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만(N. Luhmann)과 하버마스(J. Habermas)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
정성훈 (사회과학아카데미 강사)
< 목 차 >
1. 머리말
2. 체계이론 대 상호주관성 이론
3. 소통이론 대 행위이론
4. 사회학적 계몽으로서의 비판 대 철학적·규범적 척도 제시로서의 비판
5. 차이이론 대 동일성 논리
6. 맺음말
참고문헌
1. 머리말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이후 현대 사회를 과학적으로 파악하면서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지향을 가진 이들은 맑스·레닌주의 전통의 오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서유럽의 여러 철학 및 사회과학 조류들을 받아들여 왔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사회이론을 대표했던 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의 2세대 대표 주자인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였다. 현대 사회의 지배적 이성인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면서 소통적 이성을 내세웠던 하버마스는 흔히 이성 자체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함의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푸코, 데리다 등 프랑스 철학자들과 대비되어왔다.
그런데 정작 독일 사회이론에서 반이성주의 혹은 반인본주의를 대표하면서 하버마스와 오랜 세월 대립해온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한국에 별로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일반 체계이론(general systems theory)을 사회학에 적용한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은 하버마스가 체계와 생활세계의 2단계 사회이론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나 법이론과 정치이론에서 절차적 정당성 구상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나 중요한 자극을 제공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한국에도 하버마스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루만의 체계이론이 가진 거대한 면모와 복잡성, 그리고 그것이 사회비판이나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에서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은 충분히 주목받고 있지 못하다.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은 1960년대 말 하버마스가 ‘사회이론인가, 사회공학인가’라는 제목의 논쟁 파트너로 루만을 끌어들이면서 시작되었고(Habermas/Luhmann, 1971), 1998년 루만이 죽을 때까지 30년간 팽팽하게 지속되었다.1) 이 대립구도는 지금도 그들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에 의해 ‘체계이론 대 비판이론’ 또는 ‘빌레펠트학파 대 프랑크푸르트학파’라는 구도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지식인들, 특히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런 무관심의 원인으로는 루만이 사용하는 용어가 일반 체계이론,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인지생물학 등 우리에게 낯선 학문 흐름으로부터 나왔다는 점, 그의 이론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방대한 규모를 갖고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점 등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한국에 먼저 널리 소개된 하버마스가 루만의 체계이론을 ‘사회공학’으로 간주하고 사회의 현상태에 대해 ‘옹호적(affirmativ)’인 이론이라고 비판했던 효과가 상당히 크다고 본다. 하버마스가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는 다른 이론가들에 비해 정치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그리 급진적인 이론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버마스보다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루만과의 대립구도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그리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다. ‘푸코 대 하버마스’가 푸코에게 씌워져 있는 급진적 이미지로 인해 그들 사이에 별로 실질적인 논쟁이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몇 차례 소개된 반면, ‘루만 대 하버마스’는 루만이 파슨스의 보수주의적인 체계이론과 기능주의의 아류 정도로 인식되면서 별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푸코의 고고학과 계보학을 ‘비판’으로 볼 수 있다면, 정상적인 것의 비개연성과 기원의 우연성을 강조하며 권력, 진리, 화폐, 사랑 등이 역설(paradox)에 근거한다는 점2)을 드러내는 루만의 사회학적 계몽 역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 체계이론과 루만의 등가기능주의 체계이론 사이에는 헤겔과 청년헤겔학파 사이의 차별성만큼 커다란 차별성이 있다. 또한 루만의 체계/환경 차이 이론은 그 논리의 성격상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비동일성을 강조하는 아도르노의 부정적 변증법과도 가깝다.3)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에 ‘체계이론 대 비판이론’이라는 표제가 붙은 것은 루만에 대한 온당한 주목과 평가를 어렵게 만든다. 물론 루만 스스로가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대표 명칭을 ‘체계이론’이라고 불렀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이론의 종말”을 선언하면서(Luhmann, 1991) 대립해왔다. 그래서 위의 표제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이론 명칭들은 같은 맥락에서 대립되는 두 입장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하버마스도 체계를 자기 사회이론의 주요한 한 단계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루만도 그가 강조하는 이차 등급 관찰을 일종의 비판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4) ‘체계’와 ‘비판’은 서로 대립하는 말이 아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루만과 하버마스가 대립하고 있는 지점들을 몇 가지 골라서 그 기점들에서 어떻게 대립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물론 이 글에서 다룰 것보다는 훨씬 많은 대립지점들이 있지만 한국에서 이들의 대립구도에 대한 이해 수준을 높이기 위해 긴급하다고 판단한 지점들만 밝히도록 하겠다. 이 글 자체는 여기까지만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은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과 그의 현대 사회 진단이 갖는 잠재력을 알리기 위한 서론이기도 하다. 루만은 자기 이론의 성격을 결코 진보, 혁명, 좌파 등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다른 관찰자들이 루만의 이론을 그런 식으로 분류하기도 어렵다. 그는 모든 종류의 ‘-주의’가 일차 등급 관찰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며, 진보/보수, 혁명/반동, 좌파/우파, 비판적/옹호적 등의 구별을 이용하는 일차 등급 관찰자(first-order observer)들의 맹점을 다시 관찰하는 이차 등급(second-order)의 과학적(사회학적) 관찰자에 머물러 있고자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적 관찰은 현대 사회의 구조와 한계에 대한 거시적 통찰을 제공했던 맑스의 <자본> 이후 보기 드문 거대 사회이론의 구축에 이르렀다. 거대 사회이론으로서의 <자본>이 경제 비판에 머무른 반면, 현대 사회의 주된 구조를 기능적 분화(funktionale Differenzierung)5)로 파악하는 루만은 세계사회를 경제, 과학, 법, 예술, 정치, 종교 등의 여러 맥락에서 고찰하고 그 생태학적 합리성의 한계와 인간에게 끼치는 후과를 진단한 바 있다. 그리고 계층적 분화의 관념이 잔존하는 계급사회 이론을 거부하지만 기능체계들의 수행실적 상승을 통해 일어나는 포함(Inklusion)과 배제(Exklusion)라는 구별이 오늘날 세계사회의 메타코드(Metacode)로 강화되고 있다고 보고, 이로 인해 일어나는 양극화 및 현대성 위기의 문제상황을 진단하기도 한다.6) 이러한 진단들은 좌파의 실천을 위해서도 충분히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이론적 자산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2. 체계이론 대 상호주관성 이론
하나의 이론이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를 통해 그 이론의 명칭을 부여한다면 루만의 체계이론과 대비되는 하버마스 이론의 명칭은 비판이론이 아니라 ‘상호주관성 이론’이다. 루만이 사회적 관계들 혹은 사회적인 것을 ‘체계’로 파악하는 데 반해, 하버마스는 ‘상호주관성’으로 파악한다. 물론 체계와 생활세계의 2단계로 이루어진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을 상호주관성 이론으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추가 해명이 필요하다.
