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발제
1.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신경증자로서의 주체
라플랑슈와 퐁탈리스가 쓴 『정신분석사전』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약술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부모에 대해 느끼는 사랑과 증오의 욕망의 조직 전체. 이른바 그 콤플렉스의 양성적 형태는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에서처럼, 경쟁자인 동성 부모의 죽음을 욕망하고 이성 부모에 대한 성적 욕망으로 나타난다.......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인격의 구조화와 인간의 욕망의 방향을 결정짓는 데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1) ( 라플랑슈. 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정신분석 사전』, 임진수 옮김, 열린책들, 2005, p261.)
프로이트는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정신분석학의 주춧돌”2)(홍준기, 「자끄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프로이트ㆍ라깡 정신분석학: 이론과 임상」, 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 비평사, 2002, p45. 이하에서 발표문의 바탕이 될 이 논문의 인용 시에는 별다른 표기없이 괄호 안의 쪽수를 써넣어서 표기하기로 한다. 인용 속의 강조는 원문의 것이다.)로 보았으며 거세콤플렉스는 유한한 인간에게는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구조적 암반”이라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야말로 정신분석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 중 하나이며,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이 비로소 성적 주체로 태어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의 독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곧 정신분석학이 하나의 학적 체계로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46)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들은 대부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겨냥하고 있다.3) (실증주의적 과학관에 기초해서 정신분석의 사례들을 반증불가능한 사이비 과학으로 보는 포퍼의 비판과 모계 사회 연구 등을 기반으로 프로이트가 근친상간 금지의 문화적 성격을 간과했음을 비판하는 말리노프스키의 비판에 대해서는 홍준기, 『라캉과 현대철학』, 문학과 지성사, 1999, pp.236~246을 참조할 것.) 이들 통속적인 비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우리의 상식적인 도덕의식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해, “인간을 과거에 고착되어 자유를 상실한 존재로 만든다는 비판”이 그 주종을 이뤘는데, 그 비판의 정당성을 따져보기 이전에 정신분석학의 내적 맥락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성이 성적 결합이나 성행위 같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부모와 아이 간의 “모든 양육행위, 관심과 애정의 표현”, 곧 “시선과 목소리의 교환”, “똥 누이기” 등도 정신분석학의 맥락에서는 넓은 의미에서의 성적활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 둘째로 프로이트가 본능Instinkt과 충동Trieb을 구분한다는 점(46).
본능과 충동의 구분은 중요하므로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본능은 인간(동물)을 미리 정해진 특정한 행위”로 이끈다는 점에서 결정론적이다. 반면 충동은 본능에 기초를 두고 있되, “본능과는 달리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하므로 “예외와 일탈을 허용”(47)하기에 생물학적 재생산, 성감대의 만족과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바처럼, 충동은 육체와 심리 사이의 ‘한계개념’이며, 이것은 “목적성을 갖지 않으므로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다양한 대상에서 같은 만족을 얻을 수 있으며, 심지어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충족에 도달 할 수 있다.”4) (홍준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정신분석강의Ⅰ』, 아난케, 2005, p20. 충동은 그 자체로 성구분을 갖지 않는 무성적인 것이지만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거세콤플렉스를 경유하면서 주체는 타자의 영역 속에서 남성적 또는 여성적 위치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미리 결정된 과정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동의 대상이 꼭 실제 대상일 필요는 없다. 정신분석은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충동, 욕망, 향유jouissance 등의 개념을 그 대상으로 갖는다. 