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 교수의 글 일부를 가져옴. <<철학>> 102집(2010년 2월)에 실렸던 글로  

전반부는 2008년 세계철학대회에서 열렸던 한국철학 세션에 대한 보고로 이루어져있고 

후반부는 함석헌과 유영모 철학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다 

(...)

그런데 20세기 한국의 강단철학이 끊어버리고 이어가지 못했던 한국의 철학적 역사를 보이지 않게 이어간 사람들이 바로 유영모와 함석헌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한국의 철학사를 실학과 최한기 그리고 동학을 거쳐 유영모와 함석헌 그리고 우리 세대로 이어지는 연속성 속에서 서술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김흥호가 지적했듯이 유영모에게 자기인식의 실마리가 되어 준 것이 한국의 말글이었다면, 함석헌에게 그것은 한국의 역사였다. 그들은 이처럼 서로 다른 길을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현대 한국인의 철학적 자기인식의 기초를 놓았다. 철학이 방법론적으로 다른 무엇보다 자기 언어로 자기의 현실을 반성하는 데 존립하는 것이라면 스승이 한국어 속에서, 제자가 한국사 속에서 참된 자기를 찾으려 한 것은 너무도 고전적인 철학적 자기인식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의 철학적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통시적으로 보자면 동양의 철학적 전통과 서양의 철학적 전통을 서로 매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대현교수가 정확하게 인식했듯이, 유영모와 함석헌은 전통적인 동양학문의 방법론을 계승한 철학자들이었다. 오늘날 우리 세대와 달리 그들은 서양학문의 세례를 받기 전에 조선의 전통적 학문의 기초를 먼저 닦았던 사람들이다. 다석은 노자의 도덕경을 처음으로 우리말로 번역했으며, 함석헌 역시 󰡔노자󰡕와 󰡔장자󰡕 그리고 󰡔맹자󰡕 등, 동양고전에 대한 강의를 늙도록 꾸준히 계속했다. 그들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세대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동아시아적 교양에 바탕하여 서양학문과 종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서양 철학 및 종교와 동양의 철학 및 종교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열과 대립을 자기 속에서 치열하게 따라체험한 뒤에, 끝내 양자의 대립을 넘어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개방했다. 그 지평은 이전의 범주로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어서, 철학인 동시에 종교이며, 종교인 동시에 정치적 실천이다. 그들의 사유 속에서 동양과 서양의 대립이 지양될 뿐만 아니라 이성과 믿음 그리고 이론과 실천의 대립이 지양된다. 그들의 정신이 한국의 제도권 철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통 신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외면 받았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계에서 보기에 너무도 종교적인 그들의 사상은 신학자들이 보기엔 너무도 철학적이었기 때문에 어느 쪽에서도 진지하게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다른 것이 만나 부딪히는 장소가 바로 오늘날 한국의 정신적 삶의 현장이니, 그들의 철학은 바로 그 타자적 만남에서 비롯된 “정신의 임신”을 통해 태어난 새로운 세계관인 것이다.

씨철학이 만남의 철학이라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지니고 있는 첫째가는 세계철학적 의미이다. 오늘날 세계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서양철학의 전일적 지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 곧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일이다. 현실의 파탄의 근원에는 철학과 종교의 파탄이 뿌리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 시대에 이르러 서양적 세계관에 기초한 세계가 더 이상 이대로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현실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20세기에 이르러 서양정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타자적 정신은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런 타자가 있기는 있는가, 오기는 올 것인가? 마치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Godot)처럼 타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오지 않고 인류는 반신반의하며 새로운 정신을 고대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20세기에 들어 가장 먼저 철학적 서양중심주의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의 목소리는 다양한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 담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비록 그것이 언제나 학문으로서 철학의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서양과 구별되는 타자적 자기인식으로서 제출된 것인 한에서 우리는 탈식민주의 담론에 대해 철학적 의미를 인정하는데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철학이란 다른 무엇보다 자기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식민주의가 서양의 자기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제3세계 인민의 의식을 성찰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문제를 제기한 것은 커다란 공적이었으나 그것이 서양철학의 자기중심주의를 허무는 데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서구권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서양철학적 방법론을 통해 서양사람들을 주된 독자로 삼아 제시된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탈식민주의 이론은 뒤로 오면 올수록 현대 유럽철학의 다양한 변주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서양철학에 포섭되어 버려 더 이상 타자의 목소리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오늘날 새로이 등장한 상호문화철학(Interkulturelle Philosophie) 운동은 탈식민주의의 이런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여기서도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지만, 포르네-베탕쿠르(R. Fornet-Betancourt)가 대표하는 진보적 상호문화철학운동은 탈식민주의처럼 서양철학에 속절없이 포섭되어버리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한편으로는 유럽과 북미지역의 철학을 특수한 맥락(Kontext) 속에서 생성된 철학으로 상대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저 지역 이외의 철학적 전통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동등한 가치(Gleichgewicht)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쉼 없이 해 왔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얼마나 철학에서의 서양중심주의를 실질적으로 불식시킬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남는 의문이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 상호문화철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서구의 학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서양 철학이 처음부터 상호문화적이었다고 주장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상호문화철학운동 역시 서양철학의 한 흐름으로 포섭되어버릴 위험은 언제나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씨철학의 세계철학적 의의는 그것이 탈식민주의담론이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며, 상호문화철학이 애써 찾고 있는 바로 그 타자적 목소리를 들려주고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개방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씨철학은 서양철학과는 다른 또 하나의 자기동일적 사유체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타자성의 지평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기서 타자성이란 서로 무관심한 타자성이 아니라 만남 속에 있는 타자성이다. 씨철학이 개방한 이 사유의 지평 속에서 지금까지 인류가 개방해온 모든 세계들이 서로 만난다. 거기에선 노자와 간디가, 예수와 부처가,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맹자와 마르크스가 이웃이다. 이 지평에 들어서기 위해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편협한 당파성을 버리지 않고서는 누구도 이 정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아집을 버리고 타자와 만나는 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존재방식인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은 그 철저한 일관성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정신의 만남을 방해해왔다. 대개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나 비슷하게 볼 수 있는 정신의 아집은 언제나 체계적인 세계관에 뿌리박고 있었던 것이다. 씨철학의 비길 데 없는 공헌은 바로 그런 이론의 아집을 해체한 데 있다. 이것이 세계철학사적 의미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구구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절박하게 요청되는 태도변경이다. 하지만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라 해서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서양철학자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전통 내에서 자기를 극복하려 할 뿐, 타자적 정신과 만나려 하지 않는다. 물론 가끔 가상한 시도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지젝(S. Žižek)이 그다지 전문적이라 할 수 없는 지식에 기대어 “불교와 폭력 사이의 보다 깊은 유사성”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가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상이 얼마나 일면적이며 또 초보적인지를 금세 알아차리게 된다. 한국의 강단 철학자들이 독일과 프랑스와 영미 철학의 섬세한 차이를 구별하듯이 서양의 철학자들이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와 중국불교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겠는가? 그런 것을 생각하면 유영모와 함석헌의 정신세계에서 동서양의 정신들이 깊은 상호 이해 속에서 서로 만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독보적인 일인지 알 수 있다.

동서양의 정신이 만나는 것은 20세기 한국 정신사의 고유한 성격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는 온갖 철학과 이념 그리고 세계종교가 공존하면서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그것은 씨철학에 의해 반성되고 발효되기 전에는 한갓 무관심한 공존이거나, 정신의 분열상일 뿐이다. 이 분열상이 가장 참혹한 방식으로 현실화된 결과가 바로 6·25였다. 그리고 여전히 이 나라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의 적대적 분열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일상이기도 하다. 씨철학은 그 적대적 분열과 투쟁을 만남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는 자기를 내적 분열에서 구해내어 온전한 주체로서 정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며, 세계인류를 위해서는 만남 속에서 열리는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 지평은 자기동일적 사유의 지평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의 지평이라는 점에서 다른 지평이다. 그런데 씨철학이 이처럼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20세기 한국의 지성사가 그 자체로서 만남 속에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즉자적 만남이라면 중국이나 일본이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중국에는 마오쩌뚱(毛澤東)이 있고 일본에는 니시다(西田)가 있지만 유영모와 함석헌은 한국에만 있다. 마오와 니시다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서양을 추종한 결과를 보여주며 동시에 서양을 나름대로 극복하려 한 결과를 보여준다. 니시다의 철학은 일본적 사유에서만 가능할 것이며 마오의 혁명론 역시 중국의 전통으로부터 생성된 철학일 것이다. 하지만 니시다도 마오도 세계철학사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 새로운 보편의 지평을 개방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까닭은 니시다도 마오도 자기를 포기한 철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쩔 수도 없는 역사의 반향으로서, 현대 일본은 물론 중국 역시 현대사 속에서 전면적인 자기상실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모두 지켜야할 자기가 늘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든 중국혁명을 통해서든 다만 그 자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근대적으로 쇄신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중국과 일본은 역사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를 지킨 결과 하나의 자기로 남았을 뿐,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열리는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정립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마오나 니시다가 열지 못했던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유영모나 함석헌은 어떻게 열 수 있었는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사상의 새로움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주장의 새로움인가 아니면 새로운 사고방식인가? 우리가 이런 물음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씨철학의 새로움에 대한 주장은 한갓 허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씨철학의 새로움이 단순히 주의주장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새로움이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지평을 연 것이라 주장하려면, 우리는 과연 현재 보편적인 사유의 지평으로서 군림하는 서양적 철학 및 학문의 지평에 대해 씨철학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서양적 사유의 보편성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 요소로 특징지어진다. 한편에서 그것은 대상세계 전체를 동일한 지평으로 불러들인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존재라는 이름으로 개방되는 대상의 지평이다. 원칙적으로 보자면 존재의 지평에 단절이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즉 모든 것이 어떤 의미로든 있는 것이란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일양한 보편자이다. 그리고 존재의 지평 외에 우리가 다른 대상의 지평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무제약적 보편이다. 다른 한편 서양철학은 그 존재를 생각하는 방식에서 두드러진 보편성을 보여준다. 서양철학의 보편성은 그들의 생각이 그 내용에서 모두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표현 방식에서 생각이 보편적으로 개방되어 있고 전달될 수 있다는 데 존립한다. 생각의 제한 없는 접근가능성과 왜곡 없는 전달가능성이야말로 서양철학이 실질적 진리에 앞서 요구하는 진리의 형식적 기준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서양철학에 참여할 때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한편에서는 무제약적으로 개방된 보편적 존재의 지평에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누구에게도 차단되지 않은 보편적 생각의 지평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하이데거가 「철학-그것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이란 오직 그리스적인 유럽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 것도 그다지 틀렸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철학이 전체로서 전체를 사유하는 데 존립하는 정신의 활동이라면 세상 어디에서도 그리스에서처럼 순수한 방식으로 그 이상이 실현된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철학이 이처럼 순수히 보편적인 학문으로서 정립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곳에서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자유인들의 공동체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자기의 주인으로서 세계 속에서 자기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자기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서양적 자유의 이념 속에선 지배의 이념이 공속한다. 서양 철학은 그런 자유인의 공동체에서 탄생한 철학이다. 그들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먼저 세계를 통일된 전체로 파악하려 했으며, 그 세계에 대한 인식을 누구도 독점할 수 없도록 모든 인식에 형식적인 개방성과 명증성을 요구했다. 그리스 철학에 의해 기초가 놓인 서양 철학의 보편성은 바로 그런 정치적 자유의 열매였던 것이다.

하지만 서양 철학과 서양 학문이 그렇게 대상의 무제약성과 주체의 무차별성에 기반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면, 과연 어떤 의미에서 서양철학이 보여주는 보편성과 다른 보편성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인류의 역사에 한번 세워지면 다시 허물 수 없는 영속성을 지니는 정신적 성과가 있다면, 그리스적 자유와 보편성의 이념 역시 그런 성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양 철학에 의해 열린 보편적 사유의 지평을 폐기하고 그 외부로 나갈 수는 없다. 우리는 오직 다른 지평을 그 위에 겹치게 하거나 그 지평을 확장시킴으로서 그 지평을 더 넓게 하고 더 깊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다시 우리는 서양적 사유의 외부에서 전체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한다. 비유컨대 서양철학의 지평을 잡아당겨 더 넓히고 더 깊게 하기 위해서는 서양 철학의 지평 외부에 어떤 입각점을 지녀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이미 우리는 서양적 사유의 지평에 사로잡혀 있는데 어떻게 그 보편적 사유의 지평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아니, 이런 형식적 모순을 논하기 전에, 그런 외부가 있기나 한가?

만약 우리가 학문이나 철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우리는 끝끝내 서양적 보편의 지평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도 있음의 지평을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떤 생각도 보편적으로 전달가능성의 원리를 거부하면서 보편적 인정을 요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의학은 비서양학문의 이런 곤경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서양적 개념을 통해 번역되는 한에서만 보편적인 승인을 얻는다. 그렇지 않을 때, 한의학은 그 모든 실질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 과학이 아닌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서양)과학의 개념으로 번역되면 (서양)과학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아니면 과학이 아닌 것이 된다. (서양)과학이 아닌 다른 과학으로서의 한의학의 자리는 없다. 사정은 철학 경우에도 비슷하다. 비서양 철학이 서양철학적 개념으로 번역되면 서양철학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반대로 번역될 수 없다면, 그것은 보편적 전달가능성이 없으므로 아예 철학으로 인정받기 어려워진다. 이런 곤경은 만약 우리가 단순히 학문과 이론으로 서양 철학 외부에서 보편성의 다른 지평을 추구하려 한다면 벗어나기 어려운 곤경이다.

외부는 도리어 안에 있다. 서양적 보편성의 지평 내부에서 그 지평을 초월하는 타자적 입각점을 확보하는 것은 오직 정치의 지평에서만 열린다. 왜냐하면 서양철학과 서양 학문 일반의 보편성의 근거가 바로 그 정치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은 대상의 보편성을 말하고 주체의 보편성을 추구한다. 적어도 명목상으로 보자면 그 보편성은 무제약적인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자면 그들이 추구한 보편성은 제약된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철학의 주체는 자유인들이며, 서양철학의 세계는 자유인들의 눈에 비친 세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서양철학을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인―상호문화철학적 의미에서의―‘맥락’(Kontext)이다. 우리 모두가 그 자유인들이 개방한 세계 내에 이미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서양 철학의 보편적 지평 내에 있다. 하지만 그리스의 폴리스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자유인들이 아니었듯이 서양철학이 개방한 세계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운 주체는 아니다. 도리어 프란츠 파농이 말했듯이 그 세계 내에서 대다수는 “자기의 땅에서 유배된 자들” 곧 자기의 땅에서 노예로 전락한 자들이다. 즉 대다수의 인류는 같은 하나의 세계 내에서 타자이며, 내부의 외부자들이다. 하지만 자유인의 땅에서 노예로 사는 자들이야말로 자유인들이 개방한 보편적 지평 내에 거주하면서도 그 지평을 초월할 수 있는 타자적 관점을 지닌 사람들인 것이다.

20세기는 자유인의 세계에서 인류의 노예화가 극단에까지 진행된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가 철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한 유영모와 함석헌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 까닭은 노예상태는 다만 벗어나야 할 부정적 상태로만 인식되었던 까닭에, 바로 거기에 기존의 보편성의 한계를 폭로하고 전복시킬 수 있는 새로운 보편성의 씨앗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오도 니시다도 우리의 박종홍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남들과 같은 권력의 주체가 되기 위해 발버둥 쳤으니, 그것은 낡은 보편의 모방과 반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영모와 함석헌은 바로 그런 권력의지를 포기하고 억압받는 씨의 고통 속에 머물렀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의 남다른 점이다. 허다한 식민지 엘리트들이 지배적 주류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민중적 삶을 등진 것과 달리 그들은 도리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민중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전체와 하나 되려 했다. 그들에게 철학은 지배를 위해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곧 관조가 아니었다. 함석헌에겐 도리어 참된 “앎은 앓음”이다. 노예상태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수난에 참여하고, 그 보편적인 수난의 뜻을 묻는 것이야말로 씨철학의 길이었다. 플라톤의 비유를 거꾸로 돌려 말하자면, 빛을 찾아 동굴을 벗어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정신의 낮아짐이야말로 씨철학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영모는 빛이 아니라 어둠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다.

