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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한 노후? 부동산 투기로는 해결 못 한다"

[인터뷰] '기본소득' 주장하는 곽노완 교수


기사입력 2010-01-31 오후 5:29:13 
 

범죄자와 성인군자가 같은 자격으로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가한다. 간신히 글자만 깨친 사람도 노벨상 수상자와 똑같이 한 표를 던진다. 누구나 알고 있는 보통선거의 원리다.

보통선거권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라는 점은 이제 상식이어서, 이를 부정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식이 뿌리내린 지는,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스위스조차 1971년에야 여성 참정권이 도입됐다. 100년 전에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황당한 생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흔했다.

"누구나 투표권 갖듯, 누구에게나 기본소득 보장돼야"

20세기가 보통선거권 확립의 역사였다면, 21세기는 기본소득 도입의 역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지난 27일부터 29일까지 서강대에서 열린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이들이다. 판 빠레이스 벨기에 루뱅대 교수, 수플리시 브라질 노동자당 상원의원, 블라슈케 독일 좌파당 연구위원 등 기본소득 관련 논의를 주도한 이들이 대거 참가한 행사다.

기본소득(Basic income)이란,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해서, 투표권을 제한하지 않는 것처럼 기본소득 역시 노동 여부와 관계가 없다. 부(富)를 창조하는 일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평생 도박에 미쳐 지냈던 이라도 매달 일정한 소득을 보장받는다. 거꾸로, 넘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갑부들에게도 매달 똑같은 돈이 지급된다.

얼핏 들으면, 황당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최저 생계비 이상의 소득이 무조건 보장돼야 하다는 주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었다.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는 맑스주의자들의 주장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의 주장과도 통한다. 예수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 저녁 늦게야 일을 시작한 사람에게 똑같이 1데나리온씩 나눠준 포도원 주인에 대해 말했었다. 생산에 덜 기여한 사람도, 기본적인 소득은 누릴 수 있어야한다는 뜻으로도 풀이되는 내용이다.


▲ 한국에서도 진보진영 일각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관심이 크지 않은 편이다. 지난 27일부터 사흘간 진행된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는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대학생사람연대


'모든' 사람이 기본소득을 받아야 하는 이유

'가난한 이들에게 최저 생계비를 줘야 한다는 주장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굳이 돈이 필요 없는 부자들에게도 왜 똑같은 돈을 정부가 지급하지. 그 돈을 모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더 많이 주는 게 낫지 않나'라는 의문도 생길 수 있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크게 세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는 '누가 가난한 사람인지'를 판정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판정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오히려 낭비 요소라는 것. 판정 과정에서 각종 비리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게 오히려 경제적이다.

두 번째는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을 사회 구성원 전체가 아닌 일부로 한정하는 순간 생겨날 반발이다. 기본소득을 받지 않는 부자들 입장에서는 기본소득이 높아지는 게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는 일에 자신들의 세금이 쓰이는 셈이니 말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기본소득 수급자 수를 계속 줄이도록 압력을 넣게 된다. 이런 압력이 작동하면, 기본소득이 오랫동안 유지되기 힘들다.

보편주의 복지를 택한 북유럽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공병원을 예로 들면, 이해가 쉽다. 이들 국가에선 부자든, 가난한 이든 똑같은 병원을 가게 된다. 부자들이 병원 서비스에 불만을 느낀다면, 이들은 공공의료 전체를 강화하는 쪽으로 압력을 넣게 된다. 정부가 세금을 더 거둬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제기하기 어렵다. 자신들만 이용하는 병원을 따로 세우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취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부자들만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이 생겨난다면, 부자들은 공공의료 확충에 관심을 끊게 된다. 세금을 더 낼 의향도 사라진다. 결국 공공의료는 점점 축소되고, 질도 나빠진다. 기본소득 역시 사회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같은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인권 차원의 접근이다.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은 보편적 당위의 문제라는 논리다. 마치 선거권을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라는 것. 따라서 어떤 식으로건 기본소득 수급자의 조건을 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리다.

우파도 도입 주장하는 기본소득


▲ 브라질 상원에서 시민기본소득법을 발의했던 수플리시 의원이 방한해 강연을 했다.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주최팀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 기본소득이라는 말은 낯선 게 사실이다. 이번 학술대회가 주목을 끈 것은 그래서다.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대, 심각한 청년 실업, 그리고 누구나 느끼는 실업에 대한 공포 등에 대한 해법을 찾는 일에 힌트를 줄 수 있으리라는 것.

실제로 브라질에서는 '시민기본소득법'이 지난 2002년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뒤 하원을 거쳐 2004년 룰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법적 효력을 갖게 됐다. 올해부터 점진적으로 시행될 예정인 이 법에 따르면, 브라질 국적자 외에도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까지 모두 일정금액을 받게된다. 당시 법안을 발의했던 수플리시 상원의원은 이번 학술대회에 참가해서 "시민기본소득 제도 도입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손쉬운 길"이라고 말했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의 나라'로만 알려져 있는 미국에서도 기본소득이 도입된 주가 있다. 알래스카에서는 석유 매각대금의 일정액을 적립한 알래스카영구기금에서 나오는 수익을 모든 주민에게 일정하게 나눠준다.

독일에서도 기본소득 도입 논의가 활발하다. 우파 성향을 띤 독일 기업인인 괴츠 베르너 지난 2006년부터 "소득세 등 모든 직접세를 폐지하고, 소비세를 인상하여 기본소득 재원으로 삼자"는 주장을 해 왔다. 기본소득 도입 주장이 반드시 노동자와 좌파 사이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는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입장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 기본소득을 둘러싼 이론적 논의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점도 보여준다. 실제로 일부 여성운동가들은 기본소득 도입이 성별에 따른 분업을 더 고착화 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를 없애려는 노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기본소득 도입 논의는, 자칫 가사와 육아를 여성이 전담하는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한 곽노완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 연구소 교수를 만났다. 경제철학은 전공한 그는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안현호 대구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등과 함께 국내에 기본소득 관련 논의를 소개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해 왔다.

