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층 소득보장 정책의 쟁점과 대응과제

김유진 | 조직국장
한국 사회 빈곤 현황

IMF 이후 대량 해고와 비정규직화는 절대적 빈곤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일해도 가난한’ 노동빈곤층의 증가로 이어졌다. 이에 가난의 문제가 특정한 소수의 문제로 머물 수 없게 되면서 빈곤 문제가 전사회적 과제로 떠올랐다. 초유의 경제위기를 맞는 지금, 실업 증가와 임금 하락 추세와 함께 빈곤율도 증가하고 있다. 2007년에 보건사회연구원과 노동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절대빈곤율, 즉 한 달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절대빈곤가구의 비율은 2003년 10.2%에서 2006년 11.36%로 증가했다. (절대빈곤율은 2006년에 발표된 통계가 가장 최근 것이다.) 또한 도시지역 상대빈곤율, 즉 OECD 기준에 따라 중위소득 50%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의 비율은 2000년 13.51%에서 2006년 16.42% 기록했다. 도시 이외의 가구들까지 포함하는 2006년 전국가계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상대빈곤율은 18.45%에 달했다. 2007년 도시가구 기준 상대빈곤율이 17.5%로 또 증가했으니 현재 전국적으로는 5명 중에 1명꼴로 상대적 빈곤상태에 처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최근 상황을 보여주는 몇 가지 통계를 살펴보자면, 올해 5월 소득분배 불균형수치인 지니계수가 0.325로 증가했다. 이는 수치 발표 이래 최고 수준이다. 또 2009년 1분기 소득 5분위 배율(최상위층과 최하위층의 소득 격차)이 8.68배로 2000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 5월 기획재정부는 고용불안과 자산 감소로 인해 앞으로 빈부격차는 더 심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일차적으로는 임시 일용직 등 비정규직의 대량해고, 영세 자영업자의 도산으로 서민층의 근로소득이 급감하는 것이 원인이다. 그런데 격차를 더욱 확대하는 것은 근로소득보다는 금융소득이다. 대출금이 많은 서민층이 작년 말 주식, 부동산 등 자산시장이 급락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자산을 내다 팔아 손실을 확정한 반면 상위층은 연초 저점에서 주식과 부동산을 매입해 자산증식 효과를 보게 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실업, 영세자영업자의 실질소득 감소와 일자리 상실은 갑자기 빈곤의 상태로 내몰리는 인구의 증가로 이어진다. 주로 어린이, 한부모 가정, 노인, 장애인 등 소득수준이 낮거나 노동 능력이 없는 취약 계층은 가장 큰 어려움에 처한다. 민중을 빈곤의 벼랑으로 내모는 해고와 구조조정을 중단하고 긴급한 어려움에 대해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라는 것은 생존권적 요구다. 이명박 정부도 인정한 것처럼 경제위기로 인한 신빈곤층 증가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하지만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일자리가 복지’라는 이명박 정부의 ‘능동적 복지’는 생산 감소와 기업 도산 등 경제위기의 여파로 인해 일자리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긴급 추경예산 편성을 통한 지원 이외의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더구나 기존 소득보장정책의 광범위한 사각지대와 엄격한 심사 기준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긴급 지원책들은 신빈곤층만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빈곤층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이명박 정부의 재정정책 역시 큰 우려를 낳는다. 2008년 복지 지출의 비중이 낮아졌고 집행률도 낮아졌을 뿐만 아니라 향후 예산편성에서도 사회복지 지출 구성비가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회운동은 현행 소득보장 정책의 현황과 문제점을 짚어보고 요구를 마련해야 한다. 이 글은 빈곤층에 대한 소득보장 정책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기초노령연금의 현황과 요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최근 빈곤대책으로 제기되고 있는 복지재정 확대와 기본소득 보장 등 운동진영의 요구들을 검토할 것이다.

소득보장 정책 현황과 쟁점

한국에서 빈곤문제의 부상과 소득보장 정책

한국에서 빈곤층 소득보장 정책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외환위기 이후다. 대량 실업, 노숙 급증, 신용카드 남발로 인한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 500만 명 양산 등 빈곤 문제의 사회적 충격이 정부의 책임 있는 정책을 강제한 것이다. 빈곤문제가 강력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한국의 사회안전망 부실이 심각하다는 OECD의 문제제기가 맞물려 김대중 정권 시절인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되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빈곤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소득을 보장해 주는 제도로 소득보장 정책의 주요 틀이 되었다.


기존의 생활보호법(1961년 12월 제정, 2000년 폐지)이 빈곤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시혜적 태도를 취했던 데 비해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국민이 빈곤에 대한 권리로서 최저 생활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수급자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이자 한국에서 ‘빈곤선’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의의가 있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최저생계비 수준과 엄격한 선정기준, 소득발생유무와 관계없는 추정소득부과 등으로 소득보장효과가 미미하고 광범위한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등 문제가 매우 많다. 특히 조건부 수급 조항을 두어 최소한의 생활도 불가능한 일자리를 조건으로 수급권 여부를 결정한다. 이는 단순히 이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질 낮은 일자리 창출과 각종 노동유인정책을 통해 노동의 질을 저하시키고 사회정책의 위상을 낮추려는 노동연계복지가 신자유주의 사회정책의 핵심방향이기 때문이다. 먼저 빈곤층 소득보장 정책의 가장 기본적 틀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개선 요구와 발전방향을 검토해보자.

빈곤층 소득보장정책으로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연령, 근로능력과 관계없이 가구소득 및 재산 환산액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가구에 대하여 소득을 보전해주는 정책으로 노동시장 정책이 혼합되어 있다. 급여 내용은 생계급여, 주거급여, 의료급여, 교육급여, 해산급여, 장제급여, 자활급여 7종이 있고, 급여액과 수급자의 소득인정액 총합이 최저생계비 이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 급여의 원칙이다. 또 근로능력이 있는 수급자에게는 자활사업 참여를 조건으로 생계급여를 지급하며 부양의무자가 있는 경우에는 부양의무자에 의한 보호가 선행되어야 한다. 다른 법령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는 경우 타 법령에 의한 보호가 선행되어야 한다. 현재 이 제도가 포괄하고 있는 인구 범위는 국민의 2~3%인 153만 명 수준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문제점

① 비현실적인 최저생계비 수준과 폭넓은 사각지대
최저생계비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자 선정과 지원수준이자 의료급여, 모부자가정 선정기준, 노인장기요양보험의 무료대상자 기준 등 여타 사회복지서비스에서도 기준이 되는 ‘한국의 공식적인 빈곤기준선’이다. 현재 최저생계비는 절대빈곤개념의 계측방식인 전물량방식으로 3년 주기로 계측한다. 비계측년에는 기존 최저생계비에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갱신한다. 2009년 최저생계비 수준은 아래와 같다.

1988년부터 계측되고 1999년부터 실제 공적부조에 적용된 최저생계비의 상대적 수준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1999년 근로자가구 소득(4인 가구)의 38.2%였다가 2008년 30.2%로 하락했다. 최저생계비는 대부분의 사회복지서비스 선정기준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최저생계비가 낮은 수준으로 계측되는 것은 사회복지 대상의 축소와 폭넓은 사각지대의 존재를 의미한다. 책정 방식에 있어서도 전물량방식의 문제점, 연구자의 자의적 판단 문제, 계측을 하고 나서도 예산에 맞춰 재조정할 수 있는 문제 등 최저생계비 수준을 하락시키는 요인들이 많다. 최저생계비 수준이 낮아지면서 절대적 빈곤율은 상대적으로 낮게 측정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보장수준은 2000년 시행 이후 2007년까지 2.8~3.2% 수준에 머물러, 절대빈곤층조차 보장하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다. 상대적 빈곤율과 소득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고 경제위기 하에서 늘어날 빈곤층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보장 수준과 대상 확대가 중요한 시점이다.

② 부양의무자 부양능력 판별기준의 문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사각지대를 만드는 주요 문제 중의 하나는 부양의무자 기준과 재산기준이다. 현재 최저생계비 미만의 조건에 있지만 재산기준 및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수급을 받지 못하는 비수급 빈곤층이 3.7%로 수급자 2.8~3.2%보다 많다. 현재 부양의무자 기준은 수급자의 1촌 직계혈족(부모, 자녀)과 직계혈족의 배우자(며느리, 사위)로 규정되어 있다. 수급신청 탈락자 가구 중 25.7%가 부양의무자 기준에 의해 탈락되지만 이들 중 56.2%는 부양의무자로부터 사적이전소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장애인, 노인, 한부모 가정, 소년소녀 가정 등 취약계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③ 재산기준 및 자동차기준의 문제
재산기준 및 자동차기준도 수급권 박탈의 주요 사유다. 현행 제도에서 기본재산액 기준이 2004년 수준대로 동결되어 있기 때문에 생활수준 및 물가상승률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또 수급자의 생활수준 파악을 위해 도입한 소득 인정책제도(소득+재산의 소득환산액)는 전세금, 통장, 자동차 등이 모두 포함되어 수급권이 박탈되는 문제가 있다. 특히 다른 기준에 부합하더라도 자동차가 있으면 수급권을 박탈당하는 상황이 허다하다. 몇 달 전 화제가 되었던 ‘봉고차 모녀’가 바로 그 사례다. 보육료 지원, 장애수당, 의료보장, 사회서비스 지원, 시설지원 서비스 등에도 자동차기준은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한국 전체 가구의 59.4%가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는 점에서 자동차를 일반재산이 아니라 보고 과도한 소득환산율을 적용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다.