이를 통해 유영모와 함석헌은 지배적 세계 내에서 지배적 주체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세계를 드러낸다. 칸트가 말했듯이 철학이 추구하는 세계는 이념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념인가? 칸트는 그것이 오직 생각 속에서 열리는 전체인 까닭에 이념이라 불렀다. 하지만 씨철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칸트의 세계론은 수정되어야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우리들 각자는 하나의 세계이다. 철학이란 이념 속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개방하는 정신의 노동, 곧 세계화에 존립한다. 그러나 세계화의 길은 하나가 아니다. 서양철학이 개방하는 세계는 지배자의 권력의지가 개방하는 세계이다. 하지만 씨철학이 개방하는 세계는 오직 고통 받는 인간의 눈에만 보이는 세계, 능동적 관조 아래 열리는 사물적 세계가 아니라 오로지 고난의 수동성에 참여함으로써 열리는 만남의 세계이다. 외따로 떨어진 섬들처럼 낱낱의 사사로운 세계들이 하나의 보편적 세계로 이어지는 것은 너와 나의 만남을 통해 일어나는 사건이다. 세계는 만남 속에서 열리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 너와 나는 만나는가? 그것은 오직 우리가 서로의 고통에 참여할 때이다. 지배하는 정신이 개방하는 관조의 세계에서 보이는 모든 것은 인식하는 주체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물적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더 깊은 고통의 심연으로 내려가 보편적인 고통을 통해 타자와 만날 때, 그 세계는 언제나 사물화되지 않는 주체들의 공동체이다. 왜냐하면 사물은 고통을 모르나, 오직 살아 있는 주체만이 고통 받기 때문이다. 아니 거꾸로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즉, 고통의 주체만이 주체일 수 있다. 고통을 모르는 순수한 능동성 속에 있는 관조의 주체는 사실은 주체일 수도 없다. 주체성이란 고통이 있는 곳에만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씨철학은 서양철학이 개방하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화의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사물들의 세계가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 인격적 주체들의 만남의 세계이다. 그 만남의 세계는 오직 고통의 만남을 통해서만 열리는 것이니, 이 새로운 세계의 전망은 20세기 한국역사에 켜켜이 쌓인 고통의 뜻을 유영모와 함석헌이 정직하게 물었을 때 잉태되었다. 그 새로운 세계의 씨앗에 물을 주고 북돋우는 것은 이제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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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Etienne Balibar: conjectures and conjunctures, Radical Philosophy 97(September/October 1999)
옮긴이 김정한 multitude@naver.com


에티엔 발리바르 인터뷰: 추측과 정세


에티엔 발리바르는 1960년대 초반 알튀세르를 중심으로 하는 탁월한 학생 집단의 일원이었으며, 알튀세르와 함께 {자본을 읽자 Reading Capital}(1965, 1968; 영역 1970; 국역, {자본론을 읽는다}, 두레 1991)를 저술했다. 그 후 그는 프랑스의 주요 좌파 철학자로 자리잡았다. 저서로 {역사유물론 5연구 Cinq tudes du mat rialisme historique}(1974; 국역, {역사유물론 연구}, 푸른산 1989),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On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1976; 영역 1977; 국역, {민주주의와 독재}, 연구사, 1988), 최근에 영어로 옮겨진 {스피노자와 정치 Spinoza and Politics}(1985; 영역 1998; 부분 국역, {알튀세르의 현재성}, 공감 1996), {인종, 민족, 계급: 모호한 동일성들 Race, Nation, Class: Ambiguous Identities}(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공저, 1988; 영역 1991; 부분 국역,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 세계체계론의 시각}, 공감 1998), {맑스의 철학 The Philosophy of Marx}(1993; 영역 1995; 국역,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문화과학 1995), 그리고 {대중, 계급, 사상: 맑스 전후의 정치와 철학 연구 Masses, Classes, Ideas: 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1994)가 있다. 유럽 정치의 보편주의와 차이를 주제로 한 새로운 논문 선집인 {정치와 그밖의 장면 Politics and the Other Scene}은 곧 Verso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2002년 5월 예정].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당신은 철학과 정치의 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관계라는 것을 밝혀내고자 합니다. 이것은 당신 자신의 지적 궤적으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맞아요. 그 두가지는 고등사범학교의 알튀세르를 중심으로 하는 모임 속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었지만, 그 전에도 이미 얼마간 예기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1942년에 태어났고, 그래서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주 어렸습니다. 당시는 청년 지식인들----영어권의 의미에서 중간계급 middle class이 아니라 프랑스적 의미에서 중위계급 class moyen에 속하는 교육받은 사람들, 다시 말해서 가족이 공무원이거나 교사였던 사람들----이 식민 전쟁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식과 현실 참여를 형성해갔던 시기였습니다. 나의 부모는 중등학교 교사였고, 좌파였습니다. 아버지는 수학자였습니다. 그는 알제리의 프랑스 군대가 자행한 고문에 반대하는 항의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공산주의자였던 한 프랑스 수학자가 알제리 사람들을 돕다가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국립중고등학교를 마친 후, 사범학교 시험을 준비하는 특수반에 들어가기 위해, 1958년에 파리에 왔습니다. 그렇게 나는 가족을 떠났습니다. 파리에서, 나는 즉시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고 일종의 반제국주의적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1962년 전쟁이 종결되던 시기에, 나는 사범학교 학생이었는데, 당시 그곳은 정치적으로 매우 활동적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학생 연맹의 회원이었고 지속적으로 시위와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정치집단이나 정당에 속해 있었습니다.
좌파는 내가 속했던 공산주의 계열----당시 아주 강력했습니다----그리고 좌파 사회주의, 즉 PSU----사회당에서 갈라져 나온 소수 정당이었습니다----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모두 식민 전쟁에 반대했고, 사회주의 정당도 선거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함께 움직였습니다. 예를 들어, 나보다 몇 살 많았던 바디우와 테리는 그 집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격렬하게 싸웠지만, 중심 방향에서는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내가 좀더 성숙했다면, 아마 공산당 청년조직에 참가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텐데, 1956년에 헝가리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 대다수는 공산당이----온갖 오류와 실수, 의심스러운 측면에도 불구하고----가장 강력하고 훨씬 힘있는 좌파 조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산당에 참가했습니다. 나는 1960년에 공산주의 학생연맹에 들어갔고 1961년에 당에 가입했습니다. 애초부터 그것은 내부의 토론과 논쟁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나는 당이,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당을 둘러싼 조직체계가 청년 지식인이 순수하게 지적인 환경 속에 감금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랬습니다. 이런 요소는 이후 아주 영향력 있는 몇 년 동안 수많은 친구들과 동지들을 마오주의로 몰아갔는데, 그 사상은 이를테면 상징적으로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언제나 노동계급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크게 상심하게 되는데, 파리 같은 곳에서 당은 부르주아적인 노동의 분할을 조심스럽게 재생산했고, 지식인들, 특히 이런저런 식으로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노동계급으로부터 고립시켰기 때문입니다.
철학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약간 뒤늦게 다가왔습니다. 사범학교에서 시험은 다학문적인 것이었는데, 이 말은 아주 완벽한 인문학 교육을 제공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지금도 그로부터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문학과 고대 언어, 특히 독일어, 그리고 다른 주제들과 다를 바 없이 약간의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역사는 아주 중요했고 나는 또한 수학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애초에, 나는 고대 역사와 고고학 사이에서 망설였는데, 그 분야는 나와 같은 청년 인문학자들에게는 극히 이름이 높고 매력적이었습니다. 나는 문학과 고대 역사 과정을 따라가기 시작했지만, 그것들이 지독히 지루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나는 철학적 정세가 너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르트르는 때맞침 {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of Dialectical Reason}을 출간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몇 년 후에 사망했지만요).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우리는 그를 항상 철학자로 간주했는데, 아주 탁월한 논문들을 출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나를 강력히 끌어당겼습니다. 나는 생각했어요, 왜 안돼? 왜 나는 안돼? 하고. 당시 사범학교의 학장이, 강의도 했습니다만, 헤겔을 프랑스에 소개했던 장 이폴리트였다는 사실을 덧붙여야겠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 나 자신의 철학 교육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 사람은 이폴리트, 알튀세르, 사르트르였습니다. 사르트르의 강의는 분과를 바꾸기로 결심한 직후 처음 들었지요. 얼마 후에, 소르본에 조르주 캉길렘이 있었는데, 나보다 약간 나이가 많지만 나의 친구인 피에르 마슈레는 나를 그의 세미나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이폴리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 당시 나는 헤겔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나는 그게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곧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순수이성 비판}과 {변증법적 이성 비판}, 칸트와 사르트르를 동시에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성공하지 못했는데, 우리는 정치적 기선을 잡는데 시간을 모두 허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지적인 열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나는 선택했다고 확신했지만, 오래 동안 의문이 남았습니다. 나는 내가 진짜 철학자라고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의미에서라면 아무도 철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당신은 당신의 정체성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은 마치 그런 것처럼 행위한다"고 항상 말하곤 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철학자임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은 마치 그런 것처럼 행위한다, 왜냐하면 당신의 학생들은 당신에게 그런 형상을 표상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엄격한 언어의 꿈

당신은 자신의 인문학적 배경을 이야기했지만, 초기 알튀세르 시기는 강력한 반인간주의적 과학 개념에 대한 탐구가 지배적입니다. 과학에 대한 생각은 우선적으로 공산주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했던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부터, 이를테면 캉킬렘으로부터 유래했던 것입니까?

두가지가 결합된 것이지요. '과학'이란 단어 자체가 상징적인 무게, 일종의 신비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그런 모든 측면들을 함께 결합시키는 꿈을 꾸도록 했습니다. 정치----노동계급 정치----의 과학적 기초라는 관념은 맑스주의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았지만, 우리 연구의 인문학적 측면 또한 아주 유효했습니다. 알튀세르를 중심으로 하는 거의 대부분의 청년 철학자들----랑시에르와 뒤뢰(우리 모임에서 극히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결코 아무 것도 출간하지 않았습니다), 마슈레, 바디우, 나 자신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인문학자였고, 좀더 엄격한 언어와 사유 방식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논리학이나 수학 같은 학문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나 자신도 당시 수학과 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알랭 바디우를 존경하는 한가지 이유는 아마 그가 수학의 중요한 지류----기초 부문----에서 완벽하게 현대적인 연구를 수행했던 우리 모임의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그런 점에는 확실히 상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가 다른 누구보다 더 박식한 것은 아니지요.
이것은 이른바 분석적 방법을 채택하는 '앵글로-색슨' 쪽 철학자들과 소통하기가 아주 어려운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그것은 철학에서 과학적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단지 인문주의적이고 문학적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아닙니다. 두가지 상이한 과학 모델, 두가지 상이한 과학적 이상 사이의 갈등이지요. 그들이 아주 강경하게 경합하는 이유, 그런 오인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느슨하게 말하자면, 나는 분석 맑스주의자----내 친구인 게리 코헨 같은----를 포함하는 분석 철학자들에게 우리가 염두에 둔 이른바 과학적 모델이란 것은 순수한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그들이 염두에 두는 '과학적' 모델은 중세 스콜라적인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공리적 이론 모델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논증을 제시하는 증명 모델을 갖고 있지요. 이것은 과학에 대한 통념이 자신의 고유한 위치 외부에 적용될 수 있는 적대적인 방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분과에서 완벽한 훈련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캉길렘의 모범을 정확히 따라가지는 못했을지라도, 당신이 외부의 시각에서 본다면, 당신이 그 분과 자체에서 훈련받지 않았다면 진지한 과학 철학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신념을 갖고 그를 따라갔습니다. 결국, 그것은 역설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나 자신의 경우, 1960년대와 70년대, 결정론 같은 인식론적 문제를 연구하려 하고 과학적 방법을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했을 때, 나는 여전히 그 개념의 정확한 의미에서 나의 과학적 훈련을 향상시키겠다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에----그리고 맑스주의에서의, 보다 일반적으로는 정치에서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의 암묵적인 포기와 아마도 동시적이었을텐데----나는 그것이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과학적 패러다임을 포기했다고 말할 때, 이것은 내가 정치 또는 철학이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결과에 있어서 과학적이라고 하는 관념을 폐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과학이나 과학적 이성을 지성의 소외 형태로 보는 자들의 진영에 참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내가 과학적 사유를 경멸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루카치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의해 대표되는, 포스트맑스주의나 포스트헤겔적 전통에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그것은 이른바 포스트모던적인 태도의 구성에 기여해왔고,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관념이 인간성을 위한 방향을 오도하거나 무시한다고 제시하곤 합니다.

당신이 인식론적 패러다임을 포기한 시기는 언제입니까?

두가지 단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알튀세르와 그의 소규모 학생 모임과 공유하는 것인데, 1968년 바로 그 전후의 시기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알튀세르와 무관했고, 훨씬 나중에 다가온 것으로, 198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이른바 자기비판이었으며, 맑스주의 철학은 과학적 모델로부터, 일종의 '과학의 과학' 또는 모든 과학에 대한 과학적 비판으로서 발전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정치적 갈등의 모델로부터, 이른바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서 발전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알튀세르는 철학에 뭔가 고유하게 다성적이거나 애매한 것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항상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과학적 이상과 정치적 이상을 결합시키기 때문이지요. 많은 점에서 이것은 플라톤적인 철학관입니다. 나는 이제 알튀세르가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놀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수한 순간에 그 우위성은 전도되었습니다. 철학이 과학이 되려고 하는 정치적 담론이라는 생각을 유지하는 대신에, 그것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철학은 궁극적으로 그 정치적 기능을 통해 형성되고 결정되는 이론적----과학적이라는 의미에서----담론이라는 관념으로요. 이것이 첫 번째 물결이었습니다.
나에게, 두 번째 물결은 내가 스피노자에 대해 저술하기 시작할 때, 또한 정체성들----내가 모호한 보편성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계를 맺는 새로운 정치적 쟁점에 관하여 사유하기 시작할 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순수하거나 이상적인 과학적 철학 모델만이 아니라,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협소하거나 편향적인 강조까지도 포기하도록 강제했습니다. 내가 계급투쟁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이론은 계급투쟁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론과 실천의 관계가 더 복잡하고, 아마도 비틀려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때문에, 나는 '해석학'이나 심지어 단순히 '비판적 담론'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철학에는 아포리아적인 요소가 존재합니다. 철학은 추측----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추측과 정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적 공리 모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공산당을 떠난 이후, 1980년대에 일어난 당신 작업의 변화를 독해하는 한 방법은 일정한 포스트 68년의 정치적 경향----크게 말하자면 자유론적 libertarian 경향----의 이론적 회복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경향은 PCF의 관점에서 비판받아왔지만, 지금은 좀더 이단적인 맑스주의 내에서 고유한 이론적 생명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계급투쟁을 대중 갈등의 정세적 특정화로 재배치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좌파 급진주의의 형태로 해석하곤 하는, 정치적 조직화의 정당 형태와 맞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적 갈등의 일원적이고 이원적인 패턴들에 대해 다수성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해석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합니까?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알튀세르를 중심으로 하는 모임은 맑스주의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축하려 했고, 단선적 인과성(맑스주의적 전통에서 단선적 목적론과 구별되지 못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중층결정,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자율성 등의 관념들을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맑스주의는 계속해서 계급투쟁을 최종심급으로 본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정통적이었고, 당신이 언급하는 자유론적 경향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68년을 이해했던 방식을 봅시다. 프랑스에서, 적어도 68년은 문화 내부에 판돈이 걸린 특정한 정치적 쟁점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제공했습니다. 그런 관념은 아주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라면 그로부터 몇가지 상이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자유론적 관점이라고 부른 것을 채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상부구조에 대한 맑스주의적 통념의 발전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이것이 우리가 했던 일입니다. 이것이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하려고 했던 일이었고 내가 계급투쟁 개념을 확장시킴으로써 하려고 한 일입니다. 그것은 일반적 모델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다원주의를 끌어당기는 중심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어리석은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착취 같은 개념을 포기하지 않고, 따라서 사회적 조화나 합의와 관련하여 사회적 갈등이 부차적이라는 관념을 수용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으로서 계급투쟁 모델을 상대화시키기가 극히 어렵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나는 그에 다소간 동의합니다.
두 번째로, 페미니즘 같은 다른 정치적 쟁점을 돌아볼 경우, 나는 젠더 갈등 및 사회 역사에 대한 가부장제의 중요성을 이론화하는 것이 계급투쟁 모델에 아주 많이 빚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런 적대성은 계급투쟁 자체와는 다르지만 그만큼 보편적이고 결정적이라고, 따라서 특히 이론적으로 그와 갈등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푸코와 비교해봅시다. 그는 계급투쟁 모델을 분명히 상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대안적인 모델을 진보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것은 갈등성 agonism 모델입니다. 적대성이 아니라 갈등성----사회 집단들보다 오히려 역사적 행위자들에 집중하는 경쟁하는 세력들과 실천들의 불안정한 관계----이지요. 그러나 그에는 한계도 존재하는데, 아주 분명히, 계급투쟁의 경우와 젠더 억압의 경우 모두에 말입니다. 그 모델은 세력관계를 단번에 확립된 것으로 보는 결정론적 시각에 대립하고, 또한 언제나 저항이 존재한다는 것----그 모델의 주요 관념----그리고 이 저항이 그 자체로 균형이 생산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헤겔적이거나 맑스적이라기보다, 마키아벨리적입니다. 그러나 오랜 기성의 지배는 이런 방식을 묘사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갈등적 모델로 환원될 수 없는 합리적 착취의 구조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마오주의와 국제주의

