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바비칸 센터 극장에서 국립 창극단의 창극 리어를 보았다. 이번 런던 공연은 사나흘 정도로 짧은 일정이었고 우리는 마지막 날의 오후 공연을 보았다. 공연팀은 두 시간 남짓을 쉬고 다시 저녁 마지막 공연에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 빨리는 일정이다.) 여튼 우리가 본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고 기립 박수를 이끌어내었다. 


내 생각에도 무척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던 것 같다. 첫째로, 리어왕이라는 원작 자체가 문화적 경계를 타지 않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창극으로 공연되는 리어왕에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다. 더구나 창극이란 형식은 셰익스피어 비극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비극성을 가진 리어왕을 그 극한까지 몰아갈 수 있는 쟝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둘째로, 나는 이번 창극을 리어왕에 대한 가장 참신한 해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요컨대, 한국 사람이 리어왕이라는 작품을 접했을 때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토대로 각색이 이루어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예컨대, 이 모든 사단의 시발에는, 리어왕의 고집스러운 성격 못지 않게, 코델리아의 고지식함도 한 몫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의 하나로 노자의 첫 구절을 떠올릴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한국의 각색자도 분명 이런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갔을 것이다. 젊고 아름답고 착한 코델이아의 이면은 늙고 고집스러운 리어이다. 밝고 투명하고 경쾌함의 이면은 깊고 어둡고 알 수 없음이다. 그리고 그것의 이미지가 바로 물이다(여기서 바슐라르를 인용해야 할 것이나 책을 뒤지기 귀찮다). 극이 시작하고, 무대의 바닥에서 조용히 출렁이고 있는 것을 나는 비단이거나 레이저 2D 이미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물이었다. 배우들은 그 물에 발을 담그고, 첨벙대고, 고기를 잡고 등등... 했다. 어리석음과 어리석은 척 하는 것, 광기와 광기인 척 하는 것 등등의 이 처절한 변증법에서 물은 그 어느 캐릭터보다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마 물의 배역을 말하라면 그것은 바로 '비극'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리어는 처형당한 코델리아를 안고 와서 그 물에 누인다. 코델리아는 잔잔한 물 위에 누워 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마 내 옆에 셰익스피어가 앉아 있었더라면 그는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공연팀에 감사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 장면을 통해 한국에서 온 공연팀은 '햄릿(오필리어의 비극)'과 '리어왕'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기, 죽음 등등에 무엇을 첨가해야 그 광기는, 그 죽음은 궁극의 비극성을 성취할 수 있게 될까? 무지함, 고집스러움 등등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필요한 것은 바로 순진함, 나이브함, 어린 아이같음이다. 노자에 따르면, 천지는 인간을 어린 아이처럼 대한다. 그리고 동시에 노자는 천지는 결코 인자하지 아니하다고 말한다... (이 두 번째 구절은, 고전 그리스 비극의 합창의 형태로, 무대에서 직접 표현된다.)


기립 박수가 터지는 와중에도 나는 조용히 앉아서 박수를 쳤다. 나는 원래 기립 박수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담할 수 있다. 한국에서 온 공연팀의 자기 확신을 그 순간 나는 누구보다 강하게 긍정하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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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정도 일정으로 한국에 갔다가 어제 영국에 돌아왔다. 간단히 빠르게 인상만 적어보자.


