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프레이저
세계화되는 현실에서의 정의, 새로운 틀구성.
케인즈주의-베스트팔렌적 틀 아래에서, 정의에 관한 논의는 근대 영토국가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국가 차원에서 케인즈주의의 경제적 진두지휘를 촉진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의 정치적 허상, 즉 국내와 국제를 철저히 나누는 영역 구분의 허상에 의존하고 있었다. 당시에 논증의 초점은 한 사회 내에서 사회적 관계들을 정의롭게 구성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이때의 논의가 정의의 ‘무엇’이 문제가 되지 논쟁자들이 ‘누구’인지에 관한 문제를 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명백하다. 민족국가의 시민이 바로 이 ‘누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틀은 변화하고 있다. 초국적 법인이나 국제 통화 투기자들, 대규모 제도적 투자자들의 행위에서 볼 수 있듯이 영토국가 내의 결정도 국가 밖 사람들의 삶에 자주 영향을 끼친다. 또한 오늘날 재분배 요구들은 점점 더 국민경제를 가정하기를 그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정을 목표로 싸우는 운동들 역시 영토국가 너머를 내다보고 있다. 오늘날 정의에 관한 논의들은 중첩된 모습을 보인다. 예전처럼 지금도 실질 내용과 관련된 일차적 층위의 물음들이 다루어지지만 오늘날 정의에 관한 논의들은 더 나아가 이차적 층위의 물음들, 메타적 수준의 물음까지를 제기한다. 정의의 실질 내용뿐 아니라 정의의 적절한 틀까지도 함께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의 이론은 인정의 문화적 차원과 분배의 경제적 차원, 이 두 차원에 더해서 대의/표현representation의 정치적 차원까지 함께 놓아야 한다고 본다. ‘무엇’과 ‘누구’에 더해서, ‘어떻게’라는 세 번째 유형의 물음이 필요하다. 사회적 정의 이론은 이제 탈베스트팔렌적 민주적 정의 이론이 되어야 한다.
정의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참여의 동등성이다. 이때 부정의를 극복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과 대등하게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화된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다. 제도화된 장애는 경제적 차원(분배적 부정의), 문화적 차원(지위의 불평등이나 불인정)으로 나뉘어지는데, 양자는 서로 인과적으로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어떤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측면을 포괄하는 이차원적 모델이 요구되며, 이것이 최소한 내가 과거에 옹호해왔던 정의관이다. 그러나 이는 케인즈주의-베스트팔렌적 틀이 당연시되는 경우에 한해서 유효할 뿐인데, 틀의 문제가 쟁점으로 거론되면 세 번째 차원의 정의가 곧장 가시화된다. 정의의 세 번째 차원이 바로 정치적 차원이다. 이 ‘정치적인 것’은 분배와 인정에 관한 싸움들이 상연되는 무대를 제공한다. 우선 이 정치적 차원은 사회적 소속의 기준들을 만들고 그리하여 누구를 구성원으로 볼 것인지를 결정함으로써 다른 차원들의 범위를 지정해준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차원은 결정 규칙들을 설립함으로써, 경제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 안에서 논쟁들을 무대에 올리고 결정핮는 데 필요한 절차를 마련한다. 이처럼 소속 구성원과 절차라는 이슈가 중심에 놓이는 정의의 정치적 차원에서 주로 다뤄지는 것이 대의/표현representation의 문제이다. 정치적인 것의 한 측면이 경계선 설정과 관계된 수준에서, 문제는 사회 소속 여부의 문제이며, 쟁점은 포함이냐 배제이냐 이다. 정치적인 것의 다른 측면인 결정 규칙과 관련된 수준에서, 대의/표현의 문제는 쟁론의 공적 과정을 조직하는 절차와 관계된다. 정치적인 것이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정의의 차원이며, 따라서 경제적인 것이나 문화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특정 종류의 부정의를 야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부정의는 바로 대의부재/표현차단misrepresentation이다. 먼저 최소한 두 수준의 대의부재/표현차단이 구분될 수 있는데, 우선 결정규칙들이 이미 포함된 사람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동등한 성원으로서 완전히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을 때, 이를 보통의 정치적 대의부재/표현차단이라고 부른다. 가령 대안적 선거 시스템들의 정치학적 논쟁들(소선거구제, 대선거구제 등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두 번째 수준의 대의부재/표현차단은 덜 가시적인데, 이는 경계선 설정과 관련된다. 이는 잘못된 틀 구성misframing이라 불리는 것이다. 잘못된 틀구성은 일차적 층위의 정의 요구를 말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아예 거부당하는 특수한 종류의 메타적 부정의이다. 이런 종류의 잘못된 틀 구성은 아렌트가 ‘권리를 가질 권리’라고 칭했던 것이 상실된 상태와 흡사하며, 일종의 정치적 죽음과도 같다. 이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인간 아닌 자들이 되고 만다. 최근 세계화로 인해 가시화되기 시작한 문제가 바로 잘못된 틀구성 형태를 띠는 대의부재/표현차단이다. 예전에 전후 복지국가의 전성기에는 정의에 관한 사유를 주도하던 원칙적 관심사가 분배였다. 이후 신사회운동들과 다문화주의의 출현에 따라 무게중심은 인정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이 두 경우 근대의 영토국가는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정의의 정치적 차원은 주변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오늘날 세계화는 틀의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올려놓았다. 강력한 약탈국가, 외국인 투자자나 채권자 등 초국적 사적 권력, 국제 통화투기자, 초국적 법인 등등의 경우를 보자.