아마도 우리는 마오주의의 문제를 경유하여 자유론 libertarianism의 문제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오주의는 다른 어떤 유럽 나라보다 프랑스에서 훨씬 더 중요했던 것처럼 보입니다----마오주의의 장점의 측면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운동으로서, 정치적 분열을 창출하는 그 상징적 힘으로서 말입니다. 이 두가지 모두 사람들을 공산당으로부터 좀더 노동자적인 좌파 행동주의의 형태로 이동하도록 만들었고, 동시에 1970년대 동안 냉전 자유주의로 전향하는 조건을 창출하는 데 결정적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마오주의는 두가지 아주 상이한 정치적 극단을 가리킵니다. 프랑스에서 마오주의가 그렇게 영향력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프랑스뿐만이 아닙니다. 마오주의는 기존의 강력한 제도 공산당이 존재하는 모든 유럽 나라들에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마오주의는 1960년대와 70년대 프랑스에서 강력했지만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페인의 경우는 독재가 붕괴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더 복잡하지만 말입니다. 공산당 자체가 강력했던 곳에서, 마오주의는 매력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학생, 그리고 필경 노동자에게도----물론 프랑스의 주요 마오주의 조직은 학생 조직이었지만----호소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본래의 순수성을 지닌 공산주의 모델의 급진적 판본인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상적인 공산당을 재창출하려는 마지막 시도였지요. 그로부터 마오주의는 사회적 민족국가 내부의 공산당에 내재된 일종의 수치스러움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했는데, 그곳에서 노동계급 조직은 혁명적 담론을 갖고 있지만 노동계급을 복지국가의 구조 내부로 통합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복지국가 내부의 사회적 세력균형의 일부이지요. 프랑스 공산당의 전형적인 모순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마오주의는 전통 부르주아 문화의 규범적 형태에 반역하는 청년 지식인 운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세대론, 부모가 레지스탕스였거나 1945년 이후 주요 계급투쟁에 참여했거나, 아니면 공산당에 소속했다가 그것을 포기했거나 내던져버린 그런 세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국제주의적 수준에서 중국이 공산주의 운동의 영속적인 위기의 해법을 표상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마오주의 모델에 매혹되었습니다. 나 자신도 이상적인 중국 모델, 문화혁명에 강력히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것은 우리가 중국에 투영시켰던 것이었고, 그 실재 역사는 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되돌아보면, 우리는 아주 편파적이었고 대부분 중국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한 잘못된 정보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른바 문화혁명이 두가지 측면, 우리나라에서는 실질적으로 결코 통합할 수 없을 것 같은 측면들, 즉 부르주아 규범에 대한 자유론적 반역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운동을 결합시키고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이것은 문화혁명과 홍위병에 대한 이상적인 그림으로 축약될 수 있었습니다. 포스트-니체적인 문화 반역과 맑스적인 계급투쟁의 통일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수상쩍고 억압적인 조직 형태를 야기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로베르 린하르 같은 사람 덕분에(그는 개인적으로 아주 비싼 대가를 치뤘습니다) 테러리즘으로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일체의 반대를 진압한다는 측면에서 공산당보다 더 나쁜 극단적인 실천이었습니다. 혹독한 모순이었지요.

그 과정에서 反베트남 운동은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갖고 있었습니까? 수많은 학생들을 마오주의로 귀의시켰던 베트남 전쟁과 관련하여 공산당의 급진주의의 결여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까?

아마 당신 말이 맞을 겁니다, 그래요. 그것은 당시 가장 끔찍한 실수 중의 하나였습니다. 프랑스에서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의 급진적인 청년 공산주의자들은 대부분 소비에트 연방이 국제적인 수준에서 보수세력으로 행위하고 있다고 (올바르게)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내 친구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최근 소비에트 연방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중대한 일부인 국제적 국가체계를 안정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전세계에 걸친 학생과 청년 노동자의 68 운동을 세계경제의 국가체계----당연히 사회주의 국가들과 공산당을 포함하는----에 대항한 반란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보지 않을지라도 … 내가 기계적으로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정합적인 또는 체계적인 방식으로, 당시 사회주의 체계는 실제로 안정을 유지하는 보수적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런 이유로 대개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에 밀접히----정치적이고 재정적으로----의존해있던 서구 공산당도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공산당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혁명운동을 후원하고 있음을 정기적으로 선언하면서 이데올로기적 면책을 얼마간 얻어내야 했습니다.
세계의 모든 혁명 그룹들의 거대한 지지자라는 중국에 관한 이상적인 그림은 우리가 베트남 동지들과 토론하던 1970년대 초에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학생을 비롯해서 프랑스에 수천 명이 있었으며,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중국의 사건이 극히 중요했습니다. 중국이 피노체트 쿠데타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들을 완전히 대립적인 두가지 방향으로 몰아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나는 전통 공산주의에 헌신하다 친중국적 열광으로, 또한 거기에서 전혀 다른 것, 냉소주의, 종교, 냉전 자유주의 등으로 전환해갔던 내 세대 사람들을 예를 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지독히 파괴적인 효과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지독히 파괴적인 효과였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맑스나 맑스주의에 앞서 존재했던 하나의 사상이었고, 운동으로서 그리고 정합적 이론으로서 맑스주의의 종언 이후에도 아마 존재할 것입니다. 따라서 포스트-맑스적 공산주의 post-Marxian communism 같은 것이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포스트-맑스적 공산주의는 맑스적 공산주의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아야만 합니다. 이미 상속받고 있는 핵심 요소 중의 하나는 국제주의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국제주의는 맑스적 사회주의----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의 이야기 속의 가장 역설적인 쟁점인데,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이상으로서 염원되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완전히 부정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탈맑스주의자들 ex-Marxists은 경계선----국가 경계선, 문화적 경계선----을 가로지를 수 있는 능력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대표하고 또한 일종의 진보세력의 초민족적 공동체를 지향하며 작업하는 유일한 자들이 아닙니다. 프랑스 마오주의의 전통은 국제주의에 아주 깊이 헌신하고 있습니다.


철학과 이데올로기

{맑스의 철학}의 후반부 쪽에 가면 "교의 doctrine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인상적인 글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에 대해 두가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런 정식화가 일정한 정치적 역사, 즉 교의라는 통념에 기반한 정치적 기획에 대한 반작용을 어느 정도까지 표상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관념에 조응하는 철학의 개념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맑스를 '끝없는 시작'의 철학자로 보는 당신의 관념으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그 책은 {맑스의 철학}으로 출간되었습니다만, 가능하면 맑스의 '철학들' 같은 제목을 채택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맑스의 철학이란 관념은 단일한 교의 내지 통일적 철학이라는 겉포장 밑에 있는 아포리아적 방법으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맑스주의 전통에 의해 창출되었고 어쩌면 맑스 자신의 꿈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완성될 수 있는 통일적인 것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맑스의 운명이라는 특정한 사례와 관련되는 것인지, 아니면 좀더 일반적인 경우인지는 살펴봐야 합니다. 맑스주의의 통일성을 재구축하려는 시도들 중의 하나에 깊이 휘말려왔지만, 나는 이제 그것이 아포리아일 뿐만 아니라, 왜 상상했던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알튀세르가 아팠기 때문에, 아니면 그가 정치적 헌신을 이론적 활동과 결합시키고자 했던 정세가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극히 유리한 대신 결국 아주 힘겨웠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는 맑스에게 이론이란 없다, 맑스에게 철학이란 없다가 아니라, 그런 철학은 상이하고 대개 모순적인 기원들 및 개념들의 잠재적인 결합이며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철학과 관련한 맑스의 한계 입장 boundary position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여하튼 그것은 당신이 모든 철학에 대해 보유했던 입장은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 그 자체와는 무관하다는 것인가요?

좀더 완전하게 정교화시켜야 하는데, 왜냐하면 어느 쪽의 의미에서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말해서 단지 맑스라는 특정한 경우에만 적용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좀더 폭넓게 적용하려는 시도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진정한 철학자들----위대하든 변변찮든----은 교의의 체계를 건설하지 않는다는 관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진정한 철학자에게는 본래적으로 아포리아적인 요소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 철학의 역사상 그렇게 수많은 결정적인 책들이 완성되지 않는지, 완성될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철학자들이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 그들이 체계를 건설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철학자들이 체계를 획득하길 꿈꾸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철학자들의 위대함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데 실패하는 방식에 놓여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수많은 이들이 웃을 테고, 내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내 자신이 겪은 맑스의 경험이 내 정신을 비틀어놓았다고 말할 겁니다. 내 친구의 한 명인 알렉산드르 마트롱은 프랑스에서 가장 탁월한 스피노자 전문가인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매년 새로운 아포리아를 발견하고자 한다. 스피노자의 대중 개념은 아포리아적이다, 민주주의 개념은 아포리아적이다, 이런 식으로. 그건 미친 짓이다." 나는 어떤 철학적 교의의 잠재적인 통일성과 정합성을 생산하고 발현시키려는 목적을 갖는 입장에 대해 응수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누구든 그와 같은 아포리아적 철학관의 원천에 관해 상이한 설명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글쓰기, 텍스트성과 사유의 관계에 관련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좀더 폭넓게 역사, 어쩌면 정세라는 통념에 관련되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오래됐지만 유용한 용어법을 고수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철학의 관계에 연결됩니다. 그것은 위대한 철학자란 결코 단순하고 일관되게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진영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을 맺습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며, 뒷받침할 증거도 존재합니다. 또한 우선적으로 주관적이거나 심리적인 요소와도 무관합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자신의 진영에서, 주류에서 요구하는 것과 정확히 대립하는 담론을 제공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정도는 놀라운 것입니다. 감옥에 가면서까지 군주정이나 전제정을 주장하는 플라톤뿐만이 아닙니다. 아테네의 현존하는 민주주의 개념을 귀족정과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을 뛰어넘는 새로운 토대로 대체시키려 하는 아리스토텔레스만이 아닙니다. 최선의 토대는 왕의 신권이 아니라 일종의 급진적인 민주주의적 토대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영국 군주정을 납득시키려는 홉스만도 아니지요.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위대한 철학의 사후 효과입니다. 좌익 헤겔주의와 우익 헤겔주의가 존재하는 것처럼, 똑같이 좌익 맑스주의와 우익 맑스주의가 존재합니다. 모든 위대한 철학의 바로 그 핵심에는 이데올로기적 헌신과 객관적 논증의 논리 사이의 모순이 놓여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철학자는 이데올로기가 봉쇄하는 쟁점을 다시 열어놓습니다. 이것은 철학자의 정치적 입장이 때때로 극단적으로 수상쩍은 이유입니다----예를 들어, 플라톤과 하이데거를 보십시오. 당신은 결코 논증의 의미를, 그것이 이바지한다고 생각되는 이데올로기적 목적으로 환원하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정세라는 통념과 관련되는 것이겠지요? 당신의 작업을 관통해서 흘러가는 연속성의 실마리는 정세라는 통념인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아포리아가 사고의 정세적 성격과 사유의 본성 사이의 모순으로부터 도출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신이 이데올로기에 관한 논점을 이런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철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모순은 언제나 정세적이라는 것이지요?

동의합니다만, 나는 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바를 입증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 추측, 추정, 주관적 정당화는 철학에 관하여 글을 쓰거나 내 작업에서 철학적 통념을 사용하는 특정한 방식에 후험적인 a posteriori 것입니다. 루만의 개념으로, 이데올로기들은 복잡성-환원 기계들 complexity-reducing machines이고, 대부분의 이데올로기적 대안들의 이분법적 성격은 그런 측면에서 지독히 강력합니다. 그것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지배합니다. 그것은 온갖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 그리고 실험적 지식에 대한 몰두 때문에, 사회과학은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로 존재한다는 가장 강력한 지표들 중의 하나입니다. 당신은 예를 들어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아니면 행태주의와 의식의 해석학 같은 것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지속적으로 재촉 받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실천과 이론이 뒤섞이고 서로에 대해 작동하는 정세는 결코 이런 의미의 이데올로기적 대안들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철학의 관심은 정확히 이런 방향 속에 놓여 있습니다. 대개 철학자들은 어느 한 측면을 선택합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예를 들어 전체주의자이기보다는 개인주의자이다, 혹은 실재론자이기보다는 명목론자이다, 이런 식이지요. 그러나 이런 입장을 일관된 태도로 정교화시키려 할 때, 그들은 대개 자신들의 초기 입장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모든 철학자는 초기 철학과 그것을 파괴하는 후기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정세 속에서 그 모순을 극단까지 밀고 갑니다. 그들은 정세 속의 잠재적인 혹은 본래적인 모순에 극단적인 정식을 제시하는데,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담론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밖의 담론들은 복잡성을 환원시킬 필요성에 의해 전체적으로 제어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상대물은 문학 장르처럼, 철학이란 열린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글쓰기 내지 이론적 활동이 철학적인 것인지 아닌지 사전에 결정하는 질문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철학적 담론의 보편성에 어떤 효과를 발휘합니까?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철학 비판은 그것이 소외된, 추상적인 정신 노동의 관념적인 보편성임을 드러냅니다. 보편들에 대한 작업에서 당신은 보편의 종류들을 구별합니다. 실재 real, 가상 fictive, 상징 symbolic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당신은 이런 구별을 특정하게 철학적인 보편성에 관한 질문과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두가지 상이한 입장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철학이란 실재적 보편성의 영역을 열망한다----철학자들은 실재적 보편을 추구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당신의 실천과 좀더 부합하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철학이란 경쟁하는 보편들의 다수성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즉시 단성성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하는데,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보편의 다수성에 대한 담론을 갖고 있다면, 당신이 다수성에 대한 단성적 담론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띄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강한 반론이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곤 했던 입장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할 것 같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앞서 언급했던 의미에서 회의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포리아적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철학이 그런 다수성 내지 모호성을 극복하는, 보편성의 단성적 요소를 표현한다고 보는 순수하게 합리적인 철학관을 갖고 있는 사람을 납득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소간 동일한 출발점에서, 동일한 영향을 받은 우리 중의 일부는 이제 이런 점에 대한 이론적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곳이 바로, 예를 들어 바디우와 내가 전혀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이며, 비록 우리 모두 라캉에게 암시적이고 초기 비트겐슈타인에게 명시적인, 메타언어적 수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 같은 것을 받아들일지라도 그렇습니다. 나는 그에 관해 절대적으로 일관적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철학이란 담론이며, 혹은 더 적절하게, 담론의 특정한 실천으로서, 보편성의 관념이 지닌 다성성을 탐사하는 것입니다. 철학 그 자체는 보편적인 것의 모호성 속에 휩싸여 있습니다. 물론, 당신은 한 측면 내지 다른 측면이 지배적이 되는 철학들을 발견합니다. 또한 주로 우주론인 철학들이 존재합니다. 실재적인 것, 실재적인 것의 통일성과 다수성, 과정과 연계의 효과적인 측면과 잠재적인 측면 등의 문제에 몰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바디우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나도----수많은 들뢰즈주의자들은 반대할테지만----들뢰즈에게 나타나는 그런 요소를 파헤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재적인 것의 다수성이야말로 들뢰즈 철학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무한히 변별화하는 차이의 존재론이 결국 경험적으로 역사에 무관심하다는 의미에서, 당신은 들뢰즈 같은 이들이 전통적 철학자에 너무 가깝다고 보십니까? 해묵은 나쁜 의미에서 그의 '철학'이 존재하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비판적 전통에 의해 승인되는 것보다는 그 용어의 고전적 의미에서 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해체적이거나 포스트모던한 철학적 실천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것은 사태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외피, 말하자면 겉옷이기 때문입니다. 들뢰즈가 다시 사고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개체성과 삶 내지 과정의 전-개체적 형태 사이의 관계를 다시 사고하고자 합니다. 나는 이와 관련하여 {천 개의 고원 A Thousand Plateaux}을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물론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요. 그것은 아마도 상상적 철학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철학에는 상상적 요소가 존재합니다. 들뢰즈는 근본적으로 은유적인 요소를 도입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와 헤겔에 이르는, 합리주의적인 인간주의 전통이 확립시켰던 은유들의 게임, 바로 인간 개체 그 자체는 상이한 계 界에 속한다는 관념----의식 때문이든 정치적 동물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기 때문이든----을 완전히 포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근본적으로 논파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파괴를 선호합니까?

