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 van Hooft, Understanding Virtue Ethics, 2006, Acumen Publishing Limited, p.83~108의 요약문

 


스토아학파에서 레비나스까지 덕의 약사略史


개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구의 도덕 사상의 역사는 의무 개념을 위한 덕 개념의 점차적인 축소로 특징지어진다. 사람들에게 덕은 단순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여겨졌고, 이와 같은 현상은 플라톤에게서 유래한 두 가지 주된 관념의 영향 하에서 일어났다. 즉 우리는 초월적 실재의 지도 아래에 살아야 하며, 이성을 통해서 이러한 실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서 좋음이나 정의는 단순한 개념인 것이 아니라 실재이다. 우리가 세속적이고 오류가능하며 유한한 실존 속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유는 신적인 이상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종교적 전통뿐 아니라 스토아학파로부터 시작되는 많은 철학자들의 저작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다.

스토아학파는 인간은 자연의 영원한 질서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욕망과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에 의해 지도되는 것, 평정을 받아들이고 정념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자연의 질서에 맞추어 살 수 있는 방법이다.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기독교 신학의 경우 초월적 실재라는 애매한 개념은 신이라는 보다 특정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신은 히브리 전통에서 도덕법의 새로운 규범성을 주는 것으로 가정된다. 우리의 의무는 신의 의지 또는 섭리로서의 우주적 질서에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인간의 탁월성은 그의 세속적 욕망을 억누르고 신 또는 자연이 부여한 법칙에 따르는 것이 되며, 이는 칸트에게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만약 덕 윤리가 다시 부활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두 가지를 다시 확립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어떤 초자연적인 정당화나 규범에 호소할 필요없이 이 세계 속에서 우리의 탁월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로 감정은 이성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서구 윤리학사에서 보다 중요하게 떠오르는 주제는 타인과의 관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이 공동체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며,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준다는 의미에서 정의라는 덕을 강조했다. 그의 우정에 대한 분석은 또한 이러한 사회성에 대한 강조를 보여준다. 다른 한편 덕스럽게 된다는 것의 요점은 개인의 행복을 달성하는 것에 있으며, 이는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에의 배려’이다. 이하에서 우리는 덕 윤리를 흄, 니체, 레비나스의 사례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데이비드 흄

아퀴나스의 종교적 세계관과는 달리 우상파괴적인 세속주의자로서의 흄은 우리의 지식은 직접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가 직접적인 감각 경험을 가질 수 없는 신이나 영혼과 같은 형이상학적 요청들은 의문시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예컨대 인간 욕망과 경향에 대한 어떤 지식을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즉 흄이 주장하는 바는, 존재is에 대한 진술에서 당위ought에 대한 진술을 연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흄은 또한 욕망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으로 상정된 전통적 도덕 심리학도 의문에 부친다. 이성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에 불과하며 이성 자체로는 어떤 규범이나 당위적 진술을 정초할 수 없다. 흄의 기본적인 통찰은 이성은 정념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쓰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도덕규범의 기초는 이성이 아니라 타인들에 대한 염려의 감정이 된다. 흄은 이를 동정, 애정, 인간적 감정 등으로 부른다. 덕스러운 사람은 바로 동정과 타인에 대한 염려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다. 만약 도덕지식이 형이상학적 요청이 아닌 경험에 기반을 두어야한다면, 도덕성이란 객관적인 토대라기보다는 주관적인 토대, 우리의 도덕감을 토대로 갖는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 악한 행동에 대해 승인의 감정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인 행복이나 유용성을 가져오는 행동을 승인해야한다. 물론 이를 판단하는 것은 순수이성의 문제가 아니며, 이러한 승인은 우리의 타인에 대한 동정심, 돌봄의 감정으로부터 온다. 흄은 도덕지식을 설립하는 도덕감을 가장 주된 덕으로 보았고, 여러 덕 가운데에서도 특히 타인에 대한 동정심에 주목했다. 흄의 도덕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설명은 감정을 우리 삶에 중요한 부분으로 복귀시켰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는 대부분의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서로에 대한 선의의 감정을 갖으며, 도덕성이란 이러한 감정의 체계적인 표현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철저히 세속적인 현상으로 덕과 도덕을 보는 관점으로, 선이나 신의 계율, 자연의 이성적 질서를 분별하기 위한 우리의 순수이성에 의거하는 관점과 구분된다. 덕은 도덕법칙에 복종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인간적 감정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에 존재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흄의 인간관이 낙관적인 것이었다면 니체의 인간관은 상대적으로 비관적이다. 그는 인간 존재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기는 ‘힘에의 의지’라고 주장한다. 이는 자기-주장self-assertion과 경쟁성에 대한 충동 또는 본능이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기를, 지배하고 세계를 전유하고자한다. 노력과 극복과는 반대로 복종이나 겸손의 형태를 띤 어떤 것도 자연에 반하는 것일 뿐이다. 힘에의 의지는 타인들과 사물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노력이며, 가장 깊고 근본적인 의지는 자신을 타인과는 분리된, 더 우월한 것으로 단언하는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기독교의 거대 이론은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고안된 (허구적) 이야기일 뿐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실제로 이 세계는 끔찍한 곳이고 이 모든 비참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은 그러한 이야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해석학적 개념을 선취하면서, 니체는 이와 같은 믿음은 그저 진리에 기반을 두지 않으며 증명될 수 없는 위안, 단지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만 가치를 갖는 것에 거짓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니체 이전의 많은 견해들이 우리의 세속적 삶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고 이상화되고 완벽한 초자연적 영역을 위해 이 세계를 거부하라고 가르쳤다. 반면 니체는 많은 결점을 가진 것으로서 인간성 개념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이 대지 위에 뿌리내린 우리의 실존을 긍정한다.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잠재력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힘에의 의지로서 우리를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경쟁적이고 공격적이며 자기-주장적인 이 표현이 도덕성과 잘 조화될 수 있는가? 니체는 도덕을 두 가지 양식,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으로 구분한다. 먼저 주인도덕은 고유한 힘에의 의지를 표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 지배자, 귀족과 같은 존재의 도덕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탁월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며, 고유한 자기조절과 자기형성을 행한다. 반면 노예 도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약하고 비참하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자들로서, 자신만만하고 강력한 자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강한 자들을 악한 것으로 부르면서 다수 속에서 안락을 찾으려한다. 이처럼 증오, 공포, 분노를 통해 무리 근성herd mentality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약함과 겸손을 축복하는 신이라는 관념은 너무나 성공적인 나머지 주인도덕을 가진 이들마저도 감화시키고 말았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힘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종국에는 노예적 정신성이 서구 문화를 지배하게 되었다. 노예도덕은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면서 복종과 약함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지만, 실제로는 주인을 지배하는 부정직한 것이다. 의무와 복종을 강조하는 도덕의 개념도 부분적으로는 이처럼 부정직한 것이다.

또한 니체는 힘에의 의지와 더불어 ‘자유정신’을 옹호한다. 이는 근대 유럽인들의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으로, ‘극복하는 인간’ 또는 초인übermensh의 유형이다. 이러한 귀족적 인물은 그들의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힘에의 의지를 발휘한다. 이어서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일종의 영원회귀의 윤리를 도입한다. 만약 당신의 삶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영원히 반복되어야 한다고 상상해보라.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당신의 세계 속에서의 실존과 그대로의 삶을 수용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운명애amor fati를 가질 수 있다면 당신은 바로 자유정신일 것이다. 이러한 윤리는 어떠한 사후의 초월적인 보상이나 낙관적 인간관과 형이상학이 주는 거짓 위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정직성, 진정성authenticity, 운명애를 덕성으로 갖는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타인과의 덕스러운 관계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성품의 개념을 검토해야 한다. 20세기의 많은 대륙 철학자들이 바로 존재의 근원적 양식primodial mode of being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이 윤리학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검토해왔다. 가령 사물의 존재양식에서 가장 근본적인 특성은 그것이 시공간을 차지하며 사건의 인과연쇄에 속해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우리는 능동적이며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순수한 역동이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창조적인 자기-형성이다. 이와 같은 자기-투사에 대한 강조는 니체와 실존주의 전통에서도 중심적인 문제인데, 이는 타자와의 관계라는 문제를 미제로 남겨둔다. 나의 세계 속에서 타자의 현존은 그 자체로 문제로 나타나는데, 사르트르는 이 점을 특히 명료화시켰다. 예컨대 조용한 공원 구석에서 쉬고 있는 나는 타인이 이 공간에 침입함으로써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된다. 사르트르는 이처럼 세계의 점유, 사적인 공간의 보존을 두고 다투는 것이 타자와 관계하는 우리의 근원적 형식이라고 보았다. 사르트르는 또한 열쇠구멍을 통해서 누군가의 응시를 느끼는 경우를 분석하는데, 타인은 나의 진정성에 위협이 되기에 사르트르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면 “타자는 지옥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관점은 타자와의 관계를 포용하는 윤리 이론의 정립을 매우 어렵게 한다. 니체적 전통과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 전통은 자기-주장에 강조점을 둠으로써 타자와의 근원적 관계에 있어 실증적인 개념을 제공하지 못한다.


엠마뉴엘 레비나스

레비나스는 규정prescription의 집합체로서의 윤리학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성품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윤리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인간 실존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제공한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사르트르의 윤리학은 타자의 얼굴에 대해서까지 확장되지 못했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가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 인지적인 방식으로 일종의 소유를 갖고 있다. 즉 우리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자신에게 친숙한 부분으로 동화시키는 방식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지의 과정은 개념과 범주를 낯선 세계에 부과함으로써 당신의 것으로 전유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저녁을 함께하는 당신의 친구의 경우, 당신은 그를 여타의 사물들처럼 동화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특히 타자의 눈앞에서 이러한 동화는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 타자의 얼굴은 하나의 신비이고 인지적 범주로 포착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한한 것이다. 이는 자아와 진정성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어떤 놀라운 것으로의 열림으로 나타난다. 타자라는 신비로의 열림, 그리고 이 타자의 현전은 당신의 존재 양식을 변환시키며, 이러한 타자에 대한 공경과 놀람이라는 행위나 자세는 자체로 윤리적인 성질을 갖는다. 가령 자동자판기에서 기차표를 사는 경우와 매표소에 앉아있는 어떤 사람에게 기차표를 사는 경우 이 둘은 질적인 차이를 갖는데, 매표인의 현존은 가령 인사말과 같은 예의바르고 기쁜 응답을 이끌어낸다. 레비나스의 요점은 우리의 근원적인 윤리적 존재양식이 이미 사회적 존재로서의 실존을 기초로 갖는다는 것이며, 때로 이것이 나쁜 교육으로 인해 왜곡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윤리적 존재양식은 우리의 실존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이며 제거불가능한 측면이며 이는 대화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도 대화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아무런 실용적인 쓰임이나 이익이 없는 방식, 타인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고 심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대화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대화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라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투사를 강조하는 니체-실존주의의 전통은 말하는 자만이 있을 뿐 듣는 자가 없다. 그러나 대화가 우리 삶에 근본적인 것이라면 우리의 존재양식은 타자에게 귀기울임으로써 존경과 열려있음을 포함하고 있다.

의무 윤리가 주장하는 이성적 사고가 전제하는 탈-개체화dis-individuate(보편화)에 대해 레비나스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결코 탈-개체화될 수 없다고 본다. 한편 니체-실존주의 전통이 개인 주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 레비나스는 우리는 타자에 의해 윤리적으로 존재하도록 호출되는addressed 존재이며, 이는 나I 자신을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한 당신you이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나는 나이기 이전에 당신이다. 나는 나의 자아로서의 실존을 타인에게 빚지고 있다. 이러한 윤리는 어떤 명령이나 규칙에 복종하거나 내 성격의 표현을 행위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것에 책임responsibility을 가짐으로써 구성된다. 나는 항상 이미 타자의 부름과 호소에 응답하는 존재로서, 이러한 응답/책임성은 의사소통하고 사회적인 자로서 인간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존재양식 중 하나이다. 레비나스는 이처럼 감정이 단순히 인간들이 우연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를 이룬다고 주장함으로써 흄의 이론을 심화시킨다. 또한 니체의 주장이 바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레비나스는 이러한 과업은 바로 타자에 대한 책임을 함축한다고 말한다.


요약 및 결론

윤리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문제이며 감정은 우리의 윤리적 삶에 있어서 이성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는 도덕규범이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살펴본바 덕스럽게 됨은 두 가지 방향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니체 등이 자기-투사와 자기 형성을 강조했다면, 흄이나 레비나스는 타자를 돌봄caring-about-others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덕스럽게 됨의 목표가 우리 자신의 행복eudaimoniã을 달성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타인들을 염려하는 사회적이고 상호인격적인 존재가 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성은 자기-투사와 타자에 대한 근원적인 염려라는 내재적인 형식을 갖는다. 덕은 단순히 타자에 의해 요구받는 성품의 집합만이 아니라, 우리가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일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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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ical revolt"...?

