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말이다:

"My work has extende from the foundations of logic to the nature of the world." (Wittgenstein's notebooks, 79)

거기에 나는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나는 알았노라고.

어제 나의 고민은 사태(Sachverhalt)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였다. 사태의 위치가 애매했고 심지어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비트겐쉬타인이 실수한 것일까? 그러다가 비트겐쉬타인의 노트북에 딸려 있는 서신 발췌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읽었다: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atsache[사실] and Sachverhalt[사태]?" Sachverhalt is, what corresponds to an Elementarsatz if it is true. Tatsache is what corresponds to the logical propduct of elementary propos when this product is true. The reason why I introduce Tatsache before introducing Sacherhalt would want a long explanation."(Wittgenstein's letter to RUssell, 1919)

사태를 비트겐쉬타인의 실수로 넘겨 버려서는 안되리라는 의미다.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저 밑줄 친 부분(내가 쳤다)을 이제 내가 어렴풋하게나마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대략은 이렇다. 출발은 럿셀의 판단 이론이다. 판단 이론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가장 근본적인 비판이자 대안은 다음과 같다:

"we must be able to understand a propostion without knowing if it is true or false."(notebooks, 98)

(나는 이런 말을 나의 어떤 친구에게 하기가 너무 두렵다. 그 친구는 철학에 문외한이라 바른 소리를 너무도 잘 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 아니야? 저런 거 하는 게 철학이야? 정말 말장난이네...ㅉㅉㅉ")

럿셀은 저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비트겐쉬타인은 저 기준을, 스스로 판단하기에, 충족시켰다. 나는 지금 논고 전체를 저 문장을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자. 럿셀과 비트겐쉬타인의 철학적 야망은 같았다. 즉, 인간의 심적, 정신적 상태를 최대한 배제하고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럿셀은 이 기획에서 좌초했다. 판단 이론의 실패가 그 적나라한 징표다. 좌초한 이유도 명백하다. 럿셀이 자신의 철학의 기초로 영국의 경험론적 전통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나는 이걸 럿셀리안 독트린이라고 부른다).

이제 비트겐쉬타인에게 주어진 과제는 저 기준을 충족하되 인간의 심적 상태에 대한 언급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해"라는 단어를 공적인 어떤 것으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다시피 비트겐쉬타인의 해답은 명제의 그림 이론이었다. 그림 이론이란 명제가 현실에 대한 모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태"라는, 말하자면 잠재적인 사실을 도입하여! 이런 맥락에서 사태, 대상, 명제의 뜻(sense), 논리적 형태(logical form)에 대한 요구 등에 대한 논의가 딸려 나온다.

똑같은 맥락에서 "My fundamental idea is that the 'logical constants' are not representatives"(4.0312)라는 문장도 이해된다. 단순히 대표할 어떤 것이 세계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장은 올바른 논리적 표기법이 갖춰야 할 기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논고"의 논리학에 대한 언급들은 이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논고"가 그리는 세계상이란? It is as it is. 내가 느끼기로 이 세계는 철학자들에게 아주 친숙한 세계다. 철학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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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7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ekly 2011-11-27 17:18   좋아요 0 | URL
럿셀의 판단 이론을 비판한 후 비트겐쉬타인은 노르웨이 오지로 혼자 연구를 하러 떠나려 합니다. 그때 럿셀이 비트겐쉬타인에게 대강 구상만이라도 알려달라고 간청하여 비트겐쉬타인이 구술해 준 것이 "Notes on logic"입니다. 이 문서에서 비트겐쉬타인은 "명제의 가부를 알기 전에 우리가 아는 것, 즉 명제의 뜻(sense! meaninig과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합니다. 당시 비트겐쉬타인이 갖고 있던 해답은 명제의 양극성 이론입니다. "[A] proposition has two poles, corresponding to the case of its truth and the case of its falsehood. We call this the sense of a proposition."(notesbooks, 99) 그러나 이 이론은 여러가지로 불만스러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비트겐쉬타인은 방법론적인 방향전환을 하여 우리가 명제의 뜻을 알 수 있으려면 세계와 명제가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에 대해 탐구합니다. 그 결과가 논고의 서두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론적 명제들입니다. 논고 자체의 논리로 보건 문헌적인 증거들로 보건 이 이야기는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논고 전체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초 중 하나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논고 전체를 한 단어도 빼먹지 않고 이해하고자 하는 야망에 붙잡혀 있답니다. 그러나 아직 덜된 상태에서 논문을 마무리지어야 하기 때문에... 속이 좀 상합니다.

