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바쁜 일들로 사정상 인터넷을 오래 못했더니
한창 불매운동에 관한 논쟁들이 오간 것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 실제로
빈곤한 주머니 사정 등으로 인해 어차피 알라딘에서 책을 산지도 반 년이 한참 넘긴 했지만;;
기왕에 미리 알았더라면 소극적인 선언일지언정 불매운동에 더 힘을 보탰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나야 뭐 알라딘의 '주요 멤버'도 아니고 해서 이런 군소리가 의미없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논쟁에 관련된 글들을 본 것은 1월 이후이기 때문에, 못 본 글들도 많고
불매운동이 흘러간 전체적인 내용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로쟈님이 평소의 입장에 비추어봤을 때, 불매운동에 대한 로쟈님의
어떤 관망 또는 폄하의 반응은 별로 놀랍지는 않은 것 같다.
소모적인 논쟁에 다시 불을 지필 필요는 못 느끼므로, 로쟈님에 대한 언급을 삼가면서,
로쟈님이 인용한 지젝에 대한 단상을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그러한 레닌주의적 정신에 충실할 때, 이라크 파병(연장)에 반대하는 것은 개량주의적 좌파들, 혹은 얼치기 좌파들의 행태이다(물론 반대하는 척할 수는 있다). 오히려 적극 찬성해야 마땅하다(그래야지 ‘자본주의와의 전쟁’도 빨리 끝장을 볼 게 아닌가?). 즉, 친미 수구주의자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그건 성매매 방지 법안을 놓고서도 마찬가지이다. 포주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비록 전혀 다른 이유/계산에서이긴 하지만.(해방공간에서 제출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도 ‘반탁’에서 돌연 ‘친탁’으로 돌아선 공산주의자들의 행태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적과의 동침’은 레닌주의이건 마오주의이건 간에 A급 좌파의 기본 ‘전술’이다(수단으로서의 모든 ‘전술’을 정당화하는 건 목적으로서의 ‘전략’이다).
반면에, 성매매/성접대에 반대함으로써 ‘접대 없는 자본주의’를 희구하는 태도는 ‘인간적인 자본주의’,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용인하는 태도이다(‘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불가능한 만큼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도 딱 불가능하다). 그것이 소위 개량주의적/타협적 태도이며, ‘카페인 없는 커피’처럼 ‘무해한 자본주의’(적어도 ‘덜 유해한 자본주의’)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량주의적 좌파(가령, 제도권 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와 자유주의자(가령, 고종석) 간의 간격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가령, 고종석은 ‘마약 없는 마약’ 마리화나의 합법화를 지지하며, ‘섹스 없는 섹스’ 사이버-섹스를 지지할 법하다. 민노당도 마리화나와 사이버-섹스를 지지하나?). 적어도, 근본주의적 좌파나 우파(수구반동)와 비교해본다면 말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http://blog.aladin.co.kr/mramor/3306679)
그러니까 이것이 불매운동 반대에 대한 변이 지젝의 이름을 빌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지젝의 저런 이야기를 들을 때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은, 과연 이런 식의 운동 방식이
현실 정치에서 가능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로쟈/지젝의 위 이야기가 갖는 맥락은 아마도, 그의 말을 따르면, 세계를 비난하되 자신은
거기에 빠져있는 좌파적 ‘아름다운 영혼’의 자기기만을 선택하느니,
보수주의자처럼 손에 피를 묻히는 행위(act)가 낫다는 식의 이야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로쟈/지젝 식의 재담은 어떤 '아카데믹' 좌파를 비판하는
주장이 될 수 있을지언정 현실적으로, 실질적인 정치적 대안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여러 사람들이 이미 의문을 제기했지만, 가령 알 카에다, 탈레반의 테러와 자코뱅적 테러는
지젝에서 어떻게 구분되는가? 기존의 상징적 좌표를 다시 짜는 행위와 단순한 테러는?
게다가 이라크 파병에, FTA에 반대하는 것이 얼치기 좌파의 행태라면, 그것에 찬동하고
착취를 심화시켜서 자본주의와의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A급 좌파의 태도인가?
그런데 로쟈/지젝이 이야기하는 것이 단지 그것 뿐이라면,
지젝 식의 이야기가 낡은 파국론의 리바이벌하고 뭐가 다른 것인지, 혁명은 무지몽매한 pt들이
어떠한 개량주의와 인도주의의 환상에 속지 않도록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또 얻어맞아야만
일어나는 것인지?(인간은 엉덩이를 걷어차줘야만 비로소 일어난다!)
성매매에 찬성하고 전쟁을 찬성하며 착취의 수준을 무제한으로 끌어올렸을 때,
어떤 무환상의 '혁명적 주체'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인가? 과연? 난 잘 모르겠다.
물론 김대중/노무현 같은 사람들보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어떤 '전선'이 분명해짐은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어떤 우스갯소리처럼
이명박을 하늘에서 운동권에게 보내준 천사라면서 칭송할 필요도 없다.
근본주의적 좌파와 우파가 위에서 서술된 것처럼 동맹할 수 있다고 할 때,
근본적인 행위가 필요함을 주장하는 위와 같은 말이
운동하지 않음을 위한 알리바이로 기능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더군다나 비판보다는 긍정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라든지,
은행을 터는 것보다 은행을 하나 짓는 것이 낫다는 식의 이야기도,
원론적인 차원에서야 누가 반대할 게 없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태도는, 대안이 없으면 비판하지 말라는 지배층의 논리로 변질되기 쉽고,
결국 비판 자체를 봉쇄시키는 효과를 낳기 십상이다.
알라딘 불매운동을 벌이면서, 알라딘보고 비정규직 문제 전체에 대한 해결이나, 또는 누군가가
비약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자체의 폐기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사안의 강도가 약하다든지, 아니면 비교적 시급한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불매운동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전제도 매우 의심스럽지만.
아마도 운동의 단순한 실효성의 여부를 넘어서,
불매운동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환기 및 호소라는
보다 상징적인 차원으로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