하버마스에게는 체계와 생활세계 중에서 생활세계만이 언어를 통한 상호주관적 이해가 제한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단계이다. 그에 반해 체계는 화폐와 권력이라는 비언어적인 조절매체를 통해 상호주관적 이해가 제한되는 단계이다. 하지만 이 두 단계의 지위는 평등하지 않다. 하버마스에게 생활세계는 “사회체계 전체의 존립을 정의하는 하부체계”(하버마스, 2006: 245)이며, 사회는 제도적 성격을 띠는 “생활세계의 구조적 요소”(하버마스, 2006: 224)이다. 그리고 체계의 복잡성 증가는 생활세계의 제도화, 즉 구조적 분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에서 일차적인 대상은 현상학적 사회학과 마찬가지로 상호주관성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체계이론의 자극을 받아 물화(物化)된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동시에 파악하고자 하기 때문에 체계 또한 이차적인 대상으로 다룬다. 이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은 상호주관성 이론이면서 이와 더불어 체계들도 고려하는 이론이다.
하버마스와 달리 루만은 모든 사회적인 것을 체계로 파악한다. 그는 사회적 체계들을 상호작용들, 조직들, 사회들로 분류하며, 후기에 이르러 저항운동을 이들 세 가지로는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종류의 사회적 체계로 간주한다. 간혹 루만이 다루는 체계들을 모두 사회적 체계들과 동일시하거나 사회적 체계들을 모두 사회의 기능체계들과 동일시하는 오해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체계 개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일반 체계이론은 체계와 환경의 차이를 출발점으로 하며, 기계들, 생명 체계들, 심리적 체계들(의식들), 사회적 체계들 등을 그것들의 환경과의 차이를 통해 다루는 이론이다. 사회적 체계들(soziale Systeme, social systems)은 사회학의 고유한 이론적 대상이며, 상호작용들, 조직들, 저항운동들, 사회들이 이런 체계들에 해당된다.7)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등의 기능체계들은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인 사회(Gesellschaft, society 혹은 societal system)가 분화되는 하나의 형식에 따라 나오는 부분체계들이다. 그리고 기능적 분화 형식은 현대 사회의 주된 구조이다.
그래서 사회적 체계 이론이 모든 사회적 현상을 기능체계들의 자기생산 논리에 따라서만 파악한다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 체계이론적 사회학은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친밀관계를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사회적 접촉을 그 이론의 대상으로 삼는다.8) 반면에 하버마스가 체계이론으로부터 부분적으로만 수용한 체계 개념은 사회의 기능체계들, 특히 그 중에서도 경제와 정치에만 제한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하버마스의 체계 개념을 떠올리면서 루만의 체계이론이 이른바 조절매체들에 의해 조절되는 물화된 사회 영역만을 다룬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루만과 하버마스가 사회이론의 대상을 각각 ‘체계’와 ‘상호주관성’으로 삼는다는 것은 두 학자 모두 전통적인 주체 중심 철학을 극복하려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극복의 방향은 매우 다르다. 루만은 상호주관성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보며 이 패러다임이 구유럽적 인본주의(humanism)의 전제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하버마스는 루만이 독일 관념론 전통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근세 의식철학의 모나드적 주체를 작동상 닫힌 자기지시적(selbstreferentiell) 체계9)로 대체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상호비판은 두 학자의 사상적 대립에 있어 가장 첨예한 쟁점이라고 볼 수 있다. ‘존재론과 인본주의 전통을 벗어나는 의미론’과 ‘형이상학 이후의 사유’를 각각 그 사상적 발상으로 삼는 두 사람에게 ‘너는 그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어’라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가장 큰 도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가장 초보적인 사회적 체계인 상호작용(Interaktion)의 창발(Emergenz, 떠오름)에 관한 루만의 견해를 살펴보면서 두 입장 간의 차별성을 밝혀보겠다. 루만은 둘 이상의 인간 의식들이 만나 소통(Kommunikation)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 의식들과 전혀 다른 차원의 질서가 떠오른다고 보며, 이 질서는 결코 의식들로 환원되어 설명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은 상호작용을 비롯한 사회적 체계들의 주체가 아니라 그런 체계들의 자기생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환경의 일부일 뿐이다.
루만에 따르면, 의식들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암흑상자들(black boxes)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네가 한다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한다”(Luhmann, 1984: 166)는 ‘이중의 우연성(double contingency)’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렇듯 동어반복적이며 미규정적인 상황에서는 아무런 소통도 일어날 수 없다. 둘 중 하나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다’ 또는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통지하면서 먼저 규정을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통지 행위에 맞추어 상대방이 맞장구를 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이 성립하려면 발신자(타아)의 ‘정보’ 선택 및 ‘통지’ 선택뿐만 아니라 수신자(자아)의 ‘이해’라는 선택이 일어나야 한다.10) 그리고 이해를 확인하는 그 다음 소통이 연결될 때만 소통이 소통을 재생산하는 자기생산(Autopoiesis)이 가능하며 하나의 상호작용 체계가 창발한다.