암튼 말씀 감사드립니다.^^
 


(http://www.nationalgallery.org.uk/paintings/salvator-rosa-philosophy)

어제 오전에 일이 잘 안되길래 털고 일어나 내셔널 갤러리에 갔다. 가볍게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런던이 이런 게 좋다.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 무료다. 다빈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건 유료다. 신경을 자극받고 싶지 않아서 그냥 넘겼다. 내년 이월까지라는 것만 확인해 두었다.

이 방 저 방 거닐면서 그림들을 둘러 보았다. 내 요즘 취향은 방에다 걸어두면 어울릴 만한 그림이라서... 추상화가 더 구미에 당긴다. 그래서 고전 작품들로 가득한 벽들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적당한 주의만을 기울이며 그림들을 둘러 보았다.

그러다 이 그림이 눈에 딱 들어왔다. 왜냐고? 스피노자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목을 확인해 보니 "Philosophy"다. 게다가 저 손에 들린 라틴 문구는, "Be quiet, unless your speech be better than silence"란다...-.-

그대의 말이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닥치고 있으라. 말할 가치가 없는 것임에도 말하기를 고집한다는 것은 그대가 비윤리적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럿셀은 판단 이론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을, 몇 년이 지난 후 호된(severe) 비판이었다고 회고한다.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에 좌절하여 심지어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을 받고는 학문함에 있어 처음으로 자신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을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 모든 기록들은 그의 개인적 기록이나 서신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공적인 기록에 있어서는, 심지어 그의 자서전에도 이 사건이 제대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럿셀은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를 드러내고 인정하는 데 전혀 게의치 않는 사람임에도 말이다. 럿셀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까... 이런 걸 생각하다보면 내 가슴도 아프다.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은 정확히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이 비판의 학적인 측면을 매우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비판의 윤리적 측면도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추측할 수 있다.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은 아마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선생님에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이 문제를 이해하고도 책을 계속 쓰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건 선생님이 사악하다는 뜻입니다." 럿셀의 상처는 자신이 사악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음에서 오는 상처였으리라고 나는 추측한다. 이런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비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철학은 철학함 자체가 항상 문제시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보라, 저 그림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모세의 십계명이다. 젠장, 보지 말았어야 할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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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11-2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이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선생님에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이 문제를 이해하고도 책을 계속 쓰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건 선생님이 사악하다는 뜻입니다." 럿셀의 상처는 자신이 사악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음에서 오는 상처였으리라고 나는 추측한다.

이부분에서 빵~터졌네요..ㅋㅋㅋㅋㅋ 사악하다는 한 마디 때문에 연구를 포기하다니..그러고보면, 럿셀은 참으로 윤리적이었네요. 역시 럿셀은 정치를 하면 안되는 사람이었습니다..ㅎㅎ

weekly 2011-11-27 17:23   좋아요 0 | URL
아마 실제 그런 대화가 있었다면 비트겐쉬타인이 사용했을 단어는 "dishonesty"였을 겁니다. 당시의 무어나 비트겐쉬타인, 럿셀 같은 사람들을 특징짓는 단어는 아마도 지적 결백성, 혹은 지적 결벽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 런던은... 최악이다. 매일 매일 정체 모를 싸이렌 소리가 끊이지 않고 소방차와 앰뷸런스가 수시로 질주하고 거리는 곧잘 주차장으로 변한다. 어제는 킹크로스역 입구가 폐쇄되었다. 이유는 모른다. 나는 두 정거장을 걸어갔다. 거리의 사람들도 신경이 날카로와 보인다. 어깨를 부딪힌 두 남자가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본다. 나도 신경이 날카로와 진다. 이런 데서 어떻게 올림픽을 치른다고... 나는 습관처럼 혀를 찬다.

