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먼저 모더니티에 대한 전형적인 보편주의는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맑스주의, 베버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은 도구적 이성과 과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속한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봉건주의 및 전통 귀족주의에 대한 초기 부르주아 투쟁과 관련해서 태어났다. 형이상학, 종교, 미신 등은 이데올로기적 형태라고 공격당했으며,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에 대한 반테제로서 이데올로기와 투쟁한다. 즉 이성의 담지자는 진보라는 것이다. 가령 맑스에게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은폐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 재생산에 기여하는 왜곡된 의식이다. 맑스에게 이데올로기 비판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종교이다. 종교는 하나의 전도inversion이다. 인간 정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은 신이 되고, 신의 관념을 만들어낸 인간 존재는 피조물이 되기 때문이다. 맑스의 헤겔 비판에도 전도라는 동일한 메커니즘이 관여되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에서도 생산의 내적 관계들의 영역과 현상으로서 시장의 영역을 구별한다. 세계에 대한 전도된 의식은 억압과 모순을 은폐하고 재생산한다. 따라서 생산 과정과 잉여가치의 착취는 자유, 평등, 공정한 임금 등의 이데올로기적 표현들의 근원지인 시장의 기능에 의해 은폐된다.(32)

그런데 역사와 이론은 어떻게 연관을 맺는가? 가령 헤겔이 프랑스혁명을 관념화시킨 입장이라면 낭만적 역사주의의 반동, 비합리주의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난 것이다. 루카치는 비합리주의가 주요한 사회 위기들과 관계있는 국제적 현상이라는 테제를 유지했다(이성의 파괴). 라라인은 도구적 이성이 근대에 보급되었으며, 발전에 대한 보편주의적 주장에 대한 비합리적 반동이 심각한 국제적인 자본주의 위기의 순간에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39~40) 비합리주의는 위기 자체를 모더니티와 이성 일반에 대한 비난으로 대체해버리며, 자본주의의 보다 특수한 모순을 은폐하는 원인이 된다. 또한 이들은 차이와 불연속성에 대한 강조 속에서 타자 속의 인간다움의 요소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자신의 입장에 대한 정당화를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라라인은 인종주의를 예로 들어, 세이, 맬서스, 제임스 밀, 리카도 등의 식민주의와 헤겔, 맑스, 엥겔스 등 이른바 보편주의자들이 라틴아메리카나 아시아에 대해 갖고 있던 유럽중심주의적 편견을 분석한다. 반면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흄, 로크의 경험주의와 인종주의 간의 밀접한 연관도 흥미롭다(오리엔탈리즘). 주관적 이성에 대한 강조는 인종주의와 노예제를 정당화할 수 있으며,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구성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이처럼 도구적 이성에 대한 공격은 역사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관점, 각 문화의 차이와 특수성을 강조하는 관점과 밀접하게 관련한다. 역사주의의 차이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역설적으로 타자를 위협적인 것으로 구성할 수 있는데, 이는 게르만 문화를 옹호한 헤르더에게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셸링의 철학은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비합리주의 중 하나로서, 앎이 근본적으로 이성적 개념이 아닌 지적 직관, 특히 예술을 통해 획득된다고 보는데, 그 역시도 동일한 인종주의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요지는 총체적 동일성이나 총체적 차이 모두 동등한 타자의 구성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합리주의 이론이 자민족중심주의, 총체주의, 보편주의, 초역사주의의 위험이 있다면, 역사주의 이론은 인종적 특수주의, 본질주의, 상대주의, 비합리주의의 위험을 갖는다(72).


2장 : 비합리주의는 이성에 대한 부르주아의 낙관적인 믿음과 진보 및 해방을 믿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는 의지의 우월성을 강조한 쇼펜하우어 철학, 힘에의 의지를 강조한 니체의 철학, 파레토의 사회학 등에서 나타난다. 니체는 의식, 이성, 과학, 진리에 대한 폭넓은 비판을 전개한다. 이성은 힘에의 의지의 하인일 뿐이며, 니체의 관점주의는 이후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으로 전해진다. 의식은 오류와 기만의 원천이며, 진리는 반박될 수 없는 오류이다(즐거운 지식 11, 265절). 현대 과학은 금욕적 이상과 필연적 동맹을 맺으며, 니체에게 예술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위대한 수단이다.(권력에의 의지 853절) 물론 니체는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매우 드물게 사용하지만(위의 책 351절), 니체의 이데올로기론은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의 비교에서 잘 드러나는데, 노예도덕에서 적은 악으로, 노예 자신의 허약성은 덕으로, 지배 본능은 악으로 위조된다. 노예의 상상적 복수, 양심의 가책 등은 니체가 이데올로기를 극복해야 할 것으로 주장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노예도덕이 강자의 승리를 지키는데 도움을 주는 한에서 또 이데올로기를 승인하는 것으로 본다. 즉 니체는 이데올로기가 지배자를 속이는 한에서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이며, 이데올로기가 피지배자를 속일 때는 그것을 인정한다(99). 라라인은 모든 철학이 오류인 것은 아니며, 니체는 오직 실용주의와 총체적 상대주의로 나갈뿐이라고 주장한다. 그 귀족적인 이데올로기 이론은 자기 논박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주인 도덕 등 니체가 옹호하는 것이 생물학적 요소(102)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귀족적 관념이며, 노예, 병약자, 이방인 등은 금발의 야수를 위한 먹이일 뿐이라고 본다.(도덕의 계보 1부 12절) 이러한 니체의 이성 비판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 또한 영향을 미치며, 이후 하버마스는 기술적 합리성을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와 지배로 환원하려는 이들의 기획을 비판하며, 모더니티의 합리적 내용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해석과 동화의 복잡한 과정을 무시하고, 문화 산업의 권력에 대한 과도평가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125).


3장 : 구조주의는 역사주의, 인간주의적 맑스주의, 비판 이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나타났다. 알튀세르는 바슐라르와 스피노자의 입장, 진리는 자신의 척도라는 입장을 수용하면서, 과학의 타당성은 입증될 필요가 없고, 단지 과학의 타당성을 인정한다. 이성의 우월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성의 사용을 거부하는 것은 알튀세르주의자와 포스트모더니스트 사이의 접점 중 하나이다(129). 알튀세르는 생산관계의 재생산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것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호명하고, 주체들이 자신의 존재 조건을 상상의 형태로 재현하도록 한다. 과학은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는 것이며(맑스를 위하여),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고, 과학이라는 외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알튀세르는 여기서 레닌주의와 부정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조화시키는데, 여기서 중요한 이율배반이 발견된다. 첫째로 이데올로기를 사회를 포괄하는(comprehensive, 136쪽의 역자는 이를 ‘이해하는’으로 옮겼으나 부적절해 보인다) 심급으로 보는 동시에 과학의 적대자로 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둘째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가능하며, 과학은 어디에서 벗어나는가? 그들은 어떻게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알튀세르는 곤란한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데, 사회를 과학을 소유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로 나누어야 하거나, 지배 이데올로기가 필연적으로 지배한다는 이론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136~7). 1976년 강력한 비판 이후 그는 자기 비판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자기 비판의 에세이). 호명 개념은 유지되지만 이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개인을 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적 주체로 호명하는 이데올로기가 가능하다. 과학과 이데올로기 간의 대립은 사라지지만 알튀세르는 결국 레닌주의의 울타리로 돌아오며, 노동자의 자생적 의식과 과학 사이의 분리를 결합시키는 유기적 지식인를 논함으로써 그람시를 인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 전환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의 이론에서는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외부와 대면하게 하는 담론으로 이해되며, 결국 주체는 보조자일 뿐이게 된다(140). 그에게 역사는 주체없는 과정이며, 이러한 주체에 대한 공격과 담론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는 이후 포스트구조주의의 기본 전제가 된다. 사회적 총체의 통일성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해는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논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하나의 복합적 시도로서, 모호성이나 이율배반은 결국 그 자신의 이론의 해체를 불러오게 된다. 알튀세르의 광범위한 영향력, 특히 영미권에서의 수용은 주로 그의 초기 접근에 국한되지만, 하여튼 그의 광범위한 영향력은 놀라운 지적인 힘을 증언해준다. 고들리에, 테레, 듀프레, 레이, 풀란차스, 라클라우, 무페, 홀, 마슈레, 이글턴, 섬너, 메팜, 힌데스, 허스트, 크리스테바, 보드리, 솔레르스, 코와드, 엘레스, 아들람, 페쇠 등등. 이들 수용은 1. 부정적 이데올로기 개념과 계급 중심성 같은 맑스주의의 기본 전제를 고수하는 경우(풀란차스, 고들리에, 메팜, 페쇠), 2. 그람시주의에 기원을 둔 중간적 경향과 호명으로서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라클라우, 무페, 홀), 3. 담론을 모든 사회적, 정치적 삶의 구성원리로 확립하고 맑스주의 자체를 해체하려는 경우(코워드, 엘리스, 아드람, 허스트, 힌데스) 등으로 구분된다.


4장 :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너니즘의 저자들은 알튀세르가 보여준 반결정론적이고 반환원론적인 전망 및 정통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담론 중심성,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불신, 주체의 담론적 구성 등의 원리를 공유한다. 라라인은 포스트구조주의를 푸코, 힌데스, 허스트, 라클라우, 무페 등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을 리오타르와 보드리야르 등에게 사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이데올로기 종말로 대체해버린다. 푸코는 구조주의와 맑스주의의 총체화하는 합리성을 비판하면서 불연속과 분산, 차이를 강조한다. 이데올로기/과학, 지식/권력의 대립항을 넘어서는 권력이라는 문제틀이 제시되는 것이다. 권력은 곳곳에 편재하고 있으며, 이는 획득되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체 내부로부터 행사된다. 권력의 모세관적인 수준, 권력의 미시 관계들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사태를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개념에 있어서 푸코는, 니체의 영향에 의해 권력과 지식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면서, 지식, 과학, 진리 같은 개념들을 비판한다. 그는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거부하면서 담론의 인식론적 타당성과 관련된 문제들을 과소평가한다(198). 그는 또한 이데올로기 개념을 비판하면서, 권력이 의식에 미치는 영향보다는 신체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탐구해야 된다고 본다. 그러나 푸코 자신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반면 그 자신의 논의가 이미 일종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은 문제적이다(203). 허스트와 힌데스의 경우도 알튀세르에서 출발했으나, 인식론 전반에 대한 공격에 착수한다. 특권화된 개념은 없으며, 결정이라는 개념도 부당한 것으로 거부되고, 정치적 실천에서는 어떠한 지식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식론 비판은 상대주의와 독단주의로 빠지는 것으로 보인다. 담론들은 서로 공약불가능하게 되며, 이들은 어떠한 합리적 토론도 불가능해진다. 결국 허스트와 힌데스가 담론의 특권성을 부정할 때, 그들의 주장 역시 가능할 수 없는 자기 모순의 덫에 빠지게 된다(210). 라클라우는 최근 무페와 공동 작업하게 되면서, 이질성과 차이의 논리, 다원성과 비결정성을 그 슬로건으로 삼는다. 맑스주의는 과정과 주체라는 두 관점에서 볼 때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이며, 이와는 달리 급진적이고 다양한 사회운동은 민주주의적 혁명의 한 계기를 구성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급진 민주주의가 등치될 수는 없으며, 이들은 사회와 역사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포기하려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리오타르와 보드리야르 역시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 비판을 거부하지만, 뒷문으로는 다시 이데올로기 비판을 도입한다(253). 이러한 이데올로기 비판은 하버마스의 말처럼 총체화된 것이고 자기 소모적인 것, 자기 자신의 토대를 공격하는 것이다(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포스트 모더니즘은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와 아주 잘 공존하고 있다.