"무상의료와 기본소득, 어느 쪽이 더 실현 가능성 클까"


▲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가 열린 서강대 다산관에서 만난 곽노완 교수. ⓒ프레시안(성현석)
프레시안 : 브라질 등에서 도입된 사례가 있지만, 기본소득은 아직 우리에게 낯선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실현가능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곽노완 :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기본소득에 관심을 둔 이들이 많다. 사회당 역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보수 진영은 물론이고 진보진영에서도 실현가능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잠깐 생각을 돌려보자. 과거 대선에서 진보진영은 "무상교육, 무상의료"라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런 공약과 기본소득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손쉽게 도입할 수 있을까. 당연히 기본소득이다. 모든 사람이 혜택을 누리므로, 적극적인 반발은 덜 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 도입을 전제로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전체 국민의 90% 가까이가 이익을 본다. 압도적 다수가 명백한 이익을 누리는 제도를 왜 도입하기 힘들다고 보는가.

프레시안 : 모든 국민에게 현금으로 일정액을 나눠주는 제도가 실효성이 있으려면, 물가가 안정돼야 한다. 예컨대 서민에게 매달 100만 원을 나눠준다고 해도, 주거비나 대학등록금, 의료비 등이 덩달아 뛰어오른다면 별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만약 정부가 국민에게 지급된 기본소득 총액만큼 통화량이 늘리는 경우에도, 물가상승은 피하기 어렵다.

곽노완 : 기본소득 논의는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돈을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나눠준다는 핵심 내용에 동의하는 이들끼리도 구체적인 실행방식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내 입장은 기본소득이 현금과 현물로 이뤄져야 한다는 쪽이다. 현물이 포함돼 있으므로 물가 인상에 따른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주거, 교육, 의료 등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영역에 대해 공공성을 높여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기본소득 논의 안에 포함될 수 있다. 실제로 일부 학자들은 국가 안보, 공교육 등을 모두 기본소득 범주 안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또 기본소득이 현금으로만 지급되는 경우에도 지급액을 물가와 연동해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통화량 증가 가능성에 대해 물었는데, 이 경우에도 꼭 효과가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부가 국민에게 직접 돈을 지급하는 경우에 대해 시뮬레이션해보면, 국민들의 구매력이 늘어난 것으로 나온다.

흔히들 걱정하는 게 부동산 문제다. 부동산 가격 인상으로 주거비가 폭등하면, 기본소득을 도입해 봤자 별 소용이 없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다. 그러나 기본소득 논의를 조금만 뜯어보면, 이런 걱정은 사라진다.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을 어디서 확보하겠나. 대표적인 게 부동산 투기로 인한 소득이다. 투기 소득을 세금으로 전액 거둬들이는 것은 기본소득 도입의 전제 조건이다. 기본소득 도입과 부동산 가격 안정은 서로 맞물려 있는 문제다.


▲ 부분적으로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해 시행 중인 브라질은 2010년부터 전 국민에게 이 제도를 도입한다. ⓒ프레시안

"기본소득, 경제 활성화의 새로운 계기 될 수 있다"

프레시안 :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기업가 정신도 활기를 띨 듯하다. 창업이나 발명 등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이들이 망설이게 되는 이유가 실패에 따른 부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기본적인 생계가 유지된다면, 많은 이들이 혁신을 쫓는 도전에 뛰어들 듯하다.

곽노완 : 물론이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기업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경제가 활성화되는 결과도 나올 수 있다. 구매력 증대로 인한 내수 활성화, 창업 증가로 인한 고용 증대, 도전 정신 고취로 인한 기술 혁신과 문화 생산 증가 등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다양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쟁점이 된 것 가운데 하나가 외국인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문제다. 원칙상으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제한이 불가피하다. 특정 국가에서만 거주자 전체에게 기본소득을 주다면, 몰려드는 외국인을 감당하기 어렵다. 브라질 등에서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이라는 제한을 둔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여기서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얼핏 생각하면, 몰려드는 외국인에게 기본소득을 나눠주면 국가 재정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제도를 면밀하게 다듬으면, 반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지금 선진국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부족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외국인들에게도 기본소득을 개방하는 것은 인구 부족에 대한 한 해법이 될 수 있다. 또 잘만 활용하면,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 활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이 일정 기간 이상 거주한 외국인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면,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어 교육 등으로 인해 생겨나는 경제적 이익도 커진다. 이런 이익 가운데 일부를 다시 기본소득으로 돌리는 선순환 구조가 생길 수 있다.

"노후 불안감 사라지면, 부동산에 집착할 이유 없다"

프레시안 : 문제는 재원 확보일 게다. 기본소득 도입 과정에서 반대 여론이 인다면, 결국 이 대목일 듯하다.

곽노완 : 부동산과 주식 등에서 생겨난 투기 및 불로소득을 거둬서 기본소득으로 나눠주는 게 핵심이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소수 자산가 집단이 강력히 반대할 게다. 그러나 다수가 혜택을 누리는 제도를 소수가 반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또 어떤 이들은 노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부동산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늙고 병들어서 노동 수입이 사라진 뒤에는 불로소득이 있어야만 생활이 가능하다는 게다. 이런 이들에게 기본소득 도입은 새로운 환경을 열어준다. 늙어 죽을 때까지 기본적인 생활비가 보장되는 상황에서는 불로소득에 지나치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성현석 기자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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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뮤지션 2010-02-11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곽노완 : 부동산과 주식 등에서 생겨난 투기 및 불로소득을 거둬서 기본소득으로 나눠주는 게 핵심이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소수 자산가 집단이 강력히 반대할 게다. 그러나 다수가 혜택을 누리는 제도를 소수가 반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 난 이 대목에서 오히려 곽노완 교수가 주장하는 기본소득제의 비현실성을 보는데.. 우선 '소수 자산가 집단'은 '부동산과 주식 등에서 생겨난' '소득'을 절대 '투기 및 불로소득'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게 문제겠지...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자산관리 혹은 투자행위에 의해서 얻어지는 정당한 소득이니깐.. 현행 민법/상법 상에서도 이들을 보장해줘야만 한다고 여길 뿐더러... 그게 아니었다면 부동산 관련 법규를 이토록 자주 바꿨을까? 그토록 많이 개정하고도 나중에는 유야무야 되는 사례가 얼마나 많았는데... 이를 다 아는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게 의아할 따름..