 

 

 



 

 

아래는 서동진의 글의 일부

 

(...)정치란 사회의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의 조건을 규정하는 행위이고, 정치적 주체화란 바로 사회를 존재의 질서로서 수용하고 인정하길 거부하고 그것의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보편성을 폭로하고 중지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이 주체가 아니라 주체화라고 굳이 불려야하는 이유는 사회적 주체란 특정한 집단의 속성이나 자질, 성향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인 반면 정치적 주체란 그런 경험적 사실들로부터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디우같은 이가 즐겨 쓰는 랭보의 표현처럼 “논리적 반란(logical revolt)”이다. 그것이 논리적인 이유는 목적론적인 주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숨겨진 역사적 논리의 필연적인 자기전개로서 정치적 변화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실체화될 수 없고, 어떤 특정한 주체의 자리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형식적인 지위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권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자살해야했던 내 대학 시절 또래의 여대생을 덮쳐누른 것은 그 무엇으로도 물리칠 수 없는 비열하고 타락한 세계를 두고 모두를 감염시키고 있던 윤리적 자명함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히 투쟁이고 운동이다. 랭보의 시구에서 따온 말을 자신들의 투쟁의 좌표로 삼고 나아가 조직의 이름으로 내건 프랑스의 전직 알튀세르주의자들이 주동이 된 정치 그룹의 이름이 “논리적 반란(logical revolt)”이었다 한다. 언젠가 읽은 그의 가장 아름다운 글이라 할 어느 글에서 바디우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던 이들 가운데 그리고 끝까지 투쟁했던 이들이 과학자들이었음을 이야기하며 왜 그들이 그랬는지 치밀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랭보의 말처럼 지극히 논리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것은 현실주의가 왜 논리적인 것의 절차를 따르는 일이지 모든 개연적인 변이를 핑계대며 비논리적인 헛소리와 망상에 빠지는 것이 아닌지를 역설하는 그의 오랜 주장을 반향한다. 그러나 아마 우리는 여기에 한 명의 반파쇼 낙천주의자로, 혹은 어떤 연민의 투사와도 거리가 먼 외로운 논리적인 투사로서 프리모 레비를 추가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자비와 긍휼, 혹은 연민으로부터 운동을 개시하고 연장할 수 있다는 말은 헛것이다. 광우병과 관련한 촛불집회를 보면서 그것을 예찬하는 수많은 얼빠진 신문기사와 칼럼 따위를 읽으면서 나는 운동을 좀 먹는 운동으로서의 그것에 대한 환멸을 되돌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반대 혹은 저항을 어떻게 형식화할 것인가가 말 그대로 위기에 몰린 지금,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연민이라면 우리는 그저 구호기구와 자선단체 그리고 선량한 사회사업가를 가지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역사가 한 치도 바뀐 적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가로막았음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미얀마에서, 케냐에서, 아니 사하라사막 이남의 모든 곳에서, 미디어의 눈길이 닿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세계를 향해 우리가 얻는 것은 비참함의 소식과 그를 위한 구호와 사랑의 부탁이다. 역사가 멎어버린 것 같은 느낌은 그래서 더욱 생소하고 더욱 잔인하게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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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0-17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갈게요

바라 2008-10-1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담아온 것인데요 뭘.. 원래 '니체인가 바울인가'(http://www.homopop.org/log/index.php?pl=160&stext=%EB%8B%88%EC%B2%B4)와 '무엇을 할 것인가 또는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http://www.homopop.org/log/index.php?pl=258&stext=%EC%B4%9B%EB%B6%88)에서 퍼왔습니다.
 

맑스주의 위기론과 신자유주의 금융위기

김성구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 2008년10월13일 19시10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에서 비롯된 금융충격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와 공황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8500억 달러의 구제금융 법안이 미 상하원을 모두 통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이 과연 안정될 것인지, 금융시장의 위기가 실물경제의 위기로 발전하는 건 아닌지 금융시장에서는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한 실정이다.


그러나 당면한 위기와 공황을 논하기에 앞서 그것이 도대체 어떤 위기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맑스주의 위기론에 입각한 여러 논자들조차 위기의 원인과 성격을 혼란스럽게 말하기 때문이다.


맑스의 주기적 과잉생산공황


우선 맑스가 위기를 말할 때, 그것은 10년마다 찾아오는 주기적 과잉생산위기(=주기적 과잉생산공황) 또는 주기적 과잉축적위기를 지칭하였다. 이미 <공산당선언>에서 맑스는 이 위기가 주기적 과잉생산위기라는 것, 세계적 규모에서 발생하는 위기라는 것, 그리고 근대적 생산력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와의 모순의 표현이라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고, 그런 점에서 체제적 위기와의 관련을 포착하였다.


즉 맑스에게 주기적 과잉생산위기는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의 표현이며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이행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위기였다. 이 점이 위기에 관한 맑스의 관점을 반성, 변화시킨 지점이었다.


맑스는 전자의 관점에서 사회혁명은 새로운 위기의 결과로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공황관이 그로 하여금 정치경제학비판과 공황의 연구에 몰두하게 만든 주요 요인이었다.


그러나 맑스도, 엥겔스도 만년에는 이러한 공황관과 혁명관을 반성하고 방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변혁 간에는 그렇게 단선적인 관계가 아닌, 정치적 실천이 매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생전에 반복되는 주기적 위기는 이러한 반성의 현실적 토대였을 것이다.


위기를 이렇게 파악하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새로운 위기가 임박하고 있다면, 이는 우선 새로운 주기적 과잉생산위기가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의 경기순환은 미국에서 2001년 공황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이 순환이 조만간 새로운 공황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통상 10년 주기는 순환에 따라 다소 단축될 수도 있고 또는 늘어질 수도 있는 만큼 새로운 공황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작년 4/4분기 이래 점차 악화되고 있는 미국의 실물경제 지표를 감안하면 금융충격이 실물경제의 위기로 끝날 것임은 점점 더 부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장기적 위기 또는 구조적 위기


맑스는 주기적 과잉생산위기를 이미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또는 위기의 표현으로 이해하였지만, 이 모순 또는 위기는 주기적 공황 자체를 통해 극복되고 새로운 순환이 반복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순환의 반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높은 생산력 수준에서의 모순의 전개를 의미하며, 이렇게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관계는 순환의 반복 하에서 심화되는데, 그 모순의 심화는 다름아닌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에 표현되어 있다. 자본주의 축적의 모든 동인이 이윤의 획득에 있는 한, 평균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 위기는 주기적 과잉생산위기와 달리 경향적, 장기적 위기를 의미한다. 주기적 위기를 주기적 위기를 통해 극복해간다 하더라도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로 인해 자본주의는 장기적으로 성장이 둔화되고 그 체제가 불안정해진다.


생산의 무제한적 확대와 대중소비의 제한, 즉 주기적 과잉생산의 모순에서 폭발하는 10년 주기의 위기와 달리 이 위기는 생산력의 고도화,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 따른 잉여가치 생산의 상대적 저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지만, 김수행, 정성진, 윤소영 교수처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으로 직접 주기적 과잉생산공황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맑스의 방법론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물론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는 반대로 작용하는 상쇄력의 동원을 동반한다. 따라서 평균이윤율은 단선적으로 하락하지 않고, 상쇄력의 여하에 따라 그 자체 변동하는데, 그 변동이 바로 자본주의의 장기성장과 장기하강을 가져온다. 즉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관철하는 경우 자본주의는 장기하강에 빠지고 구조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며, 강력한 상쇄력이 작용하면 이윤율 조건을 개선하여 자본주의의 장기성장을 이끌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렇게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관철하면서 3번의 구조적 위기가 발생하였는데, 그 최근의 구조위기가 다름아닌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1970-80년대의 제3차 구조위기다.


구조위기 시에도 10년 주기의 경기순환이 반복, 진행하지만, 구조위기 시의 경기순환들은 대체로 호황의 상대적 약화와 공황의 상대적 심화로 특징지워진다. 따라서 성장의 둔화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구조적 위기는 주기적 위기와 달리 상부구조를 포함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일정한 구조재편을 요구하는 성격의 위기다.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


1970년대 이래 현대자본주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통해 이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핵심은 케인스주의의 해체 위에서 자유화, 세계화, 금융화, 투기화, 유연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는데, 주지하다시피 이 전환과 재편은 케인스주의의 위기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오리려 성장의 둔화와 대량실업을 고착, 심화시키고 위기를 세계화시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에서 비롯된 금융위기만이 아니라 1990년대 이래 파상적으로 전개된 국제금융위기와 외환위기는 이러한 전환이 가져온 새로운 성격의 위기임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현대자본주의의 현재의 위기는 제3차 구조위기의 지속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고유한 위기이며, 이는 제3차 구조위기로부터 등장한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이전의 구조위기들에서와 달리 새로운 장기성장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위기란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고유한 위기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2001년 순환의 종료 즉 새로운 주기적 과잉생산공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 공황을 단순하게 맑스의 주기적 과잉생산공황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증권화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이 순환의 특징을 간과하는 게 된다.


이처럼 맑스주의 위기론은 월러스틴이나 아리기같은 장기파동론자들의 위기론과 본질적으로 상이하다. 또한 현재의 경제정세의 판단도 맑스주의 위기론과 장기파동론은 서로 상반된다. 예컨대 월러스틴은 현대자본주의가 대체로 1990년대 말 또는 2000년대 초 이래 새로운 장기성장의 국면으로 전환되며, 새로운 장기하강은 2025-2050년에 전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새로운 위기를 운운한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소위기 즉 주기적 위기의 도래일 뿐인데, 장기성장 국면에서의 주기적 위기는 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경제학에 기반하고 있는 윤소영 교수가 다가오는 새로운 위기에 심대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건 앞뒤가 맞는 주장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윤 교수는 구조위기와 주기적 위기의 관련을 이해하지 못하고 극도로 양자를 혼동하고 있다.


국가개입과 공적자금 투입의 모순


신자유주의 금융위기에 대해 국가가 공적자금의 투입으로 개입하는 것은 일견 모순되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국가개입은 결코 철폐되지 않았음을 직시하면 하등 모순이 아니다. 국가는 여전히 총자본과 총독점자본의 기관이며 그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위기에 개입한다.


문제는 오히려 공적자금 투입의 모순적 효과에 있다. 시장의 위기는 과잉자본의 청산을 요구하는 것인데, 오늘날 시장기제를 통한 기업의 도산과 과잉자본 청산은 자본주의 자체를 청산할 위험이 높기 때문에 국가개입과 공적자금 투입이 불가피하지만, 이런 위기관리 방식은 과잉자본의 청산을 지연시켜 경제회복과 새로운 성장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공적자금을 동원하는 손실의 사회화, 국영화, 자본주의적 사회화는 이렇게 모순적이어서 결코 위기의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진정한 해결책은 진보적 사회화뿐이며, 여기에는 부실기업의 대주주와 경영자, 채권자, 증권소유자 등 자본가계급에게 최대한 부실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는 한편에서 과잉자본 청산에 기여하고 다른 한편에서 공적자금 투입을 최소화시킬 것이다. 궁극적으로 진보적 사회화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넘어가며 사회화된 기업에서 시장경쟁과 이윤추구를 지양함으로써 자본주의 위기의 근원을 없애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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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마스님 서재에서 펌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상상계라는 쟁점




읽기라는 문제, 따라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인물인 스피노자는 또한 역사이론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사람이다.
루이 알튀세르, {“자본”을 읽자}

스피노자주의 또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I 이데올로기의 유령들



지난 40여 년 동안 서양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단일한 논문으로서 과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하에서는 편의상 AIE 논문이라고 줄여 부르겠다.]보다 더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 논문이 있을까? 지난 1980년대 말 이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마르크스주의가 퇴조하면서 알튀세르의 저작들은 점점 더 인문사회과학 논의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여기에는 물론 주지하다시피 지난 1980년에 발생한 알튀세르의 개인적 비극도 영향을 미쳤다.], 이 논문만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토론과 응용 및 변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쩌면 이 논문은 바로 알튀세르의 저작들이 퇴조하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부터 본격적인(또는 적어도 그 이전보다 더 역동적인) 이론적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필두로 여러 저작에서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인문사회과학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시킨 것이 바로 1990년대이며, 그 뒤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젠더 이론 및 주체의 예속화/주체화subjection 이론을 전개하면서 AIE 논문을 주요한 이론적 지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특히 Butler 1997 「서론」 및 4장 참조) 역시 1990년대의 일이다. 또 그의 제자였던 에티엔 발리바르가 호명 이론을 변용하여 “국민 형태forme nation”에 관한 독창적인 문제설정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 역시 90년대 이후의 일이다(특히 Balibar 1988; 2001 1장 참조).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이처럼 다양한 비판적 논의의 대상이 되고 또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음에도 이 논문은 아직도 여전히 많은 이론적 잠재력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들에 공통적인 특징으로, 아마도 바로 이점이야말로 알튀세르의 저작, 특히 AIE 논문을 현대의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일 듯하다.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 전체를 고려해봤을 때 AIE 논문에 관한 다양한 논의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논문에 미친 스피노자 철학의 영향이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여러 차례에 걸쳐 스피노자에 대해 예외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으며, 1960년대의 자신의 이론적 작업에 대해 자기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소책자에서는 자신이 “스피노자주의자”였음을 명시적으로 고백하고 있지만(Althusser 1997, pp. 181-189), 정작 알튀세르의 가장 중요한 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AIE 논문의 스피노자주의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알튀세르의 이론 작업과 스피노자 철학의 관계 일반에 대해서는 Moreau 1997, Tosel 2005 등을 참조하고, 국내의 논의로는 진태원 2001; 2002; 2005 등을 보라. 외국의 주석가들 중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스피노자주의적 성격에 주목하고 있는 글로는 Montag 1995; 1996, Pfaller 1998 정도에 불과하다. Montag은 AIE 논문이 알튀세르의 저작 중에서도 “매우 스피노자주의적인 글”(1995, p. 65)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간략한 논의에 그치고 있다. Montag 1996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을, 특히 홉스의 정치학과 대비되는 스피노자의 정치학과 연결시켜 흥미 있는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Pfaller 1998은 지젝의 알튀세르 비판이 지닌 관념론적인 측면을 지적하면서 스피노자 상상계의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다. Locke 1996은 스피노자와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지는 않지만,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비(非)라캉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반대로 많은 주석가들은 AIE 논문 및 그의 이데올로기론 전체를 라캉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으로 특징짓고 있다[너무 많은 주석가들이 이런 견해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전거를 밝히는 것은 불필요할 것 같다. 대표적인 몇몇 경우를 지적해본다면, Barrett 1993; Eagleton 1991; Macey 1994. 국내에서는 양석원이나 홍준기 등을 들 수 있다. 이 주석가들의 특징은 구체적인 문헌학적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을뿐더러, 지난 1993년 이래 발표된 알튀세르의 유고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특히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해명하는 데 이 유고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또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라캉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불식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2 참조.]. 이들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수용하거나 그것을 준거로 삼아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론을 개조하려고 했지만, 라캉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기능주의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AIE 논문이나 알튀세르의 몇몇 글들(특히 「프로이트와 라캉」 같은 글)에 나타난 라캉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에 의지하여 AIE 논문 전체, 특히 그 논문의 후반부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에 관하여」라는 절을 라캉주의적 이데올로기론으로 특징짓고 있다.


