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똑같이 붉고 모든 목숨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본래 문학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 어떤 사회 체제 안에서도 그 가두리를 답답해하면서 탈주와 월경을 꿈꾸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1987년 6월을 떠올린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 죽음들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힘겹게 그것을 가꿔왔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명박 정권 1년 만에 대한민국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이념에 기대어 발언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이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본다. 용산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와중에 여섯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지만 저들이 행한 일은 위선적인 사과와 광범위한 탄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 장악을 기도했고 도심 광장과 사이버 광장에 차벽을 치고 철조망을 세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는 이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천박한 관료주의로 문화예술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사상 최악의 표적수사와 비열한 여론몰이는 그를 벼랑에서 투신하게 하였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는 군림하면서 영혼을 팔고 정의를 내던진 정치검찰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 저들을 여전히 검찰과 언론이라고 불러야 하나.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면 그것은 곰팡이가 슨 집이 아니라 집처럼 보이는 곰팡이일 뿐이다. 저 권력의 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서 우리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저들은 수치를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인권이 존중되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땅에서, 우리는 살아야 한다. : 강경희

 이곳은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다. 우리는 장님이 아니다. 우리는 보고 느끼고 표현할 것이다 : 강성은

 각자 흘린 눈물이 같은 맛을 낼 때, 분노는 만인의 양식! : 강정

 살아 있었구나, 너희 6월의 불씨들이여! : 강진

 반성이 멈추는 순간 우리의 말은 오물이 되고, 민주주의가 멈추는 순간 우리의 삶은 허깨비가 된다. : 고나리

 활짝 핀 민주주의 꽃내음에 흠뻑 취하고 싶어라! : 고명철

 이제 우리에게 금지된 것을 요구해야 한다. : 고봉준

 국민을 잠재적 폭도로 여기는 정권은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 고인환

 우리에겐 마감의 힘이 있다. 너희의 마감을 보고야 말겠다. : 고찬규

 촌스러워서 살 수가 없다. : 곽은영

 눈먼 망나니 제 칼에 죽는다. : 구효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 기어이 너희들의 최후를 보고야 말리라! : 권온

 민주주의는 공기와 같아서, 숨쉴 수 없게 된 후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 권혁웅

 절명으로 살아나는 연두! 연두! 연두! 함부로 파묻지 마라, 봄눈(目), 따뜻한 심장. : 권현형

 모든 버려진 약속과 빛바랜 희망을 위해 병문안 가는 길입니다. 조심하세요, 우리의 병문안은 지금 너무 뜨겁습니다. : 권희철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고, 패배는 당신들의 것입니다. : 김경인

 사람이 말하는 자유를 믿지 않기 위해 나는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지 않는 습관이 있다. : 김경주

 새가 쫓겨난 광장에 피 묻은 돌이 날아듭니다. : 김경후

 눈 닫고 귀 막고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로 너희가 내 말의 피와 살을 발린대도, 끝끝내 사람이고자, 펄펄 뛰는 사람의 말이고자. : 김근

 이 세상의 어떤 광물(狂物)로 벽을 쌓더라도 깊이 흐르는 것들은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 김나영

 우리의 혀를 자르면, 우리는 목을 내밀 것이다. : 김남극

 문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경제발전 운운하는 거창한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 아래 억압된 정직한 욕망이다. : 김남혁

 아가리를 벌린 악의 상처들을 이 문장으로 기워가리라. : 김대성

 불법 폭력이 문제라고? 맞다. 늘 그게 문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그렇게 두들겨 맞아 시퍼렇게 멍들고 피 흘리며 죽어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 김명기

 마감을 늦춰달라고 해야겠다. 거리로 나가느라 글 쓸 시간이 없다. : 김미월

 장벽이 높아질수록 모일 것입니다. 이것은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목소리들이 만나는 순간의 파열음입니다. : 김미정(평론가)

 나는 정치를 모른다. 다만 치정의 끝을 알 뿐. 그리하여 우리가 여긴 모인 이유, 되돌려놓자는 얘기다. 우리 모두가 다 아는 그 처음으로, 아름다움으로, 진실로! : 김민정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이백 살까지 살아남겠다. : 김사과

 귓구멍 막힌 사오정들의 후예들이여, 작가들의 송곳을 감사히 받으라! : 김사람

 웃음을 돌려줘, 꿈을 돌려줘! 어깨동무하고 맞짱뜨러 가자. : 김사이

 나는 당신과 함께 호흡할 것이다. 당신의 문장은 영영 절명하지 않을 것이다. : 김산

 이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어두운 밤을 쫓는 노래. 무덤 속의 당신들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 김선재

 권력의 상상력이 상식을 구금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상상력은 너희를 포위할 것이다. : 김성중

 당신이 도대체 사람입니까? 스스로에게 던져오던 이 질문을 비로소 세상에 내놓습니다. : 김소연

 봉쇄되어 말과 의미를 속박한 광장은 백지이디. 그 백지 위로 나는 미래를 쓸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으로. : 김안

 이날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고 우리는 부끄럽지 않다. : 김양선

 거짓된 빛의 세계, 새는 깃 속 어둠으로 난다. : 김애란

 나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일을 자꾸 하게 해줘서 고맙다. 이 고마움을 어떤 식으로든 보답해야 하지 않겠나. 인간이라면. : 김언

 이제 더는 하소연할 길조차 없는 억울한 사람들을 때리지 마라. : 김연수

 나는, 부끄러운 손으로, 내 삶의 길들여진 부위만을 잘라, 쥐불 놓는다. : 김요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 김윤환

 역사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 우리의 목소리를 퍼뜨리겠다. : 김이강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싸늘하게 스러진 그 대신에 이제 내가 뜨거워질 차례다. : 김이은

 텅 빈 백지를 슬픔과 분노로 가득 채운다. : 김이정

 누구나 어리석은 당나귀를 원하진 않는다. : 김자흔

 자유와 민주만이 너를 평안케 하리니, 더 이상 폭력의 벽을 쌓지 말라. : 김재영

 잘못 뽑아 개고생, 평생 두고 후회한다! 잠깐 실수 후회 말고, 미리 살펴 재난 막자! : 김정남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부끄러운 오늘을. : 김정란(소설가)

 여기에 멈춰선 절망의 발자국들을 보아라. : 김지녀

 침묵이 암묵적 동의가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하여, 무거운 입을 연다. : 김지선

 오래 전 노무현이라는 이름 위에 내 꿈을 얹어놓은 적이 있다. : 남상순

 나를 잠들 수 없게 하는구나, 위기의 시대여. : 맹문재

 무능한 정권, 썩은 검찰, 역겨운 언론- 적출대상 3종세트. 아차, 나도 문제야. : 명지현

 밥상도, 민주주의의 원탁도, 다 엎은 자여. 이제는 당신이 고꾸라질 때. : 문동만

 컨테이너 요새의 몰이꾼, 간 데 없는 표적을 향한 저격수의 총구에도, 어쩌면 담장을 넘어 파고드는 6월의 덩굴장미, 그 붉은 덩굴손! : 문혜진

 우리야말로 故人이었으되, 당신의 죽음이 우리를 살렸으니 우리의 삶은 당신을 살려내리라. : 박대현

 이명박 정권은 문화와 민주를 파괴하는 광기의 야만을 국민 앞에 사죄하고 물러가라. : 박민규(시인)

 정책이 비문(非文)이다. 언론의 맞춤법은 작위적이고, 미친개들은 국민에게 오타를 남발한다. 당신들의 언어는 번역이 안 된다. 암울한 시국의 문장을 견딜 수 없다. 오래된 생각이다. : 박상

 나는 분노한다. 국가가 없을 때 당할 고통을 국가 때문에 당한다는 것에. 나는 비참하다. 그 국가를 내가 만들었다는 것에. : 박상수

 더 이상 갉아먹지 마라. 쥐는 벽을 잊어도 갉아먹힌 벽은 쥐를 잊지 못하는 법이다. : 박성원

 "내 노래가 거치럽게 되는 것을 욕하지 마라!" 당신의 자리가 권력 아닐 때까지, 시인의 노래가 황홀해질 때까지. : 박수연

 미숙하고 서투른 나 차가운 광장에서 서성거린다. 희망을 위해. : 박슬기

 당신이 낸 구멍들이 모여 깊고 거대한, 결코 감길 수 없는 눈이 될 것입니다. : 박시하

 피리 부는 사나이여 이 쥐떼를 다 데려가, 우리에게 노래를 허락하길. : 박연준

 너를 인정한다. 거절의 대상으로, 동정의 대상으로. 그러므로 우리는 만나야 한다. : 박정석

 부끄러워, 돌멩이와 꽃을 움켜쥡니다. : 박창범

 오늘 침묵하는 자는 영원히 침묵할 것이다. : 박형서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 시와 인내심 있는 과학을, 투쟁하는 사랑과 사려깊은 정치의 씨앗을 심는다, 시장의 수사와 독재의 법전, 관료의 행정이 땅과 물길을 파헤치기로 손잡은 폐허 아래, 삶을 목숨으로 만들기로 합의한 심연 위에. : 복도훈

 너를 지울 수 없다. 민주주의여! : 박형숙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벼랑에 머리를 부딪히며 새날의 아침을 시작하는 뜨거운 죽음을 보아라, 상처가 길을 낸다 민주주의여. : 박형준

 저기, 지나가는 사람들, 이제 함께 갑시다. : 박혜상

 우리가 죽인 민주주의, 우리가 되살린다! : 방현희

 어떤 두려움도 없이 뒷걸음질치는 봄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 배영옥

 작별을 고함. 그다의 말, 치욕과 모욕의 반복이여! 복수를 고함! 우리의 말, 두 손 가득 진실과 정의로부터. : 백가흠

 자유와 민주, 한때 가졌다고 믿었던 것이 한 번도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기에. : 백지은


 폭풍전야, 이제 항쟁은 시작되었다. : 서성란

 눈 감고 귀 막아 과거로 얼굴을 돌린 자여, 들리는가! 어둠을 걷어내는 뜨거운 목소리가! : 서안나

 그 귀 진실이 뚫을지니, 잘 가라 비명이여! : 서영식

 우리 지금 마감하러 간다. 마침표 찍고 나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걸? : 서영인

 겁주고 피한다고 망각될 시간들이 아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한 외침, 거대한 알람소리가 된다. : 서효인

 이것은 법이 아니다. 이것은 언어가 아니다. 이것은 정부가 아니다. 이제, 신념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로 긴 싸움의 선언을 적는다. : 서희원

 들쥐들의 교묘한 협잡 더는 못 참겠어 울화의 향불이 지글지글 타올라 가만 못 있겠어. : 성기완

 근조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둔 시인의 슬픈 격문을 이 한줄에 담는다. 누구도 더는 죽이지 마라. : 손세실리아

 우리의 영혼이 고통스러운 건 민주주의가 우리의 본성인 까닭입니다. : 손흥규

 이제 죽음이 아닌 삶으로, 촛불이 아닌 횃불로 싸우기를. : 송경아


 기록 : 망각에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민주의 죽음이 선고된 날(07.12.19) : 송기영

 아름다움과 반성, 내 언어의 피스톤을 작동시키는 힘의 원천, 민주주의. : 송승환

 광장을 열차로 하자. 열차를 문으로 하자. 문(門)으로 욕망의 입을 열자. : 송중원

 술 마시고 깨어보니 역사를 몽땅 훔쳐가버렸네. 일어나자, 친구야. 도둑 잡으러 가야지! : 신용목

 공기 속에서 온통 비린내가 납니다. 없는 문이라면 그려서라도 열어젖혀야겠습니다. : 신해욱

 그 누가 내 사랑을 파괴하면 그가 신이어도 나는 그를 파괴할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의 애인이다. : 신형철

 괴물들이 주인인 시대여, 얼마나 더 끔찍한 결말을 바라는가. : 신혜진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 오늘은 그 중 하나만 보여주마. 그리고 내일 또 하나. 그렇게 하루에 하나씩. : 심보선

 이 시대에 다시 찾아온 어둠이여, 골방을 밝히고 글을 쓰던 촛불을 들고 다시 거리로 나서게 한, 기필코 하나둘 지워질 살진 어둠이여. : 안상학

 우리는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유롭고, 자유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보다 더 강하다. : 양윤의

 만세 만세, 민주주의여 만세!!! : 양진오

 소통을 바라는 것은 헛된 소망이 아니므로. : 여태천

 언어의 속삭임이 시작됐다. 민주주의는 침묵을 뒤집고 의연히 흐르리라. : 오창은

 사람의 마을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 그 곳에도 사람이 지나갑니까? : 우대식

 쓰고 말하고 행동하겠다. 우리의 이름이 비루해지지 않도록. : 원종국

 문학은 불온한 산소, 기어이. : 원종찬

 세상 이야기가 다 쓰여지고 난 뒤에도 새로운 이야기가 지금 다시 쓰여지고 있듯, 세상 사람들 다 죽어 흔적 없이 사라진다 해도 새로운 생명은 어디선가 꿈틀 일어서듯, 당신의 참말은, : 유용주