바라 2010-02-11 22:59   좋아요 0 | URL
그러게.. 인터뷰라서 자세한 얘기는 못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수가 혜택을 누리는 제도를 소수가 반대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는 너무 낙관적인 단순화인 거 같다. 안 그래도 사람들 다 재테크 재테크하는 마당인데...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2033 에 나왔던 말에 공감하는 데, "특히 기본소득의 경우 ‘노동하지 않아도 생존할 권리’를 요구한다. 한국에서는 사회당과 연기금 사회주의 연구자 등이 구체적인 재정 계획을 세우고 선전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주체형성과 실행방안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는 ‘대안사회에 대한 논의 촉발’, ‘사회주의를 거치지 않고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경로’ 등의 ‘이념형’ 제시에 그칠 수밖에 없다. 현행 소득보장 정책에서도 복지의존에 대한 비난과 증세에 대한 대중적 반발을 극복하는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고 사회보장 확대를 위한 운동이 미미한 조건에서 사회정책의 근간을 전환하자는 주장은 그 실행방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대중 이데올로기의 전환을 위한 주체형성과 이행의 구체적 경로에 대한 논의 없이 재정계산으로 실현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바라 2010-02-2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만수, 과학에서 몽상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발전. 발전(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5677)
 


국내에도 번역된 <들뢰즈와 예술>의 저자이며 고등사범학교에서 예술철학을 가르치는 얀 소바냐르그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4일동안 강의했는데 둘째 날과 넷째 날 밖에 가지 못했다. 예술과 철학이라는 제목 하에 이루어진 강연은 주로 들뢰즈의 미학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 많지만 몇 가지 기억나는 것들을 기록삼아 옮겨본다. 여기 적는 건 강연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불어였다면 거의 못 알아들었겠지만, 비록 느린 영어로 이루어졌어도 놓친 부분이 꽤 많았고, 그래서 밑의 내용은 꽤 오류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넷째 날 부분은 강연 관련 원고가 있으니 한번 번역을 해봐도 좋겠건만 당장은 힘들 것 같다.

둘째날 강연의 제목은 비평과 진단, 힘의 감응이었다. 초반에는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주체의 이론을 개괄했고, 시몽동에 의한 주체 개념 비판을 다루었다. 강연에 따르면 들뢰즈에게 있어서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은 큰 중요성을 갖는다. 예컨대 선-개체적 독특성이나 비인칭적 개체화 같은 개념. 이후에 <주름>의 번역자이자 소바냐르그 밑에서 들뢰즈를 전공한다는 이찬웅 씨가 잠시 강연을 했다. 일의성(둔스 스코투스)이니 중립적 본질(아비첸나) 같은 중세철학에서 유래한 개념들을 들뢰즈가 어떻게 중요하게 쓰는지, 시몽동의 변조modulation 개념이 들뢰즈에서 매우 중요하다.. 뭐 이런 이야기를 했고, 다시 소바냐르그의 강연으로 돌아오면, 개체화라는 것은 주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시몽동, 조프루아 생튈레르, 스피노자 등이 개체화 이론을 위해 동원된다. 다소 낯설은 이름의 생튈레르는 뀌비에라는 사람과 논쟁했던 동물학자로서 후자가 동물들은 결국 서로 소통될 수 없는 네 가지 정적인 종으로 환원된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친 반면 전자는 오직 하나의 종이 있을 뿐이며 이것이 모든 동물들의 다양한 변이를 가져오는 하나의 도면이 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전통 형이상학의 이분법 도식인 질료-형상 설을 비판한다. 시몽동은 오히려 재료-힘 이라는 새로운 비유기적 조직화 원리를 끌어들이는데, 그에 따르면 개체화 이전에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개체화의 원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개체와 개체화의 원리는 개체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동시적으로 구성된다. 가령 거푸집이 일방적으로 진흙을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 자체가 나름의 독특한 힘, 비균질적 에너지를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질료는 무규정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능동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 되고, 형상은 질료적 생명성의 metastable준안정적 상태로 변화할 수 있게 된다(준안정적 상태란 예컨대 과냉각 액체, 0도 이하에서도 계속 액체로 남아있는 물이 약간의 충격만으로 바로 얼어버리는 그런 상태이다. 선개체적 존재는 긴장상태에 있는 이질적인 힘들의 집합에 있고 이 힘들이 위상변화함으로써 다른 상태로 이행한다는 것). 이 질료에 내재한 잠재적 힘들과 이 힘의 지속적인 변이 과정에 대한 표현은 예술의 소관이다. 예술은 언제나 생성 중에 있는 이 잠재적인 힘들의 포획이고 삶에 대한 실험과 실천이다 등등.