이들의 견해를 하나하나 논박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일뿐더러 지면의 한계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들 중 한 사람,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힐 만한 지젝의 논의를 살펴보고 싶다. 이는 이 글 전체의 구도와 관련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우리가 서두에 인용한 제사(題詞)가 시사하듯이,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젝의 논의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스피노자 철학 사이의 관련성을 검토해보려는 이 글의 반면교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II 지젝의 알튀세르 비판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출세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Zizek 1989)에서부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Zizek 1993/2007b), 「이데올로기의 유령」(Zizek 1994),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Zizek 1996)나 󰡔까다로운 주체󰡕(Zizek 1999/2005) 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고 라캉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를 개조하거나 변형하려고 시도해왔다. 이처럼 그가 여러 저작에서 알튀세르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그의 논점은 매우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으며, 그의 다양한 논의들은 이러한 논점의 변주에 불과하다.


1) 그가 보기에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핵심은 호명 이론에 있다. 곧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하며, 이를 통해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재생산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배 체계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것이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근본적인 전언이다.(Zizek 1989; 1993)


2) 하지만 호명 이론은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면서 또한 그의 이론의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호명 이론은 어떻게 지배에 대한 저항이나 지배 체계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한지 보여주지 못하며, 모든 주체는 결국 지배 체계의 재생산 메커니즘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Zizek 1989; 1993; Dolar 1993)


3) 알튀세르가 이런 한계에 부딪치는 이유는, 라캉의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본다면 그가 첫 번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론, 그가 제시하는 호명 이론은 부유하는 기표들의 의미를 고정시켜 주는 이데올로기적 누빔점에 관한 이론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도식 속에서는 모든 호명은 항상 성공하기 마련이며, 모든 주체는 항상 주인기표를 통해 호명된다.[“누빔점은 주체가 기표에 ‘꿰매어지는’ 지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주인기표(‘공산주의’ㆍ ‘신’ㆍ ‘자유’ ㆍ‘미국’)의 호출과 함께 개인에게 말을 걸면서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하는 지점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기표 연쇄를 주체화하는 지점이다.”(Zizek 1989, 179쪽)]


4) 반면 라캉의 이론은 알튀세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제공해주는데, 그것의 핵심은 “환상을 가로지르기”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Zizek 1989 2부 3장; 1993 1부 1장; 1996 pp. 165 이하; 2003 중 「재판 서문」 등 참조)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보면 세 번째 그래프(“케보이Che vuoi?”)는 상징적 질서인 타자Autre에 의해 부여된 자신의 역할에 대해 회의하는 주체, 곧 히스테리에 걸린 주체를 나타낸다. 이처럼 자신의 동일성 내지 정체성에 대해 회의한다는 것은 바로 주체에게 전달된 호명이 실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 번째 그래프는 그 이전까지 일관된 것, 아무런 공백이나 균열도 없는 충만하고 전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타자 자체 내에 공백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욕망의 그래프의 두 번째 수준 전체(3번째와 4번째 그래프)는 “호명 너머의 차원을 지칭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Zizek 1989, 216쪽)[이하 인용문의 번역은 국역본이 있는 경우에도 대개 필자가 다소 수정했지만 일일이 밝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별도의 지적이 없는 한 인용문에 나오는 강조 표시는 모두 원문의 것이다.]


그러나 타자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공백 내지 균열이 그보다 아래 수준의 그래프에 위치한 주체들에게 은폐되어 있는 것은 바로 “환상phantasy” 때문이다. 곧 환상은 “케보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며, 정상적인 주체들은 이러한 환상을 통해 욕망하는 법을 배운다. 환상의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관된 의미의 질서, 상징적 질서는 불가능하며, 주체들 각자가 이러한 상징적 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환상의 도식이 빗금 쳐진 주체와 대상 a의 조우로 표시되는 것($◇a)은 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환상이 수행하는 기능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한 편으로 주체가 향락을 경험하고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타자의 공백을 메우면서 상징적 질서를 유지시켜준다.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적인 치료는 피분석자 또는 분석 주체가 분석가(타자)와의 동일시를 넘어서 분석가의 수수께끼 같은 욕망(“x로 남아 있는 분석가의 욕망”(Lacan 1973, p. 246))을 대면하고 이로써 자신의 욕망을 발견할 경우에 종결된다. 이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주체가 타자로부터 배제된 대상 a가 주체 자신의 “결핍destitution”, 공백을 메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대상 a와 분리되어 자신의 결핍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체는 자신이 충만한 주체, 아무런 공백을 지니지 않은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공백을 지닌 주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 임상의 차원에서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뜻하는 바다.


지젝은 이러한 임상적인 차원의 개념을 사회적 차원, 이데올로기론의 차원에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이 경우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의미하는 것은 상징적 질서에 의해 부여된 동일성을 거부하는 것, 다시 말해 그가 “행위act” 또는 “본래적 행위”(Zizek 1999, p. 266; Zizek 2007b, 428쪽)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컨대 알튀세르는 호명 이론을 통해 어떻게 각각의 주체가 이데올로기 장치들 내지 (라캉 식으로 표현하면) 상징적 질서를 통해 상징적 동일성을 부여받고 있는지 해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징적 동일화를 넘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환상의 차원, 곧 타자 자체의 공백을 메우는 차원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어떻게 주체가 상징적 동일화, 호명을 넘어설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라캉 정신분석학의 중요성은 이데올로기적인 상징적 동일화 배후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환상의 차원을 밝힐 수 있게 해주고, 더 나아가 환상을 가로지르는 길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일체의 상징적 동일화를 거부하는 “본래적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알튀세르에 대한 지젝의 이러한 비판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스피노자주의가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제시되는데, 우리가 제사로 인용한 책(Zizek 1993; 2007b)에서 지젝은 두 단계의 논의를 통해 이를 시도한다. 우선 그는 라캉의 11번째 세미나인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 나오는 언급에서 출발하여 스피노자 철학의 기본 성격을 개괄한다.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스피노자는 기표 사슬의 평준화와 같은 것을 성취한다. 그는 지식의 사슬인 S2를 명령의 기표, 금지의 기표, “아니오!”의 기표인 S1과 분리시키는 간극을 제거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주인 기표 속에서 아무런 지주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서, 곧 아버지의 은유의 부정화하는 절단의 개입 이전에 존재하는 “순수 실정성”의 환유적 우주로서의 보편적 지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스피노자적인 “지혜”의 태도는 의무론을 존재론으로, 명령을 합리적 지식으로 환원하는 것에 의해, 언어행위론의 관점에서 말하면 수행문을 서술문으로 환원하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Zizek 1993, p. 217; 2007b; 417쪽)

곧 지젝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유한성의 간극béance”은 소거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순수 실정성”의 보편적 우주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추구한 셈이다. 그 결과 스피노자는 존재와 당위, 존재론과 의무론, 사실과 가치, 서술문과 수행문 사이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후자의 항들을 각각 전자의 항들로 환원시켰다. “그렇다면 영원의 관점에서 현상들을 관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유한성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현상들을 보편적인 상징적 네트워크의 요소들로 인식한다. ... 세계에 자신의 목적을 부과하는 초월적 주권자로 이해된 “신”은 내재적인 필연성 속에서 신을 파악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입증한다. 반대로 칸트는 이론 이성에 대한 실천 이성의 우위를 긍정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령의 사실은 환원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유한한 주체들로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명령을 서술문으로 환원시킬 수 있게 해줄 만한 관조적 위치에 이를 수 없다.”(같은 곳)


지젝의 두 번째 논의는 이러한 범신론적인 스피노자 철학이 어떻게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인 환상 속에서 재현되는지, 또는 그것의 철학적 모체를 나타내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스피노자주의에서는 주체의 책임이라는 것을 사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는 명령이나 의무의 요소를 자신의 철학 속에서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세계를 인과적 사슬의 연쇄로 환원해버렸기 때문에,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주체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주체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인과 연쇄에 대한 주체의 무지에 있을 뿐이다. ““죄”는 나를 파괴적 행동으로 내몬 원인들에 대한 나의 무지를 가리키는 낡은 용어에 불과하다.”(같은 책, p. 218; 419쪽) 그런데 이러한 책임의 부재는 곧바로 타자들에게 악에 대한 책임이 모두 전가되는 것으로 변모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주의에서는] 주체가 이러한 과정의 자율적인 담지자가 되기는커녕 부분적-측면적 연계의 연결망을 위한 하나의 자리, 수동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주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정서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나”는 정확히 말하면, 나를 규정하면서 나의 자기 동일성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이러한 부분적인 객체적 동일화-모방의 연결망을 간과하는 한에서만 나 자신을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주체Subject로 인지한다.”(같은 책, p. 218; 420쪽) 이러한 메커니즘은 우리가 “탈산업적인 소비사회”라고 부르는 것에서 발생하는 바로 그것이다. 곧 “이른바 “탈근대적 주체”는 이 메커니즘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자신의 “정념들”을 규제하는 이미지들에 반응하면서 부분적인 정서들의 연결고리들에 의해 횡단되는 수동적 기반이 아닌가?”(같은 곳)


정리하자면 지젝에 따를 경우 알튀세르에게 주체들은 상징적 기표들의 연결망 속에서 부과된 동일성들에 수동적으로 호명되는 개인들인 것처럼, 스피노자주의에서도 주체들은 정서적 모방-동일시의 연결망 속에서 자신들에게 전달되는 이미지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정념적인 주체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주의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지젝 자신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스피노자 철학 사이의 긴밀한 상호연관성이라는 명확한 테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논변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인지, 그가 과연 “독서의 마스터”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뒤에서 보겠지만,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지젝의 언급은 지극히 상투적이며, 우리가 보기에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들(푸코, 데리다, 들뢰즈, 발리바르 등)에 대한 그의 비판들 역시 대개 상투적이고 피상적이다. 좀 특이한 것은 지젝의 여러 저서들을 번역한 이성민 씨는 지젝을 “‘독서의 마스터’”라고 부르면서 지젝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교한 독서를 통해 대결한다”(Zizek 2005, 642쪽)고 찬양하고 있다는 점이다.]



III 알튀세르와 스피노자에서 이데올로기―상상계라는 쟁점



그렇다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스피노자 철학 사이에는 그처럼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하는가? 분명 양자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관성은 지젝이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문제에서 알튀세르와 스피노자 사이의 연관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상상imagination” 또는 “상상계imaginaire”라는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상상imaginatio”이나 “상상하다imaginari” 또는 “이미지imago” 같은 용어들은 매우 체계적이고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불어의 “imaginaire”에 해당하는 “imaginarius”라는 용어는 매우 적게 나타난다. 이 용어는 {윤리학}에서는 단 3 번, {신학정치론}에서는 6번 등장할 뿐이다. 더욱이 그 용법 자체도 현대적인 의미의 “상상계”라는 뜻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상상 이론은 주 12)의 인용문에서 알튀세르가 주장하듯이, 근본적으로 “상상계”에 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어떤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을 현대적인 용어들로 다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곧 우리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을 살펴보면, 그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이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체계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며[스피노자의 상상이론에 관한 논의는 특히 영미권 주석가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Bertrand 1983은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데, 알튀세르의 관점과는 약간 상이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그녀는 󰡔윤리학󰡕 1부 「부록」과 󰡔신학정치론󰡕 「서문」 및 17장에서 볼 수 있는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는 그녀가 좀더 전문적인 주석가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데 반해, 알튀세르는 상상계 이론과 정치 이론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데서 생겨나는 차이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의 관점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조명하게 되면 라캉주의의 선입견에 가려 있던 알튀세르의 논의들이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우선 알튀세르 자신이 스피노자 철학, 특히 그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보자. 알튀세르는 1974년에 출간된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60년대 수행된 자신의 이론적 작업이 스피노자 철학에 준거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이 스피노자의 철학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들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윤리학} 1부 「부록」이다.[나머지는 스피노자의 철학 전략으로서 “신으로부터의 출발”이라는 사례, 스피노자의 반변증법적 입장, 인식의 문제에서 반초월론적 문제설정을 보여주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habemus enim veram ideam”라는 {지성개선론}의 명제 등이다. 좀더 자세한 논의는 Althusser 1974 참조.] 특히 그가 AIE 논문에서 전개한 이데올로기론은 {윤리학} 1부 「부록」 및 {신학정치론}에서 소묘된 상상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의 요점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윤리학} 1부 「부록」 및 {신학정치론}에서 우리는 분명 지금까지 사고된 최초의 이데올로기론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세 가지 특징을 담고 있다. 1) 이데올로기의 상상적 “실재성” 2) 이데올로기의 내적 전도 3) 이데올로기의 “중심”, 곧 주체라는 가상”(Althusser 1974, p. 184) [그 이외에 {윤리학} 1부 「부록」에 관한 상세한 연구는 Macherey I; Sévérac 1997 등을 참조. 이 두 사람은 {윤리학} 1부 「부록」 텍스트를 매우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텍스트의 논의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와 분석방식이 약간 상이하고 관점에도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윤리학} 1부 「부록」을 정확하게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조해야 할 연구들이다.] 매우 간략하기는 하지만 이 세 가지 논점은 {윤리학} 1부 「부록」과 {신학정치론}을 분석하기 위한 좋은 지침을 제시해주며, 더 나아가 AIE 논문이 스피노자의 상상이론과 어떻게 이론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알튀세르가 지적한 세 가지 논점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한다.

1. 이데올로기의 상상적 “실재성”

이 테제는 스피노자에서 상상은 감각 및 이성이나 지성과 구별되는 하나의 인식 “능력facultas”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임을 뜻한다. 여기서 세계라는 것은 인간의 삶의 공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알튀세르는 이미 1963년 고등사범학교에서 했던 강의에서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에 대해 이런 식의 해석을 제시한 바 있고[“[스피노자에서] 상상계는 데카르트에서처럼 심리학적 범주로 인식되지 않고, 세계가 그것을 통해 사고되는 범주로 인식된다. 스피노자에게 상상계는 더 이상 심리학적 기능이 아니며, 헤겔 식의 의미에서 한 요소, 곧 심리학적 기능들이 삽입되어 있는, 이 범주들이 그로부터 구성되는 하나의 전체다. ... 상상은 마음의 능력, 심리학적 주체의 한 능력이 아니며, 하나의 세계다.”(Althusser 1996c, p. 114)], 1964년에 발표되고 1년 뒤인 1965년에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좀더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데카르트주의자가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달을 “보았”듯이 또는―그들이 이에 집중하지 않았다면―보지 못했듯이, 사람들은 결코 의식의 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의 한 대상처럼, 자신들의 “세계” 자체처럼, 그렇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살아간다.””(Althusser 1996a, 280쪽/240쪽) 매우 도발적인 이 테제는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윤리학}이나 {신학정치론}의 원문을 통해 정확히 입증될 수 있으며, 여기서 언급된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달을 “보았”듯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윤리학} 2부 정리 35의 주석에 나오는 사례를 가리킨다.