그것은 형이상학과 사회적 실천의 관계를 당신이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들뢰즈는 개인이 사회적 삶 속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는 규칙들, 또한 다른 사람의 사유와 욕구와 욕망이 그 또는 그녀의 정체성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는----물론 이 반대도 마찬가지지만----규칙들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극히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초개인적 과정들, 프로이트가 말하곤 했던 원초적 과정들입니다. 외디푸스적 보호에서 풀려남으로써, 그 과정들이 전면에 부각됩니다. 그것들은 내가 '대중들 the masses'이라고 부르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그러나 당신이 스스로 의식적 개체성과 책임성의 안전과 보호를 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상황은 극히 드물고 또한 극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질문에 답변하자면, 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에 있어서, 아니면 심지어 지적인 삶에 있어서, 일관적인 들뢰즈주의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법적, 심리적, 정치적 전통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과 같은 개인의 외관상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많은 것이 상상적인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맑스에 대한 당신 책의 독특한 특색은 당신이 '이데올로기'부터 '물신성'에 이르는 맑스의 작업 내부의 발전을 상상적인 것에 관한 그의 개념의 전화에 입각해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비실재적'이라는 상상적인 것에 관한 인식론적 통념에서 사회적인 것 자체를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상상적인 것에 관한 생각으로 이동하는 것 말이죠. 이 후자의 개념이 전적으로 가장 초기의 것 이면에 남겨진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비판적 관점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솟아납니다. 비실재적인 것으로서의 상상적인 것에서 구성적인 것으로서의 상상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게슈탈트 전환 Gestalt switch이 존재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전자가 후자의 내부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요?

나의 입장은 두 번째인데, 만일 당신이 그것을 전통적 양상의 단순한 전도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단지 실재적인 것의 잘못된 표상이라는 상상적인 것의 그림에 도전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또한 실재적인 것의 부산물이라는 상상적인 것의 관념을 거부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만일 현대 프랑스 철학이 그 입장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강점을 갖고 있다면, 그와 같은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이분법을 극복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이분법, 사실과 규범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데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변증법적 전통을 향한 프랑스 철학의 동시적인 근접성과 거리감을 설명해줍니다. 헤겔적이고 맑스적인 변증법은 이미 대부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 종류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시도였지요. 헤겔이 일생에 걸쳐 사실과 규범의 대립(오늘날에도 수많은 합리주의자들이 여전히 진지한 사고 방식의 절대적 기초라고 여기는 것)에 대항하여 투쟁했던 것처럼, 맑스는 물신성에 대한 놀라운 장에서, 실재와 상상의 이분법에 도전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것은 여전히 흥미를 자극합니다. 물론, 극복의 변증법적 방식은 세 번째, 대립적 측면들을 해소시키는 합 synthesis의 개념이란 관념에 물들어 있으며, 이런 점은 현대 프랑스 철학이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포리아적 요소로 되돌아갑니다. 그것은 불가역적 사건들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상상적인 것의 실재적인 것으로의 변화, 실재적인 것의 상상적인 것으로의 변화이며, 이것이 결정적인 것으로 대두합니다.


스피노자와 대중 정치

독일에는, 칸트적 이율배반론 antinomianism의 다양한 형태로 되돌아가서 변증법적 논리의 비판에 대응하려는 경향이 존재해왔습니다. 당신이 속해 있는 전통에 반하여, 스피노자로의 전환과 연관되어 있던 훨씬 강력한----좀더 형이상학적으로 건설적이라는 의미에서----대응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갈등----이율배반 없는 갈등----을 이론화하는 좀더 형이상학적으로 만족스러운 방식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로 인해 또한 그것을 정치적으로 절대화합니다. 이에 관한 당신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프랑스 전통----또한 내가 개인적으로 일정한 유보조건을 달고 귀기울이고 있는 방향----은 스피노자의 교훈과 니체의 교훈을 결합시켜왔으며, 이것은 스피노자 자신에게 일종의 비극적 요소를 도입하기 위한 것으로, 수많은 전통적인 스피노자 독해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스피노자의 증후적 독해이며, 이런 측면에서는 우리들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출판된 {새로운 스피노자 New Spinoza}라는 선집은 이 영역에서 작업하는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분기와 수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수대중 the multitude이라는 범주를 봅시다. 나는 들뢰즈-네그리의 해석과 기본적인 요소들을 공유하는 스피노자의 다수대중 개념에 관한 해석을 발전시켜서 스피노자에서의 대중들에 대한 에세이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결국엔 거의 정확히 정반대의 결과를 생산했습니다.
들뢰즈는 다수대중이라는 생기론적 개념을 정치 영역으로, 또한 개체성들을 다수대중과 접속시키는 하나의 상상으로 이동시키는데, 이것은 완전히 낙관적인 효과들을 생산합니다. 그것은 상상적인 것에 관한 아주 자연주의적인 시각이며, 그 속에서 삶과 사랑의 힘은 불가피하게 갈등, 적대와 파괴의 요소들을 극복합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적 전통----{문명화와 그 불만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의 일정 부분 그리고 모호성이 구성되는 기본적인 상상적 과정에 관한 해석과 전적으로 대립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에서, 나는 스피노자에서의 상상적인 것에 관한 교의가 그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합리적인 정치적 구성은 끊임없이 모호성 속에 붙들려 있는 다수대중의 역량 power을 발전시키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유한성이란 요소가 존재합니다. 스피노자적 관점에서, 정치란 집단적 욕망이 전개될 수 있는 모순적 방향들과 관계 맺는 상상적인 것 속의 합리적인 구성입니다. 그런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만 그 효과를 통제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면 그 내부로부터 통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대중들의 정치를 그 내부로부터 '문명화 civilizing'하는 것입니다. 맑스주의는 대중들의 혁명적 운동의 문명화를 그 내부로부터 실행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찾아냈던 유일한 해법은 권위주의적인 것이었는데, 그것은 모든 진정한 혁명적 추동력을 파괴하곤 했습니다.

여기서 규범적인 차원이란 무엇입니까?

규범적인 요소가 존재하지만, 바라건대, 그것은 내재적인 것입니다. 규범적이지만, 억압적이지는 않습니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은, 나를 들뢰즈의 일부 정식들과 좀더 가까워지도록 하는 (하지만 네그리가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가상 fiction'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의 반대쪽에는 가상이란 요소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정치를 과학이 아니라, 예술 근처로 데려갑니다. 상상적인 것의 모호성을 조절하는 삶의 형태의 창안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진보운동이 역사 속에서 직면해왔던 아포리아는 보수적인 구조들----국가일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는----이 규범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법으로 그런 모호성을 조절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라는 것입니다. 기존 질서에 대한 모든 도전은 집단적 운동을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위태로운 구역으로 이끌어가는데, 그곳에서 당신은 의식적 개체성과 책임성의 안전과 보호를 망각합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유럽이 러시아 혁명과 파시즘의 발전 이후, 홉스봄이 '제2의 30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시기로 내던져진 구역입니다.

그런 내재적인 '문명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들과 제도들은 무엇입니까? 실제로, 그런 스피노자적 시각에서, 제도들이 현실적으로 다수대중에 대해 내재적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회적 교환의 초민족적 형태가 점차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교환을 통치하는 기본적 메커니즘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비권위주의적으로 대규모의 정치적 주체들을 구성할 개연성은 전보다 약해진 것 같습니다. 추정컨대, 이것은 네그리 같은 이들이 다수성의 철학적 존재론을 다수성의 자유론적 정치로 직접 해석하는 한 근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의 정치적 입장이 아닙니다. 계급 정치를 대중투쟁의 정세적 특정화로 보는 당신의 생각이 여기에서 어떻게 하나의 대안으로 작동하는 것입니까?

기초적인 언급은 생략하겠습니다. 내가 지칭하는 실재적 보편의 합당한 후보는 시장, 세계 시장일 것입니다.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로서 계급의 중요성에 관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질문을 야기합니다. 계급은 주로 시장 구조 내지 국가 구조로부터 도출되는 단일체인가? 답변하기는 전혀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상호작용하는 두가지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계급은 그 두 구조가 결합하여 경쟁하는 접면에서 형성됩니다. 19세기에, 계급투쟁에 입각한 사회적 실재성의 묘사는 국가가 계급투쟁의 기초적 결정요인을 포괄한다고 주장할 수 없는 형식적 조직이라는 사실로부터 자신의 설명력과 설득력을 이끌어냈으며, 오히려 계급투쟁은 사람----상품의 순환만이 아니라 노동력으로서의 남성과 여성의 순환----을 포함하는 시장의 확대에 입각해 설명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종말로 치닫고 있는 지금 시기에, 만일 계급이 정치적 영역에서 작용하는 실재적 세력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면, 계급은 우선적으로 국가 내부에 있는 세력으로서, 혹은 국가와 협상하는, 중앙집중적인 국가 자체에 대한 일종의 상대자 counterpart로서 간주되어야 합니다. 결국, 계급은 민족국가 구조에 기능적이었습니다. 계급의 정치적 주체성을 근거짓는 것은 공통 이해의 관념, 또는 사회의 일정한 응집적 대표체라는 관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 시간의 연속성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이는 연속적 과정이라는 역사에 관한 표상과 유례없는 혹은 대격변을 일으키는 사건에 관한 예견의 결합인데, 그 속에서 정치적 주체는 역사의 진로를 역전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정치적 주체들은 필연적으로 일국적 공간보다 더 큰 공간 속에 있고 동시에 과거의 계급보다 작거나 적은 포괄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낡은 의미의 연속성의 견지에서 표상될 수 없는 시-공간 속에 존재합니다. 아마도 정치적 주체들은 제도들보다 연약하지만, 억압하기가 더 어려울텐데, 자신들을 영속적으로 재구성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계적 수준에서, 영속적인 방식으로, 좀더 세계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위상을 갖는 방향 속에서 제도로서의 경계를 압박할 여지가 있는 개인들과 집단들의 통일 같은 것을 건설할 가능성에 대해 극히 회의적입니다. 반면에, 나는 문제가 회피될 수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 자체로 더 풍부하게 토론할만한 가치가 있는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면, 이른바 공동체주의적이거나 초-공동체주의적인 주민들의 상이한 지위는 유럽의 통합이 가속화되는 만큼 더욱더 긴급한 문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아주 강렬하고 위험한 상황을 야기할 것입니다. 나는 사회적 항의가 그런 측면에서 진보적이고 건강해져야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동시에,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운동을 통제하는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경계로서의 제도를 특징짓는, 내가 민주주의들의 비민주적 측면이라고 부르는 것을 억제하려는 목적을 가진 민주화 운동을 기대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담자 피터 오스본 Peter Osborne
1998년 12월,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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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10-04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리바르가 젊은시절 어땠는지를 알 수 있어서 정말 유익했던 인터뷰ㅎㅎ역시 공부만 했군요 그양반 ㅎ

바라 2009-10-05 23:4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는 얼마 전에야 발견한 글인데 역시 대담글이라 읽기 좋네요. 매우 유익한 것 같습니다ㅎ

2009-10-13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만(N. Luhmann)과 하버마스(J. Habermas)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




정성훈 (사회과학아카데미 강사)




< 목  차 >




1. 머리말

2. 체계이론 대 상호주관성 이론

3. 소통이론 대 행위이론

4. 사회학적 계몽으로서의 비판 대 철학적·규범적 척도 제시로서의 비판

5. 차이이론 대 동일성 논리

6. 맺음말

참고문헌







1. 머리말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이후 현대 사회를 과학적으로 파악하면서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지향을 가진 이들은 맑스·레닌주의 전통의 오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서유럽의 여러 철학 및 사회과학 조류들을 받아들여 왔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사회이론을 대표했던 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의 2세대 대표 주자인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였다. 현대 사회의 지배적 이성인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면서 소통적 이성을 내세웠던 하버마스는 흔히 이성 자체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함의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푸코, 데리다 등 프랑스 철학자들과 대비되어왔다.

그런데 정작 독일 사회이론에서 반이성주의 혹은 반인본주의를 대표하면서 하버마스와 오랜 세월 대립해온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한국에 별로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일반 체계이론(general systems theory)을 사회학에 적용한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은 하버마스가 체계와 생활세계의 2단계 사회이론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나 법이론과 정치이론에서 절차적 정당성 구상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나 중요한 자극을 제공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한국에도 하버마스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루만의 체계이론이 가진 거대한 면모와 복잡성, 그리고 그것이 사회비판이나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에서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은 충분히 주목받고 있지 못하다.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은 1960년대 말 하버마스가 ‘사회이론인가, 사회공학인가’라는 제목의 논쟁 파트너로 루만을 끌어들이면서 시작되었고(Habermas/Luhmann, 1971), 1998년 루만이 죽을 때까지 30년간 팽팽하게 지속되었다.1) 이 대립구도는 지금도 그들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에 의해 ‘체계이론 대 비판이론’ 또는 ‘빌레펠트학파 대 프랑크푸르트학파’라는 구도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지식인들, 특히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런 무관심의 원인으로는 루만이 사용하는 용어가 일반 체계이론,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인지생물학 등 우리에게 낯선 학문 흐름으로부터 나왔다는 점, 그의 이론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방대한 규모를 갖고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점 등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한국에 먼저 널리 소개된 하버마스가 루만의 체계이론을 ‘사회공학’으로 간주하고 사회의 현상태에 대해 ‘옹호적(affirmativ)’인 이론이라고 비판했던 효과가 상당히 크다고 본다. 하버마스가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는 다른 이론가들에 비해 정치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그리 급진적인 이론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버마스보다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루만과의 대립구도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그리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다. ‘푸코 대 하버마스’가 푸코에게 씌워져 있는 급진적 이미지로 인해 그들 사이에 별로 실질적인 논쟁이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몇 차례 소개된 반면, ‘루만 대 하버마스’는 루만이 파슨스의 보수주의적인 체계이론과 기능주의의 아류 정도로 인식되면서 별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푸코의 고고학과 계보학을 ‘비판’으로 볼 수 있다면, 정상적인 것의 비개연성과 기원의 우연성을 강조하며 권력, 진리, 화폐, 사랑 등이 역설(paradox)에 근거한다는 점2)을 드러내는 루만의 사회학적 계몽 역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 체계이론과 루만의 등가기능주의 체계이론 사이에는 헤겔과 청년헤겔학파 사이의 차별성만큼 커다란 차별성이 있다. 또한 루만의 체계/환경 차이 이론은 그 논리의 성격상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비동일성을 강조하는 아도르노의 부정적 변증법과도 가깝다.3)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에 ‘체계이론 대 비판이론’이라는 표제가 붙은 것은 루만에 대한 온당한 주목과 평가를 어렵게 만든다. 물론 루만 스스로가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대표 명칭을 ‘체계이론’이라고 불렀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이론의 종말”을 선언하면서(Luhmann, 1991) 대립해왔다. 그래서 위의 표제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이론 명칭들은 같은 맥락에서 대립되는 두 입장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하버마스도 체계를 자기 사회이론의 주요한 한 단계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루만도 그가 강조하는 이차 등급 관찰을 일종의 비판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4) ‘체계’와 ‘비판’은 서로 대립하는 말이 아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루만과 하버마스가 대립하고 있는 지점들을 몇 가지 골라서 그 기점들에서 어떻게 대립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물론 이 글에서 다룰 것보다는 훨씬 많은 대립지점들이 있지만 한국에서 이들의 대립구도에 대한 이해 수준을 높이기 위해 긴급하다고 판단한 지점들만 밝히도록 하겠다. 이 글 자체는 여기까지만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은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과 그의 현대 사회 진단이 갖는 잠재력을 알리기 위한 서론이기도 하다. 루만은 자기 이론의 성격을 결코 진보, 혁명, 좌파 등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다른 관찰자들이 루만의 이론을 그런 식으로 분류하기도 어렵다. 그는 모든 종류의 ‘-주의’가 일차 등급 관찰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며, 진보/보수, 혁명/반동, 좌파/우파, 비판적/옹호적 등의 구별을 이용하는 일차 등급 관찰자(first-order observer)들의 맹점을 다시 관찰하는 이차 등급(second-order)의 과학적(사회학적) 관찰자에 머물러 있고자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적 관찰은 현대 사회의 구조와 한계에 대한 거시적 통찰을 제공했던 맑스의 <자본> 이후 보기 드문 거대 사회이론의 구축에 이르렀다. 거대 사회이론으로서의 <자본>이 경제 비판에 머무른 반면, 현대 사회의 주된 구조를 기능적 분화(funktionale Differenzierung)5)로 파악하는 루만은 세계사회를 경제, 과학, 법, 예술, 정치, 종교 등의 여러 맥락에서 고찰하고 그 생태학적 합리성의 한계와 인간에게 끼치는 후과를 진단한 바 있다. 그리고 계층적 분화의 관념이 잔존하는 계급사회 이론을 거부하지만 기능체계들의 수행실적 상승을 통해 일어나는 포함(Inklusion)과 배제(Exklusion)라는 구별이 오늘날 세계사회의 메타코드(Metacode)로 강화되고 있다고 보고, 이로 인해 일어나는 양극화 및 현대성 위기의 문제상황을 진단하기도 한다.6) 이러한 진단들은 좌파의 실천을 위해서도 충분히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이론적 자산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2. 체계이론 대 상호주관성 이론




하나의 이론이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를 통해 그 이론의 명칭을 부여한다면 루만의 체계이론과 대비되는 하버마스 이론의 명칭은 비판이론이 아니라 ‘상호주관성 이론’이다. 루만이 사회적 관계들 혹은 사회적인 것을 ‘체계’로 파악하는 데 반해, 하버마스는 ‘상호주관성’으로 파악한다. 물론 체계와 생활세계의 2단계로 이루어진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을 상호주관성 이론으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추가 해명이 필요하다.

