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커플들.
지하철 옆자리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이 앉아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 무엇인가를 계속 이야기한다. 머리 모양, 잠바 색깔… 이런 사소한 것들 일텐데 나는 책을 읽느라 듣지를 못한다. 그러다 잠시 암전. 그리고 남자의 낮고 분명한 목소리. 나는 화내고 싸우고 이런 것 싫어한다, 너는 왜 자꾸 나한테 화를 내느냐. 여자의 당황한 목소리. 싸우고 그래야 발전도 있고 그런 거 아니냐. 여자가 남자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남자의 몸이 여자의 몸에서 공간적으로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책으로 얼굴을 가리다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딴 칸으로 가야 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으므로.

지하철 안.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 앞에 자리가 났다. 황급히 나를 제지하는 손길을 느낀다.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 나는 책장으로 다시 눈길을 돌린다. 남자가 여자를 데려와 빈 자리에 앉힌다. 남자는 내 옆에 서 있다. 두 손에 커피 두 잔을 들고. 여자는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자신이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끼고 있겠지. 아니면 너 정도 스펙에 나 정도 여자와 같이 있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해, 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감히 말하자면, 커플1의 여자와 커플2의 남자는 사랑을 하는 방법, 혹은, 같은 말이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그대의 사랑의 표현이 상대방을 힘들게 하거나,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든다면, 그리하여 스스로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차라리 비극이다. -칼 마르크스의 말이다. 덧붙이자면 비극은 미성숙의 표현이다. 성숙한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 스피노자나 동양의 수많은 사상서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추상적인 물음이 있다. 성숙한 사람, 즉 현자나 군자란 어떤 사람인가? 현자나 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별로 의미있는 질문은 아니다. 상상력을 통해 해결가능한, 혹은 상상력을 통해서만 해결가능한 질문은 의미있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기에 불교가 주로 다루고 있는 질문이 이런 것들이다. 유마경을 보라!

실질적인 물음이 있다. 소인들의 세계에서 군자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추상적으로 다뤄질 수 밖에 없다. 이러 저러한 맥락에서 벌어지는 이러 저러한 상황들을 모두 고려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상이 구체화될 수 없으면 그 추상은 단지 말장난일 뿐이다. 추상이 구체화되는 과정을 해석, 혹은 적용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추상이 구체화되는 환경, 혹은 사건을 “역(change)"이라고 한다. 아다시피 주역이라는 책의 주제가 이것이다. -그러므로 주역은 심각하게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에서 작성된 책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주역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에 동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의할 수 밖에 없음에도 머뭇거리는 것도 미성숙의 적나라한 표현이다.

(너무 나갔다. 저 일화는 스냅샷일 뿐이다. 우리는 점 몇 개를 갖고 그래프를 완성할 수는 없다.)

2. 조선일보.
내가 자주 이용하는 식당은 조선일보를 구독한다. 그래서 나도 조선일보를 자주 본다. 물론, 혐오스러운 장면도 많다. 예를 들면, 결혼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고 캠페인을 하는 것이나 이러 저러한 고전을 읽자고 캠페인을 하는 것. 왜 이리 캠페인이 많은가? 이런 장면들, 그리고 정치적으로 대단히 유치한 기사들은 그저 지나친다. 그러고 나면 다른 신문에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정도의 것들만 남는다. 남들과 겹쳐질 수 있는 것들만이 조선일보의 가치를 형성한다. 그 반대가 아니고!

애플의 하청 공장인 폭스콘에 대한 기사. 주당 노동 시간이 60여 시간에 달한다든지, 11일 연속으로 일하는 경우도 흔하다는 이야기들. 그 기사를 읽고 미소를 지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내 마지막 직장의 경우 주5일은 12시간, 토요일은 오후 4시까지, 그리고 격주로 일요일에도 일해야  했다. 내가 일했던 대부분의 공장들이 하루 12시간, 그러니까 주야반으로 돌아간다. 가장 심했던 공장은 주야 체계로 돌아가되, 월 평균 2회 휴일, 그리고 한달에 한 두번 철야(즉, 24 시간 근무)가 있었다. 급여는 최저 임금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계산해 보면 얼마인지 바로 답이 나올 것이다. 모두 삼성이나 엘지의 하청 공장이었다. 대기업에서 장비를 대주고 하청 기업에서 노동자를 부려 제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구조.