바나나와 사과의 예(47)에서 볼 수 있듯이 충동의 대상인 것은 현실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현실을 유지시키는 환상,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심리적 현실’로서의 환상으로서 “사후적으로nachträglich”(불어의 전미래 시제를 생각해보자 : ‘거세는 실제로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거세 콤플렉스는 아버지가 실제적으로, 역사적으로 위협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아들의 환상 혹은 환상적 해석의 결과”(47)가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는다는 것과 신경증자가 되는 것은 곧 같은 의미인데 이것은 이 두 항이 부동의 기계적, 직선적 인과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서의 증상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원인과 시간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 때 신경증자가 아버지가 근친상간을 금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한 만족을 주는 어머니라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49). 자신의 실존적 공허를 견뎌내는 것보다 이러한 착각이 더욱 견딜만한 것이기 때문에, 신경증자는 오히려 근친상간 금지명령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대상을 소유하고 있는 경쟁자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자기의 팔루스적 약함을 견뎌야 하는 것보다 편하다.”5)(페터 비트머, 『욕망의 전복』, 홍준기 외 옮김, 한울, 1998. p148)
2.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석 - ‘아버지의 이름’을 중심으로
이제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석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 차례이다. 프로이트가 당대의 다윈의 진화론을 신봉하는 등 ‘과학주의적 오류’로 얼마간 편향된 측면이 있었다면,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은 “철저히 구조적”인 파악으로서, 말리노프스키 등의 프로이트 비판이 함축하는 “생물학적, 역사학적 혹은 신화적 이해방식”(50)과는 대립된다는 특징을 가진다. 레비스트로스와 소쉬르 등의 구조주의 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라캉의 이러한 구조적 해석은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제시하는 ‘원초적 아버지’의 원시군거집단의 근친상간금지법 역시 문자적, 역사적, 발생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구조적으로 해석할 것을 요구한다. 이 아버지는 “이름”으로 , “상징적 의미” 속에 존재하는, “은유 혹은 기표”(52)로서의 아버지이다. 이 아버지의 이름(nom)은 곧 아버지의 금지(non)이기도 한데, 라캉에게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가족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속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삼각관계’, 즉 구조적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라캉의 팔루스Phallus는 무엇인가? 라캉은 남녀의 ‘차이’ 자체를 상징하는 기표로서의 팔루스와 육체기관으로서의 페니스를 구분한다. 팔루스는 “결여 자체의 상징”으로서 양성의 이상적 합일(“성적 관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54). 주체는 궁극적으로 무無에 불과한 남근을 상상적 팔루스로 승격시킴으로써 결여를 메우려는 신경증자가 되며, 이 팔루스와 주체가 갖는 구조적, 논리적 위치 또는 향유의 방식에 따라 남녀를 구분한다.6)(홍준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정신분석강의Ⅰ』, 아난케, 2005, p63. 성적 차이에 대한 라캉적 탐구의 보다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슬라보예 지젝 외, 『성관계는 없다』, 김영찬 외 엮고 옮김, 도서출판 b, 2005를 참조할 것.) 라캉의 팔루스 개념은 그를 남성중심주의의 옹호자로 오해하도록 부추기기도 하는데, 하지만 라캉의 팔루스는 자신을 지탱할 궁극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남성을 지탱해주는 팔루스란 단지 결여의 상징이므로 페니스를 가진 남성의 우월의식은 단지 착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곧 “주체에게 상상적인 만족감, 근거없는 충족감을 주는 모든 것, 자신의 결여를 채울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무’일 뿐인 이 모든 것이 팔루스라는 상징 속에 포함된다.”(56) 가령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부재와 현존의 교대 속에서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어머니는 왜 팔루스를 욕망하는가? 그것은 아이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결여된 존재이기 때문이고, 이때 팔루스는 주체의 결여를 채워준다고 가정되는, 그러나 실정적인 대상으로서 무엇이 아니라 “결여 자체의 상징”(53)이 된다. 만약 아이가 어머니가 원하는 팔루스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수용하면 어머니와의 상상적 이자관계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아버지의 이름’을 수용하지 못하게 되면 상상적 이자관계- 곧 근친상간 관계-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라는 제3자, 아버지의 이름(이 제3자를 라캉은 상징계, 대타자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없이 어머니와 아이 간의 둘만으로 이루어진 폐쇄적 세계, “아버지의 이름의 배척(forclusion)”(56)이 바로 정신병의 세계이다.7)(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라캉이론과 임상분석』, 맹정현 옮김, 민음사, 2002, pp. 192~193 “아버지의 상징적인 기능을 전복시키는 것은 이로울 게 없다는 것, 그 결과는 아버지의 기능 자체보다도 더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신병의 발병률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이냐, 더 나쁜 것이냐 ~ou pire>라는 제목으로 실행한 세미나 XIX에서 말하려고 했던 바이다. 