한국의 인천 공항을 나서는 순간 두텁고 습한 공기 덩어리에 당황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동남아 날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풀 꺽인 것이 그 정도라는 것이다. 다음날 일을 보느라 강남 거리를 쏘다녀야 했는데 사람들 복장에 의아함을 느꼈다. 날은 더운데 올-블랙 패션인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열에 두 엇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올 블랙이었던 것 같다. 어떤 가게에 갔다가 그 얘기를 했다. "사람들이 상하복 전부 까만 옷을 입고 있는 게 너무 신기하네요." 그러자 가게 여주인이 당황해했다. 나는 그제서야 카운터 밑으로 그 분의 하의도, 그러므로 상하의 모두가 까만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 사람들이 까만 옷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이 유행이 시작된지 10년도 더 된 것 같긴한데..." - 아, 10년도 더 전에 시작된 유행이라고... 현상은 그렇게 거기 있었는데 그동안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미처 챙겨보지 못했다. 그리고 몇 칠 후 뉴욕 타임스의 구독 메일로 한 기사가 배달되어 왔다. 전세계적으로 올 블랙 패션이 유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그리고 나는 어떤 현상에 대해 그것을 지역적으로 고유한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무반성적인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 세계는 너무나 복잡해졌다. 복잡성을 연결성으로 정의한다면 현대가 인류 역사상 가장 복잡한 시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복잡성 때문에 비롯된 일군의 태도는, 역설적이게도 원자적 태도이다. 그러므로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히려 필요한 것은 총체화의 태도라는 것을.  


예외는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말 빠릿빠릿하고 열심히 살고 있었다. 어떤 금융사에 갔다.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왔는데요..." "그건 3층에서 해요. 한 층 더 올라가셔야 해요." 그러나 2층 그 직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그 건에 관해 설명해 주며 도와주었다. 3층에 올라가자 담당자가 없었다. 그러자 옆에 직원이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일을 도와주었다. 유니클로에서 바지를 샀다. 바지를 사고 피팅을 하고 기장을 줄이고 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손님의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움직였다. 신발을 사러갔다. 남직원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손님을 응대하고 창고를 뒤지고 있었고 여직원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발끈을 매어주었다. 피팅을 마치고 나서 더 이상 응대할 손님이 없자 목청을 높여 "세일이요, 세일~"을 외쳤다. 나는 저렇게 몸이 부서져라 일해 본 경험이 없다. 그럴 자신도 없다. 예외? 어떤 편의점에 갔는데 모자를 내려쓰고 마스크를 눈밑까지 끌어올린 직원이 계산이 끝나자마자 바로 시선을 핸드폰으로 향하며 응대의 종료를 선언하는 모습. 유튭같은 데서 종종 희화화되는 장면의 실사 버전.


어디를 가든 그랬다. 이번에 한국에 가기 직전에 영국에서 치주 질환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 한국에 간 김에 한국에서도 치과를 찾아가보았다. 영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저렴하게, 비교도 할 수 없이 짧은 대기 시간에 (그리고 내 생각에 훨씬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것만을 가지고 한국의 시스템이 영국의 시스템보다 더 낫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한층 위에서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한국의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한 마디로 말해서 경쟁일 것이다. 그러나 경쟁만을 말해서도 안될 것이다. 더 적절하게 말하면 아마도 그것은 그러한 경쟁을 허용하는, 혹은 복돋우는 사회 문화적 환경일 것이다. 그러한 환경에서 고객들이 응당 기대하는 서비스의 수준은 높을 것이고, 서비스 제공자들은 고객의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켜주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교보 문고에 갔더니 사람들로 바글 바글했다. 그러다 다음과 같은 거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글쎄, 재고 있는지 확인하고 매장이 왔더니 재고가 없다더라구요. 재고가 없을 수는 있지요. 근데 직원이 "검색해서 확인하셨어요?" 라고 하는데 그 말투가~"   