④ 추정 소득의 문제
추정소득은 수급자들의 실제소득 발생여부와 상관없이 소득파악이 용이하지 않은 가구원(일용직, 파트타임, 노점 등)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실업상태에 있는 수급자는 물론 근로조건유예자(근로경험 있는 중증장애인, 3세 미만의 유아를 탁아소에 맡긴 경험이 있는 한부모 가정의 부모) 등에게도 자활을 강요하거나 추정소득을 부과하며, 경제 불황으로 인해 실업상태인 수급자들에게 추정소득을 부과해 이를 생계급여에서 제외하고 지급한다. 실제 수급당사자가 임금활동을 하고 있는지, 소득수준이 얼마인지 고려하지 않고 임의로 추정소득을 부과해 수급권을 박탈하거나 생계급여를 낮추는 것이다.

⑤ 노동을 강제하는 조건부과 및 노동자의 노동권 박탈 문제
조건부과 기준은 사회복지사가 연령, 외형상의 건강상태, 전직 및 자격 등을 기준으로 책정하는 것으로, 자의적인 근로능력판단으로 노동할 수 없는 수급자에게 노동을 강제하거나 추정소득을 책정해 생계급여를 낮추는 문제가 심각하다. 만성질환이 있어도 진단서를 제출할 수 없거나, 정신장애와 같이 장애진단을 받을 수 없는 경우, 3세 이상 미취학 아동의 부모 등에게도 노동을 강제하는 것이다. 또 사회적 일자리나 공공서비스 일자리와 같은 수준의 노동을 하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개선을 위한 요구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대상선정과 지급기준이 되는 최저생계비는 그 비현실성으로 인해 ‘국민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운동세력들이 이에 대한 개선을 요구해왔는데, 핵심은 애초 법의 취지대로 보장성 확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상대적 빈곤선을 도입하고 그에 동반하여 최저생계비 인상해야 하며(중위소득 50%, 평균소득 50% 등 여러 기준이 제기되고 있다), 그와 연동해 기초법 대상자를 확대하고 수급액을 인상해 절대 빈곤층조차 포괄하지 못하고 있는 제도의 보장성을 확대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절대 빈곤 상태에 놓여있지만 부양의무자 기준, 재산기준, 추정소득 조항으로 인해 발생한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독소조항을 폐지, 완화해 가야 한다.
‘근로연계복지’라는 방향 하에서 생계급여 수급 조건으로 자활사업 참여가 강제되는 문제, 즉 조건부 수급 조항은 폐지되어야 한다. 자립지원의 원칙에 근거한 조건부 수급 제도는 생계급여를 줄이려는 시도에 그칠 뿐 실제 자활을 통해 적정한 소득을 얻기 어렵고 자활 참여 이후 수급자의 자립을 위한 기반이 전혀 없는 현실에서 그저 강제에 그칠 뿐이다. 나아가 복지와 노동을 연계해 노동시장 신축화에 부응하고 수급 대상을 줄여 재정을 절약하고자 하는 시도에 반대하며 제대로 된 일자리와 사회정책의 확대를 요구해야 한다.
덧붙여 기초법은 수급대상이 되면 7가지 급여를 모두 받을 수 있고, 탈락되면 아무 것도 보장받을 수 없는 구조다. 운동진영은 그간 급여 분리, 선별적 확대를 요구해 왔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정부 차원에서 급여분리를 시도하고, 자활급여는 별도의 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사각지대 해소와 보장성 확대를 위한 운동진영의 취지와는 달리 정부의 급여분리는 생계급여를 긴축적으로 운영하려는 의도가 다분하기에 그간의 요구를 재정비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노후소득보장으로서 국민연금과 기초노령연금

한국의 노인 빈곤현황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 노인 가구의 상대적 빈곤율은 2006년 기준 45%로, OECD 국가 평균인 13%에 비해 3.5배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2009년 한국의 노인자살률이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65~74세의 자살률은 64.9명으로 가장 낮은 그리스의 4.9명에 비해 13배나 많은 수치이며 나이가 들수록 자살률은 더욱 상승하는 양상을 보였다. 한국의 정년퇴직 연령이 선진국보다 낮고 연금과 같은 복지 혜택도 상대적으로 미흡한 것이 그 주요 원인이다. 또 노동을 통한 소득 이외에 생존을 위한 사회보장이 취약한 현실에서 노인 부양의 책임을 전담해왔던 가족(여성의 이중부담)이 위기에 처하자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 것이다. 경제위기가 노인 인구에게 더욱 가혹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노후 소득보장정책으로서 국민연금과 기초노령연금의 현황과 발전방향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현재 노후 생활의 보장과 소득재분배의 역할을 하는 공적연금으로서 국민연금의 발전방향 논의는 ①사각지대에 대한 대안 ②기초노령연금과 국민연금을 통합적인 노후소득보장체계로 발전시켜나가기 위한 논의로 정리해볼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연금과 기초노령연금의 통합 및 재구조화 논의를 위한 소위원회’를 꾸리고 기초노령연금의 발전방향과 국민연금 관계설정에 관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주된 내용은 ①기초노령연금을 기초연금화하면서 국민연금을 소득비례로 전환하는 방안 ②기초연금 급여율을 높이고 대신 국민연금 급여율을 낮추는 방안 ③기초노령연금의 보험료를 동결시키는 방안 등이라 한다. 이는 지금까지의 연금개혁 흐름을 이어가는 논의라 볼 수 있다.

공적연금으로서 국민연금의 문제점

국민연금은 전 국민의 가입을 원칙으로 하지만 실제 사각지대는 광범위하다. 전체 노동자 중 50% 가량이 고용형태(불안정노동층, 자영업자, 전업주부, 비공식부분 노동자 등) 상 제한으로 가입하지 못하거나, 보험료 부담으로 가입을 꺼리고 있다. 또 가입이 가능해도 소득이 낮아 납부하지 못하는 실질적 사각지대는 전체 가입자의 42%(2007년)에 달하며, 특히 지역가입자의 절반이 이에 해당한다. 국민연금의 50% 급여율은 모두 40년 가입을 조건으로 하는데, 불안정한 고용기간으로 실제 보장수준은 20%에 그치며 제한된 수의 노인만이 수급자가 되면서 보편적 사회보장정책으로서의 의미가 무색하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연금개혁 방향에 따라 소득에 따른 비례적 보장 형태로 연금 체계가 변화되면 국민연금이 가졌던 소득재분배 기능이 소멸하고 나아가 연금 민영화의 길이 넓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는 공적인 노후소득보장정책으로서 국민연금의 기능을 없애는 것이다. 또 현재 쌓여있는 기금의 크기가 거대해 기금 운용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기초노령연금의 현황과 문제점

기초노령연금은 2003년 연금개혁 국면에서 한나라당의 당론으로 제시되면서 등장했다. 이는 공적연금의 위상을 낮추고 노인인구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사회운동은 기초노령연금의 기초연금으로의 발전이라는 입장을 제시했다. 2007년 연금개혁 국면에서 정부는 고령화, 재정안정화 등을 근거로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하면서, 국민연금의 보험료는 높이고 보장성을 낮추는 방향의 연금개혁을 단행했다. 기초노령연금의 도입에 따라 현재 65세 이상 노인의 70%를 대상으로 월 8만 4천 원 가량의 급여를 지급하고 있으며 기금의 규모는 3천억 가량이다.
기초노령연금 도입이 노인인구라는 사각지대를 해결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고 공적연금의 효과가 조기에 발휘되어 국민연금의 안정적 지지기반 마련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하지만 2007년 당시 국민연금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와 운동의 열세로 기초노령연금 도입은 국민연금의 후퇴를 동반했다. 앞으로 진행될 연금개혁 방향도 기초연금 확대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약화시키는 맞바꾸기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한 사회운동의 대응에는 다층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현행 기초노령연금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광범위한 사각지대와 낮은 보장성 문제다. 국민연금급여가 노후의 소득에 반영되었을 경우 노인 빈곤율은 41.1%, 기초노령연금까지 반영되었을 경우 36.2% 수준에 머물러 현재 급여수준은 노인 빈곤을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하기 어렵다. 기초노령연금이 국민연금 A값의 10%로 상향된다고 하더라도 노인 빈곤율은 크게 줄지 않는다. 노인의 상당수가 매우 빈곤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급여수준을 상향해도 노인의 생활상태를 일부 개선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연금 퇴직연금 등 사적연금의 성숙에 따라 기초노령연금은 장기적으로 수급비율을 축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노인인구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기초노령연금의 수급비율은 오히려 축소될 전망이다.
기초노령연금 수급자격 선정에 있어서도 개선이 요구된다. 기초노령연금의 수급자격 선별요건은 소득 및 자산에 근거하는데 실제 소득을 가지고 있는 노인의 비율은 매우 낮기 때문에 수급자격 결정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산이 될 것이다. 여타 사회보장제도와 마찬가지로 생활에 직접적 도움이 될 수 없는 자산 때문에 수급 받을 수 없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소득조사가 주요 선별요건이 되어야 한다.