태양을 볼 때 우리는 이것이 우리로부터 200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오류는 단순히 이런 상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상상하는 중에 우리가 태양의 진정한 거리 및 이러한 상상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나중에 태양이 지구 지름의 600배 이상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이처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진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의 변용은 우리의 신체가 태양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 태양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Spinoza 1999a, 158~159쪽―강조는 인용자) [이 사례에 대한 좀더 상세한 분석은 진태원 2006 5장 참조]

이데올로기가 상상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또 스피노자에서 상상은 인식의 한 가지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조건 자체, 인간학적 장 그 자체라는 것은 2절에서 살펴본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지젝의 언급이 얼마나 허술한 주장인지 잘 보여준다. 지젝은 멘델스존과 야코비의 논쟁 이래 독일 관념론의 기본 신조처럼 전승되어온 스피노자주의=범신론이라는 도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스피노자가 “유한성의 간극”은 소거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순수 실정성의 보편적 우주의 인과연쇄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 관해 이보다 더 상투적인 비난도 없을 것이다. 󰡔윤리학󰡕 1부 「부록」이나 󰡔신학정치론󰡕이 보여주듯이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인간의 삶, 인간 사회의 삶은 상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더욱이 지젝이 주장하듯이 이러한 상상은 단순히 무지의 표현이자 인식의 진전에 따라 소멸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고유한 변용에 따라 세계를 체험하고 살아가는 한에서 우리가 자연에 대해 얼마나 진전된 인식을 얻든 간에 우리는 여전히 세계를 “인간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ordinem & concatenationem affectionum corporis humani”(E II P18s)”에 따라 체험하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서 자연이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ordo & concatenatio rerum”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은 이를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라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지젝 식의 표현을 따른다면 바로 “유한성의 간극”에 대한 스피노자적인 표현과 다르지 않다.

2. 이데올로기의 내적 전도

이것은 목적론이 어떻게 자연을 전도시키는가에 관한 스피노자의 분석을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목적론이 모든 편견의 뿌리를 이루고 있음을 지적한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려고 하는 모든 편견은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 의거하고 있다. 곧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자연 실재들은 자신들이 그러듯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한다고 가정하며, 더 나아가 신 자신이 모든 것을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인도한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고,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deum omnia propter hominem fecisse, hominem autem, ut ipsum coleret.(E I App.; G II 78―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목적론은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상상적 투사(投射)projection의 형태를 띠고 있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한다는 것을 본성적인 사실로, 그 자체로는 해로울 것이 없는 자연적 사실로 간주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인간에 고유한(또는 특정한 생물들에게 고유한) 목적 지향적 행위방식을 다른 모든 자연 실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연 실재들은 어떤 목적에 따라 운동하지 않으며 관성 원리에 따라 작용하고 반작용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는 자연에는 작용인(물론 동역학적 관점에서 파악된)만이 작용하고 있을 뿐 목적인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 실재들에 대해 이를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 방식을 자연에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투사가 신에게 적용될 때, 목적론은 완결된 형태를 띠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자연 실재들이 어떤 목적에 따라 행위한다면, 자연 전체를 목적론적 관점에 따라 계획하고 질서지은 어떤 존재자,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목적론은 필연적으로 목적론적 질서의 주재자인 어떤 신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 자신이 말하듯이 “자연을 완전히 전도하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변용의 질서와 연관”이라는 관점에 따라 달리 표현해볼 수 있다. 변용의 질서와 연관, 곧 상상계가 인간의 경험과 인식의 원초적인 인간학적 조건을 이룬다면, 이러한 상상계가 낳는 가상성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사물 그 자체의 질서와 연관으로 착각하는 데 있다. 곧 어떤 실재들의 변용 내지 이미지와 그 실재들 자체를 혼동하는 것, 다시 말해 실재들의 변용이나 이미지, 실재들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그 실재들 자체의 질서와 연관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바로 가상의 근본적인 뿌리가 존재한다. 스피노자의 고유한 용어법대로 하면,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는 것, 또는 결과만을 사고할 뿐, 그러한 결과를 낳은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배제하는 것, 바로 여기에 가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의 고유한 효과 중 하나는 자신을 산출한 원인을 배제하는 데 있다.


알튀세르의 경우는 어떨까? 이 점에 관해서도 양자 사이에는 놀랄 만한 유사성, 아니 동일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AIE 논문의 이론적인 의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에서 하나의 단절을 이룩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데, 그것은 그 논문이 정확히 이데올로기를 기만이나 조작, 허위의식으로 간주하는 관점, 또는 포이어바흐 식으로 이데올로기의 발생 원인을 인간의 존재조건 자체의 소외 속에서 찾는 관점과 단절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해석들은, 그것들이 전제하고 의존하는 테제, 곧 이데올로기에서 세계에 대한 상상적 표상 속에 반영되는 것은 인간들의 존재조건, 따라서 실재 세계라는 테제를 글자 그대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Althusser 1995, p. 296; 1991, 109쪽―강조는 인용자)

더욱이 이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점, 곧 “완전히 실증주의적인 맥락”에서 이데올로기를 “순수한 환상으로, 순수한 꿈으로, 다시 말하면 무로 이해”(같은 책, p. 294; 104쪽)하는 관점과도 정확히 단절하는 것이다. 그 대신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인간들”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서로 표상/재현/상연하는se représentent” 것[이 표현의 의미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평은 진태원 2002, 379쪽 참조]은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조건들, 그들의 현실 세계가 아니며,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에게 표상/재현/상연되는représenté 것은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다. 실재 세계에 대한 모든 이데올로기적, 따라서 상상적 표상/재현/상연의 중심에 잇는 것은 바로 이 관계다(같은 책, p. 297; 109쪽)” “représenter”라는 단어의 독창적인 용법은 논외로 한다면, 스피노자의 상상에 대한 논의와 알튀세르의 주장 사이의 이론적 연관성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3. 이데올로기의 “중심”: 주체라는 가상

이 테제는 목적론적 가상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 자연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인간들의 착각이 놓여 있음을 가리킨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윤리학󰡕 1부 「부록」에서 스피노자의 분석은 크게 두 가지 논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스피노자는 신이 목적론적으로 행위한다는 가정의 밑바탕에는 좀더 근본적인 상상적 투사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신과 인간의 특별한 상호 의존 관계에 관한 투사다. 앞에서 인용한 󰡔윤리학󰡕 1부 「부록」 인용문에서 강조한 부분에서 드러나듯이 이러한 상호 의존 관계는 이중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첫째는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신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을 특별히 총애하며, 인간을 위해 모든 것, 모든 자연 실재들을 창조했다. 이는 곧 신이 인간에게 자연 만물을 자신의 수단으로,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그들은 자연 만물을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이 수단들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이 수단들을 공급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러한 수단을 자기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마련해준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E I App.; G II 78)


그러나 그렇다면 왜 신은 이처럼 인간을 총애하는가?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이러한 특권, 인간이 모든 것을 자신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는가? 그 이유는 두 번째 의존 관계를 통해 해명된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신은 인간으로부터 숭배를 받기 위해, 공경을 받기 위해, 인간을 위해 자연 만물을 창조했으며, 또 인간에게 그것들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서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게 된다. 그러나 왜 신이 인간의 숭배, 인간의 공경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왜 무한한 신, 지고하게 완전한 신이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숭배,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이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질문 자체를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그 이전에 목적론 자체를 가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목적론을 타당한 것으로 전제했을 때에만 의미 있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이러한 질문과 답변을 불필요한 것으로, 신학자들의 가상, 심지어 “착란delirare”에 불과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물론 스피노자가 이러한 목적론적 가상이 지니는 실제적인 효력을 무시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여기서 스피노자의 목표는 이러한 가상의 효력을 부각시키는 게 아니라, 가상을 낳는 인간학적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을 뿐이다. 사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5장과 17장, 특히 17장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모세의 중개를 통해 야훼와 맺는 계약, 다시 말해 우리가 방금 말한 신과 인간의 특별한 상호 의존 관계의 원형을 이루는 신과의 계약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둘째, 그 대신 그는 관점을 바꿔서 목적론적 가상을 낳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신과 인간의 특별한 상호 의존 관계를 설명하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스피노자는 목적론을 낳는 본질적인 인간학적 특성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인정해야 하는 것, 곧 모든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충동을 의식한다는 것을 기초로 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E I App.; G II 78) [“satis hic erit, si pro fundamento id capiam, quod apud omnes debet esse in confesso; nempe hoc, quod omnes homines rerum causarum ignari nascuntur, & quod omnes appetitum habent suum utile quaerendi, cujus rei sunt conscii.”]

스피노자는 이 문장에서 두 가지 본질적인 점을 대비시키고 있다. 하나는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 태어난다는 것, 따라서 인간에게는 본유 관념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고, 또 이러한 충동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첫 번째 논점은 상상 개념 자체에서 따라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모든 인식은 항상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단지 외부 실재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의 신체 및 인간 자신의 정신에 대한 인식까지도 이러한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2부 정리 19와 정리 23 참조). 그런데 이러한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신체의 역량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2부 정리 14), 신체의 변용들을 인식하는 정신의 소질, 능력도 그에 따라 변화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아이 또는 유년 시절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에[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윤리학󰡕 5부 정리 39의 주석일 것이다. 스피노자의 인식론 및 윤리학을 이해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스피노자에서 아이/유년시절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연구는 매우 드물다. 정리 39의 주석에 대한 논평은 Macherey V, pp. 184-85를 참조하고, 아이/유년시절의 문제에 관한 최근의 좋은 논의는 Zourabichvili 2002 2부 참조.], 인간이 탄생의 시점에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본유관념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으며,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이 점에서 스피노자는 경험론자들, 특히 홉스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스피노자에게 인간의 본질은 충동 또는 욕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무지한 채로 태어나지만 본성적으로 어떤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또 이 충동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간학적 조건에서 비롯한 이 양자의 괴리가 좁혀지지 않는 상태에서는(이는 인간이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 인간은 목적론적 가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고, 이를 자연 현상들에 대해 투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목적론적 가상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가상은 한편으로 원인에 대한 무지와 다른 한편으로 결과(충동)에 대한 의식 사이의 괴리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중심, 곧 주체라는 가상은 주지하다시피 “호명” 테제를 통해 제시된다. 지젝을 비롯한 많은 라캉주의 주석가들은 적어도 호명 테제에서만큼은 알튀세르가 라캉에게 분명한 이론적 빚을 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라캉의 이론을 잘못 해석해서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호명 테제에 나오는 몇몇 표현들, 특히 대문자 주체와 작은 주체들 사이의 “거울 관계” 내지 “거울 구조”라는 표현은 라캉의 용어법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가령 알튀세르의 표현법은 라캉의 11번째 세미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차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주체는 타자Autre의 장에 예속됨으로써만 주체일 뿐이다.”(Lacan 1973, p. 172) 단 라캉은 대문자 주체 대신 대문자 타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용어법 자체는 라캉에서 유래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 자체는 라캉적이라기보다는 스피노자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는 우선 알튀세르가 호명 테제를 예시하기 위해 들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모세가 신과의 계약을 맺고 이를 바탕으로 히브리 국가를 구성하는 사례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은 “주체Subject”이고 모세 및 신의 백성인 수많은 주체들은 신의 대화자-피호명자, 곧 그의 거울들이고 반영들이다. 인간들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지 않았던가? 모든 신학적인 성찰이 증명하듯이 신이 인간들 없이 완벽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 인간들이 신을 필요로 하고 주체들이 “주체Subject”를 필요로 하듯이 신은 인간들을 필요로 하고 “주체”는 주체들을 필요로 한다.”(Althusser 1995, p. 317; 1991, 124쪽) 그런데 이는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17장에서 히브리 신정국가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이중적 계약의 사례 바로 그것이다.


이 점을 이론적ㆍ정치적 측면에서 좀더 부연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를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제사로 인용한 󰡔“자본”을 읽자󰡕의 한 구절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이하 3절의 내용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역자 해제」 중에서 270-276쪽의 내용을 다소의 수정을 거쳐 전재한 것이다.]

읽기라는 문제, 따라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인물인 스피노자는 또한 역사이론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Althusser 1996b, p. 8. 강조는 알튀세르)

스피노자에 대한 알튀세르의 논의 중에서 제일 덜 주목받고 있지만, 또한 제일 놀라운 사례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이 주장은 겉보기에는 매우 당혹스러운 주장이다. 사실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역사에 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또 역사에 대한 고찰이 전혀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 주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엉뚱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역사철학이 18세기 말 계몽주의 이후, 특히 독일 관념론에서 하나의 철학적 주제로 등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알튀세르의 지적은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라는 비난까지 받을 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은 그것 혼자서만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과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후자가 없이 전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이 양자를 결부시켰다는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고유한 철학적 업적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읽기”라는 문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와도 결부시키고 있다.


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가 거의 언급하지도 않은 그의 “역사이론”에 주목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 역사이론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더 나아가 이는 “읽기”나 “글쓰기/기록하기”의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처럼 의문들은 끊임없이 생겨나지만,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한 그의 다른 언급들과 마찬가지로, 대담한 주장을 한 마디 던져놓은 다음, 마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다른 논의로 성큼 건너뛰고 있다.


바로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흥미 있는 통찰을 제공해주는데, 왜냐하면 그는 󰡔신학정치론󰡕에서 하나의 역사이론(“역사철학”이 아니라)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그는 성서에 나타나 있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 및 전개과정을 분석하고 있는 󰡔신학정치론󰡕 17장만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전반부(곧 1장-15장)의 분석 역시 하나의 역사이론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먼저 그는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차 수준의 역사”(또는 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면 “비판적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서는 히브리 백성들의 상상에 기초를 둔 하나의 역사적 담론이며,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러한 역사적 담론에 대한 이차적 담론, 곧 비판적 역사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그는 성서는 바로 서사敍事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서사는 히브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적 기록/글쓰기의 관행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글쓰기/기록”이라는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읽기/독해”의 문제를 역사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로 제기한 최초의 인물인 셈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을,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 곧 대중들의 상상이라는 문제와 결부시킨다. 발리바르의 분석에서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상상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되고 있다.


