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베르그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 최화 옮김, 아카넷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 지성사
황수영, <베르그손-지속과 생명의 형이상학>, 이룸
들뢰즈는 철학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는 일이라고 한다. <베르그송주의>에서 들뢰즈는 지속, 기억, 엘랑 비탈 세 가지 개념을 통해서 베르그손을 읽자고 제안한다. 먼저 들뢰즈는 방법으로서의 직관의 세 가지 규칙을 이야기한다. 첫째 문제의 제기와 창조, 둘째 진정한 본성 차와 실재의 마디를 발견하기, 셋째는 공간보다는 시간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기와 관련된다. 들뢰즈가 보기에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는 것은 발명이나 창조이다. 첫째 규칙과 관련하여 거짓문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과 잘못 제기된 문제들이 그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은 더와 덜의 문제를 착각하고 부정적 관념들을 앞세우는 지성의 착각에서 유래한다. 또 잘못 제기된 문제들은 분석된 강도량 개념, 공간화된 시간(동질적 시간), 자유의 문제에 대한 오해이다. 이는 본성상의 차이를 갖는 것들을 혼동하고 뒤섞어 정도상의 차이를 갖는 것으로 파악하고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환원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험 자체는 복합물이기 때문에 직관을 통해서 이것들을 본성상의 차이를 갖는 지속과 공간, 질과 양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양적 다양체는 불연속적인 동질적 요소로 되어있으며 상호외재적인 정도상의 차이를 갖는다. 질적 다양체는 서로 연속적이면서 이질적이고 상호침투하는 유기적 전체로서 본성상의 차이를 갖는다. 특히 공간과는 달리 지속은 나누어지면서 본성을 변화하는 것이다.
이중에서 특히 공간화된 시간의 문제, 동질적 시간이라는 관념은 이러한 문제를 요약할 만한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베르그손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의식에 직접 소여론>은 시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부논문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론에 관한 것만 상기해보더라도 그에게 있어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말년의 베르그손은 자신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해달라는 부탁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과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의식에 직접 소여론>(이하 <시론>) 2부를 중심으로 베르그손의 생각을 살펴보기로 하자.
수 개념과 공간 표상
베르그손은 <시론> 2부에서 우선 수 개념 분석을 통해 지성의 공간 표상을 밝힌다. 수 개념은 양화quantification 작업의 토대가 되는데, 양 50마리를 세는 경우를 살펴보자. 양을 세기 위해서는 첫째로 개체들의 구체적 성질이 무시되어야 하고 둘째로 각 개체들은 동질적이면서도 서로 구별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모두 섞여버릴 것이고 50마리의 양들은 공간 속에서만 구분될 수 있다. 공간은 수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장이다. 왜냐하면 양들을 셀 때 우리는 매 순간 한 마리의 양들과 관계할 뿐이며 이렇게 순간 속에서 파악된 개체가 50마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그것들 전체를 단번에 직관할 수 있어야 하고 각 개체들의 이미지를 매순간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의 형성은 동질적 단위unity를 이상적 공간 속의 한 점으로 표상하면서 그것들의 합을 전체로 직관할 때 가능해진다. 이 때 단위들을 무한히 분할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연장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분할가능성은 수학적 공간을 전제로 하며 지성의 작용과 분할가능성, 수학적 공간은 이렇게 서로 맞물려 기능하는 개념이다. 한편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수와 공간은 서로 동근원적이며 이때 공간의 특징은 상호 외재성이다. 또한 연장 실체로서 물질의 고유한 본성으로 불가침투성을 상정하는 근대철학의 사고도 전형적인 공간적 사고의 사례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공간 표상을 시간 속에 투사하는 데서 발생한다. 실재적 시간은 구체적 변화 속에서 느껴지는 시간이며 질적 변화, 생성이다. 이 질적인 시간의식을 느끼기 위해서는 의식의 심층적인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외적인 자극과 행동의 실용적 요구에 몰두한 의식은 소통의 필요에 의해 인위적인 공통적인 것, 질의 추상화, 일반화에 이끌린다.