 민주주의의 뇌, 더 이상 손상시킬 수 없다. : 유정이

 푸르게 날이 선 6월의 잎사귀로 썩어버린 심장을 찌릅니다. 굿 바이 MB. : 유형진

 뱀의 눈으로 읽으라, 나는 지금 희극과 비극을 쓴다. : 유홍준

 저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후진 이야기. 어떤 작가도 생각하지 않는 플롯. : 윤성희

 한 손엔 곤봉 한 손엔 삽, 머리엔 떡찰 가슴엔 악법, 썩은 입술로 산자를 물어뜯는 괴물, 누가 광장에 MonsterB를 풀어놨는가! : 윤예영

 사랑이나 꿈 때문에 절망해볼 권리를 달라. 돈 때문이 아니라. : 윤이형

 이 한 줄은 내 눈엣가시가 되어 바로 보게 하고, 내 입엣가시가 되어 침묵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 윤지영

 반칙과 특권 없는 사회, 그 꿈까지 허공에 던질 수는 없습니다. : 이경재

 보라, 우리에겐 밤을 뚫는 천 개의 눈동자가 있다. : 이기성

 이제 내 모든 주어와 동사는 광장에서 씌어질 것이고, 광장에서 교정될 것이다. : 이기호

 그의 서재에 떨어져 뒹구는 혁명의 금빛 단추 하나를 나는 몰래 주워 가졌소. : 이덕규

 민주주의는 중심의 옹호가 아니라 중심의 괴로움을 사유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 이도연

 시민은 폭도가 아니다. 단지(斷指), 민주주의일 뿐이다. : 이동욱

 하느님, 우리가 이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하여, 총명하고 선량한 제 딸아이가 커서 감옥 갈 확률만 높아지고 있습니다. : 이만교

 이 미래를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구체적으로, 지속적으로! : 이문재

 광장의 벽에 부딪혀 새들은 추락했다. 우리는 검은 합창을 시작한다. 우리의 목소리를 찾을 때까지 불멸의 전염병이 될 것이다. : 이민하

 꽃잎처럼 동동 떠다니는 서러운 얼굴, 아 민주주의여! : 이상섭

 이 말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역사는 이 말에 이르지 못했으니 단 한 번도 우리는 폐기한 적 없으니, 더 이상 짓밟지 마라! 우리 가슴에 새긴 민주주의라는 네 글자. : 이선우

 그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고요한 정원이 무너져내렸다. 입 있는 자여, 이제 말하자. : 이성미

 작가의 지성과 상상력으로 우리, 민주주의를 만들어갑시다. 다시, 민주주의여 만세! 사랑이여 만세! : 이성혁

 이보다 더 무자비한 정권은 있었지만 이보다 더 비열한 정권은 없었다. 얼마나 더 많은 목숨을 벼랑으로 몰아야 당신의 국정이 완수되는가? 이제 그만 물러나길...... : 이순원

 2009년 6월, 무엇이 그를 우리들의 가슴에 불러모으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모습을 잃지 않은 민주주의다. : 이시영

 우리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를 창조한다. : 이신조

 내 이웃이 헌법적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고 모멸을 삼키며 죽어갈 때, 나는 어디에 있었나? : 이안

 죽은 것들이, 죽지 않는다. 여전히 농성 중이고 투신 중이고 신음 중이다. 나는 울고 일어나, 귀신들과 더불어. : 이영광

 너희가 모든 것을 무너뜨려도 끝까지 남아 있는 하나. 선얺나 피의 말- 자유! : 이영주

 막음이 없고, 막힘이 없는 곳. 그곳이 구름 위가 아니라 이 지상이기를. 저 헐벗은 창문들과 함께 원한다. : 이용임

 역사는 뼈보다 희고 무겁다. 나는 이미 가벼워졌다. 너도 필히 가루가 될 것이다. : 이용헌

 결국, 우리의 모든 말들이 "씨"가 되리라. : 이은림

 죽은 이들의 뒷모습으로 우리는 수많은 정면을 이루기로 하자. 무수하고 다양하게, 거대한 하나의 얼굴로. : 이장욱

 아직도 자유는, 아름답지만 피흘리는 5월의 신부. 닫힌 광장에서 구출해야겠습니다. : 이진희

 몸이 아프다. 저 먼 곳, 부엉이바위로부터 우리들의 명치 끝으로. : 이찬(평론가)

 너무 어둡지 않은가? 너무 비좁지 않은가? 너무 희박하지 않은가? : 이현승

 너 어쩌자고 그렇게 사는가? : 이현우(로쟈)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권력자들을 잠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 피에르 신부. 목소리, 목소리여...... : 이혜경

 가도 가도 끝없는 무덤 속이다. 스스로 구원하리라. : 이혜미

 말과 글, 표현의 무덤을 지켜볼 수 없다! : 임수현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꿈꿀 권리조차 짓밟아버리는 비정한 권력이여, 인간을 저버리고 물신을 숭배한 너의 야만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 임영봉

 나의 꿈은 분노 없이 나와 세상을 사랑하는 것. 그러나 오늘은 분노의 촛불을 켜기로 합니다. : 임지연

 모퉁이를 도니 꽃은 떨어져서 피어나고, 모두 눈을 뜨고 있습니다. : 장무령

 그대들의 야욕과 폭력, 간교에 분노한다. 이 분노는 함성이 되어 자유의 광장에 울려퍼질 것이다. : 전도현

 저 우악스런 권력의 발악은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무력함의 격렬한 표현일 뿐이다! : 전성욱

 시인이 깨어 있으면 독재자는 잠들지 못한다. : 전성태

 구멍이다. 그 구멍 뚫고 자유와 인권이 그대의 동공에 선 피로 맺히리라. : 전형철

 쎄스코에 전화히기 전에, 냉큼 물러가라! : 정여울

 시대적 박약아들에게 우리의 문장이 약이 될 것이다. : 정영효

 저 시퍼렇게 일렁이는 슬픔의 연대를 보라, 총칼보다도 강하다. : 정우영

 이성은 행동하지 않는다. 너의 울고 있는 말들을 보여줘. : 정은경

 청계천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살아 있는 물이 아니다. 이대로 모두가 유령이 될 순 없다. : 정주아

 우리에게 영웅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 자체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죽음의 위협과 싸울 것이다. : 정한아(시인)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 우리의 말은 솟구치고 터져서 광장에 스밀 것이다. : 정혜경

 한밤중 정동까지 이어진 말없는 행렬을 지나며 느꼈던 부끄러움, 오래 기억하고 싶다. : 정홍수

 꿈이 흐려진 자리에는 언제나 미래의 얼굴이 나타난다. : 조강석

 부끄러움을 관통한 아픔이 선연히 떠오르는, 치욕의 날들이다. 잊을 수 없는, 치욕의 순간이다. : 조동범

 우리, 끝내 이기리라. : 조성면

 꿈마저 빼앗긴 절망만큼 아픈 것은 없습니다. 아픔을 모르는 자들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 조연정

 나는 의문이 죄가 되지 않는 고요한 세계를 원한다. : 조연호

 사람 사는 세상으로 가는 이정표를 우리가 다시 일으켜세워야 합니다. : 조용숙

 나는 동료들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비천한 권력을 멸시한다"고, 사랑의 말들이 흘러나왔다. : 조원규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몸도 영혼도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 하여라."(마태 10:28) : 조윤

 시인, 모국어라는 지우개로 독재라는 오자를 지운다. : 조정

 우리의 문장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 조해진

 악이여, 혁명이 우리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조형래

 들을 귀 없는 권력자여, 이 성경 구절을 기억하는가? "온 공동체가 소리 높여 아우성쳤다.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다."(민수기 14:1) : 조효원

 너희들이 뽑아낸 머리카락들의 무덤을 보아라. 여기 스르르 살아 움직이는 무덤을. : 주영중

 우리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진실을 만드세요, 하느님. 그녀와 손잡고 거리로 나가겠습니다. : 진은영

 사과는 필요없다, 약속은 이미 깨어졌으니. 이 슬픔을 흐르게 하라, 다른 세상이 그 안에 고여 있으니. : 차미령

 사람 사는 세상과 민주주의를 무참히 짓밟은 너! 네 무덤까지 쫓아가 침을 뱉으리라. : 채은

 뱉지 않고 삼키지요, 뜨거운 이 불덩이. 벌거숭이 이 마음엔 부엉이 붉은 울음소리가 날지요. : 천운영

 불미(不尾)스러운 일은 꼬리가 있는 동물에게도 일어난다. 이따금 천둥, 번개가 자네를 불미스럽게 만들 걸세. : 천수호

 정치에 소질 없는 CEO가 국가폭력을 남용하니 천년왕국은커녕 곧 망하겠구나. : 최성각

 결국 민주주의가 이긴다. : 최진영

 촛불 밝히는 손은 세상의 풍경입니다. : 최창근

 해가 뜨지 않는다면 해를 그리지요. 탈색하는 피가 아닌 잉크의 푸르름으로. : 하성란

 산 이름이 죽은 이름이 되고,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이 되는. 여기는 없었던 나라. 나는 이 나라의 국민입니다. : 하재연

 결핍과 부재의 자리에서 더욱 단단해지는 문장의 순도(純度)를 나는 믿는다. : 한세정

 민주여! 사랑과 가난과 죽음의 힘으로 우리는 네게로 간다! : 한용국

 권력이 권리인 줄 아는, 자본이 자유인 줄 아는 이들에게, 부끄러움을 돌려드립니다. 본디 저들의 것이었습니다. : 한지혜

 Mad Bomb 자폭해라! : 함기석

 율법에 갇힌 자들, 얼굴 없는 노래에 둘러싸이게 되리. : 함돈균

 인권을 말하면 인권이 보장되고 자유를 말하면 자유가 실현되는, 지킬 건 지키는 세상을 원합니다. : 해이수

 이것은 사람 사는 세상으로부터 온 목소리니, 너희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말들에 답하라. : 허병식

 자유와 사랑을 원합니다. : 허윤진

 촛불은 더욱 거세게, 다시 타오를 것이다! : 허정

 어두운 곳 저 멀리서 소쩍 울음 들려온다. 붉은 피 토해내며 제 억울함 알리는 거다. : 홍기돈

 폭력과 폭력 사이로 빛나는 촛불을 본다. : 홍준희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듯합니다. 이명박 정권은 국가권력이 조폭일 수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결된 힘만이 이에 맞서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 황광수

 우리는 당신이 지금껏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 황규관

 법이문(법)의 목을 죄고, 시민도 시인도 적이 되는 땅. "아, 입이 없는 것들", 비명만이 말이 되는 땅. : 황호덕

우리는 작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글을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바탕에 언제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모였습니다.

참혹한 오늘을 불러온 것도 우리이지만

참다운 내일을 만드는 이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권의 야만에 분노합니다.

사람의 설 자리가 사라진 현실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의 얼굴을.

우리는 듣고 싶습니다.

아첨과 왜곡의 목소리가 아니라 공정하고 진실된 언론의 발언을.

우리는 느끼고 싶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자부를.

우리는 되찾고 싶습니다.

본래 우리 것인 광장과 집과 대지, 스스로 흘러 생명일 수 있는 강물을.

우리는 꿈꾸고 싶습니다.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사회,

양심과 이성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평등은 원래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는 입을 엽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한줄선언' 참가자 명단

 

강경희 강성은 강 정  강 진 고나리 고명철 고봉준 고인환 고찬규 곽은영 구효서 권   온 권혁웅 권현형 권희철 김경인 김경주 김경후  근 김나영 김남극 김남혁 김대성 김명기 김미월 김미정 김민정 김사과 김사람 김사이 김   산 김선재 김성중 김소연 김   안 김양선 김애란 김   언 김연수 김요일 김윤환 김이강 김이은 김이정 김자흔 김재영 김정남 김정란(소설가) 김지녀 김지선 남상순 맹문재 명지현 문동만 문혜진 박대현 박민규(시인)  박   상 박상수 박성원 박수연 박슬기 박시하 박연준 박정석 박창범 박형서 복도훈 박형숙 박형준 박혜상 방현희 배영옥 백가흠 백지은 서성란 서안나 서영식 서영인 서효인 서희원 성기완 손세실리아 손홍규 송기영 송승환 송종원 신용목 신해욱 신형철 신혜진 심보선 안상학 양윤의 양진오 여태천 오창은 우대식 원종국 원종찬 유용주 유정이 유형진 유홍준 윤성희 윤예영 윤이형 윤지영 이경재 이기성 이기호 이덕규 이도연 이동욱 이만교 이문재 이민하 이선우 이성미 이성혁 이순원 이시영 이신조 이   안 이영광 이영주 이용임 이용헌 이은림 이장욱 이진희 이  찬(평론가) 이현승 이현우(로쟈)   이혜경 이혜미 임수현 임영봉 임지연 장무령 전도현 전성욱 전성태 전형철 정여울 정영효 정우영 정은경 정주아 정한아(시인)   정혜경 정홍수 조강석 조동범 조성면 조연정 조연호 조용숙 조원규 조   윤 조   정  조해진 조형래 조효원 주영중 진은영 차미령  채   은 천운영 천수호 최성각 최진영 최창근 하성란 하재연 한세정 한용국 한지혜 함기석 함돈균 해이수 허병식 허윤진 허   정 홍기돈 홍준희 황광수 황규관 황호덕  총18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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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이라는 대당의 허상

[기고] 한 편의 ‘희극’이 ‘비극’으로 끝나다



이광일(성공회대)  / 2009년05월26일 10시54분

다소 긴 글을 시작합니다. 어느 분들에게는 듣기 싫은 소리일 수도 있겠지요.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정말 슬픕니다. 넉 달 전쯤 40년 지기를 먼저 보내고 묘 주변에 잠시 혼자 남아 진정 삶과 죽음이 함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다 내려왔는데, 노무현 전대통령 또한 이 세상을 등지며 ‘삶과 죽음이 하나 아닌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글을 쓰다가 혹은 길을 걷다가 나이 50이 되기도 전에 몹쓸 병에 걸려 혼자 깊은 밤을 보내며 죽어갔을 친구의 실존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릅니다.