스타벅스에 공부를 하러 들어갔다. 흑인 아저씨가 다가와 남성 잡지를 사달라고 한다. 나는 필요 없다고 한다. 잡지엔 2 파운드 가격이 붙어 있는데 이 아저씨가 1 파운드만 달라고 한다. "1 파운드?" 나는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모아 1 파운드를 만들어 건네 준다. "근데, 이 잡지는 필요없어요." 흑인 아저씨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슬쩍 걱정 한 자락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흑인 아저씨가 주먹을 내쪽으로 내밀며 "에이 요~"를 하자고 한다. 나는 너털 웃으며 주먹을 부딪힌다. 나는 흑인들이 좋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내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젊은 남자 하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할머니 한 분이 옆에 서자 양보를 하려고 그런 것이었다. 할머니가 함박 웃으며 다음 역에서 내리니 괜찮다고 한다. 날카로왔던 나의 신경이 깨끗이 풀어진다. 나는 이런 장면을 사랑한다.

워털루에서 기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아뿔싸, 앤스콤의 책에서 내가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가 다루어 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Russellian doctrine이라고 이름 붙이고 나의 작은 논문 곳곳에서 강조를 하던 것이었는데... 강조의 강도를 줄여야 겠다. 대수로운 것이 아닌 듯 다루어야 겠다고 마음 먹는다. 촌스럽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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럿셀의 "철학의 문제들"은 가장 성공적인 철학 입문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 이 책이, 분명히 인식론에 지나치게 치우친 감은 있지만, 철학의 보편적인 논점들을 객관적이고 균형감있게 소개해 준 책임에는 틀림없지 않는가? 아니다. 이 책은 럿셀 자신의 철학 체계를 스케치한 풍경화다. 이 책이 철학 입문서라면 럿셀 철학의 입문서일 뿐이다.

2). 그래도 이 책이 평이하고 쉬운 문장으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써진 것은 맞지 않은가? 아니다. 감춰진 맥락을 따라잡지 못하면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므로 결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3). 그래도 이 책이 애매한 용어를 자제하고 논란이 많은 부분은 배제하여 어느 정도 객관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문제들만 다루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주제는 acquaintance 이론이고 이 이론은 제5장에서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이론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전혀 명료하지 않다. 나는 이 이론을 이해하느라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러다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The difficulty with Russell’s principle [of acquaintance] has always been to explain what it
means. The principle is that a subject cannot make a judgement about something unless he knows which object his judgement is about. … the real dispute concerns what it is to have such knowledge” (Evans).

허탈함을 동반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4). 그래도 말이다. 아무런 스캔들도 일으키지 않고, 아무런 논란꺼리도 없는 것이 어떻게 철학의 고전이 되었겠나? 이 책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았다면 객관/평이/명료의 한 얼굴과 그에 상치되는 또다른 얼굴을 함께 갖고 있어서이지 않을까? 그렇다. 고전은 항상 두 얼굴을 갖는다. 결론은 착하게 살지 말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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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지금 3층 짜리 집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으니 1, 2, 3층을 동시에 올릴 수 밖에 없다고. 그런데 아마 그건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각 층을 동시에 올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1층부터 차례로 올리는 것보다 더 빨리 집을 지을 수는 없을 거란 이야기다.

나는 지금 혼란에 봉착해 있다. 책과 논문들과 키보드 사이를 방황하다 불쌍한 듀리당의 당나귀 신세로 하루를 마치곤 한다. 오늘도 조급한 마음에 이것 저것 사이를 헤매 다니다 문득 깨달았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다음부터는 이렇게 해야지 하고 마음 먹은 일은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기억하라. 너 자신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걸. 뮤즈를 믿어야 한다는 걸. 이건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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