하버마스에게는 체계와 생활세계 중에서 생활세계만이 언어를 통한 상호주관적 이해가 제한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단계이다. 그에 반해 체계는 화폐와 권력이라는 비언어적인 조절매체를 통해 상호주관적 이해가 제한되는 단계이다. 하지만 이 두 단계의 지위는 평등하지 않다. 하버마스에게 생활세계는 “사회체계 전체의 존립을 정의하는 하부체계”(하버마스, 2006: 245)이며, 사회는 제도적 성격을 띠는 “생활세계의 구조적 요소”(하버마스, 2006: 224)이다. 그리고 체계의 복잡성 증가는 생활세계의 제도화, 즉 구조적 분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에서 일차적인 대상은 현상학적 사회학과 마찬가지로 상호주관성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체계이론의 자극을 받아 물화(物化)된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동시에 파악하고자 하기 때문에 체계 또한 이차적인 대상으로 다룬다. 이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은 상호주관성 이론이면서 이와 더불어 체계들도 고려하는 이론이다.

하버마스와 달리 루만은 모든 사회적인 것을 체계로 파악한다. 그는 사회적 체계들을 상호작용들, 조직들, 사회들로 분류하며, 후기에 이르러 저항운동을 이들 세 가지로는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종류의 사회적 체계로 간주한다. 간혹 루만이 다루는 체계들을 모두 사회적 체계들과 동일시하거나 사회적 체계들을 모두 사회의 기능체계들과 동일시하는 오해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체계 개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일반 체계이론은 체계와 환경의 차이를 출발점으로 하며, 기계들, 생명 체계들, 심리적 체계들(의식들), 사회적 체계들 등을 그것들의 환경과의 차이를 통해 다루는 이론이다. 사회적 체계들(soziale Systeme, social systems)은 사회학의 고유한 이론적 대상이며, 상호작용들, 조직들, 저항운동들, 사회들이 이런 체계들에 해당된다.7)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등의 기능체계들은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인 사회(Gesellschaft, society 혹은 societal system)가 분화되는 하나의 형식에 따라 나오는 부분체계들이다. 그리고 기능적 분화 형식은 현대 사회의 주된 구조이다.

그래서 사회적 체계 이론이 모든 사회적 현상을 기능체계들의 자기생산 논리에 따라서만 파악한다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 체계이론적 사회학은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친밀관계를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사회적 접촉을 그 이론의 대상으로 삼는다.8) 반면에 하버마스가 체계이론으로부터 부분적으로만 수용한 체계 개념은 사회의 기능체계들, 특히 그 중에서도 경제와 정치에만 제한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하버마스의 체계 개념을 떠올리면서 루만의 체계이론이 이른바 조절매체들에 의해 조절되는 물화된 사회 영역만을 다룬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루만과 하버마스가 사회이론의 대상을 각각 ‘체계’와 ‘상호주관성’으로 삼는다는 것은 두 학자 모두 전통적인 주체 중심 철학을 극복하려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극복의 방향은 매우 다르다. 루만은 상호주관성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보며 이 패러다임이 구유럽적 인본주의(humanism)의 전제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하버마스는 루만이 독일 관념론 전통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근세 의식철학의 모나드적 주체를 작동상 닫힌 자기지시적(selbstreferentiell) 체계9)로 대체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상호비판은 두 학자의 사상적 대립에 있어 가장 첨예한 쟁점이라고 볼 수 있다. ‘존재론과 인본주의 전통을 벗어나는 의미론’과 ‘형이상학 이후의 사유’를 각각 그 사상적 발상으로 삼는 두 사람에게 ‘너는 그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어’라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가장 큰 도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가장 초보적인 사회적 체계인 상호작용(Interaktion)의 창발(Emergenz, 떠오름)에 관한 루만의 견해를 살펴보면서 두 입장 간의 차별성을 밝혀보겠다. 루만은 둘 이상의 인간 의식들이 만나 소통(Kommunikation)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 의식들과 전혀 다른 차원의 질서가 떠오른다고 보며, 이 질서는 결코 의식들로 환원되어 설명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은 상호작용을 비롯한 사회적 체계들의 주체가 아니라 그런 체계들의 자기생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환경의 일부일 뿐이다.

루만에 따르면, 의식들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암흑상자들(black boxes)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네가 한다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한다”(Luhmann, 1984: 166)는 ‘이중의 우연성(double contingency)’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렇듯 동어반복적이며 미규정적인 상황에서는 아무런 소통도 일어날 수 없다. 둘 중 하나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다’ 또는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통지하면서 먼저 규정을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통지 행위에 맞추어 상대방이 맞장구를 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이 성립하려면 발신자(타아)의 ‘정보’ 선택 및 ‘통지’ 선택뿐만 아니라 수신자(자아)의 ‘이해’라는 선택이 일어나야 한다.10) 그리고 이해를 확인하는 그 다음 소통이 연결될 때만 소통이 소통을 재생산하는 자기생산(Autopoiesis)이 가능하며 하나의 상호작용 체계가 창발한다.

그런데 이런 창발에 있어서 소통 관여자들의 의식들은 결코 ‘공동의’ 의식이나 상호주관성을 형성하지 못한다.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이중의 우연성 상황은 그대로 지속된다. 다만 의식의 사건이 아닌 소통의 사건인 정보, 통지, 이해의 선택 단계들에서 순수한 이중의 우연성이 ‘기대 구조’의 형성을 통해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으로 바뀔 뿐이다. 여기서 ‘기대’란 의식의 기대가 아니다. 기대 구조란 하나의 소통이 다른 소통들과 연결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 중 특정한 것들이 선호되거나 배제되는 ‘제약’을 뜻한다. 소통에 관여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대 구조에 맞춰 나가야 하는 의식은 상호작용의 주체가 아니라 그 환경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소통에서 지칭되는 인간이란 체계의 기대 구조에 따라 통지 행위가 귀속되는 동일성 지점인 ‘인격(Person)’이지 의식적 주체가 아니다.

앞선 설명을 읽으면서 루만 고유의 생경한 개념들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웠을 독자들을 위해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더라도 개념어를 대폭 줄여 좀 더 쉽게 설명해보겠다.

너는 생각한 것들 중 극히 일부만을 말할 뿐이다. 그리고 네가 말한 것들 중 극히 일부만을 나는 이해한다. 여기서 너의 의도(정보)와 너의 말(통지)을 구별하는 나의 이해가 너의 의식 속에 있는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나는 그런 이해에 기초하여 다시 너에게 내가 생각한 것들 중 극히 일부만을 말하며, 앞서와 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이 과정은 서로가 말한 것을 추리(이해)하면서 그 말 속에 들어있는 기대에 맞추어 나감(기대 구조 형성)을 통해서만 지속될 수 있다. 때로는 나의 의도와는 다른 말도 해야 하며 너의 말 속에 들어있는 오해를 묵인하기도 해야 한다. 말하는 과정에서 딴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생각의 일치에 우리가 도달해보자고 합의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일치를 확인할 길은 없으며 합의를 지키자는 약속은 소통의 실재일 뿐 의식의 실재는 아니다. 서로 약속을 지킨다고 해도 진심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진심이라고 각자 생각하거나 진심이라고 서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좀 더 복잡한 사회적 체계들인 조직이나 사회의 기능체계 차원에 이르면 의식들 각각의 실재로부터 자립적인 소통의 실재가 더욱 뚜렷이 떠오른다. 선생님이 낸 시험 문제를 학생들이 읽고 답안지를 쓴 후 이를 선생님이 읽고 채점하는 소통 과정을 떠올려보자. 수십 명의 학생들이 한 교실에 앉아 똑같은 문제를 풀고 있는 사건, 정답을 쓰기 위해 그들의 생각과는 무관한 글을 쓰고 있는 사건, 읽고 싶지 않은 답안까지 모두 읽고 규정에 따라 채점하고 있는 사건 등등, 이렇게 극히 비개연적인 사건들의 연쇄는 이 소통 과정에 관여하는 의식들을 주체로 보아서는 전혀 해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과정은 우/열로 코드화된 교육체계의 기대 구조, 그리고 교육의 기능을 충족하기 위해 역할을 분배하는 학교 제도 및 조직들의 기대 구조에 의해 진행된다. 그 선생님이나 그 학생들이 주체라서, 혹은 그들 사이에 상호주관성이 형성되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선생님 역할과 학생 역할은 다른 인격들로 대체될 수 있다.

물론 선생님과 학생들은 시험 과정을 주제로 한 메타소통(소통 과정에 관한 소통)을 진행하면서 기대 구조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기대 구조 형성에 있어서도 이들은 결코 주체가 아니며 상호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결정도 주체들 사이의 강제 없는 투명한 합의에 의해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리고 구조 변동이란 그 소통 체계 자체의 진화이며, 여기서 의식들은 그 체계의 환경에서 각각 다른 강도로 자극할 뿐이다.11)

이런 발상은 모든 담론에는 권력이 작용한다고 보며, 이러한 권력은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 없이 행사된다고 보는 푸코의 관점과 유사하다.12) 물론 루만의 입장에서 보면 푸코의 권력은 사회적 체계들의 공고화된 기대 구조들을 뜻한다. 개념의 인플레이션을 좋아하지 않는 루만은 ‘미시권력’과 같은 종류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권력을 이러한 기대 구조들에서 작용하는 범사회적 소통매체들 중 하나라고 본다.13) 루만에게 권력은 소통의 성공을 보장하는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매체들 중 물리적 폭력과 공생하는 매체, 그래서 정치체계의 독립분화(Ausdifferenzierung)를 가능하게 한 매체이다. 어쨌거나 푸코와 루만은 담론 원칙이 “강제 없는 합의”(Habermas, 1998: 205)를 보장해야 한다고 보는 하버마스의 담론관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렇듯 의식들의 (참여가 아닌) 관여와 자극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그로부터 자립적인 성격을 갖는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통찰은 이미 맑스에게서도 발견된다. 포이어바흐의 유적 존재와 슈티르너의 유일자에 맞서 맑스가 인간을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선집 1권: 186)로 규정했을 때, 여기서 인간은 개체의 신체나 의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인격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자립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탐구는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이어졌다. 경제적 사회구성체론을 정식화할 때 맑스는 생산관계들을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선집 2권: 477)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자본>의 2판 후기에서 자본가는 그 관계들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경제적 관계들의 인격화”(MEW 23: 16)로 파악된다. 또한 상품의 가치 형식이 펼쳐지는 과정은 순수한 이중의 우연성으로부터 벗어나 기대 구조를 형성하는 상품생산자들의 소통 과정, 즉 그들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인 사회적 체계가 떠오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치 실체’란 구체적 유용노동의 시간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물질적 실체가 아니며, 개인들이 생각한 대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심리적 실체도 아니다. 실재적 추상(reale Abstraktion)을 통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으로 측정되는 가치는 사회적 실체이다.

그런데 루카치의 물화 이론 이후 이러한 사회과학적 인격 이해나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재적 추상에 대한 파악은 자본주의 사회에만 고유한 대상성 형식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사회과학을 등한시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철학 전통의 인본주의적 사회 이해로 돌아가게 되었고, 하버마스는 주체철학의 극복 방향으로 상호주관성 패러다임을 택하게 된다.

물질적 기체나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자립적인 사회적 질서에 대한 맑스의 통찰은 뒤르켐, 파슨스 등 다소 보수주의적인 함의를 갖는 구조 중심의 사회학 전통14)에서 이어졌다. 루만은 그 자립성을 고정된 구조에서가 아니라 기능 우위의 역동적 구조를 갖는 체계 자체에서 찾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선행하는 사회학 전통을 잇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보수주의적 함의와 단절한다. 그는 기능 개념을 구조 유지를 위한 수행(performance)이 아니라 ‘문제와 문제 해결의 관계’로 정식화함으로써, 사회구조의 변화 가능성을 완전히 열어놓는 역동적 체계에 관한 이론을 수립했다. 물론 그 방향이 진보인지 퇴보인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등등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지만 적어도 현상태의 유지나 사회통합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의 보수와는 전혀 무관한 이론을 수립한다.







3. 소통이론 대 행위이론




다음으로 살펴볼 대립구도는 이론의 대상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과 관련된 것이다. 즉 체계로서의 사회이건 상호주관성으로서의 사회이건 사회를 이루는 요소들을 무엇으로 보는가라는 주제와 관련된 대립구도이다.

많은 이들이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을 ‘소통이론’이라고도 부르지만 정확히 말해 그의 이론은 책 제목 그대로 ‘소통적 행위 이론’이지 소통들을 요소로 삼는 이론이 아니다.15) 그는 베버로부터 이어지는 행위 중심 사회학의 전통에 서 있다. 그는 행위자인 주체가 객체세계와 관련을 맺는 행위를 ‘목적론적 행위’ 또는 ‘도구적 행위’로 간주하며, 주체와 주체가 서로 관계를 맺는 사회적 행위의 원본이 되는 행위를 상호이해 지향적인 ‘소통적 행위’라고 부른다. 그리고 주체가 다른 주체를 객체로 간주하는 경우를 도구적 행위와 마찬가지로 성공 지향적인 성격을 갖는 ‘전략적 행위’라고 부른다. 따라서 사회적 행위는 소통적 행위와 전략적 행위로 나뉘지만 여기서 소통적 행위가 본래적인 사회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소통적 행위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하버마스는 행위 중심 사회학의 전통적인 합리성 개념을 대체하는 합리성 개념을 마련한다. 저 혼자 행위하는 행위자의 합리성이 아니라 행위자들 사이에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으로부터 나오는 소통적 합리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는 행위이론의 전통에 서면서도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을 극복하는 하나의 길이라고 볼 수 있다.16)

행위 개념과 구조 개념을 기본 개념으로 삼아 펼쳐져온 사회학의 역사에서 소통을 사회적 체계들의 요소로 삼고 의미(Sinn)를 이 요소들을 접속시키는 매체로 간주한 루만의 발상은 그야말로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와 이를 유지하는 ‘기능’을 강조했기 때문에 객관적 사회학으로 분류되곤 하는 파슨스조차도 사회적 체계들의 요소를 ‘단위 행위(unit act)’로 삼았다는 점을 볼 때, 소통이론으로의 전환은 전적으로 루만의 고유한 업적이다.

루만에 따르면, 사회적 체계들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것도 행위들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사회를 비롯한 사회적 체계들을 정보, 통지, 이해라는 세 가지 선택에 의해서 성립하는 단위인 소통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봄으로써, 루만은 주관적 사회학도 객관적 사회학도 아닌 ‘소통적 사회학’ 또는 ‘사회적 사회학’을 확립했다. 이러한 전환에 따라 행위 개념의 위상은 부차화된다. 루만은 “소통은 자기구성의 요소적 단위이며, 행위는 사회적 체계들의 자기관찰과 자기기술의 요소적 단위”(Luhmann, 1984: 241)라고 본다.