한국의 노동자 평균 임금 수준은 결코 낮지 않다. 그러나 하청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잔업 없이는 용돈 수준을 벌어갈 수 있을 뿐이다. 불행하게도 장시간, 저임금으로 고착된 구조의 한 원인은 대기업 노동자들의 고임금이다. 이러한 이중 구조는 사회 곳곳에 있다. 사회적 유동성을 최대한 억제하는 구조들. 기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좁은 틈새 주위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경쟁들, 에너지의 소모들, 스트레스들. 한국 사회는 그러한 스트레스를 통해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이 기타의 구성원들에게서 최대의 결과물을 최소의 비용으로 뽑아내어 유지되는 구조인 것 같다. 쉽게 말하면, 나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꾀바른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그들끼리만 경쟁하도록  만드는 것. 정부가 학생들 교과서를 어렵게 만들고, 일제 고사를 치르게 하는 이유. 청년 실업이 정권의 안위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이유…

위장, 보호색에 관한 기사. 어떤 책 소개였는데 거기 소개된 일화 하나가 재미있었다. 피카소가 일차대전때 위장색을 칠한 군용 차량을 보고는 저걸 최초에 한 것이 입체파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나는 요즘 세잔의 채석장 그림에 관심이 가서 그걸 노트북 바탕 화면으로 해놓았었다. 그러다 곧장 원상 복귀. 세잔의 그림이 너무 정신 사나왔기 때문이었다. 붓칠이 깔끔하게 되어 있지 않아 이곳 저곳에 미완성인 듯 작은 틈들이 있었고, 나뭇잎의 초록색은 바위의 황갈색과 채도가 맞지 않아 위화감이 있어 보였다. 바위 굴곡들의 오른쪽은 검정에 가까운 진한 그림자가 져 있었는데 세잔은 그러한 효과를 화면 이곳 저곳에서 실험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림자가 튀어나옴을 표현한 것인지, 들어감을 표현한 것인지는 직접 관찰해 볼 일이다. 직접 관찰해 보면 일상의 물건들, 그림자가 진 일상의 물건들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점은 장담해 줄 수 있다. 그 움푹 들어감이 시각의 효과인지 촉각 경험과 어우러진 효과인지 의문이 든다면 세잔의 그림을 다시 바라보라. 그가 실험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것이 이렇게 보인다고 말한다. 세잔은 그렇지 않다고, 그것은 그대의 눈이 덜 예민하고 선입견에 쌓여 있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들을 양식화하여 하나의 미적 구조로 구체화한다. 그리고 우리는 세잔 앞에서 당황한다. 세잔은 우리의 미적 경험을 배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이 위장색 앞에서 당황한다. 그것이 어느 정도 멀리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놀라고 당황하는 것은 좋다. 치매에도 좋다고 하더라. 스님들은 그걸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3. 프로스트.
한 친구가 어느 미술 전시회에서 산 책에서 프로스트의 시를 읽고 내 생각이 났단다.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Robert Frost, "The Road Not Taken" 중에서)

아름답고 분위기 있는 시다. 그러나 그뿐이다. 나는 항상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해 걸었다. 또다른 갈림길이 나오면 나는 또다시 사람이 다닌 흔적이 덜한 쪽 길을 택해 걸었다. 그러다 드디어 길이 끝나고 무성한 잡풀과 잡목 속에 갇힐 때도 많았다. 되돌아 가야 할 때도 있었고, 어떻게든 새 길을 내야 할 때도 있었다. 그 곳에서 뱀과 다람쥐와 사슴과 내가 동시에 서로의 움직임에 긴장해야 했었다.

그러나 물론 저 시의 강조점은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택함에 대한 한 설명일 뿐이다. 프로스트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 쪽을 오래 바라보면서 자신이 택한 길을 따라 걸었을 뿐이다. 다음 번에는 저쪽 길을 택해야지, 택할 수 있을 거야,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프로스트는 한 길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이 자신의 삶에 큰 계기가 되었음을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는 아직 그렇게 늙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갈림길에 있다. 거기서 주저하고 있다. 택하지 않을 길을 오래 바라보고 있다. 이 선택이 장래에 혹 한숨을 만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선택을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우연에 따르는 것이리라. 공중에서 사과가 떨어지듯이. 계곡을 타고 물이 흐르듯이. 그것이 우리가 주사위를 던지는 이유이리라. 나는 문득 문득 그러한 점들이 매끈한 곡선을 형성함을 깨닫고 놀라곤 한다. 점들에서 곡선을 본 것은 나 자신임에도. 점들을 이어서 곡선을 만드는 것을 "이야기 하기"라고 한다. 그리고 "이야기 하기"를 해석이라고 한다. 거울을 들여다 보면 거기에 항상 내가 있다. 당연하면서도 놀랍다. 추상이 해석될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나는 프로스트가 저 시를 아주 젊었을 때 썼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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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스 기사: The rich get even richer