그런데 이런 창발에 있어서 소통 관여자들의 의식들은 결코 ‘공동의’ 의식이나 상호주관성을 형성하지 못한다.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이중의 우연성 상황은 그대로 지속된다. 다만 의식의 사건이 아닌 소통의 사건인 정보, 통지, 이해의 선택 단계들에서 순수한 이중의 우연성이 ‘기대 구조’의 형성을 통해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으로 바뀔 뿐이다. 여기서 ‘기대’란 의식의 기대가 아니다. 기대 구조란 하나의 소통이 다른 소통들과 연결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 중 특정한 것들이 선호되거나 배제되는 ‘제약’을 뜻한다. 소통에 관여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대 구조에 맞춰 나가야 하는 의식은 상호작용의 주체가 아니라 그 환경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소통에서 지칭되는 인간이란 체계의 기대 구조에 따라 통지 행위가 귀속되는 동일성 지점인 ‘인격(Person)’이지 의식적 주체가 아니다.
앞선 설명을 읽으면서 루만 고유의 생경한 개념들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웠을 독자들을 위해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더라도 개념어를 대폭 줄여 좀 더 쉽게 설명해보겠다.
너는 생각한 것들 중 극히 일부만을 말할 뿐이다. 그리고 네가 말한 것들 중 극히 일부만을 나는 이해한다. 여기서 너의 의도(정보)와 너의 말(통지)을 구별하는 나의 이해가 너의 의식 속에 있는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나는 그런 이해에 기초하여 다시 너에게 내가 생각한 것들 중 극히 일부만을 말하며, 앞서와 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이 과정은 서로가 말한 것을 추리(이해)하면서 그 말 속에 들어있는 기대에 맞추어 나감(기대 구조 형성)을 통해서만 지속될 수 있다. 때로는 나의 의도와는 다른 말도 해야 하며 너의 말 속에 들어있는 오해를 묵인하기도 해야 한다. 말하는 과정에서 딴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생각의 일치에 우리가 도달해보자고 합의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일치를 확인할 길은 없으며 합의를 지키자는 약속은 소통의 실재일 뿐 의식의 실재는 아니다. 서로 약속을 지킨다고 해도 진심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진심이라고 각자 생각하거나 진심이라고 서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좀 더 복잡한 사회적 체계들인 조직이나 사회의 기능체계 차원에 이르면 의식들 각각의 실재로부터 자립적인 소통의 실재가 더욱 뚜렷이 떠오른다. 선생님이 낸 시험 문제를 학생들이 읽고 답안지를 쓴 후 이를 선생님이 읽고 채점하는 소통 과정을 떠올려보자. 수십 명의 학생들이 한 교실에 앉아 똑같은 문제를 풀고 있는 사건, 정답을 쓰기 위해 그들의 생각과는 무관한 글을 쓰고 있는 사건, 읽고 싶지 않은 답안까지 모두 읽고 규정에 따라 채점하고 있는 사건 등등, 이렇게 극히 비개연적인 사건들의 연쇄는 이 소통 과정에 관여하는 의식들을 주체로 보아서는 전혀 해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과정은 우/열로 코드화된 교육체계의 기대 구조, 그리고 교육의 기능을 충족하기 위해 역할을 분배하는 학교 제도 및 조직들의 기대 구조에 의해 진행된다. 그 선생님이나 그 학생들이 주체라서, 혹은 그들 사이에 상호주관성이 형성되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선생님 역할과 학생 역할은 다른 인격들로 대체될 수 있다.
물론 선생님과 학생들은 시험 과정을 주제로 한 메타소통(소통 과정에 관한 소통)을 진행하면서 기대 구조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기대 구조 형성에 있어서도 이들은 결코 주체가 아니며 상호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결정도 주체들 사이의 강제 없는 투명한 합의에 의해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리고 구조 변동이란 그 소통 체계 자체의 진화이며, 여기서 의식들은 그 체계의 환경에서 각각 다른 강도로 자극할 뿐이다.11)
이런 발상은 모든 담론에는 권력이 작용한다고 보며, 이러한 권력은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 없이 행사된다고 보는 푸코의 관점과 유사하다.12) 물론 루만의 입장에서 보면 푸코의 권력은 사회적 체계들의 공고화된 기대 구조들을 뜻한다. 개념의 인플레이션을 좋아하지 않는 루만은 ‘미시권력’과 같은 종류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권력을 이러한 기대 구조들에서 작용하는 범사회적 소통매체들 중 하나라고 본다.13) 루만에게 권력은 소통의 성공을 보장하는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매체들 중 물리적 폭력과 공생하는 매체, 그래서 정치체계의 독립분화(Ausdifferenzierung)를 가능하게 한 매체이다. 어쨌거나 푸코와 루만은 담론 원칙이 “강제 없는 합의”(Habermas, 1998: 205)를 보장해야 한다고 보는 하버마스의 담론관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렇듯 의식들의 (참여가 아닌) 관여와 자극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그로부터 자립적인 성격을 갖는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통찰은 이미 맑스에게서도 발견된다. 포이어바흐의 유적 존재와 슈티르너의 유일자에 맞서 맑스가 인간을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선집 1권: 186)로 규정했을 때, 여기서 인간은 개체의 신체나 의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인격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자립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탐구는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이어졌다. 경제적 사회구성체론을 정식화할 때 맑스는 생산관계들을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선집 2권: 477)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자본>의 2판 후기에서 자본가는 그 관계들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경제적 관계들의 인격화”(MEW 23: 16)로 파악된다. 또한 상품의 가치 형식이 펼쳐지는 과정은 순수한 이중의 우연성으로부터 벗어나 기대 구조를 형성하는 상품생산자들의 소통 과정, 즉 그들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인 사회적 체계가 떠오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치 실체’란 구체적 유용노동의 시간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물질적 실체가 아니며, 개인들이 생각한 대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심리적 실체도 아니다. 실재적 추상(reale Abstraktion)을 통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으로 측정되는 가치는 사회적 실체이다.
그런데 루카치의 물화 이론 이후 이러한 사회과학적 인격 이해나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재적 추상에 대한 파악은 자본주의 사회에만 고유한 대상성 형식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사회과학을 등한시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철학 전통의 인본주의적 사회 이해로 돌아가게 되었고, 하버마스는 주체철학의 극복 방향으로 상호주관성 패러다임을 택하게 된다.
