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밤,참- 말,참 예쁘다

대학시절 4년을 기숙사에서 보낸 나는 다양한 야식 문화와 함께 했는데, 대략
전자렌지라면 - 탕수육 - 치킨 - 찜닭 - 그 이후로는 다양!

뭐 이정도라 할 수 있다. 가스렌지가 없던 그 때, 누구나 책상 위에 전자렌지용 라면 용기 하나쯤을 가지고 있었으며,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4분 30초간 돌리면 되는 전자렌지 라면은 최고의 인기 야식이자 식사대용품이었다. 여름에는 비빔면도 인기 최고. 나는 한동안 집에 와서도 전자렌지에 라면 끓여먹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 중 단연 인기 품목은 짜파구리였는데, 이건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2:1의 비율로 섞었을 때 최고의 맛이 난다. 그러니까 3명은 모여야 먹을 수 있단 얘기. 남자는 두명도 가능하겠다. 짜파게티의 느끼함을 너구리의 개운함이 싹 감싸주는 맛이랄까. 가끔 우리 집에 놀러오는 애들이나 모임, 엠티 등에서, 할 줄 아는 유일한 요리는 라면과 계란후라이이며, 할 줄 아는 유일한 특별 요리는 짜파구리뿐인 나는 이 음식을 몇번 해줬다. (해줬다고 하기도 민망하군) 내가 또 짜파게티 물 하나는 잘맞춘다 흐흐흐- 학교를 휴학하고 라면 전문 N사 계열 광고대행사에서 인턴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직원 아이디어를 낼 때 낼 게 없어서 끄적끄적 이걸 낸 적이 있다. 이걸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올렸던 걸 누가 봤는지 학교에 소문이 잘못 돌아 나는 복학 후에 스쿨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후배에게 이런 말도 들었다.

"어, 언니 저는 언니가 학교 졸업하고 N사 들어가서 짜파구리 개발중이라고 들었었는데- 지금 왜 학교에 계시는 거에요? "

아, 도대체 이런 소문은 어디서, 왜 났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짜파구리 사랑은 대단했지. 하지만 귀찮아서 잘 안끓여먹은지 2년도 넘었다.

우리학교는 산속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중국집이 차로 20분 가량 걸리는 곳에 있었다. (물론 더 가까운 바닷가 중국집이 있었지만 배달이 안됐으므로 패스) 자장면이나 짬뽕은 불어서 시킬 수가 없었고, 대신 탕수육을 그렇게 자주 시켜먹었었는데, 이 중국집은 우리 학교에 탕수육 팔아서 건물을 지은 중국집이라는 거! -_- 하지만 이건 치킨의 시대가 오기 전의 일이다

바야흐로 뼈 없는 닭의 시대가 오고, 학교 주변은 치킨집의 춘추전국 시대를 이뤘는데, 원조 뼈없는 닭인 '살로만 치킨' 닭의 양은 비슷하나 껍데기가 두꺼워 수북히 담겨와 남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캡틴', 그리고 상대적으로 얇고 깔끔한 밀가루 껍데기와 좋은 기름에 튀겨 깔끔함을 추구하던 여성들을 공략했던 '회나무'까지(그래도 지가 치킨이지) 이 정도가 대표선수 되시겠다. 우리는 모두, 우리 부모님께 학교 앞에서 닭장사를 하게 해야 한다고 우겨댔으며,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하룻밤에 희생되는 닭의 양이 몇마리인지를 헤아려보기도 했다. 여기서 깜짝퀴즈,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치킨은 저 세 업체 중 어디일까요?

그리고 찜닭의 시대가 왔다. 찜닭의 시대가 오면서 탕수육은 사양산업으로 접어들었고, 치킨과 찜닭 양립 시대가 왔다. 우리 학교 근처에 있던 처가 찜닭과 같은 맛의 찜닭을 나는 서울 어디에서도 먹어본 적이 없다. 간장국물이 아닌, 매운 국물, 풍성한 당면. 일단 오면 일회용기를 한번 뒤집어 바닥에 대고 빙빙 돌려 양념이 골고루 묻게 한 다음 함께 온 부추전과 먹으면, 그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결국 긴장한 대학관 사모님께서는 안동까지 가셔서 찜닭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아 오셨고, 자극적인 처가 찜닭을 먹기 힘들어하던 학생들은 간장 소스의 대학관 찜닭을 선호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의 첫번째 찜닭은 매콤한 처가찜닭. 친구들과 함께 찜닭먹는 일주일에 한번 찜닭 먹는 날도 정해놓았었고,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친구랑 둘이 찜닭을 시켜서 꾸역꾸역 먹다가 토할뻔하고 -_- 내 다시는 찜닭을 먹지 않으리라 다짐하고는 돌아서서 또 찜닭을 시켜먹었던 기억도 있다. 이제 학교 근처에도 처가 찜닭은 없다고 한다. 신촌 어딘가로 이사해 찜닭집을 내셨다는데, 한 번도 찾아가본 적은 없다.

참 배고팠던 때였다. 일단 하루세끼 학교밥을 먹을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으니, 지치고, 힘들었고, 어떤 때는 메뉴만 보고 돌아서서 온 적도 있었다. 그런 날, 저 밤참들은 내가 참말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입새에 일던 찜닭에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던 그 기억이 지금까지도 먹을 걸 보면 일단 축적해두고 봐야 한다고 믿는 구차하게 먹을 것에나 집착하는 나 자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또 참 먹을 것 귀하게 여기기가 쉽지 않던 이 21세기에 음식 귀한 줄 알고 자랐던 게 다행스럽다 싶기도 하다. (이런 초합리화!)