넷째 날은 예술과 내재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었다. 소제목으로는 유사성과 반대되는 생성, 생성과 열린 체계, 리좀, 동물 되기와 감응affect의 목록, 힘의 포착으로서 생성, 이미지의 개체화, 운동-이미지와 세 변이태,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의 이행 등이 거론되었다. 들뢰즈의 이미지 존재론은 본래 무엇보다 베르그손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들뢰즈는 이를 영화의 존재론에 끌어들이기 때문에 무엇이 베르그손 고유의 것이고 아닌지 헷갈리는 점이 있다(비단 이건 베르그손 독해만의 경우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들뢰즈의 영화론에 관해서 간략하게만 몇 자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주지하다시피 들뢰즈는 영화에 관한 두 권의 책, <시네마 1권; 운동-이미지>와 <시네마 2권; 시간-이미지>을 썼다. 그는 이미지(물질과 관념의 중간에 위치하는 어떤 것)를 운동과 등치시키고, 이미지들의 총체인 세계에는 중심도 없고 어떤 정박된 주체도 없다고 주장한다. 오직 이미지들만이 존재한다. 이미지는 복수적이고 미분적인 힘관계들의 배치agencement이며 유동하고 임시적인 개체화의 장의 탈중심화된 우주를 구성한다. 운동-이미지들의 무한한 집합은 다양한 변이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내재성의 평면이다. 이미지들은 모두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를 갖는데, 여기에 특이한 이미지인 신체가 개입한다. 이때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어떤 간격이 들어서게 되고, 이 간격은 특정한 면에서만 작용을 받아들이고 반작용을 실행한다. 간격을 통해 선별과 조직화, 변이가 가능해지고, 그래서 이 간격은 ‘비결정성의 중심’이라 불린다. 운동-이미지에서 세 변이가 일어나는데 비결정성의 중심은 이미지들의 총체에서 관심을 끄는 것을 취하는데 이때 중심과 결부된 운동-이미지가 바로 지각-이미지이고, 지각-이미지가 작용하거나 반작용하는 것이 행위-이미지이며, 지각과 행위 사이를 점하는 것이 바로 감응-이미지이다. 이제까지 서술된 내용이 현실적인 층위에서 다루어진 이미지론이고 시간의 도입과 더불어 잠재적인 것의 층위에서 다루는 이미지론이 나오게 된다. 영화의 탁월성은 영화가 정박이나 지평의 중심없는 탈중심화된 이미지의 세계, 순수 운동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영화의 역량은 현실적 이미지, 운동-이미지뿐만 아니라 시간-이미지도 준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이때 시간-이미지는 운동-이미지의 감각-운동 도식을 파괴하는 순수 시지각적 ․ 음향적 이미지, 기억-이미지, 꿈-이미지, 결정체-이미지 등으로 분류된다. 시간-이미지를 통해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상호공존과 식별불가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기존의 사유의 이미지를 깨뜨리고 새로운 지각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현상학적인 1인칭 주체의 관점을 비판하고 비인칭적, 선개체적인 잠재적 힘들의 차원을 개방할 것이다.

일단 예전에 들뢰즈를 드문드문 읽어보았을 때의 독서들은 주로 칸트나 니체, 베르그손, 스피노자에 관한 그의 책들과 <차이와 반복>이나 <의미의 논리> 같은 책들을, 그나마 제대로 이해도 못한 상태에서 읽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주로 강연 대상이었던 <감각의 논리>나 <천개의 고원>, <시네마> 등은 아예 읽어보질 못해서 이해가 어려웠다;; 들뢰즈에 과문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냥 강연에서 주워들은 생각들을 바탕으로 말해보면 확실히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물질, 동물, 괴물 등등) 사이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개체는 언제나 강도적인 종합, 힘의 합성의 산물이며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 능동적 주체나 실체가 아니라 스피노자가 말하는 양태, 언제나 여러 우연적인 마주침의 과정에서 구성되는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인간 개체의, 또는 인간 의식의 자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선개체적 차원에 주목하기. 그래서 이 존재론은 어떤 강도적 존재론이지만, 전통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단순한 일자는 아니고 뭔가 ‘이상한’ 일자로부터 다수적인 존재의 동등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인간은 언제나 미리 주어진 선개체적 개체화의 장 안에서 어떤 관개체적 존재이고 어떤 무엇에서 다른 무엇으로 이행하고 변화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물론 이 힘은 물리적, 화학적 차원의 힘이 아니다. 그 힘, 역량은 니체가 말한 Macht, 스피노자가 말한 puissance일 것인데, 이는 언제나 들뢰즈에게서는 무엇보다도 일종의 유희, 그러니까 예술적인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의 잘 알려진 캐치프레이즈인 일의성, 다수성, 차이, 복수성, 내재성, 독특성, 생성, 창조, 기쁨! 철학의 조건들이 과학, 정치, 예술 등이 있다고 할 때, 들뢰즈에게는 가장 탁월한 조건이 바로 예술일 것이며 그의 철학을 이끄는 가장 주요한 충동도 니체적인 예술 충동(“이 모든 것은 오직 미학적으로만 정당화된다”)일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철학, 그러니까 시종일관 하나의 미학일 어떤 철학을 어떤 사람들이 시도하는 것처럼 정치철학적으로 논의하려 할 때, 그게 누군가가 보기에는 커다란 가능성일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커다란 한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치에서는 창조와 차이만큼이나 습관과 안정, 균형과 지속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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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0-01-24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소바냐르그의 강연이 있었군요! 전혀 모르고 있었네요.ㅠㅠ

바라 2010-01-24 20:28   좋아요 0 | URL
네ㅠ 람혼님이 오셔서 들었으면 좋으셨을텐데 아쉽네요ㅜ들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저보다야.. 프랑스철학 전공하는 선생님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오시고 미학과 학생들도 꽤 많았어요.

2010-01-24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계속 바쁜 일들로 사정상 인터넷을 오래 못했더니 

한창 불매운동에 관한 논쟁들이 오간 것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  실제로

빈곤한 주머니 사정 등으로 인해 어차피 알라딘에서 책을 산지도 반 년이 한참 넘긴 했지만;; 

기왕에 미리 알았더라면 소극적인 선언일지언정 불매운동에 더 힘을 보탰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나야 뭐 알라딘의 '주요 멤버'도 아니고 해서 이런 군소리가 의미없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논쟁에 관련된 글들을 본 것은 1월 이후이기 때문에, 못 본 글들도 많고  

불매운동이 흘러간 전체적인 내용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로쟈님이 평소의 입장에 비추어봤을 때, 불매운동에 대한 로쟈님의  

어떤 관망 또는 폄하의 반응은 별로  놀랍지는 않은 것 같다.  

