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끝냈다.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지루한 부분도 있었는데 후반부로 가면서는 거의 망작으로 변해가더라. 후반 몇 편을 건너 뛰고 최종회의 절반 정도를 감상하는 것으로 시청을 끝냈다.


이 작품을 정치 드라마라 할 것이면 세종과 정기준이 그 무슨 바위 위에서 호위 무사들이 대치하는 가운데 벌인 논쟁이 하일라이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장면은 좀 심심한 편이었다. 첫째, 둘의 관점은 이미 밝혀질 대로 밝혀진 상태다. 구태여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논쟁할 필요는 없었다. 둘째, 칼로 상대의 목을 겨누다가 베지 않고 그대로 내려놓는 장면이 한 회에도 수도 없이 나오다 보니 대치 장면이 전혀 긴장감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그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작가가 필요한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작품은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훌륭한 배우(대표적으로 한석규)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즐거움이 아니라 민망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큰 축은 태종-세종 사이의 정치 철학적 견해 대립, 세종-정기준 사이의 정치 철학적 견해 대립이다. 그런데 세종이 태종과 대립하면서 동시에 정기준(더 정확하게는 정도전)과도 대립할 수는 없다. 곧바로 묻자면 세종은 왕권강화파인가, 그 반대인가?


이에 대한 논쟁은 한글 창제에 대한 논쟁으로 대체된다. 작가가 그린 세종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세종은 봉건 군주의 한계 안에 갖혀 있는 인물인가, 그것을 뛰어넘는 인물인가?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세종은 사농공상, 반상천의 위계 질서의 옹호자인가, 아니면 그것의 최종적인 혁파를 수용하는 인물인가? 


세종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글을 만들었지만 신분 질서의 혁파는 수용할 수 없었다면, 이것이 세종의 한계이자 모순이자 고민이라면, 이 한계, 이 모순, 이 고민은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것이다.


세종이 군주의 전횡을 견제하는 장치들의 이상을 수용하면서도, 저 자신은 그런 장치들의 견제를 받고 싶지 않아했다면, 이 또한 세종의 모순이자 고민이 된다. 아, 작가들이여, 제발 이 모순, 이 고민들에 주목하라. 제발 이 모순, 고민들에 정면으로 부딪히라. 그것만이 당신들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가능한 이런 질문들, 이런 모순들을 피해나갔다. 작가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지고 싶지 않았던 탓, 즉, 작가의 대담성이 부족한 탓이다(천재는 용기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고민하며 괴로와 하는 세종의 입에서는 "사랑"이니 "책임"이니 하는 추상적인 낱말이 튀어나와 허공으로 사라질 뿐이다. 한석규가 고민하는 척, 괴로와 하는 척 하는 사람을 실제로 고민하고 괴로와 하는 사람으로 그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진한 민망함으로 남을 뿐이었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배우의 연기를 보기 위해 본다. 배우의 연기를 충분히 감상하려면 작가와 감독의 실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배우의 연기는 그 작품의 가치와 완전히 동등하다.)


그런데 통속 사극에 이런 깊이를 요구하는 게 타당한가? 그렇다. 당신이라면 한석규가 완전 허접한 대사를 읊고 있는 꼴을 보면 기분이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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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imes … therefore unable to reach our goal. The task arises of proving the impossibility of solving the problem…” (by Hilbert)


수학이나 자연과학의 방법론과 철학의 그것은 다르다. 다시 말하면 철학자들은 게으르다. 비트겐쉬타인의 "논고"가 그토록 짧은 이유다. 비트겐쉬타인은 "논고"의 서문에서 자신이 이 책에서 거둔 성취의 결과물이 얼마나 작은지에 대해 말한다. 그 성취의 결과물이 작으면 작을수록 비트겐쉬타인에게 영예로운 일이 될 것이다. "논고"의 성취의 결과물은 정말로 작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비트겐쉬타인에게 영예가 될까? 정말로 게으름이 영예가 될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건전한 눈에는 "논고" 같은 철학서가 허깨비로 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건전한 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똑같은 주제로 거듭 되돌아온다. 철학에 강한 열의를 갖고 있음에도 진학을 하지 않았던 이유... A4 한 장 짜리 자기 소개서를 쓰는데 무려 일주일을 소비하고도 끝을 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 철학은 해결책이나 제안들의 총합이 아니라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들의 자취로 정의되며, 그것으로 가치를 평가받는다... 라고 나는 늘상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힐버트의 위의 인용문이 철학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을 긍정하기에는 나는 너무 건전한 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다행스러운 것은... 더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것. 목요일 비행기를 타야 하니 그 전에 모든 것을 완료해 놓아야 한다는 것... 내가 보기에 철학을 하는 진짜 방법은...(내 머리 속에는 완결된 문장이 들어 있지만 여기 적지는 않겠다. 내가 만일 훗날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면 그때 이 문장들을 써먹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충분히 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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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새벽까지 친구들, 친구들의 동료들과 와인과 위스키를 곁들여 떡국을 먹고 파운드화와 유로화로 고스톱을 치며 놀았다. 영국에서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이야~


화제 중 하나. 어떻게 셜록은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BBC에서 하는 셜록 홈즈에서 홈즈는 병원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한다. 그런데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 수 있을까? 결과를 보고하겠다.