기초노령연금의 쟁점과 발전 방안

현재 기초노령연금 발전전망에서 주된 쟁점은 급여수준보다는 급여 대상이다. 기초노령연금을 향후 노인 100%에 제공하는 ‘보편적인’ 공적연금-기초연금으로 발전시키자는 요구가 진보신당, 여성운동계 등에서 제기되고 있다. 기초연금으로의 발전 문제에 있어서 한정적 재원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는 중요한 쟁점이다. 노인 인구 100% 대상 기초연금으로 발전시키자는 주장의 근거는 장기적으로 공적연금의 혜택과 정당성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각종 감세정책 철회, 재정기조 변경을 통한 재원마련으로 현재 ‘용돈’ 수준으로 지급되고 있는 기초노령연금 보장수준도 높이자는 안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취약한 노후소득보장제도의 상황, 경제위기 하 정부 재정적자 위험 가능성, 또 부자감세나 4대강 정비사업 등 정부의 재정정책 방향을 철회하기 위한 투쟁의 형성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한정된 재원을 모든 노인인구에게 나누어 주기는 어렵다. 용돈 수준의 급여를 모든 노인에게 제공할 것이 아니라 현재 기초노령연금의 문제점 개선을 통해 더 빈곤하고 필요한 이들에게 집중하는 전략이 고려될 수 있다.
또한 기초연금으로의 발전 요구가 지금까지의 연금개혁 과정과 현재 이명박 정부의 개혁 방향에 대한 정세적 대응인지 검토해야 한다. 연금개혁 과정에서 기초노령연금 대상범위 확대, 기초연금으로의 전환이 국민연금의 소득재분배 기능 삭제, 소득비례연금으로의 전환 등 국민연금의 위상을 사적 보험으로 전락시키는 방안과의 맞바꾸기가 현실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소득재분배 기능을 소멸하는 국민연금 제도의 근본적 전환이기 때문에 단순한 제도적 변화를 넘어서는 문제다. 지금처럼 진행된다면 빈곤층 노인의 급여수준 하락, 고소득층의 급여 수준 상승, 제도 간 중복수급을 금지한다는 단서로 인해 빈곤할수록 각 제도들을 통해 받게 되는 급여의 총합이 감소하는 등 전반적인 빈곤층의 소득보장 정책이 후퇴되는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국민연금과 기초노령연금의 통합적 운영(이를 통한 공적연금의 후퇴)에 문제를 제기하고 현재 국민연금과 기초노령연금이 실질적인 노후 소득보장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요구를 마련해 가야 한다. 현재적으로는 2028년까지 합의된 급여수준(A값의 10%) 상향을 앞당기자는 요구를 통해 위기에 처한 노인 인구에 대한 보장성을 확대해가며, 이미 지적된 문제들의 개선 요구를 통해 공적 연금의 소득재분배 기능의 강화하자는 요구가 그 출발점이다. 공적연금으로서 국민연금의 정당성(소득재분배 기능) 강화라는 방향성 하에 제도적 보완 또는 이행도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의회전술’이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연금관련 대응에서 공적연금 강화를 위한 사회운동의 실천방안들(논의주체 형성을 위한 의제설정, 일상적 소재와 매개의 계발)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국민연금 기금 운용에 있어 위험성을 높이는 금융투자원리의 연기금 활용방안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공공부문, 사회복지부문에 대한 투자 확대, 부과방식으로의 장기적 전환 등 제출된 방안을 검토하고 공동의 투쟁을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 공적연금의 전망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조직해야 한다.


현 시기 소득보장정책(기본생활보장)에 관한 운동세력의 요구와 쟁점

경제위기로 인한 빈곤문제의 확산에 대해 많은 요구가 제출되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운동세력의 요구 중 해고금지 및 고용보장, 사회서비스 등 공공분야 일자리 창출, 실업급여 확대 등은 경제위기 하 노동자의 생존 보장을 위한 공통적 요구다. 또 최저생계비 인상과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개선, 연금개악 저지를 통해 기존 소득보장 제도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보장성을 확대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공감대가 있다.
소득보장 관련 운동세력의 요구안 중 쟁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과감한 재정 방안을 제출한 진보신당의 요구, 일하지 않아도 생존할 권리로서 기본소득 보장을 제시하는 사회당의 요구다.
진보신당은 2008년 12월 <1,008만 명 기본생활 보장을 위한 3대 개선안>을 발표하여 기초연금 도입(모든 노인에게 월 30만 원 지급), 장애연금 도입(중증장애인 월 25만 원, 경증장애인 월 12.5만 원 보장),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개선(재산기준 완화와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로 372만 명 추가해 509만 명 보장, 중앙정부 부담률을 77.38%에서 100%로 확대) 세 가지를 주요하게 요구했다. 여기에 필요한 재원은 총 38조 6,110억 원이다.
사회당은 모든 국민에게 일정한 기본소득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제출했다. 연령별로 차등을 두어 계산했을 때(1인당 연 400만 원~1,000만 원) 2009년 필요한 기본소득 합계는 284조 원인데 재원은 각종 부가세, 이자소득세, 배당소득세, 지대소득세 등을 인상하고 국방비 절감으로 마련하자는 제안이다.
경제위기 하에서 빈곤의 심화가 사회복지 확대를 공격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계기이므로 과감한 재정 확충과 제도 신설을 요구하자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운동 주체의 형성이 부족하고 조직된 노동자운동의 투쟁이 부재한 상황에서 원칙적인 확대 요구는 자칫 선명성 경쟁에 그칠 수 있다. 요구는 있으되 운동은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또한 ‘기초노령연금 도입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후퇴’와 같이 지배세력에 활용된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실제로 경제위기 하에서 재정 확충은 제약이 큰 문제인데다 정부 재정기조를 바꾸는 것 또한 운동이 부재한 상황에서 요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는 점에서 한계가 존재한다.



 
  기본소득 어떻게 볼 것인가  
 
대량실업이 자본주의의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문제이자 결과라는 분석에서부터
‘일하지 않는 자의 먹을 권리’‘,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이 1980년대 이후 유럽
좌파의 중요한 화두로 부각되었다. 기본소득 전략은 완전고용의 불가능성, 수준 낮은 공공부조와 실업급여의 한계, 강제노동 등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며 노동연계복지의 강화 속에서 노동과 소득을 분리시키는 전략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실제 기본소득 정책은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시행되었다. 기존의 복지제도 대부분을 철폐하고 대신 일정한 소득한계를 정해 그 이하의 소득자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 복지국가의 비효율, 재정적자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관철된 것이다. 독일이 관련해 가장 많은 논의와 활동이 벌어졌고, 또 신자유주의자에 의해 유사한 제도가 도입된 사례다.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분석마르크스주의의 대표자인 반 파레이스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주장은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자본주의적 길’로서 생산력 발전을 통해서 기본소득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그리의 경우는 현재의 생산력수준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이미 가능하다고 보아 사회임금론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노동거부의 인식을 전제한다.
 
 


특히 기본소득의 경우 ‘노동하지 않아도 생존할 권리’를 요구한다. 한국에서는 사회당과 연기금 사회주의 연구자 등이 구체적인 재정 계획을 세우고 선전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주체형성과 실행방안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는 ‘대안사회에 대한 논의 촉발’, ‘사회주의를 거치지 않고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경로’ 등의 ‘이념형’ 제시에 그칠 수밖에 없다. 현행 소득보장 정책에서도 복지의존에 대한 비난과 증세에 대한 대중적 반발을 극복하는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고 사회보장 확대를 위한 운동이 미미한 조건에서 사회정책의 근간을 전환하자는 주장은 그 실행방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대중 이데올로기의 전환을 위한 주체형성과 이행의 구체적 경로에 대한 논의 없이 재정계산으로 실현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빈곤층 소득보장을 위한 사회운동의 요구

신자유주의와 함께 전 세계의 복지기조로 자리 잡은 노동연계복지는 복지의존성 공격을 통한 재정지출 축소, 광범위한 산업예비군 형성을 통한 노동신축화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하 복지 확대 요구는 단순한 재정확충과 적절한 분배 문제에 그칠 수 없다. 사회보장정책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사회 유지를 위한 노동 통제전략이자 피지배계급의 저항으로 달성된 기본적 생활 보장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따라서 경제위기 하 급증하는 빈곤층의 생존권적 요구도 단순히 재정측면에서의 가능성을 넘어서 사회복지의 방향성을 바꿔내기 위한 장기적 전망, 현실의 심각한 빈곤문제의 해결을 위한 구체적 요구와 공동의 투쟁 형성, 노동자운동의 인식 확장과 주체 형성 문제가 핵심이다.
이명박 정부의 사회정책 기조가 더욱 공세적이고 적극적인 시장화라는 점에서 우리의 요구는 사회보장의 확대에 그치지 않고 시장화 정책에 대한 비판, 제대로 된 일자리 창출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또한 현존하는 빈곤층 소득보장정책이 실제로 민중의 생존권 방어를 위한 매개가 될 수 있도록 구체적 요구를 정돈하고 운동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경제위기에 직면한 이명박 정부의 빈곤과 실업 대책은 기존 제도의 소폭 확장과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지원방안에 그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진전된 대책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에 빈곤층 소득보장제도로서 기초생활보장제도, 노후소득보장제도이자 공적연금으로서 국민연금, 기초노령연금에 관해 사각지대 해소와 보장성 확대의 요구 등 지금까지 제기된 요구들을 제기하면서 긴급한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정책 시장화에 반하는 장기적 발전방안을 그려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경제위기 책임전가에 맞선 노동자운동의 투쟁과 맞물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소득보장과 제대로 된 일자리 요구로 나아가는 운동의 주체형성을 동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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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9-07-1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처 :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2033 월간 사회운동
 

김석수, <칸트와 아렌트> 요약과 재구성, 추기. 


