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향성 개념을 축으로 연구하는 영국 철학자 한 분이 있다. 요즘 그 분의 책을 주로 읽고 있다. 굉장히 통찰력 있는 학자라는 느낌은 그리 들지 않지만, 어쨌든 성실하고 정직한 분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렇게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연구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후설 철학에 대해서라면 모한티라는 분이 있다. 나는 그 분의 논문이나 책에 대해서라면 그저 신뢰한다. 정말 이럴까? 하면서 다른 자료를 찾아볼 필요가 없다.
저 영국 철학자의 글들은, 모한티의 글들처럼 전폭적인 신뢰 속에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의 입장에 대해 나의 관점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는다. 그러니까 저 분과 나의 관점은 비슷하면서도 확연하게 달라야 한다. 그런 작업을 계속 하다가, 얼마전 문득 돌아보니 이제 나만의 고유한 이론적 입장이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당신은 이러 저러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이러 저러하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만, 그러므로 단편적으로만 기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서사 구조 형태의 이론적 입장이 형성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나의 이론적 관점의 대부분은 사르트르에게서 빌려온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가끔 내가 세상에서 사르트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닐까 망상하기도 한다. 여튼 나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사르트르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초월이란 언제나 한 가지 방향만을 갖는다는 것이 문제다. 한 철학자에서 다른 철학자로, 혹은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옮겨가는 것은, 초월의 형태를 일부 그 안에 포함할 수는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관점에서는 진정한 초월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예컨대 사르트르에서 하이데거로 옮겨간다고 초월이 되지는 않는다. 초월은 그 문제 영역에 대해 끝장을 보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하여 초월은 헤게식으로 말하면 지양의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 지금 내가 나의 이론적 입장에 대해 느끼는 바가 그렇다. 사르트르의 존재론의 연장이 아니면서, 즉 그것과 다른 관점을 취하면서, 사르트르의 존재론을 포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나는 느낀다. --- 3월1일날 이에 관련해서 메모를 써두었는데, 아직 그 환상이 깨지지 않아, 그것이 혹 환상이 아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