물질적 기체나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자립적인 사회적 질서에 대한 맑스의 통찰은 뒤르켐, 파슨스 등 다소 보수주의적인 함의를 갖는 구조 중심의 사회학 전통14)에서 이어졌다. 루만은 그 자립성을 고정된 구조에서가 아니라 기능 우위의 역동적 구조를 갖는 체계 자체에서 찾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선행하는 사회학 전통을 잇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보수주의적 함의와 단절한다. 그는 기능 개념을 구조 유지를 위한 수행(performance)이 아니라 ‘문제와 문제 해결의 관계’로 정식화함으로써, 사회구조의 변화 가능성을 완전히 열어놓는 역동적 체계에 관한 이론을 수립했다. 물론 그 방향이 진보인지 퇴보인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등등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지만 적어도 현상태의 유지나 사회통합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의 보수와는 전혀 무관한 이론을 수립한다.
3. 소통이론 대 행위이론
다음으로 살펴볼 대립구도는 이론의 대상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과 관련된 것이다. 즉 체계로서의 사회이건 상호주관성으로서의 사회이건 사회를 이루는 요소들을 무엇으로 보는가라는 주제와 관련된 대립구도이다.
많은 이들이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을 ‘소통이론’이라고도 부르지만 정확히 말해 그의 이론은 책 제목 그대로 ‘소통적 행위 이론’이지 소통들을 요소로 삼는 이론이 아니다.15) 그는 베버로부터 이어지는 행위 중심 사회학의 전통에 서 있다. 그는 행위자인 주체가 객체세계와 관련을 맺는 행위를 ‘목적론적 행위’ 또는 ‘도구적 행위’로 간주하며, 주체와 주체가 서로 관계를 맺는 사회적 행위의 원본이 되는 행위를 상호이해 지향적인 ‘소통적 행위’라고 부른다. 그리고 주체가 다른 주체를 객체로 간주하는 경우를 도구적 행위와 마찬가지로 성공 지향적인 성격을 갖는 ‘전략적 행위’라고 부른다. 따라서 사회적 행위는 소통적 행위와 전략적 행위로 나뉘지만 여기서 소통적 행위가 본래적인 사회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소통적 행위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하버마스는 행위 중심 사회학의 전통적인 합리성 개념을 대체하는 합리성 개념을 마련한다. 저 혼자 행위하는 행위자의 합리성이 아니라 행위자들 사이에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으로부터 나오는 소통적 합리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는 행위이론의 전통에 서면서도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을 극복하는 하나의 길이라고 볼 수 있다.16)
행위 개념과 구조 개념을 기본 개념으로 삼아 펼쳐져온 사회학의 역사에서 소통을 사회적 체계들의 요소로 삼고 의미(Sinn)를 이 요소들을 접속시키는 매체로 간주한 루만의 발상은 그야말로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와 이를 유지하는 ‘기능’을 강조했기 때문에 객관적 사회학으로 분류되곤 하는 파슨스조차도 사회적 체계들의 요소를 ‘단위 행위(unit act)’로 삼았다는 점을 볼 때, 소통이론으로의 전환은 전적으로 루만의 고유한 업적이다.
루만에 따르면, 사회적 체계들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것도 행위들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사회를 비롯한 사회적 체계들을 정보, 통지, 이해라는 세 가지 선택에 의해서 성립하는 단위인 소통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봄으로써, 루만은 주관적 사회학도 객관적 사회학도 아닌 ‘소통적 사회학’ 또는 ‘사회적 사회학’을 확립했다. 이러한 전환에 따라 행위 개념의 위상은 부차화된다. 루만은 “소통은 자기구성의 요소적 단위이며, 행위는 사회적 체계들의 자기관찰과 자기기술의 요소적 단위”(Luhmann, 1984: 241)라고 본다.
사회적 체계들의 작동(Operation) 단위인 소통은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는 사건이다. 그래서 수많은 소통들이 다른 소통들과 연결되지 못한 채 잠재화된다. 루만이 “현행화(Aktualisierung)와 잠재화(Virtualisierung), 재현행화와 재잠재화의 단위”(Luhmann, 1984: 100)라고 정식화하는 ‘의미’는 현행적으로 연결된 소통들을 ‘형식들(Formen)’로 드러내는 동시에 연결되지 못하고 잠재화된 소통들이 다시 현행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환기시키는 매체이다.17)
이러한 연결을 통해 소통들이 현행화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행위들로 관찰될 필요가 있다.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정보, 통지, 이해의 세 가지 선택은 어떤 인격에게 귀속되는 ‘통지 행위’로 단순화되어 관찰될 때만 쉽게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단순화는 사회적 체계들마다 다르게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는 가족에게는 체험으로 관찰될 뿐이지만 법에서는 범법 행위로 관찰될 수 있다. 뇌물로 받은 돈의 출처가 되는 인격은 법에서는 관심사가 되지만 경제에서는 관심사가 되지 않는다. 이렇듯 행위나 행위자인 인격을 자명한 사회적 실체로 간주하지 않음으로써, 루만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소통들의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지는 행위 귀속 가능성 및 인격화 가능성을 설명한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하버마스가 사용하는 전략적 행위와 소통적 행위의 구별은 관찰자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친밀관계에서는 투명한 합의(상호이해지향적 행위)로 관찰되는 소통이 정치에서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야합(성공지향적 행위)으로 관찰될 수도 있다.
