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런던 레스터 스퀘어의 헌책방 몇 군데를 돌아 책 몇 권을 샀다.


레이 몽크의 럿셀 전기를 살까 하다가 두텁고 10 파운드나 되어 안사고 말았었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안사길 잘 한 거 같았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럿셀이 직접 쓴 자서전과 회고록, 서신들이 있는데 또 무슨 전기가 필요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더군다나 두텁기까지 하다면.


사 온 책 중에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독/영 대역본이 있다. 예전에 독/한 대역으로 읽은 적이 있다. 하이데거는 문제적 작가다. 그가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해설하는 것을 들을 때면 이 사람 천재군... 이란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한나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플라톤 강의를 듣고 머리 속에서 폭풍이 일었다고 했는데 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하이데거가 자기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면 머리 속이 온통 의구심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게 철학일까, 말장난일까?


나는 하이데거의 "진리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 그를 아주 집어치우기로 다짐했었다. 하이데거는 거기서 고대 그리스의 어떤 개념에 대한 기존 해석들을 강하게 비판했는데, 다른 문헌들을 조사해 보니 하이데거의 비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이데거가 자신의 철학을 주장하기 위해 실증적 연구 결과들조차 무시하거나 왜곡한다고 판단했고 그에 대한 관심을 아주 끊기로 했었다.


아까 화장실에 하이데거를 갖고 들어가 역자의 해설 부분을 넘겨 보는데 "Heidegger has shown the way to a new human being rooted in the Being of being..."의 a new human being 부분에 책의 원주인이 밑줄을 치고 물음표를 달아 놓은 게 보였다. 여백에는 "Rubbish!!! Heidegger is anti-humanist & anti-political."이라고 연필로 갈겨져 있다.


이런 것 재미있다! 나는 헌책의 여백에 책의 주인이 이리 저리 코멘트를 남겨 놓은 것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것이 헌책의 진정한 매력 중의 하나라고 여긴다. (이 책은 1956년도에 나왔다)


하이데거의 나치즘에 대한 태도는 두고 두고 이 학자의 족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철학자가 나치즘에 대해 순진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나치즘에 대해 순진할 수 있는 사람은 철학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젊은 날의 스피노자에 대해 당대의 어떤 사람이 "스피노자는 상인을 하기에는 너무 순진하다"고 썼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스피노자가 보여준 인간 심리에 대한 심오한 통찰들에 의구심을 갖게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순진함만이 철학자에게 용인될 수 있는 유일한 순진함이다. 나는 그러한 순진함이 한 인간을 철학자로 만든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혹은 정치에 순진했다고 말할 때의 그 순진함은, 우리가 용인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골 무지랭이가 나치즘에 순진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순진함을 용인해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하이데거는 문제적 작가다. 단언하건대, 그는 철학자는 절대 아니고 오히려 쓰레기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전체 철학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심오한 통찰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그것이 그의 비극이고, 어쩌면 우리의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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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휴가 갔던 러시아 여학생 복귀. 얼굴이 시커멓게 탔고 눈화장이고 까만 매니큐어고 영락없이 클레오파트라 이미테이션. 이집트 갔다 왔단다. 이집션 닮았다고 해주었다. 한 계절을 잘 놀았구나. 부럽다...


워털루역. 또다시 연착. 7시 20분 차를 놓쳤는데 연착 중이었다. 피난민같은 엄청난 인파가 연착 중인 기차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기차가 왔고 나는 콩나물 시루같은 기차 안으로 몸을 끼어넣는데 성공. 못 타고 만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기차 문이 닫히는데 몸을 기차 안으로 더 깊이 박아넣지 못한 승객 둘이 기차 밖으로 탈락. 그들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 허탈한 듯한 표정이 잠시 스쳐가더니 이내 휴대폰을 꺼내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라. 차 안에도 차 밖에도 짜증스러운 표정들이 하나도 없었다. -신기했다.


비좁은 기차 안에서 럿셀을 읽었다. 많은 자극을 받고 있다. 야망이 커짐을 느낀다.


집에 와서 밥 먹고 아무 것도 안했다. 꾸벅꾸벅 졸면서 테레비를 봤다. 뉴스나이트에서 내내 힉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이처럼 큰 뉴스로 다뤄지는 게 신기했다. 아마 CERN에 영국 국민들의 세금도 들어가 있을 것이다. 지금 CERN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인류의 가장 커다란 지적인 모험들 중 하나일 것이다. 나도 관심을 두어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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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지하철 연결 통로를 걷다 문득 내 발걸음이 빨라졌음을 느꼈다. 플랫폼이든 지하철 안이든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는 곳만 있으면 나는 책을 펴들고 럿셀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 럿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재미와 감동을 준다. 할 말이 많지만 오늘은...