-. 셜록 홈즈가 병원 옥상에서 뛰어 내린 건 맞다. 그러나 밑에 대기하고 있던 청소차나 그 밖의 안전 장치로 떨어졌다.

-. 홈즈 주변으로 몰려 든 행인들은 모두 홈즈가 사전에 섭외해 놓은 사람들이다. 자전거로 왓슨을 친 사람은 물론이고.

-. 왓슨이 홈즈의 맥을 재는데, 홈즈는 맥을 뛰지 않게 하는 장치나 약을 복용한 상태였을 것이다.

-. 홈즈의 시신을 처리하는 등의 문제는 몰리와 홈즈 형의 조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의 가장 약한 고리는, 홈즈가 청소차로 떨어졌다면 모리어티의 부하들도 그걸 봤을 거라는 것. 왓슨의 눈을 속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리어티의 부하들의 눈도 속여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 부분은 드라마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왓슨은 계속 이동하는데 왓슨을 저격하려는 스나이퍼는 어떤 건물 계단에 계속 걸터 앉아 있다. 말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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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 예쁜 스페인 아줌마가 있다. 쉬는 시간에 혼자 넋두리같은 말을 잘 한다. 나한테 영국 온지 얼마나 되었냐기에 6달이 다 되어 간다고 했더니 자기는 2년이란다. 칠판에 "I miss my mother"같은 말을 큼찍하게 쓰더니 2년이란 시간이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고 말을 잇는다. 나는 숙제를 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대꾸도 못해주고 있었는데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가버렸다는 말을 듣자니 나 역시도 6달이란 시간이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앞으로의 삶도 내가 의식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 빨리 지나가 버릴 것이다. 나는 요즘 진학 문제에 막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막혀 있을 때일수록 시간은 더욱 빨리 지나간다. 답은 막혀 있는 것을 빨리 뚫어내는 것 뿐...


집중이 주는 피곤을 피하려 유튭에서 놀다 모처럼 피터 가브리엘의 음악을 듣게 되었다. 영국 냄새가 물씬 나는 아름다운 곡이다. 방황에 관한 노래, 모색에 관한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곡의 모든 버전이 다 좋다. 위에 걸어놓은 버전에서는 곡의 분위기와 멜로디가 오케스트레이션과 너무나 잘 맞는다(마치 오리지널 곡인 것처럼). 마무리 부분에서 베토벤이 부드럽게 접속되는 흐름도 너무나 아름답다. 이 곡이 방황과 모색의 노래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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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에 한국으로 돌아간다. 어제 런던에 있는 호일스 서점에 가서 중2인가 중3인 아이에게 선물로 줄 책을 샀다. 아무리 영어와 수학을 잘한다 하더라도 중2,3 아이에게 영어로 쓰인 수학이나 과학책은 무리인 것 같았다. 결국 리처드 파인만에 대한 만화책을 골랐다.


웹 검색을 하다가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Letter to Professor Feynman. 파인만의 철학, 혹은 인문학 혐오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 글이다. 나는 편지의 저자가 파인만에게 공정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렇다. 누구나 어떤 성향을 갖는다. 파인만은 깊이, 격조 등을 강조하는 문화적 취향을 철저하게 싫어했다. 그것이 파인만의 한 성향이다. 파인만은 그러한 성향을 자신의 탁월한 쇼맨쉽을 발휘하여 거침없이 드러냈다. 이렇게 드러난 것은 비판에 철저하게 허약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드러난 것은 과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의 저자가 한 일은 이 과장된 것, 허약한 것을 공박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저자의 공박은 무의미하다. 


"[Feynman] wrote on [his] blackboard, prior to [his] last trip to the hospital, “What I cannot create I do not understand”. Some people may take this as a measure of [his] depth. I take it as a measure of [his] limitations."


나는 파인만의 저 말을 이 블로그에 인용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을 파인만의 깊이에 대한 증거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만약 저 말이 파인만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파인만의 저 말이 의미하는 것은, 말하자면, 직접 경험하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파인만이 경험하기에 비트겐쉬타인을 대단한 철학자로 치부하는 철학자들, 세잔의 그림 앞에서 경탄을 연발하는 비평가들, 말러의 교향곡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문을 써대는 평론가들은 거의 다 가짜였다는 것이다. 파인만은 아마추어 드럼 연주자이자 아마추어 화가였다. 당연히 리듬에 대해 자신보다 탁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의 존재, 색과 구도에 대해 자신보다 월등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의 존재에 대해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언어로 쉽게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이 어떤 과학적 구도에 따라 해석되지 않는다고 그것들을 배척한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태도였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파인만이 철학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언컨대 파인만의 주변에 뛰어난 철학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찮게도...