나는 번 아웃이라는 말을 비로소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젊은 세대에 있어 번 아웃의 역치가 지나치게 낮은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경험한 바로는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친척 중에 병특 중인 20대 후반의 젊은 친구가 있다.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뛰어난 인재다. 병특 1년 반이 되어 이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유는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기, 혹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젊은 세대 친구들과 대화하다보면 종종 놀랄 때가 있다. 거의 판에 박은 듯한 표현을 반복적으로 듣게 될 때가 그렇다. 그 중 백미는 어떤 친척이 아들에게 들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내가 자립적인 사람이 못된 건 아버지가 나를 자립적인 사람으로 키우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니예요?") 그 친구의 아버지는 현재의 직장에서 병특을 마쳤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그 친구는 이직할 마음이 강한 것 같다. 자신의 역량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지, 자신이 공정하게 대우받고 있는지 등에 대해 빠르게 계산해보고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젊은 세대에게 뉴-노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성 세대의 의견이 옳은지 젊은 세대의 의견이 옳은지가 문제가 아니라 젊은 세대의 의견이 그냥 현재의 상식일 것이라는 뜻이다. 현 젊은 세대의 선택 성향이 전반적으로 옳았음이 경험적으로 증명된다면 그 성향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다음 세대의 선택 성향은 좀 더 보수적이 될 것이다. 그 친구의 여자 친구는 현재 고연봉의 전문직이다. 그런데도 투 잡을 하고 있고, 거기다 더해 CPA 공부를 준비하고 있다. 노후 준비까지 병행하는, 우리 늙은 세대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완벽주의! - 나는 이런 완벽주의에 젊은 세대의 일부도 숨막혀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젊은 세대의 이러한 경향성은 그러한 경향성을 산출하는 이러 저러한 조건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한국의 낮은 출산률은 이러한 조건들의 결과의 결과의 결과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물론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러한 조건들에 대해 논할 수는 없다. 단, 두가지는 분명하다. 첫째, 이 조건들은 어설픈 세대론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 조건들과 그 산출물들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즉 윤리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두 가지 자명한 점을 인정한다면 소모적인 논쟁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모적 논쟁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론은 별도로 하고 소모적 논쟁을 여전히 즐기게 될 것이기는 하다.


보고 느낀 것이 아직 많은데 여기서 대충 줄이도록 하자. 광화문, 창덕궁, 종로3가 갈매기살 집, 신당동 중앙 시장 등등 할 얘기가 너무 많다. 아마 몇 칠 뒤면 모두 잊어먹어 버릴 것일 테지만...


(추. 이제 슬슬 한국에 사는 것과 영국에 사는 것의 장단점에 대해 말할 때인가? 분명한 사실은 이제 영국 등의 이른바 선진국 국가에 이주해 산다는 것의 분명한 장점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이 이미 선진국이므로. 포르투갈로 이주한 어떤 영국 할머니는 이런 질문에 대해, 영국을 떠나 아쉬운 점은 런던에서 매일 열리는 콘서트들을 더 이상 즐길 수 없다는 것이고, 포르투갈로 이주하여 얻는 가장 큰 이득은 이방인으로서의 자유라고 했다. 예를 들면 포르투갈에 사는 영국인은 굳이 포루투갈의 정치 뉴스에, 그리고 영국의 지긋지긋한 정치 뉴스에 스트레스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도 이 할머니와 같은 의견이다. 나라마다 이러 저러한 장단점이 있지만 그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 떨어져 살게 되면 거의 100% 확률로 그 사회의 이방인이 된다. 한국의 살인적인 경쟁에서 빠져나오고 싶은가? 그러나 빛의 속도로 제공되는 한국의 서비스들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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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3주 일정으로 한국에 다녀온다.)


스피노자에 대한 나의 책이 완성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올덴부르크의 첫 번째 편지 전문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영국 왕립 협회의 서기 올덴부르크는 유럽 업무 여행 중 29살의, 아직 아무 것도 출간하지 않은 유태인 사상가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의 집을 직접 방문한다. 그렇게 스피노자를 인터뷰하고 스피노자와 지속적인 연락 관계를 가져야 겠다고 결정한다. 이 결정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스피노자의 인품.

둘째, 스피노자가 추구하는 방향에서의 지식. 즉, 제일원리에서 모든 것을 연역해내는 방법론. 다시 말하면 형이상학.