우선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무지가 있다. “이러한 이차 수준의 서사는 재구성될 수 있는 한에서의 사건들의 필연적인 연쇄과정 및, 자신들을 움직이는 원인들 대부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역사적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역사의 “의미”를 상상하는 방식을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Balibar 2005, 152쪽) 대중들의 상상은 비판적 역사의 필연적인 구성 요소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비판적 역사의 소재를 이루는 성서 내지 히브리 인민의 삶 자체가 상상의 요소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중들의 삶이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실제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이를 상상에 따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앞서 논의한 대로 스피노자의 일반적인 인간학적 테제,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야기시킨 원인들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윤리학󰡕 1부 「부록」)는 테제에서 따라 나온다.


그 다음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의 기초가 되었던 정치적 상상의 요소가 있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17장에서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히브리 국가의 구성이 일종의 계약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계약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이중적인 계약의 형식을 띠고 있다. 곧 이는 주권자와 신민들 사이에 맺어지는 정치적 계약이면서 동시에 야훼라는 신에 대한 개개의 신자들(곧 개개의 히브리인들) 사이에 맺어진 종교적 계약이기도 하다.[이 점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Balibar 1985; 진태원 2004 참조] 따라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신은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이면서 또한 정치적 주권자이며, 신의 계율에 대한 위반은 동시에 국법의 위반을 의미했다. “요컨대 시민법과 종교는 서로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국가는 신정 국가라 불릴 수 있었다.(Spinoza 1999b 17장 7-8절, p. 546)”


스피노자 자신이 말하고(“이 모든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의견opinione magis quam re에 속하는 것이다.” Spinoza 1999b 17장 8절, 모로판, 546)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라는 것은 물론 하나의 허구다. 하지만 이러한 허구는 매우 실제적인 효과를 낳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허구를 통해 하나의 국가가 구성될 수 있었고, 적어도 모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놀랄 만한 안정과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구가 이처럼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신을 각 개인의 신으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히브리 민족 전체의 신으로, 따라서 히브리 국가의 유일한 주권자로 만듦으로써, 각자가 신에게 바치는 절대적 헌신과 복종이 동시에 국가에 대한 헌신과 복종으로 되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왜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 필요한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는 무엇보다도 오랜 노예 생활 때문에 스스로 국가를 구성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히브리 인민들의 “미개인 같은rudis”(Spinoza 1999b 5장 10절, p. 222) 심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허구에 기초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역사적으로 유일한 국가인 것처럼, 일반적인 설명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발리바르가 보여준 것처럼 좀더 일반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곧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은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에 대한 법적 관점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정의 이중적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정은 한편으로 민주정과 등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과의 계약을 통해 신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하고 자신들을 신의 백성으로 재인지함으로써, 히브리인들 모두는 신 앞에서 동등한 신의 백성들, 신의 시민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상적 민주정”은 민주정의 핵심인 집합적 권리, 집합적 주권을 “다른 무대”로 옮겨놓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곧 신정에서 인민들 스스로가 동등하게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이는 신이라는 진정한 주권자가 초월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한에서다(곧 신의 거주지로서 신전이 특별한 경배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한에서). 따라서 신정은 집합적인 주권이 초월적인 신의 자리, 비어 있는 상징적 자리의 매개를 통해서만 실행될 수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발리바르의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제 고유한 의미의 민주정으로 되돌아가 보자. 개인들이 신과의 동맹이라는 허구(곧 주권의 상상적인 자리 이동) 없이도 명시적인 “사회계약”에 따라 직접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명되면, 문제는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중들의 미신은 차치한다 해도, 이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권리의 동등성과 의무의 상호성 위에 구성된 민주 국가는 개인적 의견들의 결과인 다수결 법칙에 따라 통치된다. 그러나 다수결 법칙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주권자가 공적인 이익과 관련된 활동을 명령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존중받을 수 있게 만드는 절대적 권리를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 외에도 또한 야심들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선호하는 것, 곧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Balibar 2005, 77쪽)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일회적인 것에 불과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사실은 정치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중요한 보편적 교훈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첫째, 법적 제도만으로는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는 충분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대중들의 정념적 삶을 조절할 수 있는 별도의 메커니즘 내지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둘째, 하지만 정념적 삶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종교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히브리 신정국가가 개인들의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함으로써 상당한 기간 동안 정치적 통합을 이뤄내긴 했지만, 이러한 국가의 통합, 일체화는 그 자체가 정념적인 양가성에 지배받고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끼리의, 국민들끼리의 놀라운 유대는 신과의 동일시/정체화를 매개로 한 서로에 대한 정념적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랑의 이면은 초월적인 신의 감시와 처벌에 대한 공포와 잠재적인 적으로서 이웃에 대한 일반화된 증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예수는 이처럼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삶을 정치적, 교권적 권위로부터 분리하여 이를 각자의 믿음과 판단에 따른 윤리적 실천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하나의 문화혁명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는 신자로서의 개인들을 정치적 권위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자체로부터 분리시켰으며, 또 그에 비례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신의 말씀을 내면화된 도덕법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셋째, 상상계가 개인의 삶 및 사회적 삶에서 구성적인 요소로 존재하는 한에서 대중들은 ‘자기 자신’(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과 합치할 수 없다는 것, 곧 대중들은 온전한 자율적 주체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상상계가 인간의 삶의 장소 그 자체인 한에서, 다시 말해 환원 불가능한 인간의 유한성의 조건 그 자체인 한에서,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또는 민주주의의 성립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전제되어 있는 대중들의 자기 통치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인가? 겉보기와는 달리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중들의 자기 통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는 항상 경향적으로만, 갈등적인 운동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곧 이는 유토피아로서의 민주주의 대신 현실적인 운동으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의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이제 우리가 위에서 출발했던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의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지금까지의 분석은 알튀세르가 AIE 논문에서 제시한 호명이론이 외양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것이 채택하고 있는 몇몇 용어법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전개한 이론적 분석과 놀랄 만한 이론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1) 이는 우선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 및 그것을 원용한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분석은 알튀세르의 AIE 논문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분석, 국가의 형성과 재생산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2) 더 나아가 알튀세르가 대주체와 작은 주체들(및 그 매개자로서 정치 지도자) 사이에 존재하는 호명 관계라고 부른 것은 스피노자가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 및 그것이 보여준 놀랄 만한 지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이중적인 계약관계와 정확히 합치하는 것이다.


3)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은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 수많은 오해와 달리 상상계 내부의 관점을 표현하는 것임을 시사해준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 이론은 기능주의적인 관점을 대변하는 것으로 널리 비판받아왔다. 다시 말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각각의 “개인들”이 “주체들”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미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지배 체계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없게 만든다고 비판받아왔다(이런 측면에서 보면 지젝의 비판은 종래에 제기되던 비판을 라캉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좀더 세련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AIE 논문이 불러일으킨 논쟁(및 오해)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AIE에 대한 노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데올로기 내부에는 항상 계급투쟁이 존재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의 기능이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이라면 그 이유는 저항이 있고, 저항이 있는 것은 투쟁이 있기 때문이며, 이 투쟁은 결국 계급 투쟁에, 때로는 가까이에서, 그러나 대개는 멀리서 응답하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반응이다.”(Althusser 2007, 332쪽) 그런데 계급투쟁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항상 집단에 대해, 또는 더 나아가 대중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반면 호명 이론에서는 집단이나 대중들이 아니라 항상 개인이나 주체(또는 복수로 개인들이나 주체들)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호명의 메커니즘은 항상 사회적 투쟁의 현실적 장이 추상된 가운데, 집단이나 대중들이 이미 개인들이나 주체들로 해체된 가운데 사고되는(또는 “상연되는représenté”) 것임을 말해준다. 물론 이는 이러한 추상이나 해체가 전혀 허구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과의 계약에 대한 상상계가 히브리인들에게 지극히 실재적이었듯이, 이데올로기의 상상계 내부에서는 이는 지극히 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에게 주체는 상상계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라캉적인 의미에서 상징적인 차원이나 실재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젝은 알튀세르를 비판하면서 지속적으로 “상징적 동일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알튀세르에게 이는 용어모순과 같은 표현이다. 그에게 주체가 지니고 있는 동일성은 상상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며, “동일시identification” 역시 상상적인 것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대한 노트)」 참조. 이 글은 아마도 이 책에 수록된 글 중 가장 주목받지 못한 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이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1996년 서문」에서 의미심장하게도 이 글이 일종의 “도둑맞은 편지”일 것이라고 쓰고 있다. Balibar 1996 참조.]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알튀세르에게 상상계란 라캉적인 의미의 상상계, 또는 좀더 그릇된 것이기는 하지만, 지젝의 의미에서의 상상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무의식의 주체라는 차원이 없다고, 호명 이전에 존재하는 주체를 사고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논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라캉적인 도식이나 최근에는 지젝 식의 해석을 그것에 덧씌우는 것에 불과하다. 그에게 주체는 상상적인 주체, 하지만 삶의 기반으로서 상상계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동일성을 갖고 살아가는 주체를 가리킨다.


스피노자와 관련하여 알튀세르가 차이를 보이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전자에게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식(히브리 신정)으로 나타났던 것이 후자에게는 보편적인, 초역사적인 메커니즘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발리바르가 보여주듯이 히브리 신정이 보편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알튀세르가 이를 호명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알튀세르가 호명의 메커니즘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곧 지배 계급의 예속의 메커니즘으로만 사고했다는 점이다. 히브리 신정의 경우 호명은 대중들의 무능력을 전제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상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히브리 인민들의 집단적인 생존의 전략(무의식적인?)이었으며, 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드시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발리바르 식으로 표현하면(Balibar 1991), 히브리 신정국가에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호명은 대중들의 해방에 대한 열망의 (얼마간 가상적인)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스피노자 식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민주주의적인 경향의 표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과 응용의 능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간파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점일 것이다.


물론 이는 지젝(및 다른 비판가들)이 주장하듯이 알튀세르에게 호명의 메커니즘이 “기능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사고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알튀세르는 이미 AIE 논문 말미의 “보론”에서 이데올로기 내부에서는 항상 계급투쟁이 진행된다는 것, 곧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중적인 저항이 항상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고, AIE 논문이 불러일으킨 논란에 대해 답변하는 글(Althusser 1976)에서는 이 점을 좀더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 이론이 기능주의적이라거나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비판은 적절한 것이 못된다. 다만 알튀세르는 호명은 개인들 및 대중들의 실존과 행동의 상징적 지주이면서 동시에 장애물을 이룬다는 것, 따라서 호명 그 자체가 계급투쟁 및 지배와 저항의 쟁점이 된다는 것을 충분히 해명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IV. 지젝의 난점들