설상가상 죽음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즈음에 일어난 용산학살이라는 구조적 폭력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저렇게 불에 타 죽어야할 사람들이 아닌데, 살릴 수 있었던 선량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도 모자라 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붙이고 진실을 밝히라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수배, 연행하고, 조문하겠다는 사람들 길을 가로 막고. 그래서 하도 기가 막혀 이명박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덕수궁 앞에서 노무현전대통령의 추모대열을 경찰이 막는다는 뉴스가 흘러나와도 그저 덤덤할 뿐입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20대의 젊은 시기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5.18민중항쟁 시기에 죽임을 당한 평범한 시민들의 처참한 주검을 담은 사진들을 처음 접한 후 매일 TV에 나와 아무 일 없다는 듯 ‘정의구현사회’를 반복하는 전두환씨를 보며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뒤돌아보면 그 역시 부질없는 짓이었지요. 이 두 사람을 보면 그저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말만이 떠오를 뿐입니다. 이런 그들도 과연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생각할까요.


그래도 말단에서 정치학을 공부한다고 사람들이 확인 겸 해서 종종 묻습니다. “이명박정권 등장이후 정치가 실종되었다고 말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이명박식 정치 아닌가요!?” 번득이는 질문에 “그렇지요, ‘정치’지요. 현실 속의 정치는 하나로 존재하지 않거든요.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 이 사회’는 여럿의 정치가 서로 모순과 긴장, 적대와 갈등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체적인 모습을 끊임없이 만들어 가지요. 하나의 정치를 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런 ‘뻔한 대답’을 하면서 이제 이 변변치 않은 지식을 가지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노무현 전대통령도 괜히 했다고 후회한 정치, 진정 ‘정치란 무엇입니까?’라는 자문을 하게 되니 이 무슨 조화인가요.


잠시 과거를 더듬어 봅니다. 전두환정권은 정규군을 투입하여 5.18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한 후 불순분자, 폭도들이 소요, 폭동을 일으켜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 그 죽임이 불가피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안정됐으니 국민여러분은 생업에 전념하라고 했지요. 지금 이명박정권은 또 어떤가요.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철거민들을 학살하고 ‘이제 여기 용산은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으니 모이지 마세요, 배회하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 일 없다.’면서도 경찰력을 동원하여 거리를 막고 무엇이 두려운지 4호선 신용산 역 바로 옆의, 학살현장 남일당 건물을 철통같이 ‘경호’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80년대의 양식 있는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처음에 “광주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데...”라며 소곤소곤 말했지요. 평온해졌다고 하는데도 그 곳에 시선을 주고 귀를 쫑긋했습니다. 전두환정권의 총칼이 두려웠지만 ‘전두환시리즈’, ‘이순자시리즈’라는 것을 만들어 그들을 희화하고 조롱하다가 결국 목소리를 모아 마침내 “거기에서 학살이 있었어요~”라고 큰소리로 진실을 말했지요. “파쇼타도”를 외치며 싸웠지요. 지금 용산은 어떤가요. 많은 사람들이 잊었다 하지만 철거민들이 학살된 것을 잘 알기에, 광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기에 양식 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그 가족과 함께 억울함을 널리 알리고 거기에서 얼마나 반인륜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있든 그렇지 않든 항상 그 곳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요.


진정 정치란 무엇인가요. 바로 여기에 ‘그들의 정치’와 ‘우리의 정치’가 어떻게 다른지, 그 비밀 아닌 비밀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파시스트의 계보를 지닌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장밋빛 꿈만 말하며 매사에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요. 그렇기에 그들은 지금 죽어가는 사람,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사람들일수록 더 매몰차게 몰아댑니다. 그렇기에 선량한 사람들을 죽여 놓고도 아무 일 없으니 그냥 관심 끄라는 투의 말을 눈 한번 꿈적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자기와 상이한 목소리들은 모두 막아버리고 수색, 압수하여 갖다 버리고 가두어 차단하면 되지요. 이게 ‘그들의 정치’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공안(치안)’입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넓고 깊은 강이 있습니다. 왜냐구요? 그들은 자신들이 임의로 그어 놓은 경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목소리와 삶 자체를 애초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은 ‘주권자’라고 하면서요. 단 한 치의 공간도 내주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는 무엇인가요. 오히려 “여기에 어그러짐, 차이, 긴장과 갈등이 있어요.”라고 밖으로 외치는 것이지요. 80년 새벽 광주에서도 신군부파시스트의 ‘공식적인 말’과는 달리 “여기 우리 죽어가요.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그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그 한마디에 이후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에 괴로워하면서 젊은 청춘을 보냈습니다. 그것을 생생히 다룬 임철우의 소설 「봄날」을 기억하시죠. 용산에서도 “여기 사람이 있어요. 제발 생존할 수 있는 공간만은 허용해주세요.”라고 절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결국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외침 때문에 또 많은 이들이 자책하며 잠 못 이루고 눈물을 흘립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니 알아주기를 원치 않는 이들이야 말로 진정 ‘이 시대의 바보들’이지요. 바로 여기에 ‘우리의 정치’가 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시공간을 함께 만드는 것이 ‘우리의 정치’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공간일 지라도요. 왜냐구요? 말을 못하면 결국 시들어 죽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노무현전대통령이 몸을 던진 ‘부엉이바위’ 또한 그런 공간을 상징하는 것 아니던가요. 그렇기에 거기에서는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치’에 대해 이처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자본과 부당한 권력이 그 애절한 삶의 목소리들에 관심을 보이겠습니까. 사람의 관계를 비용 대비 생산성, 이윤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자본에게 그런 외침은 그저 어느 가을날 무수히 땅에 떨어져 이리저리 구르는 낙엽소리만도 못한 것이겠지요. “비즈니스 플랜들리”를 말하는 이명박정권의 귀에 어찌 그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국가성장동력의 창출이라는 ‘거대프로젝트’를 방해하는 이음(異音)은 그저 빨리 제거해야 할 ‘무능한 인간쓰레기들의 소음’ 정도로만 취급될 뿐입니다. 이제 왜 그들이 죽어가는 사람,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사람들일수록 더 무시하고 몰아붙이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 집니다. 그들은 오직 추가비용으로만 계상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래서 그런가요. 요즘 많은 저널리스트들, 학자들이 ‘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의 관계에 대해 자주 언급합니다. ‘살아 있는 권력’인 이명박정권이 ‘죽은 권력’을 상징하는 노무현정권을 탄압, 조롱하였고 노무현전대통령은 그 상징적 희생양이라는 평가도 들립니다. 물론 이런 대당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것은 주권자를 대상화, 수동화시킨다는 점에서 그 이데올로기의 혐의를 벗어날 없습니다. 왜냐구요? 어떤 사회이건 민주주의를 표명하는 한 ‘살아 있는 권력’은 오직 ‘자기지배를 실현하고자 하는 주권자’에게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가요. 그것은 이들 두 정치세력들이, 언론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민주주의를 대리주의 토대 위에서만 사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모두가 그저 주권자를 투표하는 기계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이라는 대립구도 속에서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살아 있어야 할 주권자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이라는, 즉 ‘집권 엘리트’와 ‘집권하지 못한 엘리트’ 사이의 이런저런 파워게임, 음모와 계략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대당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은 바로 살아 있어야 할 주권자들이 죽어 있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 주권자가 오히려 위임권력에 지배당하고 있는 ‘벌거벗은 주권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줄 뿐입니다.


그렇기에 묻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권력’, 그리고 지금 ‘죽은 권력’이나 과거에 ‘살아 있는 권력’의 지배 속에서 당신은 주권자로서 살아 있었던 적이 있나요. 직설적으로 묻습니다. 과거 노무현정권은 ‘살아 있는 권력’이 아니었나요. 여전히 착취, 수탈, 배제, 억압, 차별의 관계 속에서 고통 받는 무수한 대중이 존재하는데, ‘민주주의의 대강이 완성되었다.’고 말했던 그 노무현정권은 ‘살아 있는 권력’이 아니었습니까.


민주주의, 즉 ‘자기지배의 실현’을 담보해야 할 주권자로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사회의 다양한 관계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온갖 착취와 수탈, 억압과 배제, 차별의 경계를 넘어 나아가는 크고 작은 실천에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선거를 통해 자유주의적 민주정권이 한두 번 들어섰다고 해서 그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있나요. 선거가 민주주의인가요. 오직 보수정치(학)만이 그렇게 역설할 뿐입니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으로 권력이 넘어가 이른바 ‘삼성공화국’이 존재하는데, 그리하여 그것을 문제 삼은 변호사, 기자, 정치인은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는데, 또한 국가권력이 자신들의 오랜 상표였던 중립성의 언술조차 부정하고 ‘비즈니스 플랜들리’를 외치며 자본과 직접 거래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이 시대에, 그리하여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장벽들은 더욱 높아지고 그 와중에 가난한 이들은 저토록 억울하게 죽어나가고 있는데, 아무리 뼈가 빠지게 일해 생산력을 높여놓아도 빈부격차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심해지는데, 그것들을 문제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기지배의 실현’이, 민주주의의 대강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런 썩을 대로 썩어 문드러진 구조들, 관계들을 덮어둔 채, 이른바 깃털인 ‘박연차 리스트’를 들이대며 ‘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들이 도덕성, 법치 운운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본말전도 아닌가요. 이것이야말로 정녕 웃기는 한 편의 코미디 아닌가요.


그렇기에 진정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는 그의 인식,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그가 이처럼 웃지 않을 수 없는 코미디의 주연임을 자임하며 그것을 비극으로 전환시켰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진정 막후의 검은 손들은 엄숙주의로 가장한 채 지금 이 추모의 순간에도 그의 죽음을 앞세워 ‘국가경쟁력강화’니 ‘국민단합’을 외치며 어떻게 하면 대중을 더 착취, 억압할까를 궁리하면서 저렇게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의 재임 시기에 이런 부당한 구조들, 사회관계들이 낳아지지 않았는데, 그의 민주주의는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그 대강이 완성되었다고 말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완성되었다고 말하자마자 그 코미디는 더욱 극단화되었고 그의 민주주의조차 생명력을 잃게 되었으며 바로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그 ‘살아 있는 권력’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도한 해석인가요.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연인 노무현이 아니라 사회관계의 결절점으로서의 노무현정권에 대한 비판자였기에 그 지지자들에게 묻습니다. ‘정치인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과거 그를 지지했던 어느 배우처럼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냐?”고 반문한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저 또한 이 시대의 재산과 교양을 지닌 분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노무현의 직설화법을 좋아했지요. 항상 가난을 끼고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가난한 자들의 고상치 못한 문화, 민중적 부대낌을 여전히 좋아합니다. 문득 정치인 노무현에게서 그런 면모를 볼 때, 그 누구보다도 친근감을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저런 무책임한 발언을 하며 그 누구를 정치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를 정치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타자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를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조금이라도 정치인 노무현에 시선을 준 적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가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는 그 어떤 경계들을 넘어 나아가고자 하였기 때문 아닌가요. 안 그런가요. 그렇다면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그가 그것을 멈추는 순간, 민주주의의 대강이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정치인 노무현을 내팽개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민주주의를 좀 더 진전시키라고 탄핵으로부터 구해주고 그 정치세력을 의회의 다수당으로 만들어 준 것이지 ‘대연정’하라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경계들과 대결하는 것을 포기한 순간 이미 ‘시대의 아이콘으로서의 정치인 노무현’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당치않게도 그의 반연고주의, 반지역주의, 반특권의 정치적 행보가 좋아 지지한다는 사람들이, 그것도 자칭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과거 그와의 인연, 이런저런 회한을 드러내며 추모하는 것을 넘어 그의 죽음을 앞세운 채, 민주주의의 의미를 호도하고 진보세력에게까지 어줍지 않은 ‘분노의 화살’을 돌리는 언술, 행태가 눈에 보이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요. 그와 같은 행태는 추모라는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될, 진정 ‘인간 노무현’조차 죽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것은 최소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의 맹종일 뿐입니다. 그것은 ‘정치인 노무현’을, ‘민주주의자 노무현’을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그를 살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로부터 벗어나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 무엇인가를 버리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진정 민주주의자로서의 그의 어떤 모습을 기억하여 그것을 다시 살리고 싶다면, 그를 추모하는 동안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진정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이을 것인지 성찰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이 지성인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정치인 노무현’을, ‘민주주의자 노무현’을 살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그것은 과거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여기에 가로 놓여 있는 그 어떤 부당한 장벽들, 경계들을 비판하고 그것에 저항하면서 그것을 허물고 새로운 삶의 관계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민주주의는 과거의 경력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의 부당한 관계들을 문제시하고 그것을 넘고자 하는 실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죽은 노무현을 잡고 그를 기억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고통 받는 용산을, 특수고용노동자들을, 이주노동자들을, 소수자를, 수탈 받는 환경과 생태의 아픔을 안고 함께 싸우는 것이 진정 그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민주주의, 즉 자기지배의 실현은 그 어떤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꿈을 투사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들만이 “이제 저를 버리라.”고 한 ‘대통령 노무현’의 말을 제대로 독해하는 사람이고 그를 넘어섬으로써 그를 살리는 참다운 지지자가 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정치인 노무현’이 꿈꾸었을 그 어떤 세상이 진정 특권을 지닌 세력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었다면, 그리하여 “이미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대통령 노무현’의 말이 자신의 개혁을 막고 있던 거대자본과 특권의 힘 앞에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자조와 한탄의 그것이었다면, 그의 꿈은 결코 개혁자유주의자들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과제라는 것을요. 그리고 개혁자유주의자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계’는 오직 그것을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실현되어져 왔다는 역사를 부정하거나 잊지 마십시오. ‘노무현의 꿈’은 열성지지자들인 당신들이 진정한 민주주의자, 진보주의자로 거듭날 때만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정말 잊지 말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을 추모하는 저 촛불이 지금 그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는 용산의 착한 이들과 가난한 자들의 삶 속으로 자연히 이어질 때만이, 진정 ‘이 시대의 또 다른 바보들’과 어깨를 할 수 있을 때만이 그 또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요. 이제 당신들의 몫입니다.