소모적인 논쟁에 다시 불을 지필 필요는 못 느끼므로, 로쟈님에 대한 언급을 삼가면서, 

로쟈님이 인용한 지젝에 대한 단상을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그러한 레닌주의적 정신에 충실할 때, 이라크 파병(연장)에 반대하는 것은 개량주의적 좌파들, 혹은 얼치기 좌파들의 행태이다(물론 반대하는 척할 수는 있다). 오히려 적극 찬성해야 마땅하다(그래야지 ‘자본주의와의 전쟁’도 빨리 끝장을 볼 게 아닌가?). 즉, 친미 수구주의자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그건 성매매 방지 법안을 놓고서도 마찬가지이다. 포주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비록 전혀 다른 이유/계산에서이긴 하지만.(해방공간에서 제출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도 ‘반탁’에서 돌연 ‘친탁’으로 돌아선 공산주의자들의 행태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적과의 동침’은 레닌주의이건 마오주의이건 간에 A급 좌파의 기본 ‘전술’이다(수단으로서의 모든 ‘전술’을 정당화하는 건 목적으로서의 ‘전략’이다).

반면에, 성매매/성접대에 반대함으로써 ‘접대 없는 자본주의’를 희구하는 태도는 ‘인간적인 자본주의’,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용인하는 태도이다(‘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불가능한 만큼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도 딱 불가능하다). 그것이 소위 개량주의적/타협적 태도이며, ‘카페인 없는 커피’처럼 ‘무해한 자본주의’(적어도 ‘덜 유해한 자본주의’)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량주의적 좌파(가령, 제도권 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와 자유주의자(가령, 고종석) 간의 간격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가령, 고종석은 ‘마약 없는 마약’ 마리화나의 합법화를 지지하며, ‘섹스 없는 섹스’ 사이버-섹스를 지지할 법하다. 민노당도 마리화나와 사이버-섹스를 지지하나?). 적어도, 근본주의적 좌파나 우파(수구반동)와 비교해본다면 말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http://blog.aladin.co.kr/mramor/3306679

 

그러니까 이것이 불매운동 반대에 대한 변이 지젝의 이름을 빌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지젝의 저런 이야기를 들을 때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은, 과연 이런 식의 운동 방식이 

현실 정치에서 가능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로쟈/지젝의 위 이야기가 갖는 맥락은 아마도, 그의 말을 따르면, 세계를 비난하되 자신은  

거기에 빠져있는 좌파적 ‘아름다운 영혼’의 자기기만을 선택하느니,  

보수주의자처럼 손에 피를 묻히는 행위(act)가 낫다는 식의 이야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로쟈/지젝 식의 재담은 어떤 '아카데믹' 좌파를 비판하는 

주장이 될 수 있을지언정 현실적으로, 실질적인 정치적 대안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여러 사람들이 이미 의문을 제기했지만, 가령 알 카에다, 탈레반의 테러와 자코뱅적 테러는  

지젝에서 어떻게 구분되는가? 기존의 상징적 좌표를 다시 짜는 행위와 단순한 테러는?  

게다가 이라크 파병에, FTA에 반대하는 것이 얼치기 좌파의 행태라면, 그것에 찬동하고 

착취를 심화시켜서 자본주의와의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A급 좌파의 태도인가?  

그런데 로쟈/지젝이 이야기하는 것이 단지 그것 뿐이라면, 

지젝 식의 이야기가 낡은 파국론의 리바이벌하고 뭐가 다른 것인지, 혁명은 무지몽매한 pt들이 

어떠한 개량주의와 인도주의의 환상에 속지 않도록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또 얻어맞아야만 

일어나는 것인지?(인간은 엉덩이를 걷어차줘야만 비로소 일어난다!)     

성매매에 찬성하고 전쟁을 찬성하며 착취의 수준을 무제한으로 끌어올렸을 때,  

어떤 무환상의 '혁명적 주체'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인가? 과연? 난 잘 모르겠다.

물론 김대중/노무현 같은 사람들보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어떤 '전선'이 분명해짐은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어떤 우스갯소리처럼  

이명박을 하늘에서 운동권에게 보내준 천사라면서 칭송할 필요도 없다.

근본주의적 좌파와 우파가 위에서 서술된 것처럼 동맹할 수 있다고 할 때,  

근본적인 행위가 필요함을 주장하는 위와 같은 말이  

운동하지 않음을 위한 알리바이로 기능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더군다나  비판보다는 긍정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라든지,

은행을 터는 것보다 은행을 하나 짓는 것이 낫다는 식의 이야기도, 

원론적인 차원에서야 누가 반대할 게 없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태도는, 대안이 없으면 비판하지 말라는 지배층의 논리로 변질되기 쉽고, 

결국 비판 자체를 봉쇄시키는 효과를 낳기 십상이다.

알라딘 불매운동을 벌이면서, 알라딘보고 비정규직 문제 전체에 대한 해결이나, 또는 누군가가 

비약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자체의 폐기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사안의 강도가 약하다든지, 아니면 비교적 시급한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불매운동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전제도 매우 의심스럽지만.  