 


 


아렌트에게 철학은 기본적으로 정치철학이며, 우리는 사적 영역인 가계oikos로부터 벗어나 공적 영역인 폴리스에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정치적 동물이다(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번역된 바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그녀는 이데아를 향한 관조적 삶을 추구한 플라톤을 비판하며, 정치 속의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사유하고 판단하는 철학으로부터 등을 돌린 마르크스도 비판한다. 아렌트는 또한 정치가 예술과 관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의 지상에서의 삶의 조건이 복수성과 현상성을 기반으로 한다면, 각자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출연할 공연의 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연의 장은 진리episteme를 강요하는 곳이 아니라, 의견doxa를 통해 다수의 인간들이 함께하는 장이어야 한다. 인간은 행위와 발언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정체를 현시함으로써 자신의 세계에 출현한다. 그녀는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지phronesis와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을 종합하는 한편, 공동체감에 입각한 보편성을 추구한다. 전통 철학에서 철학과 죽음은 연계되지만, 아렌트는 탄생성natality를 강조한다. 아렌트의 박사 논문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개념Der Liebebegriff bei Augustin 역시 현상의 세계를 고통과 눈물의 골짜기로 규정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비판한다. 현상의 부정은 세계소외를 창출하고, 이는 무세계를 초래한다. 이 세상에서 탄생하여 행위하고 사유하는 인간, 아렌트는 현상성appearing과 복수성plurality를 인간의 삶의 조건으로 자리매김한다. 모든 존재는 드러냄, 현상에 의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이데거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던 아렌트는 불멸의 피안, 목적의 나라, 예지계, 영원한 존재 같은 개념을 기각한다. 사람은 오직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근대 이후 생명의 유지 활동에 참여하는 노동의 압도적인 우위와 마르크스에게서도 여전했던 생산 중심의 패러다임은 세계소외를 야기해왔다. 활동적 삶이라는 용어는 근대 초기까지 불안정이라는 부정적 함의를 늘 지녀왔지만, 아렌트는 독자성을 가진 다양한 인간들men을 획일적인 인간이나 인류로 귀속시키려는 제작poiesis의 정치를 거부하고, 복수성과 현상성에 기반하여 상호주관성을 인정하는 실천praxis의 정치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활동적 삶vita activa은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되며,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은 사유, 의지, 판단으로 구분된다. 아렌트는 노동과 작업은 행위(act는 어원적으로 archein, prattein, agere, agerere에서 유래하며, 이들은 모두 함께함이라는 뜻을 지닌다)로 수렴되어야 하며, 사유와 의지는 판단으로 수렴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행위와 판단의 조화를 주장한다. 연대기적으로 볼 때, 1950년대에 아렌트는 전자의 삶을 강조했다면, 1970년대에는 후자의 삶을 강조했다.

아렌트의 독특함은 하버마스와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이에 위치하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렌트가 차지하는 이러한 이론적 지형은 곧 니체와 칸트 사이에 위치한 독특한 이론적 입지점으로 소급한다. 가령 인간은 공간적으로는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며,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미래의 틈새에 존재한다. 이 이야기로서의 판단이 전개되는 틈새는 진리가 강제되는 장이 아니라 서로 자기를 드러내는 의견의 장이다. 또한 현상, 특수성, 복수성을 중시하고, 진리를 비판하고 가상과 외관, 경연agon을 중시한다는 점은 분명히 아렌트가 니체와 접근하는 부분이다. 니체가 생성의 무죄Unschuld des Werdens를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공적 영역인 현상 세계에서 자신을 드러냄은 긍정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렌트는 니체가 행위를 힘에의 의지의 표현으로 환원함으로써 칸트의 공통감을 약화시키고 니체적인 미학은 심의적deliberative인 관점을 배제시킬 수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칸트의 경우는 어떠한가?

칸트의 판단력은 한 주체의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을 매개하기위해, 법칙이 자연에 적용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칸트는 이미 특수적인 것을 보편적인 법칙 아래 포섭하는 규정적 판단력과, 특수적인 것들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는 능력으로서 반성적 판단력을 구분한 바 있다. 반성적 판단력은 자연의 합목적성에 관계하며, 특히 대상의 형식과 인식 능력의 일치로 느껴지는 주관적 합목적성에 관계한다. 이는 이론적, 실천적 관심을 벗어나 느낌의 보편타당성을 추구하는 미감적 판단력, 확장된 사유방식, 공통감에 근거하는 것이다. 칸트에게 합목적성은 이미 목적 없는 합목적성인데, 칸트에게 판단력은 또한 사회적 차원의 도덕적 관심으로 향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홀로 있을 때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이성과 상상력 간의 부조화가 중시되는 숭고미에서 이러한 도덕적 차원은 더욱 잘 드러난다. 숭고는 감성적 형식을 넘어서 이성의 이념들에 관계하고, 예지적 존재들, 영혼, 신 등으로 향하게 되기 때문에 숭고 감정은 이미 도덕으로 향한다. 칸트의 미적 판단력은 목적 판단력을 거쳐 예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칸트의 판단력은 사유와 존재를 등치시켜온 형이상학의 역사를 해체하고 근대적 합리성을 비판하는 철학적 사유들에 많은 자양분을 제공해왔다. 미감적 판단력, 숭고 등을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한 리오타르, 데리다, 들뢰즈가 바로 그들이며, 아렌트 역시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특히 아렌트는 기존의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 사이의 부조리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판단 개념에 집중한다. 칸트의 취미 판단은 인간의 현상성과 복수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판단의 형태로 분석되는데, 이 판단력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매개하며, 아렌트는 이러한 판단력을 통해 서로 의견을 말하면서(아렌트는 사유가 동반되는 말하기인 speaking과 그냥 내뱉는 말하기 talking을 구분한다) 행위하는 인간들 사이의 공동체감을 마련하고자 한다. 행위act가 판단을 동반하지 않은 채로 성급하게 이루어지면 독단적인 behavior로 바뀔 수 있다. 이러한 독선을 막기 위해 아렌트는 칸트의 무관심성, 목적 없는 합목적성 등의 개념을 적극 수용하며, 아집을 벗어난 심성의 확장, ‘넓혀가는 마음’을 수용한다. 판단이 없는 사회를 바보스러운 사회라고 보는 아렌트는 타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가까이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중시한다. 판단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해지는 것으로, 칸트가 규정한 바, 인간이라는 호칭을 요구하는 자에게 언제나 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으로서의 공통감과 관계한다. 판단을 통해 인간은 타인들과 소통하고, 호소하고 간청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의견 나눔을 거쳐 동료의 입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넓혀감으로써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공통감,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모두에게 대표성을 지닌 범례적 타당성은 아렌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물론 칸트의 경우 미적 판단력은 목적 판단력을 향해 있고, 취미는 숭고를 거쳐 도덕으로 향한다는 점, 미감적 보편성이 선험적인 공통 감각에 기반을 둔다는 점, 원초적 계약이라는 이념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아렌트에 의해 비판된다. 그녀는 칸트의 선험성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천지를 통해 실제적인 대화 속에 터전잡아야 한다고 보며, 칸트의 선험적 공통 감각을 공동체적 공통 감각community sense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이는 선험성과 후험성을 동시에 지니며, 이러한 판단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의견 교류를 통해 교정된다는 점에서 칸트적 판단과 구별된다.

앞서 니체와 아렌트의 차이, 칸트와 아렌트의 차이만큼이나, 하버마스와 아렌트의 차이도 특기할 만하다. 공론장에서의 자유로운 토론과 의사 형성, 상호주관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와 아렌트는 가까워지지만, 아렌트의 경우 이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아닌 공통 감각에 근거를 두면서, 반드시 합의나 동의를 목표로 하지 않고 특수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와 갈라진다. 또한 아렌트의 의견은, 인지적 명제나 과학적 타당성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동의와 간청, 호소를 통한 공감과 정서적 동의를 구하기 때문에, 그 현실적 실효에는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가령 하버마스는 아렌트가 현실 공동체 안의 욕망 투쟁의 현장, 경제의 영역을 합리성 담론을 통해 탐구하지 못하고 순수하게 미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문제라고 비판한다. 권력에는 아렌트와 하버마스가 공히 강조하는의사소통적인 영역 외에도 수단적 권력, 행정권력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에 대한 지나친 부정의식은 자칫 비인지주의, 주관주의나 미학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아렌트의 공론장은 콘서트 방식으로 진행되며, 그녀는 철학자가 아니라 역사가, 시인의 입장에서 이야기들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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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omopop.org/log/index.php?page=3 

신자유주의 분석가로서의 푸코:
미셀 푸코의 통치성과 반정치적 정치의 회로 - 서동진


 


권력의 시인이라는 푸코의 초상

최근 우리 눈에 부쩍 자주 띄는 푸코의 초상이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 나아가 신자유주의 분석가로서의 미셀 푸코이다. 그런데 어딘지 낯설게 들리고 또 얼마간 느닷없기까지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푸코는 실존의 미학자로서의 서정적인 어느 철학자의 모습에 가깝다. 혹은 훈육사회와 미시권력의 세계를 고발한 그 어느 자유주의자보다 더 극한적인 자유주의자의 모습을 한 푸코야 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푸코의 형상에 훨씬 근접해 보인다. 그런 우리에게 자유주의 분석가로서의 푸코, 나아가 그것의 현재 형태인 신자유주의를 면밀하게 탐색하고 그것을 우회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곤구하는 푸코는, 낯설고 또 어쩐지 어색하여 보이기까지 할 수 있다.