인간 실존의 문제인 죽음은 모든 이들을 슬픔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런데 여기 학살당한 지 130일 넘게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냉동고에 보관되어 있는 용산의 가난한 주검들이 있습니다. 호혜적 삶과 관계를 희구하다 결국 스스로 목을 매 삶을 마감한 특수고용노동자 박종태의 주검이 있습니다. 진정 살아 있는 주권자여야 할 그들은 여전히 자본과 권력에 의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조롱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저편에 한 시대의 정치지도자이자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의 죽음이 있습니다.


차별받지 않는 주검들의 세상을 꿈꾸며 이들 모두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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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5-29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참 글을 쉽고 겸손하게 쓰시는군요. 담아가요

바라 2009-05-30 01:40   좋아요 0 | URL
그럼요. 이유님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비슷하게 느꼈었는데요. 이광일씨의 글은 이번에도 역시 좋네요.
 

  법원이 시민불복종을 재판할 수 있을까?

2009/03/21 23:25 | Posted by 몽똘
'인권연구소 창'이 주관하는 철학과 인권 세미나(http://www.khrrc.org/index.php)에 참여하며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글을 다시 읽고 있다. 아렌트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으로 1, 2차 세계대전을 몸소 겪었고,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말, 70년대 초의 정치상황을 관찰하기도 했다. 아렌트가 말한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라는 개념이 현대적인 인권 개념의 재구성과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다.



아렌트가 인권을 자기 철학의 핵심주제로 다루지는 않았지만(아렌트는 인권보다 시민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이 아렌트의 인권 개념을 비판하며 자기 얘기를 꺼내면서 아렌트의 사상이 자연스레 인권의 주제로 옮겨진 듯하다. 그런데 아렌트의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방식이 아렌트의 사상 전체를 살피고 그 속에서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자연스런 과정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래서 인권활동가나 인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렌트의 여러 책을 함께 읽으며 그 개념의 흔적을 찾아보는 세미나를 하고 있다.

그와 관련해 아렌트가 쓴 [공화국의 위기]를 읽고 있다. 이 책은 60, 70년대 미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인데, 현재 우리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시민불복종'이라는 글에서 아렌트는 당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과 흑인민권운동을 벌이던 시민불복종운동을 다룬다. 아렌트는 어떤 정치적 의견이 공동체 내에서 소통되며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정치라 보고 그런 소통과 관계의 장을 보장하는 것을 권력의 역할이라 봤다.

아렌트는 어떤 사안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을 경계하는데, 가령 양심적 병역거부는 법을 어기는 행위의 정당성을 개인의 양심에서 찾기 때문에 정치적인 사안을 비정치적인 문제로 환원시킨다. 그러다보니 어떤 개인의 양심과 다른 개인의 양심이 충돌할 때(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흑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킹 목사의 양심과 미시시피의 인종주의자의 양심이 충돌할 때), 그 주장은 타당성을 가지기 어렵다. 더구나 그런 양심이 정당화되려면 그 사람이 선과 악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능력은 자연적으로 타고날 수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봤고 그 근거를 양심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서 찾기를 바랬다.


양심적인 거부자와는 달리 불복종 시민은 한 집단의 성원이며 싫든 좋든 이 집단은 자발적 결사를 이루는 것과 같은 정신에 따라 형성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논의에서 가장 큰 오류는 우리가 개인들―그들은 자신을 주관적이며 양심에 따라 사회의 습관과 법에 도전한다―을 다루고 있다는 가정이다.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을 구분하면서 시민불복종을 중요한 정치행위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불복종 시민의 실상은 조직된 소수집단이며, 공동이익이라기보다는 공동의견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고, 정부의 정책이 다수에 의해 지지받을 것을 알 경우라도 그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서리라는 결의를 갖는다. 그들의 일치된 행동은 그들의 일치된 의견에서 나온다.
시민불복종은 자신의 행위가 현재의 법질서를 해치거나 다수의 상식과 반대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여러 시민들이 힘을 모으는 정치행위이다. 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법질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거나 정부가 적법하고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고 음모를 꾸밀 때에, 시민불복종은 변화를 이룰 유일한 수단이다. 아렌트는 당시 미국사회가 이런 상태(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전쟁을 벌이고 정보기관이 은밀히 활약하는)였다고 보고 시민불복종 행위를 미국의 건국행위만큼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미국의 건국행위란 따져보면 식민지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시민불복종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시민불복종은 공개적으로 법에 도전하기 때문에 일종의 딜레마를 가진다. 사회가 유지되고 정치가 이루어지려면 그 경계를 짓는 법이 필요한데, 시민불복종은 그 법의 경계를 넘어서려 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렌트는 법조문보다 법의 정신이 중요하고 준법정신이 입법자의 태도를 가질 때, 즉 내가 곧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자 스스로 그 법에 복종하는 사람(인민주권이라고 해야 할까)일 때 가능하기 때문에 시민불복종이 정당하다고 본다. 특히 새롭게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합의하지 않은 그 사회의 질서에 도전하고 문제를 제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불복종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렌트는 그런 불복종이 약속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람의 행동이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간의 합의와 약속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민은 불복종을 하는 만큼 자신이 시민으로서 따를 수 있고 따라야 하는 것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이 글에서 흥미로운 내용은 시민불복종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법률가들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법률가들은 이런 시민공동체의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인 행동을 개인의 범죄행위로 다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복종 시민을 한 집단의 성원으로 인정하기보다는 법정에서 피고가 될 개인적 범법자로 간주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개인에 대한 정의의 할당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다른 모든 것―피고는 다른 자들과 함께 뜻을 하며 법정에서 그를 진술하려 한다는 여론이나 시대정신(Zeitgeist)―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재판절차의 위풍이다.
법은 법에 대한 불복종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는 시민불복종의 권리가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 권리(결사의 권리)와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치제도는 불복종하는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도록 보장해야 한다. 아렌트는 로비스트들이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시민불복종하는 단체들이 압력단체를 만들어 정부를 압박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헌법 제 1조가 보장하는 결사의 권리가 현실에서 제대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위기에 빠졌다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이런 분석은 지금 한국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이 사회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요즘은 이런 방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자신의 주장을 더이상 받아주지 않는다고 여긴 시민들이 곳곳에서 촛불을 들고 저항하고 있다. 정부는 이 저항을 법으로 가로막으려 하지만 아렌트가 얘기하듯 촛불시민들의 불복종 행위에 대한 판단은 법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정치행위는 기존의 정치질서가 가진 문제점 때문에 비롯된 것이고 시민들은 불복종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위기는 아주 심각하다.

국회의원이나 관료들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들을 자꾸 법원으로 가져가서 해결하려 하는데, 그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법원은 그 의제를 사회와 소통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려 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기에 적절하지 않은 기관이다. 그리고 그 사법적인 판단의 잣대는 이미 낡은 것으로 새로이 나타나는 것을 규정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의 사법계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충원되지도 않고 그 작동과정 역시 민주적이지 않다(최근에는 아예 대놓고 판결에 개입하기도 하니).

아마도 이명박 정부는 이런 정치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게 뻔하다. 시민불복종의 권리는 짓밟히고 그와 함께 결사의 권리,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단체를 자유로이 만들 권리도 무기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어쩌면 이제 저항은 아주 근본적인 수준으로 진행되어야 할지 모른다. 권력이 정치를 포기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때, 저항은 건국행위 수준의 정치행위를 지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단순히 법에 복종하지 않고 정부에 저항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사람들이 맺을 새로운 약속, 새로운 결사들을 만들며, 그들의 국가를 버리고 우리들의 공동체를 조금씩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비폭력 불복종의 정신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터져나와야 한다.

공동체가 무기력하고 정치가 왜곡되었으니 그것을 버릴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 개인으로 흩어지지 말고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정치행위는 국가가 보장하는 시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근본적인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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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9-04-19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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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꼬의 유명론적 인간학







                                                               심재원(서울대)







  『광기의 역사』, 『말과 사물』, 『감시와 처벌』 그리고 『성의 역사』등으로 이어지는 미셸 푸꼬 ( 1926-1984)의 사상 대장정을 철학적 견지에서 살펴 본다면 어떤 모습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까 ? 푸꼬 사상에 대한 이 원초적 질문에, 본고는 그의 사상이 서구 철학사적 전통 내에서 ‘유명론적 인간학’으로 자리 매김되어질 수 있다는 주장을 소략히 전개하고자 한다.




고고학의 이념




  『광기의 역사』에서 1971년의 「니체, 계보학, 역사」까지 푸꼬의 출간된 전저작을 일독하면, 그의 ‘고고학’이 『지식의 고고학』에 이르러 방법론으로서 칸트주의적 ‘비판적 합리주의적 기술론 description critico-rationnelle’으로 귀결하고, 그의 ‘계보학’은 「니체, 계보학, 역사」에서 방금 언급된 ‘고고학’이 응용 발전되어, 모든 사변적 세계관에 맞서는 ‘유명론적 전술 tactique nominaliste’로 전화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여, 푸꼬의 ‘고고학’은 『광기의 역사』의 1961년도 초판 서문에서 이미 언급된 뒤, 『임상 의학의 탄생』과 『말과 사물』에서는 각기 ‘의학적 시선의 ‘고고학’’과 ‘인간 과학의 ‘고고학’’이라는 부제 용어로서 등장함에도, 1966년이 되어서야 푸꼬 자신을 통한 개념 정립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내용인 즉, ‘고고학’은 ‘주어진 시대의 문서고 archive 전체의 총체적 연구 결과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고학 archéologie’은 연구-기술 대상의 ‘기원 archê’을,  그 여타의 것을 가능케 하는 제일 토대적 시원 origine으로서가 아니라, 창시와 변형으로 반복 점철된 상관적 단초들로서 다루는 것이다. 또한, 이 ‘고고학’은 인간 의식을 대상으로 기존의 고고학처럼 은밀히 숨겨진 뭔가를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의 표면 자체를 매개로 하여 인간 사유를 대상으로 그 실제적 제 관계를 탐구 기술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푸꼬 ‘고고학’은, 시대적 문서고의 언문 덩어리들에서 우리가 받아 들이거나, 거부하거나 혹은 변형시키는 것들과 관계하는 제 역사적 조건의 분석과 기술이다. 그런데, 푸꼬 자신의 해명에 따르면, ‘고고학’을 “어떤 특정 형태의 사고를 필연화하는 역사를 가리키기 위하여”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독일 형이상학의 진전』에서의 칸트이다 (『말과 글』1, 1089쪽). 칸트 고고학의 이념은 이성의 원리들과, 이 원리들이 그들 사이에서 지탱하는 상관 관계들의 비판적 합리주의적 추출이다. 이러한 추출에서 기원하는 합리주의적 역사 해석은 역사 현실의 비판적 분석을 수행하는 한편, 경험적 우연의 외양을 가로 질러 선험적 제 필연성을 부상시킨다. 이러한 재구성적 역사 해석은, 이성이 역사를 통괄하고 영유하는, 특히 비판적 이성과 철학사 사이의 상관 관계를 드러내는 것을 이념으로 한다. 정녕, 귀납 명제 형태 속에서 철학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 않고, 시행 착오를 통해 필연성을 담보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귀납적 필연성의 부상émergence과만 관련된 것이다. 모든 선험적 판단이 불확정적인 현실을 지양하는 것이긴 하나, 이러한 판단의 보편성의 토대는 이성 자체에서만 보장되어질 수 있다. 이처럼, 칸트에게서 합리주의적 철학은 비판주의적으로만 고려될 수 있다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논리적 필연성을 고양하는 합리주의적 비판 철학은 그 자체로서 일정한 체계이며, 그러므로 일련의 뒷손질을 통해 구성되어질 수 없다. 이 철학은 자신이 드러내는 합리적 명증성 속에서 자기 이해된다. 이처럼 새로운 철학사가 부상하는데, 이는 이 지점에서 철학사에 고고학적 명료성이 도입되기 때문이다. 즉, 일련의 철학에서 토대적 원리들의 연계와 정합성을 발견하면서 진정하고 혁신적인 명제들을 찾아 내는 것이 고고학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고고학을 도입하는데, 이는 “철학적 철학사”, 즉 경험론적 계승사와는 다르게 합리적 비판주의적 원칙들에 따라 일련의 철학들을 자기 것으로 해낼 수 있는 역사를 그려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총괄컨데, 푸꼬의 고고학은 ‘문서고’의 합리적 비판주의적 분석 탐구와 역사적 기술로 총괄적으로 개념 규정될 수 있는데, 문서고는 일정 시대에 주어진 사회와 연동되어, 결정적으로 부상하였을 일군의 현실적 사태들로서뿐만 아니라, 작동하며 자기 전화하고 다른 담론들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일군의 실제적 언표로서 투사되는 일단의 담론을 가리킨다.

