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영국판 "오피스" 전편을 몰아서 보았다. 한 마디로 감동. 블랙 코메디에 대한 정의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미국이나 한국에서 이런 식의 코메디가 어떻게 수용될 수 있을지 궁금해 졌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미국판 오피스 클립을 몇 개 보았다. 미국판 오피스에서는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국판은 다큐멘타리같은데 말이다. 댓글들을 읽으니 미국판은 에피소드가 진행되면서 영국판과 다른 길을 간다고 한다. 좀 더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영국판은, 내 느낌으로는 진하디 진한 블랙으로 간다. 여기서 우리가 감히 웃어도 될까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친구랑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그런 "블랙" 코메디를 영국적인 특성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걸 어떤 "지역적" 특성으로 간주하기가 무척 망설여졌다. 나는 그걸, 말하자면 코메디의 정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피스"의 공동 작가 중 하나이자 주인공 역을 연기한 Ricky Gervai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Comedy is above all about empathy in my opinion and I think as an actor the more you empathise with a character the more engaging he will be to an audience."


나는 이 분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블로그에 비슷한 의견을 쓰기도 했다. 재능있는 작가나 배우는 아무리 비윤리적인 인물이라도 그에 섬세한 결을 부여하여 관객들로부터 감정이입을 빼앗아올 수 있다. 서투른 작가나 배우는 그런 섬세한 결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서툴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작품에 대해 어떤 것은 좋다, 어떤 것은 나쁘다는 평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지, 이 작품은 나의 성향에 맞는다, 저 작품은 안맞는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도 많다. 줄여야 한다. 어짜피 나는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말로 끝날 이야기다. 그리고 나로서는 당신 역시 스피노자주의자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 이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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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조정래의 소설에 크게 실망했단다. 조정래라는 이름에 걸맞는 작품이 아니라면서 오랫 동안 화를 내었다. 나는 깔깔 웃었다. 그 책이 내 손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난 몇 줄 읽어보고는 바로 책을 집어 던졌었다. 벽을 두드려 보면 그 집이 오래 갈 집인지 어떤지 알 수 있다. 그 소설에서 조정래의 문장은 완전한 날림이었다. 그 친구는 날림 공사를 한 시공사에 화를 내듯이 조정래에게 화를 내었다.


우리는 한참 빌리 엘리어트, 이문열 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내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의 한 문장 "이제 그 겨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맞나?)를 읊자, 친구도 그 귀절을 안다며 맞장구를 쳤다. 좋은 작품은 좋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당연한 이야기인가... 좋은 문장에서는, 내 관점인가 모르겠는데, 작가가 보이지 말아야 한다. 이문열이 좋은 소설가이긴 하지만, 안타까왔던 것은, 그의 작품에는 항상 이문열이 출몰한다는 것이었다. "선택"은 아주 대놓고 나댄 작품이고. 이문열이나 조정래같은 대단한 작가들도 참을성을 잃고 하고 싶은 말(해야 할 말이 아니라!)을 함부러 내던지는 실수를 하는구나... 하는 점에서 나는 차라리 위안을 받는다. 그분들이야 망작을 하나 냈으면 잠깐 괴로워 하다가 새로 좋은 작품을 쓰면 될 테고... 그런데 이문열도 다시 좋은 작품을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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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공사가 있어서 동네 스타벅스에 갔다 왔다. 아침인데도 사람이 꽤 있었다. 나는 맬컴의 비트겐쉬타인 회상록을 읽었다. 재밌다. "[An explanation] must be public."(p 47) 같은 문장이 나의 주의를 잡아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토론의 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나의 테제는, 어떤 기준계를 상정하는 한 모든 판단은 측정이다, 라는 것이다. 거의 동어반복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떤 토론의 참여자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당연히 그는 동의할 수 없다는 말 이상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쉬운 게임이다. 나는 그에게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어댄다. 그것이 게임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조깅하는 모습을 본다. 한 겨울에 짧은 바지만 입고 그렇게들 뛴다. 사실 영국은 춥지 않다. 나는 보일러를 켜지 않고 살고 있다. 복싱 데이때 선물로 받은 두툼한 잠바도 입을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조깅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영국에 와서 한국의 뭔가를 그리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이다. 심장의 압박, 머리에서 흘러 내리는 땀, 그것을 식혀 주는 바람, 발 아래 놓인 전경, 정신의 휴식 등등... 아쉽게도 영국에 와서는 산을 보지도 못했다. 한창 머리가 복잡할 때 나는 산을 무척 필요로 했었다. 영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나도 짧은 반바지를 하나 사서 포레스트 검프처럼 끊임없이 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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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영국의 코리안 타운이라 할 수 있는 뉴몰든에 가서 친구랑 저녁을 먹었다. 나의 작은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가 자꾸 말을 자르는 것 같아서 답답해 했었는데... 나는 교수가 내 논문을 읽었는지도 밝히지 않아 당황스럽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고, 그 친구는 교수가 읽었던 말던 추천서 써주겠다 했으니 얼른 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였다. -그 친구가 옳다.


