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론... 물론 철학사적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다.

"It is indeed possible to make up words, but I cannot associate a thought with them."
                                                                    -비트겐쉬타인(현자와의 대화에서)

나는 전기 비트겐쉬타인에게서 이러한 얼굴을 더 일찍 발견했어야 했다!!!

(나는 5.542와 논고 초반부의 온톨로지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해석을 찾아야 한다. 답은 헤르쯔의 역학 모델에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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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나의 소논문의 오류가 드러나고 있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한정된 자료를 갖고 급히 써낸 글의 전형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우길 수 있는 만큼은 논리가 선명하고 문헌 근거도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는 해답이 너무 쉬워 보인다는 것이다.

럿셀의 판단 이론-명제의 뜻-그림 이론으로 연결되는 구도는 맞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에서 패러다임 간의 충돌을 과장했다. 그러므로 5.542에 대한 나의 해석은 너무 일방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 형이상학적 주체에 대한 강조도 과도하다. 분명한 것은, 비트겐쉬타인이 형이상학적 주체를 통해 논리 공간 개념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트겐쉬타인은 논리 공간 개념을 형이상학적 주체(혹은 영원의 상 아래서 바라봄)와 연결시킴으로써 건축술적인 기교를 발휘한 것 뿐이다. -이런 장치에 속아넘어가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나는 비트겐쉬타인을 너무 관념적인 철학자로 만들어 버렸다. 너무 쉬운 해답을 고안한 철학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의미는 내가 그의 사고의 깊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그 징표를 나는 나의 소논문의 조잡함에서 발견한다. -기분 좋은 아침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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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다 썼다. 내가 생각하던 논리대로 글을 완결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에게 프린트해 달라고 해서 첫 페이지를 읽어보고는 기분이 안좋아졌다. 엉망이었다. 참고 문헌을 이용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 심히 불안해 졌다. 일단 다 썼다는 사실을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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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게 준 소논문 마감 시한이 오늘까지다. 그런데 아직도 500 단어 정도를 더 써야 한다. 오늘 안에 끝낼 수 있는 분량이기 때문에 오늘까지는 끝날 것 같다.

오늘 할 일은 논고의 초반부 존재론과 후반부 형이상학에 일관된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명제가 뜻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밝히면 내가 할 일은 다 끝난다. 시작이 럿셀의 판단 이론이었으므로 마무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형이상학적 주체라는 개념은 명백히 쇼펜하우어적 영향 아래 윤리적 가치의 담지자로 비트겐쉬타인의 철학 안으로 유입되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동기와 이러한 유입은 마땅치 않아 보인다. 나는 형이상학적 주체라는 개념 아래, 말하자면 명제 이론적 주체가 포섭될 수 있을지를 탐색해 보았고 마침 문헌적 증거를 찾았다. 나는 이러한 관점(말하자면 세계관)이 물리학적 관점, 예를 들면 비트겐쉬타인이 자주 인용하는 헤르츠의 역학적 세계관과 융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문득 쟁점이 옮겨짐을 느낀다. 나는 비트겐쉬타인이 자신의 철학적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을, 말하자면 럿셀식의 인식 주체-객체 구도에서 탈피하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을 19 세기 과학사의 한 논쟁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럿셀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헤겔식 관념론에 대한 반발이었다. 과학사에서는 그러한 반발이 마흐에게서 발견된다. 둘의 성향과 관점은 다르지만 인식 대상(주로는 감각 자료) 위에 자신들의 전체 체계를 쌓아 올리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마흐의 격한 경험론적 성향에 반대한 주요한 인사 중 하나가 헤르쯔인 것 같다. 마찬가지로 럿셀의 순진한 경험론에 진저리를 낸 사람이 바로 비트겐쉬타인일 것이다. 그렇게 헤르쯔와 비트겐쉬타인이 만나는 것 같다.

주체-객체의 구도는 이들에게 사라진다. 그 직접적인 귀결은 사고의 자율성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명제는 뜻을 가질 수 있다. 럿셀에게서 명제의 의미는 완전히 실재에 귀속된다. 그러나 비트겐쉬타인에 있어 명제는 완전한 의미에서 실재와 동등하다. 다만 실천에 있어 명제가 세계에 대한 그림이 될 수 있으려면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적인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제한이 있을 뿐이다.