물론 그 제목에서 생략된 단어는 바로 아버지란 뜻의 père이다.”) 신경증자는 적어도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고 상징적 거세를 수용한, 곧 자신이 어머니의 팔루스가 될 수 있고 완벽한 만족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포기함으로써, 완결이 불가능한 애도작업Trauerarbeit을 수행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주체이다. “팔루스가 됨(être le phallus)”에서 “팔루스의 소유(avoir le phallus)”로의 이행(57)은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와의 상징적 동일화를 함으로써 가능해진다. 58쪽의 도식 중 왼쪽의 삼각형이 나타내는 것이 상상적 자아moi와 이상적(상상적) 어머니 또는 이상적 자아Ideal ich가 갖는 근거없는 충족감을 주는 상상적 팔루스(Ψ)적 관계라면, 오른쪽 삼각형은 아버지의 이름, 즉 상징적 팔루스(Φ)의 개입으로 자아의 이상(Ich ideal)로서의 어린아이와 상징화한 어머니가 3자관계를 맺는 상징적 관계이다.8)(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외 옮김, 인간사랑, 1998, p327. “자아이상은 상징적 내사introjection이고 이상적 자아는 상상적 투사projection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자아이상은 내재화된 법률계획으로서, 이상으로서, 상징적 질서에서 주체의 위치를 좌우하는 길잡이로서 작동하는 능기이다.......반면에 이상적 자아는 거울단계의 거울상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것은 자아가 바라는 미래 통합에 대한 약속이며, 자아가 구축되는 통일성의 착각이다.”)
동물적 인간에서 인간주체로 변하기 위해서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원하는 팔루스는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서 라캉은 “아버지 은유métaphore paternelle”를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욕망의 기표인 S'가 아버지의 이름, 기표 S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은유적 의미(s)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름, 명사, 금지로서의 아버지는 엄마를 지워버리며, 중화시키며, 대체한다. 간단히 말해, 아버지는 자신의 금지와 이름으로 엄마를 대체한다.”9)(60쪽 공식에서의 횡선은 기표의 대체와 억압을 보여준다) 아버지 기표가 개입하기 전에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은 아이 자신이었지만, 아버지의 이름nom du père의 개입으로 인해 아이는 ‘문자적’ ‘육체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은유적 의미에서만 혹은 무의식적으로만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10)(아버지의 이름이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과 은유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언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듯이 ‘아버지임’의 진리는 다른 질서에 속한다. 우리가 ”나는 어떤 정자의 아들 또는 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난센스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리프 쥘리앵, 『노아의 외투: 아버지에 대한 라캉의 세 가지 견해』, 홍준기 옮김, 아난케, 2000, pp84~85.) 이러한 은유적 언어사용은 신경증자에게 가능한 것으로 정신병자는 이러한 은유나 간접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 라캉은 “팔루스의 의미작용”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팔루스가 영원히 상실된,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원천 혹은 의미작용 자체”(61)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라캉에게 아버지 은유는 인간은 유한하고 결여된 존재이며 그 욕망은 결코 완전히, 직접적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라캉의 ‘프로이트로의 복귀’의 의미
요컨대 라캉이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창했다는 것의 의미 역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비판과 정신분석학에 대한 거부를 극복하려는 노력에 그 핵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이 안나 프로이트, 하르트만 등의 자아심리학을 “직선적 인과론, 생물학적 환원주의, 생식기 중심주의, 사회순응주의에 근거하”(63)고 있다고 비판한 것은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정신분석의 ‘합리적 핵심’을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는 알튀세르가 마르크스 유물론에 대한 인간주의적 해석-청년 마르크스, 루카치,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으로 이어지는-과 싸우면서 인식론적 단절, 과잉결정 등의 개념을 통해 일생동안 마르크스에 대한 재해석과 개조작업을 지속했던 것과 종종 비견되기도 한다.11)(마르크스에 대한 알튀세르의 쇄신 노력에 대해서는 루이 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옮김, 백의, 1997 및 루이 알튀세르 외, 『자본론을 읽는다』, 김진엽 옮김, 두레, 1991 등을 참조하고 알튀세르가 라깡의 ‘프로이트로의 회귀’의 의미를 평가한 문헌으로는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와 라깡」,『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도서출판 솔, 2000을 참조. 