지젝의 작업은 라캉의 정신분석학, 특히 그의 후기 작업의 요소들을 도입함으로써 현대 이데올로기론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 지젝 이전까지 이데올로기론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주로 상상계-상징계라는 쌍을 통해 논의되었는데, 이는 라캉의 작업이 (옳든 그르든 간에) 대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이론을 매개로 도입되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지젝은 이전까지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실재계”의 차원을 과감하게 이데올로기론으로 이끌어들이면서 이데올로기론 및 알튀세르와 라캉의 관계에 대해 전혀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사실 라캉의 후기 작업이 RSI론[이는 각각 “le Réel”, “le Symbolique”, “l'Imaginaire”, 곧 “실재계”, “상징계”, “상상계”의 약자표시다]으로 통칭되는 삼원성(특히 실재계를 중심으로 한)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영미권에서 지젝 이전의 라캉 수용은 불완전하고 다소 왜곡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젝의 진정한 독창성은 라캉의 이론(및 독일 관념론 철학)을 이데올로기론 및 사회이론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드문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드문 예외들 중 특히 장 클로드 밀네의 작업을 들 수 있다. Milner 1983.], 그 이전까지는 누구도 실재계를 포함한 라캉의 RSI론 전체를 이데올로기론과 사회이론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 그것이 현대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줄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반면 지젝은 다수의 저작들을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이 이데올로기론 및 문화분석론으로서도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젝의 이론적 작업에 난점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는 특히 그가 시도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개조에서 잘 나타난다. 가령 그는 우리가 위에서 제시했듯이 알튀세르의 이론에 대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우월한 이유를 이 후자가 호명을 넘어서는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특히 AIE 논문에서 호명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이론화함으로써, 그의 의도와 달리 자본주의적인 재생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 못한 채 오히려 기능주의에 빠져든 반면, 라캉은 욕망의 그래프나 “무의식의 주체”라는 개념을 통해 상징적 질서의 공백을 드러내고 호명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젝이 주장하듯이 라캉의 이론이 이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단지 정신분석학의 임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상을 가로지르’면서 동시에 증상과의 동일시를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에게 전가된 속성들 속에서 우리의 사회체계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에게 귀속된 ‘과잉분’ 속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Zizek 1989, 223쪽) 반복되는 “해야 한다”의 명령형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지젝에게 “환상을 가로지르기”는 궁극적으로 윤리적 문제라는 점이 드러난다. 윤리는 물론 비판적인 지식인들이나 대중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며, 올바른 정치적 행위를 위한 규범적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이론 또는 사회적 분석의 차원에서 윤리적 명령이 어떤 의의를 지닐 수 있을까? 특히 이데올로기론의 차원에서는 윤리적 명령이 어떤 의미에서 중요할까? 이는 “우리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지 “우리는 호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식의 명령과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하지만 “환상을 가로지르기”라는 해결책이 제기하는 좀더 중대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환상을 가로지르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환상을 가로지르’면서 동시에 증상과의 동일시를 완수”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엔 항상 상징적 질서로 통합될 수 없는 어떤 적대적인 갈등이 가로지르고 있다.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목적은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대관계에 의해 분할되지 않으며, 각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Zizek 1989, 220쪽) 우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핵심이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실소를 자아내는데, 과연 오늘날 누가 이처럼 아름다운 “통합주의적 관점”,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적 통일체”(같은 곳)로 바라보는 관점을 믿을지, 또 과연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런 식의 관점을 설파할 것인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좀더 심각한 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대한 지젝의 관점 자체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유대인을 하나의 물신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예로 든다. 곧 유대인은 “이 통합주의적인 비전과 적대적인 갈등에 의해 분열된 실제 사회 간의 거리”를 메우기 위한 물신, “건전한 사회조직을 부패시키는 이질적인 신체, 외부적인 요소”다. 따라서 “사회적인 환상이라는 개념은 적대라는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대응물이다. 환상은 정확히 적대적인 균열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바꿔 말해서 환상은 이데올로기가 자기 자신의 균열을 미리 고려해 넣는 방식이다.”(같은 책, 221쪽)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지젝이 말하는 사회적인 환상 또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라면, 결국 환상이란 기만적인 조작 및 그것이 산출하는 허위의식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마도 지젝이나 지젝주의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환상이 작동하는 것은 의식 내지 담론의 수준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서 향락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곧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우리의 향락 자체를 구조화하는 방식이다. 유대인의 예를 든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유대인을 증오하고 혐오하고 배척하는 것은 이런저런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들 때문이 아니라, 그가 바로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다면, 우리가 앞서 제기한 질문이 다시 제시된다. 이러한 사회적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회적 환상이 기만이나 허위의식의 문제라면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은 원칙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사실상으로는 매우 힘들지 몰라도). 비판적인 분석과 대중적인 계몽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환상이 의식이나 담론의 차원이 아니라 향락의 수준에 위치하고 있다면, 곧 우리 욕망의 가장 집요하게 내밀한 차원의 문제라면, 이것을 어떻게 가로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것이 된다. 어떻게 어제까지 그토록 증오했던 유대인들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될까? 유대인(또는 오늘날이라면 이주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사실은 가장 큰 피해자라고 일깨우면 될까? 유대인(이주 노동자들)이 실제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과 무관하다는 경험적인 자료들을 축적해서 입증하면 될까? 하지만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볼 수 있듯이 정서와 인식, 욕망과 지식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지젝의 관점에서 과연 이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지젝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바로 이것일 텐데, 지젝은 이 문제에 대해 줄곧 윤리적 태도,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믿고 또 그것을 추구하려는 윤리적 태도(그의 표현대로 하면 “행위”)가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버틀러와 대조하여, 라캉이 내기에 걸고 있는 것은, 심지어/또한 정치에서도, 바로 그 근본적인 환상을 ‘횡단’하는 좀더 근본적인 제스처를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환상적 중핵을 교란시키는 그와 같은 제스처만이 본래적 행위인 것이다.”(Zizek 1999, p. 266; Zizek 2005, 428쪽; Zizek 2007a). 좋은 이야기다. 그런데 대중들의 저항 없이 어떻게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지 않고서 어떻게 대중들의 윤리적 각성 및 저항을 기대할 수 있을까?[지젝에 대한 좌파 이론가들, 특히 숀 호머의 비판을 반비판하면서 토니 마이어스는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다른 한편으로, 호머는 지젝이 강조한 ‘행위’를 ‘세계를 바꾸기 위한 진실한 방법’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위가 우리의 인식 지평을 바꾼다고 할 때, 행위의 출현 이후 어떤 세계가 나타날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지젝은 진술 불가능한 것을 말하기보다는 행위의 가능성 자체를 지속시키는 데 관심을 가진다. 지젝이 지적하듯이 “오늘날 정치적 공간이 구조화되는 방식은 점점 더 행위의 출현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지젝은 자본주의적 삶의 지평을 끊임없이 이론화함으로써 행위를 위한 장소를 규명하는 데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한다.”(마이어스 2004, 225쪽) 마이어스는 몇 가지 측면에서 기본적인 혼동을 보여준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행위의 출현 이후 어떤 세계가 나타날지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행위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아는 것이다. 지젝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라 대중의 행위가. 둘째, 혁명 이후, 그날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말과 혁명의 가능성, 변혁의 가능성을 위해 현재 존재하는 세계의 구조들을 분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마이어스는 지젝이 “자본주의적 삶의 지평을 끊임없이 이론화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지젝이 하고 있는 것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대중문화적인 현상 및 부시의 이라크 침공과 같은 정치적 현상들에 적용하여 그 현상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현상들을 예시하는 것 또는 좀더 후하게 말하면 라캉을 원용해서 현상들을 분석하는 것(이때의 분석은 아마도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의 분석에 더 가까울 것이다)은 세계의 구조에 대한 분석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구조적인 분석이 없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세계의 근본적인 변혁을 감히 꿈꿔볼 수 있을까? 셋째, 마이어스는 지젝이 행위를 위한 장소를 규명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한다고 말하고 있고, 지젝 자신은 진보 정치를 위해 수동성으로 물러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것도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윤리적 행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좀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지배 계급 중 누가 지젝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윤리적 행위를 두려워하겠는가?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이 “지젝이 강조한 ‘행위’를 ‘세계를 바꾸기 위한 진실한 방법’으로 확대 해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을까?] 아니 지젝에게는 수동적인 대중과 다른 대중들multitudo에 대한 관점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더욱이 환상의 물질적인 지주로 기능하는 각종 물질적 장치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관념론적 성격에 대한 비판으로는 Sato 2007 5장을 참조할 수 있다.]


지젝이 최근의 작업(특히 Zizek 2003 「재판 서문」; 2005 및 여러 저작)에서 집요하게 근본적인 변혁에 대한 전망, “본래적인 행위”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면서도, 정작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윤리적 명령을 반복하는 데 그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이데올로기론에서의 퇴보를 나타내는 징표가 아닐까? 이를 좀더 부연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지젝에게 상상계 또는 그가 좀더 강조하는 용어대로 하자면 환상은 스피노자나 알튀세르와 달리 그것이 지닌 가상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상적인 것은 사회적 적대를 봉합하고 왜곡하고 기만적으로 쟁점을 전위시키는 것일 뿐, 개인들의 삶의 기반, 장소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더욱이 스피노자나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적 상상은 정치적 행위의 바탕을 이루는 데 반해, 지젝에게는 지배 계급의 조작의 소재가 될 뿐이다.


2) 이데올로기론에서 알튀세르적인 단절의 지표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적인 물질성에 대한 주장이었다. 이러한 테제를 통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한 고전적인 테제, 곧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의식의 문제이며 물질적인 역사와 달리 아무런 독자적인 실재성도, 역사성도 갖지 않는다는 테제와 단절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이 테제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개념으로 이어져,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의식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물질적인 장치를 통해, 관습적인 의례와 규율 장치를 통해 작동하는지 보여줄 수 있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관한 테제는 이데올로기가 역사적으로 규정된 물질적 장치들을 통해 제도화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며, 이는 정치적 투쟁의 쟁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스피노자에서도, 적어도 󰡔신학정치론󰡕에서 상상계는 항상 물질적인 장치들이나 제도 및 의례들과 관련해서 사고되고 있다. 반면 지젝에게는 물질적인 장치들이나 제도들에 대한 분석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사회적ㆍ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분석들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사례들로 제시될 뿐이다.[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지젝이 처음 제시하고(Zizek 1989) 지젝 자신(Zizek 1997 3장) 및 로베르트 팔러(Pfaller 2002)가 좀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이데올로기적 장치 및 제도들을 분석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V.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지젝은 자신의 여러 저작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기반하여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의 한계를 비판해왔다. 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서는 이러한 한계가 스피노자주의의 한계 또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서 스피노자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스피노자 철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판단하는 점에서는 지젝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그는 대부분의 라캉주의자들의 맹목적인 비판보다 훨씬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주의=범신론이라는 상투적인 도식에 입각한 그의 비판은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의 비판일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이 지니는 중요성과 독창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심각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지젝의 생각과 달리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는 다른 기반, 특히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에 기초하여 구성되고 발전되었으며, 라캉의 이론이 얼마간 알튀세르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오히려 전자의 토대 위에서 변형되고 재구성된 상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특성 및 그것의 정확한 강점과 난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이 글은 2008년 3월 15일 서양근대철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처음 발표했으며, 3월 31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월요모임에서 다시 발표한 바 있다. 첫 번째 발표회에서 귀중한 논평을 해주신 홍기숙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두 차례의 발표회에서 좋은 지적을 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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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요약

이 연구는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어떤 의미에서 스피노자주의적 이데올로기론이라고 할 수 있는지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대개 라캉주의적 이데올로기론으로 알려져왔으며, 더욱이 실패한 라캉주의 이론으로 비판받아 왔다. 슬라보예 지젝은 최근 저작들에서 이러한 실패의 이유를 알튀세르와 스피노자주의의 연관성에서 찾고 있으며, 라캉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양자의 공통적인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필자의 주장은,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의 본질적인 이론적 연관성을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는 지젝이 옳지만, 그 연관성의 실제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문제의 핵심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상계' 개념의 의미를 밝히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상상계 개념은 스피노자의 인간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새롭게 해명하는 데에도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난점들은 스피노자와 알튀세르가 공유하고 있는 유물론적 상상계 개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핵심 주제어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 상상계, 호명, 환상, 변용의 질서와 연관, 신정국가


Abstract

This study aims to elucidate in what sense the Althusserian theory of ideology is a spinozistic one. It has been generally considered as a Lacanian theory, and even criticized by some commentators as a failed one. Slavoy Zizek found the reasons of its failure in the theoretical connections between the Althusserian theory and the Spinozism, and criticized their common limitations from the viewpoint of Lacanian psychoanalysis. In my thought, he was surely right to find the essential theoretical relation between Althusser and Spinoza, but he totally failed to understand its meaning and significance. I think the point is to clarify the meaning of "the imaginary" in the philosophy of Spinoza. "The imaginary" is important not only to understand Spinoza's anthropology, but also to bring a new light on the Althusserian theory of ideology. Then, I hope, one can explain the difficulties of Zizek's own theory of ideology in the light of the materialist concept of the imaginary which is shared by Spinoza and Althusser.

key words: Slavoy Zizek, ideology, the imaginary, interpellation, fantasy, order & connection of affections, state of the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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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경제위기 어떤 상태인가?


[칼럼] 구조적 위기 또는 심각한 공황으로 이

어질 가능성 커



박하순(노기연/사회진보연대)  / 2008년08월04일 15시46분

지난 3월 미국 제 5위 투자은행 베어스턴스가 몰락할 무렵 신용경색과 경제위기 공포가 최고조에 달했다가, 미 연방준비위원회의(연준) 지원 아래 제이피모건체이스 은행이 베어스턴스를 인수하고 금융시장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었다. 그래서 대공황 전문가로서 미 연준 의장을 맡고 있는 벤 버냉키는 6월에 "미국 경제의 실질적인 하강 위험이 줄어들었다"고 언급하였고,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은 "신용위기 최악의 상황은 이미 끝났거나 곧 끝날 것"이라 했다.


그러던 것이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민영화되었으나 정부가 일정하게 지원하는, 합해서 모기지 시장의 반 정도를 점유하는 거대 주택금융(모기지) 업체인 패니메이(Fannie Mae)와 프레디맥(Freddie Mac)의 부실 소식으로 다시 금융시장이 요동을 쳤다. 미 정부는 재무부로 하여금 양 기관에 대한 신용공여한도를 각각 22.5억 달러씩 향후 18개월 동안 증액하고 필요할 경우 양 기관으로 대표되는 정부지원 모기지업체 발행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권한을 재무부에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하여 의회의 승인을 얻었다(그린스펀은 최근 양 기관의 국유화를 주장하였고, 벤 버냉키도 최후의 카드로 이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은 다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렇게 금융시장이 위기감에 휩싸이고 뒤이어 중앙은행의 금리인하 및 유동성 공급과 정부의 경기진작책 및 공적자금 투입 발표가 있으면서 시장이 상대적인 안정을 되찾는 식의 교대가 2007년 중반 비우량(서브프라임)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발발한 이후 1년간 계속되고 있다. 올해 들어서는 미국경제의 이런 불안한 행보에 유가 변수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그러면 미국경제는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가?
최근 발표된 속보치(나중에 수정될 수 있다)에 따르면 미국경제는 2/4분기에 연율로 환산하여 1.9%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9.2% 증가한 상품 및 서비스 수출(1/4분기에는 5.1% 증가하였다)과 6.7% 증가한 정부지출(1/4분기에는 5.8% 증가하였다)이 이 정도의 성과를 내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국내총생산의 약 70%를 차지하는 소비도 1.5% 증가하여(1/4분기에는 0.9% 증가하였다) 경제성장률이 더 악화하지 않는 데 기여하였다.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미 정부가 4월부터 1,680억 불에 이르는 소득세를 환급해 주었고 이것이 소비지출을 어느 정도 늘리는 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금융시장 주변에서는 2.3% 정도의 성장률을 예측하였는데 이에는 약간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0%로 발표되었던 1/4분기 경제성장률은 0.9%로 수정되었고, 0.6%로 발표되었던 2007년 4/4분기 성장률은 -0.2%로 수정되어 발표되었다. 대체로 2분기 이상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경우로 정의되는 경기침체가 시작되었는지 아닌지, 시작되었다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그동안 논란이 있었는데 논자에 따라서는 미국의 경기침체의 시작시점을 2007년 4/4분기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상황이다.


그리고 최근 발표한 고용통계를 보면 7월 실업률은 4년 만에 최고치인 5.7%를 기록하였고, 고용규모는 7개월 연속 감소하였다. 4월까지만 해도 실업률은 5%였는데 그 사이 무려 0.7%포인트가 증가한 것이고 6월 실업률 5.5%보다 0.2%포인트가 상승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은 경착륙이나 공황을 이야기할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불안불안하게 금융위기 상황을 헤쳐 나오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미국경제는 앞으로도 약간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우선 주택가격 하락이 얼마나 더, 언제까지 하락할 것인가에 달려 있어 보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불거진 미국경제의 위기적 양상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 부실에서 시작하였다. 신용이 썩 좋지 않은 사람들이 모기지 은행에서 주택 자금 대출을 받아 주택을 샀는데(사실 이런 연유로 주택가격이 계속 오르고 주택부문의 성장도 과도하게 진행되었다. 즉 주택시장에 커다란 거품이 형성된 것이다), 이자부담이 늘고 소득이 감소하자 이들 중에 그 원리금을 제 때에 상환하지 못한 주택구매자들이 많아졌다.(이자부담이 왜 늘어났는가? 2000년대 초반 정보기술부분에서의 거품붕괴를 막기 위해 대폭 낮아진 기준금리는 2004년부터 오르기 시작했고, 많은 모기지들이 초기 2-3년은 낮은 이자율, 이후 7-8년은 높은 이자율을 지불하는데 2000년대 초중반 급격히 늘어난 서브 프라임 모기지들은 2000년대 중후반부터 높은 금리를 지불해야 했다. 소득은 왜 감소하였는가? 자동차 공업 부진 등으로 이들 지역의 실업이 늘어났고 당연히 소득이 감소하였다.)