오전에, 일종의 자기 소개서를 썼다. 나의 철학적 성향을 언급하면서 짧게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인용했다. 한국에서 올 때 스피노자 전집을 갖고 왔었는데 펼쳐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습기를 먹어서 종이가 약간 눅눅해져 있었다. 오래된 친구처럼 반가왔다. (인용한 부분은 에티카 제2부, 명제 49다. 나는 스피노자의 투명성을 사랑한다. 이윽고는 그 투명성에도 결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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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 런던의 중국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너무 많이 먹었다. 다시는 여기 올 생각이 안들 정도로.


2. 코톨드 갤러리에 갔다. 유료다. 입장료가 있다는 건 관람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내셔널 갤러리는 무료다. 잠깐 들러서 좋아하는 그림 몇 점 보고 머리를 환기시킨 후 가볍게 갤러리를 나설 수 있다. 유료인 경우는 가능한 많이 보려 한다. 결국 지친다. 코톨드 갤러리를 나서면서 나는 완전히 진이 빠져 버렸다.


코톨드에서 본 첫 그림은 성모와 성자를 그린 것이었다. 나는 팽팽했던 무엇이 갑자기 사르르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격해 있었고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던 것 같다. 격하게 표출되는 감정들(눈물, 흐느낌 등을 동반하는)은 그러한 이완의 반영일 것이다. 나는 숨을 고르며 차분히 옆 그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잔의 풍경화 앞에 섰다. 세잔은 또다시 나에게 수수께끼를 준다. 나는 또다시, 세잔의 그림을 이해해 보려 애쓰고 있다. 왜, 그림 앞에서 이런 짓을 하여야 하는가? 모르겠다.


3.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내가 두번째로 논문을 보냈던 교수님에게 답장을 받았다.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는 작은 논쟁(철학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교수님은 나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당혹스러웠다. 나는 비트겐쉬타인의 "말할 수 있는 건 분명하게 말해져야 한다"는 금언의 강력한 옹호자라고 자임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틀렸다"라는 말보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가 나에게 더 큰 심리적 타격을 준다.


그 교수님은 숱한 질문들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의아스러운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당신은 비트겐쉬타인의 판단 이론이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같은 질문. 이 질문은 우리의 논쟁과 별 상관이 없다. 그래서 토론 중에 나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나의 작은 논문의 한 주제다! 결국 그 교수님은 나의 논문을 읽지 않았다는 것인가? 


교수님은 추천서를 써주고 싶으니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많은 정보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낸 논문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평도 없었고, 읽었다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토론에 있어서는 나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나의 철학적 자질에 대한 유일한 판단 근거인 나의 작은 논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으면서도 추천서는 써주겠다고 한다!


나는 당혹과, 일종의 좌절을 느꼈다. 아마 코톨드에서 미리 진을 빼놓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면의 밤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나는 확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확신은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결국 내가 첫 번째로 논문을 보냈던 교수님의 평에 의존하기로 했다. 그 분은 나의 논문을 "It's a very good piece of work"라고 했었다. 나는 구체적인 코멘트가 없는 일반적인 평들은 무시하기 때문에 이 분의 평을 무게있게 여기지 않았었다. 이런 허울 좋은 말보다, 내가 바란 것은 차라리 "Your essay is full of common mistakes. First, ..." 같은 것이었으니까. 어쨌든 지금 나는 확신의 근거가 필요하다.


이런 지저분한 감정 속에서 나는 추천서를 얻기 위해 CV를 써 보낼 것이다. 그 교수님이 나의 CV를 읽고 과연 추천서를 써줄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나는 아마 너무도 덜 성숙한 사람일 것이다. 그 교수님과 논쟁을 벌이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조용하게, 부드럽게, 실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한 친구에게 맬컴의 비트겐쉬타인 회상록을 읽으라고 강제하고 있다. 나의 의도는 뻔하다. 여기 나보다 훨씬 심한 사람도 있다, 최단 거리를 걷기 위해 벽을 뚫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에 비하면 난 정말 부드러운 사람이다... -아, 정말로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나라는 사람이 피곤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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