아마도 운동의 단순한 실효성의 여부를 넘어서,  

불매운동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환기 및 호소라는  

보다 상징적인 차원으로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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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6 0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이] 2010-01-0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좋은 글이네요ㅋ 많은 부분 공감이 갑니다. 그치만 로쟈님도 단지 한 명의 블로거이시고 자기의 주장이 있는건데, 그리고 그렇게 모욕적으로 불매운동 하신 분들을 비난한 것도 아닌데, 다른 분들이 너무 과민반응한거 아닌가 싶은 부분이 있기도... 정 못마땅 하다면 그냥 로쟈님 블로그에 안 들어가는 식으로 돌아서면 되는건데, 굳이 그렇게 공격적으로 댓글을 달았어야 하는지;;; 각자의 자유로운 생각이 있는거 아닌가요ㅎ 항상 운동할 때 부딪히는 문제이지만 그런 식으로는 효과적으로 설득되지도 않고 반목만 증가하는거 같아서 이번엔 조금 아쉬웠어요.

키릴 2010-01-06 18:58   좋아요 0 | URL
과민반응은 오히려 로쟈님이 아닐까요? 먼저 반칙을 했잖우. 관망한다고 해 놓고 왜 중대신문*한겨레21*경향신문 같은 공식매체에 불매에 관한 폄하를 하고 다니는 걸까요? 불매운동 하시는 분들이 로쟈님의 관망을 존중했어요. 먼저 이 룰을 어기고 선빵치고 나간 사람은 로쟈님이오. 공식매체에 부정적인 의견을 개진한 로쟈님께 제대로 된 해명을 해라, 사과를 요구해도 대답 대신 엉뚱한 글을 퍼와 논점을 흐리고 안티니, 뭐니 씨부렁거리는 사람이 바로 로쟈씨란 말입니다.

[해이] 2010-01-06 19:41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제가 속속들이 전후사정을 다 아는건 아니라... 그랬다면 다른 블로거들의 실망감이 적지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그냥 조용히 돌아서는것도 나쁘지 않았을거란 생각이;; 암튼 잘모르겠어요;;

신지 2010-01-0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릴 님, 저는 생각이 좀 다른데요. 제가 보기에 로쟈님은 불매에 관해서 '글쎄...'라는 입장인 것 같았어요. 문제가 된 '순수한 가장' 발언은 불매측 입장에서 보기에 분명히 기분이 나쁠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한 사람이 청자가 생각하는 그런 의도로 말했을까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말한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개념적인 조어로 표현한 것인데 ㅡ 아마도 '이제와서 몰랐다는 듯이' 이런 말이 아닐까 싶어요. ㅡ 그 문제는 오해의 여지가 있고 입장에 따라 기분 나쁠 수 있지만, 말과 표현에 관한 것이니까, 해명을 통해서 서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봐요. (말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오해가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말을 완벽하게 하는 사람은 아마 없겠죠.)

말은 앞뒤 맥락도 고려해서 봐야겠죠. 그 발언은 "지젝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실제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숨기기 때문에 ‘수동적인 철회’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또 ‘행위’를 통해서 현실을 돌파해야한다고도 말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접합될 수가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더군요.

그렇다면 저는 타인이 개인의 생각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사람은 사상의 자유가 있으니까요. 멋진 '그럴듯한' 말을 했어야 할까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압력을 통해 바꾸려고 한다면(그것이 통한다면), 앞으론 지식인들이 '정치적으로 옳은' 말만 하게되지 않을까 싶어요. 솔직하게 말할 지식인은 없게 되겠죠. 요컨대, 그 발언은 당연히 사람마다 입장마다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다르더라도)'틀린' 말이 아니라면 개인의 사상에 관여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이 돼요.

다른 매체의 발언들도 문제가 있는 건가요? 저는 그건 국외자 입장에서 언급한 것이라고 봤거든요. 나름대로 불매운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외부에 알라딘 문제를 소개하는 건 불매운동에 좋은(우호적인) 일이라고 봤어요. 가령,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 아닌, 한 사람의 '생각' 안에는 찬성논리도 있고, 반대논리도 있고, 무관심도 있고, 관심도 있고, 짜증날 때도 있고, 우호적일 때도 있고, 여러가지가 한계가 없이 혼재되어 있잖아요. 저만 해도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그냥 내 일 하고.. 뭐 그렇거든요. 사실 모든 일은 단순하지 않고 개별적입니다. 그렇다면, 사안마다, 그때그때마다 구체적으로 개별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디 사는게 그렇게 간단한가요.. 당신은 이래야 돼-라는 건 단순히 타인의 '기대'가 아닐까 싶어서요. 모든 일에 일관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은 없지 않나 싶고 그래요.(물론, 제 생각일뿐 각자 생각이 있겠지요.)


바라 2010-01-08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컴퓨터가 맛이 가는 상황 등으로 인해 와보니 여러 분들이 댓글을 남겨주셨네요. 더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기도 한데.. 그냥 더 이상 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도 로쟈님의 서재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키릴님의 말씀처럼 로쟈님이 그저 한 명의 블로거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 분이 큰 영향력을 갖는만큼, 자신의 발언이 갖는 정치적 효과에 대해서 더 헤아리고 신중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해이님이 경험했고 또 우려했던 것이 어떤 것인지는 저도 공감하지만요. 물론 개인이 갖는 사상의 자유도 존중해야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떤 종류든 의사소통을 차단해서는 안 되고, 사실 우리의 생각이란 것도 언제나 이미 다른 생각들과의 교통 속에서 만들어지는 중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많은 분들이 서재를 떠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네요..
 

 


 

 

 

 

 

낸시 프레이저
세계화되는 현실에서의 정의, 새로운 틀구성.