more..
less.. 그렇지만 푸코가 1970년대 후반에 진행했던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세미나들이 거의 공개되고 또 출판이 이뤄지면서 우리는 그 누구보다 섬세하고 또 집요하게 자유주의를 분석했던 이론가로서의 푸코와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때마침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상대하고 비판할 것인가가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화급한 주제로 부상한 때이기도 하다. 푸코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내가 푸코의 자유주의 세미나 3부작이라고 부를 세미나를 연속적으로 진행하였고, 이 세미나에서 이뤄진 강의와 대화가 묶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영토, 안전, 인구󰡕, 그리고 󰡔생정치의 탄생󰡕이란 제목으로 공간되었다. 이는 󰡔감시와 처벌󰡕(1975), 󰡔성의 역사1󰡕(1976)을 출판하고 난 이후 오랜 침묵 끝에 그의 때 이른 죽음을 전후하여 나온 󰡔성의 역사󰡕 2, 3권(1984) 사이에, 과연 푸코의 관심과 작업은 무엇이었는지 헤아리는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지배(domination)의 분석’으로부터 갑자기 윤리의 문제, 그 스스로 즐겨 사용한 표현을 빌자면 “자기의 돌봄”이란 “주체성의 계보학”에 대한 분석으로 이론적 관심을 전환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푸코를 둘러싸고 흔히 퍼져있는 미신적인 혐의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혐의란 푸코가 모든 곳에 권력이 있다는 현혹적인 자신의 주장으로부터 반드시 따라 나올 수밖에 없는 수행적인(performative) 효과라고 할 그 것, 즉 ‘권력의 바깥’은 없다, 누구도 그 곳에 있을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인 결론으로 인해 그 스스로 궁지에 다다르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극히 퇴행적이고 심지어 유치해보이기까지 하는 ‘실존의 미학’이란 주장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소개된 세미나 일부 자료와 인터뷰, 강의를 제외하면 오디오 테이프 형태로만 존재하던 푸코의 세미나가 마침내 출판되면서 이런 혐의는 거의 푸코와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 푸코가 진행했던 세미나의 내용 가운데 일부와 그의 강연, 인터뷰 등과 그의 세미나에 참여했던 제자들의 연구 프로젝트가 영어권 독자들에 소개되기도 하고 또 책으로 묶이기도 하였다. 특히 푸코의 강의 요약 가운데 일부인 “통치성”을 비롯한 몇 편의 논문과 제자들의 글 가운데 일부가 영국의 포스트 알튀세르주의자들의 저널이었던 <이데올로기와 의식 Ideology and Consciousness> 그리고 <경제와 사회 Economy and Society>를 통해 영어권에 잇달아 소개되고 그것이 다시 묶여 책으로 출간되었다. 또 이를 주도했던 영국의 몇몇 이론가들은 “통치성 governmentality”이란 개념에서 비롯된 새로운 분석적 접근을 하나의 이론적 학파로까지 조직하게 되면서, 훗날 다수 경멸적인 이름이라 할 수 있을, ‘통치성 학파’로 불리게 된다.