시간은 계기적successive이며 공간에서 나타나는 병렬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 요소들은 불가분적으로 상호침투하며 지속한다. 이것들은 이질적이면서도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서 통합되어 연속적이다. 마치 음악의 선율에서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적극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의식상태들은 비가역적이며 과거 기억의 전체가 축적된 채로 부단히 변화한다. 축적된 과거 기억이 현재 속에서 새로운 것과 함께 매 순간 질적으로 변화하고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은 의식 상태들에 공간 표상을 투사함으로써 의식의 본성을 왜곡한다. 예컨대 시계바늘과 시계추의 운동으로 상징되는 시, 분, 초로 분할된 객관적, 과학적 시간을 다루는 것이다. 이 점에서 지성은 지속의 직관과 대립하는데 지성은 의식을 외재화하고 공간표상을 통해 파악하기 때문이다. 반면 내적 의식은 순간 밖에 없는 객관 세계에 연속성을 부여한다. 일종의 삼투압처럼 의식의 내재성과 지성의 공간적 사유가 타협해서 만든 것이 동질적 시간이다. 공간은 공존coexistence, 시간은 계기succession라는 형식에 의해 각각 동질성을 띠게 된다. 베르그손은 공간을 동질적인 것으로 정의하며 거꾸로 모든 동질적인 것은 공간이라고 말하는데, 질의 부재로서의 동질성은 일종의 가상이다. 공간은 우리 의식의 상호 침투하는 상태들을 분리하여 그것을 병렬시킴으로써 동질적 시간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동질적 공간의 기원에는 인간 지성의 노력이 있다. 가령 동물들에게 공간은 인간에게서처럼 동질적이지 않으며 고유한 질적 특성을 띠는 방향감각을 갖는다. 사실 인간에게서 조차 오른쪽과 왼쪽의 감각은 분석이나 정의가 불가능하다. 자연에 적응하고 그것을 지배하기 위해 생겨난 인간 지성에게 질적 차이는 부담스러운 것인데, 베르그손은 칸트와 마찬가지로 공간을 주관의 형식으로 간주하되, 그것을 넘어서 지성의 형식으로까지 간주한다. 지성은 이질성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동질적 공간을 형성하고 모든 질을 양화시킨다. 인식론에서 발생학으로의 전환. 동질적 공간의 범형은 유클리드 공간이며 피타고라스의 무리수 문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제논의 역설 등은 이러한 공간 표상의 극단에서 성립하는 산물이다. 요컨대 공간 표상은 실제적 삶과 행동의 필요성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실재적 지속의 직관과는 상반된다. 그러한 이유로 공간화된 시간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불가피한 초월론적 가상(칸트)의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직관하는 심층자아가 상호침투하는 흐름이고 본래적 자유라면 사회적 삶과 관계하는 표층자아는 소통의 필요에 의해 내적 상태를 양화하고 언어로 표현하는데, 언어 역시 유동적 실재를 고정하는 공간 표상의 산물이다. 이처럼 지성적 인식은 행동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실재의 본 모습은 지성이 아닌 내적 직관, 지속 안에 위치하여 그것과 하나가 되는 행위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이제 “지속과 공간이라는 두 항이 동시성으로 연결되며, 그것이 시간과 공간의 교차”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말할 차례이다. 베르그손에서 동시성은 지속과 공간의 교차로 정의된다. 권리적으로는 지속과 공간은 올바른 나눔division의 방법에 의해 엄밀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사실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험은 복합물이며 지속과 공간이라는 두 경향은 서로 삼투한다. 의식적 삶은 물론 이질적인 계기들이 불가분하게 상호침투하는 유동적 흐름이지만, 지속에 어떤 순간을 잘라낸다면 일종의 동시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과학은 속도를 잰다고 할 때 운동의 시작점과 끝점, 두 동시성을 찍고 그 사이의 공간을 셈한다. 만약 우주의 모든 운동들이 두 배, 세 배 빨라질 때 의식은 어떤 질적인 느낌을 갖지만 과학이 다루는 물리적 공식은 수정될 필요가 없다.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으로서 동시성은 그것을 접점으로 하여 지속하는 공간, 공간화된 지속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아 속에는 상호 외재성이 없는 계기만이 있으며 자아 밖에는 계기 없는 상호외재성만이 있다. 시간을 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양자 사이의 삼투현상에 의해 생긴 것이다. 지속과 외부 세계의 결합, 가령 종소리를 들을 때 그것이 주는 선율로서 질적인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속에 속한다면 종소리를 구별하여 하나하나 세는 것은 공간적 사유인 것이다. 순수한 이질성이 상호침투하고 내적이고 유기적으로 결합한 의식의 상태를 서로 병치시키고 계기를 연속적인 선으로 표상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지성의 작용이다. 이처럼 시간이 구별하고 세는 장소가 된다면 공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며, 베르그손은 동질적 시간은 공간의 제4차원이라고 부른다.