올덴부르크는 영국 과학계의 경험론적이고 실험적인 방법론에 대해 스피노자적인(혹은 데카르트적인) 방법이 어떤 시사를 줄 수 있을 것인지를 궁금해 했다. 그러나 후속하는 편지들에서 스피노자는 올덴부르크를 만족시키는데,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이해시키는데 실패한다. --- 이는 당연하다. 올덴부르크는 스피노자의 방법론에 대해 알고 싶어했는데 스피노자는 방법론을 아직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스피노자는 죽을 때까지 방법론을 완성하지 못한다. (스피노자가 방법론을 완성시키지 못한 것은 전혀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철학에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이 열려져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철학자를 현대에 이야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철학자로 하여금 현대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게, 현대의 문제에 대해 직접 말하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의 경우는 스피노자가 그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그의 방법론을 가지고 현대의 문제에 대해 직접 말하게 하고 싶다. 나는 스피노자의 정치학 등등보다는 형이상학을 가지고 현대에 개입시키고 싶다. 그것이 나의 기획의 핵심이다. 나의 야심을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다. 나는 스피노자에게 스피노자의 방법론을 완성시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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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18: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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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2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백종현 번역의 칸트 저작 하나(프롤레고메나)를 읽다가 번역이 참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백종현이 칸트의 저작들을 왕성하게 번역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한국의 칸트 학계는 든든한 기반을 갖춰가고 있는 셈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알라딘을 검색해 보았는데 엉뚱하게도 한국어판 칸트 전집 간행을 두고 백종현과 한국 칸트 협회 사이에 논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진행형인지는 더 알아보지 않았다.)


일단 논쟁점은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 가독성의 문제. 둘째, 칸트의 일부 전문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 솔직히 별로 의미있어 보이는 논쟁점은 아닌 것 같다.


첫째, 가독성의 문제. 우선 확인할 것은 칸트 저작의 가독성 문제는 역자들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칸트의 저술에 익숙했던 칸트의 친구 철학자도 <순수이성비판>의 원고를 읽다가 더 읽다가는 미칠 것 같아(칸트의 저작을 읽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했을 바로 그 경험!) 읽기를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가독성의 문제를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문제로 구체화한다면 여기에 확실한 답이 없다는 점은 너무도 분명하다. 나 자신은 의역을 선호하지만, 읽기의 깊이가 더해갈수록 도움이 되어주는 것은 직역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용어 번역 문제. 문제가 되는 것은 아 프리오리, 트렌센던트, 트렌센덴탈, 이렇게 셋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그것은 시장에 달린 문제이다. 칸트 철학 연구자나 칸트 저작의 독자들 뿐 아니라 칸트 이후 철학자들(예컨대 헤겔, 후설 등등)에 대한 연구자, 독자들의 선택에 따라 결정될 문제라는 것이다. 예컨대, 트렌센던트같은 경우는, 어떤 것을 넘어서는 행위, 넘어서 있는 상태 등에 대한 광범위한 맥락에서 이미 '초월'이라는 용어로 안착되어 있다. 신은 세계를 넘어서 있다는 의미에서 초월적이며, 이 책상은 나의 정신을 넘어서 있다는 의미에서 초월적이며, 인간 실재는 항상 주어진 것을 넘어 가치나 의미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초월적이며... 등등. 칸트 철학 연구자들이 아무리 트렌센던트를 '초월' 이외의 다른 말로 번역하려 해도 이미 끝난 게임이다. 아 프리오리는 번역을 하지 않고 아 프리오리로 그대로 사용하든지, 선험적이라는 말을 쓰든지 내 생각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또, 칸트 이전의 철학사에서는 트렌센던트와 트렌센덴탈을 모두 '초월'로 옮겨도 아무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칸트 고유의 용어로서의 트렌센덴탈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 혹은 의식의 구조에 대한 탐구라는 본연의 의미를 옮길 적당한 용어를 찾기가 힘들어 보인다. 내 생각엔 경험 이전만을 의미하는 '선험'보다는 경험을 넘어서 있으면서 경험을 정초하는 것에 대한 탐구라는 의미에서, 그러므로 경험론적으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특유의 방법론을 팔요로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너무 낯선 신조어를 도입하지는 않기로 한다면, '초월론적'이라는 용어가 더 낫다고 본다. (혹자는 이 용어가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반대한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라면 현대 한국어의 개념어 중 몇 개나 살아남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저 논쟁의 핵심은 가독성 문제나 용어 번역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가독성의 문제는 상대적이라는 것, 용어 선택의 문제는 시장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저 논쟁의 참여자들이 모를 리가 없다. 아마 작은 시장에서 어쩌다 보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두 프로젝트가 경쟁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 것 같다. 예컨대, 백종현이 잘 하고 있는데 칸트 협회본 전집이 또 필요한가? 라는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응답이 필요했을 것이다. 논쟁이 좀 모양 없게 진행되고 있는 점은 아쉽지만 워낙 큰 프로젝트이고 걸린 것이 많으니 이해가 아니 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제삼자적 입장에서는, 그러한 경쟁이 더 나은 번역본을 생산하고 칸트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환기할 수 있다면 사소한 잡음 따위는 충분히 미분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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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남부 해안 지역인 도셋으로 이박삼일로 여행을 갔다 왔다. 이 지역에 대한 특별한 정보나 동기 그런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나는 영화 "이터널스"의 마지막 백악 절벽 드론 촬영 장면이 멋지다고 생각했고, 아내는 드라마 "브로드처치"의 촬영지를 가보고 싶어했는데, 그곳이 도셋이었다. --- 어쨌든 재미있게 놀았다.