단 위 논문에서 호의적이었던 알튀세르의 라캉에 대한 평가는 이후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이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에서 비판적 관점으로 바뀌게 된다.) 라캉의 프로이트로의 복귀는 위에서 “아버지의 은유”를 살펴보면서 보았듯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지어져 있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소쉬르나 야콥슨의 언어학의 영향 하에서 작업했다는 점에서 물론 라캉은 구조주의 운동의 후예 중 한 사람이지만, 그러나 라캉이 단순히 구조 속에서 해체되는 주체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라캉은 무의식의 ‘주체’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떠한 주체인가? RSI 도식이나 각종 수학소 등의 개념을 계속적으로 가공해나가면서 라캉은 자신의 체계를 끊임없이 쇄신했고 그의 사상은 그만큼 다면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는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정신분석은 숱하게 많은 이론적 분파들을 낳게 되었지만 오늘날 프로이트를 말하기 위해서 라캉을 우회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3.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남는 의문
지금까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프로이트에 대한 라캉의 해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라캉의 언어학적, 구조적 해석은 프로이트가 이른바 ‘범성욕주의자’라는 비판을 방어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성적 요인만으로 규정되지도 않으며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문화적 요인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곧 그것은 중층적 결정 과정이다. 그런데 모든 2자적 관계에 대해 라캉은 모든 인간관계 속에 존재하는 필연적 사실로서 3자적 관계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매개’로서 아버지 은유의 필연적 존재를 도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는데 있어서 가족 모델의 분석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12)(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 전승화 옮김, 동문선, 2005, p184. 가령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분석학은 줄기차게 부모와 가족의 통로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다른 분기를 택하지 않고 이 분기를 택했다고 정신분석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 분기로 막다른 골목을 만들었던 점, 어쨌거나 정신분석학이 야기한 새로운 발화체들을 사전에 분쇄하는 발화 행위의 여건들을 고안했다는 점에서 정신분석은 비난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3자 관계의 구조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가족과 사회 사이의 일정한 상동성을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가족 내의 가부장적 구조와 사회의 권위주의적 구조를 평행적으로 보는 식의 분석은 둘 사이의 존재하는 차이, 사회가 갖는 고유의 종별성, 복잡성을 사상시킬 우려가 있다. 두번째로 가족을 어떤 공시적인 구조적 모델로 삼는다고 할 때, 가족 자체 내에서, 또는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 관계가 가족을 관통하고 있는 모순과 변화의 역동적 과정을 살피기에는 난점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가족이라는 것 자체의 ‘역사성’을 파악하기에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은 충분히 개방적인가?13)(예컨대 유럽에서 ‘아버지’ 개념의 변화를 아이에 대한 권리, 아이의 권리, 아이의 친권을 소유할 권리 등으로 나누어 분석한 것으로는 필립 쥘리앵, 위의 책, pp. 47~68을 참조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 비평사, 2002
홍준기, 『라캉과 현대철학』, 문학과 지성사, 1999
홍준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정신분석강의Ⅰ』, 아난케, 2005
장 라플랑슈. 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정신분석 사전』, 임진수 옮김, 열린책들, 2005
페터 비트머, 『욕망의 전복』, 홍준기 외 옮김, 한울, 1998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라캉이론과 임상분석』, 맹정현 옮김, 민음사, 2002
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외 옮김, 인간사랑, 1998
필리프 쥘리앵, 『노아의 외투: 아버지에 대한 라캉의 세 가지 견해』, 홍준기 옮김, 아난케, 2000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와 라깡」,『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도서출판 솔, 2000
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 전승화 옮김, 동문선,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