제논의 역설
파르메니데스에서 비롯하는 엘레아 학파의 일자 문제는 오랫동안 주된 철학적 주제가 되어왔다. 특히 제논의 역설에 대해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무한급수), 라이프니츠(미적분), 칸트 등의 철학자들이 그 대답을 내놓았지만 그 문제들을 진정으로 풀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베르그손이 보기에 이 역설은 동적인 실재와 우리의 지성에서 성립하는 공간 표상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즉 운동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trace과 운동 그 자체(운동의 운동성)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속을 공간 중의 신체가 갖는 운동 표상이나 감관 지각이 주는 외적 대상의 표상과 섞어버린다. 이와 같은 지속과 공간의 삼투 효과가 공간화된 시간과 동질적 시간을 낳는 것이다. 공간은 시간의 계기성이나 방향성이 제거된 상호외재적인 동시성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다시 제논의 역설로 돌아와보면, 아킬레스의 걸음과 거북이의 걸음 각각은 불가분적인 하나의 행위act이며 공간처럼 분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베르그손은 공간은 무한히 나눌 수 있는 상호외재적인 것이지만 운동은 나누어질 수 없는 것 자체이며 지속으로서의 시간이다. 아킬레스나 거북의 각 걸음은 자신의 고유한 질적인 것으로 의식에 주어지며, 이러한 질적인 것을 나누는 것은 그 질을 본성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공간이 정지와 순간, 동시성과 동질성의 표상이라면 지속은 이질성을 계기로 갖는 운동 자체이다. 지속에서는 정지된 순간을 구분할 수 없으므로 공간 속에서 파악되는 것처럼 한 위치와 일치시킬 수 없다. 운동의 실재성은 우리의 살아있는 내적 의식 및 지속의 관련 하에서만 보아야 한다. “설탕이 녹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는 베르그손의 유명한 말도 시간과 지속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성이 상정하는 부동적이고 동질적인 공간 표상에서는 결코 운동 자체를 파악할 수 없으며, 실재 자체는 우리의 직관을 통해서 인식 가능한 것이다. 베르그손에게 공간은 제작적 삶이나 행위에 관심을 둔 지성의 산물이고 모순율에 기초해서 동적 실재를 고정화시킨 표상이다.