5장 : 하버마스에게서는 1981년까지 이데올로기 개념이 보존되는데, 그러나 이후 의사소통 행위이론을 발표하면서, 이성의 개념화 및 의식철학의 대체에서 의사소통을 끌어들이고,이데올로기 개념은 포기된다. 먼저 하버마스의 초기 입장을 보면, 그는 우선 모더니티에 의해 야기된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을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으로부터 수용하고, 또한 마르쿠제의 견해에 나타나는 과학기술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수용한다. 그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19세기 자유주의의 시장경제 및 단순 교환원리에 더 이상 기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실제적인 정치 쟁점들을 탈정치화하는 일종의 기술관료적 의식은 권력의 정당화 문제를 마치 전문가에게만 맡겨진 기술적 결정의 문제인 양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기술과 과학에서 유래하며, 기술과 과학은 융합되고 점점 조작되고 있다(이성적 사회를 향하여). 그러나 다른 한편 하버마스는 마르쿠제가 기술적 합리성의 이데올로기적 본성을 진보적 생산력과 적절히 조화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도구적 관심들과의 연관 속에서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물론 하버마스는 과학과 기술을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보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도구적 관심들이 후기 자본주의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었으며, 실천적이고 의사소통적인 관심들의 영역을 감소시켰다는 사실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인식과 관심 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는 관심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경험과학과 상응하는 기술적 혹은 도구적 유형, 역사 과학에 상응하는 실천적 또는 의사소통적 유형, 비판이론과 관련된 해방의 유형이 그것이다. 그는 맑스주의가 도구적 관심과 소통적 관심 사이의 구별을 소홀히 했으며, 역사 진화의 설명에서 소통적 관심을 도구적 관심으로 환원시켰다고 비판한다. 비판이론의 부정적 이성 개념이나 맑스주의의 긍정적 이성 개념 모두 전통적인 주체철학에서 유래하는 환원주의의 형태이다. 이는 주체가 개인으로서 객관적 세계와 관계맺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집단적으로 관계맺는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는 보편적 화용론의 관점(263쪽에서는 pragmatics를 실용학으로 번역했다)에서 의사소통을 분석하고자 하며, 담론의 보편타당성의 기초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모든 담화 행위에는 합의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이 은연 중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모든 담화 행위는 이해 가능한 타당성 요구(264쪽에는 이행이라고 오기되어있다)에 대한 상호 간의 승인을 포함하기에, 비강제적인 합의의 열망을 자신의 목적으로 갖는다. 이렇게 실제 담화에서 우리는 이상적 담화 상황을 불가피하게 가정하게 된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이처럼 폭력, 검열, 억압 때문에 진정한 합의를 도출할 수 없는 상황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는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 때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합리화에 관한 프로이트의 관점과 유사하다. 이데올로기의 원형은 신경증적 불안이며, 이데올로기 비판에 관한 하버마스의 모델은 프로이트 정신분석적인 것이다. 비판 이론가에게는 자기 반성을 통해 사이비 의사소통의 원인을 폭로하기 위한 사회적 수준이 필요하며, 정신분석가와 마찬가지로 반사실적인 이상적 상황과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267). 또한 이데올로기 비판의 규범적 토대는 바로 언어구조 속에 있다. 이러한 점에서 루카치와 하버마스의 유사성은 분명한데, 인간이 적절한 지식을 가지고 가설적으로 존재하는 구조와 실제 존재하는 구조들에 대해 비교할 수 있다면, 루카치는 계급의식이 그 기준을 제공하고 하버마스는 이상적 담화 상황이 그것을 담당한다.

문제는 이때 이데올로기가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으로 귀속된 당위에서 비판된다는 점이다. 해방의 가능성을 드러내주는 언어적 구조라는 규제적 모델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인 판단의 기준을 제공할 수 없다. 맑스의 비판이 역사적 분석에서 도출된 구체적인 것이라면, 하버마스의 비판은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이며,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구조로부터 도출된다(271). 이데올로기 비판과 정신분석 비판 사이의 유사성 역시, 신경증이라는 개인적 수준으로부터 계급권력과 계급지배라는 사회적 수준으로의 이행이 갖는 어려움 때문에 곤란한 것으로 드러난다. 개인의 정신분석적 치료를 정치적 행위를 위한 모델로 가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버마스가 이데올로기의 토대를 이루는 물질적 이해관계와 계급적대에 대해 어떤 명백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273).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행위이론 이후로 이데올로기 개념을 포기한다. 이데올로기는 19세기의 총체화하는 체계들에 국한되어야 하며, 발전된 현대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가 기능적 등가물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능적 등가물은 총체화하는 의식 형태의 형성을 방해하고 일상의식을 파편화시킨다. 하버마스는 기존의 이성 비판이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만 일면적으로 파악해왔다고 본다. 니체,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도구적 이성을 넘어선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관한 생각이다. 합목적적 행위, 성공 지향적 행위, 도구적 행위와는 달리 의사소통적 행위는 이해에 도달하려는 행위이다. 물론 이 구분은 의심스러운데, 이해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과 이기적 계산이 꼭 대립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은 정도의 문제이다(286). 그리고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이해 가능성, 명제적 진리, 진실성 등의 타당성 요구를 포함하는데, 과연 그러한 상호주관적 합의가 진리의 척도가 될 수 있는가? 벨머는 하버마스가 이성의 운명이 합리성의 근본적 척도가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본다. 이성은 합리성과 진리의 근본적 척도 없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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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8-21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르헤 라라인 책이 나왔었네요. 전혀 몰랐는데 좋은정보 ㄳ

바라 2009-08-21 02:07   좋아요 0 | URL
뭘요ㅎ 어서 여유가 나서 세미나 이런 것도 좀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ㅠ
 

루만(N. Luhmann)과 하버마스(J. Habermas)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




정성훈 (사회과학아카데미 강사)




< 목  차 >




1. 머리말

2. 체계이론 대 상호주관성 이론

3. 소통이론 대 행위이론

4. 사회학적 계몽으로서의 비판 대 철학적·규범적 척도 제시로서의 비판

5. 차이이론 대 동일성 논리

6. 맺음말

참고문헌







1. 머리말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이후 현대 사회를 과학적으로 파악하면서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지향을 가진 이들은 맑스·레닌주의 전통의 오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서유럽의 여러 철학 및 사회과학 조류들을 받아들여 왔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사회이론을 대표했던 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의 2세대 대표 주자인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였다. 현대 사회의 지배적 이성인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면서 소통적 이성을 내세웠던 하버마스는 흔히 이성 자체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함의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푸코, 데리다 등 프랑스 철학자들과 대비되어왔다.

그런데 정작 독일 사회이론에서 반이성주의 혹은 반인본주의를 대표하면서 하버마스와 오랜 세월 대립해온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한국에 별로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일반 체계이론(general systems theory)을 사회학에 적용한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은 하버마스가 체계와 생활세계의 2단계 사회이론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나 법이론과 정치이론에서 절차적 정당성 구상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나 중요한 자극을 제공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한국에도 하버마스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루만의 체계이론이 가진 거대한 면모와 복잡성, 그리고 그것이 사회비판이나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에서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은 충분히 주목받고 있지 못하다.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은 1960년대 말 하버마스가 ‘사회이론인가, 사회공학인가’라는 제목의 논쟁 파트너로 루만을 끌어들이면서 시작되었고(Habermas/Luhmann, 1971), 1998년 루만이 죽을 때까지 30년간 팽팽하게 지속되었다.1) 이 대립구도는 지금도 그들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에 의해 ‘체계이론 대 비판이론’ 또는 ‘빌레펠트학파 대 프랑크푸르트학파’라는 구도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지식인들, 특히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런 무관심의 원인으로는 루만이 사용하는 용어가 일반 체계이론,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인지생물학 등 우리에게 낯선 학문 흐름으로부터 나왔다는 점, 그의 이론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방대한 규모를 갖고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점 등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한국에 먼저 널리 소개된 하버마스가 루만의 체계이론을 ‘사회공학’으로 간주하고 사회의 현상태에 대해 ‘옹호적(affirmativ)’인 이론이라고 비판했던 효과가 상당히 크다고 본다. 하버마스가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는 다른 이론가들에 비해 정치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그리 급진적인 이론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버마스보다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루만과의 대립구도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그리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다. ‘푸코 대 하버마스’가 푸코에게 씌워져 있는 급진적 이미지로 인해 그들 사이에 별로 실질적인 논쟁이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몇 차례 소개된 반면, ‘루만 대 하버마스’는 루만이 파슨스의 보수주의적인 체계이론과 기능주의의 아류 정도로 인식되면서 별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푸코의 고고학과 계보학을 ‘비판’으로 볼 수 있다면, 정상적인 것의 비개연성과 기원의 우연성을 강조하며 권력, 진리, 화폐, 사랑 등이 역설(paradox)에 근거한다는 점2)을 드러내는 루만의 사회학적 계몽 역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 체계이론과 루만의 등가기능주의 체계이론 사이에는 헤겔과 청년헤겔학파 사이의 차별성만큼 커다란 차별성이 있다. 또한 루만의 체계/환경 차이 이론은 그 논리의 성격상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비동일성을 강조하는 아도르노의 부정적 변증법과도 가깝다.3)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에 ‘체계이론 대 비판이론’이라는 표제가 붙은 것은 루만에 대한 온당한 주목과 평가를 어렵게 만든다. 물론 루만 스스로가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대표 명칭을 ‘체계이론’이라고 불렀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이론의 종말”을 선언하면서(Luhmann, 1991) 대립해왔다. 그래서 위의 표제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이론 명칭들은 같은 맥락에서 대립되는 두 입장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하버마스도 체계를 자기 사회이론의 주요한 한 단계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루만도 그가 강조하는 이차 등급 관찰을 일종의 비판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4) ‘체계’와 ‘비판’은 서로 대립하는 말이 아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루만과 하버마스가 대립하고 있는 지점들을 몇 가지 골라서 그 기점들에서 어떻게 대립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물론 이 글에서 다룰 것보다는 훨씬 많은 대립지점들이 있지만 한국에서 이들의 대립구도에 대한 이해 수준을 높이기 위해 긴급하다고 판단한 지점들만 밝히도록 하겠다. 이 글 자체는 여기까지만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은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과 그의 현대 사회 진단이 갖는 잠재력을 알리기 위한 서론이기도 하다. 루만은 자기 이론의 성격을 결코 진보, 혁명, 좌파 등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다른 관찰자들이 루만의 이론을 그런 식으로 분류하기도 어렵다. 그는 모든 종류의 ‘-주의’가 일차 등급 관찰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며, 진보/보수, 혁명/반동, 좌파/우파, 비판적/옹호적 등의 구별을 이용하는 일차 등급 관찰자(first-order observer)들의 맹점을 다시 관찰하는 이차 등급(second-order)의 과학적(사회학적) 관찰자에 머물러 있고자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적 관찰은 현대 사회의 구조와 한계에 대한 거시적 통찰을 제공했던 맑스의 <자본> 이후 보기 드문 거대 사회이론의 구축에 이르렀다. 거대 사회이론으로서의 <자본>이 경제 비판에 머무른 반면, 현대 사회의 주된 구조를 기능적 분화(funktionale Differenzierung)5)로 파악하는 루만은 세계사회를 경제, 과학, 법, 예술, 정치, 종교 등의 여러 맥락에서 고찰하고 그 생태학적 합리성의 한계와 인간에게 끼치는 후과를 진단한 바 있다. 그리고 계층적 분화의 관념이 잔존하는 계급사회 이론을 거부하지만 기능체계들의 수행실적 상승을 통해 일어나는 포함(Inklusion)과 배제(Exklusion)라는 구별이 오늘날 세계사회의 메타코드(Metacode)로 강화되고 있다고 보고, 이로 인해 일어나는 양극화 및 현대성 위기의 문제상황을 진단하기도 한다.6) 이러한 진단들은 좌파의 실천을 위해서도 충분히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이론적 자산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2. 체계이론 대 상호주관성 이론




하나의 이론이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를 통해 그 이론의 명칭을 부여한다면 루만의 체계이론과 대비되는 하버마스 이론의 명칭은 비판이론이 아니라 ‘상호주관성 이론’이다. 루만이 사회적 관계들 혹은 사회적인 것을 ‘체계’로 파악하는 데 반해, 하버마스는 ‘상호주관성’으로 파악한다. 물론 체계와 생활세계의 2단계로 이루어진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을 상호주관성 이론으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추가 해명이 필요하다.