파인만은 기술자들을 존경했다. 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드는 사람들. 위의 편지에서 이 부분을 언급할 때 나의 마음은 복잡해 졌다. 나도 반년 전까지 파인만이 존경하는 직군, 즉 용접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입으로 뭔가를 조잘대는 일을 하기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관리부 사람이 내려와 내 옆에 쌓여 있는 코일의 인치수를 물으면 나도 그 사람의 위 아래를 쓱 쳐다보며 비웃듯이 말했었다. "30". 속으로는 "보면 몰라?"하고 비아냥 대면서 말이다. 나는 그것을 수도 없이 직접 다루었기 때문에 라벨이 붙어 있지 않아도 제품의 인치 수를 바로 알 수 있다. 나의 으스댐의 비밀이 바로 그것이다. 특정 제품과 무한할 정도로 반복되는 접촉.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기술자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면 공장 여기 저기를 다니며 뭔가를 주어다 쓱쓱 일을 해결한다. 사무실 사람들이 완벽한 무능 상태에서 얼어있는 장면과 뚜렷히 대비된다. 여기서 비밀은 경험과 관점이다. 기술자들은 도구를 다루기 때문에 그 도구들로 뭔가를 해결하려는 관점을 갖게 되고 그것이 경험으로 쌓이게 된다. 사무실 사람들은 기성의 솔루션을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고쳐달라고 부탁하거나, 그것이 안되면 새로 구매하려 든다.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멋있어 보이는 것은 당연히 기술자다.


그러나 기술자들이 아인쉬타인의 방정식을 만들 수는 없다. 기술자들은 자신의 경험으로 강화된 매뉴얼에 고착되어 있다. 아인쉬타인이 달리는 차에서 나온 빛의 속도에 차의 속도를 더하면 안된다는 제안을 하면 가장 크게 반발할 사람들은, 말하자면 기술자들일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 여태까지 그렇게 벡터를 더해서 잘 해왔는데!


파인만은 최고 수준의 과학자들과 일한 경험을 즐겁게 회상한다. 문제가 하나 주어지면 갖가지 시각에서 가능한 모든 아이디어가 제출되어 토론되는 과정. 고급 과학자들이 자신의 명성에 구애됨 없이 엉터리같은 아이디어도 기꺼이 제시하여 검토하게 하는 과정. 만약 거기에 기술자들이 앉아 있었다면 그네들은 결코 틀릴 것같은 말은 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제시한 아이디어가 반박당하면 얼굴을 붉히다가 스패너를 날리거나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한 환경에서 파인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제도에서 일할 때 나는 동료 한분과 방을 같이 썼다. 그 분은 타락한 여고생 이야기, 치정에 얽힌 살인극 같은 리얼리티 드라마를 좋아했고 나는 그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 분은 책을 읽지 않았고 나는 밤마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책을 읽고 거기서 새로운 사고를 발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분은 나보다 훨씬 뛰어난 기술자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장 영역을 떠나면 그분과 나는 공통 관심사가 거의 없었다. 그 분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보수적이었다 등등... 


나는 여전히 공장에서 손으로 직접 일하시는 분들을 존경하지만, 그분들의 한계도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파인만이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분들을 존경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그에 맞추는 것은, 계속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분들과 동일한 레벨에서 지속적으로 작업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파인만이 기술자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면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평범한 기술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자신의 발랄한 아이디어들을 계속 자제한다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은 파인만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파인만이 그들과 다른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파인만이 고급 취향들을 경멸했지만, 그렇다고 대중 문화를 칭송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CSI와 같은 뻔하고 뻔한 범죄 수사물이나 살인, 호러, 외계인을 다룬 그렇고 그런 소설들... 파인만이 브라질에 가서 고등학교에서 사용될 과학 교과서를 검토하다가 모든 교과서들이 다 쓰레기라서 경악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것은 파인만이 그 분야의 위대한 전문가 중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똑같은 논리가 다른 수 많은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수준의 눈에서 보면 쓰레기같은 소설들, 쓰레기같은 음악들, 쓰레기같은 영화들, 쓰레기같은 철학들... 그러나 그러한 수준에 만족하고 그것을 즐기는 대중들(파인만 자신도 드럼 연주자로서 쓰레기같은 음악을 생산했다는 평을 다른 전문가로부터 받은 적이 있다). 파인만이 브라질의 과학 교과서에 경악을 했다면 다른 분야에도 경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파인만은? 그래서 파인만은 단순한 직관과 풍부한 깊이를 가진 강의를 대중에 제공하고자 기획했던 것 같다. 둘은 융합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결과가 쉬운, 대중이 접근하기 쉬운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 같다. 기술자의 입장에서 보면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록(난 1권만 읽었다)은 쓸데없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이리라. 기술자들은 파인만의 교과서보다는 차라리 파인만이 경악해마지 않았던 브라질 교과서를 선택할 것이다. -이런 것이 파인만의 딜레마다. 만일 파인만이 이해될 수 없다면 파인만은 그의 스테레오타입을 통해 이해될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인물들에게 따르는 어쩔 수 없는 그림자다.   