  이러한 담론의 고고학을 푸꼬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사상사와 분별하며 그 용법을 제시하는데, 네 가지 원리적 분별점이 중차대한 것으로 제시된다. 첫째 용법은 본원적 담론과 이의 반복된 파생물 사이의 가치상 위계 서열을 거부하는 것인데, 이로써 고고학은, 일정 담론의 실제적 출현을 조건짓는 언표적 규칙성을 세우는 데에 주력한다. 문서고를 성격 지우는, 이 규칙성은 본원적 담론에 따라 여타 파생물에 처음 한 번에 결정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유일한 시원적 담론의 독창성으로부터 총괄적 파생 원리를 찾지 않고, 총체적 시대 구분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 고고학에서는 중요하다. 둘째로, 제 모순은 고고학상 그 자체로서 차별적으로 기술되어야 할 항목들이다. 총괄적 일원론적 모순 전개에 고고학은 다원적 모순들의 개별적 형태, 수준 그리고 기능의 분석을 대체한다. 셋째로, 고고학은 제 담론을 비교 대조할 적에, 대상 담론들을 동시성에선 맞세우고, 시간성에선 차별 지우며, 비담론적 실천성에 특정적으로 관계 지운다. 이러한 고고학적 비교 대조는 항시 제한적이며, 제 담론의 다양성을 갖가지 형태로 그려 내기를 의도하기에, 그 효과는 승수적multiplicateur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전형transformation의 탐지와 관계해서는, 제 담론의 뚜렷한 공시성이 중요하다. 따라서 고고학은 시간적 연속을 정지시킨다. 그런데, 이 연속 정지의 목적은 제 담론의 시간성을 성격짓고 이를 계열화하는 제 관계를 부상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정지되는 것은 최초의 분리할 수 없는 연쇄로서의 연속이라는 테마와 담론은 단 하나의 형태와 단 하나의 연속 수준을 갖는다는 테마이다. 이들 테마에 고고학은 다양한 형태로 포개진 연속과 특정한 연속들의 연접 양식을 둘 다 부상케 하는 분석을 대치한다. 또한, 고고학은 ‘차이’를 단순화 시키길 거부한다. 따라서, 차이의 고고학은 가능 사태들로부터 수다한 담론 수준을 구분해 내며, 변동에 대한 무차별적 준거에 제 전형의 분석을 대체하고, 반복자 (동일자, 연속자)가 어떻게 분산자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동일 조건과 규칙을 따라 실제로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고려하는데, 이 경우에 단절rupture은 한정된 실제성들 사이에서 상당수의 개별적 전형에 의해 특정화되는 불연속을 의미한다. 상기된 용법을 요약컨데, 푸꼬 고고학은 개별적이기 보다는 구조 체계적 독창성을 강조하고, 일괴암적monolithique 모순보다는 차별화된 제 모순을 선호하고, 승수 생산적 비교 대조를 강조하며, 불연속의 제 전형을 우선시 하는 용법으로써, 문서고의 비판적 합리주의적 탐구와 기술의 실천적 방법이다.




계보학의 전술




  은사 이뽈리뜨Hyppolite에게 극적으로 헌정된, 「니체, 계보학, 역사」는 거의 모든 테마에 걸쳐 헤겔의 사변적 역사 철학에 맞서는 푸꼬의 선전 포고이다. 이 ‘계보학 선언’으로 푸꼬는 모든 순수 이론적 사변 철학에 맞서는, 자신의 고고-계보학적 입장을 결정적으로 취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위 소론에 의거하면, 푸꼬 계보학은 방법으로서의 고고학과 상보적으로 역사에 적용되면서 내성적 방법으로서라기 보다는 논쟁적 입장으로 본격적으로 전화하기 시작한다. 이미 『담론의 질서』에서, 이 두 접근 방식은 결코 완전히 분리 가능한 것이 아니었고, 양자의 “차이는 완전히 대상이나 영역에 관한 것이 아니라, 타격점이나 투시각 혹은 경계선에 관한 것”(68쪽)이었음에도, 구심성의 고고학은 특정 담론의 형식적 영유를 중심으로 그 형성, 요구, 이전, 제약, 전환 등등의 내적 인과율을 보여주려 하는 것으로 기술되었던 한편, 원심성의 계보학은 제 담론의 외부적 실제 형성과 관계되었다. 이제 「니체, 계보학, 역사」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니체의 철학 사상을 푸꼬가 모든 순수 이론적 사변 철학에 맞서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본격적으로 영유 해석하는지를 보여주는 ‘계보학 선언’이자 ‘반 절대 이성주의 선전 포고’이다.

  내용인 즉, 푸꼬 계보학에서는 고증주의적positiviste 박학 다식의 문서 준거적 세밀함을 요구하는 사태적 단독성 singularité들을 탐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로써 계보학은 본질적 기원을 찾는, 이상주의적이고 목적론적인 메타역사(철)학에 맞서는데, 계보학자는 사물의 본질은 어떤 실체도 없이 하나  하나씩 구성된 것이라 본다. 이러한 계보학자에게, 장엄한 본질적 기원은 모든 사물의 창시에 그 값진 가치와 본질적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사변적 형이상학의 덧새싹surpousse일 뿐이다. 사물의 단초는 하찮고 우연적이라는 의미에서 계보학적으로 ‘낮은’ 것이다. 따라서 계보학을 한다는 것은 낮은 역사적 단초들의 불확정적 놀이에 세밀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원’보다는, ‘출처 provenance’와 ‘부상 émergence’이 계보학의 고유한 대상이다. 사실, 자발적 생성들의 내재적 발원지로서의 ‘출처’의 분석은 일괴암적 이상체 아래에서의 제 사태의 확산에 주목하는데, 이로써 우리의 존재와 인식에는 초월적 진리와 존재가 아니라 표면적 사건들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지나간 사태들을 이들의 고유한 우발적 분산에서 재취하고자 한다. 다른 한편, 힘 puissance의 분출로서의 ‘부상’은 국지적 출현의 단독성을 가리키는데, 이와 관계해서 목적론적 종말은 항시 현재적인 기세의 일련의 무한 연속의 한 최종 국면일 뿐이다. 부상의 분석은 따라서 힘들이 다양한 정황에서 서로 서로 반발하는 우연의 놀이를 보여준다. 이 부상의 세계는 폭력의 규칙의 세계이며, 지배의 놀이를 끊임없이 재발진시키는 것이 이 폭력의 규칙이다. 이처럼, 인류 역사는 단계별로 점진적으로 영구 평화로까지 진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놀이의 각 규칙에 폭력을 각인해나가면서 지배에서 또다른 지배로 계속된다. 이러한 갖가지 역사적 부상은 한 의미 전체의 승계적 전개가 아니라, 수다한 정복, 이전, 반전, 대체 등등의 역사적 효과의 결과이다. 계보학은 이러한 효과들의 역사이며, 이들을 지배적 힘의 불확정적 무대에서 단독적 사태들로서 부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출처와 부상의 실제 역사는 어떤 초월적 실체에도 의거치 않으면서, 현존재 각각의 그 역사적 온전성에 내생적 불연속을 도입한다. 이 역사적 힘은 어떤 목적지도 어떤 기계성도 없이 상호 투쟁의 우연성만을 갖고, 실제 역사는 가장 가까운 것의 형성과 변형과 관계하여 사태 각각에 그의 척도와 강도를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계보학은 따라서 투시적 시선이며, 당파적 장치이자, 치료적 지식이다.




미시 권력과 통치성




  상기한 고고-계보학을 바탕으로 푸꼬는 1970년대에 권력의 문제 연구에  주력하는데, 그 문제 의식은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로 굴절된 전통적 법률-경제주의적 권력관의 극복이다. 근대 사회 계약론에 뿌리를 둔, 이 경제주의 권력관의 내용은 ‘권력은 우리가 재화처럼 소유자일 수 있고, 따라서 법률적 계약 행위에 의해 이전커나 양도할 수 있는 권리이며, 이러한 계약 거래의 법률 행위를 모델로, 모든 개인이 보유하고, 정치적 주권 권력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양도가 가능한 것이 권력’이라는 것이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4쪽) 그런데, 푸꼬는 비법률-경제주의적 권력 분석을 하기 위해, 니체의 계보학을 권력 이론에 적용해서, 권력을 사회 계약론의 모델 바깥에서, 법률적 주권과 국가 제도의 한정된 장의 외부에서 연구하면서, 지배의 기술과 전술로 부터 분석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하에, 『감시와 처벌』에서 기율discipline로 상징되는 푸꼬의 미시적 사회 권력론이 이해되어야 한다.

  이 미시적 사회 권력론을 살펴 보면, 푸꼬는 17-18 세기 서구 사회에 기존의 법률-경제주의적 전근대적 군주 권력 장치와는 다른 권력 기제가 새로이 부상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기제가 ‘기율’이다. 이 새로운 권력 기제는 신체와 신체가 행하는 것을 우선 대상으로 하고, 신체의 노동과 동작 시간을 추출하며, 지속적 감시와 처벌을 통해 행사되는데, 물리적 강제의 미세한 분할 경계망을 조건으로 하면서, 예속된 생산력과 동시에 예속하는 강제력의 효과의 극대화를 작동 원칙으로 하고 개인화를 동반 효과로 하는 ‘전면적 사회 통제’이다. 푸꼬에 따르면 사실, 권력은 편재하는 것으로서 결코 누가 쥐거나 누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어떤 개인에게도 어떤 집단에게도 속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서, 분산, 연계, 네트워크, 상호 받침대, 잠재력 차이, 편차 등등이 있는 경우에만 있는 것이다. 미시 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대상으로 상정하는 지점에서, 권력은 기율적 권력으로서 일정 정도 말단의 모세망이자 최종적 연계 양태인데,  이에 의거해서 일반적 정치 권력이 최종 수준에서 신체를 건드리고 몸짓, 행태, 습관, 언행, 태도 등에 간섭하면서 개인의 신체 자체를 표적으로 하향 집중하며 “두뇌의 무른 섬유질”에 작동, 변형, 지도 등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율적 권력은 개인의 신체, 몸짓, 시간, 행태 등의 철두 철미한 총체적 장악인데, 한편으론 기율이 자기 검열의 습관이 될 때까지 감시와 처벌의 항시적 통제 절차를 함축하며, 다른 한편으론 기율의 증가와 완벽화를 시간적 척도를 따라 세밀화할 점진적이고도 등급화된 반복 수행을 통해 그 효과가 보장된다. 부연컨데, 이러한 기율 체제는 저절로 진행되도록 적용되는 것인데, 최고의 감독자도 개인화되고 대치 가능한 ‘기능’으로서 보다 방대한 체계 안에서는 기율화된 자로 나타난다. 기율적 권력은 예속된 신체들을 만들어 내고, 신체에 기능-주체를 정확하게 고정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기율은 권력 관계에서 개인을 표적, 동반자 그리고 상대자로서 구성하는 권력의 단말적 모세 형태이다. 그런데, 푸꼬의 이러한 미시 권력론은 작동 권력이 전략적 관계로서 이해되고, 그 파급 효과가 조처, 조작, 전술, 기술, 기능 등에 할당되며, 그 속에서 항시 긴장되고 활동적인 관계망을 우리가 식별해낼 것을 전제한다. 기율적 권력은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격려나 금지로서 피지배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직위를 부여하며, 이들을 통과하고 관통하며, 이들에 의거한다. 이러한 권력 관계가 수없이 많은 대결 지점과 불안정한 진원지를, 각각이 모두 세력 관계의 최소한 과도적인 갈등, 투쟁, 역전의 위험 부담을 포함하면서, 가로 지르며, “신체 동작의 섬세한 통제를 가능케 하며, 그 힘의 항상적 예속을 보장하고, 신체 동작에 온순함-유용성의 관계를 강제하는” 것이다. (『감시와 처벌』, 139쪽)