케인즈주의-베스트팔렌적 틀 아래에서, 정의에 관한 논의는 근대 영토국가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국가 차원에서 케인즈주의의 경제적 진두지휘를 촉진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의 정치적 허상, 즉 국내와 국제를 철저히 나누는 영역 구분의 허상에 의존하고 있었다. 당시에 논증의 초점은 한 사회 내에서 사회적 관계들을 정의롭게 구성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이때의 논의가 정의의 ‘무엇’이 문제가 되지 논쟁자들이 ‘누구’인지에 관한 문제를 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명백하다. 민족국가의 시민이 바로 이 ‘누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틀은 변화하고 있다. 초국적 법인이나 국제 통화 투기자들, 대규모 제도적 투자자들의 행위에서 볼 수 있듯이 영토국가 내의 결정도 국가 밖 사람들의 삶에 자주 영향을 끼친다. 또한 오늘날 재분배 요구들은 점점 더 국민경제를 가정하기를 그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정을 목표로 싸우는 운동들 역시 영토국가 너머를 내다보고 있다. 오늘날 정의에 관한 논의들은 중첩된 모습을 보인다. 예전처럼 지금도 실질 내용과 관련된 일차적 층위의 물음들이 다루어지지만 오늘날 정의에 관한 논의들은 더 나아가 이차적 층위의 물음들, 메타적 수준의 물음까지를 제기한다. 정의의 실질 내용뿐 아니라 정의의 적절한 틀까지도 함께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의 이론은 인정의 문화적 차원과 분배의 경제적 차원, 이 두 차원에 더해서 대의/표현representation의 정치적 차원까지 함께 놓아야 한다고 본다. ‘무엇’과 ‘누구’에 더해서, ‘어떻게’라는 세 번째 유형의 물음이 필요하다. 사회적 정의 이론은 이제 탈베스트팔렌적 민주적 정의 이론이 되어야 한다.

정의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참여의 동등성이다. 이때 부정의를 극복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과 대등하게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화된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다. 제도화된 장애는 경제적 차원(분배적 부정의), 문화적 차원(지위의 불평등이나 불인정)으로 나뉘어지는데, 양자는 서로 인과적으로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어떤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측면을 포괄하는 이차원적 모델이 요구되며, 이것이 최소한 내가 과거에 옹호해왔던 정의관이다. 그러나 이는 케인즈주의-베스트팔렌적 틀이 당연시되는 경우에 한해서 유효할 뿐인데, 틀의 문제가 쟁점으로 거론되면 세 번째 차원의 정의가 곧장 가시화된다. 정의의 세 번째 차원이 바로 정치적 차원이다. 이 ‘정치적인 것’은 분배와 인정에 관한 싸움들이 상연되는 무대를 제공한다. 우선 이 정치적 차원은 사회적 소속의 기준들을 만들고 그리하여 누구를 구성원으로 볼 것인지를 결정함으로써 다른 차원들의 범위를 지정해준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차원은 결정 규칙들을 설립함으로써, 경제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 안에서 논쟁들을 무대에 올리고 결정핮는 데 필요한 절차를 마련한다. 이처럼 소속 구성원과 절차라는 이슈가 중심에 놓이는 정의의 정치적 차원에서 주로 다뤄지는 것이 대의/표현representation의 문제이다. 정치적인 것의 한 측면이 경계선 설정과 관계된 수준에서, 문제는 사회 소속 여부의 문제이며, 쟁점은 포함이냐 배제이냐 이다. 정치적인 것의 다른 측면인 결정 규칙과 관련된 수준에서, 대의/표현의 문제는 쟁론의 공적 과정을 조직하는 절차와 관계된다. 정치적인 것이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정의의 차원이며, 따라서 경제적인 것이나 문화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특정 종류의 부정의를 야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부정의는 바로 대의부재/표현차단misrepresentation이다. 먼저 최소한 두 수준의 대의부재/표현차단이 구분될 수 있는데, 우선 결정규칙들이 이미 포함된 사람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동등한 성원으로서 완전히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을 때, 이를 보통의 정치적 대의부재/표현차단이라고 부른다. 가령 대안적 선거 시스템들의 정치학적 논쟁들(소선거구제, 대선거구제 등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두 번째 수준의 대의부재/표현차단은 덜 가시적인데, 이는 경계선 설정과 관련된다. 이는 잘못된 틀 구성misframing이라 불리는 것이다. 잘못된 틀구성은 일차적 층위의 정의 요구를 말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아예 거부당하는 특수한 종류의 메타적 부정의이다. 이런 종류의 잘못된 틀 구성은 아렌트가 ‘권리를 가질 권리’라고 칭했던 것이 상실된 상태와 흡사하며, 일종의 정치적 죽음과도 같다. 이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인간 아닌 자들이 되고 만다. 최근 세계화로 인해 가시화되기 시작한 문제가 바로 잘못된 틀구성 형태를 띠는 대의부재/표현차단이다. 예전에 전후 복지국가의 전성기에는 정의에 관한 사유를 주도하던 원칙적 관심사가 분배였다. 이후 신사회운동들과 다문화주의의 출현에 따라 무게중심은 인정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이 두 경우 근대의 영토국가는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정의의 정치적 차원은 주변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오늘날 세계화는 틀의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올려놓았다. 강력한 약탈국가, 외국인 투자자나 채권자 등 초국적 사적 권력, 국제 통화투기자, 초국적 법인 등등의 경우를 보자.

재분배와 인정에 대한 모든 요구 안에는 항상 대의/표현이 이미 들어 있다. 정치적 차원은 정의 개념의 문법상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의/표현 없이는 재분배도 인정도 없다. 이것은 토의 민주주의 이론에서 충분히 강조되지 않은 사실이다. 적절한 대의/표현의 정치라면 정치적 부정의의 세 번째 차원, 틀을 정하는 과정까지도 민주화하려고 애써야 한다. 누가 정의의 주체로 간주되는지, 무엇이 적절한 테두리인가 하는 이슈에 초점을 맞추는 이 틀구성framing 정치는 정치적 공간의 권위 있는 분할선을 만들고, 수정하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틀 구성 정치는 두 가지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는데, 하나는 수긍적affirmative 틀구성 정치이다. 이 접근법은 틀 설정의 베스트팔렌적 문법은 받아들이되, 현존하는 틀의 경계선만을 문제삼는다. 그들은 국가영토적 원칙을 수용한다. 두 번째 판본의 틀 구성 정치는 전환적transformative 접근법이다. 여기에서는 국가영토성의 원칙이 더 이상 정의의 ‘누구’를 결정하는 모든 경우에 예외없이 적절한 토대를 제공할 수는 없다고 본다. 금융시장, 해외 공장, 투자체제, 세계경제의 통치 구조, 전 지구적 미디어의 정보 네트워크, 생명 정치 등과 같은 문제들과 관련해 부정의를 범하는 권력들은 장소의 공간이 아닌 흐름의 공간에 속한다.