소녀시대보다 스트라빈스키가 더 뛰어난 음악을 제공하는가? 이걸 질문이라고 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하고 이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파인만이 브라질 과학 교과서의 저렴한 품질에 경악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중 누구는 소녀시대가 만들어낸 제품에 경악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자신이 직접 읽고 공부할 교재로 하나를 선택하라면  파인만의 교과서보다는 브라질의 과학 교과서를 택할 사람이 훨씬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찬가지 경우가 소녀시대와 스트라빈스키에도 적용될 것이다. 소녀시대/스트라빈스키, 브라질 교과서/파인만 교과서 사이의 간극은 매우 분명하다. 전자는 생각할 필요, 이해(감상)에 드는 에너지를 최소한 시킨 작품이고, 후자는 그에 크게 구애받지 않은 작품이다. 나의 기준으로 말하면 후자는 무한한 산출성을 갖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산출성은 우리가 직접 곡을 만들고 물리학을 연구하고 철학을 할 때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리라는 것이다. 스스로 철학을 연구해 보아야 플라톤이 왜 철학의 신인지를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창조 활동에 동참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 것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파인만의 말이다. 이때 우리가 이해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의 깊이다. 창조 활동은 우리에게 잣대를 준다. 위대한 작품에 비교했을 때 나의 작품이 어느 수준인가 하는 잣대. 나의 작품에 들어간 공력과 비교했을 때 저 위대한 작품에는 어느 정도의 공력이 들어가야 했을까 하는 잣대. 그리고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좌절감. 경외감. 그러한 좌절감, 경외감의 크기가 곧 그 작품의 깊이다.


파인만은 수학자들을 놀려 먹는 것도 좋아했다. 파인만의 성향과 관심, 재능에 비해 수학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어려운 학문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신포도" 취급을 한 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파인만은 수학자들이 자신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파인만은 수학이라는 학문의 깊이를 수학자라는 살아있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직접 경험해 보고 인식했을 것이다. 파인만은 수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철학의 경우, 파인만이 지속적으로 철학자들을 놀려먹는 것을 놓고 볼 때 파인만은 결코 좋은 철학자를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만약 파인만이 베토벤의 교향곡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파인만으로 하여금 베트벤을 경외하도록 이끈 음악가가 주변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나는 단순하게 생각한다. 주변의 멘토가 없었어도 당신은 베토벤을 경외한다고? 첫째, 당신은 진정으로 베토벤을 이해하고 경외하는가? 둘째, 세상에는 파인만같은 사람, 즉 스트라빈스키보다는 소녀시대를 경외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


결론은 이렇다. 우리 모두는 모든 분야의 전문가일 수 없다. 당신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에게 그 분야의 위대한 작품을 나에게 소개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소개시켜 주어야 한다. 당신이 파인만이라면 물리학이 얼마나 흥미있는 학문인지를 당신의 깊이(즉, 실존)를 통해 나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화가라면, 피카소가 얼마나 위대한 화가인지를 당신의 깊이를 통해 나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철학자라면 당신의 철학의 깊이를 당신의 실존의 깊이를 통해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문제는 어떤 음악, 어떤 철학 작품, 어떤 물리학 이론이 아니라 음악가, 철학자, 물리학자... 등등이 된다. 즉, 문제는 실존이다. 그래서 다시 묻자. 예를 들면 진중권은 미학에 있어 소녀시대인가, 스트라빈스키인가? 나는 두말할 것 없이 전자라고 믿는다. 나는 그의 미학에 관한 글들에서 결코 그의 깊이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인만이 위대한 교사라면 그것은 파인만이 학생을 교사로 만들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학생을 영원한 구경꾼으로 만든다. 첫째, 그렇게 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둘째, 그 자신 교사이지 못하기 때문에. 위대한 교사는, 위대한 전문가는 그 분야의 즐거움을 느끼고 전달해 줄 수 있다. 즐거움은 창조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 없이 자신의 분야에 대해 뭔가를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앵무새처럼 다른 이의 이야기를 다시 전달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거기엔 허세가 잔뜩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종종 지나치게 야만인스러운 데, 그런 허세의 현장을 발견하면 도저히 참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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