4. 사회학적 계몽으로서의 비판 대 철학적·규범적 척도 제시로서의 비판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를 대표하는 호르크하이머는 ‘전통이론’을 데카르트 이래 사실을 숭배하는 조류라고 규정하고, ‘비판이론’을 “이성적이며 보편성에 상응하는 사회 조직”(Horkheimer, 2005: 229)이라는 이념을 갖는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구별법을 이어받아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의 병리현상을 진단하고 이를 비판할 수 있는 척도를 제시하는 일을 비판이론의 핵심 과제로 삼는다. 그래서 현대적 사회비판의 과제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 식민지화에 맞서 생활세계의 소통적 합리성을 회복하는 일이 된다. 여기서 비판의 척도는 앞서 살펴본 행위 합리성의 구별에 의지하며, 이는 형식화용론이라는 언어철학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다. 또한 행위에 있어 반-사실적(counter-factual) 규범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규범적 척도이다. 물론 이러한 척도 제시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체계라는 사실성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사회학을 참조하는 것이긴 하지만, 하버마스에게 비판이란 기본적으로 ‘철학적 근거를 갖는 규범적 척도 제시’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비판적/옹호적이라는 구별법을 이용하여 루만의 체계이론을 “지배에 순응하는 문제설정”, “기성의 것의 존속 유지를 위한 옹호론”(Habermas, 1971: 170), “현대 사회의 복잡성 상승을 옹호하는 태도”(Habermas, 1988: 426) 등등으로 평가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기능을 구조 유지에 종속시키는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 체계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적절할 수 있어도 기능 개념을 “문제와 문제 해결의 관계”(Luhmann, 1984: 84)로 정식화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기능적 등가물을 찾을 수 있고 등가물들 간의 비교가 가능하다고 보는 루만의 등가기능주의 체계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부적절하다.18) 루만은 현존하는 구조는 언제든 비교를 통해 대체될 수 있다고 보며, 모든 것은 다르게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적 사실을 다각도로 탐구하는 일과 그 사실을 숭배하는 태도는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사실 탐구의 내용은 이데올로기 비판이나 지식사회학이 그렇게 해왔듯이 다른 관찰자들에 의해 비판적/옹호적, 진보적/보수적 등등의 구별법에 따라 평가받을 수 있지만, 탐구 자체가 이러한 구별법에 얽매여 출발할 필요는 없다.
루만은 사회학이 비판적/옹호적이라는 구별로부터 출발하면 현대 사회의 문제상황에 대한 관찰에 실패하게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부터 출발할 경우 대중매체가 현대 사회에 제공한 기회와 위험부담을 동시에 관찰하는 일을 방해한다. 대중매체가 현실을 왜곡한다는 비판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세계사회의 현실이란 오직 대중매체를 통해 산출되는 현실이라는 점을 간과하게 만든다. 왜곡된 현실이나 이를 비판하는 현실이나 모두 대중매체의 현실이다(루만, 2006: 106 이하 참조).
루만은 체계와 환경의 구별을 주도적 차이(Leitdifferenz, guiding difference)로 이용하는 관찰이 현대 사회의 문제상황을 가장 폭넓게 볼 수 있도록 한다고 본다. 그리고 ‘존재/비존재’, ‘진보/보수’, ‘여성/남성’, ‘친환경/반환경’ 등 다른 구별을 주도적 차이로 이용하는 관찰자들의 맹점을 밝힌다.19) 이는 단일맥락적 세계 관찰자의 관점에서 다맥락적 체계/환경 차이 관찰자의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세계를 하나의 맥락에서 두 개의 값으로만 구별하는 일차 등급 관찰자 관점에서 수많은 맥락들에서 각각 달라지는 체계/환경 구별들을 이용해 일차 등급 관찰을 다시 관찰하는 이차 등급 관찰자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20)
루만은 사회학의 이차 등급 관찰자 관점에서 다른 관찰자들의 맹점을 밝히는 작업을 ‘사회학적 계몽’이라고 부른다.21) 그런데 이러한 계몽은 계몽하는 자가 계몽되는 자에 대해 어떤 인식론적 우월성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계몽하는 관찰자 역시 다른 관찰자 관점에서 보면 일차 등급 관찰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루만은 자신의 사회학이 스스로를 “비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헤겔과 칸트가 어떻게 기술하는지를 하버마스가 관찰하고, 하버마스가 어떻게 기술하는지를 루만이 관찰한다는 식의 연쇄라는 의미에서 “삼차 등급의 입장, 그럼에도 원리적으로는 이차 등급 관찰 입장으로부터 구별되지 않는 (더 반성이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어서만 구별되는) 입장”(Luhmann, 1997: 1117)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반성의 연쇄는 진리를 보증하거나 동일성에 이르는 일이 아니라 차이를 산출할 뿐이다. 비판으로서의 계몽은 계속 다른 합리성들을 산출하는 일이지 세계의 진리에 도달하는 목적론적 과정이 아니다. 하나의 계몽이 갖는 설득력은 그것에 다른 소통들이 연결되어 가는 과정, 즉 개연적으로(그럴듯하게) 되는 과정에 의해서만 성립한다. 비판을 통한 변화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임의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변화는 비개연적인 것이 개연적으로 되는 과정이며, 그 조건은 다음 소통에 있어 마치 필연적인 듯 느껴지는 구조, 즉 앞선 비개연적 선택들이 형성한 기대의 구조들이다.
루만의 사회학적 계몽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비판(Kritik)’이다. 비판이라는 단어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쓰는 방식보다 폭넓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kritike는 ‘판단하다’, ‘판결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를 근세에 철학적 개념으로 정착시킨 칸트의 이성 비판에서 비판은 이성의 ‘한계를 긋는 일’, 그 ‘월권을 지적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지 더 좋은 이성을 척도로 하여 더 나쁜 이성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었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역시 비판의 척도가 되는 이상적 사회를 기준으로 삼아 현실을 비판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정치경제학의 원리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를 서술함(Darstellung)을 통해 정치경제학의 한계와 자본주의 경제의 한계를 긋는 일이었다.22) 공황은 그러한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이지 공황 자체가 비판의 규범적 척도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루만의 체계이론은 하버마스의 철학적·규범적 비판과는 다른 의미에서 ‘비판적’이며, 여기서 비판이란 사회학적 계몽 혹은 과학적 비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다른 관찰자들의 구별이 갖는 맹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자신의 맹점에 대한 계몽도 감수해야 하는 끊임없는 비판의 연쇄이다. 따라서 더 나아간 비판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척도를 철학적으로 근거지을 수도 규범적으로 정당화할 수도 없는 비판이다.