재분배와 인정에 대한 모든 요구 안에는 항상 대의/표현이 이미 들어 있다. 정치적 차원은 정의 개념의 문법상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의/표현 없이는 재분배도 인정도 없다. 이것은 토의 민주주의 이론에서 충분히 강조되지 않은 사실이다. 적절한 대의/표현의 정치라면 정치적 부정의의 세 번째 차원, 틀을 정하는 과정까지도 민주화하려고 애써야 한다. 누가 정의의 주체로 간주되는지, 무엇이 적절한 테두리인가 하는 이슈에 초점을 맞추는 이 틀구성framing 정치는 정치적 공간의 권위 있는 분할선을 만들고, 수정하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틀 구성 정치는 두 가지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는데, 하나는 수긍적affirmative 틀구성 정치이다. 이 접근법은 틀 설정의 베스트팔렌적 문법은 받아들이되, 현존하는 틀의 경계선만을 문제삼는다. 그들은 국가영토적 원칙을 수용한다. 두 번째 판본의 틀 구성 정치는 전환적transformative 접근법이다. 여기에서는 국가영토성의 원칙이 더 이상 정의의 ‘누구’를 결정하는 모든 경우에 예외없이 적절한 토대를 제공할 수는 없다고 본다. 금융시장, 해외 공장, 투자체제, 세계경제의 통치 구조, 전 지구적 미디어의 정보 네트워크, 생명 정치 등과 같은 문제들과 관련해 부정의를 범하는 권력들은 장소의 공간이 아닌 흐름의 공간에 속한다.
이렇게 볼 때 전환적인 틀구성 정치는 세계화되는 현실 안에서 틀 설정의 심층적 문법을 바꾸려 한다. 이 접근법은 하나 또는 여럿의 탈베스트발렌적 원칙을 보완하려고 한다. 틀 설정의 탈베스트팔렌적 양태는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모든 당사자 원칙’이 가장 유망한 후보이다. 어떤 사회 구조나 제도에 영향을 받는 모든 이들이 그 구조나 제도에 관련한 문제에서 정의주체로서의 도덕적 입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공통된 구조적 혹은 제도적 얼개 안에서 함께 엮여있기 때문에 정의의 동료 주체가 된다. 오늘날 세계화 행동주의자들은 정치 공간의 국가영토적 분할법을 공략하기 위해서 모든 당사자 원칙에 직접 호소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환적 틀 구성 정치는 여러 차원과 수준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사회운동들은 한 수준에서 부당분배, 불인정, 보통의 정치적 대의부재/표현차단이라는 일차적 층위의 부정의를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두 번째 수준에서는 정의의 ‘누구’를 재구성함으로써 잘못된 틀 구성의 부정의를 제거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국가영토 원칙이 부정의를 면책하는 데 기여한다면 이 운동들은 그 원칙 대신 모든 당사자 원칙에 호소한다. 전환적 정치의 요구들은 훨씬 더 나아가는데, 이 운동들은 탈베스트팔렌적 틀 설정 과정에서의 발언권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의의 얼개가 그려지고 수정되는 과정을 민주화하려고 한다. 정의의 ‘누구’를 구성하는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동시에 ‘어떻게’를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민주적 경연장을 창출할 것을 요구한다. 예컨대 세계사회포럼. 이런 식으로 그들은 탈베스트팔렌적 민주적 정의의 새 제도들이 성립될 수 있음을 선보이고 있다. 세 번째 층위의 정치적 부정의를 우리는 메타정치적 대의부재/표현차단이라고 부른다. 이 투쟁은 ‘누구’라는 문제에 관한 논쟁을 민주적으로 발의하고 결정할 수 있는 제도가 결여되어 있음을 드러내면서 ‘어떻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세계화되는 오늘날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쟁이라면, 메타정치적인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들과 손잡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이 수준에서도 다시, 대의/표현 없이는 재분배도 인정도 없다. 오늘날 독백적인 사회정의론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누구’에 관한 결정은 점점 더 정치적인 문제로 간주된다. 이제부터 결정의 민주적 과정은 정의의 ‘무엇’뿐만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 모든 수준, 보통의 정치적 수준은 물론이고 메타정치적 수준에서도 대화적일 때 탈베스트팔렌적 민주적 정의 이론이 될 수 있다. 이런 설명이야 말로 우리가 세계화되는 현실에서 틀의 문제를 정의의 핵심 문제로 볼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