모기지 은행에서 다른 금융기관으로 넘겨진 주택대출자산을 근거로 하여 채권(MBS, ABS)과 이보다 더 복잡한 채권들(CDO)이 발행되었는데(주택대출자산의 유동화) 이들의 가격이 하락하고, 이런 채권들을 보유한 각종 금융기관들(투자은행, 헤지펀드, 상업은행 등)이 부실해졌다. 물론 원리금을 못 갚은 주택소유자들의 주택은 값싸게 처분되고 주택가격은 하락하였다.


사실 주택가격이 오르고 있을 때에는, 원리금을 갚지 못할 사람들이 오른 주택가격에 기초해 다시 대출을 받아 문제를 연기할 수도 있었고 받은 현금을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일단 주택가격이 내리기 시작하면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하락한 주택가격은 대출금에 미달해 주택을 팔아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게 되어, 연체율은 더욱 높아지게 되고 결국 주택은 금융기관으로 넘어가 처분된다. 즉 연체는 주택가격 하락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주택가격 하락으로 인해 연체가 늘어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주택건설 축소 및 해당부문에서의 생산 및 소득의 감소, 금융기관의 부실 및 해당부분의 손실 확대, 신용경색으로 인한 금리상승과 이로 인한 소비 및 투자 축소나 주식시장의 부진, 그리고 이로 인한 소비 축소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택가격 하락은 현재의 위기의 크기나 깊이의 척도가 된다.


주택가격은 이전 최고치에서 30% 내외의 하락이 있을 것이라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대도시 20개 지역의 주택가격을 재는 케이스쉴러지수(S&P/Case Shiller Home Price Indices)로는 지난 5월까지 최고치 대비 20% 약간 못 미치는 주택가격 하락이 있었다. 금융시장이 약간 안정을 찾은 시기여서인지 몰라도 5월의 주택가격 하락은 전월 대비 0.9%가 하락하여 약 2%가 하락했던 3월, 4월에 비하면 약간 둔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앞으로도 10% 이상 주택가격이 하락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하락은 2009년까지 계속될 것이라 한다.


이렇게 될 경우 보유자산의 상각을 계속 해나가고 있고, 딱히 영업상황도 개선될 기미가 없는 메릴린치나 리먼브라더스같은 미국 3, 4위 투자은행의 경우 베어스턴스의 길을 뒤따르지 말란 법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상업은행 4위 와코비아나 심지어는 자산규모 기준 1위 씨티은행의 안전한 운행도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은 이번 금융위기의 규모나 파장을 가장 정확히 예측하고 있어 이름을 드높인 뉴욕대학의 루비니 교수의 진단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루비니 교수는 8,500개 대소규모의 은행 중 8% 정도가 파산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파산한 은행 예금 중 개인당 1억 한도 안에서는 보장을 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 정부의 공적자금이 투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패니메이나 프레디맥의 재국유화 가능성도 있고, 쓰러진 거대은행들에도 직간접적으로 공적자금이 투입될 것이어서 미 정부의 부담은 크게 늘어날 것이다(‘부실의 사회화’).


미국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주택시장 거품문제만은 아니다. 지금껏 지속적으로 구조조정을 해 오고 있던 3대 미 자동차업체(지엠, 포드, 크라이슬러)는 또다시 고유가의 직격탄을 맞고 빈사상태에 놓여 있다. 고유가는 자동차 업계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는데 이들 업체는 픽업트럭, SUV, 대형차 등 고유가에 특히 취약한 차들을 생산해 와 그 타격이 특별히 크다. 미국자본주의가 세계헤게모니로 등장한 데는 자동차산업의 발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들 업체들의 부진은 매우 상징적이라 하겠다.


미국경제의 앞날에 또 다른 변수는 미국을 제외한 세계 다른 국가나 지역의 경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경제와 여타 경제는 상호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표에 따르면 유럽연합, 일본, 영국 등 거대경제권의 성장이 매우 미약하다. 몇몇 나라는 경기침체에 들어갈 가능성도 농후하다.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의 주택시장 거품도 붕괴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2008년 1분기에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고 2분기도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으로 예측이 되고 있어 경기침체에 들어섰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호주, 남아공 경제상황도 좋지 않다. 중국, 베트남, 인도는 주가가 폭락하고 있으며, 베트남, 인도, 필리핀 등은 대외 불안 요소를 가지고 있다. 즉 세계 다른 많은 지역이나 국가의 경제도 거품붕괴나 부진한 성장, 혹은 대외 경제 불안 요소를 안고 있다. 최근 미국경제의 성장을 그나마 지탱해 준 수출도 부진해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사태가 장기화한다면 이들 지역이나 국가들의 미국 내 투자자산에 대한 환수 가능성도 없지 않다.


2009년 혹은 2010년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미국의 금융위기의 양상은 거대금융기관의 부실, 거대 자동차업체나 항공업체의 부실, 세계 여타지역의 경제위기나 개도국의 외환위기 등으로 인해 앞으로도 위기와 상대적 안정이 교차되는 싸이클을 지속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기존 제도들이 위기의 부담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무너져 위기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시스템 리스크를 경험할 수도 있어 보인다. 이는 당연히 구조적 위기 내지 심각한 공황으로 이어질 것이다.


설사 공황까지는 가지 않을지라도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부실의 사회화와 이로 인한 재정적자 심화 등으로 미국경제는 최소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어떤 양상이든 임금억제, 실업률 및 비정규-단시간 노동의 증가, 물가인상 등으로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과 노동권은 심각히 훼손될 것이다.


이윤율 추이를 통해 본 미국경제 위기
이윤율 추이를 소묘해 보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이윤율 대용으로 비금융법인자본 수익률(이윤과 이자 등의 자본소득 ÷ 생산 자산[=고정자산+재고자산])을 이용하자.






미국경제의 이윤율은 65년까지 상승을 하다가 1982년까지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그 사이 작은 등락들이 있는데 새로운 정점들은 그 이전 정점들에 비해 더 낮고 새로운 저점들은 그 이전 저점들에 비해 더 낮다. 그리고 1997년까지 이윤율은 완만한 기울기로 다시 상승하다가 97년 이후 2007년까지는 이윤율이 다시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82년부터 97년까지 작은 등락들의 정점들은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고 97년 이후의 새로운 정점인 2004년의 정점은 97년보다는 낮다.


한편 82년 이후 가장 높은 이윤율을 보이고 있는 97년의 이윤율도 65년의 이윤율에 비하면 70% 정도에 불과하다. 윤소영(『이윤율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 2002)에 따르면 미국경제는 69-70년 순환적 위기, 73-75년 구조적 위기, 80년 순환적 위기, 81-82년 구조적 위기, 90-91년 순환적 위기를 경험한다. 구조적 위기란 이윤율 추세선이 하락하는 가운데 이윤율이 급격히 하락할 때 발생하는데 이는 공황으로 연결된다.


널리 알려진 대로 미국자본주의는 70년대 중반 징후적 위기가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하여 미국자본주의는 성장기에서 불황기로 진입한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이익을 향유하면서 5-60년대 황금기에는 현저히 미달하지만 일정한 호황을 구가한다. 90-91년 순환적 위기를 한차례 겪었을 뿐 97년까지 이윤율이 추세적으로 상승한다. 이윤율이 상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주의 그룹들 중 최정점에 위치하면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편익의 대부분을 영유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국내 노동자의 노동권과 개도국의 발전의 권리가 희생되었다. 97년 이후 이윤율은 다시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미국자본의 해외부문으로부터의 수익률은 아직도 증가하거나 유지되고 있는 반면에 국내에서의 수익률이 감소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97년 이후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후반부라 일컬을 만하다.


이런 설명 틀에서라면 2001년의 위기는 구조적 위기라 할 수 있을 것이고, 2009년 혹은 2010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예상이 되는 현재의 금융위기의 결과는 2001년 위기를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윤율도 2001년의 이윤율보다 더 낮아질 것이다.


윤소영(『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 2005)은 미국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를 2010년대로 예상하고 있는데, 2009년 혹은 2010년 이후 또 다른 회복국면이 있을지라도 이때의 이윤율은 2004년의 이윤율보다 더 낮을 것이고 이 정점 이후 이윤율 하락은 81-2년의 수준을 하회할 것이다. 미국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권과 공적자금 투입기관들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둘러싼 투쟁을 완강하게 전개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미국경제위기 어떤 상태인가? (2)


[칼럼] 거대한 거품과 그 붕괴는 더 큰 규모로

돌아올 것



박하순(노기연/사회진보연대)  / 2008년10월10일 15시44분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은 하나의 직접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여러 지불이 상쇄되는 한에 있어서는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는 계산화폐 또는 가치척도로서 오직 관념적으로 기능할 뿐이다. 현실적인 지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한에 있어서는, 화폐는 유통수단, 즉 상품교환의 단지 순간적인 매개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의 개별적 화신, 교환가치의 독립적 존재형태, 일반적 상품으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 모순은 산업 및 상업의 공황 중에서 화폐공황으로 알려진 국면에서 폭발한다. 이 화폐공황은, 지불들의 연쇄와 지불결제의 인공적 조직이 충분히 발전된 경우에만 일어난다. 이 메커니즘에 전반적 교란이 일어날 때, 그 교란이 어떻게 해서 생겼건 간에, 화폐는 계산화폐라는 순전히 관념적인 모습으로부터 갑자기 그리고 직접적으로 경화로 변해 버린다(칼 마르크스,『자본』3권, 김수행 역).


신용공황으로 ‘화폐기근’이 발생할 때 은행신용이 일반적 등가물로서 화폐를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극적으로 확인된다(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특정한 지불일이 붙어있는 지불의무의 연쇄는 도처에서 끊어지는데, 이것은 신용제도(자본과 함께 발전하여 왔다)의 동시적 붕괴에 의하여 더욱 격화된다. 이 모든 것들이 격렬하고 첨예한 공황, 갑작스럽고 강력한 가치감소, 재생산과정의 현실적 정체와 교란, 그리고 재생산의 현실적 축소를 초래한다(칼 마르크스,『자본』 3권, 김수행 역).


글머리에: 대규모 구제금융안 통과


모기지 시장 거의 반을 점유하는 두 거대 모기지 업체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국유화와 2000억 달러 구제금융 이후에, 제 4위 투자은행 리만브라더스의 파산보호신청(법정관리)을 계기로 미국 내에 그리고 국제적으로 신용경색 현상이 심각해지자 미국 정부는 부실자산 구제(TARP; Troubled Asset Relief Program)를 골자로 하는 긴급 경제안정법안(EESA)을 제출하였다. 구제금융 자금으로 7,000억 달러의 미 국민의 세금이 지출되어야 하는 법안이다. 자유시장원칙에 어긋난다는 공화당 의원 다수의 반발과, 국민들은 주택을 차압당하고 쫓겨나고 있는데 국민들의 세금으로 월가를 구제할 수 없다는 민주당 좌파의 반대가 더해져 하원에서 한차례 부결된 이후, 이 구제금융 법안은 공화당 의원을 달래기 위해 감세안이 추가되고, 예금보험 한도를 한시적으로 2009년까지 10만 달러에서 25만 달러로 올리는 내용을 삽입하여 상원과 하원을 통과했다.


신용경색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는 이 뿐만이 아니다. 미 연방준비위원회(중앙은행 격;연준)는 기간입찰대출(TAF) 규모를 1천5백억 달러에서 9,000억 달러까지 늘려 자금을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미 연준은 기업어음을 매입하여 직접 기업에 자금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더 나아가 전 세계 주요 국가 중앙은행들과 공조하여, 심지어는 중국 중앙은행까지 참여하여 금리를 내렸다. 가장 최근에는 영국의 예를 따라 크거나 작거나, 건강하거나 부실하거나 간에 금융기관들의 우선주 매입 형태로 자본금 확충에 구제금융 자금을 투입한다는 계획까지 세워지고 있다. 즉 부분적인 국유화를 단행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3위 투자은행 메릴린치의 제이피모건체이스로의 인수합병, 1위 보험회사 AIG의 국유화, 1, 2위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의 (겸업)은행으로의 전환, 저축대부조합 1위 워싱턴 뮤추얼의 제이피모건체이스로의 인수합병 등의 사건도 있었다.


한편 신용경색에서 자유롭지 않은 유럽 각국도 긴급자금을 투입하기도 하고, 예금보장 한도를 전액으로 늘리기도 하고, 공적자금을 투입해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는 많은 대형 금융기관들을 국유화하거나 보다 건강한 금융기관에 인수합병시키는 등 신용경색을 해소하기 위한 제반 조치를 필사적으로 취하고 있다.


지속되고 심화되는 신용경색


그러나 신용경색과 은행파산이 극심했던 1930년대 대공황에 대한 전공자이자 전문가 미 연준 의장 버냉키와 금융기관의 이익을 가장 잘 옹호할 것 같은, 최대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 회장 출신 폴슨 재무장관 주도로 진행된 구제금융안 통과와 이런 일련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신용경색은 가실 기미가 전혀 안 보이고 신용경색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TED 스프레드(1)는 4를 넘나들고 있다. 사실 2007년 초 이번 위기 발생 이후 미 정부나 연준의 이러저러한 정책, 즉 자금 공급, 금리인하, 세금환급을 통한 경기부양, 구제금융 제공 등의 정책이 취해지면 일시적으로 금융시장이 안정을 되찾아 자금경색이 풀리곤 했는데 이번엔 온갖 초대형 정책을 연일 쏟아내 놓아도 신용경색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그림 1> 참조).





▲  이 숫자가 커질수록 신용경색이 심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평상시는 이 TED 스프레드는 0.5 정도를 나타낸다고 한다.