나의 작은 논문을 아무 교수에게나 보내 버렸다. 한 이삼일 반응을 기다릴 것이고, 내가 기대한 반응이 없으면 다른 교수에게 보낼 것이다... 그 끝이 환한 빛깔일지, 암흑의 빛깔일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나는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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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내내 나의 작은 논문을 손보며 지냈다. 문장들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재고가 완성된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논지는 확고한 상태다.


한 친구를 논문과 관련한 토론에 끌어 들이려 애를 썼다. 친구는, 내가 새로운 지적 호기심의 발동을 기대하며 마음 졸이는 순간마다 "이런 거 왜 해?" 하며 나를 실망시켰다. 나는 "지금 얘기한 이 아이디어는 함의가 굉장히 풍부해. 너가 좋아하는 진중권이 이런 아이디어를 받아다 미학책에 써먹는 거야." 라는 식으로 응대하곤 했다. 친구는 내내 무표정과 볼맨 소리를 했다. 그러다가, 내가 친구를 철학 토론에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한 후에, 그 친구가 뜬금없이 한 마디 툭 던졌다. "근데 비트겐쉬타인이 똑똑하긴 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지?" -그 순간 나의 눈은 초롱 초롱 빛나고 있었을 것 같다.


지난 금요일에 런던 호일스 서점에 가서 럿셀에 대한 책을 한 권 샀다. 학생 할인 기간이 다 끝나서 요즘은 호일스에 잘 안가고 아마존uk에서 중고로 책들을 구입한다. 어쨌든. 예기치 않게 곁가지를 치긴 하였지만 여전히 나의 탐구 주제는 럿셀이다. 인간적으로도, 나는 럿셀을 비트겐쉬타인보다 더 좋아한다. -친구에게는 이렇게 말했었다. 럿셀은 나의 첫번째 철학자였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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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학원 가는 데 기차가 연착해서 많이 지각을 했다. 집에 올때도 플랫폼마다 죄다 연착 사태였다. 어쨌든 나는 덕분에 7시 10분쯤에 워털루역에 도착해서 연착된 6시 50분 급행 차를 타고 집에 올 수 있었다(차는 7시 40분 가까이 되어서 출발했다). 차 안은 북새통이었지만 영국인들은 그런 사태에 익숙한 탓인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혹은 집에 도착해서야 짜증을 느낄지도~


영어 강사가 나의 작은 논문에 대해 아무 말도 안한다. 1). 내가 지각을 해서 화가 났다. 2). 아직 다 검토하지 못했다. 3). 그냥 넘어가려는 수작이다. 친구 말은 2번일 거란다. 하긴 분량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을 거다. 그런데 친구 말이 원래는 강사들이 논문 교정 같은 거 절대로 안해 준단다. 이곳 사람들은 공사가 확실하니까. -암튼 오늘은 늦지 않게 집에서 일찍 출발할 생각이다.


소논문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지내고 있다. 더 읽어보지도 않는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는 내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해 확신을 하고 있다. 확신의 계기는 구글 북스 등을 통해 비트겐쉬타인이 직접 "논고"의 이러 저러한 부분에 대해 해설한 것을 일부 읽었기 때문이다. 나의 논지는 "논고"와도 일치하고 비트겐쉬타인의 해설과도 일치한다. -현재는 이렇게 느끼고 있다.


잠깐 설명하면 이렇다. 비트겐쉬타인은 "노트북"에서 주-술 관계니 2항 관계니 하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나는 비트겐쉬타인이 뭘 의도하는지 알 것 같다. 예를 들어 "this is white"는 주-술 관계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명제는 'this is identical in colour with that"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때 that이 white 색상을 정의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일항 관계니 이항 관계니 하는 것이 자의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럼 이런 명제들이 표현하는 사실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비트겐쉬타인은, 그러므로, 이런 자의적인 명제 형태가 아닌 완전히 일반화될 수 있는 명제 형태를 찾게 된다. 그게 내가 보기에는 "논고"의 궁극적인 작업이다. 그 작업을 위해 선행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논고" 서두의 온톨로지다. "논고"의 나머지 부분은 이 작업의 단순 적용이다. 그 단순 적용의 예 중 하나가 5.542다. 이 명제는 정말로 단순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논고"에 대한 이해의 핵심이다. 재밌는 건 "this is white" 운운하는 예를 나는 럿셀의 책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럿셀의 책("The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에 럿셀의 강의 중에 저런 질문들이 나온다. 럿셀은 이런 질문들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비트겐쉬타인은 심각하게 다룬 셈이고.


비트겐쉬타인이 "논고"에서 한 작업이 궁극적인 진리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다. 물론 당연히 아닐 것이다. 비트겐쉬타인 스스로 자아 비판하고 있는 판이니까. 그럼에도 "논고"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지적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럿셀의 말 그대로 말이다). 거기엔 하나의 사상이 완비된 상태로 체계화되어 있다.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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