통치, 통치성 그리고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이성

통치성이란 개념이 푸코가 진행했던 자유주의의 형성과 변모를 이해할 수 있는 주요한 개념적 탐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완결적이고 정합적인 ‘이론’으로 규정하기엔 억지스러운 점이 있다 할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통치성은 외려 푸코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근대 국가의 계보학”적 분석을 위해 도입한 잠정적인 방법 혹은 그의 접근 방식을 요약하는 이론적인 도구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물론 푸코 스스로 언급하듯이 그가 착수했던 이론적인 기획은 통치, 통치성이란 개념을 중심으로 현저한 변화를 겪는다. 그것은 󰡔감시와 처벌󰡕을 출간하고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란 이름으로 묶인 세미나가 진행될 때까지 푸코가 지속했던 권력 분석에 일종의 전환이 이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즈음까지 푸코의 권력에 대한 접근은 권력에 관한 사법-정치적 담론 혹은 권력에 관한 주권적 모델로부터 벗어나려는 끈질긴 노력이라 볼 수 있다. 󰡔감시와 처벌󰡕을 전후하여 푸코가 전개한 권력에 대한 ‘바깥으로부터의 사고’라는 접근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세미나를 전후하여 이른바 “니체의 가설(Nietzsche's hypothesis)” 혹은 정복과 전쟁의 모델이란 관점으로 모아진다. 푸코가 “역사-정치적 담론”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런 관점은, 주권(혹은 권리)과 법이란 관점에서 권력을 인식하는 자유주의적 정치철학(“리바이어던의 모델”)과도 거리를 두는 한편 권력의 기원적인 중심으로서 경제를 가정하고 계급지배란 관점에서 사고하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를 푸코는 “왕의 목을 자르기”라는 유명한 경구로 푸코가 표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의 왕이란 봉건적 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군주이든 아니면 사법적으로 권리의 평등을 보장받은 근대적 시민이든 법률을 통해 코드화되고 또한 그를 통해 보장되거나 제재받는 권리의 주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왕이란 사법-정치적 담론을 압축하는, 다시 말해 권력을 사고하기 위해 언제나 선험적으로 가정되는 권력의 모델이자 정치적 주체의 이상(理想)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푸코는 기울 권력(disciplinary power)과 “정상화(규격화) 사회(society of normalization)”란 모델에 따라 사법-정치적 담론이 가정하는 주권적인 권력/주체의 모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하였다. 그는 18세기를 전후하여 서유럽사회는 시민의 권리를 성문화, 조직화하는 법률적인 코드와 사회적 신체를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훈육 메커니즘을 결합사킨, “주권적 권력”과 “훈육적 권력의 복합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즈음 푸코의 입장은 렘케같은 이가 지적하듯이 사법-정치적 담론 혹은 그에 바탕한 권력 모델을 단순히 뒤집은 것, 혹은 그것의 반사적인 역상 속에서 권력을 사고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통치(성)이란 관점에 서면서 푸코는 이런 모델과도 결별할 수 있는 이론적 전환을 이룰 수 있게 된다.
통치(government)란 개념은 자유주의의 등장을 이해하는 데 관건적일 뿐 아니라 푸코의 권력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통치는 앞서 간단히 말하였듯이 사법-정치적 담론에 속박된 권력론으로부터 거리를 둘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였던 훈육 권력이란 담론으로부터도 역시 벗어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통치란 개념은 자유주의의 역사적 변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 통치란 권력의 전략적 게임과 지배(domincation)이란 권력의 작용을 둘러싼 성층적인 형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아울러 사법적-주권적 권력과 훈육 권력과 경합하거나 혹은 그것을 흡수하고 변형시키면서 18세기를 전후하여 서유럽 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자유주의적 지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의의를 차지한다. 푸코는 근대 사회에서 권력이 작용하는 방식을 세 가지의 성층적인 형태의 도식을 통해 설명하는데, 이 때 기존에 미시권력이라고 불렸던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권력의 작용을 전략적 게임이라고 풀이한다. 개인이 관계 맺는 자기 자신이든 타인(들)이든, 아니면 기관, 제도, 기업같은 것이든 그 무엇이든 인간관계 안에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 힘의 관계를 푸코는 전략적 게임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것이 상대적으로 경직되고 또 고정되면서 관계를 맺고 있는 항들 사이에 비가역적인 관계가 수립될 때 푸코는 이를 ‘지배’라고 부르고 이것이 우리가 흔히 권력이라 일컫는 그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푸코는 ‘통치’(혹은 통치 테크놀로지)를 이 사이에 놓는다.
그렇다면 통치란 무엇일까. 여기에서 통치성이란 개념은 통치가 차지하는 푸코의 권력 분석 안에서의 위치를 가늠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의 역사적 특성을 분별하는 데 결적인 역할을 한다. 통치성(governmentality)이란 개념은 푸코 스스로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그것은 그 용어 자체가 보여주듯이 통치(govern/gourvener)와 사고양식(mentality/mentalite)란 두 가지 낱말을 결합한 것이다. 굳이 요약하자면 특정한 사고양식을 통한 통치를 가리킬 것이고 푸코 자신의 간결한 정의를 쫓자면 행동방식 혹은 행실에 대한 통솔(conduct of conduct)을 통한 권력의 작용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이 용어는 정치 이성(political reason), 정치적 합리성(political rationality) 혹은 통치 합리성(governmental rationality)같은 개념들과 맞바꿔 쓸 수 있고 푸코는 자신의 강의와 글에서 이러한 개념들을 혼용하여 쓰고 있기도 하다.
통치성이란 개념을 통해 푸코는 크게 두 가지의 차원을 겹쳐놓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화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지식과 권력은 권력이 행사되고 작용하는 표면, 즉 그 대상을 구성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장치, 절차, 계산의 형식 등을 두루 망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매우 특정하면서도 복합적인 형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 과정, 분석과 반성, 계산과 전술들로 구성되는 전체(ensemble). 이러한 권력의 표적은 인구이며, 그 중요한 지식의 형태는 정치경제학이고 또한 그 본질적인 기술적인 수단은 안전기구들이다.”라고 푸코가 말할 때 가리키는 것이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푸코는 근대 사회의 통치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테크놀로지로서 안전기구(apparus of security), 그것이 작용하는 대상으로서 생물학적인 종으로서 다시 말해 생명을 가지고 자신의 욕망(desire)을 실현하고 보장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human species) 즉 인구, 그리고 이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인 지식의 형태로서 정치경제학을 꼽는다.
다음으로 우리는 통치성을 주체화의 원리, 혹은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윤리, 개인이 자신을 권력에 예속된 주체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변형하는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주체로서 살아가도록 이끄는 힘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을 푸코는 통치하다는 것(governing)이 엄밀하게 가리키는 바로 정의하면서 상당히 꼼꼼하게 분석을 시도한다. 이것은 바로 히브리적인 전통에서 비롯되어 중세의 기독교적 서구를 경유하고 다시 근대 국가에서 통치란 형태로 변용된, 사목권력(pastoral power)이다. 이는 군주와 신민이란 관계를 목자-양떼란 관계와 결합시키면서 개인, 가족, 공동체를 비롯한 다양한 삶의 현실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갈 것인지를 배려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특히 푸코는 사목권력이 훗날 국가에 의한 통치, 그가 경제적 통치, 정치적 통치, 혹은 줄여 그냥 통치라고 부를, 국가를 통한 권력의 작용을 설명하는데 결정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도시, 영토, 주권’같은 지고한 대상이 아니라 다수적 삶, 그가 ‘전부이면서 각자(all and each/omnes et singulatim)’라고 부르는 대상을 상정하고 또 그에 적합한 지식과 기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점에서 푸코가 통치성을 통치 합리성 혹은 정치 이성으로서 분절할 수 있도록 하는 이론적 계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이 거칠게 말해 근대 국가의 맹아라고 할 수 있는 16세기를 전후하여 서유럽에서 형성된 절대주의 국가에서의 “국가이성(raison d'Etat/ratio status/the reason of state)”과 그것을 실현하는 장치로서 “행정관리(police)”에 대한 분석이다. 국가이성이란 기존에 국가가 권력을 행사할 때 의존하던 추상적이고 선험적인 원리나 이상(이를테면 천국의 지복, 내세에서의 구원 등)과 단절하여 국가가 자기의식적으로 자신의 힘이 작용하는 대상을 분별, 조사, 관찰, 반성하면서 어떻게 작동할지를 정의하고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권력 행사 방식 혹은 그것을 구체화하는 과학, 지식을 말한다. 다시 말해 마침내 국가는 엄밀한 의미에서 추론(reasoning)을 통해 혹은 합리성(rationality)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이는 중세의 봉건적 군주나 초기 절대주의 국가가 상정했던 목표와 그것을 실현하려는 기술, 이를테면 영토와 부(wealth)의 관리를 위해 행사하던 테크놀로지와는 전연 다른 새로운 것을 고안한다. 이것이 행정, 관리, 국책(國策) 등으로 부를 수 있을 폴리스(police)라고 할 수 있다. 시민이면서 동시에 인구인 대상을 지배하기 위해 발달한 폴리스에 관한 과학(Polizeiwissenshaft)은 푸코가 꾸준히 강조하듯이 전체화하면서(totalizing)하면서 동시에 개인화하는(individualizing) 권력으로서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한다. 건강, 장수, 안전, 행복 등을 비롯한 다양한 목표를 위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즉 인구를 돌보는 국가는 바로 행정관리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푸코는 국가이성이 한계에 부딪치며 18세기를 전후하여 새로운 통치성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훗날 자유주의라고 부르게 될 정치적 합리성으로의 전환이 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국가이성이 가진 목표, 즉 국가와 그것의 부의 증대를 “사회”와 그것의 경제적 진보라는 목표로 대체하는 새로운 통치성이라 할 수 있다. 푸코는 이런 통치성의 등장을 선도하고 조직한 것이 중농주의자로 대표되는 정치경제학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푸코는 “국가이성은 새롭게 부상하던 영역인 경제에 의해 개조되었으며, 경제 이성(economic reason)은 국가이성을 대체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합리성에 새로운 내용과 새로운 형태를 제공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정치경제학을 통해 마련된 통치성의 핵심적인 특성을 푸코는 크게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자연스러움(naturalness)”의 대상으로서 “사회”가 고안되고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가정인 사회, 시민사회 대 국가란 이분법이 형성된 것이다. 이제 국가는 시민사회를 책임지고 관리해야 하며 국가는 또한 그 시민사회가 만들어내는 움직임, 중상주의가 상정하는 교환(exchange)이란 관점에서 파악된 부가 아니라 생산하고 소비하며 그를 통해 구체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이루는 인구들의 삶, 즉 사회를 상대하게 된다. 두 번째로 이러한 자연스러움으로서의 사회라는 가정으로부터 통치성의 핵심적 구성요소인 지식과 권력의 관계 역시 변용되지 않을 수 없음을 푸코는 지적한다. 이제 좋은 통치를 위해 국가는 국가이성에서와 같이 외교적인 계산이나 역학관계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자연적 대상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으로부터 과학적 지식을 뽑아내게 된다. 그리하여 통치 기예와 지식은 세부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세 번째의 것, 인구란 관점에서의 혁신적인 변화가 이뤄지게 된다. 국가이성이 인구란 관념을 끌어들이고 이를 통치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순전히 양적 다수, 머리 숫자로만 고려된 것이었다. 국가이성에 이끌렸던 중상주의적 국가에서 관심은 군주의 부를 좌우하는 것이 인구의 숫자, 그리고 그것의 일과 순종성(docility)이었기 때문에 절대적 가치를 지닌 상품과 수량화할 수 있는 부였다면 새로운 통치성 즉 자유주의는 최대의 가치가 아니라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은 최적의 가치, 균형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네 번째는 국가가 개입하는 방식이 변화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새로운 통치성이 가진 전제는 국가이성에서처럼 군주 혹은 국가의 의지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대상으로서의 사회의 운동을 보장하고 촉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 단순히 규칙이나 규제를 통해 사람들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국가의 개입 방식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리하여 푸코는 다섯 번째로 자유주의가 문자 그대로 자유(liberty)에 기반을 둔 통치라고 할 수 있게 하는 그것, 즉 좋은 통치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란 점을 꼽는다. 이는 중농주의자들이 인구란 서로 다른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전체처럼 다룰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모두가 하나의 행위의 동인(mainspring), 즉 “욕망(desire)”을 통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구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규제나 명령이 아닌 바로 이런 욕망의 법칙, 즉 정치경제학이 상대하는 경제적 인간 혹은 욕망을 쫓으며 살아가는 개별적이면서도 또한 전체인 인구=시민이 가진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인가 사회주의적 통치성인가 혹은 그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자유주의적 통치성이 등장한 이후 그것은 어떤 변천을 겪어왔을까. 푸코가 󰡔영토, 안전, 인구󰡕 이후에 진행한 󰡔생정치의 탄생󰡕이 직접적으로 관심을 둔 것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상세하게 분석한다. 특히 푸코는 제3공화국, 나치즘의 등장을 전후하여 독일에서 등장한 프라이부르크 학파, 혹은 그들이 발간했던 저널의 이름을 따서 질서자유주의자(the Ordo-liberals)라고 불리는 초기의 신자유주의와 우리가 흔히 시카고 학파라고 부르는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소개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분절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이를 상세하게 소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는 푸코의 분석을 참조하면서 극히 간략하게 신자유주의가 기존의 자유주의의 ‘실패’를 어떻게 표상하였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통치성을 고안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이에 놓인 거리를 설명하기 위한 손쉬운 방편 가운데 하나는 자유주의적 통치성을 사회적 신체의 지형학(topography of social body)을 생각해 보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앞에서 간단히 지적했듯이 자유주의의 정치적 합리성의 핵심적인 특징은 경제적 삶의 세계와 거의 동일한 것이라고 할 ‘사회(the social)’를 고안하고 이를 국가가 상대해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와 국가의 관계, 나아가 경제 혹은 시장과 사회, 국가의 관계는 근대적 통치성, 자유주의가 변용되는 방식을 이해하는데 있어 관건적인 역할을 한다. 이는 푸코가 신자유주의로 꼽는 질서자유주의와 시카고 학파의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고 변형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결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장(경제)과 국가, 나아가 경제, 사회, 국가라는 항들을 어떻게 설정하고 또 각각을 어떻게 분절하고 연관시키는가를 보면서 푸코가 시도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분석을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질서자유주의는 독일적 문제인 나치즘이라는 국가사회주의에서 출발하여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정초한다. 