하버마스에게는 체계와 생활세계 중에서 생활세계만이 언어를 통한 상호주관적 이해가 제한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단계이다. 그에 반해 체계는 화폐와 권력이라는 비언어적인 조절매체를 통해 상호주관적 이해가 제한되는 단계이다. 하지만 이 두 단계의 지위는 평등하지 않다. 하버마스에게 생활세계는 “사회체계 전체의 존립을 정의하는 하부체계”(하버마스, 2006: 245)이며, 사회는 제도적 성격을 띠는 “생활세계의 구조적 요소”(하버마스, 2006: 224)이다. 그리고 체계의 복잡성 증가는 생활세계의 제도화, 즉 구조적 분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에서 일차적인 대상은 현상학적 사회학과 마찬가지로 상호주관성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체계이론의 자극을 받아 물화(物化)된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동시에 파악하고자 하기 때문에 체계 또한 이차적인 대상으로 다룬다. 이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은 상호주관성 이론이면서 이와 더불어 체계들도 고려하는 이론이다.

하버마스와 달리 루만은 모든 사회적인 것을 체계로 파악한다. 그는 사회적 체계들을 상호작용들, 조직들, 사회들로 분류하며, 후기에 이르러 저항운동을 이들 세 가지로는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종류의 사회적 체계로 간주한다. 간혹 루만이 다루는 체계들을 모두 사회적 체계들과 동일시하거나 사회적 체계들을 모두 사회의 기능체계들과 동일시하는 오해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체계 개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일반 체계이론은 체계와 환경의 차이를 출발점으로 하며, 기계들, 생명 체계들, 심리적 체계들(의식들), 사회적 체계들 등을 그것들의 환경과의 차이를 통해 다루는 이론이다. 사회적 체계들(soziale Systeme, social systems)은 사회학의 고유한 이론적 대상이며, 상호작용들, 조직들, 저항운동들, 사회들이 이런 체계들에 해당된다.7)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등의 기능체계들은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인 사회(Gesellschaft, society 혹은 societal system)가 분화되는 하나의 형식에 따라 나오는 부분체계들이다. 그리고 기능적 분화 형식은 현대 사회의 주된 구조이다.

그래서 사회적 체계 이론이 모든 사회적 현상을 기능체계들의 자기생산 논리에 따라서만 파악한다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 체계이론적 사회학은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친밀관계를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사회적 접촉을 그 이론의 대상으로 삼는다.8) 반면에 하버마스가 체계이론으로부터 부분적으로만 수용한 체계 개념은 사회의 기능체계들, 특히 그 중에서도 경제와 정치에만 제한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하버마스의 체계 개념을 떠올리면서 루만의 체계이론이 이른바 조절매체들에 의해 조절되는 물화된 사회 영역만을 다룬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루만과 하버마스가 사회이론의 대상을 각각 ‘체계’와 ‘상호주관성’으로 삼는다는 것은 두 학자 모두 전통적인 주체 중심 철학을 극복하려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극복의 방향은 매우 다르다. 루만은 상호주관성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보며 이 패러다임이 구유럽적 인본주의(humanism)의 전제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하버마스는 루만이 독일 관념론 전통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근세 의식철학의 모나드적 주체를 작동상 닫힌 자기지시적(selbstreferentiell) 체계9)로 대체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상호비판은 두 학자의 사상적 대립에 있어 가장 첨예한 쟁점이라고 볼 수 있다. ‘존재론과 인본주의 전통을 벗어나는 의미론’과 ‘형이상학 이후의 사유’를 각각 그 사상적 발상으로 삼는 두 사람에게 ‘너는 그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어’라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가장 큰 도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가장 초보적인 사회적 체계인 상호작용(Interaktion)의 창발(Emergenz, 떠오름)에 관한 루만의 견해를 살펴보면서 두 입장 간의 차별성을 밝혀보겠다. 루만은 둘 이상의 인간 의식들이 만나 소통(Kommunikation)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 의식들과 전혀 다른 차원의 질서가 떠오른다고 보며, 이 질서는 결코 의식들로 환원되어 설명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은 상호작용을 비롯한 사회적 체계들의 주체가 아니라 그런 체계들의 자기생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환경의 일부일 뿐이다.

루만에 따르면, 의식들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암흑상자들(black boxes)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네가 한다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한다”(Luhmann, 1984: 166)는 ‘이중의 우연성(double contingency)’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렇듯 동어반복적이며 미규정적인 상황에서는 아무런 소통도 일어날 수 없다. 둘 중 하나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다’ 또는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통지하면서 먼저 규정을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통지 행위에 맞추어 상대방이 맞장구를 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이 성립하려면 발신자(타아)의 ‘정보’ 선택 및 ‘통지’ 선택뿐만 아니라 수신자(자아)의 ‘이해’라는 선택이 일어나야 한다.10) 그리고 이해를 확인하는 그 다음 소통이 연결될 때만 소통이 소통을 재생산하는 자기생산(Autopoiesis)이 가능하며 하나의 상호작용 체계가 창발한다.

그런데 이런 창발에 있어서 소통 관여자들의 의식들은 결코 ‘공동의’ 의식이나 상호주관성을 형성하지 못한다.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이중의 우연성 상황은 그대로 지속된다. 다만 의식의 사건이 아닌 소통의 사건인 정보, 통지, 이해의 선택 단계들에서 순수한 이중의 우연성이 ‘기대 구조’의 형성을 통해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으로 바뀔 뿐이다. 여기서 ‘기대’란 의식의 기대가 아니다. 기대 구조란 하나의 소통이 다른 소통들과 연결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 중 특정한 것들이 선호되거나 배제되는 ‘제약’을 뜻한다. 소통에 관여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대 구조에 맞춰 나가야 하는 의식은 상호작용의 주체가 아니라 그 환경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소통에서 지칭되는 인간이란 체계의 기대 구조에 따라 통지 행위가 귀속되는 동일성 지점인 ‘인격(Person)’이지 의식적 주체가 아니다.

앞선 설명을 읽으면서 루만 고유의 생경한 개념들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웠을 독자들을 위해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더라도 개념어를 대폭 줄여 좀 더 쉽게 설명해보겠다.

너는 생각한 것들 중 극히 일부만을 말할 뿐이다. 그리고 네가 말한 것들 중 극히 일부만을 나는 이해한다. 여기서 너의 의도(정보)와 너의 말(통지)을 구별하는 나의 이해가 너의 의식 속에 있는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나는 그런 이해에 기초하여 다시 너에게 내가 생각한 것들 중 극히 일부만을 말하며, 앞서와 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이 과정은 서로가 말한 것을 추리(이해)하면서 그 말 속에 들어있는 기대에 맞추어 나감(기대 구조 형성)을 통해서만 지속될 수 있다. 때로는 나의 의도와는 다른 말도 해야 하며 너의 말 속에 들어있는 오해를 묵인하기도 해야 한다. 말하는 과정에서 딴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생각의 일치에 우리가 도달해보자고 합의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일치를 확인할 길은 없으며 합의를 지키자는 약속은 소통의 실재일 뿐 의식의 실재는 아니다. 서로 약속을 지킨다고 해도 진심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진심이라고 각자 생각하거나 진심이라고 서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좀 더 복잡한 사회적 체계들인 조직이나 사회의 기능체계 차원에 이르면 의식들 각각의 실재로부터 자립적인 소통의 실재가 더욱 뚜렷이 떠오른다. 선생님이 낸 시험 문제를 학생들이 읽고 답안지를 쓴 후 이를 선생님이 읽고 채점하는 소통 과정을 떠올려보자. 수십 명의 학생들이 한 교실에 앉아 똑같은 문제를 풀고 있는 사건, 정답을 쓰기 위해 그들의 생각과는 무관한 글을 쓰고 있는 사건, 읽고 싶지 않은 답안까지 모두 읽고 규정에 따라 채점하고 있는 사건 등등, 이렇게 극히 비개연적인 사건들의 연쇄는 이 소통 과정에 관여하는 의식들을 주체로 보아서는 전혀 해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과정은 우/열로 코드화된 교육체계의 기대 구조, 그리고 교육의 기능을 충족하기 위해 역할을 분배하는 학교 제도 및 조직들의 기대 구조에 의해 진행된다. 그 선생님이나 그 학생들이 주체라서, 혹은 그들 사이에 상호주관성이 형성되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선생님 역할과 학생 역할은 다른 인격들로 대체될 수 있다.

물론 선생님과 학생들은 시험 과정을 주제로 한 메타소통(소통 과정에 관한 소통)을 진행하면서 기대 구조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기대 구조 형성에 있어서도 이들은 결코 주체가 아니며 상호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결정도 주체들 사이의 강제 없는 투명한 합의에 의해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리고 구조 변동이란 그 소통 체계 자체의 진화이며, 여기서 의식들은 그 체계의 환경에서 각각 다른 강도로 자극할 뿐이다.11)

이런 발상은 모든 담론에는 권력이 작용한다고 보며, 이러한 권력은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 없이 행사된다고 보는 푸코의 관점과 유사하다.12) 물론 루만의 입장에서 보면 푸코의 권력은 사회적 체계들의 공고화된 기대 구조들을 뜻한다. 개념의 인플레이션을 좋아하지 않는 루만은 ‘미시권력’과 같은 종류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권력을 이러한 기대 구조들에서 작용하는 범사회적 소통매체들 중 하나라고 본다.13) 루만에게 권력은 소통의 성공을 보장하는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매체들 중 물리적 폭력과 공생하는 매체, 그래서 정치체계의 독립분화(Ausdifferenzierung)를 가능하게 한 매체이다. 어쨌거나 푸코와 루만은 담론 원칙이 “강제 없는 합의”(Habermas, 1998: 205)를 보장해야 한다고 보는 하버마스의 담론관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렇듯 의식들의 (참여가 아닌) 관여와 자극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그로부터 자립적인 성격을 갖는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통찰은 이미 맑스에게서도 발견된다. 포이어바흐의 유적 존재와 슈티르너의 유일자에 맞서 맑스가 인간을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선집 1권: 186)로 규정했을 때, 여기서 인간은 개체의 신체나 의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인격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자립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탐구는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이어졌다. 경제적 사회구성체론을 정식화할 때 맑스는 생산관계들을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선집 2권: 477)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자본>의 2판 후기에서 자본가는 그 관계들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경제적 관계들의 인격화”(MEW 23: 16)로 파악된다. 또한 상품의 가치 형식이 펼쳐지는 과정은 순수한 이중의 우연성으로부터 벗어나 기대 구조를 형성하는 상품생산자들의 소통 과정, 즉 그들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인 사회적 체계가 떠오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치 실체’란 구체적 유용노동의 시간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물질적 실체가 아니며, 개인들이 생각한 대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심리적 실체도 아니다. 실재적 추상(reale Abstraktion)을 통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으로 측정되는 가치는 사회적 실체이다.