사고는 실재와 구별될 수 없다. 이것은 무슨 신비롭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물리학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가 그렇다. 모든 예술은 음악을 궁극으로 삼는다고 쇼펜하우어가 말했던가? 물리학은 마치 수학을 궁극으로 삼는 것 같다. 완전히 비물질적인 세계. 내 눈 앞의 이 사과보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그 원자들이 더 실재적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식의, 어떤 것이 더 실재적이냐는 질문은 시대착오적으로 무의미한 질문이다. 답을 한다면 종이 위에 적힌 수식 하나가 우주 전체만큼이나 실재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환상이나 미신없이 이런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만큼 진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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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적 주체에 대한 언급은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우리는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는 규칙을 환기할 뿐이다.

과학의 예를 들어보자. 과학, 예를 들자면 물리학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지 우리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즉, 보편성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다. 뉴턴의 역학에서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뉴턴이 한 일은 사과와 달의 운동에 동일한 방정식을 적용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뉴턴이 한 일은 사과와 달의 운동에 동일한 운동 법칙이 적용될 수 있으려면 그 방정식이 어떤 형태이어야 하는가를 밝힌 것이다. 뉴턴이 한 일이 사과와 달의 운동에 동일한 운동 법칙이 적용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 아님에 주의하자.

이 점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예로 들어보자. 이 이론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이 이론은 관측자의 운동 상태와 상관없이 우주에 동일한 방정식을 적용할 수 있으려면 그 방정식이 어떤 형태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인쉬타인이 관측자의 운동 상태와 상관없이 우주에 동일한 방정식이 적용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아님에 주의하자.

보존 법칙은 선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떤 보존 법칙이 깨진다는 것은 그보다 상위 수준에서 다른 보존이 지켜짐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질량 보존의 법칙.

이런 것이 지시하는 것은 우주가 이해가능하게 조직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진정 이해할 수 없는 것은(그러므로 신비한 것은) 우주가 이해가능하다는 것이다."(아인쉬타인)

비슷한 버전의 비트겐쉬타인의 말: "It is not how things are in the world that is mystical, but that it exists."(6.44)

그러나 이런 식의 언급들은 비트겐쉬타인 스스로의 금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금언을 어기는 것이다. 저런 언급들은, 우주에는 어떤 보편적인 법칙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증명할 수 없으므로 그에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느낌은 "신비롭다"는 감정을 동반한다... 라는 식의 말을 에둘러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운동 방정식은 우주의 구조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주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측정치를 주면 결과값으로 우리가 일련의 숫자값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명백히 파인만주의자이다. 나는 파인만이 비트겐쉬타인보다 철학적으로 깊다고 느낀다. (물론 옆집 아저씨도 형이상학적 잡설에 짜증스러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파인만이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다. 물리학이든, 철학이든, 언어학이든 탐구의 전제로서 문제 영역에 대한 어떤 구조를 전제하고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구조는 철저하게 도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구조에 은연 중에 어떤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행위를 나는 철학적 유치함의 징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비트겐쉬타인의 "논고"는 유치하다. 그 유치함이 "논고"가 끼칠 수 있는 해악 중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고"는 철학자가 뭔가 있어 보이고 싶을 때 쓸 만한 책의 전형과 같은 것이다. 말해질 수는 없으나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스스로 드러나는 것? 언어에 한계를 설정하고 그 한계의 장막 뒤에 어떤 가치를 숨겨두려는 철학적 사기. 그러나 단언하건대, 그 장막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언어적으로 분명하게 말해졌을 것이다.

드러난 만큼, 표현된 만큼만 존재한다. 더 많이 드러날 수록 더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이 곧 선이다. 그러므로 나는 스피노자주의자다.

존재에 한계를 긋는 것을 나는 철학적 퇴행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한계는 그어질 수 없다. 신이 아니라면!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말은, 가능한 최대한 말하라는 의미다.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상정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부분에 한계를 긋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한 금지는 언제나 실패한다. 아 프리오리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아 프리오리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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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9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ekly 2011-11-30 18:06   좋아요 0 | URL
하하 반갑습니다. 제게는 그것이 선택가능한 유일한 것으로 보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