구제금융안 통과와 이런 일련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왜 경제주체들은 금융기관들에 신뢰를 보내지 않고 자금인출과 현금보유에 열을 올리고 있을까? 그래서 신용경색이 지속되고 있을까?


이는 기본적으로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어떤 금융기관이라도 지급불능에 빠질 수 있다고 경제주체들이 의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심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지극히 정당해 보인다. 우선, 경제주체들이 금융 시스템이 고장이 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모기지 기반 채권이나 각종 파생 금융상품 등 부실자산을 어떤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각각의 금융기관들의 재무구조가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재의 부실상태도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래에 각 금융기관들의 부실상태가 더 대체로 악화될 것은 뻔하지만 각각의 금융기관들이 어느 정도 악화될 지를 또한 전혀 모른다는 데 있다.


여기서 장래에 왜 상태가 악화될 것인가를 좀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이번 위기의 도화선이 된 주택가격의 하락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 하락 정도가 애초 예상한 25%(6월 현재 18% 하락)를 넘어 30% 혹은 40%에까지도 이를 수 있다는 예측들이 나오고 있다. 주택가격 하락률이 이렇게 커진다면 비우량(서브 프라임) 주택담보대출의 연체율도 애초의 예상보다 높아지고 프라임(우량) 담보대출의 부실도 더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주택가격 하락이 몇 달 안, 즉 단기간에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인데 그 기간이 길어진다면 단기간 안에 깔끔한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즉 부실자산을 정부에 매각한 이후에도 금융기관의 새로운 부실은 몇 차례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조치로 해결 불가능한 “느린 동작의 붕괴”가 문제라는 것이다.


둘째, 신용경색으로 상징되는 현재의 금융위기는 공급관리자협회(ISM) 제조업지수, 9월 취업자수, 자동차 판매 대수(2)등을 보건데 실물경제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주택부문의 불황을 지속시킬 뿐만 아니라 신용카드, 자동차 할부, 학자금 융자 등 소비자 금융의 부실, 일반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의 부실도 낳게 될 것이다. 이런 금융자산을 보유한 금융기관들의 부실은 당연히 심화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열거한 이유들로 인해 금융기관들은 자금인출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들은 도산을 모면하기 위해 자산매각, 대출 기피 등으로 대응하고 있는데, 이런 행위 자체가 자산가격의 추가적인 하락 및 영업축소와 이로 인한 추가적인 부실이라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즉 주택거품 붕괴가 여전히 진행되는 가운데 지속되고 있는 실물경제 위기는 금융기관의 추가적인 부실을 낳고, 추가적인 금융기관 부실은 신용경색을 지속시키고, 신용경색 지속은 다시 추가적인 실물경제위기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미 정부의 대책이 현재까지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이 큰데, 현재의 문제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아 정확한 대응책이 되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장래에 발생할 큰 문제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유효한 대책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용경색은 ‘백약이 무효’인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신용경색의 국제적 성격


신용경색은 현재 국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그 이유를 좀 살펴보기로 하자. <그림 2>는 미국 이외 세계 전체의 미국내 투자자산(이하 다 잔액이다)과 미국계 자본의 대외 투자자산을 각각 미국 이외 세계 전체의 총생산 대비 비중의 추이를 보여주고 있다. 두 수치 다 90년대 중반 20% 미만에서 그 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2007년의 경우 4-50%에 이르고 있고(미국의 국내총생산에 비해서는 각각 145%와 128%에 해당한다), 2007년 말 그 가액은 각각 약 20조 1천억 달러와 약 17조 6천억 달러에 이른다.(3) 이런 미국과 미국 이외 세계 사이의 투자자산의 급증은 금융세계화로 인하여 실제 투자자산의 유량(플로우)이 증가한 측면도 있고 기존 투자자산의 시장가치가 상승한 데서 온 측면도 있다. 특히 미국의 대외 투자자산 가치의 증가는 2008년 중반까지 진행된, 달러가치에 비한 여타 세계 통화 가치의 상승에서 연유한 측면이 크다.





▲  미국의 대외 투자자산 가치의 증가는 2008년 중반까지 진행된, 달러가치에 비한 여타 세계 통화 가치의 상승에서 연유한 측면이 크다.

그 이유야 어떻든 이렇게 비중이 커진 투자자산으로 인해, 미국 내 투자자산의 가치 감소는 이들에 투자하고 있는 여타 세계의 금융기관이나 기업을 부실로 몰아갈 수 있고, 반대로 여타 세계의 금융기관이나 기업의 부실은 이들에 투자하고 있는 미국 금융기관들이나 기업들을 부실로 몰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 상무부 산하 경제분석국의 자료를 통해 구체내역을 보면 2007년 잔액 기준으로 미국 이외 세계전체의 미국 내 투자자산은 각종 채권 3조 3천억 달러(전체의 약 16.4%), 주식 투자 2조 8천억 달러(14.1%), 직접투자 2조 4천억 달러(12.1%) 등이다. 채권도 자산가치 변동을 하지만(특히 모기지 관련 채권), 이 채권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보유자산의 26.2%(5조 2천억 달러)가 자산가치 변동의 위험을 안고 있다. 미국의 해외 투자자산은 각종 채권 1조 5천억 달러(전체의 약 8.4%), 주식 투자 5조 2천억 달러(29.3%), 직접투자 3조 3천억 달러(18.9%) 등이다. 역시 채권을 제외하고도 보유자산의 48.1%(8조 5천억 달러)가 자산가치 변동의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택거품의 붕괴로 모기지 기반 각종 채권들의 부실화나 가치하락은 이런 채권을 가진 미국 및 다른 나라 금융기관의 부실화 및 주식가치 하락과 채무불이행 위험을 증가시키고 이는 연쇄적으로 반응을 일으켜 다시 전 세계 금융기관의 자산가치를 감소시키게 된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금융기관을 부실에 빠지게 한다.(4)


그리고 2007년 말 미국 이외 세계 전체의 미국으로의 은행대출과 미국 채권 매입액 잔액의 합계는 약 7조 3천억 달러(36.4%)이고, 미국의 미국 이외 세계로의 은행대출과 이들로부터의 채권매입 잔액의 합계는 5조 3천억 달러(30.1%)인데, 결국 금융기관의 부실은 국제적인 은행 대출과 채권매입의 축소나 중단을 야기할 것이므로 세계적인 신용경색은 자연스럽게 뒤따를 것이다. 또한 이는 다시 자산의 헐값 매각 등을 야기하여 금융기관들의 추가적인 부실의 원인이 될 것이다.


주식가격 폭락과 세계적인 은행의 실패 가능성


한편 주택가격 하락과 모기지 관련 채권들의 부실에서 시작하였지만 현재 세계적인 주식가격 하락과 이로 인한 금융기관들의 부실에서 오는 신용경색도 심각하다. 세계 각국의 주식시장의 하락률이 30%대-60%대에 이르고 있는데 미국 이외 지역의 주가하락률이 더 높다는 것을 감안하면 미국의 대외투자 자산 가치 감소가 특별히 크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엔화를 제외한 모든 통화에 비하여 달러가치가 상대적으로 상승하고 있는데(즉 여타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하락하고 있는데) 이로 인한 손실까지 고려한다면 미국의 금융기관들과 기업들의 자산가치 감소는 상당하다고 하겠다.(5)


그래서 현재로서는 금융기관들이 보유하고 있는 모기지 관련 채권들과 주식을 포함한 투자자산들을 시가로 평가한다면 미국과 주요 국가의 세계적인 금융기관들이 거의 모두 자본잠식 상태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추측이 된다. 이는 자금인출이 계속된다면 결국에는 만기불일치로 인한 지급불능이 아니더라도 부채총계가 자산총계보다 커서 지급불능에 빠진다는 의미이다.(6)


99년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했던 글래스-스티걸 법의 폐지 이전부터 상업은행은 투자은행 기능을 겸해 겸업은행으로 변해왔고 이번 위기 과정에서 위기에 빠진 투자은행들을 인수했는데 이런 은행들이 위험에 빠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씨티은행, 미국은행(BOA), 제이피모건체이스, 그리고 스위스계 거대은행 UBS, 영국계 거대은행들 등. 또한 투자은행 기능만 하다가 이번 위기에 예금수신을 하겠다면서 겸업은행으로 ‘화장만 고쳐’ 변신을 선언한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의 위험은 이들보다 훨씬 더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들 위험해진 금융기관에 참여한 일본은행들의 실패도 예상이 된다. 이런 세계적인 거대은행의 실패가 현실화한다면 신용경색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지속적인 거품’에 의존해야 생존 가능한 세계자본주의의 모순


“우리는 또 다른 거품이 필요하다”
미국 주택시장 거품이 붕괴하면서, ‘화폐기근’으로 금리가 치솟고 거대 금융기관들이 쓰러지고 증권시장이 하락하면서 미국경제가 위기로 빠져들자 몇 개월 전 어느 금융관련 종사자가 내뱉은 말이다.


돌이켜 보면 1990년대 말 정보기술산업(IT)에서도 거대한 거품이 만들어졌다가 정보기술산업 주식(나스닥)이 폭락을 했고, 따지고 보면 아시아 위기도 ‘아시아 태평양 시대’가 열렸다면서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으로 자본이 몰려들면서 형성된 거품이 붕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경제에서의 80년대 90년대 ‘저축 대부 조합’ 사태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과잉축적-이윤율저하를 주기적으로 경험한다. 자본주의에서 개별자본은 자본간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더 효율적으로 착취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노동절약적인 생산수단을 경쟁적으로 도입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과잉축적으로 이어지고 결국 거대한 거품이 형성된다.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거품은 붕괴된다. 경제위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번 미국의 경제위기는 2006년 4/4분기부터 시작된 이윤율저하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이윤율 저하의 효과는 과잉생산 과소소비의 모습을 띤다. 과잉생산 과소소비의 정도는 업종마다 다를 것인데 이번 위기에서 주택부문의 과잉생산 과소소비의 정도는 특히 심하다. 현재는 이미 팔린(실현된) 것으로 기록된 주택 상품이 연체 차압의 형태로 반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잉축적과 주택부문의 붐은 전 세계 자본의 미국으로의 유입으로 가능해졌다. 미국은 거대한 경상수지 적자를 내게 되었다.


그 동안 미국경제는 성장률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순항하는 듯 보였다. 거대한 거품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일부에서 비판하면 그린스펀은 별 문제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제 역사상 전대미문의 거대한 거품이 붕괴하면서 세계적으로 신용경색이 발생하고 있다. 제사(題詞)에서 언급된 ‘화폐기근(신용경색)’은 비단 상품시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직접금융(채권, 주식)의 팽창, 신용의 증권화 등으로 한껏 부풀어진 세계의 자산시장 전체에서 신용경색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만간 거대한 금융기관도산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여 크루그먼 등 새 케인즈주의자들은 국제적인 공조 아래 은행들의 (일시적인) 국유화, 예금 보장, 거시경제적 경기부양을 위기타개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들의 대안에 외채위기나 환율위기를 겪을 개도국의 문제나 (특히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문제 등은 아예 시야에 없다는 것을 잠시 제쳐놓는다면, “시장에 맡겨라”를 주문처럼 되뇌는 공화당 의원들에 비하면 이들의 대안은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일정하게나마 성공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금융기관들이 자본잠식 상태에 있고 이들에 대한 불신이 극도에 달해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본금 확충이 있어야 할 것이고, 현재 하강하고 있는 경기를 되돌리기 위해서 장기에 걸친 대규모 경기부양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세계 경제 전체가 동조화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정책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시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일정한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상당한 시간과 어마어마한 재정지출과 치밀한 국제적인 협력이 요구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대안이 일시적으로 일정하게 성공을 거둔다 하더라도 그 부정적인 후과(재정적자 급증, 지지부진한 성장) 역시 만만찮을 것이다. 물론 보다 중요한 문제점은 이들의 대안이 ‘지속적인 거품’에 의존해서만 생존이 가능한 미국 주도 세계자본주의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거대한 거품과 그 붕괴는 더 커다란 규모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이다. 아니면 1930년대 대불황에서처럼 손쉬운(?) 해결책으로 전쟁이 모색될 지도 모르겠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이나 노동권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노동자 민중의 대안을 본격화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그것도 전국적이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각주

1) LIBOR(런던 은행간 금리)와 미 재무성 증권 3개월 물(안전자산)의 수익률의 차이. 자금경색이 발생하면 LIBOR 금리는 오르는 반면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는 미 재무성증권으로 자금이 몰리면서 가격이 오르고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는 수익률은 떨어지게 되어 이 둘 사이의 차이가 커지게 된다. 즉 이 숫자가 커질수록 신용경색이 심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평상시는 이 TED 스프레드는 0.5 정도를 나타낸다고 한다.


2) 포드의 자동차 9월 판매대수는 전년 동월 대비 34.6%가 하락하였고 지엠이나 크라이슬러 심지어는 도요타 자동차 판매대수도 현저히 줄었다. 자동차 3사의 운명은 그야말로 경각에 달려 있다.


3) 미국의 순 국제투자 자산 잔액(=대외 투자자산 잔액 - 외국인투자 자산 잔액)은 그래서 -2.4조 달러이고 그 절대 규모는 미국 국내총생산에 비해 17.7%를 차지한다.


4) 미국의 채권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영국과 벨기에 및 룩셈부르크이고 그 다음 많은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과 중국은 안전자산인 재무성증권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5)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달러가치가 상승한다면 미국의 대외자산 가치를 급격히 하락시켜 순 국제투자 잔액은 급격히 그 마이너스 규모가 증대할 것이다. 이는 가까운 장래에 다른 나라들의 달러자산의 급격한 매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년 미국의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의 지속에 비해 순 국제투자 잔액의 마이너스 규모는 별로 증가하고 있지 않은데 이는 2008년 중반까지 지속된 달러가치 하락 때문이다.
한편 현재는 그 방향이 바뀌어 달러가치가 상승하고 있는데 유럽이나 여타 국가의 경제사정이 미국에 비해 썩 낫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금융세계화가 심화된 현재 환율의 상승 혹은 하락과 그 정도는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


6) 이번 미국의 구제금융안에는 금융기관 보유 자산을 시가로 평가하는 것을 유예할 수 있도록 했다. 금융기관의 자본잠식 실상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오히려 혼란을 더 부추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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