그런데 루카치의 물화 이론 이후 이러한 사회과학적 인격 이해나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재적 추상에 대한 파악은 자본주의 사회에만 고유한 대상성 형식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사회과학을 등한시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철학 전통의 인본주의적 사회 이해로 돌아가게 되었고, 하버마스는 주체철학의 극복 방향으로 상호주관성 패러다임을 택하게 된다.

물질적 기체나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자립적인 사회적 질서에 대한 맑스의 통찰은 뒤르켐, 파슨스 등 다소 보수주의적인 함의를 갖는 구조 중심의 사회학 전통14)에서 이어졌다. 루만은 그 자립성을 고정된 구조에서가 아니라 기능 우위의 역동적 구조를 갖는 체계 자체에서 찾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선행하는 사회학 전통을 잇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보수주의적 함의와 단절한다. 그는 기능 개념을 구조 유지를 위한 수행(performance)이 아니라 ‘문제와 문제 해결의 관계’로 정식화함으로써, 사회구조의 변화 가능성을 완전히 열어놓는 역동적 체계에 관한 이론을 수립했다. 물론 그 방향이 진보인지 퇴보인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등등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지만 적어도 현상태의 유지나 사회통합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의 보수와는 전혀 무관한 이론을 수립한다.







3. 소통이론 대 행위이론




다음으로 살펴볼 대립구도는 이론의 대상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과 관련된 것이다. 즉 체계로서의 사회이건 상호주관성으로서의 사회이건 사회를 이루는 요소들을 무엇으로 보는가라는 주제와 관련된 대립구도이다.

많은 이들이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을 ‘소통이론’이라고도 부르지만 정확히 말해 그의 이론은 책 제목 그대로 ‘소통적 행위 이론’이지 소통들을 요소로 삼는 이론이 아니다.15) 그는 베버로부터 이어지는 행위 중심 사회학의 전통에 서 있다. 그는 행위자인 주체가 객체세계와 관련을 맺는 행위를 ‘목적론적 행위’ 또는 ‘도구적 행위’로 간주하며, 주체와 주체가 서로 관계를 맺는 사회적 행위의 원본이 되는 행위를 상호이해 지향적인 ‘소통적 행위’라고 부른다. 그리고 주체가 다른 주체를 객체로 간주하는 경우를 도구적 행위와 마찬가지로 성공 지향적인 성격을 갖는 ‘전략적 행위’라고 부른다. 따라서 사회적 행위는 소통적 행위와 전략적 행위로 나뉘지만 여기서 소통적 행위가 본래적인 사회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소통적 행위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하버마스는 행위 중심 사회학의 전통적인 합리성 개념을 대체하는 합리성 개념을 마련한다. 저 혼자 행위하는 행위자의 합리성이 아니라 행위자들 사이에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으로부터 나오는 소통적 합리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는 행위이론의 전통에 서면서도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을 극복하는 하나의 길이라고 볼 수 있다.16)

행위 개념과 구조 개념을 기본 개념으로 삼아 펼쳐져온 사회학의 역사에서 소통을 사회적 체계들의 요소로 삼고 의미(Sinn)를 이 요소들을 접속시키는 매체로 간주한 루만의 발상은 그야말로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와 이를 유지하는 ‘기능’을 강조했기 때문에 객관적 사회학으로 분류되곤 하는 파슨스조차도 사회적 체계들의 요소를 ‘단위 행위(unit act)’로 삼았다는 점을 볼 때, 소통이론으로의 전환은 전적으로 루만의 고유한 업적이다.

루만에 따르면, 사회적 체계들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것도 행위들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사회를 비롯한 사회적 체계들을 정보, 통지, 이해라는 세 가지 선택에 의해서 성립하는 단위인 소통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봄으로써, 루만은 주관적 사회학도 객관적 사회학도 아닌 ‘소통적 사회학’ 또는 ‘사회적 사회학’을 확립했다. 이러한 전환에 따라 행위 개념의 위상은 부차화된다. 루만은 “소통은 자기구성의 요소적 단위이며, 행위는 사회적 체계들의 자기관찰과 자기기술의 요소적 단위”(Luhmann, 1984: 241)라고 본다.

사회적 체계들의 작동(Operation) 단위인 소통은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는 사건이다. 그래서 수많은 소통들이 다른 소통들과 연결되지 못한 채 잠재화된다. 루만이 “현행화(Aktualisierung)와 잠재화(Virtualisierung), 재현행화와 재잠재화의 단위”(Luhmann, 1984: 100)라고 정식화하는 ‘의미’는 현행적으로 연결된 소통들을 ‘형식들(Formen)’로 드러내는 동시에 연결되지 못하고 잠재화된 소통들이 다시 현행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환기시키는 매체이다.17)

이러한 연결을 통해 소통들이 현행화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행위들로 관찰될 필요가 있다.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정보, 통지, 이해의 세 가지 선택은 어떤 인격에게 귀속되는 ‘통지 행위’로 단순화되어 관찰될 때만 쉽게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단순화는 사회적 체계들마다 다르게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는 가족에게는 체험으로 관찰될 뿐이지만 법에서는 범법 행위로 관찰될 수 있다. 뇌물로 받은 돈의 출처가 되는 인격은 법에서는 관심사가 되지만 경제에서는 관심사가 되지 않는다. 이렇듯 행위나 행위자인 인격을 자명한 사회적 실체로 간주하지 않음으로써, 루만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소통들의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지는 행위 귀속 가능성 및 인격화 가능성을 설명한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하버마스가 사용하는 전략적 행위와 소통적 행위의 구별은 관찰자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친밀관계에서는 투명한 합의(상호이해지향적 행위)로 관찰되는 소통이 정치에서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야합(성공지향적 행위)으로 관찰될 수도 있다.







4. 사회학적 계몽으로서의 비판 대 철학적·규범적 척도 제시로서의 비판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를 대표하는 호르크하이머는 ‘전통이론’을 데카르트 이래 사실을 숭배하는 조류라고 규정하고, ‘비판이론’을 “이성적이며 보편성에 상응하는 사회 조직”(Horkheimer, 2005: 229)이라는 이념을 갖는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구별법을 이어받아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의 병리현상을 진단하고 이를 비판할 수 있는 척도를 제시하는 일을 비판이론의 핵심 과제로 삼는다. 그래서 현대적 사회비판의 과제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 식민지화에 맞서 생활세계의 소통적 합리성을 회복하는 일이 된다. 여기서 비판의 척도는 앞서 살펴본 행위 합리성의 구별에 의지하며, 이는 형식화용론이라는 언어철학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다. 또한 행위에 있어 반-사실적(counter-factual) 규범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규범적 척도이다. 물론 이러한 척도 제시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체계라는 사실성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사회학을 참조하는 것이긴 하지만, 하버마스에게 비판이란 기본적으로 ‘철학적 근거를 갖는 규범적 척도 제시’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비판적/옹호적이라는 구별법을 이용하여 루만의 체계이론을 “지배에 순응하는 문제설정”, “기성의 것의 존속 유지를 위한 옹호론”(Habermas, 1971: 170), “현대 사회의 복잡성 상승을 옹호하는 태도”(Habermas, 1988: 426) 등등으로 평가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기능을 구조 유지에 종속시키는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 체계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적절할 수 있어도 기능 개념을 “문제와 문제 해결의 관계”(Luhmann, 1984: 84)로 정식화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기능적 등가물을 찾을 수 있고 등가물들 간의 비교가 가능하다고 보는 루만의 등가기능주의 체계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부적절하다.18) 루만은 현존하는 구조는 언제든 비교를 통해 대체될 수 있다고 보며, 모든 것은 다르게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적 사실을 다각도로 탐구하는 일과 그 사실을 숭배하는 태도는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사실 탐구의 내용은 이데올로기 비판이나 지식사회학이 그렇게 해왔듯이 다른 관찰자들에 의해 비판적/옹호적, 진보적/보수적 등등의 구별법에 따라 평가받을 수 있지만, 탐구 자체가 이러한 구별법에 얽매여 출발할 필요는 없다.

루만은 사회학이 비판적/옹호적이라는 구별로부터 출발하면 현대 사회의 문제상황에 대한 관찰에 실패하게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부터 출발할 경우 대중매체가 현대 사회에 제공한 기회와 위험부담을 동시에 관찰하는 일을 방해한다. 대중매체가 현실을 왜곡한다는 비판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세계사회의 현실이란 오직 대중매체를 통해 산출되는 현실이라는 점을 간과하게 만든다. 왜곡된 현실이나 이를 비판하는 현실이나 모두 대중매체의 현실이다(루만, 2006: 106 이하 참조).

루만은 체계와 환경의 구별을 주도적 차이(Leitdifferenz, guiding difference)로 이용하는 관찰이 현대 사회의 문제상황을 가장 폭넓게 볼 수 있도록 한다고 본다. 그리고 ‘존재/비존재’, ‘진보/보수’, ‘여성/남성’, ‘친환경/반환경’ 등 다른 구별을 주도적 차이로 이용하는 관찰자들의 맹점을 밝힌다.19) 이는 단일맥락적 세계 관찰자의 관점에서 다맥락적 체계/환경 차이 관찰자의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세계를 하나의 맥락에서 두 개의 값으로만 구별하는 일차 등급 관찰자 관점에서 수많은 맥락들에서 각각 달라지는 체계/환경 구별들을 이용해 일차 등급 관찰을 다시 관찰하는 이차 등급 관찰자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20)

루만은 사회학의 이차 등급 관찰자 관점에서 다른 관찰자들의 맹점을 밝히는 작업을 ‘사회학적 계몽’이라고 부른다.21) 그런데 이러한 계몽은 계몽하는 자가 계몽되는 자에 대해 어떤 인식론적 우월성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계몽하는 관찰자 역시 다른 관찰자 관점에서 보면 일차 등급 관찰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루만은 자신의 사회학이 스스로를 “비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헤겔과 칸트가 어떻게 기술하는지를 하버마스가 관찰하고, 하버마스가 어떻게 기술하는지를 루만이 관찰한다는 식의 연쇄라는 의미에서 “삼차 등급의 입장, 그럼에도 원리적으로는 이차 등급 관찰 입장으로부터 구별되지 않는 (더 반성이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어서만 구별되는) 입장”(Luhmann, 1997: 1117)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반성의 연쇄는 진리를 보증하거나 동일성에 이르는 일이 아니라 차이를 산출할 뿐이다. 비판으로서의 계몽은 계속 다른 합리성들을 산출하는 일이지 세계의 진리에 도달하는 목적론적 과정이 아니다. 하나의 계몽이 갖는 설득력은 그것에 다른 소통들이 연결되어 가는 과정, 즉 개연적으로(그럴듯하게) 되는 과정에 의해서만 성립한다. 비판을 통한 변화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임의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변화는 비개연적인 것이 개연적으로 되는 과정이며, 그 조건은 다음 소통에 있어 마치 필연적인 듯 느껴지는 구조, 즉 앞선 비개연적 선택들이 형성한 기대의 구조들이다.