전제: 2010년 미국 경제가 회복기로 접어드는 가운데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졌다. 2010년에 추가적으로 창출된 소득의 93%가 상위 1%에게 돌아갔다. 클린턴 시대에는 45%, 부시 시대에는 65%였다.


원인: 새로운 산업의 급성장(테크놀로지, 금융 서비스 등), 부시 행정부의 감세 정책 등


대책: 부시의 감세 법안이 소멸되도록 놔두고, 사회적 유동성을 촉진할 수 있도록 교육, 조세 제도 등을 손봐야 한다.


전망: 공화당은 반동적인 감세안과, 교육, 사회적 인프라 예산 등을 깍을 수 있는 감축안을 내놓고 있다. 민주당은 그보다 나은 정책을 갖고 있지만 소수당인데다가 선거 전망도 좋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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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에 앉아 이코노미스트 온라인판을 읽고 있다. IELTS 공부를 겸한 것이다. 그동안 세상 돌아가는 일에 너무 무심했었다. IELTS 시험이 끝난 뒤에도 신문, 잡지를 꾸준히 챙겨 읽어야 겠다.


오늘 읽은 기사는 “Is a concetration of wealth at the top to blame for financial crises?”라는 것인데 많은 생각꺼리를 준다.


독후감은 이렇다:


과도한 소득불균등이 경제 위기를 초래하는가?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 보자. 과도한 신용팽창이 경제 위기를 초래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 이다. 그러면 소득불균등이 신용팽창을 초래하는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소득불균등이 어떻게 신용팽창을 초래하는가? 1).정부는 저소득 가계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부채를 끌어들인다. 2).정부는 저소득 계층이 금융권으로부터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 준다. 그러므로 가계 부채가 늘게 되고 금융권이 부실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3).저소득 가계가 고소득 가계의 소비 형태를 따라간다. 이러한 “소비의 낙수 현상"도 가계 부채의 증가에 일조한다. 

이러한 신용팽창은 금융 위기로 귀착된다.


3)에서 저소득 가계의 소비는 더욱 조장되는데 정부는 1), 2)를 통해 이를 현상적으로(말하자면 마약을 주사하여) 달래는 셈이다. 이를 통해 정부가 보호하고자 하는 계층은, 물론 고소득 가계일 것이다. 고소득 가계는 잃을 것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고.


일단 금융 위기가 발생하면 고소득 계층을 대변하는 언론은 이렇게 말한다: 소득에 비해 과도한 소비가 위기를 초래했다. 부채를 과도하게 끌어다 쓴 가계에 대한 관용은 모럴 해저드만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할 말 있나?


조사에 의하면, 미국에서 소득불균등이 심한 지역의 국회의원일수록 모기지 규제 완화에 더 적극적이었다고 - 읽고 고소득 계층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데 더 열심이었다고 헤아린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라고 국회의원에 뽑아준 것이니.


헤아리고 나니… 축하한다는 말을 아니 할 수 없다. 당신들은 질 수 없는 게임을 하고 있다. 피어리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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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다. 개인적으로 큰 일들이 많았다. 어제, 추천서 등록을 포함하여 대학원 지원 과정을, 이제서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데드라인을 넘겨 버린 학교도 있었다. 힘들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다. 학점은 입학 요강의 기준점을 한참 하회하고, 학교를 떠난지 너무 오래 되었고, 사회 경력도 전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추천서는 내가 받을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좋은 분들에게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실제 어떤 내용이 들어갔는지는 모른다. 두 분을 너무 고생시켰다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만 가득하다. 에세이와 자기 소개서는 내가 나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지원 시기가 매우 늦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더 빨리 에세이를 쓰고, 더 빨리 자기 소개서를 써낼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자기 소개서를 서둘러 완성했더라면 내가 지금 만족하고 있는 수준만한 것은 결코 못되었을 것이다. -내가 게으름을 부린 시간들은 사고가, 아이디어가 충분히 익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게으름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나는 내가 가진 최선의 것들을 모조리 다 털어넣었다는 생각에 후련함을 느낀다. 만일 어떤 학교에서도 오퍼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자산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하리라. 나는 깨끗이 포기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했기 때문이다. 짐작하겠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반대와 염려와 설득과 애원을 다 물리치고 일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나는 내가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만일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새로이 정의해야 한다. 내게 그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지금 내게 어떤 한 단어가 허용된다면...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오, 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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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어느 갤러리에서)