사회적 체계들의 작동(Operation) 단위인 소통은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는 사건이다. 그래서 수많은 소통들이 다른 소통들과 연결되지 못한 채 잠재화된다. 루만이 “현행화(Aktualisierung)와 잠재화(Virtualisierung), 재현행화와 재잠재화의 단위”(Luhmann, 1984: 100)라고 정식화하는 ‘의미’는 현행적으로 연결된 소통들을 ‘형식들(Formen)’로 드러내는 동시에 연결되지 못하고 잠재화된 소통들이 다시 현행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환기시키는 매체이다.17)

이러한 연결을 통해 소통들이 현행화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행위들로 관찰될 필요가 있다.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정보, 통지, 이해의 세 가지 선택은 어떤 인격에게 귀속되는 ‘통지 행위’로 단순화되어 관찰될 때만 쉽게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단순화는 사회적 체계들마다 다르게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는 가족에게는 체험으로 관찰될 뿐이지만 법에서는 범법 행위로 관찰될 수 있다. 뇌물로 받은 돈의 출처가 되는 인격은 법에서는 관심사가 되지만 경제에서는 관심사가 되지 않는다. 이렇듯 행위나 행위자인 인격을 자명한 사회적 실체로 간주하지 않음으로써, 루만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소통들의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지는 행위 귀속 가능성 및 인격화 가능성을 설명한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하버마스가 사용하는 전략적 행위와 소통적 행위의 구별은 관찰자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친밀관계에서는 투명한 합의(상호이해지향적 행위)로 관찰되는 소통이 정치에서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야합(성공지향적 행위)으로 관찰될 수도 있다.







4. 사회학적 계몽으로서의 비판 대 철학적·규범적 척도 제시로서의 비판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를 대표하는 호르크하이머는 ‘전통이론’을 데카르트 이래 사실을 숭배하는 조류라고 규정하고, ‘비판이론’을 “이성적이며 보편성에 상응하는 사회 조직”(Horkheimer, 2005: 229)이라는 이념을 갖는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구별법을 이어받아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의 병리현상을 진단하고 이를 비판할 수 있는 척도를 제시하는 일을 비판이론의 핵심 과제로 삼는다. 그래서 현대적 사회비판의 과제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 식민지화에 맞서 생활세계의 소통적 합리성을 회복하는 일이 된다. 여기서 비판의 척도는 앞서 살펴본 행위 합리성의 구별에 의지하며, 이는 형식화용론이라는 언어철학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다. 또한 행위에 있어 반-사실적(counter-factual) 규범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규범적 척도이다. 물론 이러한 척도 제시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체계라는 사실성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사회학을 참조하는 것이긴 하지만, 하버마스에게 비판이란 기본적으로 ‘철학적 근거를 갖는 규범적 척도 제시’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비판적/옹호적이라는 구별법을 이용하여 루만의 체계이론을 “지배에 순응하는 문제설정”, “기성의 것의 존속 유지를 위한 옹호론”(Habermas, 1971: 170), “현대 사회의 복잡성 상승을 옹호하는 태도”(Habermas, 1988: 426) 등등으로 평가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기능을 구조 유지에 종속시키는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 체계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적절할 수 있어도 기능 개념을 “문제와 문제 해결의 관계”(Luhmann, 1984: 84)로 정식화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기능적 등가물을 찾을 수 있고 등가물들 간의 비교가 가능하다고 보는 루만의 등가기능주의 체계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부적절하다.18) 루만은 현존하는 구조는 언제든 비교를 통해 대체될 수 있다고 보며, 모든 것은 다르게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적 사실을 다각도로 탐구하는 일과 그 사실을 숭배하는 태도는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사실 탐구의 내용은 이데올로기 비판이나 지식사회학이 그렇게 해왔듯이 다른 관찰자들에 의해 비판적/옹호적, 진보적/보수적 등등의 구별법에 따라 평가받을 수 있지만, 탐구 자체가 이러한 구별법에 얽매여 출발할 필요는 없다.

루만은 사회학이 비판적/옹호적이라는 구별로부터 출발하면 현대 사회의 문제상황에 대한 관찰에 실패하게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부터 출발할 경우 대중매체가 현대 사회에 제공한 기회와 위험부담을 동시에 관찰하는 일을 방해한다. 대중매체가 현실을 왜곡한다는 비판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세계사회의 현실이란 오직 대중매체를 통해 산출되는 현실이라는 점을 간과하게 만든다. 왜곡된 현실이나 이를 비판하는 현실이나 모두 대중매체의 현실이다(루만, 2006: 106 이하 참조).

루만은 체계와 환경의 구별을 주도적 차이(Leitdifferenz, guiding difference)로 이용하는 관찰이 현대 사회의 문제상황을 가장 폭넓게 볼 수 있도록 한다고 본다. 그리고 ‘존재/비존재’, ‘진보/보수’, ‘여성/남성’, ‘친환경/반환경’ 등 다른 구별을 주도적 차이로 이용하는 관찰자들의 맹점을 밝힌다.19) 이는 단일맥락적 세계 관찰자의 관점에서 다맥락적 체계/환경 차이 관찰자의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세계를 하나의 맥락에서 두 개의 값으로만 구별하는 일차 등급 관찰자 관점에서 수많은 맥락들에서 각각 달라지는 체계/환경 구별들을 이용해 일차 등급 관찰을 다시 관찰하는 이차 등급 관찰자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20)

루만은 사회학의 이차 등급 관찰자 관점에서 다른 관찰자들의 맹점을 밝히는 작업을 ‘사회학적 계몽’이라고 부른다.21) 그런데 이러한 계몽은 계몽하는 자가 계몽되는 자에 대해 어떤 인식론적 우월성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계몽하는 관찰자 역시 다른 관찰자 관점에서 보면 일차 등급 관찰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루만은 자신의 사회학이 스스로를 “비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헤겔과 칸트가 어떻게 기술하는지를 하버마스가 관찰하고, 하버마스가 어떻게 기술하는지를 루만이 관찰한다는 식의 연쇄라는 의미에서 “삼차 등급의 입장, 그럼에도 원리적으로는 이차 등급 관찰 입장으로부터 구별되지 않는 (더 반성이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어서만 구별되는) 입장”(Luhmann, 1997: 1117)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반성의 연쇄는 진리를 보증하거나 동일성에 이르는 일이 아니라 차이를 산출할 뿐이다. 비판으로서의 계몽은 계속 다른 합리성들을 산출하는 일이지 세계의 진리에 도달하는 목적론적 과정이 아니다. 하나의 계몽이 갖는 설득력은 그것에 다른 소통들이 연결되어 가는 과정, 즉 개연적으로(그럴듯하게) 되는 과정에 의해서만 성립한다. 비판을 통한 변화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임의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변화는 비개연적인 것이 개연적으로 되는 과정이며, 그 조건은 다음 소통에 있어 마치 필연적인 듯 느껴지는 구조, 즉 앞선 비개연적 선택들이 형성한 기대의 구조들이다.

루만의 사회학적 계몽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비판(Kritik)’이다. 비판이라는 단어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쓰는 방식보다 폭넓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kritike는 ‘판단하다’, ‘판결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를 근세에 철학적 개념으로 정착시킨 칸트의 이성 비판에서 비판은 이성의 ‘한계를 긋는 일’, 그 ‘월권을 지적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지 더 좋은 이성을 척도로 하여 더 나쁜 이성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었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역시 비판의 척도가 되는 이상적 사회를 기준으로 삼아 현실을 비판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정치경제학의 원리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를 서술함(Darstellung)을 통해 정치경제학의 한계와 자본주의 경제의 한계를 긋는 일이었다.22) 공황은 그러한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이지 공황 자체가 비판의 규범적 척도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루만의 체계이론은 하버마스의 철학적·규범적 비판과는 다른 의미에서 ‘비판적’이며, 여기서 비판이란 사회학적 계몽 혹은 과학적 비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다른 관찰자들의 구별이 갖는 맹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자신의 맹점에 대한 계몽도 감수해야 하는 끊임없는 비판의 연쇄이다. 따라서 더 나아간 비판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척도를 철학적으로 근거지을 수도 규범적으로 정당화할 수도 없는 비판이다.







5. 차이이론 대 동일성 논리




이런 면에서 보자면 루만의 비판과 하버마스의 비판은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 대표주자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차별성을 반영하고 있다.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공동 작업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성의 자기비판과 계몽에 대한 계몽을 강조하는 데서 그친다. 반면 그에 이은 단독 작업에서 호르크하이머는 주관적이며 도구적인 이성에 맞서기 위해 비판은 객관적 이성의 반동적 위험성을 알면서도 “객관적 이성을 강조하면서 수행”(호르크하이머, 2006: 216)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여기서 호르크하이머는 ‘객관적’의 뜻을 ‘상호주관적’에 가깝게 쓰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의 소통적 이성 이론은 호르크하이머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킨 면이 있다. 비판의 척도가 되는 이성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성을 구별하는 이성 이원론, 그래서 비판 척도의 동일성(identity)이 전자를 통해 확보되는 방식의 비판을 호르크하이머와 하버마스는 공유하고 있다.

반면 아도르노는 <부정적 변증법 Negative Dialektik>에서 진리, 화해, 구원(Erlösung), 객체의 매개(Vermittelung) 등에 관해 말하긴 하지만, 이는 끊임없는 부정 혹은 비판의 계기일 뿐이다. 비판하는 이성의 완성, 즉 주체와 객체의 매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며, 이것의 완성을 꿈꾸는 일은 또 다른 동일성 철학일 뿐이다. 이는 주체와 주체의 매개인 상호주관성을 이성으로 실체화하는 것 역시 동일성 철학의 반복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Identität der Identität und Nichtidentität)”(Hegel, 1986: 74)을 핵심 명제로 하는 헤겔의 동일성 논리에 맞서 아도르노는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을 개념들을 통해 여는 것이되,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을 개념들과 동일시하지 않는”(아도르노, 1999: 63-64) 사유, 즉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비동일성’을 부정적 변증법의 핵심으로 삼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차이들을 산출할 수밖에 없는 아도르노의 비판이론 노선은 합의를 지향하는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노선과는 상당한 차별성을 갖는다.

부정적 변증법의 비동일성 논리는 오히려 루만에게로 이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23) 루만은 체계(동일성)와 환경(비동일성)의 차이(비동일성)를 출발점으로 삼으며,24) 이러한 차이들이 각 체계마다 다르게 일어난다고 본다. 그는 헤겔이 전통적 존재론의 전체/부분 도식을 ‘특수자 속의 보편자’라는 발상을 통해 보편/특수 도식으로 전환시켰다고 본다.

헤겔의 정신철학에서 살아있는 실체이자 참된 주체인 정신은 “자기 자신을 통해 자기가 다르게 됨이라는 매개운동(Vermittelung)”(Hegel, 2006: 14)이다. 여기서 다르게 됨이란 자연의 생성을 뜻한다. 따라서 정신은 자연과 구별되는 특수자인 동시에 자연과의 구별을 ‘자기 안에서의 반성(Reflexion in sich)’으로 고양시키는 보편자이기도 하다. 절대자를 향한 운동 속에서 정신이라는 동일성의 외부(자연, 비동일성)는 제거된다.

전체/부분 도식과 그 변형인 보편/특수 도식의 동일성 논리에 맞서는 체계/환경 차이의 이론에 따르면, 자기지시적 체계들은 체계와 환경의 구별을 체계 안에 재도입(re-entry)함으로써 자기관찰과 타자관찰을 할 수 있다. 체계는 ‘자기 안에서의 구별’을 이용해 환경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관찰된 자기’와 ‘관찰된 타자’는 작동상의 자기와 작동상의 타자가 아니다. 모든 관찰은 자신의 작동(Operation)인 체계/환경 구별 그 자체를 관찰할 수는 없다. 구별 자체는 관찰의 맹점이다. 그래서 관찰되는 동일성으로서의 체계와 관찰되는 비동일성으로서의 환경은 비가시적인 작동, 즉 차이에 의존한다. 이런 차이이론에 따르면, 헤겔에게서 자연을 매개하는 정신의 운동이란 결국 비(非)정신과의 차이에 의존해야 하며 이 차이를 결코 극복할 수 없다.25)

이런 차이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주체와 다른 주체들의 차이는 결코 상호주관성이라는 동일성에 이를 수 없다. 상호주관적 합의란 합의와 불일치의 구별을 통해 각 주체 안에 다르게 재도입되는 합의(동일성)이다. 따라서 이러한 동일성은 합의에 대한 각 주체의 다른 이해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상호이해(Verständigung)라고 볼 수 없다. 합의라는 재현 또는 표상은 각 주체 안에서 다르게 이루어지는 작동(차이)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계 통합을 넘어서 생활세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통합 역시 불가능하며, “사회가 궁극에는 소통적 행위를 통해 통합되어야 한다”(Habermas, 1998: 43)는 목표는 동일성 철학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 관념론과 루카치의 주체-객체 동일성 테제는 상호주관성 이론에서 주체-주체 동일성 테제로 대체된다고 볼 수 있다.

동일성 철학과 관련해 소결론을 내려 보면 다음과 같다.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의 1세대 안에는 헤겔 이후 독일 철학에서 계속 반복되어온26) 동일성 논리와 차이이론 사이의 대립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2세대에서는 동일성 논리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 반면 부정적 변증법이 함축하고 있었던 차이이론은 오히려 루만을 통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27)







6. 맺음말




이 글은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이다. 우선 이 글에서 밝힌 것 말고도 그들 사이의 대립지점이 엄청나게 많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해이다. 필자는 학위논문을 통해 두 사람의 언어 이해를 비롯한 매체이론상의 대립지점을 이미 분석한 바 있으며, 두 사람의 인권이론을 비교하는 작업도 준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다룬 대립지점들은 두 이론의 명칭 자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점들이기 때문에 20세기 후반 독일 사회이론의 대립구도를 이해함에 있어 핵심적인 지점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이해인 또 다른 이유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이루어진 하버마스 중심의 비교와 달리 이 글은 루만 중심의 비교이기 때문이다. 대립하는 두 이론을 비교할 때 전적으로 공정한 비교란 불가능하다. 비교 자체도 이론이기 때문에 비교는 어떤 이론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필자는 체계이론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대 입장을 왜곡하지 않기 위한 노력은 충분히 기울였다고 판단한다.

지금까지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가 이해되어온 방식을 상당히 바꾸어보려는 이러한 시도가 한국에서 두 사상가에 대한 연구, 특히 부족한 루만에 대한 연구가 진척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비록 루만 자신은 사회학적 계몽에 머물러 있었지만, 우리는 열린 틀을 가진 이 과학적 자산을 실천적 사회비판과 대안사회의 전망 제시로도 연결할 수 있다. 필자가 볼 때 한국의 좌파 담론은 현재 ‘과학 없는 비판’과 ‘사회학 없는 정치철학’의 과잉 상태이며, 과학의 공백을 여전히 19세기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메우고 있다. 다시 사회구성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혹은 복잡한 세계사회의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일이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루만의 체계이론적 사회학은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해줄 수 있는 유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각주

 

 


1) 이들의 주요 저작 곳곳에는 직접 상대방을 거명하지는 않더라도 체계이론의 전제나 비판이론의 전제에 대한 반박이 깔려있다. 1980년대 이후 하버마스가 루만을 직접 겨냥해 비판하고 있는 대표적인 글로는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의 열두 번째 강의와 부언 설명이 있다. 루만이 하버마스를 직접 겨냥해 비판하고 있는 글로는 "Ich sehe was, was Du nicht siehst 나는 네가 보지 않는 것을 본다", Soziologische Aufklärung 5권, "Am Ende der kritischen Soziologie 비판적 사회학의 종말", Zeitschrift für Soziologie 20호 등이 있다.

 

2) 루만은 진리를 비진리와의 구별을 이용하되 진리라는 긍정적인 값을 선호하도록 만드는 이원적 코드를 갖는 매체, 그래서 학적 소통들(Kommunikationen)이 진리값을 갖는 소통들을 수용하기 쉽게 만드는 ‘성공매체’라고 본다. 그런데 권력, 법, 화폐, 진리, 사랑 등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 매체들’이라고도 불리는 성공매체들은 그 부정적인 값, 예를 들어 비진리에 대한 선호를 봉쇄할 수 없다. 그리고 진리는 진리 자체가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를 확정할 수 없는 역설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이 역설은 진리값과 비진리값을 할당하는 과학체계의 역사적 프로그램들에 의지해 펼쳐진다. 하지만 역설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펼침을 통해 은폐될 뿐이며, 새로운 프로그램들과의 비교에 의해 다시 가시화된다. 더 상세한 설명은 정성훈, 2009: 141 이하 참조.