칸트와 베르그손의 공간론
칸트는 감성적 인식에서 시간가 공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의 의미를 강조한다. 칸트가 보기에 공간은 버클리가 본 것처럼 감각들 간의 관계로서의 공간도 아니며 데카르트가 파악한 것처럼 외적 연장 실체도 아닌 주관의 형식이자 순수직관이다. 공간은 부분들로 이루어져있고 이것들을 서로 포함 관계를 갖는다. 이에 반해 개념은 특수한 대상들을 일반화하여 자기 아래에 포섭subsumption한다. 개념과 공간이 이러한 차이를 지니며 칸트는 공간이 감각적 현상에 관해서는 경험적 실재성을 갖고 물자체에 관해서는 초월적 관념성을 가짐을 주장한다. 문제는 칸트가 시간 역시 공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시간은 내감의 형식이지만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부분들이 단 하나의 시간에 귀속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공간의 직관적 성격을 보이기 위해 칸트가 들었던 ‘대칭적 대상의 역설’의 예는 시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공간과 시간 관념의 동형성은 연장적 크기와 강도적 크기의 분석에서 잘 드러나는데, 양과 질의 범주에 의해 성립하는 순수지성의 원칙은 각각 직관의 공리와 지각의 예취의 표제 하에 논의된다. 칸트는 경험적 의식에서 다양성의 통일은 곧 시공간적 직관의 통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문제는 지각의 예취 원칙에서 감각내용을 양적 본성을 갖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도를 질의 범주의 초월적 도식으로 파악하는 것인데, 이때 강도적 크기는 시간의 내용을 채우는 감각의 강약의 정도를 의미한다. 즉 강도적 크기는 ‘질의 양’으로 파악된다. 베르그손에게 시간은 의식상태의 질적 존재방식과 관련되므로 칸트의 강도량 개념은 비판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칸트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공간을 지성의 산물로 본다. 오히려 베르그손은 동질적 공간과 연장을 구분한다. 연장은 본능에 의해 파악되는 구체적 실재이며 수학적으로 파악된 추상적 동질적 공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순수공간, 즉 동질적 공간은 모든 질의 부재로 이루어지는데, 칸트는 시간을 감각들이 그 안에서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동질적 장소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해된 시간은 베르그손이 보기에 순수의식의 영역에 공간 관념이 침입해서 생긴 사생아적 개념이다. 동질적 시간 파악의 비밀은 바로 공간 속에 있다. 공간에 비해 지속은 서로에 대해 내재적이며 상호침투한다. 칸트가 물자체와 현상계를 구분하면서 오로지 상대적 인식만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면 베르그손은 지속의 직관을 통한 절대적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다. 베르그손이 지성의 근본적 토대로 제시하는 동질적 공간은 삶의 실용적 목적 외에 다른 기원을 갖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성의 형식은 단지 행동의 필요성과 관련될 뿐이며 진화적 기원을 탐구함으로써 발생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본능과 달리 무기적 도구를 제작하기 위한 실용적 필요를 갖는 지성은 지속에 무차별적이고 동질적인 공간을 투영함으로써 물질을 분해하고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여>의 구분에 따르자면 이러한 공간화된 시간은 사회적 의식과 언어생활과 관련된 표층의식과 관계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논변을 통해 베르그손은 플라톤의 독단론과 칸트의 불가지론을 극복하는 이중적 목표를 갖는다.
과학적 인식과 직관
과학은 모든 것을 정태적으로 관찰, 분석, 물질 언어로 계량화해서 표시한다. 과학은 내재적 의식의 흐름으로서의 시간, 양화할 수 없는 삶의 시간, 의식의 상태마저도 그렇게 한다. 과학적 인식, 개념적 사고는 대상 사이에 공통되는 것을 추출하고 추상화, 일반화하는 분석이며, 이러한 실증과학은 절대적 인식은 될 수 있어도 전체적 인식은 결코 될 수 없는 부분적 인식일 따름이다.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환원하고 질적, 내적 강도를 강도량으로 환원하는 과학적 인식은 상대적이다. 과학적 인식을 지도하는 지성은 도구를 만들고(호모 파베르) 감각의 연장이자 행동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과학적 인식은 적어도 물질에 관한 한 절대에 접촉할 수 있지만 결코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부분적인 것이다. 수를 세고 헤아린다는 것은 동질적 공간 안에서 상호 외재적인 것을 병치하는 것이다.
과학이 지성에 의존해서 물질을 다룬다면 철학은 정신을 자신의 고유대상으로 삼는다. 직관이 요구되는 까닭은 과학이 상정하는 바와는 달리 세계가 부단히 움직이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베르그송의 직관은 종래 철학자들이 말하던 지속의 밖에 위치한 지성적 직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직관은 구체적 실재 내부에 파고들어가 대상에 합일하는 공감이다. 대상에 일치하여 그 대상을 전체적으로 또 직접 파악하는 것이 직관이며, 이런 점에서 직관은 내적 지속으로 향하는 단순한 행위이다. 직관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지속 속에서 사고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방식을 통해 형이상학은 궁극적으로 질적인 미분과 적분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