5. 차이이론 대 동일성 논리
이런 면에서 보자면 루만의 비판과 하버마스의 비판은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 대표주자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차별성을 반영하고 있다.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공동 작업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성의 자기비판과 계몽에 대한 계몽을 강조하는 데서 그친다. 반면 그에 이은 단독 작업에서 호르크하이머는 주관적이며 도구적인 이성에 맞서기 위해 비판은 객관적 이성의 반동적 위험성을 알면서도 “객관적 이성을 강조하면서 수행”(호르크하이머, 2006: 216)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여기서 호르크하이머는 ‘객관적’의 뜻을 ‘상호주관적’에 가깝게 쓰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의 소통적 이성 이론은 호르크하이머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킨 면이 있다. 비판의 척도가 되는 이성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성을 구별하는 이성 이원론, 그래서 비판 척도의 동일성(identity)이 전자를 통해 확보되는 방식의 비판을 호르크하이머와 하버마스는 공유하고 있다.
반면 아도르노는 <부정적 변증법 Negative Dialektik>에서 진리, 화해, 구원(Erlösung), 객체의 매개(Vermittelung) 등에 관해 말하긴 하지만, 이는 끊임없는 부정 혹은 비판의 계기일 뿐이다. 비판하는 이성의 완성, 즉 주체와 객체의 매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며, 이것의 완성을 꿈꾸는 일은 또 다른 동일성 철학일 뿐이다. 이는 주체와 주체의 매개인 상호주관성을 이성으로 실체화하는 것 역시 동일성 철학의 반복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Identität der Identität und Nichtidentität)”(Hegel, 1986: 74)을 핵심 명제로 하는 헤겔의 동일성 논리에 맞서 아도르노는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을 개념들을 통해 여는 것이되,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을 개념들과 동일시하지 않는”(아도르노, 1999: 63-64) 사유, 즉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비동일성’을 부정적 변증법의 핵심으로 삼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차이들을 산출할 수밖에 없는 아도르노의 비판이론 노선은 합의를 지향하는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노선과는 상당한 차별성을 갖는다.
부정적 변증법의 비동일성 논리는 오히려 루만에게로 이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23) 루만은 체계(동일성)와 환경(비동일성)의 차이(비동일성)를 출발점으로 삼으며,24) 이러한 차이들이 각 체계마다 다르게 일어난다고 본다. 그는 헤겔이 전통적 존재론의 전체/부분 도식을 ‘특수자 속의 보편자’라는 발상을 통해 보편/특수 도식으로 전환시켰다고 본다.
헤겔의 정신철학에서 살아있는 실체이자 참된 주체인 정신은 “자기 자신을 통해 자기가 다르게 됨이라는 매개운동(Vermittelung)”(Hegel, 2006: 14)이다. 여기서 다르게 됨이란 자연의 생성을 뜻한다. 따라서 정신은 자연과 구별되는 특수자인 동시에 자연과의 구별을 ‘자기 안에서의 반성(Reflexion in sich)’으로 고양시키는 보편자이기도 하다. 절대자를 향한 운동 속에서 정신이라는 동일성의 외부(자연, 비동일성)는 제거된다.
전체/부분 도식과 그 변형인 보편/특수 도식의 동일성 논리에 맞서는 체계/환경 차이의 이론에 따르면, 자기지시적 체계들은 체계와 환경의 구별을 체계 안에 재도입(re-entry)함으로써 자기관찰과 타자관찰을 할 수 있다. 체계는 ‘자기 안에서의 구별’을 이용해 환경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관찰된 자기’와 ‘관찰된 타자’는 작동상의 자기와 작동상의 타자가 아니다. 모든 관찰은 자신의 작동(Operation)인 체계/환경 구별 그 자체를 관찰할 수는 없다. 구별 자체는 관찰의 맹점이다. 그래서 관찰되는 동일성으로서의 체계와 관찰되는 비동일성으로서의 환경은 비가시적인 작동, 즉 차이에 의존한다. 이런 차이이론에 따르면, 헤겔에게서 자연을 매개하는 정신의 운동이란 결국 비(非)정신과의 차이에 의존해야 하며 이 차이를 결코 극복할 수 없다.25)
이런 차이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주체와 다른 주체들의 차이는 결코 상호주관성이라는 동일성에 이를 수 없다. 상호주관적 합의란 합의와 불일치의 구별을 통해 각 주체 안에 다르게 재도입되는 합의(동일성)이다. 따라서 이러한 동일성은 합의에 대한 각 주체의 다른 이해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상호이해(Verständigung)라고 볼 수 없다. 합의라는 재현 또는 표상은 각 주체 안에서 다르게 이루어지는 작동(차이)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계 통합을 넘어서 생활세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통합 역시 불가능하며, “사회가 궁극에는 소통적 행위를 통해 통합되어야 한다”(Habermas, 1998: 43)는 목표는 동일성 철학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 관념론과 루카치의 주체-객체 동일성 테제는 상호주관성 이론에서 주체-주체 동일성 테제로 대체된다고 볼 수 있다.
동일성 철학과 관련해 소결론을 내려 보면 다음과 같다.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의 1세대 안에는 헤겔 이후 독일 철학에서 계속 반복되어온26) 동일성 논리와 차이이론 사이의 대립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2세대에서는 동일성 논리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 반면 부정적 변증법이 함축하고 있었던 차이이론은 오히려 루만을 통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27)
6. 맺음말
이 글은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이다. 우선 이 글에서 밝힌 것 말고도 그들 사이의 대립지점이 엄청나게 많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해이다. 필자는 학위논문을 통해 두 사람의 언어 이해를 비롯한 매체이론상의 대립지점을 이미 분석한 바 있으며, 두 사람의 인권이론을 비교하는 작업도 준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다룬 대립지점들은 두 이론의 명칭 자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점들이기 때문에 20세기 후반 독일 사회이론의 대립구도를 이해함에 있어 핵심적인 지점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이해인 또 다른 이유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이루어진 하버마스 중심의 비교와 달리 이 글은 루만 중심의 비교이기 때문이다. 대립하는 두 이론을 비교할 때 전적으로 공정한 비교란 불가능하다. 비교 자체도 이론이기 때문에 비교는 어떤 이론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필자는 체계이론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대 입장을 왜곡하지 않기 위한 노력은 충분히 기울였다고 판단한다.
