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이폰에 앱을 하나 사서 설치했다. 모모노트라는 메모용 앱이다. 내가 찾던 기능들을 착실히 구현해 놓은 것 같았다. 나는 장치들 사이의 동기화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출판되고 고정되어 영속적으로 참조할 수 있는 뷰를 제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앱은, 일종의 비공개 블로그 사이트를 그러한 뷰로 제공한다. 좋은 아이디어다. 텍스트 입력을 하려면 편집 버튼을 별도로 눌러야 되는데 이것도 현명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롹킹 시스템이니까. 참 사려깊은 디자인들을 보고 흐뭇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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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 외서부에서 존재와 무를 샀다. Being and Nothingness. 사르트르는 책 제목에 관한한 나와 상극이다. 존재와 무, 구토, 변증법적 이성 비판, 자유에의 길... 지하철에서 펴들고 읽기에는 책 제목이 너무 야하다. 

Introduction을 다 읽었다. 마치 시사 주간지를 읽는 것처럼 속도감있게 읽힌다. 그렇게 읽었다고 착각하고 있다가 잠시 책을 내려 놓고 보면 머리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지하철 안이다. 읽은 페이지의 두께에 흐뭇해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학 1학년 안팎 때 한국어판 "존재와 무" 서론을 읽었던 것 같다. 그 뒤로 몇번 다시 시도를 했을 것이지만 서론 이상을 읽은 기억은 없다. 서론의 처음 몇 페이지는 그럭 저럭 읽었을 것이고, 그 뒤 페이지들은 그저 눈으로 활자를 따라 읽는 정도였을 것이다. 

사실 서론의 그 몇 페이지가 사르트르에 대한 나의 이해의 거의 전부다. 그리고 그 몇 페이지는 내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 이 블로그에도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본질이란 현상을 파고 들어가야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드러난 것들의 총체다. 프루스트가 천재라고 할 때, 그 천재는 작가로서의 탁월한 능력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프루스트가 생산한 것들의 총체를 뜻한다. 이는 굉장히 엄정한 윤리학을 내포한다. 그것은 변명의 가능성을 폐기한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이런 말은 불가능하다. "그를 돕고 싶었지만..." 이런 말도 불가능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지만..." 이런 말 하지 말라! 당신의 존재란 what you are가 아니라 all you've done일 뿐이다.

나는 아직도 이 이론 근방에서 헤매고 있다. 아마 내가 무지하게 게으른 사람임을 뜻하는 것이리라. 영문판 "존재와 무"를 읽으며 나 자신의 그런 게으름, 혹은 변화에 있어 철저한 무능력 따위를 느꼈다. 부지런해야 겠다. 이 책 무지하게 두텁다. 역시 부지런해야 한다는 자각을 준다. 이 책, 숱하게 오해되고 있다고 겉표지에 나와 있다. 가짜가 되기는 정말 쉽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읽지도 않은 책 표지들을 죽 나열하는 것처럼 자기비하적인 일이 또 있을까? 이런 자기비하를 일삼는 사람들은 매우 흔하다. 책의 표지를 사진으로 찍는 것은 그 책을 통독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스피노자 말대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힘들고, 힘든 만큼이나 드문 것이리라. 부지런 하자. 그런 면에서 사르트르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아마 사르트르가 글을 쓰던 카페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보다 거기 앉아서 1000 페이지 분량의 책을 써대던 사르트르가, 어떤 관점에서는 더 훌륭한 사람이리라. 이 논리의 정당화를 요구하는가? 나는 불가능하다. 반대로 내가 당신에게 당신 논리의 정당화를 요구해도 되겠는가? 당신은 나의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 당신은 열심히 책 표지를 사진으로 찍어 올리며 "앞으로 읽을" 책이라고 말하라. 그리고 나를 피하라. 누구든, 그러므로 나도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판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당신이 찍어 놀린 책 표지 사진으로가 아니라 what you've read로 판단하게 될 터이니까. 부지런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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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날 오전에 테레비에서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하면 박근혜 대세론이 흔들릴 것이며 그러면 대안으로 김문수 등등이 부각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더라. 그때 나는 어라, 그러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박근혜가 여권 대통령 후보로 나와줘야지, 비박근혜면 여당이 대선에서 이길 지도 모른다... 차라리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선전해서 박근혜가 새누리당의 유일한 대안으로 계속 남아있는 게 낫겠다...


그런데 총선 결과는 새누리당의, 누구도 짐작 못한 압승.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토달 여지 없이 완벽한 박근혜의 승리. 더 커다란 낭패는, 여당에 과반마저 넘겨주어 대선에서 야당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정권의 힘을 미리부터 반감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 아마 최악의 낭패는, 이제 박근혜의 힘을 인정하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조지 오웰의 "1984" 마지막 장면처럼 체념해 버린 사람들이 무척 많아졌다는 것. -우리는 우리 시대에서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괴력을 가진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자, 이제 그 앞으로 가서, 하찮은 자존심때문에 차마 인정하지 못했던 우리의 경외를 고백하자!