루만의 사회학적 계몽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비판(Kritik)’이다. 비판이라는 단어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쓰는 방식보다 폭넓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kritike는 ‘판단하다’, ‘판결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를 근세에 철학적 개념으로 정착시킨 칸트의 이성 비판에서 비판은 이성의 ‘한계를 긋는 일’, 그 ‘월권을 지적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지 더 좋은 이성을 척도로 하여 더 나쁜 이성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었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역시 비판의 척도가 되는 이상적 사회를 기준으로 삼아 현실을 비판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정치경제학의 원리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를 서술함(Darstellung)을 통해 정치경제학의 한계와 자본주의 경제의 한계를 긋는 일이었다.22) 공황은 그러한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이지 공황 자체가 비판의 규범적 척도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루만의 체계이론은 하버마스의 철학적·규범적 비판과는 다른 의미에서 ‘비판적’이며, 여기서 비판이란 사회학적 계몽 혹은 과학적 비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다른 관찰자들의 구별이 갖는 맹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자신의 맹점에 대한 계몽도 감수해야 하는 끊임없는 비판의 연쇄이다. 따라서 더 나아간 비판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척도를 철학적으로 근거지을 수도 규범적으로 정당화할 수도 없는 비판이다.







5. 차이이론 대 동일성 논리




이런 면에서 보자면 루만의 비판과 하버마스의 비판은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 대표주자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차별성을 반영하고 있다.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공동 작업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성의 자기비판과 계몽에 대한 계몽을 강조하는 데서 그친다. 반면 그에 이은 단독 작업에서 호르크하이머는 주관적이며 도구적인 이성에 맞서기 위해 비판은 객관적 이성의 반동적 위험성을 알면서도 “객관적 이성을 강조하면서 수행”(호르크하이머, 2006: 216)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여기서 호르크하이머는 ‘객관적’의 뜻을 ‘상호주관적’에 가깝게 쓰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의 소통적 이성 이론은 호르크하이머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킨 면이 있다. 비판의 척도가 되는 이성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성을 구별하는 이성 이원론, 그래서 비판 척도의 동일성(identity)이 전자를 통해 확보되는 방식의 비판을 호르크하이머와 하버마스는 공유하고 있다.

반면 아도르노는 <부정적 변증법 Negative Dialektik>에서 진리, 화해, 구원(Erlösung), 객체의 매개(Vermittelung) 등에 관해 말하긴 하지만, 이는 끊임없는 부정 혹은 비판의 계기일 뿐이다. 비판하는 이성의 완성, 즉 주체와 객체의 매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며, 이것의 완성을 꿈꾸는 일은 또 다른 동일성 철학일 뿐이다. 이는 주체와 주체의 매개인 상호주관성을 이성으로 실체화하는 것 역시 동일성 철학의 반복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Identität der Identität und Nichtidentität)”(Hegel, 1986: 74)을 핵심 명제로 하는 헤겔의 동일성 논리에 맞서 아도르노는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을 개념들을 통해 여는 것이되,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을 개념들과 동일시하지 않는”(아도르노, 1999: 63-64) 사유, 즉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비동일성’을 부정적 변증법의 핵심으로 삼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차이들을 산출할 수밖에 없는 아도르노의 비판이론 노선은 합의를 지향하는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노선과는 상당한 차별성을 갖는다.

부정적 변증법의 비동일성 논리는 오히려 루만에게로 이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23) 루만은 체계(동일성)와 환경(비동일성)의 차이(비동일성)를 출발점으로 삼으며,24) 이러한 차이들이 각 체계마다 다르게 일어난다고 본다. 그는 헤겔이 전통적 존재론의 전체/부분 도식을 ‘특수자 속의 보편자’라는 발상을 통해 보편/특수 도식으로 전환시켰다고 본다.

헤겔의 정신철학에서 살아있는 실체이자 참된 주체인 정신은 “자기 자신을 통해 자기가 다르게 됨이라는 매개운동(Vermittelung)”(Hegel, 2006: 14)이다. 여기서 다르게 됨이란 자연의 생성을 뜻한다. 따라서 정신은 자연과 구별되는 특수자인 동시에 자연과의 구별을 ‘자기 안에서의 반성(Reflexion in sich)’으로 고양시키는 보편자이기도 하다. 절대자를 향한 운동 속에서 정신이라는 동일성의 외부(자연, 비동일성)는 제거된다.

전체/부분 도식과 그 변형인 보편/특수 도식의 동일성 논리에 맞서는 체계/환경 차이의 이론에 따르면, 자기지시적 체계들은 체계와 환경의 구별을 체계 안에 재도입(re-entry)함으로써 자기관찰과 타자관찰을 할 수 있다. 체계는 ‘자기 안에서의 구별’을 이용해 환경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관찰된 자기’와 ‘관찰된 타자’는 작동상의 자기와 작동상의 타자가 아니다. 모든 관찰은 자신의 작동(Operation)인 체계/환경 구별 그 자체를 관찰할 수는 없다. 구별 자체는 관찰의 맹점이다. 그래서 관찰되는 동일성으로서의 체계와 관찰되는 비동일성으로서의 환경은 비가시적인 작동, 즉 차이에 의존한다. 이런 차이이론에 따르면, 헤겔에게서 자연을 매개하는 정신의 운동이란 결국 비(非)정신과의 차이에 의존해야 하며 이 차이를 결코 극복할 수 없다.25)

이런 차이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주체와 다른 주체들의 차이는 결코 상호주관성이라는 동일성에 이를 수 없다. 상호주관적 합의란 합의와 불일치의 구별을 통해 각 주체 안에 다르게 재도입되는 합의(동일성)이다. 따라서 이러한 동일성은 합의에 대한 각 주체의 다른 이해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상호이해(Verständigung)라고 볼 수 없다. 합의라는 재현 또는 표상은 각 주체 안에서 다르게 이루어지는 작동(차이)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계 통합을 넘어서 생활세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통합 역시 불가능하며, “사회가 궁극에는 소통적 행위를 통해 통합되어야 한다”(Habermas, 1998: 43)는 목표는 동일성 철학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 관념론과 루카치의 주체-객체 동일성 테제는 상호주관성 이론에서 주체-주체 동일성 테제로 대체된다고 볼 수 있다.

동일성 철학과 관련해 소결론을 내려 보면 다음과 같다.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의 1세대 안에는 헤겔 이후 독일 철학에서 계속 반복되어온26) 동일성 논리와 차이이론 사이의 대립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2세대에서는 동일성 논리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 반면 부정적 변증법이 함축하고 있었던 차이이론은 오히려 루만을 통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27)







6. 맺음말




이 글은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이다. 우선 이 글에서 밝힌 것 말고도 그들 사이의 대립지점이 엄청나게 많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해이다. 필자는 학위논문을 통해 두 사람의 언어 이해를 비롯한 매체이론상의 대립지점을 이미 분석한 바 있으며, 두 사람의 인권이론을 비교하는 작업도 준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다룬 대립지점들은 두 이론의 명칭 자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점들이기 때문에 20세기 후반 독일 사회이론의 대립구도를 이해함에 있어 핵심적인 지점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이해인 또 다른 이유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이루어진 하버마스 중심의 비교와 달리 이 글은 루만 중심의 비교이기 때문이다. 대립하는 두 이론을 비교할 때 전적으로 공정한 비교란 불가능하다. 비교 자체도 이론이기 때문에 비교는 어떤 이론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필자는 체계이론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대 입장을 왜곡하지 않기 위한 노력은 충분히 기울였다고 판단한다.

지금까지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가 이해되어온 방식을 상당히 바꾸어보려는 이러한 시도가 한국에서 두 사상가에 대한 연구, 특히 부족한 루만에 대한 연구가 진척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비록 루만 자신은 사회학적 계몽에 머물러 있었지만, 우리는 열린 틀을 가진 이 과학적 자산을 실천적 사회비판과 대안사회의 전망 제시로도 연결할 수 있다. 필자가 볼 때 한국의 좌파 담론은 현재 ‘과학 없는 비판’과 ‘사회학 없는 정치철학’의 과잉 상태이며, 과학의 공백을 여전히 19세기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메우고 있다. 다시 사회구성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혹은 복잡한 세계사회의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일이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루만의 체계이론적 사회학은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해줄 수 있는 유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각주

 

 


1) 이들의 주요 저작 곳곳에는 직접 상대방을 거명하지는 않더라도 체계이론의 전제나 비판이론의 전제에 대한 반박이 깔려있다. 1980년대 이후 하버마스가 루만을 직접 겨냥해 비판하고 있는 대표적인 글로는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의 열두 번째 강의와 부언 설명이 있다. 루만이 하버마스를 직접 겨냥해 비판하고 있는 글로는 "Ich sehe was, was Du nicht siehst 나는 네가 보지 않는 것을 본다", Soziologische Aufklärung 5권, "Am Ende der kritischen Soziologie 비판적 사회학의 종말", Zeitschrift für Soziologie 20호 등이 있다.

 

2) 루만은 진리를 비진리와의 구별을 이용하되 진리라는 긍정적인 값을 선호하도록 만드는 이원적 코드를 갖는 매체, 그래서 학적 소통들(Kommunikationen)이 진리값을 갖는 소통들을 수용하기 쉽게 만드는 ‘성공매체’라고 본다. 그런데 권력, 법, 화폐, 진리, 사랑 등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 매체들’이라고도 불리는 성공매체들은 그 부정적인 값, 예를 들어 비진리에 대한 선호를 봉쇄할 수 없다. 그리고 진리는 진리 자체가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를 확정할 수 없는 역설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이 역설은 진리값과 비진리값을 할당하는 과학체계의 역사적 프로그램들에 의지해 펼쳐진다. 하지만 역설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펼침을 통해 은폐될 뿐이며, 새로운 프로그램들과의 비교에 의해 다시 가시화된다. 더 상세한 설명은 정성훈, 2009: 141 이하 참조.

 

3) 파슨스와의 차별성 및 아도르노와의 유사성에 관해서는 4와 5에서 다룰 것이다.

4) “자신을 ‘비판적’으로 이해한다면, 사회학이 반드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휘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 ‘비판적’을 취한다면, 이것이 우선 뜻하는 바는 사회학이 이차 등급 관찰자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Luhmann, 1997: 1119) 루만의 사회학적 계몽과 이차 등급 관찰에 관해서는 4에서 다룰 것이다.

 

 

5) ‘기능적 분화’란 사회가 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맥락에 따라 정치, 경제, 법, 과학 등으로 분화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밖의 다른 분화 형식으로는 부족, 혈연 등으로 나누어지는 ‘분절적 분화’, 도시와 농촌 또는 제1세계와 제3세계 등으로 나누어지는 ‘중심/주변 분화’, 그리고 신분들에 따라 나누어지는 ‘계층적 분화’ 등이 있다. 루만의 체계분화 이론에 관해서는 크네어/낫세이, 2008: 150 이하 및 정성훈, 2009: 171 이하 참조.