지금까지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가 이해되어온 방식을 상당히 바꾸어보려는 이러한 시도가 한국에서 두 사상가에 대한 연구, 특히 부족한 루만에 대한 연구가 진척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비록 루만 자신은 사회학적 계몽에 머물러 있었지만, 우리는 열린 틀을 가진 이 과학적 자산을 실천적 사회비판과 대안사회의 전망 제시로도 연결할 수 있다. 필자가 볼 때 한국의 좌파 담론은 현재 ‘과학 없는 비판’과 ‘사회학 없는 정치철학’의 과잉 상태이며, 과학의 공백을 여전히 19세기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메우고 있다. 다시 사회구성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혹은 복잡한 세계사회의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일이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루만의 체계이론적 사회학은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해줄 수 있는 유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각주
1) 이들의 주요 저작 곳곳에는 직접 상대방을 거명하지는 않더라도 체계이론의 전제나 비판이론의 전제에 대한 반박이 깔려있다. 1980년대 이후 하버마스가 루만을 직접 겨냥해 비판하고 있는 대표적인 글로는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의 열두 번째 강의와 부언 설명이 있다. 루만이 하버마스를 직접 겨냥해 비판하고 있는 글로는 "Ich sehe was, was Du nicht siehst 나는 네가 보지 않는 것을 본다", Soziologische Aufklärung 5권, "Am Ende der kritischen Soziologie 비판적 사회학의 종말", Zeitschrift für Soziologie 20호 등이 있다.
2) 루만은 진리를 비진리와의 구별을 이용하되 진리라는 긍정적인 값을 선호하도록 만드는 이원적 코드를 갖는 매체, 그래서 학적 소통들(Kommunikationen)이 진리값을 갖는 소통들을 수용하기 쉽게 만드는 ‘성공매체’라고 본다. 그런데 권력, 법, 화폐, 진리, 사랑 등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 매체들’이라고도 불리는 성공매체들은 그 부정적인 값, 예를 들어 비진리에 대한 선호를 봉쇄할 수 없다. 그리고 진리는 진리 자체가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를 확정할 수 없는 역설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이 역설은 진리값과 비진리값을 할당하는 과학체계의 역사적 프로그램들에 의지해 펼쳐진다. 하지만 역설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펼침을 통해 은폐될 뿐이며, 새로운 프로그램들과의 비교에 의해 다시 가시화된다. 더 상세한 설명은 정성훈, 2009: 141 이하 참조.
3) 파슨스와의 차별성 및 아도르노와의 유사성에 관해서는 4와 5에서 다룰 것이다.
4) “자신을 ‘비판적’으로 이해한다면, 사회학이 반드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휘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 ‘비판적’을 취한다면, 이것이 우선 뜻하는 바는 사회학이 이차 등급 관찰자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Luhmann, 1997: 1119) 루만의 사회학적 계몽과 이차 등급 관찰에 관해서는 4에서 다룰 것이다.
5) ‘기능적 분화’란 사회가 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맥락에 따라 정치, 경제, 법, 과학 등으로 분화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밖의 다른 분화 형식으로는 부족, 혈연 등으로 나누어지는 ‘분절적 분화’, 도시와 농촌 또는 제1세계와 제3세계 등으로 나누어지는 ‘중심/주변 분화’, 그리고 신분들에 따라 나누어지는 ‘계층적 분화’ 등이 있다. 루만의 체계분화 이론에 관해서는 크네어/낫세이, 2008: 150 이하 및 정성훈, 2009: 171 이하 참조.
6) 포함과 배제의 구별이라는 메타코드에 관해서는 정성훈, 2009: 215 이하 참조. 기능적 분화라는 현대성을 방어하는 법체계의 침식 경향에 대한 진단은 Luhmann, 1993: 571 이하 참조.
7) 루만의 층위별 체계 분류에 관해서는 Luhmann, 1984: 16의 표를 참조. 정성훈, 2009: 9 이하의 설명도 참조.
8) 조만간 한국어 번역본이 나올 <열정으로서의 사랑 Liebe als Passion>은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이 얼마나 폭넓은 사회적 관계들을 다룰 수 있는지를 입증하는 사례이다.
9) 루만은 세포, 유기체, 신경체계 등의 생명 체계들, 심리적 체계들(의식들), 사회적 체계들, 그리고 사회의 분화된 기능체계들은 모두 그 환경들에 대해서 작동상의 닫힘(operational closure)을 통해 인지적으로 열려 있는(cognitive openness) 체계들이라고 본다. 여기서 작동상 닫혀 있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의식작용들은 의식작용들에만 준거(자기지시, Selbstreferenz)하지 의식 바깥의 실재와 결코 직접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의식은 의식(자기)와 환경(타자)의 구별을 의식 안에 재도입(re-entry)함을 통해서만 인지할 수 있다. 이런 체계들을 부르는 명칭이 자기생산(Autopoiesis)이다. 자기지시적이며 자기생산적인 체계와 모나드적 주체의 결정적인 차별성은 전자는 자기-원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가 아니라는 점, 오직 체계와 환경의 구별이라는 작동에 의해서만 - 지시된 자기밖에 볼 수 없다 하여도 자기지시란 지시되지 않은 타자와의 구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 가능하다는 점이다. 체계 혹은 동일성은 스스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환경 혹은 비동일성과의 ‘차이’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10) 루만은 소통이 타아(他我, alter ego)와 자아(ego)가 관여하는 정보, 통지, 이해의 세 가지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생각했다고(정보)뿐만 아니라 말하거나 썼다고(통지) 하더라도 소통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소통 개념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정성훈, 2009: 84 이하 및 크네어/낫세이, 2008: 114 이하 참조.