  이렇듯, 권력의 분석의 진입로가 지배 관계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자명하다면, ‘어떻게 지배 관계를 분석하며, 세력 관계의 개념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라는 문제 의식에서 푸꼬는 ‘정치는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되는 전쟁’이라는 담론에 주목하며 이를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역사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이 담론은, 관습적으로 취해지는 철학-법률적 담론과 상당히 다른, 사회에 관한 역사-정치적 담론인 동시에, 영구적 사회 관계, 모든 권력 관계와 제도의 지울 수 없는 심층으로서의 전쟁에 관한 담론이다. 이 ‘전쟁의 담론’의 내용인 즉, ‘철학-법률적 이론과는 상반적으로, 정치 권력은 전쟁이 그쳤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전쟁이 국가의 탄생을 주재했고, 권리, 평화, 법률은 전장의 피와 진흙에서 태어난다. 법은 평화화가 아닌데, 그 아래에서 전쟁이 모든 권력 기제의 내부에서 계속 맹위를 떨치기 때문이다. 전쟁이 법, 제도, 그리고 질서의 숨은 동력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서로에 맞서 전쟁 상태이다, 전선이 사회 전체를 지속적으로 영원히 가로지르고, 우리 각자를 어느 한 진영에 위치시키는 것이 이 전선이다. 중립적 주체란 없다. 각자는 강제적으로 누군가의 적이다. 그리고 이 전쟁을 설명 원리로 되찾는 것으론 충분치 않고 재활성화해서, 승자가 되기 위해 준비해야만 하는 결정적 전투에까지 끌고 가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주권과 법의 문제에 따라서 정열되는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철학-법률적인 담론에 반하여, 사회에서의 투쟁의 영구성을 해독하는 '전쟁의 담론'은 본질적으로 역사-정치적인 담론, 당파적 승리를 위해 진리가 무기로서 기능하는 담론이라는 사실에 푸꼬는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권력을 논함에, 푸꼬는 일정 국가에서 국민의 복종을 보장하는 제도와 장치 전체로서, 폭력에 반하여 규칙의 형태를 띨 예속의 양상으로서도, 또한 일 구성원 혹은 한 집단이 행사하며 그 파급 효과가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일반적 지배 체계로서도 권력을 다루지 않는다. 이로 부터, 푸꼬의 권력 분석은 국가 주권, 법률 형태 혹은 단일한 총괄적 지배를 출발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 그는 권력을 “행사되는 영역에 내재하고 조직적으로 구성되는 제 세력 관계의 다양성, 부단한 투쟁과 대립을 통해 제 세력 관계를 변형, 강화, 역전시키는 놀이, 이러한 세력 관계가 연쇄나 체계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서로 서로를 발견하는 지지대들, 혹은 정반대로 서로 서로를 고립시키는 제 편차와 제 모순, 제 세력 관계가 그 속에서 효과를 갖고 전반적 구도와 제도적 결정화가 국가 장치들, 법률의 정식화, 사회적 헤게모니들 속에서 구체화되는 전략들”로서 이해한다. (『성의 역사 1』, 121-2쪽) 따라서, 푸꼬는 ‘유명론’적 접근 방식을 시사하는데, ‘권력은 제도도, 구조도, 혹자에게 부여될 특정 역량도 아니며, 일정 사회에서 복합적 전략 상황에 부여되는 이름이다’. (상동, 123쪽)

  따라서, 「주체와 권력」( 1982)에서 푸꼬가 “권력이란 어떻게 행사되는가 ?”의 문제에 우선 집중하는 것은, 실체론적이고 기원론적인 질문 “권력이란 무엇인가 ? 권력은 어디서 오는가 ?” 앞에서 무한정 답보 상태일 때 우리가 일군의 상당히 복합적인 권력 현실태를 놓치진 않는가를 자문하기 때문이다. 푸꼬가 분석하는 권력의 특성은 개인이나 집단의 역량 자체가 아니라 이들 사이에서의 제 관계를 문제시 한다는 것인데, 이처럼 ‘권력’은 ‘상대자들 사이에서의 제 관계’를 가리키고 이 관계는 서로 서로 유인하고 반응하는 일군의 비상징적 ‘행위’가 염두에 두어진 것이다. 고로, 권력의 행사는 단순히 ‘상대자들 사이에서의 관계’가 아니고, “특정자들의 여타 특정자들에 대한 행위 방식” (『말과 글』2, 1054-5쪽)으로서의 그것인데, 이는 물론 영구적 제 구조에 의지하는 분산된 가능성의 장에 포함될지라도 권력은 행위로서만 현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권력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타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고유한 가능하거나 현실적인, 미래나 현재의 행위에 작용하는 행위 방식’이다. (상동, 1055쪽) 이러한 권력 관계는 “응당히 권력 관계가 되기 위해서 자신에 불가결한 두 구성원에 연결되는데, 권력이 행사되는 타자가 끝까지 행위 주체로서 인정되고 유지되면서 가능한 반응, 반작용, 효과, 창안의 한 마당 전체가 권력 관계 앞에 열리는” 것이다. (상동) ‘인도conduite’의 푸꼬적 용법이 이러한 권력 관계의 특수성을 보다 잘 포착토록 하는데, ‘인도는 타자들을 이끄는 행위인 동시에 다소간 열린 가능성의 장에서 처신하는 방식’이다. 심층적으로 말하여, 권력은 이제 “두 적 사이의 대립이나 일자의 타자에 대한 앙가주망engagement의 차원이라기보다는 ‘통치gouvernement’의 차원”이다. (상동, 1056쪽) 이 ‘통치’의 개념은 정치 구조와 국가 경영만이 아니라, ‘개인이나 혹은 집단의 행위를 이성적으로 이끄는 방식’을 가리킨다 : “권력에 고유한 관계 양식은 따라서 폭력이나 투쟁의 측면에서도 아니고, (끽해야 이의 도구만이 될 수 있을 뿐인) 계약이나 자발적 유대의 측면에서도 아닌, 통치라는 — 전쟁적인 것도 아니며 법률적인 것도 아닌— 단독적 행위의 양식의 측면에서 찾아져야 한다.” (상동) 이런 고려하에, 푸꼬는 —혹자가 타자의 행위를 결정하려 하게끔 하면서, 이에 타자가 그의 행위가 결정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하거나 역으로 상대자의 행위를 결정하려 하는— 자유 행위의 전략적 놀이와 통상적으로 권력으로 불리우는 지배 상태를 구분하고, 이 양자 사이에 통치적 기술을 배치한다. 따라서 그의 권력 분석틀에는 세 가지 차원: 전략적 관계, 통치의 기술 그리고 지배 상태가 있다. 또한 통치성gouvernementalité을 매개로 한, 권력 관계의 이성성rationalité은 복합 다중적이고 다양한 형태를 가지며 가족 관계, 일정 제도 내부, 행정 경영,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 등에서 작동하는데, 흔히 이러한 통치성의 이성적 기술을 통하여 제 지배 상태가 설정되고 구현된다. 그런데, 이처럼 권력을 연구함에, 푸꼬는 정치적 권력론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그의 문제틀이 주체의 구성과 이성성의 기술이 둘 자체 사이에서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인 차원에서 이 관계의 결정 요소의 하나로서 권력 관계를 분석하려 한 것이라 말년에 회고했다. 사실, 인간은 그에게 행사되고 그가 타자에 행사하는 “일정 상당수의 권력 관계를 통해 주체로서” 구성된다. 그리고 “나는 권력 이론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한 것”이라고까지 그는 자신의 권력론 작업을 압축 정리했다. (상동, 1269쪽)




역사 유명론의 계보학




  사학자 베인느 Veyne는 「푸꼬가 역사를 변혁한다」(1978)는 논문 서두에서 푸꼬를 “완성된 역사가, 역사의 완성”이라 극찬하며 ‘최초로 완벽한 고증주의자, 유명론자, 다원주의자 역사가’로 규정하였다. 이에 대해 푸꼬는 자신의 역사 작업에서 “나는 역사적 보편자와 역사에서 유명론적 방법을 시험해야 할 필연성에 관한 폴 베인느의 사색에 의지” (상동, 819쪽)했고, “폴 베인느가 잘 봤다: 역사적 분석을 통해 그 자체로 표명되는 유명론적 비판의 역사적 지식에 관한 제 효과가 중요하다” (상동, 853쪽)라고 호응했다. 베인느의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1971)에 따르면, “역사는 과학이 아니고, 과학으로 부터 기다릴 것이 많지 않으며, 역사는 설명치 않고 방법이 없다” (10쪽). 달리 말하여, “역사 설명은 어떤 원리에도, 어떤 영구적 구조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데, 모든 개별적 사건intrigue이 자신의 단독적 인과 장치를 갖기 때문이다.” (149쪽) 과학적 설명에 맞서, “역사는 일어난 것의 단순 기술로 나타나며, ‘어떻게’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할” 뿐이다. (222쪽) 이처럼, 역사는 사실적 진리만을 찾을 뿐이며, “증거 자료 documents에 의한 인식”이다 (15쪽). 이처럼, 유명론적으로, “모든 분류 개념은 잘못된 것인데, 어떤 사태도 어떤 다른 사태와 유사치 않으며”, “존재와 동일성은 추상에 의해서만 있을 뿐인데, 역사는 구체자만을 알려할 뿐이기” 때문이다. (184-5쪽) 그래서 역사에서 “항시 변화하는 진리와 항시 시대와 불일치하는 개념들 사이에서, 개념과 범주는 끊임없이 재편되고, 어떤 기정 형태도 갖지 않으며, 자신들의 대상의 현실에 맞춰 모델화되어야 한다” (190쪽). 실제, 푸꼬에 있어서, 대상은 사람들이 행하는 실천의 상관 요소일 뿐이다. 따라서, ‘푸꼬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실천’이라 불리는 새로운 심급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의 실천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는 모든 역사가들이 말하는 것, 즉 사람들이 행하는 것 이외의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모호하고 고상한 용어로 말하는 것 대신에 정확하게 말하고, 첨예한 윤곽을 기술하려 할 뿐이다’ (397쪽). 그 결과, “낱말로 부터 사물을 판단하도록 권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푸꼬는 정반대로 낱말이 사물, 자연 대상, 피치자들 혹은 국가의 현존을 믿게끔 하며 우리를 속이며, 이러한 대상들은 상응하는 실천들의 상관 요소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398쪽). 사실, 그의 고증주의적 역사 분석은 역사에 형이상학적인 실체도 본질도 없으며, 단지 일어난 제 실천의 상관 요소들만이 있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상관자들만이 존재하기에, 그는 실천 자체가 아니라 행위, 사태 그리고 여타 상관자들을 논의 대상으로 하는데, 이는 그에게 대상 자체, 즉자, 추상 일반 등은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푸꼬의 철학은 따라서 ‘고증주의적 유명론’이다. 또한, 베인느가 시사하듯이, 푸꼬의 역사-철학의 인식론적 근본 문제는 ‘경험 대상들의 초역사적 실재성을 부인함과 동시에, 이들이 단순 기술 대상으로서의 주관적 허구가 아닌, 객관적 설명 대상으로 남기 위해선 이들에게 합당한 객관적 실재성의 여지를 남겨야 한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푸꼬는 이 어려운 문제를 관계의 우위성의 니체 철학으로 해결하는데, 사물은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 이 관계의 결정이 사물의 설명 자체” (413쪽)이기에, 그의 유명론은 ‘반 질료-형상설적 실체론의 ‘관계의 존재론’’이다.