 

6) 포함과 배제의 구별이라는 메타코드에 관해서는 정성훈, 2009: 215 이하 참조. 기능적 분화라는 현대성을 방어하는 법체계의 침식 경향에 대한 진단은 Luhmann, 1993: 571 이하 참조.

 

7) 루만의 층위별 체계 분류에 관해서는 Luhmann, 1984: 16의 표를 참조. 정성훈, 2009: 9 이하의 설명도 참조.



8) 조만간 한국어 번역본이 나올 <열정으로서의 사랑 Liebe als Passion>은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이 얼마나 폭넓은 사회적 관계들을 다룰 수 있는지를 입증하는 사례이다.

 


9) 루만은 세포, 유기체, 신경체계 등의 생명 체계들, 심리적 체계들(의식들), 사회적 체계들, 그리고 사회의 분화된 기능체계들은 모두 그 환경들에 대해서 작동상의 닫힘(operational closure)을 통해 인지적으로 열려 있는(cognitive openness) 체계들이라고 본다. 여기서 작동상 닫혀 있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의식작용들은 의식작용들에만 준거(자기지시, Selbstreferenz)하지 의식 바깥의 실재와 결코 직접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의식은 의식(자기)와 환경(타자)의 구별을 의식 안에 재도입(re-entry)함을 통해서만 인지할 수 있다. 이런 체계들을 부르는 명칭이 자기생산(Autopoiesis)이다. 자기지시적이며 자기생산적인 체계와 모나드적 주체의 결정적인 차별성은 전자는 자기-원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가 아니라는 점, 오직 체계와 환경의 구별이라는 작동에 의해서만 - 지시된 자기밖에 볼 수 없다 하여도 자기지시란 지시되지 않은 타자와의 구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 가능하다는 점이다. 체계 혹은 동일성은 스스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환경 혹은 비동일성과의 ‘차이’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10) 루만은 소통이 타아(他我, alter ego)와 자아(ego)가 관여하는 정보, 통지, 이해의 세 가지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생각했다고(정보)뿐만 아니라 말하거나 썼다고(통지) 하더라도 소통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소통 개념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정성훈, 2009: 84 이하 및 크네어/낫세이, 2008: 114 이하 참조.

 

11) 루만을 비판하는 논자들은 간혹 루만이 초기의 논문에서 썼던 말인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변화를 거부한다고 평가하거나 실천의 의의를 무시한다고 평가하곤 한다. 필자는 이 말에서 ‘나’란 의식으로서의 나라고 본다. 따라서 이 말은 기원도 필연성도 없는 우연적인 기대 구조의 변경 가능성은 무한하게 열려 있다는 것에 대한 강조, 그리고 그런 변화의 인간 주체는 없다는 점에 대한 강조라고 본다. 그리고 그의 인격 개념과 행위 개념에 비추어본다면, ‘내가 변화시켰다’ 또는 ‘우리가 바꾸었다’라는 말에서 ‘나’나 ‘우리’는 소통의 진화를 특정한 인격이나 인격들에게 행위로 귀속시키는 관찰의 단위일 뿐이다.

 

12) 푸코의 권력 개념에 관한 간단한 설명으로는 양운덕, <미셸 푸코>, 13쪽 이하 참조.

 

 

 

13) 푸코, 부르디외, 네그리 등은 권력, 자본, 계급 등의 개념을 지나치게 넓게 사용함으로써 그 개념들이 가지는 ‘구별과 지칭’(루만의 ‘관찰’)의 능력, 혹은 ‘규정된 부정’(아도르노)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14) 기든스는 이를 행위 중심의 ‘주관적 사회학’과 대비해 ‘객관적 사회학’이라고 부른다. 기든스, 2006: 25 참조. 하지만 사회적 대상을 다루는 이론이 의식철학의 주체/객체 도식을 이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사회적 질서의 자립성을 강조하는 맑스나 루만의 사회학에 굳이 이런 식의 수식어를 붙이라고 한다면 ‘사회적 사회학’이 적합할 것이다.

 

15) 그래서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라는 책제목을 ‘의사소통행위이론’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의사소통’이 곧 ‘행위’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도구적 행위, 전략적 행위, 극적 행위 등과 구별되는 행위라는 점이 강조되기 위해서는 ‘소통적 행위 이론’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16) 행위자의 관행적(practical) 의식과 재귀적(reflexive) 행위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행위자들의 구조 형성 능력을 강조하는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은 행위이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주관적 사회학을 극복하려는 또 다른 시도이다. 구조화 이론에 관해서는 기든스, 2006 참조. 구조화 이론과 체계이론을 비교한 것으로는 정성훈, 2009: 100-109 참조.

 

17) 형식들은 “요소들 사이의 긴밀한 접속”이며, 매체들은 “요소들 사이의 느슨한 접속”(Luhmann, 1997: 196)이다.

 

18)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와 루만의 등가기능주의의 차별성에 관한 더 상세한 설명은 크네어/낫세이, 2008: 64 이하 및 정성훈, 2009: 36 이하 참조.

 

19) 다맥락적인 체계/환경 차이를 주도적 차이로 이용하는 이론이 다른 주도적 차이를 이용하는 이론보다 우월한가의 문제는 미리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론이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출발점으로서의 차이는 모두 우연적인 것이며 그 차이가 가질 수 있는 설명력의 우위는 오직 그로부터 연결되는 연구의 생산성과 적합성에 의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따라서 체계/환경 차이의 우월성은 미리 주어지는 것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 우월성은 경제, 과학, 법, 예술, 종교, 정치, 대중매체, 저항운동, 조직, 친밀관계 등에 이르는 루만의 방대한 연구 성과와 그것이 갖는 설득력에 의해서만 입증된다.

 

20) 루만은 이런 발상을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이가(二價) 논리학을 비판하면서 다가(多價) 논리학을 시도한 고트하르트 귄터(Gotthard Günther)로부터 가져왔다.

 

21) 루만은 자신이 쓴 논문들을 주제별로 모아 1970년부터 1995년까지 여섯 권의 <사회학적 계몽> 시리즈를 펴낸 바 있다.

 

22) 맑스는 라쌀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정치경제학 비판 기획을 “서술을 통한 비판”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23) 필자는 논리 이외의 측면에서 아도르노와 루만을 비교하는 작업은 본격적으로 착수하지 못했다. 논리상의 유사성에 관한 더 상세한 서술은 정성훈, 2009: 259 이하 참조. 사회학의 측면에서 아도르노와 루만의 공통점과 차별성을 밝힌 독일의 연구로는 Breuer: 1995가 있다.

 

24) <사회적 체계들 Soziale Systeme>의 ‘도입’에서 루만은 체계이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이 “동일성과 차이의 차이(die Differenz von Identität und Differenz)”임을 뚜렷이 밝히면서 이것이 변증법 전통과 갈라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부정적 변증법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Luhmann, 1984: 26 및 각주 19 참조.

 

25) 헤겔의 보편/특수 도식을 차이이론의 관점에서 더 상세하게 비판한 글로는 정성훈, 2008: 385 이하 참조.

 

26) 헤겔의 동일성 철학에 대한 비판은 포이어바흐로부터 시작되며, 이는 슈티르너와 맑스를 거치면서 급진화된다. 물론 이들은 한편에서는 동일성 논리를 비판하면서 포이어바흐의 유적 본질(Gattungswesen) 개념이 보여주듯이 다른 방식으로 동일성 논리를 반복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논문을 통해 다룰 것이다.

 


27) 그래서 1968년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도르노가 더 이상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자리를 루만이 이어받은 일은 의미심장하다. 당시 루만이 진행한 세미나가 사랑의 사회학이었고, 여기서 작성된 습작이 발전되어 1982년 <열정으로서의 사랑>으로 출간된다. 이 세미나를 계기로 자극을 받은 하버마스는 독일 사회학 대회에 루만을 불러내어 두 사람의 첫 번째 논쟁이 시작된다. 루만의 제자인 디르크 백커(Dirk Baecker)가 인터넷에 올린 영문 소개글(http://projects.isss.org/Main/NiklasLuhmannByDirkBaecker)을 참조하라. 물론 프랑크푸르트에서 루만의 세미나는 일회로 끝났고 빌레펠트에서 교수직을 얻어서 빌레펠트학파가 시작된다. 또한 아직까지 필자는 루만이 아도르노와 자신의 공통점을 언급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가 프랑크푸르트학파 내지 비판이론을 언급할 때 그것은 항상 하버마스를 대표로 하는 입장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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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rkheimer, Max, 2005, Traditionelle und kritische Theorie, Fischer.

Luhmann, Niklas, 1984, Soziale Systeme, Suhrkamp.

Luhmann, Niklas, 1991, "Am Ende der kritischen Soziologie", Zeitschrift für Soziologie 20호.

Luhmann, Niklas, 1993, Das Recht der Gesellschaft, Suhrkamp.

Luhmann, Niklas, 1997,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Suhrkamp.

Marx, Karl, Das Kapital, MEW 23권, Dietz. 

[출처]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작성자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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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8-0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더위에도 열심히 공부 중이시군요! ^^

바라 2009-08-05 23:35   좋아요 0 | URL
아 공부라긴 민망하구요; 이 글은 진보평론 여름호에 실린건데 정성훈 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힘내세요!
당신의 ‘배후’에는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 국민들은 열렬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운하 사업이다 4대강 정비 사업이다 외치며 죄다 땅만 파고 강만 엎는 대역사의 삽질 말고는, 시장 할머니 부여잡고 목도리 한 장 적선하거나 떡볶이 가게 순례하며 값싼 격려 인사나 던지는 휴먼 드라마와 같은 쇼 말고는, 대통령님이 우리에게 더 이상 보여주실 게 없는 건지. 우리 국민들은 오매불망 한 가지 걱정뿐입니다. 이 기막힌 쇼가 결코 끝나서는 안 될 텐데, ‘경제’를 외치면서, ‘중도’와 ‘서민’을 부르짖으면서, 정작 ‘경제’와 ‘중도’와 ‘서민’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흥미진진한 코미디를 5년밖에 볼 수 없다는 건 너무 잔인한 것 아닐까, 우리 국민들은 노심초사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힘내세요! 당신의 배꼽 빠지는 개그를 응원하는 서민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정리해고자들이 있잖아요!

우리 국민들은 매일 감탄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이 용산에서 타죽은 사람들과 떨어져죽은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은 이제 ‘국민’이 아니라고, 단지 ‘불법시위자’이자 ‘범죄자’들일 뿐이라고 명확히 구분해주시니, 그 확실하면서도 공명정대한 국가정체성의 기준에, 죽은 자도 산 자도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팽팽한 긴장감을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언제 ‘국민’의 자리에서 ‘국민이 아닌 자’의 자리로 떨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기에, 우리들의 삶이 아니라 당신들의 삶을 위한 ‘경찰국가’와 ‘법치주의’의 서슬 퍼런 짜릿함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기에, 우리 국민들은 일찍이 민주주의 시대에는 미처 경험할 수 없었던 스릴을 잔뜩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힘내세요! 삼복더위를 싹 날려줄 당신의 납량특집을 응원하는, 너무나 무서워서 반년 동안이나 장례도 못 치르고 있는 죽은 이들과 그들의 가족이 있잖아요!