 

3) 파슨스와의 차별성 및 아도르노와의 유사성에 관해서는 4와 5에서 다룰 것이다.

4) “자신을 ‘비판적’으로 이해한다면, 사회학이 반드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휘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 ‘비판적’을 취한다면, 이것이 우선 뜻하는 바는 사회학이 이차 등급 관찰자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Luhmann, 1997: 1119) 루만의 사회학적 계몽과 이차 등급 관찰에 관해서는 4에서 다룰 것이다.

 

 

5) ‘기능적 분화’란 사회가 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맥락에 따라 정치, 경제, 법, 과학 등으로 분화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밖의 다른 분화 형식으로는 부족, 혈연 등으로 나누어지는 ‘분절적 분화’, 도시와 농촌 또는 제1세계와 제3세계 등으로 나누어지는 ‘중심/주변 분화’, 그리고 신분들에 따라 나누어지는 ‘계층적 분화’ 등이 있다. 루만의 체계분화 이론에 관해서는 크네어/낫세이, 2008: 150 이하 및 정성훈, 2009: 171 이하 참조.

 

6) 포함과 배제의 구별이라는 메타코드에 관해서는 정성훈, 2009: 215 이하 참조. 기능적 분화라는 현대성을 방어하는 법체계의 침식 경향에 대한 진단은 Luhmann, 1993: 571 이하 참조.

 

7) 루만의 층위별 체계 분류에 관해서는 Luhmann, 1984: 16의 표를 참조. 정성훈, 2009: 9 이하의 설명도 참조.



8) 조만간 한국어 번역본이 나올 <열정으로서의 사랑 Liebe als Passion>은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이 얼마나 폭넓은 사회적 관계들을 다룰 수 있는지를 입증하는 사례이다.

 


9) 루만은 세포, 유기체, 신경체계 등의 생명 체계들, 심리적 체계들(의식들), 사회적 체계들, 그리고 사회의 분화된 기능체계들은 모두 그 환경들에 대해서 작동상의 닫힘(operational closure)을 통해 인지적으로 열려 있는(cognitive openness) 체계들이라고 본다. 여기서 작동상 닫혀 있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의식작용들은 의식작용들에만 준거(자기지시, Selbstreferenz)하지 의식 바깥의 실재와 결코 직접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의식은 의식(자기)와 환경(타자)의 구별을 의식 안에 재도입(re-entry)함을 통해서만 인지할 수 있다. 이런 체계들을 부르는 명칭이 자기생산(Autopoiesis)이다. 자기지시적이며 자기생산적인 체계와 모나드적 주체의 결정적인 차별성은 전자는 자기-원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가 아니라는 점, 오직 체계와 환경의 구별이라는 작동에 의해서만 - 지시된 자기밖에 볼 수 없다 하여도 자기지시란 지시되지 않은 타자와의 구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 가능하다는 점이다. 체계 혹은 동일성은 스스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환경 혹은 비동일성과의 ‘차이’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10) 루만은 소통이 타아(他我, alter ego)와 자아(ego)가 관여하는 정보, 통지, 이해의 세 가지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생각했다고(정보)뿐만 아니라 말하거나 썼다고(통지) 하더라도 소통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소통 개념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정성훈, 2009: 84 이하 및 크네어/낫세이, 2008: 114 이하 참조.

 

11) 루만을 비판하는 논자들은 간혹 루만이 초기의 논문에서 썼던 말인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변화를 거부한다고 평가하거나 실천의 의의를 무시한다고 평가하곤 한다. 필자는 이 말에서 ‘나’란 의식으로서의 나라고 본다. 따라서 이 말은 기원도 필연성도 없는 우연적인 기대 구조의 변경 가능성은 무한하게 열려 있다는 것에 대한 강조, 그리고 그런 변화의 인간 주체는 없다는 점에 대한 강조라고 본다. 그리고 그의 인격 개념과 행위 개념에 비추어본다면, ‘내가 변화시켰다’ 또는 ‘우리가 바꾸었다’라는 말에서 ‘나’나 ‘우리’는 소통의 진화를 특정한 인격이나 인격들에게 행위로 귀속시키는 관찰의 단위일 뿐이다.

 

12) 푸코의 권력 개념에 관한 간단한 설명으로는 양운덕, <미셸 푸코>, 13쪽 이하 참조.

 

 

 

13) 푸코, 부르디외, 네그리 등은 권력, 자본, 계급 등의 개념을 지나치게 넓게 사용함으로써 그 개념들이 가지는 ‘구별과 지칭’(루만의 ‘관찰’)의 능력, 혹은 ‘규정된 부정’(아도르노)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14) 기든스는 이를 행위 중심의 ‘주관적 사회학’과 대비해 ‘객관적 사회학’이라고 부른다. 기든스, 2006: 25 참조. 하지만 사회적 대상을 다루는 이론이 의식철학의 주체/객체 도식을 이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사회적 질서의 자립성을 강조하는 맑스나 루만의 사회학에 굳이 이런 식의 수식어를 붙이라고 한다면 ‘사회적 사회학’이 적합할 것이다.

 

15) 그래서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라는 책제목을 ‘의사소통행위이론’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의사소통’이 곧 ‘행위’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도구적 행위, 전략적 행위, 극적 행위 등과 구별되는 행위라는 점이 강조되기 위해서는 ‘소통적 행위 이론’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16) 행위자의 관행적(practical) 의식과 재귀적(reflexive) 행위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행위자들의 구조 형성 능력을 강조하는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은 행위이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주관적 사회학을 극복하려는 또 다른 시도이다. 구조화 이론에 관해서는 기든스, 2006 참조. 구조화 이론과 체계이론을 비교한 것으로는 정성훈, 2009: 100-109 참조.

 

17) 형식들은 “요소들 사이의 긴밀한 접속”이며, 매체들은 “요소들 사이의 느슨한 접속”(Luhmann, 1997: 196)이다.

 

18)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와 루만의 등가기능주의의 차별성에 관한 더 상세한 설명은 크네어/낫세이, 2008: 64 이하 및 정성훈, 2009: 36 이하 참조.

 

19) 다맥락적인 체계/환경 차이를 주도적 차이로 이용하는 이론이 다른 주도적 차이를 이용하는 이론보다 우월한가의 문제는 미리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론이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출발점으로서의 차이는 모두 우연적인 것이며 그 차이가 가질 수 있는 설명력의 우위는 오직 그로부터 연결되는 연구의 생산성과 적합성에 의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따라서 체계/환경 차이의 우월성은 미리 주어지는 것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 우월성은 경제, 과학, 법, 예술, 종교, 정치, 대중매체, 저항운동, 조직, 친밀관계 등에 이르는 루만의 방대한 연구 성과와 그것이 갖는 설득력에 의해서만 입증된다.

 

20) 루만은 이런 발상을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이가(二價) 논리학을 비판하면서 다가(多價) 논리학을 시도한 고트하르트 귄터(Gotthard Günther)로부터 가져왔다.

 

21) 루만은 자신이 쓴 논문들을 주제별로 모아 1970년부터 1995년까지 여섯 권의 <사회학적 계몽> 시리즈를 펴낸 바 있다.

 

22) 맑스는 라쌀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정치경제학 비판 기획을 “서술을 통한 비판”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23) 필자는 논리 이외의 측면에서 아도르노와 루만을 비교하는 작업은 본격적으로 착수하지 못했다. 논리상의 유사성에 관한 더 상세한 서술은 정성훈, 2009: 259 이하 참조. 사회학의 측면에서 아도르노와 루만의 공통점과 차별성을 밝힌 독일의 연구로는 Breuer: 1995가 있다.

 

24) <사회적 체계들 Soziale Systeme>의 ‘도입’에서 루만은 체계이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이 “동일성과 차이의 차이(die Differenz von Identität und Differenz)”임을 뚜렷이 밝히면서 이것이 변증법 전통과 갈라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부정적 변증법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Luhmann, 1984: 26 및 각주 19 참조.

 

25) 헤겔의 보편/특수 도식을 차이이론의 관점에서 더 상세하게 비판한 글로는 정성훈, 2008: 385 이하 참조.

 

26) 헤겔의 동일성 철학에 대한 비판은 포이어바흐로부터 시작되며, 이는 슈티르너와 맑스를 거치면서 급진화된다. 물론 이들은 한편에서는 동일성 논리를 비판하면서 포이어바흐의 유적 본질(Gattungswesen) 개념이 보여주듯이 다른 방식으로 동일성 논리를 반복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논문을 통해 다룰 것이다.

 


27) 그래서 1968년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도르노가 더 이상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자리를 루만이 이어받은 일은 의미심장하다. 당시 루만이 진행한 세미나가 사랑의 사회학이었고, 여기서 작성된 습작이 발전되어 1982년 <열정으로서의 사랑>으로 출간된다. 이 세미나를 계기로 자극을 받은 하버마스는 독일 사회학 대회에 루만을 불러내어 두 사람의 첫 번째 논쟁이 시작된다. 루만의 제자인 디르크 백커(Dirk Baecker)가 인터넷에 올린 영문 소개글(http://projects.isss.org/Main/NiklasLuhmannByDirkBaecker)을 참조하라. 물론 프랑크푸르트에서 루만의 세미나는 일회로 끝났고 빌레펠트에서 교수직을 얻어서 빌레펠트학파가 시작된다. 또한 아직까지 필자는 루만이 아도르노와 자신의 공통점을 언급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가 프랑크푸르트학파 내지 비판이론을 언급할 때 그것은 항상 하버마스를 대표로 하는 입장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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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칼, 1991,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권>, 박종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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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hmann, Niklas, 1997,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Suhrkamp.

Marx, Karl, Das Kapital, MEW 23권, Dietz. 

[출처]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작성자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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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8-0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더위에도 열심히 공부 중이시군요! ^^

바라 2009-08-05 23:35   좋아요 0 | URL
아 공부라긴 민망하구요; 이 글은 진보평론 여름호에 실린건데 정성훈 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http://www.homopop.org/log/index.php?page=3 

신자유주의 분석가로서의 푸코:
미셀 푸코의 통치성과 반정치적 정치의 회로 - 서동진


 


권력의 시인이라는 푸코의 초상

최근 우리 눈에 부쩍 자주 띄는 푸코의 초상이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 나아가 신자유주의 분석가로서의 미셀 푸코이다. 그런데 어딘지 낯설게 들리고 또 얼마간 느닷없기까지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푸코는 실존의 미학자로서의 서정적인 어느 철학자의 모습에 가깝다. 혹은 훈육사회와 미시권력의 세계를 고발한 그 어느 자유주의자보다 더 극한적인 자유주의자의 모습을 한 푸코야 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푸코의 형상에 훨씬 근접해 보인다. 그런 우리에게 자유주의 분석가로서의 푸코, 나아가 그것의 현재 형태인 신자유주의를 면밀하게 탐색하고 그것을 우회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곤구하는 푸코는, 낯설고 또 어쩐지 어색하여 보이기까지 할 수 있다.


more..
less.. 그렇지만 푸코가 1970년대 후반에 진행했던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세미나들이 거의 공개되고 또 출판이 이뤄지면서 우리는 그 누구보다 섬세하고 또 집요하게 자유주의를 분석했던 이론가로서의 푸코와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때마침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상대하고 비판할 것인가가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화급한 주제로 부상한 때이기도 하다. 푸코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내가 푸코의 자유주의 세미나 3부작이라고 부를 세미나를 연속적으로 진행하였고, 이 세미나에서 이뤄진 강의와 대화가 묶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영토, 안전, 인구󰡕, 그리고 󰡔생정치의 탄생󰡕이란 제목으로 공간되었다. 이는 󰡔감시와 처벌󰡕(1975), 󰡔성의 역사1󰡕(1976)을 출판하고 난 이후 오랜 침묵 끝에 그의 때 이른 죽음을 전후하여 나온 󰡔성의 역사󰡕 2, 3권(1984) 사이에, 과연 푸코의 관심과 작업은 무엇이었는지 헤아리는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지배(domination)의 분석’으로부터 갑자기 윤리의 문제, 그 스스로 즐겨 사용한 표현을 빌자면 “자기의 돌봄”이란 “주체성의 계보학”에 대한 분석으로 이론적 관심을 전환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푸코를 둘러싸고 흔히 퍼져있는 미신적인 혐의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혐의란 푸코가 모든 곳에 권력이 있다는 현혹적인 자신의 주장으로부터 반드시 따라 나올 수밖에 없는 수행적인(performative) 효과라고 할 그 것, 즉 ‘권력의 바깥’은 없다, 누구도 그 곳에 있을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인 결론으로 인해 그 스스로 궁지에 다다르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극히 퇴행적이고 심지어 유치해보이기까지 하는 ‘실존의 미학’이란 주장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소개된 세미나 일부 자료와 인터뷰, 강의를 제외하면 오디오 테이프 형태로만 존재하던 푸코의 세미나가 마침내 출판되면서 이런 혐의는 거의 푸코와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 푸코가 진행했던 세미나의 내용 가운데 일부와 그의 강연, 인터뷰 등과 그의 세미나에 참여했던 제자들의 연구 프로젝트가 영어권 독자들에 소개되기도 하고 또 책으로 묶이기도 하였다. 특히 푸코의 강의 요약 가운데 일부인 “통치성”을 비롯한 몇 편의 논문과 제자들의 글 가운데 일부가 영국의 포스트 알튀세르주의자들의 저널이었던 <이데올로기와 의식 Ideology and Consciousness> 그리고 <경제와 사회 Economy and Society>를 통해 영어권에 잇달아 소개되고 그것이 다시 묶여 책으로 출간되었다. 또 이를 주도했던 영국의 몇몇 이론가들은 “통치성 governmentality”이란 개념에서 비롯된 새로운 분석적 접근을 하나의 이론적 학파로까지 조직하게 되면서, 훗날 다수 경멸적인 이름이라 할 수 있을, ‘통치성 학파’로 불리게 된다.


