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자 아트 픽션 1
폴 왓킨스 지음, 권영주 옮김 / 아트북스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보는 순간, 떠오른 영화가 있었다. 이렌 자콥(Irène Jacob) 주연의 <인코그니토>(Incognito, 1997). 여담이지만 이렌 자콥은 국내에 ‘이렌느 야곱’이라는 국적불명의 해괴한 표기법(영어식도, 독일어식도, 프랑스어식도 아님)으로 소개되어 돌아다닌다. 처음 기록한 분이 어떤 심오한 취지에서 그렇게 쓰셨는지 몹시 궁금하다.

내가 이 영화를 기억하는 건, 순전히 이렌 자콥의 매력 때문이다. 오랫동안 나만 뇌리에 남았나 했는데, 최근에 인터넷 찾아보니 키에슬롭스키(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걸작 <세 가지 색 - 레드>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로 기억하는 분들이 좀 있더라. 특히 <세 가지 색 - 레드>는, 감독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생각할 때, 우리 세대 영화배우 캐스팅 사상 최고의 대박이었다고 감히 말해본다.

영화 <인코그니토>와 <위조자>는 닮은 데가 적지 않다. 우선 미국인이 주인공이고 파리가 배경이다. 무명 화가인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인코그니토>의 해리 도노반은 아버지의 병원비 때문에, <위조자>의 데이비드 핼리팩스는 독일군이 숨겨놓은 60여 점의 고트하임 컬렉션을 구해내기 위해) 감히 네덜란드 출신 거장의 세기적 걸작(<인코그니토>에서는 렘브란트의 <눈먼 이의 초상>, <위조자>에서는 베르메르의 <천문학자>) 위조에 도전한다. 영화는 1997년에 발표되었고 이 책의 원작 The Forger는 2000년에 발표되었다. 얼핏 생각하기엔 영화보다 뒤에 나온 소설이 영화의 모티프를 모방했거나 아이디어를 빌렸을 거라는 인상을 받기 쉽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에는 유사성보다 훨씬 많은 차이가 존재하고, 소설 쪽이 단연 묘사의 리얼리티나 스토리텔링의 완숙도가 뛰어나다.(영화가 좋게 평가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하고 조용히 묻힌 탓에, 비교하는 것이 소설 쪽에 모독이 될지는 모르겠다.) 

영화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풍 스릴러가 미술이란 소재를 뒤집어쓴 것일 뿐(존 바담 감독은 <잠복근무> <고공침투> 등의 스피디한 액션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노천카페에서 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만나 바로 사랑에 빠진 여자 주인공이 알고 보니 렘브란트 전문가였고 나중에 법정에서 그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식의 황당한 설정이 관객의 몰입감을 떨어뜨린다. 반면 <위조자>는 소재인 회화와 명작 감식, 미술품 위조에 관한 기본 상식은 물론이고 1930년대 파리의 상황, 전시(戰時) 프랑스의 일상생활 묘사가 대단히 세밀하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를 한 티가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 한창 작업에 몰입한 해리(제이슨 패트릭 분)

물론 영화도 나름대로 볼거리를 제법 갖췄다. 초반에는 미술품 모작에 관한 전문지식이 상세하게 들어가면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중반에는 브로커에게 주인공이 쫒기는 설정을 넣어 액션영화스러운 장면이 튀어나오며, 마지막에는 날카로운 두뇌싸움을 보여주는 법정스릴러의 면모도 보여준다. 줄거리 전체에서 반전은 뻔한 감이 있지만, 파리의 아파트 독방에서 주인공이 모작을 만드는 과정 세부 묘사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위조자>를 재미있게 읽고 미술에 관심 있는 분은 영화도 한번 찾아서 보시기 바란다.

<위조자>의 가장 큰 장점은, 저자 폴 왓킨스의 프로필에도 나와 있듯이 섬세하고 세밀한 묘사가 으뜸이다. 원문의 문체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우리말판으로 판단하건데 문장 호흡도 하드보일드에 가깝다. 정밀한 고증에 딱딱 끊어지는 간결한 문체, 다방면의 풍부한 묘사는 장면 하나하나가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손색이 없다. 독일군에 대한 상투적 적개심을 배제한 점이나, ‘예술혼’을 내세운 싸구려 감동 쥐어짜기가 없고, 400쪽이 넘는 긴 분량 가운데 비현실적 연애놀음이 끼어들지 않는 것도 작품의 리얼리티에 든든한 토대를 쌓아준다.

개인적으로는 판크라토프가 한 이 말이 가장 인상깊었다.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진짜 희생은 단 한 가지뿐이라네. 잊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 그러고 나면 더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106쪽)

아, 감동적인 말이었다. ‘아트 픽션’이라면 예술가가 평생의 혼을 담아서 걸작을 남긴다... 정도의 주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작가는 그 이상을 노렸다. 이 말을 뱉은 캐릭터 판크라토프는 1929년 어느 날,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살라버린다.(동양에서는 도가 전설이나 일본 선(禪) 우화 중에 비슷한 모티프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건 작가의 세심한 구성이 돋보이는 부분인데, 같은 주제를 더 엄청난 사건 속에 슬쩍 언급한다. 판크라토프의 절친한 친구이자 러시아 망명자인 이반은 프랑스 외인부대 용병으로 복무하던 시절 핼리팩스의 삼촌 찰리를 알게 되는데, 두 사람은 린드버그보다 2년 앞선 1926년에 이미 비행기를 몰고 대서양을 횡단했다. 다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위대한 성취를 해내고도 익명(인코그니토, Incognito)으로 남는 아름다움. 이 부분에서 소설과 영화는 다시 한번 만난다.)

오랜만에 본 TV에서 ‘옥션하우스’라는 드라마 예고 광고를 봤다. 미술, 미술품 가격, 미술품 위조 등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사가 높아지는 트렌드의 반영인 것 같았다. 그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는 물론이고 유익한 ‘정보’도 얻어갈 만한 책이다.


미술책 전문 출판사에서 펴내는 ‘아트 픽션’이라…… 다음 작품들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