우리 국민들은 불철주야 대통령님의 숙면을 기원합니다. 당신의 편안한 잠을 위해 청와대 주위를 전경 버스로 철통같이 꽁꽁 에워싸세요. 우리의 밤이야 어찌 되든 대통령님의 안온한 밤을 위해 당신의 충직한 개들을 항상 깨어 있게 하세요. 그리고 주위를 경계케 하세요. 그러면 그 개들이 당신을 대신해서 두 눈 똑똑히 보게 될 거예요, 진정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를. 그렇게 되면, 모든 충직한 개들이 그러하듯, 그들은 고개를 돌려 당신을 향해 짖게 될 겁니다. 그 안온한 숙면은 끝났다고, 주인님, 멍멍, 지금은 주무실 때가 아니에요, 그렇게 외치고 짖으면서 알려줄 겁니다, 당신이 정말로 귀하게 생각해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명박 대통령님, 힘내세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 때문에 잃어버린 10년이니까요. 누가 뭐래도 당신 때문에 잃어버린 평화고 당신 때문에 잃어버린 민주주의니까요. 대통령님은 우리 국민들이 과거 죽음을 무릅쓰고 얻었던 그 모든 것들을 단 1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거꾸로 되돌리는 기적을 보여주신 분이니까요. 이명박 대통령님, 제발 힘내세요! 당신의 ‘배후’에는, 이렇게 우리 국민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잖아요! 타죽지도 않고 떨어져죽지도 않고, 이렇게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서서, 계속 당신을 지켜보고 있잖아요! 당신이 사랑하는 악법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랑하지 않는 국민들의 민심이며, 당신이 사랑하는 대운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랑할 수 없는 역사의 거대한 강물일 테니까요. 힘내세요, 대통령님! 당신의 ‘배후’에는 우리가, 이렇게 든든한 국민들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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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라디너들의 응징 코메디(?)
    from 꿈을 나누는 서재 2009-07-28 15:41 
    이 나라의 현실이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를 분간할 수 없는 어색하고 애매하기 짝이 없는 한편의 삼류 코메디 같다. 여기에 알라디너들의 정의를 담은 시국선언문이 오늘에야 완성되어 경향신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제목만을 보고 기쁜 마음에 글을 접할 무뇌충 너희들의 가슴에 알라디너들이 보내는 하이~코메디가 꽂히기나 할런지 걱정이 되긴 한다만 밝은 웃음에서 쓴웃음으로의 반전이라도 기대해볼란다.  너희들이 과연 봉황의 깊은
 
 
바라 2009-07-2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 승주나무님, 아프락사스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이 수고해주셨는데, 많은 분들이 오늘 경향신문을 사보시면 좋겠네요~

2009-07-28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30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4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3982 



쌍용차 노동자 가족 죽음은 살인 

 


[투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독자  / 2009년07월20일 15시34분

쌍용차 가대위 여성동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분명 쌍용자동차 자본가계급과 정부


정부와 쌍용자본가계급은 6명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더니, 오늘 또 다시 파렴치하게도 쌍용자동차 노동자 동지의 가족인 가대위 동지를 살인했다. 상하이자본에게 모든 기밀과 기술 및 이윤을 떠넘겼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1조 5천억 원이라는 이익금을 도용했던, 과거 쌍용자동차의 비리의 주범, 박용태 쌍용자본가계급은 기만적이게도 쌍용자동차 법정관리인으로 재등장하여 60일이상 목숨을 내놓고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을 또 다시 기만하면서 자신의 과거의 비리를 숨기고 혼자 살아남기 위하여 수십만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쌍용 가대위 여성동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분명 쌍용자동차 자본가계급과 정부이다. 2009년 7월 20일 아침 9시경, 박용태 쌍용자본은 ‘법’을 앞세우며 또 다시 공권력을 대동하여 공장을 진입함으로써 도장공장의 불바다의 위험속에 내몰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또 다시 위협하였고, 결국, 쌍용노동자가족인 가대위동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오늘 경찰은 쌍용공장위에 3개의 헬기를 띄워 검거농성중인 노동자들 위를 낮게 날면서 위협하였고, 공장정문을 비롯한 모든 출입구에 전투경찰과 사복경찰을 수겹으로 둘러싸고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강하게 위협하였다. 사실상 이미 공권력은 공장내에 배치가 된 상태이고, 이 공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는 사측은 본관건물에서 바로 그 뒷건물인 도장공장에 있는 노동자들을 향해 폭력을 휘둘렀다. 이러한 위급하고 긴급한 상황속에서 쌍용자동차 가대위 여성동지는 남편인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정책부장 이재진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화염속에 둘러싸인 것을 보고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쌍용자동차 가대위 동지들의 눈물겨운 투쟁


그동안 쌍용자동차 가대위 동지들은 눈물겨운 투쟁을 벌여왔다. 가대위 동지들 중에는 해고당한 남편, 소위 죽은 자의 아내도 있었고, 산자의 아내도 있었다. 오늘 사망한 여성동지는 바로 노동조합 정책부장 이재진의 아내로 가대위 활동에도 열심히 투쟁하던 동지였다. 가대위 동지들은 공장점거파업 초기에는 평택시내를 돌면서 남편들의 투쟁의 정당성을 홍보했고, 평택시장을 찾아가서 호소도 하였고, 평택시를 돌며 무릎이 닳도록 삼보일배를 하면서 남편들의 투쟁을 지지하였다. 또한 전국의 투쟁사업장과 집회를 찾아다니며 남편들의 투쟁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다. 쌍용자동차 가대위 동지들은 지난 7월 2-3일, 공장내에 공권력이 들어오면서 공장내부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자, 전국의 투쟁사업장과 집회장소를 돌면서 죽음에 내몰린 남편들의 투쟁을 돕기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해왔었다.


가대위 동지중의 한명이 “이제 마음도 진정되고 안정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울면 남편들이 걱정을 하기 때문에 이제는 울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엊그제 였는데, 정부와 자본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가족마저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쌍용 자본가계급과 정부에게 이대로 물러설수는 없다.


정부의 인면수심을 노동자의 힘으로 박살내자


지금 정부의 비호속에, 쌍용자본가계급은 왜 이렇게 날뛰는 것인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알고 있다. 바로 박영태를 위시한 비리의 주범들이 그들의 비리를 노동자들에게 덮씌우려고 강력한 노동자탄압을 선택했다는 것을 말이다. 박영태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그의 비리를 가리려 하지만, 이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그를 가증스러워할 뿐이다.


또한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하면서 실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주범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소위 “쌍용자동차 사태에 관여하지 않겠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바로 오늘 쌍용자동차 공장에 공권력이 대대적으로 투입되던날,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은 "지금과 같이 세계 자동차 시장이 위축돼 있는 상황에서, 시장경쟁력이 떨어지는 쌍용자동차의 생존 가능성도 대단히 낮다고 보고 있다"고 하면서, "노조의 공장 점거로 생산이 중단된 현재 상황이 7월말 이후까지 계속되면 쌍용차는 파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사측과 협력업체의 판단"이라면서 사측과 협력업체를 대동하여 정부의 인면수심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지금 7명의 사람이 죽어나가고, 도장공장의 화약고를 안고 있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묻고 있으며, 정부가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만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의 인면수심이 모든 정부각료들에게 전염되었는가? 정부는 마치 한 몸처럼 이렇게 파렴치한 언행과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정부와 자본가계급은 왜 이렇게 한편으로는 ‘파산’이니 ‘노사공멸’이니 하는 말로 노동자들을 위협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공권력을 투입하여 노동자들이 점거하고 있는 공장을 악착같이 탈환!하려고 하는가? 바로 그들의 위기 때문이다. 그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와 자본가계급이 미쳐 날뛸수록 그들은 벼랑끝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전국의 노동자계급 동지들이여, 지금 당장 연대의 투쟁을 시작합시다


지금 점거투쟁중인 쌍용자동차 공장안은 참혹하다. 음식물, 식수, 전기, 의약품이 차단되었고, 외부와의 모든 출입이 차단되었다. 정부는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의 인권을 짓밟다 못하여 인간대우조차 안하고 있다. 모든 생필품 공급마저 끊기고 있는 쌍용자동차들에게 남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오직 하나뿐인 노동자 자신이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서로 붙들고 매고 의지하면서 자본에 대한 투쟁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재 60일이 넘는 투쟁의 과정동안 쌍용자동차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굳세게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남은것은 투쟁밖에 없다. 그들은 그들의 몸을 불살라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 전국의 노동자계급 동지들이 쌍용자동차로 몰려오고 있다. 그러나, 더 모여야 한다. 전국적인 연대투쟁이 매일 매일 지속적으로 거대하게 이루어져서 자본가계급과 정부를 압도하여, 그들이 굴복시켜야 한다.


지금은 전국노동자계급의 연대투쟁만이 해답이다. 이것만이 죽음으로 내몰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살릴수 있는 길이다. 전국의 노동형제들이여, 점거투쟁중인 쌍용자동차 공장주변에 수십만의 거대한 노동자들의 띠를 만드는 것만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살리고, 전국의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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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적인 비정규직법 개악 시도
노동신축화와 경제위기 책임전가를 위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이전투구

정책위원회
이명박 정권의 비정규직법 개악 시도

7월 1일 오후 한나라당이 기습적으로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 전체회의를 열어 비정규직법 개정안 상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날 회의는 환노위 위원장을 포함한 야당의원의 불참한 가운데 이루어져 법안상정의 적법성 논란이 되고 있다. 비정규직법 개정안은 일단 6월 30일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함에 따라 7월 1일부터 기존의 비정규직법이 예정대로 시행된다. 한나라당, 민주당, 선진과창조의모임은 30일 밤늦게까지 합의를 시도했으나 최대 쟁점인 법 시행의 유예기간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2006년 11월 30일 노무현 정권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비정규직법을 합의해서 처리했다. 일반적으로 비정규직법이라고 하면 이때 제․개정한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과 「파견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을 함께 일컫는다. 2007년 7월 1일부터 비정규직 사용기간(2년) 제한을 내용으로 하는 기간제법이 시행되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 비정규직법 개정 논의가 정부에서부터 불붙기 시작했다. 2008년 10월 이영희 노동부 장관이 비정규직법이 시행되면 “2009년 7월부터 100만 명이 넘는 근로자가 불안한 상태에 들어간다”고 말하며 고용대란설을 설파했다. 올해 3월 12일에는 노동부가 <비정규직 고용안정 대책>을 발표하여 현행 개정안이 윤곽을 드러냈고, 3월 13일에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3월 30일에는 기간제와 파견제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비정규직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고, 4월 1일 국회에 제출되었다. 4월 임시국회에서 여야 간의 이견으로 상정이 무산된 비정규직법 개정안은 6월 19일 환노위 3당 간사와 민주노총, 한국노총이 참여하는 비정규직법 5인 연석회의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석회의는 6월 29일까지 9차례 열렸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한나라당은 이 과정에서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대신에 법 적용을 유예하는 안을 당론으로 확정하고 제시하였다. 한나라당은 법적용 유예기간을 초기에는 3년으로 정했다가 협상이 진행되면서 2년으로 변경하였다. 협상 마감시한이 코앞에 닥친 6월 30일에는 선진과창조의모임에서 낸 절충안(300인 이상 사업장은 현행법 즉시 시행, 300인 미만 200인 이상 사업장은 법 시행 1년 유예, 200인 미만 5인 이상 사업장은 최대 1년 6개월까지 법 시행 유예)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7월 1일 환노위에 기습 상정한 것은 비정규직법 시행을 3년 유예하는 기존의 안이다.)