푸코가 흥미롭게 설명하듯이 “자본주의의 비합리적 합리성”이란 베버주의적 질문에서 출발한 두 가지의 베버주의적 경향 혹은 학파가 있다. 그것은 먼저 질서자유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양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비합리성을 폐절할 수 있는(nullifying) ‘사회적 합리성’을 모색하려 했던 반면,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비합리성을 폐절할 수 있는 경제적 합리성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동일한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였지만 정반대의 해결책을 찾아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전개하면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국가를 조망하고 분석하는 매우 독특한 관점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질서자유주의가 제시했던 자유주의를 재구성하는 틀 혹은 정식은 지금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들이 정식화한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질문, 즉 국가의 지나친 성장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제 거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치즘 그리고 그것에 조응하는 현상이라고 할 케인즈주의, 소비에트사회주의, 심지어 자유주의의 원산지인 영국에서의 베버리지 계획(Beveridge plan)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자본주의적 체제의 시도를 대조하고 이를 독일적 문제인 나치즘에 대응시키면서 질서자유주의는 기왕의 자유주의가 지닌 “소박한 자연주의(naive naturalism)”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들의 주장을 내놓았다. 푸코는 이를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자유질서주의자들의 비판을 통해 압축적으로 설명하는데 자유방임주의의 핵심적인 주장은 시장 경제에 내재한 자연적 법칙이 있고 국가는 그것에 가능한 간섭하지 않아야 하며 그것이 실패하거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을 때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질서자유주의자는 그런 자연적 대상으로서의 시장 혹은 경제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정치적 조절을 통해 창출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대상이라고 역설한다. 그것이 바로 질서자유주의자들이 “사회적 시장경제”의 요체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와 사회 혹은 국가가 대립적인 항으로서 상정하고 전자를 자연화시키면서 어떤 내재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하길 거부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적 선택과 행위, 특히 제도나 정책과 같은 것을 통해 다양한 자본주의적 ‘질서’가 역사적, 우연적으로 존재할 따름이라고 강변한다. 그들을 질서자유주의자로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자본주의 법칙 혹은 논리란 인식을 대신하여 정치적 선택의 소산으로서의 질서란 관점을 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발 신자유주의는 질서자유주의와 무엇이 다를까. 이는 역시 사회와 국가 혹은 (시장)경제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표상하고 둘 사이를 관계지우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질서자유주의자들 가운데 대표적 이론가 가운데 한 명인 뤼스토우(Alexander Rüstow)가 제안한 “생명정책(정치)(Vitalpolitik)”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사회의 모든 단위, 그것이 개인, 가족이든 아니면 이웃공동체같은 지역사회이든 모두를 기업체(enterprise)로 가정하고 사회가 경제의 이름 안에서 통치될 수 있도록 하는 기획을 일컫는다. 여기에서 상기되듯이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사회적 영역과 경제를 구분하고 전자를 후자의 원리(경쟁)에 관점에 따라 구성하고 관리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한다. 이를 질서자유주의들은 사회정책(social policy)라고 부른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듣는 경구, 이를테면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짜는 법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접근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쟁’이란 경제적 원리에 따라 ‘사회’를 관리하고 그를 위해 사회적 삶의 세계를 모두 기업체적인 정체성을 가진 대상처럼 다루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모두에게 평등한 불평등(inequality equal for all)이란 질서자유주의자의 핵심적인 명제가 압축적으로 반향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질서자유주의자들의 문하생이었던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질서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흡족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무엇보다 방금 말했던 사회와 경제 사이의 구분을 거부한다. 그들은 사회적 삶의 세계가 곧 경제적인 삶의 세계이며 사회 안에서 펼쳐지는 모든 활동을 경제적 행위로서 받아들여야 함을 역설한다. 푸코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게리 백커의 인적 자본(human capital)과 범죄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접근을 다룬다. 그러나 푸코의 미국 신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을 굳이 상세하게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펼쳐지는 거의 모든 것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경제개발계획이라는 개발독재 기간 동안 한국 경제를 주도했던 국가의 경제적 개입 방식이 종결되고 국가인적자원개발계획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경제기획원같은 부처를 대신하여 지식경제부같은 부처가 그 자리를 메우게 되었을 때, 학교사회에 속박된 획일적인 학생이 아니라 자기 학습권을 행사하며 자기주도적인 학습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육정책이 들어설 때, 실업(자) 대신에 고용가능성(employability)란 담론이 대신할 때, 근로자나 종업원이란 말 대신에 역량을 갖춘 인재란 용어가 그 자리를 메울 때, 소득의 분배를 통해 자기의 경제적 생존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재태크’를 통해 자신의 경제적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관리할 때, 이력서가 아니라 스펙을 완비한 포트폴리오를 준비할 때, 이 모두는 미국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어떻게 구체적인 지식, 제도, 정책, 법률, 행위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직접적인 경제적 삶의 세계는 물론 교육, 보건, 복지와 같은 종래 사회적 삶의 세계로 생각되었던 영역을 모두 기업화(enterprising)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활동하고 살아가는 주체를 기업가적 주체(entrepreneur) 혹은 기업가적 정신(entrepreneurial spirit)에 따라 살아가는 개인, 집단, 조직, 사회체로 주체화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경제와 사회 사이에 놓인 거리는 사라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푸코가 자신의 오랜 권력 분석의 기획을 통치성에 관한 분석, 그 가운데서도 자유주의에 관한 분석으로 전환하며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주체화의 윤리, 그리고 이를 구성하고 중재하는 지식의 관계를 탐색한 푸코의 이론적 궤적을 극히 간략하게 짚어보았다. 이러한 푸코의 자유주의 분석으로부터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난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데 얻을 수 있는 이론적 정치적 교훈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신자유주의를 특정한 이념이나 좁은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로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고전파경제학이나 합리적 선택론이나 게임이론, 위험관리론 같은 다양한 ‘학술적’ 담론을 망라하고 심지어는 일상생활에서의 자기계발 담론과 그에 연관된 구체적인 언어적 생태계를 포괄한다. 그러나 이렇게 신자유주의를 단정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신자유주의가 제출하는 편향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염된 현실에 대한 표상을 넘어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제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한편 두 번째의 함정 역시 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를 언제부턴가의 역사적 시점부터 조성된 객관적이고 불가역적인 현실로서 사고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계화이든 아니면 자본의 고삐풀린 움직임이든 혹은 20 대 80의 세계이든, 신자유주의를 이러한 맹목적인 자본주의의 현실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으로 간주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이런 잘못을 바로잡는 즉 더 많은 사회적 연대의 가치, 더 많은 공공성, 더 많은 국가의 개입 같은 것에 머물고 말 것이다. 물론 이는 희극적인 결과를 낳기 일쑤이다. 이를테면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악몽을 물리칠 수 있는 유력한 진보적 대안으로 널리 선전되었고 급기야 그를 주도했던 인물을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까지 만들었던 ‘4조2교대 일자리 나누기’라는 캠페인을 생각해보자. 이는 마치 신자유주의적 폐단을 극복할 대안처럼 여겨졌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자기책임부여와 권한강화를 통해 생산적 주체를 형성하려는 지극히 신자유주의적인 실천의 한 갈래 일 뿐이다. 이는 이른바 사회운동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90년대 이후 활약했던 한국의 소문난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이 공공성의 기치 아래 벌여온 일들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인 ‘협치(governance)’, 국가가 시민사회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고 이를 자율화시킴으로써 시민사회가 자기 스스로 책임을 부여받고 자신의 문제를 관리하게 하는 새로운 통치 전략과 기술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아름다운재단’같은 시민사회운동단체야말로 가장 탁월한 형태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구성하는 직물의 한 씨줄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자유주의 분석, 정치적 합리성의 계보적 분석은 신자유주의의 정치학을 비판적으로 분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던져준다. 그것은 관념이나 지식으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경험적이고 실정적인 현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라 통치가능한(governable) 혹은 지배할 있는 현실을 구성하고 그와 관계 맺는 주체의 행위의 조건 혹은 행위 방식을 유도하고 평가하며 보상하는 지식과 테크놀로지, 윤리의 복합적인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를 가리키는 이름은 통치성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란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혹은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통치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미테랑 정권의 등장을 전후하여 푸코가 개탄했던 것처럼 우리는 사회주의적 통치성이라 할 만한 것을 고안하고 구상하는 데 착수해야 할까. 그러나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지난 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그러나 거의 믿기 어려우리만치 실종하여 버린 희귀한 정치적 사태를 생각해 보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산 수입쇠고기를 둘러싼 검역 문제에서 출발한 이른바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는 어쩌면 푸코의 통치성의 정치를 둘러싼 의구를 풀어볼 수 있는 제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법-정치적 문제설정 혹은 주권 담론의 주술적 유혹으로부터 벗어난 생정치적 주체를 통한 변혁의 전망을 내세우는 푸코의 끈질긴 주장을 되짚어 보는 데 아주 의미심장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우리는 촛불 시위에서 두 개의 대립적인 혹은 그것이 지나친 것이라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하나의 정치적 주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며 “헌법1조가”를 부른 사법적-주권적 주체이자 동시에 시민의 생명과 안녕을 보호하고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인구-주민으로서의 주체이다. 물론 이 두 주체는 동일한 공간에서 출현하였고 어쩌면 둘은 다르지 않은 인격체 속에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전연 다른 주체의 모습이다. 이는 사회적 삶의 운명 속에 살아가는 계급 혹은 주민과 어떤 사회적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 문자 그대로의 엄밀한 의미에서 무조건적으로 평등을 주장하는 인민 혹은 민중이라는 두 가지의 이질적인 정치적 주체이다. 그렇기에 푸코보다 더 푸코적인 자크 동즐로로의 표현, “주권을 가지고서 혁명을 할 수 있지만 하나의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는 유려하고 충격적인 단언에 대하여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회를 끝낼 수 있는 혁명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실은 사회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끈 그 결렬의 순간, 그 심연을 알 수 없는 공백이 더 결정적인 것 아닐까. 이를테면 동즐로 스스로 서술하듯이 프랑스 민주주의 혁명이 만들어낸 견딜 수 없는 민주주의적 평등을 자본주의 ‘사회’의 체계 속으로 길들이기 위하여 사회의 형성과 관리로 정치를 환원하는 것, 정의와 행복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정치를 안녕과 진보란 목표 속에 유폐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일 아닐까.
그렇다면 푸코가 말한 사회주의적 통치성이란 것도 혹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이후의 통치성이란 것도 결국은 푸코의 통치성이란 기획 속에서는 결국 발원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가 근대 국가의 계보학이란 이름으로 진행한 장기적인 이론적인 기획은 놀랍게도 권력의 분석이란 이름 아래에서 권력의 영도(零度)를 끊임없이 회피하려는 몸짓으로 둔갑하게 된다. 그 권력의 영도는 인민과 인구 사이에 구분이 사라지는, 푸코의 표현을 다시 빌자면 생정치적 주체와 주권적 주체가 결합하면서 만들어내는 희귀한 정치적 계기를 가리킨다. 물론 이를 우리는 투박하게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혹은 바디우같은 철학자의 시정적인 표현을 빌어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빵과 토지를 달라는 사회적 요구는 평등한 세계를 달라는 정치적 주장과 떼어놓을 수 없다. 둘 가운데 어느 하나 없이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러나 푸코는 이 둘 사이의 거리를 가능한 멀리 벌여 놓는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광란적 사태, 민주주의라는 미증유의 계기가 삭제된 즉 ‘본연의 정치’가 없는 정치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푸코를 기꺼이 반정치적 정치의 이론가로 규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푸코의 이론적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푸코로 인하여 우리는 거꾸로 다시금 민주주의적 정치의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에 관한 급진적 사유를 이끄는 주요한 사상가들이 드러나게 혹은 드러나지 않게 푸코와의 거리 속에서 사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랑시에르의 불화의 정치학은 푸코의 ‘행정관리(police)’란 개념을 정치의 존재론으로 사고함으로써 출발하지 않던가. 발리바르의 자유-평등의 정치학은 정치의 타율성을 사고한 마르크스-푸코의 짝으로부터 정치의 자율성과 정치의 타율성의 타율성을 준별하는 작업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하물며 바디우는 어떠한가. ■