  실제 『생정치biopolitique의 탄생』에서 보이듯, 그의 “통치적 실천”의 연구는 유명론적 방법 선택을 명시한 것인데, 그는 “통치적 실천을 말하거나 이에서 출발하기를 선택함에, 이는 물론 시초적이고 시원적이며 완전히 주어진 대상으로서의, 예를 들면 군주, 주권, 인민, 신민, 국가, 시민 사회와 같은 이 일정 다수의 개념들을 아주 분명한 방식으로 등한시하는 것” (4쪽)이라 말한다. 달리 말하여, ‘그 구체적 제 현상을 연역키 위한 혹은 일정 다수의 구체적 제 실천에 대한 강제적 이해 격자로서의 보편자들로부터 출발하는 대신에, 구체적 실천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실천의 격자로 보편자를 걸러 내려한다’는 것이다. (상동) 주지하듯이, 유명론자 오캄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거하면서 보편자가 존재적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Z, 13은 유와 종, 즉 보편자가 실제로 존재함을 분명히 부인함에도, 프레데M. Frede에 의거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적 대상들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치 않으며, 이것은 고두Goddu에 의해 설파된 오캄의 ‘개별적 자연 경험 대상만이 실체적 존재’라는 질료-형상설적 개체 존재론과 그의 존재론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레데의 논의의 일단을 요약컨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진정한 존재로서 궁극적으로 실체인 것은 형상이며, 이 형상은 자신의 동일성을 변화를 가로질러서도 유지하는 존재자의 구성 기능 역량이다. 이러한 탈 질료-형상주의의 역량적 존재 개념관과 베인느 자신의 역사 유명론의 존재론적 토대에 관한 언급 (상게서, 153쪽)은 플라톤의 『소피스테스』247d-e의 ‘뒤나미스dunamis’에 의한 존재ousia의 정의를 주목케 하는데, 이 뒤나미스는 ‘능동과 수동의 힘puissance d’agir et de pâtir ’으로 개념화될 수 있고, 이 ‘힘’의 형이상학의 전통의 궁극적 최근 담지자가 니체의 ‘힘에의 의지’ 개념과 이를 매개로 한 푸꼬의 ‘미시 권력’ 개념이다. 하이데거와 뮐러-라우터 그리고 누구보다도 니체 자신이 잘 보여 주듯이, 매 단계에 다다른 자신의 정도degré를 제어하며 행사되고 성장할 뿐이라는 힘의 구조화되고 유일한 본성을 가리키기에, 힘에의 의지는 힘의 강화와 증대인 한에서만 힘이고, 세계의 모든 동력은 힘에의 의지인데 이 힘의 본성은 모든 운동자 사이에서의 관계에서 실현된다. 이러한 힘의 통일성은 세력의 영역에서의 어떤 조직화를 의미할 뿐인데, 이러한 조직 내에서의 힘의 끓는 변전들이 한 운동자의 다수 운동자로의 분리 혹은 다수 운동자의 한 운동자로의 집중을 초래한다. 바로 이것이 힘에의 의지의 개별화individuation인데, 이러한 맥락에서 ‘개체’는 참으로 존재하기는 하나, 힘에의 의지의 재생산된 ‘개체성’으로서 각별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뒤나미스로 인해, 개체 자체는 질료-형상설적 유명론의 최후의 형이상학적 그림자로서 명목화된다. 근저에서 바라보면, 이 질료-형상의 개체는 개별적, 개별화된 혹은 개체화된 뒤나미스에 주어지는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론적 차원에선, 오캄조차도 완전히 유명론자가 아니다. 그는 보편자 논쟁의 맥락에서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형이상학의 질료-형상설적 전통을 유지하면서 보편자들을 명목화하는 데 만족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뒤나미스 관계의 유명론’의 관점에서, 일단의 실정적 개별자들이 “역사가 그 개별적 정황으로 인해 상당수의 변화를 가져 올 보편자들로서” 분석될 수 없음에, 이러한 실정성의 분석에서 다시 취해야 하는 것은 테마적으로 독자적인 개별성들으로서의 “제 순수 단독성singularités pures”이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50쪽). 유명론의 고고 계보학은 이제 방법론적으로 ‘어떠한 토대적 의지점, 어떠한 순수 형상으로의 도피처도 없는 순수 단독성들의 내재성의 장에서 단절, 불연속성, 단독성, 순수 기술, 부동의 도판, 무설명, 무횡단’을 재확인한다. (상동) 사실, ‘가용성acceptabilités의 제 단순 조건’에 연관되는 순수 단독성들이 의미를 가지는 한에서, “이 단독성을 효과로서 고려하는 복합적이고도 촘촘한 인과망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서 단독적 실정성을 명료화하는 연관 짓기, 상호 작용과 순환 작용의 독해 그리고 혼성 과정의 증대의 고려의 필연성이 유래한다’. (상동) 요약컨데, ‘다양한 결정 요소들로 부터 단독성이 효과로서 나타나는 그 출현 조건을 재현’하는 것이 유명론적 고고 계보학에서는 중요하다.




비판주의의 인간학




  『말과 사물』(1966)에 따르면, ‘인간’은 18세기말에 서양 지식의 장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근대 인간학의 모든 안이함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두 세기가 되지 않은 최근의 고안물이며 인류의 지식이 새 형태를 찾게 되자마자 사라질 것이라 푸꼬는 예측하였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분석학으로서의 인간학은 근대 사상에서 구성적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경험적 종합이, ‘코기토 cogito’의 주권이 인간의 유한성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는 지점 너머에서, 보장될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칸트가 『논리학』에서 세 가지 질문 (무엇을 알 수 있는가 ?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을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최종 질문으로 총괄적으로 수렴하며 정식화하였다. 이 질문은 19세기 이래로 경험적인 것과 초험적인 것을 ‘혼동’하며 사상사를 완주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푸꼬는 ‘인간학적 졸음’이라 지칭하였다. 이처럼 (분석적) 인간학은 칸트 이래로 지금까지 철학 사상을 지휘 향도한 토대 규정이었을 것이나, “우리 눈 앞에선 분열되고 있는 중”이다. (352쪽) 따라서 푸꼬에겐, “인간은 인간 지식에 제출된 가장 오래되지도 않고 가장 항상적인 문제도 아니다.” (398쪽) 사실, 16세기 이래 유럽 문화를 살핀 연후, 푸꼬는 ‘‘인간’이 여기에서 최근의 고안물임과 그의 임박한 종말’을 단언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죽음’을 언급하며, 그는 “이 죽음을 우리 시대에 진행중이었던 뭔가로 제시하며 내가 틀렸다”고 자아 비판한다. (『말과 글』2, 894쪽) 자신이 두 측면을 혼동했다는 것인데, 그 첫째는 ‘인간이 자기 고유의 주체성을 변형 개입했던 경험으로서의 인간 과학에서, 그의 약속이 인간의 발견이었다면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나, 종합적 문화 경험으로서의 이 과학은 인간 주체를 인식 대상으로 환원하며 새 주체성의 구성과 연관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측면은 ‘역사상 인간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이전하면서 다양하고, 결코 끝이 없으며, 인간일 그 무엇으로 결코 자기 규정을 하지 않을, 일련의 무한하고 수 많은 주체성 속에서 자기 구성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며, ‘인간의 죽음’을 말하며 이 두 번째 측면을 말하려 했던 것이라고 푸꼬는 결론 짓는다. ‘인간’의 ‘지성사적 죽음’의 ‘주체학적 부활’로서의 인간학적 복귀를 푸꼬는 이렇게 스스로 추인한 것이다. 돌이키건대, 그는 ‘통치’라는 새 문제틀을 제시함에, ‘결코 정치 구조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다. 통치 대상은 사람들, 인간들, 개인들 혹은 그 집합체들이다. 사람이 통치하는 것은 애초에 근본적으로 사람이다’라고 명시하였다. (『안전, 영토, 인구』, 126쪽) 이렇듯 ‘통치’의 문제틀을 새로운 정치-사회 분석틀로 제시함에, 『안전, 영토, 인구』와 『생정치의 탄생』곳곳에 걸쳐 푸꼬는 인간과 그 인간학적 파생 개념들 (민중, 인구, 경제의 인간homo œconomicus)과 접근 방식을 가지고 ‘통치성’의 역사 유명론적 분석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렇듯 역사 유명론적 기술로서, 인간학적 주제 의식을 가지고 고고-계보학을 하는 것은 푸꼬 자신이 인정하듯 칸트의 비판주의 전통에 입각한 것이다. (『말과 글』2, 1450쪽) 푸꼬는 이 전통을 제한적 자세attitude limite로서의 철학적 에토스로 성격 규정하는데,  비판은 “한계들의 비판이자 이것들에 대한 사색”이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 상동, 1393쪽) 칸트의 질문이 인식의 한계에 관한 것이었다면, 푸꼬의 질문은 이를 현재화하여 “고증적 질문 : 우리에게 보편적, 필연적, 의무적으로 주어진 것들에서 무엇이 단독적이며 우연적이고 임의적 제약에 의한 것의 몫인가”로 역전하는 것이다. (상동) 즉, 푸꼬의 ‘비판’은 ‘보편적 가치를 갖는 형식적 구조의 연구가 아니라 우리를 주체로서 구성 확인토록 하는 사태들을 통한 역사적 조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비판은 칸트에서처럼 초월적이지도 않고 형이상학 정립적이지도 않은데, 그 목적성에 있어서는 계보학적이며 방법에 있어서는 고고학적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을 동일한 정도의 역사적 사태들로 결합하는 담론을 다루려” 한다는 의미에서 고고학적이고, “우리를 우리인 것이게끔 한 우연성에서, 우리이거나 우리가 행하거나 생각한 것을 더 이상 우리이거나 우리가 행하거나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을 끌어낸다”는 의미에서 계보학적이다. (상동) 이런 맥락에서, 비판은 모든 실제적 변화에 “절대적으로 불가결하다”고 푸꼬는 지적하는데, “동일한 사고 양태에 머무는 변화, 동일한 생각을 사물의 현실에 보정하는 방식일 뿐인 변화는 피상적인 변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상동, 999-1000쪽) 분명,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은 사회, 정치, 경제와 역사에, 그러나 또한 보편적인 범주들과 형식적 구조들에 연계되어 있음에, 사고와 사회 관계는 아주 별도의 것으로 논리학의 보편적 범주들은 사람들이 실제로 생각하는 방식을 적합하게 고려하기에 안성맞춤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동, 1597쪽) 따라서, 사회사와 사고의 형식적 분석 사이의 좁은 길인 “사고의 비판사 histoire critique de la pensée”로 푸꼬는 자신의 작업을 명명하였고, “자신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역사의 한 개별적 시기에 만들어진 특정 주제들을 자명하고 진리인 것으로 취하고 있으며 이러한 부당한 자명성은 비판되고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상동)이라 하였다. 이로써, 철학과 역사 사이에, 역사 철학의 구성도 아니며 철학적 역사 서술도 아닌 형태의 관계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는 “역사에 관한 사색”이 아니라 “역사 속의 사색”으로, ‘사고를 역사 작업으로, 또한 반면에 역사 작업을 개념적 이론적 틀의 변형으로 시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동, 1232쪽) 이와 같은 실천적 제 경험의 역사적 반성은 자신의 초기 기획에서 “‘경험’ 개념의 정교화의 이론적 불충분성과 이 개념의 실천과의 관계의 모호성”으로 인해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고 푸꼬는 회고한다. (상동, 1398쪽) 이에, 첫째 난점은 일반적 인간론에, 둘째 문제는 사회 경제적 연구에 의거하는 철학적 인간학과 사회사 사이의 딜레마의 곡예를 하느니, “경험 제 형태의 역사성 자체를 사고”하는 것이 “철학적 인간학과 이에 기댈 수 있는 제 개념의 유명론적 환원과 사회사의 영역, 개념 그리고 방법으로부터의 탈구”라는 비판적 방식을 거쳐, “경험 제 형태의 형성, 발전, 변형이 일어날 수 있는 영역, 즉 사고사 histoire de la pensée를 오늘화”하는 작업으로서 가능케 되었다고 한다. (상동) 이 고고-계보학의 부단한 현재화 작업은 “진실과 허구의 놀이를 다양한 가능 형태들 속에서 세우고, 따라서 인간을 인식의 주체로서 구성하는 것, 규칙의 수용이나 거부를 토대 짓고 인간을 사회적 법적 주체로 구성하는 것, 자기 자신과 타인들과의 관계를 세우고 인간을 윤리적 주체로서 구성하는 것” (상동)으로서의 역사 비판주의 유명론의 인간학이다. 푸꼬는 예속되는 수동자이자 자기 주체화의 능동자로서 유명론으로 파악된 인간을 연구함에,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실체로서의 주체는 없는 것이며, 예속적 제 실천 혹은 보다 자율적인 자기 배려에 의해 구성되는 제 관계 형태로서’ (상동, 1552, 1537-8 쪽) 주체를 파악하기에, “인간에 관해서만 이제는 철학을 할 수 있을 뿐이라면, 이러한 한도에서 모든 철학은 근저에서 인간학일 것이 아니겠는가 ? 이러한 계기에, 철학은 그 내부에 모든 인간 과학이 총체적으로 가능한 문화 형식이 된다” (『말과 글』1, 467쪽)는 자신의 철학관을 항시 견지한 것이다. 그의 철학은 이처럼 “모든 인간 과학이 자신의 토대와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실정성의 장” (『칸트 인간학에의 서론』, 124쪽)을 여는 것이다.

























주요 참고 문헌




Foucault, Dits et écrits I-II, « Quarto », Gallimard, 2001

        , Les mots et les choses, Gallimard, 1966

        , L’archéologie du savoir, Gallimard, 1969

        , Surveiller et punir, Gallimard, 1975

        , «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 Gallimard/Seuil, 1997

        , Histoire de la sexualité I, « tel », Gallimard, 1994

        , « Qu’est-ce que la critique »,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la philosophie, 2, 1990, Armand Colin

        ,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Gallimard/Seuil, 2004

        ,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Gallimard/Seuil, 2004

Frede, M., “Individuals in Aristotle”, Essays in Ancient Philosophy, Univ. of Minnesota Press, 1978

Goddu, “Ockham’s Philosophy of Nature” in Spade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Ockham, 1999

Kant, Progrès de la métaphysique en Allemagne, Œuvres philosophiques III, « Pléiade », Gallimard, 1986

Nietzsche, Œuvres philosophiques complètes I-XIV, Gallimard

Platon (tr. Robin), Sophiste, Œuvres complètes, « Pléiade », 1950

Veyne, Comment on écrit l’histoire, « Points/histoire », Seuil, 1996







http://blog.naver.com/jaiwonshim/120051659441

[출처] 미셸 푸꼬의 유명론적 인간학 |작성자 심심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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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2부 6장~12장 ‘법과 인민’ 요약




6장 법에 관하여

사회계약에 의해 정치체에 존재와 생명을 부여했다면, 입법législation은 이 조직에 활동과 의지를 부여한다. 정치체를 형성시키고 결합되게 하는 최초 행위는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것은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정의는 신으로부터 나오고, 신만이 원천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고한 신으로부터 정의를 받을 수만은 없기에 아마도 이성에서만 나오는 보편적인 정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정의가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되려면 상호적이어야 한다. 이 정의의 법은 상벌이 없으므로 인간들 사이에서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기에 권리를 의무와 결합시키고 정의를 그 대상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약속conventions과 법loix이 필요하다.