갑자기 대선까지 시간이 너무 짧게 남았다는 위기감이 든다. 박근혜가 보여준 초인간적인 괴력의 기억이 엷어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야권이 준비하고 있을 박근혜 침몰 프로젝트(정수 장학회 문제 등등)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 괴력의 기억을 증폭할 궁리를 하고 있을 새누리당 사람들은 분명 이런 문제들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털고 갈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하고 있을 것이다. 자, 대의를 위해 이런 사소한 시비꺼리는 과감하게, 깨끗하게 털어버립시다! 과연! 그릇이 된 사람이야! 


그러나 이명박이 재앙이듯 박근혜도 재앙이라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박근혜는 사안을 합리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전무하다는 우리의 확신을 단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를 신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친박"이라는 이름의 당이 출현했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가?). 이보다 확실하게 실패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정치인이 있었는가? 


쳇... 야당은 카리스마 있고, 전 연령대에 감동을 줄 수 있는 대선 주자를 중심으로 뭉쳐야 할 거다. 이명박을 까지도 말고, 박근혜를 까지도 말고, 너무 진보적인 정책도 내놓지 말고, 인물 대 인물로 붙어서 박근혜보다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후보를 내놓아야 할 거다. -정책이 아니라 인물에 기대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는 확실히 늙었다. 다른 대안이 있느냐고 항변하는 이 논리는 언젠가 많이 들어본 흘러간 곡조다.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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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기 있는 한 대목. 이 노트가 내 사후에 출판되어 사람들이 읽고 나서 이렇게들 말하겠지, 사르트르라는 인간 참 피곤한 성격이군. 그때 당신(보봐르)이 사르트르도 나름 부드러운 남자였다는 주석을 달아주어야 할 거요...


2. 그러나... 사르트르의 이 일기를 편집하여 거기에 주석을 달 권리를 가진 사람은 보봐르가 아니라 사르트르의 마지막 여인이자 수양딸인 아케임(이름이 맞나?)이었다는 거...


3. 아마 사르트르보다 더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나일 듯. 정말 피곤한 성격의 사람임을 이렇듯 뻔뻔하게 공개하고 있으니...  


4. 오늘 총선. 야당을 찍었지만 현재 보아하니 지는 분위기. 실망. 그러나 크게 실망하지는 않는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몫이 있으니. 그 몫은 다른 누가 지는 것이 아닐 테니. 우리는 이명박이라는 크나큰 수업료를 내고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나 충분히 배우지는 못한 것 같다. 우리는 기꺼이 더 큰 수업료를 낼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러나 이 또한 건방진 말이다. 수업료 운운은 한국 국민들의 일반 수준이 나보다 낮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니. 그러나 위악보다는 거만이 나을 듯 하다. 사람들은 한국은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는 철없는 낙관같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 여기까지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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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 외서부에 비트겐쉬타인의 "탐구"를 사러 갔는데 "Jean-Paul Sartre War Diaries Notebooks"가 눈에 뜨였다. 이런 책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책 뒷표지를 보니, 사르뜨르는 이 노트에 철학, 문학, 정치, 역사, 자전적 이야기 등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적어놓았다고 되어 있다. 영국에서 비트겐쉬타인에 대한 논문을 쓸 때 생각이 났다. 비트겐쉬타인의 비공식적 육성들(그가 직접 쓴 노트들, 편지들, 구술한 메모들,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노트들 등등)을 참조할 수 없었다면 나는 내가 지금도 그 진리성을 확신하고 있는 나의 작은 논문을 결코 써내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사버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작은 논문을 쓰면서 진행 상황을 어느 정도 이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고, 또 초고의 몇 가지 버전을 나에게 보내는 메일의 첨부 형태로 저장해 놓았다. 그럼에도 그러한 것들의 총합내지 점진적 발전이 완성고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즉, 매일 매일, 매 시간 단위로 진전을 기록하더라도 진전들 사이에, 부정합처럼, 점진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기록할 수 없는 비약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나는 안다. 그러한 비약이 없다면 그 작품은, 말 그대로 "ordinary"할 뿐일 게다. 그러한 비약을 통해서 작품은 나에게서 독립한다. 나는 작품에 대해 타자가 된다. 우리는 그 타자성을 추구해야 하고, 나의 경험으로 볼 때 그러한 타자성의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나 자신 안으로 깊게 침투함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안으로 깊게, 철저하게, 무자비하게 침투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혹자는 그것을 실존, 고독, 단독자 개념으로 이야기할 지도 모르겠다만... -와, 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하다니! 나는 내가 이룬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너무도 너무도 보잘 것이 없다) 내가 느낀 타자성의 경험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니까... 양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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