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에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 갔었다. 이 갤러리의 가장 유명한 소장품은 아마도 오필리아일 것이다. 이 그림 앞에 오래 있지는 못했다. 너무도 끔찍해서...

(럿셀을 읽다가 커피 한 잔을 들고 벽에 테이프로 붙여 놓은 세잔의 커다란 컬러 도판 앞에 섰었다. 컬러 도판의 색상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복제판으로라도 하나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번 테이트에 갔었던 기억이 났고. 세잔 것은 아니었지만 갖고 싶은 복제판이 하나 있었는데 값이 너무 비쌌었지. 그러다 오필리아 생각이 났다. 끔찍했었지. 몸 서리가 쳐지도록 끔찍하다.)


(이미지 출처: http://www.tate.org.uk/op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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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가 피쉬 앤 칲스였다. 영국의 대표적인 음식이라는데 그냥 정크 푸드에 가까와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음식을 일상적으로 먹다니... 한번 먹어보고 나니 다시는 먹을 일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칠 전 스타벅스에서 나의 작은 논문을 쓰다가 중요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너무 피곤하였기 때문에 그에 만족하고 그만 집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난데 없이 피쉬 앤 칲스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또 먹었다.

오늘 스타벅스에서 나의 작은 논문을 쓰면서 문단을 문장으로 대신하는 수법으로 내가 바라던 결론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일단 이야기는 되는 것 같아서 기뻤다. 그런데 난데없이 피쉬 앤 칲스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5시에 오후 영업을 시작하는 피쉬 앤 칲스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고이 사서 먹었다.

아마 내가 나 자신에게 뭔가 상을 주고 싶을 때 내 몸은 피쉬 앤 칲스를 요구하는 것 같다. 그것이 피쉬 앤 칲스라니! 좀 실망스럽긴 하다.

저녁에 집에 와서 그동안 써 놓은 것을 검토해 보았다. 엉망이었다. 서두 부분부터 고쳐 나가다 보니 엉성하게 개요만 얽어놓은 후반부는 아예 손도 대지 못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고 마음이 불안해 졌다.

내가 피쉬 앤 칲스를 먹고 싶어질 때 나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걸 먹고 만다. 나는 그런 고집스런 비타협의 충동이 나에게 곧 오겠지 하며 지금의 불안한 마음을 달랜다. 암만 생각해도 그것이 피쉬 앤 칲스라는 게 너무 실망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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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do you know exactly the right question to ask?
-Because I'm not afraid of the answers.
                                                      (from The Hour)

불행인지 다행인지 좋은 작품들은 종종 몇몇 문장들로만 기억된다. 좋은 작품들이 누리는 특권이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에릭 호퍼의 다음과 같은 말은 대단히 야심적이고 현실적이다: "나는 좋은 문장 몇개를 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문장과 싸우는 이유다. 지나가는 문장 하나에 소홀할 수 없는 이유다. 나는 책 전체가 주는 무게가 그 책 안의 어떤 문장 하나가 주는 무게와 동일 평면에 있다는 사실을, 무슨 신을 믿는 것처럼 이의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윤리는 이런 데에 근거하고 있다. 만일 윤리라는 것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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럿셀의 판단 이론을 주제로 작은 논문 하나를 쓰고 있다. 아이디어는 있는데 그것들 중 어느 것을 강조해야 할 지,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 구성해야 할지가 분명하지 않다. 주제의 범위를 줄이며 서론만 몇 번 갈아 엎었다.

나의 실수. 1). 너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얘기하려고 하지 말라. 너가 쓰고자 하는 것은 작은 논문일 뿐이다. 그 안에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담을 수는 없다. 2). 세세한 표현이나 구성에 연연하지 말고 일단 끝까지 써라. 그래야 그것이 이야기가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다. -기분 전환 겸으로 설겆이를 하다 든 생각이다.

일단 끝까지 가자. 너절하고 상투적인 표현과 콩글리쉬로 범벅이 되더라도 일단 끝까지 가자. 끝마친 후에는 그런 쓰레기들에 대범할 수 있었던 스스로를 치하하며 백포도주 한 병을 만끽하자. 백포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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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존에서 중고로 주문한 럿셀의 "Theory of knowledge"가 왔다. 럿셀이 하루에 열 페이지씩을 써갈기며 야심적으로 진행하던 프로젝트였으나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으로 집필을 포기해야 했던 문제의 그 저작이다.

편집자의 서론을 읽었다. 감상.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으로 책을 포기해야 했을 때 럿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살 충동을 느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럿셀이 그 충격을 비트겐쉬타인에 대한 사적인 감정과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럿셀은 철학자였으니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테지만 말이다.

아무튼 읽어야 할 책이 하나 더 늘었다. 책 분량부터 확인하게 되더라.

2. 앤스콤의 "An interoduction to Wittgensein's Tractatus"를 읽기 시작했다. 서문에, 말하자면, 철학자들의 저작을 이해하려면 기존의 선입견을 떨쳐버리고 그 철학자들이 해결하고자 한 문제들을 찾아 함께 궁리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는 식의 조언이 나온다. 지극히 옳은 말이다. 철학책을 읽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철학을 하는 것 뿐이다.

서문 각주에 멋진 이야기가 있어서 각주 전체를 옮겨두려 한다. 플라톤의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문제와 딱 닿아 있다.

" In judging, one judges something; in judging something, one jugges something real; so in judging something unreal one judges nothing; but judging nothing, one is not judging at all"(Plato's Theaetetus 189A) Wittgenstein returned to the problem presented by this argument again and again through his life.

심오함이란 생산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심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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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2013-08-13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해근님//
개인 신상 정보를 노출하셔서 부득이 댓글을 지웁니다. 양해해 주세요.

박해근 2013-08-2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입견을 버리라는 말은 문명`문화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사람의 생각은 뇌에 기록하여 그 형상곧 경험(첫벌을 읽어야 알 수있다)을 바탕으로 말을 듣고 읽고 (생각)하게 되어있다."선입견을 버리고"라는 뜻은 경험한 것을 버리고라는 말과 같다,사람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하여 말을 듣고 글을 읽는데 그 경험한 것을 버리고 읽고 듣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철학을 하는 사람`새로운 이치나 원리를 발견한 사람 들은 이 선입견을 버리고 생각(궁리)를 한 것이다.이 일을 "첫 벌"에서는 골(머리)을 비우고 듣고 골을 체워 마하라고 했다.그러나 사람은 보편적으로 골을 비우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마치 벼락을 맞는 일과 같이.지금까지의 문화에서 이 개념이 없어서 이 글의 표현으로 "지극히 어렵지만 선입견을 버리고"라는 표현이 낮다.골을 비우는 것에서 철학은 시작된다.

weekly 2013-08-21 20:2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말씀 잘 들었습니다. 철학은 표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상에 대한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똑같은 '선입견'이란 말을 통해 박해근님과 앤스컴은 각기 다른 사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앤스컴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선입견'이란 말을 사용했고 박해근님은 좀 더 특수하고 심층적인 맥락에서 이 말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이란 말에 어떤 정의를 담든 그것은 님의 권리이겠지요. 그러나 님의 정의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이유를 저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님처럼 "지극히 어렵지만", 혹은 좀 더 엄밀하게 "선입견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 이해되는 한에서" 라는 식의 단서를 '선입견'이란 말 앞에 붙여야 한다는 주장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