일반의지는 개별적인 대상을 상대로 하지 않는다. 개별적인 대상이 국가 안에 있다면 이러한 관계가 존속하는 한 전체는 더 이상 없으며 다만 크기가 다른 두 부분이 있을 뿐이다. 인민 전체가 인민 전체가 대상으로 법을 제정할 때 인민은 오직 자기 하나만을 고려한다. 이때 생기는 관계는 전체 대상과 전체 대상의 대비일 뿐, 전체가 분할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법이 적용되는 대상도 법을 제정하는 의지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이 된다. 바로 이와 같은 행위가 법이다. 또한 법의 대상이 항상 일반적이라는 것은 법은 인민을 한 조직체로 또 행위를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할 뿐 결코 개인으로, 행위를 개별적인 것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적 대상에 관한 모든 기능은 입법권에 속하지 않는다. 법이란 일반의지의 행동이므로 법을 제정하는 일이 누구의 권한인지, 군주가 법을 초월하는지, 법이 불공정한지, 우리가 어떻게 자유로우면서 법에 복종할 수 있는지를 물을 필요도 없다. 법은 우리 자신의 의지의 기록이다.

또한 법은 의지의 보편성과 대상의 보편성을 결합시키고 있다. 만약 주권자의 명령이라 해도 그것이 개별적 대상을 상대로 한 것이라면 이는 법이 아니라 행정명령이며 행정기관의 행위가 된다. 정부형태가 어떤 것이든 법에 의해 통치됨으로써 공공의 것이 우위에 서는 모든 국가는 공화국république(res publica)이라 불린다. 사실 법은 정확히 사회적 결합의 조건일 뿐이다. 따라서 법에 복종하는 인민이 법의 제정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연합하여 결사하는 자들만이 그 구성체 조건을 결정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조건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무엇이 자신에게 유익한지,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는 눈먼 다중multitude이라면, 어떻게 해서 다중이 입법 체계와 같은 중대하고도 어려운 일을 집행할 수 있는가? 사실 일반의지는 항상 옳은 것이지만 그것을 인도하는 판단은 늘 현명하지는 않다. 개인은 이익을 잘 알아보지만 그것을 포기해버리는 반면 공중은 이익을 원하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못한다. 양편을 모두 지도할 필요가 있다. 입법자의 존재가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7장 입법자에 관하여

국가에 가장 적합한 사회규칙을 발견하려면, 인간의 모든 정념passions을 다 알고 있으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그리고 인간의 본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되 그것을 꿰뚫어 알고 있는 그런 우월한 지성이 필요하다. 인간들에게 법을 제정해주기 위해서는 신들과 같은 지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실 군주는 입법자가 제정한 모형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입법자는 기계를 창안해내는 기계공이고 군주는 이 기계를 조립하여 가동시키는 사람에 불과하다. 가령 몽테스키외는 “사회가 태어날 때는 공화국의 통치자들이 제도institution를 만들어내지만 그 후부터는 제도가 통치자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한 국인에게 제도를 만들어주려는 사람은 말하자면 인간의 자연적 상태를 개조하는 위치에 있음을 느껴야 한다. 그는 자체로는 하나의 완전하고 고립된 전체인 개인을 보다 큰 전체의 한 부분으로 변화시켜 자연으로부터 받은 독립적이고 육체적인 존재를 부분적이고 정신적인 morale존재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즉 인간에게서 그 본래의 힘을 제거하고 타인의 도움없이는 사용할 수 없는 그런 힘을 부여해야 한다. 그 결과 각 시민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도움없이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그리고 전체에 의해 얻어진 힘이 모든 개인들의 자연적 힘의 총화와 같거나 그 이상이 되면, 입법은 이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완벽성에 도달하게 된다.

입법자는 국가에서 어느 모로 보나 비상한 인물이다. 이는 행정직도 아니고 주권도 아니다. 이 직무는 국가를 조직constitue하는 것이지만 국가의 구조/헌법constitution 속에 편입되지는 않는다. 이는 인간의 세계와는 전혀 공통되는 것이 없는 특별하고 우월한 기능이다. 사람을 지배하는 자는 법을 지배해서는 안되고, 법을 지배하는 자는 사람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리쿠르구스가 그의 조국에 법을 만들어 주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왕위를 포기한 일이었고, 대부분 그리스 도시에서는 법의 제정을 외국인에게 의뢰하는 것이 관례였다. 근대 이탈리아 공화국, 제네바 공화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법을 편찬하는 사람은 결코 입법권을 갖지 않으며 또 가져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인민 자신도 자신의 양도불가능한 권리를 내어줄 수는 없다.

우리는 입법작업에서 양립불가능한 것 같은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발견한다. 입법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작업이라는 것과 그 작업을 행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권한도 없는 권위자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어려움은 이것이다. 대중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생각들이 너무나 많고 각 개인은 눈앞에 개인적 이익과 일치하는 정부의 계획 외에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도의 결과로 얻어져야 할 사회정신이 그 제도/입법institution의 동기가 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이미 법이 규정하는 이상적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입법자는 힘도 논리도 사용할 수 없으므로, 이 둘이 아닌 다른 질서의 권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어느 시대나 국가의 시조들은 하늘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다. 입법자는 일반 대중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숭고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신들의 결정에 위임함으로써, 인간의 지혜로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을 신의 권위를 빌어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 경우 입법자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그의 사명을 실증해줄 참된 기적이다. 헛된 위세는 일시적 유대를 만들고 오직 뛰어난 지혜만이 영구적인 유대를 만든다. 모세의 계율이나 마호메트의 법전 등이 그 예이다. 정치와 종교는 공동의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국가가 생겨날 때 하나가 다른 것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다.




8장 인민에 관하여(1)

현명한 입법자instituteur는 법을 만들기 전에 그 법의 대상이 될 인민이 그것을 받들기에 적합한가를 살핀다.(플라톤, 크레타섬의 예) 사람들은 유년기에 온순한 것처럼 인민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완고해진다. 일단 버릇coutumes이 자리잡고 편견이 뿌리를 내리면 이를 개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도 부질없는 일이다. 물론 국가의 역사에 있어서도 개인에게서처럼 과거의 기억을 앗아가는 혁명이 가하는 격동기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다. 왜냐하면 인민은 야만이었을 동안에는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지만 시민의 활력이 소모되었을 때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소요가 인민을 파괴할 수는 있으되 혁명이 재건할 수는 없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인민의 경우에도 성숙기가 있는만큼 이 시기가 오기를 기다려 그들로 하여금 법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



9장 인민에 관하여(2)

국토는 너무 커도 안 되고 너무 작아도 안 된다. 모든 정치체에도 지나쳐서는 안 되는 힘의 최대가 있어서 그것이 커지다 보면 오히려 그 힘이 약해질 수 있다. 사회적 유대도 그 범위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더욱 약화되며, 소국은 일반적으로 대국보다 더 강하다.

첫째로, 거리가 멀수록 행정관리는 힘들어지며 행정의 계층이 늘어남에 따라 그 비용도 늘어난다. 과중한 지출부담은 백성들을 계속 허덕이게 만들며 비상시에 대처할 예비비는 거의 남지 않게 된다. 둘째로, 정부는 법을 지키게 하고 반란을 방지하는 힘과 신속성이 감퇴하며, 인민은 통치자들이나 조국, 동포들에 대해서 애정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행정관리들이 국가를 다스리게 되면서 멀리 덜떨어져있는 관리들은 중앙 정부의 권위에서 벗어나게 된다. 요컨대 국가 조직의 규모가 지나치게 비대하면 국가는 쇠약해진다. 또한 모든 인민은 일종의 원심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힘에 의해 끊임없이 상호 적대적으로 작용하고 제 자신을키워가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데카르트의 와동설tourbillons과도 같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를 확대할 이유도 있고 또 축소할 이유도 있다. 이 크고 작은 비율 중 국가의 보존에 가장 유리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 일반적으로 확대의 이유는 단순히 대외적이고 상대적이므로 대내적이고 절대적인 축소의 이유에 종속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은 건전하고 강력한 국가 조직이며 광대한 국토가 제공하는 자원보다는 좋은 정부에서 생겨나는 활력에 더 기대를 걸어야 한다.



10자 인민에 관하여(3)

정치체의 크기는 두 가지 방법으로 측정될 수 있다. 하나는 영토의 넓이에 의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주민의 수에 의해서이다. 토지가 주민을 부양하기에 충분해야 하고 또 토지가 부양할 수 있을만큼의 주민이 있을 때 적당한 비율이 생겨난다. 토지가 지나치게 넓으면 그것을 지키기 힘들고 경작은 미흡해지며 생산은 과잉상태가 된다. 토지가 지나치게 좁으면 국가는 이웃 국가들에 의존하게 된다. 그 형편이 교역이나 전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인민은 그 자체로 허약하다. 일정한 수의 인민이 가질 수 있는 힘의 최대치는 바로 이 비율에 의해 구해진다. 이 고정된 비율을 숫자로 표현할 수는 없다. 이는 토질, 비옥도, 기후, 주민의 기질, 출산 능력 등의 차이가 있으며 특별한 경우(산악지방, 해안지대 등)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법을 제정해주는 데는 또 하나의 조건, 인민이 풍요와 평화를 누려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국가가 형성되는 시기는 가장 약하고 파괴되기 쉬운 순간이며 이런 위기 상황에서 전쟁이나 기근이나 폭동이 일어나면 국가는 전복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인민이 입법의 대상으로 적합한가? 같은 뿌리와 이해관계 혹은 약속의 일치에 의해 결합되어 살면서 아직 법의 속박을 맛보지 않은 인민, 관습coutume이나 미신에 깊이 빠져 있지 않은 인민,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고 스스로 충족할 수 있는 인민 등이다. 입법 작업에서는 수립해야 할 일보다 파괴할 일이 더 어렵다. 이는 자연의 단순성과 사회의 요구를 결합시키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훌륭하게 구성된 국가는 매우 드물다.



11장 입법의 여러 체계에 관하여

모든 입법체계의 목적이 되어야 할 만인의 최대의 행복은 정확히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개의 주요한 대상으로 귀착한다. 자유가 필요한 것은 모든 개별적 종속dependance particuliere은 그만큼 국가라는 정치체의 힘을 약화시키기 때문이고, 평등이 필요한 것은 평등없이 자유가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등에 관해 말하자면 이는 권력과 부의 정도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균등하다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폭력이 될만큼 강대해서도 안 되고 단지 지위나 법에 의해서만 행사되어야 하며, 부는 어떤 시민도 다른 사람을 매수할 수 있을만큼 풍족해도 안 되고 또 자신을 팔아야 할만큼 가난해서도 안 된다. 강자의 편에서는 재산과 세력의 절제가, 약자의 편에서는 탐욕과 선망의 절제가 있어야 한다. 국가가 안정을 가지려면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공히 위험한 부자도 거지도 없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평등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관념적 공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바로 사물의 힘이 항상 평등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만큼 입법의 힘은 그것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가야한다. 그리고 모든 훌륭한 제도의 일반적인 목표는 각 국가마다 지역적 여건과 주민들의 성격에 따라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를 위해 최선의 것이 될 제도의 특이한 체계를 각 인민에게 설정해주어야 한다. 국가의 구조가 진실로 확고하고 지속적인 것이 되는 것은 모든 것들이 일치됨으로써 자연적 관계와 법이 항상 같은 문제에 대해 힘을 합치고, 법이 자연적 관계를 보장하면서도 나아가 그것을 교정하는 것으로 그칠 때이다.



12장 법의 분류

첫째로 조직체 전체가 그 자신에 대해 행하는 작용, 전체의 전체에 대한 관계 또는 주권자의 국가에 대한 관계를 규정하는 법은 정치법loix politique 또는 근본법이라고 불린다. 물론 이때 인민은 어떤 경우에도, 설령 최선의 것이라 해도 법을 바꿀 권리를 가지고 있다. 루소는 이 책에서의 서술을 이 법에 관해서만 제한한다.

두 번째로 구성원 상호 간의 관계 또는 전체 조직체와의 관계이다. 전자의 경우는 최소의 관계이어야 하고 후자의 경우는 최대의 관계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관계로 각 구성원은 모든 구성원에 대해 완전히 독립적인 관계가 되고, 국가에 대해서는 극도의 종속적인 관계가 되도록 해야 한다. 국가의 힘만이 구성원들의 자유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민법loix civiles은 바로 이 두 번째 관계에서 태어난다.

세 번째 관계로서 인간과 법의 관계, 즉 형에 대한 불복종의 관계를 고려할 수 있다. 이 관계는 형법loix criminelles을 수립하게 되는 원인으로서 이는 다른 법률의 준수를 위한 징벌 규정이다.

네 번째로 가장 중요한 법이 추가된다. 이는 인민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사실상 국가의 진정한 구조를 이룬다. 이 법은 인민을 그 제도의 정신 가운데 보존하고 부지불식간에 권위의 힘을 습관habitude의 힘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이는 풍습moeurs, 관습coutumes 특히 여론opinion에 대해서인데, 이는 정치가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은 부분이지만 다른 모든 부분의 성공은 여기에 달려있다. 풍습이야말로 형성에는 보다 긴 시간이 걸리지만 여타의 법을 확고히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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