지금은 돈도 벌고, 거주 환경도 바뀌었으니, 예전보다 맛있는 걸 많이 먹게 되면서 조금씩 입맛이 까탈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워낙 막 먹고 자라서, 아무거나 다 맛있긴 하지만, 가끔씩 음식 앞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내 모습 뒤로, 저 정크푸드들을 먹으며 행복해 했던 나의 대학시절이 스친다. 어쩌면 신촌에 있다는 그 처가찜닭을 다시 찾아가지 않고 있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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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년전 일기를 읽다가 기절
    from 지극히 개인적인 2007-12-07 00:57 
    나는 매일 12시가 넘으면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투데이 히스토리를 눌러 1년전 오늘, 2년전 오늘, 3년전 오늘, 4년전 오늘....... 의 일기를 쭉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그럴 때마다 가끔 놀랄 정도로 현재의 삶과 일치한다던가, 혹은 현재 했던 생각을 그 때도 했던 것들에 놀라는데, 오늘 밤참 관련 페이퍼를 쓰고 투데이 히스토리를 눌렀다가 난 그만 웃어버렸다 드디어 성공했다 캡틴 둘이 먹기에 이은 찜닭 둘이
 
 
깐따삐야 2007-12-06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알라딘은 잔인해욧. 이 시간에 이런 페이퍼라니.-_-

웽스북스 2007-12-07 00:01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에서, 깐따삐야 별의 야식을 소개해주시죠? ㅎㅎ

마늘빵 2007-12-07 00:07   좋아요 0 | URL
나는 닭을 싫어하므로 무감정. -_-

깐따삐야 2007-12-0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는 이야기 시작하면 내 흥에 내가 빠져서리 밤을 꼴딱 새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자극시키지 마세욤.ㅋㅋ

웽스북스 2007-12-07 00:06   좋아요 0 | URL
흑, 저도 이 밤에 자극되면 안되는데, 이상하게 기대가되네 ㅋㅋ

마늘빵 2007-12-07 00:08   좋아요 0 | URL
어서 두 분 다 라면을...! 하나씩 끓여서 사진 찍어 올리세요.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맛있는 라면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맛있는 라면 (둘리 노래)

웽스북스 2007-12-07 00:19   좋아요 0 | URL
어, 나 그노래 디게 좋아하는데
라면이 있기에 세상 살맛나
하지만 라면은 맛좋은 라면은 구멍뚫린 구공탄에 끓여야 제맛
(까루까루고추까루~)

푸하 2007-12-07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계신거 같아요. 그 이야기를 선명하게 드러내시는 데, 묘사와 서사의 능력이 있으셔서 그런 듯해요.
짜파구리... 두 가지 스프의 결합입가요? 상상만해도...!!! 네요.^^;

웽스북스 2007-12-07 00:21   좋아요 0 | URL
!!!! 라니요, 정말 맛있는데 흐~
묘사와 서사의 능력은 없는데, 순전히 먹는 얘기라 그래요 ㅋㅋ

Mephistopheles 2007-12-07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살아남은 뼈없는 닭집은 살로만치킨 같아요..
찜닭...전 찜닭을 먹으면서 몇번 불쾌했던 기분이 들었었죠.
이건 찜닭을 가장한 당면닭이였으니까요..

웽스북스 2007-12-07 01:00   좋아요 0 | URL
전 닭도 닭이지만 당면이랑 감자도 좋아해서
당면이 많은 게 불만이었던 적은 별로 없었어요-
애가 가끔 심하게 불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긴 하지만 ㅋㅋ

살아남은 치킨집은 나중에 발표할게요

프레이야 2007-12-07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웬디양님 대문사진 넘 예뻐요.
저 어제 밤참으로 군고구마랑 잉어빵 먹었어요.ㅎㅎ

웽스북스 2007-12-07 13:20   좋아요 0 | URL
흐흐 대문 사진은 아는 분께서 제가 생각나는 사진이라며 선물해주셨답니다 (엄훠! ㅋㅋ) 저도 매우매우 좋아라하는 사진이에요~ 그니까 제가 꽃을 닮은 건 아니구요, 뭐 그냥 다양한 뭐, 에잇 ㅋㅋ

네꼬 2007-12-07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안녕하세요? 네꼽니다. (꾸벅)
글 읽기 전에 사진이 먼저 눈을 빼앗았어요. 마음이 화사해집니다.
배고픈 글인데 그것보다도..... 전, "초합리화" 이런 얘기에 늘 마음을 빼앗겨요. *_*

웽스북스 2007-12-07 13:20   좋아요 0 | URL
네꼬님 찌찌뽕! 저도 오늘 네꼬님 서재가서 즐겨찾기 추가하고 왔는데
네꼬님도 ㅋㅋ
기념으로 '초합리화' 단어 사용을 허하노라~

비로그인 2007-12-07 13:32   좋아요 0 | URL
저는 네꼽니다를 배꼽입니다로 읽었어요.

웽스북스 2007-12-07 19:34   좋아요 0 | URL
네꼽니다
배꼽입니다
백곰입니다

흐흐흐 (죄송합니다)

비로그인 2007-12-0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는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즐겁죠.
특히 입안이요.

웽스북스 2007-12-07 19:35   좋아요 0 | URL
흐흐 읽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시다니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