스 2007-12-08 01:10   좋아요 0 | URL
아 요즘 대학생들 정말 열심히 하긴 하더라고요- 전 B맞은 거 재수강하는 사실 자체를 증오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까 라주미힌님은 B맞은 걸 재수강하는 수준의 학점이셨단 말이죠? 전 그랬음 학교 3년은 더 다녔을 거에요 ㅋㅋ (자랑이다~)

라주미힌 2007-12-08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가 별로 없어서 ...
1학년 과목이라 만만했거든요.. (아.. 이런것도 해명 해야되다니 ㅠㅠ)

웽스북스 2007-12-08 02:03   좋아요 0 | URL
푸흐흐흐 그만 웃어버린 사건! ^^

Mephistopheles 2007-12-08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쯤에서...
신나게 놀고 마시고 자화자 하면서 졸업시 평균 3.8 받은 이가 댓글 남기고 갑니다.

웽스북스 2007-12-08 10:27   좋아요 0 | URL
어라, 메피님 그런 분이셨군요 -_- 쳇

비로그인 2007-12-08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눈에는 열심히 공부하던 우리 과 한 친구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제 대학시절은 님과 찜닭과 캡틴을 함께 했던 H양과 흡사하구요.
혹시 내 친구 ㅇㅇ아니세요?

웽스북스 2007-12-08 10:27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럼 승연이 본명이 아니어야하는데 말이지요 ㅎㅎ

잉크냄새 2007-12-08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공대출신이면서 1학년 물리학을 F 받았죠. 놀고 먹은 1학기 중간고사 15점, 빡세게 공부한 기말고사 15점...4학년 재수강시 석양의 무법자 동기와 정말 열심히 해서 6년 후배들을 제치고 2등으로 교과를 마칠시 물리학 교수가 교실에서 일으켜세워 칭찬을 해줬는데,이거 칭찬이 아니라 왠지 무덤을 손수 파주시는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밖에 생각할수가 없더군요. 너거들 빵구내고 저렇게 다시 할래?

웽스북스 2007-12-08 11:57   좋아요 0 | URL
아 이거야말로 이건 칭찬도 아니고 욕도 아니야의 오묘한 경지에 서 있는 그래서 기뻐해야할지도 슬퍼해야할지도 모르겠는 경계에서 몸둘바를 모르겠는 그 사건이시군요- 그럼 1등은 그 동기였나요?

다락방 2007-12-0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이 밑에 댓글달면 안되는 1人 이로군요. 이로서 웬디양님과 제 관계는 아주 멀어져버렸어요.

저는 학고도 먹었고, F는 달고 살았고, F가 안나오면 D였고,A는 받아본적도 없고, 친구에게 "만점은 3점이지?"라고 물었던 그런 학생이었거든요. 전공 교수님은 "오늘 다락방 나왔으니 출석은 안부른다" 고 말씀까지 하셨던. orz
애들은 수업끝나고 만화방에 있는 절 찾으러 오곤했죠.

네, 전 이런사람이예요. 흑 ㅜㅡ

웽스북스 2007-12-09 01:22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
무지 매력적인 학생이셨군요-
전 이런 친구들 굉장히 좋아했었답니다

F가 없는 건 제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소심해서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