그 즈음이 마침 이른바 극우파의 폭동 사태로 영국이 난리인 때였다. 한국에서, 괜찮냐고, 조심하라고 안부를 묻고 당부하는 연락들이 몰려왔다. 가볍게 웃으며 무시하며 여행을 떠났었다. 


첫 날 숙소에 여장을 풀고 바로 옆에 있는 펍에 갔는데 펍에서 시간을 때우던 혈기왕성한 동네 노인분들이 말을 걸어왔다. 꼬막 등에 대해 신나게 재잘대다가 아내가 눈치 없게 극우파 폭동에 대해 노인분들께 물었다. 노인분들이 창피해했다. --- 이 폭동 사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그냥 접기로 하자.


숙소가 있는 동네 이름이 톨퍼들인데 이곳에 노조 운동 박물관이 있어 들러 보고 책 사고 컵 사고, 웨이모쓰나 더들 도어 등의 해변 등에서 잘 놀다 사고 없이 잘 돌아왔다. 


(숙소 옆 펍 벽에 걸려 있던 메시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펍이어서 매일 밤 오자 했는데 첫 날 밖에는 가지 못했다.)


(톨퍼들이라는 동네가 노조 운동의 한 시원지였다. 관련 박물관에서 산 컵. 매년 축제도 열린다니 그에 맞춰서 다시 가보고 싶다.)


웨이머쓰라는 해안가 벼룩 시장에서 70년대 영국 형사 드라마 <스위니>와 70년대 초 BBC에서 방영된 코믹 시트콤 <It ain't half hot mom> 박스셋을 샀다. 각각 2, 3 파운드 밖에 안해서 샀는데 샀으니 억지로라도 봐야 한다. 요즘 이것들을 보고 있다. 그 중 <ain't half hot>은 1945년 이차 대전 말미의 인도 주둔 영국군 병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요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인종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드라마다. 그 시대 즈음을 배경으로 일본 방송국이 한국 주둔 일본군 병영을 배경으로 코메디를 만든다고 생각해보라. 한국인 민간인들이 영국군의 시중을 드는 역으로 등장하는. 일정 정도의 경계감 없이 이런 드라마를 감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능하면 이런 경계감을 털어내려고 노력하면서 이 드라마를 보고 있다. 예컨대, 한국이 일본보다 월등하게 잘 나가는 나라가 되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 풀린 마음으로 이런 류의 드라마를 소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에는 그것이 불가능한가? 그럴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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