- 문화과학 2009년 봄 호에 기고한 글의 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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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철학 수고>> 中 <헤겔의 변증법과 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 요약 (pp. 182~217)


마르크스는 헤겔 변증법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당시 독일의 슈트라우스나 브루노 바우어 등은 헤겔의 논리학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포이어바흐는 헤겔 변증법에 대해 최초로 “진지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지닌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업적은 1. 철학을 인간 본질 소외의 또 다른 형식이자 현존 방식으로 파악했다는 점 2.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이론의 근본 원리로 삼음으로써 진정한 유물론과 실재적 학문을 정초했다는 점 3. 부정의 부정에 대해 자기 자신에 근거하는 긍정적인 것을 대치시켰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포이어바흐의 설명에 따르면, 헤겔 변증법은 실체의 소외, 즉 절대적이고 고정된 추상, 통속적으로 표현하자면 종교와 신학에서 출발한다. 둘째로, 헤겔은 “무한자를 지양하고 현실적인 것, 감각적인 것, 실재적인 것, 유한한 것, 특수한 것을 정립”한다. 즉 철학은 종교와 신학의 지양이다. 셋째로, 헤겔은 긍정적인 것을 다시 지양해서 추상, 무한자를 회복하며, 이로써 종교와 신학을 회복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부정의 부정을 파악함으로써, “역사의 운동에서 추상적이고 논리적이며 사변적인 표현을 찾아냈을 뿐이며, 따라서 이러한 역사는 아직, 하나의 전제된 주체로서 인간의 현실적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산출 행위, 인간의 발생사일 뿐”이라고 적는다.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헤겔 철학의 진정한 탄생지요 비밀”인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엔치클로페디> 전체 역시 철학적 정신의 확대된 본질, 자기 대상화에 불과하다. 논리학은 정신의 화폐이며, 헤겔의 사유는 외화된, 자연과 현실적 인간을 도외시한 추상적 사유이다.

헤겔의 이중의 오류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헤겔이 부, 국가권력 등을 인간적 본질에서 소외된 존재로 파악했을 때, 그것은 사상의 존재이다. 외화의 역사, 외화의 폐기 전체는 단지 추상적 사유, 논리적, 사변적 사유의 생산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낯선 대상들이 된 인간의 본질적 힘들을 획득하는 것은 의식 속에서, 순수 사유 속에서, 추상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화일 따름이다. 헤겔에서 감각, 종교, 국가 권력 등은 정신적 존재로 나타나며, 정신만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고 정신의 진정한 형식은 논리적 사변적 정신이 된다. 따라서 “존재, 대상이 사상적 존재로서 대상이듯이, 주체는 항상 의식 또는 자기의식이며, 또는 오히려 대상은 추상적 의식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인간은 자기의식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등장하는 소외의 다양한 형태들은 의식과 자기의식의 다양한 형태들일 뿐이다.”

물론 헤겔의 성취 역시 존재한다. 그의 <정신현상학>의 위대함은 인간의 자기산출을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노동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헤겔은 근대 국민경제학자들의 입장에 서 있는데, 그는 노동을 인간의 본질, 자기를 확증하는 인간의 본질로 파악한다. 하지만 단지 노동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볼 뿐, 소외 등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노동은 인간의 외화 속에서 대자적으로 되는 것이지만, 헤겔이 인정하는 유일한 노동은 정신적, 추상적 노동이다.

하여튼 <정신현상학>의 마지막 장인 ‘절대지’의 핵심은 의식의 대상이 자기의식에 불과하다는 것, 또는 대상은 단지 대상화된 자기의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저 비대상적인 유심론적 존재로 간주된다. 자기의식은 인간적 자연, 인간의 눈 등의 하나의 질이지 인간적 자연이 자기의식의 하나의 질은 아니다. 헤겔에서 인간 본질이나 인간은 자기의식으로 가눚되는 까닭에, 인간적 본질의 모든 소외는 그저 자기의식의 소외일 뿐이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본질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인간은 대상적 본질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자기의식일 뿐이다. 의식이 대상을 극복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의식에 대해 대상 자체는 소멸되어 가는 것으로 드러나며(대상이 자기에게 귀환), 자기의식의 외화가 物性을 정립하며(물성은 외화된 자기의식과 같다. 자기의식은 오로지 추상적인 물만을 정립할 뿐 결코 현실적인 물을 정립할 수 없다), 이러한 외화는 부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도 가지고, 즉자적으로뿐만 아니라 의식자체에 대해서도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결국 의식은 외화와 대상성을 지양하고 자기에게 복귀한다는, 따라서 자신의 타자 존재 자체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 있다는 계기도 있다.

그런데 의식이 존재하는 방식이 바로 知로서, 지는 의식의 유일한 대상적 행태이다. 헤겔은 의식이 대상을 의식 자체의 자기 외화라고 앎에 의해 정립한다고 본다. 의식은 외화와 대상성을 지양해서 자신에게 복귀하며, 그에 따라 자신의 타자 존재 자체 안에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 있다는 계기가 들어있다. 이 같은 설명에 사변의 모든 환상이 집약되어 있다. 이것이 헤겔의 거짓 실증주의이며, 여기에 겉보기만의 비판주의의 뿌리가 있다. 사실 헤겔에서 부정과 보존, 긍정이 결합된 지양이 독특한 구실을 한다. 예컨대, 헤겔 법철학에서 지양된 사법은 도덕이고, 지양된 도덕은 가족이고, 지양된 가족은 시민사회이고, 지양된 시민사회는 국가이고, 지양된 국가는 세계사이다. 헤겔 논리학에서는 이것이 질, 양, 척도, 본질, 현상, 현실성, 개념, 객관성, 절대적 이념, 자연, 주관적 정신, 인륜적 객관정신, 예술, 종교, 절대지 등으로 전개된다. 결국 헤겔이 철학으로 지양시킨 것은 현실적 종교, 국가, 자연이 아니고 교의학, 법률학, 국가학, 자연과학에 불과하다.

헤겔의 변증법은 하나의 담당자, 하나의 주체를 가져야 하는데, 이 주체는 성과로서 비로소 생성된다. 자신을 절대적 자기의식으로 아는 주체는 신, 절대적 정신이다. 이런 까닭에 주어와 술어는 절대적으로 전도된 관계, 신비적인 주체-객체, 객체를 포괄하는 주체성, 하나의 과정으로서 절대적 주체가 된다. 변증법은 인간의 자기 산출 또는 자기 대상화 행위를 형식적이고 추상적으로 파악한다. 헤겔에서 소외된 대상, 인간의 소외된 본질적 현실은 의식일 뿐이고 소외의 사상일 뿐이며, 외화의 지양도 마찬가지로 내용없는 추상에 대한 추상적이고 내용 없는 지양, 부정의 부정일 뿐이다. 이때 내용으로 충만하고 살아있고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자기 대상화 활동은 단순한 추상, 절대적 부정성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논리학 전체는 추상적 자유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절대적 이념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자연이야말로 어떤 것이라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추상적으로 파악되고 인간에게 분리되어 자체로 고정된 자연은 인간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헤겔에서 자연은 이념의 타자 존재의 형식일 따름인데, 이는 추상적 사유가 본질이므로 이 사유에 외적인 것은 본질 상 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이러한 외면성은 사유에 대한 자연의 대립, 자연의 결함으로 파악되며, 추상과 구별되는 자연은 결함있는 존재이다. 자연은 추상적 사유자를 위해 자신을 지양해야만 한다. 절대자는 정신이다.

그러나 물질론적 역사관을 가진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은 “견고하게 잘 다져진 대지에 서서 모든 자연적 힘들을 호흡하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이다. 자연주의만이 세계사의 행위를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은 직접적으로 자연 존재이고, 자연적 힘, 생명력을 갖춘 활동적 자연 존재이다. 인간은 자연적, 육체적, 감각적, 대상적 존재로서 시달리고 제약되고 한계지어진 존재로서, 그의 충동의 대상들이 그의 밖에 독립된 대상으로 존재한다. 즉 “대상적, 자연적, 감각적이라는 것, 그리고 대상과 자연과 감각을 자기 바깥에 가진다는 것, 또한 자신이 제3자에 대해 대상과 자연과 감각이라는 것은 다 같은 것이다.” 자기 바깥에 자신의 자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는 결코 자연적 존재가 아니며, 가령 비대상적 존재는 비존재이다. 그런 존재는 유일한 존재, 그 바깥에 어떤 존재도 없는 고독한 존재이다. 내가 어떤 대상을 갖자마자 이 대상은 나를 대상으로 삼지만, 비대상적 존재는 비현실적, 비감각적, 추상의 존재이다. 이에 반해 대상적, 감각적 존재로서 인간은 시달리는 존재이며, 열정적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한갓 자연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자연 존재이다. 즉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존재, 유적 존재이다. 모든 자연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신의 생성 행위, 역사를 갖지만, 인간에게 역사란 의식된 역사이며, 생서 행위로서 역사는 의식적으로 자신을 지양하는 생성 행위로서, 역사는 인간의 진정한 자연사이다. 신의 지양으로서 무신론은 이론적 인간주의의 생성이고, 사유재산의 지양으로서 공산주의는 실천적 인간주의이며, 양자 모두 종교와 사유재산의 지양을 통해 자기 자신과 매개된 인간주의가 된다. 무신론, 공산주의는 결코 도피나 추상이 아니며 현실적인 것으로서 인간 본질의 현실적 생성이자 현실적으로 인간에 대해서 생성된 실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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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pe126 2011-10-23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 갑니다~!!

담탱 2017-10-15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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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6-2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기네 ㅋㅋ

바라 2009-06-24 02:09   좋아요 0 | URL
저도 보고 싶은게 몇몇 있는데 시간이 될지 잘 모르겠네요. 일단 시립대가 넘 멀기도 하고요;

2009-07-05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