오늘 저녁 한국으로 돌아간다. 진학 문제를 매듭짓지 못해서 마음이 가볍지가 않다. 오로지 나의 게으름 탓이다...


가장 인상에 남는 것 하나. 프랑스에 갔었던 것. 프랑스는 나에게 많은 좌절을 주었었다. 파리 대학가 서점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던 스피노자에 관한 책, 나는 그걸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상심을 했었다. 위 사진 속의 갤러리, 현대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구내 계단에 걸터 앉아 갤러리에서 제공하는 가벼운 알콜 음료를 홀짝 홀짝 마시며 영화에서나 나올 듯한 선남선녀들이 떼로 화려한 옷을 입고 알콜 음료를 마시며 환담하는 걸 지켜 보면서 나는 또 좌절감을 느꼈었다. "저 사람들 지금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한 껀 올리기 위한 작업을 벌이고 있는 걸까?" 나는 시무룩해 했었지... 나는 완전한 무력감을 느꼈었지...


세잔의 고향 엑상 프로방스 어느 카페. 와인 한 잔을 시켰더니 올리브를 작은 접시에 같이 내오더라. 세잔이 파리에서는 와인을 시켜도 올리브를 서비스로 내주지 않는다고, 파리 놈들은 쫀쫀하다고 시골사람답게 투덜댔었다는 이야기가 새삼 떠올랐다. 올리브는 맛있었고 영국에 와서 테스코에서 올리브를 살 때마다 꼭 엑상 프로방스에서 맛 본 그 올리브와 비교하게 되고 실망하게 되더라. 엑상 프로방스의 것은 그냥 집에서 담근 올리브이리라. 카페에는 한동네 사람들로 보이는 노인들이 많았고 카페 아가씨는 일을 잘 하고 싹싹했고 손님이 뜸할 때는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담배를 피워 댔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신선한 경험들이었다.


영국에서의 경험들은 나의 틀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들이었다. 셰익스피어, 베토벤, 서점, 피쉬 앤 칲스, 철학, 논문... 그것들은 나의 틀 안에서 부드럽게 소화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예쁜 옷을 입은 영국 아가씨들이 워털루 역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반가왔다. 영국에서 논문을 쓰고, 이러 저러한 주제로 교수님들과 토론을 하면서 나는 내가 작거나 약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강하다, 무자비하다, 확고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신하게 되었었지. 나는 부서질 필요가 없었고, 좌절을 느낄 필요가 없었고, 놀랄 필요가 없었다. 아니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이제 떠날 말미에 느끼는 것은, 이 말미에 내가 너무나도 게을렀기 때문에 다시는 게으르지 말자고 다짐을 하고 또 하는 나 자신이다. 진학을 위해 퍼스널 스테이트먼트를 쓰면서 나는 나의 과거에 대해 변명을 해야 했고 그것이 하기 싫어서 계속 도망치고 게으름을 부렸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도박벽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리면 결국은 써질거야 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곤 했던 가여운 남자... 그러나 내가 머리에 떠올려야 할 사람은 도스토옙스키같은 사람이 아니라 아마 빠삐용일 것이다. 삶에서 가장 커다란 죄는 무엇인가? 시간을 낭비한 죄. 나는 시간을 낭비했는가? 내게 재능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영국에서 내가 느낀 것은 부드러운 접속감이었다. 그 부드러운 접속이 내게 자신감을 주었다. 프랑스에서 내가 느낀 것은 단절감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좌절감을 주었다. 그 단절을 메울 시간이 내게 있을지 겁이 났다. 차라리 이런 기분을 되새기면서 귀국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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