11) 루만을 비판하는 논자들은 간혹 루만이 초기의 논문에서 썼던 말인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변화를 거부한다고 평가하거나 실천의 의의를 무시한다고 평가하곤 한다. 필자는 이 말에서 ‘나’란 의식으로서의 나라고 본다. 따라서 이 말은 기원도 필연성도 없는 우연적인 기대 구조의 변경 가능성은 무한하게 열려 있다는 것에 대한 강조, 그리고 그런 변화의 인간 주체는 없다는 점에 대한 강조라고 본다. 그리고 그의 인격 개념과 행위 개념에 비추어본다면, ‘내가 변화시켰다’ 또는 ‘우리가 바꾸었다’라는 말에서 ‘나’나 ‘우리’는 소통의 진화를 특정한 인격이나 인격들에게 행위로 귀속시키는 관찰의 단위일 뿐이다.
12) 푸코의 권력 개념에 관한 간단한 설명으로는 양운덕, <미셸 푸코>, 13쪽 이하 참조.
13) 푸코, 부르디외, 네그리 등은 권력, 자본, 계급 등의 개념을 지나치게 넓게 사용함으로써 그 개념들이 가지는 ‘구별과 지칭’(루만의 ‘관찰’)의 능력, 혹은 ‘규정된 부정’(아도르노)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14) 기든스는 이를 행위 중심의 ‘주관적 사회학’과 대비해 ‘객관적 사회학’이라고 부른다. 기든스, 2006: 25 참조. 하지만 사회적 대상을 다루는 이론이 의식철학의 주체/객체 도식을 이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사회적 질서의 자립성을 강조하는 맑스나 루만의 사회학에 굳이 이런 식의 수식어를 붙이라고 한다면 ‘사회적 사회학’이 적합할 것이다.
15) 그래서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라는 책제목을 ‘의사소통행위이론’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의사소통’이 곧 ‘행위’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도구적 행위, 전략적 행위, 극적 행위 등과 구별되는 행위라는 점이 강조되기 위해서는 ‘소통적 행위 이론’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16) 행위자의 관행적(practical) 의식과 재귀적(reflexive) 행위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행위자들의 구조 형성 능력을 강조하는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은 행위이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주관적 사회학을 극복하려는 또 다른 시도이다. 구조화 이론에 관해서는 기든스, 2006 참조. 구조화 이론과 체계이론을 비교한 것으로는 정성훈, 2009: 100-109 참조.
17) 형식들은 “요소들 사이의 긴밀한 접속”이며, 매체들은 “요소들 사이의 느슨한 접속”(Luhmann, 1997: 196)이다.
18)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와 루만의 등가기능주의의 차별성에 관한 더 상세한 설명은 크네어/낫세이, 2008: 64 이하 및 정성훈, 2009: 36 이하 참조.
19) 다맥락적인 체계/환경 차이를 주도적 차이로 이용하는 이론이 다른 주도적 차이를 이용하는 이론보다 우월한가의 문제는 미리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론이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출발점으로서의 차이는 모두 우연적인 것이며 그 차이가 가질 수 있는 설명력의 우위는 오직 그로부터 연결되는 연구의 생산성과 적합성에 의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따라서 체계/환경 차이의 우월성은 미리 주어지는 것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 우월성은 경제, 과학, 법, 예술, 종교, 정치, 대중매체, 저항운동, 조직, 친밀관계 등에 이르는 루만의 방대한 연구 성과와 그것이 갖는 설득력에 의해서만 입증된다.
20) 루만은 이런 발상을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이가(二價) 논리학을 비판하면서 다가(多價) 논리학을 시도한 고트하르트 귄터(Gotthard Günther)로부터 가져왔다.
21) 루만은 자신이 쓴 논문들을 주제별로 모아 1970년부터 1995년까지 여섯 권의 <사회학적 계몽> 시리즈를 펴낸 바 있다.
22) 맑스는 라쌀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정치경제학 비판 기획을 “서술을 통한 비판”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23) 필자는 논리 이외의 측면에서 아도르노와 루만을 비교하는 작업은 본격적으로 착수하지 못했다. 논리상의 유사성에 관한 더 상세한 서술은 정성훈, 2009: 259 이하 참조. 사회학의 측면에서 아도르노와 루만의 공통점과 차별성을 밝힌 독일의 연구로는 Breuer: 1995가 있다.
24) <사회적 체계들 Soziale Systeme>의 ‘도입’에서 루만은 체계이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이 “동일성과 차이의 차이(die Differenz von Identität und Differenz)”임을 뚜렷이 밝히면서 이것이 변증법 전통과 갈라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부정적 변증법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Luhmann, 1984: 26 및 각주 19 참조.
25) 헤겔의 보편/특수 도식을 차이이론의 관점에서 더 상세하게 비판한 글로는 정성훈, 2008: 385 이하 참조.
26) 헤겔의 동일성 철학에 대한 비판은 포이어바흐로부터 시작되며, 이는 슈티르너와 맑스를 거치면서 급진화된다. 물론 이들은 한편에서는 동일성 논리를 비판하면서 포이어바흐의 유적 본질(Gattungswesen) 개념이 보여주듯이 다른 방식으로 동일성 논리를 반복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논문을 통해 다룰 것이다.
27) 그래서 1968년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도르노가 더 이상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자리를 루만이 이어받은 일은 의미심장하다. 당시 루만이 진행한 세미나가 사랑의 사회학이었고, 여기서 작성된 습작이 발전되어 1982년 <열정으로서의 사랑>으로 출간된다. 이 세미나를 계기로 자극을 받은 하버마스는 독일 사회학 대회에 루만을 불러내어 두 사람의 첫 번째 논쟁이 시작된다. 루만의 제자인 디르크 백커(Dirk Baecker)가 인터넷에 올린 영문 소개글(http://projects.isss.org/Main/NiklasLuhmannByDirkBaecker)을 참조하라. 물론 프랑크푸르트에서 루만의 세미나는 일회로 끝났고 빌레펠트에서 교수직을 얻어서 빌레펠트학파가 시작된다. 또한 아직까지 필자는 루만이 아도르노와 자신의 공통점을 언급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가 프랑크푸르트학파 내지 비판이론을 언급할 때 그것은 항상 하버마스를 대표로 하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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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작성자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