이렇게 볼 때 전환적인 틀구성 정치는 세계화되는 현실 안에서 틀 설정의 심층적 문법을 바꾸려 한다. 이 접근법은 하나 또는 여럿의 탈베스트발렌적 원칙을 보완하려고 한다. 틀 설정의 탈베스트팔렌적 양태는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모든 당사자 원칙’이 가장 유망한 후보이다. 어떤 사회 구조나 제도에 영향을 받는 모든 이들이 그 구조나 제도에 관련한 문제에서 정의주체로서의 도덕적 입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공통된 구조적 혹은 제도적 얼개 안에서 함께 엮여있기 때문에 정의의 동료 주체가 된다. 오늘날 세계화 행동주의자들은 정치 공간의 국가영토적 분할법을 공략하기 위해서 모든 당사자 원칙에 직접 호소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환적 틀 구성 정치는 여러 차원과 수준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사회운동들은 한 수준에서 부당분배, 불인정, 보통의 정치적 대의부재/표현차단이라는 일차적 층위의 부정의를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두 번째 수준에서는 정의의 ‘누구’를 재구성함으로써 잘못된 틀 구성의 부정의를 제거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국가영토 원칙이 부정의를 면책하는 데 기여한다면 이 운동들은 그 원칙 대신 모든 당사자 원칙에 호소한다. 전환적 정치의 요구들은 훨씬 더 나아가는데, 이 운동들은 탈베스트팔렌적 틀 설정 과정에서의 발언권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의의 얼개가 그려지고 수정되는 과정을 민주화하려고 한다. 정의의 ‘누구’를 구성하는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동시에 ‘어떻게’를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민주적 경연장을 창출할 것을 요구한다. 예컨대 세계사회포럼. 이런 식으로 그들은 탈베스트팔렌적 민주적 정의의 새 제도들이 성립될 수 있음을 선보이고 있다. 세 번째 층위의 정치적 부정의를 우리는 메타정치적 대의부재/표현차단이라고 부른다. 이 투쟁은 ‘누구’라는 문제에 관한 논쟁을 민주적으로 발의하고 결정할 수 있는 제도가 결여되어 있음을 드러내면서 ‘어떻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세계화되는 오늘날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쟁이라면, 메타정치적인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들과 손잡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이 수준에서도 다시, 대의/표현 없이는 재분배도 인정도 없다. 오늘날 독백적인 사회정의론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누구’에 관한 결정은 점점 더 정치적인 문제로 간주된다. 이제부터 결정의 민주적 과정은 정의의 ‘무엇’뿐만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 모든 수준, 보통의 정치적 수준은 물론이고 메타정치적 수준에서도 대화적일 때 탈베스트팔렌적 민주적 정의 이론이 될 수 있다. 이런 설명이야 말로 우리가 세계화되는 현실에서 틀의 문제를 정의의 핵심 문제로 볼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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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사전 126쪽,  

무한판단 das undendliche Urteil


헤겔이 무한판단을 논하는 것은 대체로 <<예나 체계 2>>가 최초이다. 거기서 무한판단은 부정판단을 한층 더 철저화한 부정의 판단, 술어가 속하는 좀더 고차적인 영역을 부정하는 판단이다[아카데미 판 GW 7권. 88쪽]. 예를 들면 “감정은 빨간색을 갖지 않는다”는 무한판단에서는 술어(빨간색)가 속해 있는 좀더 고차적인 영역(색 일반)이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이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헤겔은 무한판단의 문법적 형식 “어떤 것은 비-A이다”에 얽매여 있지 않다.) 이와 같은 무한판단에는 주어와 술어를 분리하는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주어와 술어를 자립적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논리의 학>>에서는 이러한 긍정적 측면이 ‘긍정적 무한판단’으로서 명시된다. 주어에 관계하는 “개별은 개별적이다”, 술어에 관계하는 "보편은 보편적이다"가 긍정적 무한판단이다. 이에 반해 앞에서 말한 무한판단은 “부정적 무한판단”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것은 “부정적 무한(das Negativ-Unendliche)”[주어캄프 전집 6권. 324쪽] 결국 악무한이며 “판단이라는 형식이 지양된 판단”[같은 곳]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또한 부정판단 - 무한판단의 관계는 민사소송-범죄[<<논리의 학>> 6권. 3258쪽; <<법철학>> 95절], 질병-죽음[<<엔치클로페디(제3판) 논리학>> 173절 보론], 사용-양도[<<법철학>> 53절] 등의 논리적인 분석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헤겔의 변증법 논리에 따르면 절대적 구별은 절대적 동일성이다. 그러므로 무한판단에서 주어와 술어가 절대적으로 구별될 때 주어와 술어는 또한 절대적 동일의 관계에 서게 된다. <<정신현상학>>에서는 그와 같은 무한판단으로서 “자기는 사물이다”[3권 260, 577쪽], “사물은 자아다”[3권, 577쪽]가 등장한다. 헤겔은 이런 종류의 무한판단을 사변명제, 절대적 판단, 근원분할이라고 부르지만, 이런 종류의 무한판단은 진무한을 표현하고 있으며, 헤겔 철학의 근본사상의 표현에 불가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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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 2012-10-08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갑니다.
das undendliche Urteil → das unendliche Urte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