민주당은 기존법 시행 및 보완을 주장했다. 보완책으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기금 대폭 증액을 내세웠다. 하지만 협상이 진행되면서 비정규직 차별시정제도 강화 등 법 시행을 위한 제도적 보완을 위해 ‘6개월의 준비기간’을 둘 수 있다고 밝히며 사실상 6개월 유예로 입장을 정리했다. 또한 노동계의 동의를 전제로 5인 이상 30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1년 유예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연석회의에 참가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유예를 전제로 한 회의였다면 애초부터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여야 3당을 비판했다. 한국노총은 기존법의 시행 및 보완을, 민주노총은 근본적인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법 시행 유예를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강행해 통과시킬 경우 즉각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비정규직법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

2009년 7월 비정규직법 시행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2007년 7월 이후 근로계약을 체결한 노동자를 “2년을 초과하여 기간제 근로자로 사용하는 경우 그 기간제 근로자는 기간을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로 본다”는 조항 때문이다. 즉 이들은 정규직이나 무기계약직으로 자동 전환되어 7월부터 계약기간이 2년이 넘은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해고할 경우, 근로기준법상 부당해고로 간주된다. 기간제법의 사용기간 2년 제한이 처음으로 적용되는 것이 올 7월부터인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러한 조치가 시행될 경우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규직 채용에 부담을 가진 기업들이 동일인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채용하기보다는 계약 만료 후 다른 비정규직을 고용함으로써 대량 해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하고 있다. 정부는 구체적으로 2009년 7월 기준으로 2년을 초과하는 비정규직의 규모를 100만 명 내외로 추산하고 이들의 고용대란을 강조하며, 이를 비정규직법 개정의 주요한 근거로 삼고 있다.

운동진영은 정부의 이러한 우려를 법제정 당시부터 예견했다. 우리는 비정규직법이 2년마다 기간제 노동자들의 주기적 해고를 가져오고 2년 한도 내에서 기간제 노동자를 무제한 사용할 수 있는 ‘비정규직양산법’, 즉 비정규직보호법이 아니라 비정규직악법이라고 비판했다. 사용사유 제한이 아니라 사용기간 제한을 골간으로 비정규직법이 만들어지면서 실질적인 비정규직 양산 억제와 정규직 전환이 불가능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당시 기간제법은 ①관행으로 인정되었지만 비정상적인 고용이었던 비정규직을 정상적인 고용형태로 인정하였다, ②사용사유 제한이 아니라 사용기간 제한으로 해고 후 재고용이나 파견 및 용역과 같은 간접고용으로의 전환을 통해 비정규직 양산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③광범위한 적용 예외사유를 두어 법망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들의 경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파견법의 경우 ①파견대상업무를 대폭 확대하였다, ②파견기간을 2년까지로 연장하고 고령자의 경우에는 이마저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③불법파견의 경우에도 2년을 넘기지 않으면 직접고용의무가 없어 사실상 불법파견을 조장한다는 등의 문제가 지적되었다. 따라서 2006년 당시 기간제법 제정과 파견법 개정으로 구성된 비정규직법 제․개정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보다는 비정규직의 사용을 공식화, 일반화해 노동신축화를 제도화하고 이에 대한 일부 보완조치를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비정규직법의 문제점은 경제상황이 급변하면서 더욱 부정적인 방향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미 경제위기로 비정규직의 해고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다. 자영업자와 임시 일용 노동자의 실직이 늘고 있으며, 중소제조업체에 대한 고용유지지원금 지원규모도 크게 증가했다. 한계 상황에 부딪힌 쌍용자동차, GM대우 등의 대기업에서도 강제 휴업으로 사실상의 비정규직 우선 해고가 발생했다. 소리 소문도 없이 해고가 진행되는 영세사업장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하다. 한편 정부가 운영을 책임지는 공공기관과 공기업의 경우도 공기업선진화나 경영효율화를 내세우며 비정규직 해고에 앞장서고 있다. KBS는 경영효율화를 이유로 비정규직 노동자 420명 중 18명에 대해 6월 30일 계약해지를 통보했으며, 331명을 자회사로 이관하고 89명에 대해 계약해지할 계획이다. 한국토지공사는 6월 30일 145명에 대해 계약해지를 통보했고, 한국산재의료원(28명)과 보훈병원(23명)도 최근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정부의 역행적 정책기조와 유례없는 경제위기 속에서 기간제 사용기간 제한이 실제로 적용되는 올 7월 이후 비정규직의 연이은 해고사태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09년 7월 사용기간 2년 제한조항이 적용되는 기간제 노동자가 최대 3.2만 명으로 추산되고, 7월 이후 매달 최대 3~4만 명이 해당될 것이다.


노동신축화와 비정규직 문제 책임 전가

그렇다면 이명박 정권이 비정규직법의 개정을 추진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먼저 현 정권은 기간제 사용기간 제한을 무력화함으로써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자본의 손을 들어주려고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나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와 같은 자본가 단체는 비정규직 문제가 정규직 노동시장의 경직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부는 정규직 노동시장에 대한 개혁, 즉 노동신축화는 추진하지 않은 채 비정규직의 사용기간만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를 완화하고 임금 및 고용의 신축성을 제고할 것을 가장 근본적인 대책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에 더해 기간제 사용기간 제한은 폐지하거나 최소한 계약당사자의 합의로 연장할 수 있도록 개정할 것을 요구한다. 자본은 비정규직의 자유로운 사용과 정규직의 고용안정에 대한 공격을 핵심적인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7월 1일부터 기간제 사용기간 제한이 적용되기 때문에 여야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등 운동진영도 이 문제에 집중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의 <비정규직 고용안정 대책>(2009.3.12)을 보면 파견법 개정을 통해 파견근로의 고용기간도 4년으로 연장하고, 파견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파견대상 업무를 확대할 계획이다. 또한 기간제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단기간 노동자의 기간제한 예외사유도 확대할 예정이다. 국회에서 관련 법률 개정이 여의치 않더라도 손쉬운 시행령 개정을 통해 비정규직의 사용을 확대하고 제도화하겠다는 것이다. 이 중 노동권의 불모지대인 파견제를 확대하려는 시도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즉 현재 기간제를 쟁점으로 하는 비정규직법 개정은 이명박 정권의 노동신축화 정책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비정규직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대량해고가 발생한다고 협박함으로써 여론을 선도하고 국민적 압박 수단으로 삼았다. 노동신축화라는 본질을 숨겼다. 또 해고를 막기 위해서 기간제 사용기간 제한을 연장하거나 유예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설정함으로써 비정규직의 사용 자체는 당연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용기간이 연장되면 사용자는 계약해지를 통해 그 기간 안에 비정규직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해고할 수 있다. 오히려 제도적으로 비정규직의 사용을 고착화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사용기간 연장이나 적용유예 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 비정규직의 고용대란이 발생할 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명박 정권은 앞으로 벌어질 비정규직 고용문제의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유리한 입지를 선점했다. 이미 한나라당은 비정규직법이 노무현 정권 때 여야합의로 도입된 법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민주당을 압박하고 있으며, 대안 없는 비판으로 향후 벌어질 비정규직 해고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현행법의 사용기간 제한 연장이나 유예를 반대하는 민주노총에 대해서도 비슷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일보는 7월 1일자 기사에서 “양대 노총 조합원 중에서 비정규직 비율은 소수에 불과하며,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가 양대 노총에게는 '발등의 불'이 되지 못한다. … 결국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 원인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정규직 노조'라는 것이 정설이다”며 노동계에 비판의 화살을 돌렸다. 지배세력과 자본은 이러한 논리를 동원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제위기의 책임을 다른 세력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양의 탈을 쓰려고 한다. 즉 지금과 같은 구도에서 이명박 정권은 비정규직법 개정을 통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해고와 실직 실태를 호도하고, 노동신축화를 확대하는 일거양득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비정규직법 논란의 맹점을 넘어서자

그렇다면 비정규직법 개악저지를 외치며 강경저항의 자세를 취한 민주당의 태도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심지어 환노위 위원장인 추미애 의원은 노동계와의 합의 없이는 어떤 법안도 상임위를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밝혔다. 먼저 노무현 정권 때 그들이 비정규직법 논의를 주도적으로 제기하고 여야합의하에 통과시켰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의 수많은 우려와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법안을 강행통과 시켰던 세력이 지금에 와서 악어의 눈물을 흘리면서 노동계와 비정규직의 벗인 양 핏대를 세우고 있다.

민주당의 이러한 태도변화는 무엇 때문인가. 무엇보다 민주당은 비정규직법 대응을 통해 노무현 사망 이후 이른바 개혁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필요한 사회적 이슈를 선점할 수 있다. 특히 이명박 정권 들어서 노정 대화 통로가 완전히 차단된 민주노총을 이용하여 공조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노동계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변하는 서민 민생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도 있다. 민주당은 이러한 행태를 작년 광우병 촛불집회나 그 이후 민생민주국민회의와의 활동, 그리고 최근 ‘MB악법’ 대응과정에서 이미 여러 번 연출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실제로 비정규직법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는 정략적이고 기만적일 뿐이다. 사용기간 연장이나 유예는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 돌연 6개월 유예 수용으로 바뀌었고, 노동계의 입장을 들먹이며 1년까지도 경우에 따라 수용가능하다고 밝혔다. 마치 자신은 공평한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세력으로 묘사하면서 정치적인 부담은 노동계에 떠미는 꼴이다.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번 비정규직법 논란 과정에서도 민주당은 기존 비정규직법에 대한 문제제기를 인정하지 않고 현행유지와 정규직전환기금 증액으로 문제를 무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용사유 제한 없는 사용기간 제한으로는 비정규직의 반복적인 해고와 외주 용역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결국 민주당은 2006년의 입장으로 되돌아갔고 다만 여당에서 야당으로의 상황변화에 따라 자신의 포지션을 바꿨을 뿐이다.

비정규직 문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현행법의 개악’이라는 구조에 갇혀서는 안 된다. 자본과 정권이 던져놓은 조삼모사에 빠지는 꼴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법 개악 저지를 넘어서 현재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는 해고와 계약해지를 막고, 고용 유지를 위해 정부에게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첫째, 쌍용자동차 투쟁과 같은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싸움, KBS 등 비정규직에 대한 계약해지와 해고에 맞선 싸움 등 현재 벌어지고 있는 투쟁의 공간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남길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자행되고 있는 해고와 노동권 박탈을 사회적 이슈로 만들고 막아야 한다. 둘째, 취약 부문부터 시작되어 확산되고 있는 해고에 맞서기 위해서 ‘한시적 해고중단 및 고용안정 특별법’과 같은 제도적 요구를 내걸고 전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위한 투쟁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이러한 싸움이 결합될 때 이명박 정권의 노동신축화, 노동권 박탈, 경제위기 책임전가에 맞서 투쟁전선을 세우고 비정규직법의 개악 시도를 막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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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9-07-17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처 :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sola&id=640 사회화와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