통치, 통치성 그리고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이성

통치성이란 개념이 푸코가 진행했던 자유주의의 형성과 변모를 이해할 수 있는 주요한 개념적 탐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완결적이고 정합적인 ‘이론’으로 규정하기엔 억지스러운 점이 있다 할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통치성은 외려 푸코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근대 국가의 계보학”적 분석을 위해 도입한 잠정적인 방법 혹은 그의 접근 방식을 요약하는 이론적인 도구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물론 푸코 스스로 언급하듯이 그가 착수했던 이론적인 기획은 통치, 통치성이란 개념을 중심으로 현저한 변화를 겪는다. 그것은 󰡔감시와 처벌󰡕을 출간하고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란 이름으로 묶인 세미나가 진행될 때까지 푸코가 지속했던 권력 분석에 일종의 전환이 이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즈음까지 푸코의 권력에 대한 접근은 권력에 관한 사법-정치적 담론 혹은 권력에 관한 주권적 모델로부터 벗어나려는 끈질긴 노력이라 볼 수 있다. 󰡔감시와 처벌󰡕을 전후하여 푸코가 전개한 권력에 대한 ‘바깥으로부터의 사고’라는 접근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세미나를 전후하여 이른바 “니체의 가설(Nietzsche's hypothesis)” 혹은 정복과 전쟁의 모델이란 관점으로 모아진다. 푸코가 “역사-정치적 담론”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런 관점은, 주권(혹은 권리)과 법이란 관점에서 권력을 인식하는 자유주의적 정치철학(“리바이어던의 모델”)과도 거리를 두는 한편 권력의 기원적인 중심으로서 경제를 가정하고 계급지배란 관점에서 사고하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를 푸코는 “왕의 목을 자르기”라는 유명한 경구로 푸코가 표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의 왕이란 봉건적 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군주이든 아니면 사법적으로 권리의 평등을 보장받은 근대적 시민이든 법률을 통해 코드화되고 또한 그를 통해 보장되거나 제재받는 권리의 주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왕이란 사법-정치적 담론을 압축하는, 다시 말해 권력을 사고하기 위해 언제나 선험적으로 가정되는 권력의 모델이자 정치적 주체의 이상(理想)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푸코는 기울 권력(disciplinary power)과 “정상화(규격화) 사회(society of normalization)”란 모델에 따라 사법-정치적 담론이 가정하는 주권적인 권력/주체의 모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하였다. 그는 18세기를 전후하여 서유럽사회는 시민의 권리를 성문화, 조직화하는 법률적인 코드와 사회적 신체를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훈육 메커니즘을 결합사킨, “주권적 권력”과 “훈육적 권력의 복합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즈음 푸코의 입장은 렘케같은 이가 지적하듯이 사법-정치적 담론 혹은 그에 바탕한 권력 모델을 단순히 뒤집은 것, 혹은 그것의 반사적인 역상 속에서 권력을 사고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통치(성)이란 관점에 서면서 푸코는 이런 모델과도 결별할 수 있는 이론적 전환을 이룰 수 있게 된다.
통치(government)란 개념은 자유주의의 등장을 이해하는 데 관건적일 뿐 아니라 푸코의 권력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통치는 앞서 간단히 말하였듯이 사법-정치적 담론에 속박된 권력론으로부터 거리를 둘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였던 훈육 권력이란 담론으로부터도 역시 벗어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통치란 개념은 자유주의의 역사적 변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 통치란 권력의 전략적 게임과 지배(domincation)이란 권력의 작용을 둘러싼 성층적인 형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아울러 사법적-주권적 권력과 훈육 권력과 경합하거나 혹은 그것을 흡수하고 변형시키면서 18세기를 전후하여 서유럽 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자유주의적 지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의의를 차지한다. 푸코는 근대 사회에서 권력이 작용하는 방식을 세 가지의 성층적인 형태의 도식을 통해 설명하는데, 이 때 기존에 미시권력이라고 불렸던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권력의 작용을 전략적 게임이라고 풀이한다. 개인이 관계 맺는 자기 자신이든 타인(들)이든, 아니면 기관, 제도, 기업같은 것이든 그 무엇이든 인간관계 안에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 힘의 관계를 푸코는 전략적 게임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것이 상대적으로 경직되고 또 고정되면서 관계를 맺고 있는 항들 사이에 비가역적인 관계가 수립될 때 푸코는 이를 ‘지배’라고 부르고 이것이 우리가 흔히 권력이라 일컫는 그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푸코는 ‘통치’(혹은 통치 테크놀로지)를 이 사이에 놓는다.
그렇다면 통치란 무엇일까. 여기에서 통치성이란 개념은 통치가 차지하는 푸코의 권력 분석 안에서의 위치를 가늠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의 역사적 특성을 분별하는 데 결적인 역할을 한다. 통치성(governmentality)이란 개념은 푸코 스스로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그것은 그 용어 자체가 보여주듯이 통치(govern/gourvener)와 사고양식(mentality/mentalite)란 두 가지 낱말을 결합한 것이다. 굳이 요약하자면 특정한 사고양식을 통한 통치를 가리킬 것이고 푸코 자신의 간결한 정의를 쫓자면 행동방식 혹은 행실에 대한 통솔(conduct of conduct)을 통한 권력의 작용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이 용어는 정치 이성(political reason), 정치적 합리성(political rationality) 혹은 통치 합리성(governmental rationality)같은 개념들과 맞바꿔 쓸 수 있고 푸코는 자신의 강의와 글에서 이러한 개념들을 혼용하여 쓰고 있기도 하다.
통치성이란 개념을 통해 푸코는 크게 두 가지의 차원을 겹쳐놓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화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지식과 권력은 권력이 행사되고 작용하는 표면, 즉 그 대상을 구성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장치, 절차, 계산의 형식 등을 두루 망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매우 특정하면서도 복합적인 형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 과정, 분석과 반성, 계산과 전술들로 구성되는 전체(ensemble). 이러한 권력의 표적은 인구이며, 그 중요한 지식의 형태는 정치경제학이고 또한 그 본질적인 기술적인 수단은 안전기구들이다.”라고 푸코가 말할 때 가리키는 것이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푸코는 근대 사회의 통치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테크놀로지로서 안전기구(apparus of security), 그것이 작용하는 대상으로서 생물학적인 종으로서 다시 말해 생명을 가지고 자신의 욕망(desire)을 실현하고 보장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human species) 즉 인구, 그리고 이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인 지식의 형태로서 정치경제학을 꼽는다.
다음으로 우리는 통치성을 주체화의 원리, 혹은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윤리, 개인이 자신을 권력에 예속된 주체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변형하는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주체로서 살아가도록 이끄는 힘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을 푸코는 통치하다는 것(governing)이 엄밀하게 가리키는 바로 정의하면서 상당히 꼼꼼하게 분석을 시도한다. 이것은 바로 히브리적인 전통에서 비롯되어 중세의 기독교적 서구를 경유하고 다시 근대 국가에서 통치란 형태로 변용된, 사목권력(pastoral power)이다. 이는 군주와 신민이란 관계를 목자-양떼란 관계와 결합시키면서 개인, 가족, 공동체를 비롯한 다양한 삶의 현실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갈 것인지를 배려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특히 푸코는 사목권력이 훗날 국가에 의한 통치, 그가 경제적 통치, 정치적 통치, 혹은 줄여 그냥 통치라고 부를, 국가를 통한 권력의 작용을 설명하는데 결정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도시, 영토, 주권’같은 지고한 대상이 아니라 다수적 삶, 그가 ‘전부이면서 각자(all and each/omnes et singulatim)’라고 부르는 대상을 상정하고 또 그에 적합한 지식과 기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점에서 푸코가 통치성을 통치 합리성 혹은 정치 이성으로서 분절할 수 있도록 하는 이론적 계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이 거칠게 말해 근대 국가의 맹아라고 할 수 있는 16세기를 전후하여 서유럽에서 형성된 절대주의 국가에서의 “국가이성(raison d'Etat/ratio status/the reason of state)”과 그것을 실현하는 장치로서 “행정관리(police)”에 대한 분석이다. 국가이성이란 기존에 국가가 권력을 행사할 때 의존하던 추상적이고 선험적인 원리나 이상(이를테면 천국의 지복, 내세에서의 구원 등)과 단절하여 국가가 자기의식적으로 자신의 힘이 작용하는 대상을 분별, 조사, 관찰, 반성하면서 어떻게 작동할지를 정의하고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권력 행사 방식 혹은 그것을 구체화하는 과학, 지식을 말한다. 다시 말해 마침내 국가는 엄밀한 의미에서 추론(reasoning)을 통해 혹은 합리성(rationality)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이는 중세의 봉건적 군주나 초기 절대주의 국가가 상정했던 목표와 그것을 실현하려는 기술, 이를테면 영토와 부(wealth)의 관리를 위해 행사하던 테크놀로지와는 전연 다른 새로운 것을 고안한다. 이것이 행정, 관리, 국책(國策) 등으로 부를 수 있을 폴리스(police)라고 할 수 있다. 시민이면서 동시에 인구인 대상을 지배하기 위해 발달한 폴리스에 관한 과학(Polizeiwissenshaft)은 푸코가 꾸준히 강조하듯이 전체화하면서(totalizing)하면서 동시에 개인화하는(individualizing) 권력으로서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한다. 건강, 장수, 안전, 행복 등을 비롯한 다양한 목표를 위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즉 인구를 돌보는 국가는 바로 행정관리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푸코는 국가이성이 한계에 부딪치며 18세기를 전후하여 새로운 통치성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훗날 자유주의라고 부르게 될 정치적 합리성으로의 전환이 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국가이성이 가진 목표, 즉 국가와 그것의 부의 증대를 “사회”와 그것의 경제적 진보라는 목표로 대체하는 새로운 통치성이라 할 수 있다. 푸코는 이런 통치성의 등장을 선도하고 조직한 것이 중농주의자로 대표되는 정치경제학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푸코는 “국가이성은 새롭게 부상하던 영역인 경제에 의해 개조되었으며, 경제 이성(economic reason)은 국가이성을 대체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합리성에 새로운 내용과 새로운 형태를 제공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정치경제학을 통해 마련된 통치성의 핵심적인 특성을 푸코는 크게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자연스러움(naturalness)”의 대상으로서 “사회”가 고안되고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가정인 사회, 시민사회 대 국가란 이분법이 형성된 것이다. 이제 국가는 시민사회를 책임지고 관리해야 하며 국가는 또한 그 시민사회가 만들어내는 움직임, 중상주의가 상정하는 교환(exchange)이란 관점에서 파악된 부가 아니라 생산하고 소비하며 그를 통해 구체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이루는 인구들의 삶, 즉 사회를 상대하게 된다. 두 번째로 이러한 자연스러움으로서의 사회라는 가정으로부터 통치성의 핵심적 구성요소인 지식과 권력의 관계 역시 변용되지 않을 수 없음을 푸코는 지적한다. 이제 좋은 통치를 위해 국가는 국가이성에서와 같이 외교적인 계산이나 역학관계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자연적 대상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으로부터 과학적 지식을 뽑아내게 된다. 그리하여 통치 기예와 지식은 세부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세 번째의 것, 인구란 관점에서의 혁신적인 변화가 이뤄지게 된다. 국가이성이 인구란 관념을 끌어들이고 이를 통치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순전히 양적 다수, 머리 숫자로만 고려된 것이었다. 국가이성에 이끌렸던 중상주의적 국가에서 관심은 군주의 부를 좌우하는 것이 인구의 숫자, 그리고 그것의 일과 순종성(docility)이었기 때문에 절대적 가치를 지닌 상품과 수량화할 수 있는 부였다면 새로운 통치성 즉 자유주의는 최대의 가치가 아니라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은 최적의 가치, 균형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네 번째는 국가가 개입하는 방식이 변화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새로운 통치성이 가진 전제는 국가이성에서처럼 군주 혹은 국가의 의지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대상으로서의 사회의 운동을 보장하고 촉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 단순히 규칙이나 규제를 통해 사람들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국가의 개입 방식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리하여 푸코는 다섯 번째로 자유주의가 문자 그대로 자유(liberty)에 기반을 둔 통치라고 할 수 있게 하는 그것, 즉 좋은 통치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란 점을 꼽는다. 이는 중농주의자들이 인구란 서로 다른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전체처럼 다룰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모두가 하나의 행위의 동인(mainspring), 즉 “욕망(desire)”을 통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구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규제나 명령이 아닌 바로 이런 욕망의 법칙, 즉 정치경제학이 상대하는 경제적 인간 혹은 욕망을 쫓으며 살아가는 개별적이면서도 또한 전체인 인구=시민이 가진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인가 사회주의적 통치성인가 혹은 그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자유주의적 통치성이 등장한 이후 그것은 어떤 변천을 겪어왔을까. 푸코가 󰡔영토, 안전, 인구󰡕 이후에 진행한 󰡔생정치의 탄생󰡕이 직접적으로 관심을 둔 것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상세하게 분석한다. 특히 푸코는 제3공화국, 나치즘의 등장을 전후하여 독일에서 등장한 프라이부르크 학파, 혹은 그들이 발간했던 저널의 이름을 따서 질서자유주의자(the Ordo-liberals)라고 불리는 초기의 신자유주의와 우리가 흔히 시카고 학파라고 부르는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소개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분절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이를 상세하게 소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는 푸코의 분석을 참조하면서 극히 간략하게 신자유주의가 기존의 자유주의의 ‘실패’를 어떻게 표상하였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통치성을 고안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이에 놓인 거리를 설명하기 위한 손쉬운 방편 가운데 하나는 자유주의적 통치성을 사회적 신체의 지형학(topography of social body)을 생각해 보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앞에서 간단히 지적했듯이 자유주의의 정치적 합리성의 핵심적인 특징은 경제적 삶의 세계와 거의 동일한 것이라고 할 ‘사회(the social)’를 고안하고 이를 국가가 상대해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와 국가의 관계, 나아가 경제 혹은 시장과 사회, 국가의 관계는 근대적 통치성, 자유주의가 변용되는 방식을 이해하는데 있어 관건적인 역할을 한다. 이는 푸코가 신자유주의로 꼽는 질서자유주의와 시카고 학파의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고 변형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결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장(경제)과 국가, 나아가 경제, 사회, 국가라는 항들을 어떻게 설정하고 또 각각을 어떻게 분절하고 연관시키는가를 보면서 푸코가 시도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분석을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질서자유주의는 독일적 문제인 나치즘이라는 국가사회주의에서 출발하여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정초한다. 푸코가 흥미롭게 설명하듯이 “자본주의의 비합리적 합리성”이란 베버주의적 질문에서 출발한 두 가지의 베버주의적 경향 혹은 학파가 있다. 그것은 먼저 질서자유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양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비합리성을 폐절할 수 있는(nullifying) ‘사회적 합리성’을 모색하려 했던 반면,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비합리성을 폐절할 수 있는 경제적 합리성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동일한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였지만 정반대의 해결책을 찾아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전개하면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국가를 조망하고 분석하는 매우 독특한 관점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질서자유주의가 제시했던 자유주의를 재구성하는 틀 혹은 정식은 지금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들이 정식화한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질문, 즉 국가의 지나친 성장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제 거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치즘 그리고 그것에 조응하는 현상이라고 할 케인즈주의, 소비에트사회주의, 심지어 자유주의의 원산지인 영국에서의 베버리지 계획(Beveridge plan)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자본주의적 체제의 시도를 대조하고 이를 독일적 문제인 나치즘에 대응시키면서 질서자유주의는 기왕의 자유주의가 지닌 “소박한 자연주의(naive naturalism)”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들의 주장을 내놓았다. 푸코는 이를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자유질서주의자들의 비판을 통해 압축적으로 설명하는데 자유방임주의의 핵심적인 주장은 시장 경제에 내재한 자연적 법칙이 있고 국가는 그것에 가능한 간섭하지 않아야 하며 그것이 실패하거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을 때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질서자유주의자는 그런 자연적 대상으로서의 시장 혹은 경제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정치적 조절을 통해 창출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대상이라고 역설한다. 그것이 바로 질서자유주의자들이 “사회적 시장경제”의 요체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와 사회 혹은 국가가 대립적인 항으로서 상정하고 전자를 자연화시키면서 어떤 내재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하길 거부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적 선택과 행위, 특히 제도나 정책과 같은 것을 통해 다양한 자본주의적 ‘질서’가 역사적, 우연적으로 존재할 따름이라고 강변한다. 그들을 질서자유주의자로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자본주의 법칙 혹은 논리란 인식을 대신하여 정치적 선택의 소산으로서의 질서란 관점을 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발 신자유주의는 질서자유주의와 무엇이 다를까. 이는 역시 사회와 국가 혹은 (시장)경제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표상하고 둘 사이를 관계지우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질서자유주의자들 가운데 대표적 이론가 가운데 한 명인 뤼스토우(Alexander Rüstow)가 제안한 “생명정책(정치)(Vitalpolitik)”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사회의 모든 단위, 그것이 개인, 가족이든 아니면 이웃공동체같은 지역사회이든 모두를 기업체(enterprise)로 가정하고 사회가 경제의 이름 안에서 통치될 수 있도록 하는 기획을 일컫는다. 여기에서 상기되듯이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사회적 영역과 경제를 구분하고 전자를 후자의 원리(경쟁)에 관점에 따라 구성하고 관리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한다. 이를 질서자유주의들은 사회정책(social policy)라고 부른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듣는 경구, 이를테면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짜는 법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접근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쟁’이란 경제적 원리에 따라 ‘사회’를 관리하고 그를 위해 사회적 삶의 세계를 모두 기업체적인 정체성을 가진 대상처럼 다루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모두에게 평등한 불평등(inequality equal for all)이란 질서자유주의자의 핵심적인 명제가 압축적으로 반향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질서자유주의자들의 문하생이었던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질서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흡족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무엇보다 방금 말했던 사회와 경제 사이의 구분을 거부한다. 그들은 사회적 삶의 세계가 곧 경제적인 삶의 세계이며 사회 안에서 펼쳐지는 모든 활동을 경제적 행위로서 받아들여야 함을 역설한다. 푸코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게리 백커의 인적 자본(human capital)과 범죄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접근을 다룬다. 그러나 푸코의 미국 신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을 굳이 상세하게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펼쳐지는 거의 모든 것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경제개발계획이라는 개발독재 기간 동안 한국 경제를 주도했던 국가의 경제적 개입 방식이 종결되고 국가인적자원개발계획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경제기획원같은 부처를 대신하여 지식경제부같은 부처가 그 자리를 메우게 되었을 때, 학교사회에 속박된 획일적인 학생이 아니라 자기 학습권을 행사하며 자기주도적인 학습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육정책이 들어설 때, 실업(자) 대신에 고용가능성(employability)란 담론이 대신할 때, 근로자나 종업원이란 말 대신에 역량을 갖춘 인재란 용어가 그 자리를 메울 때, 소득의 분배를 통해 자기의 경제적 생존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재태크’를 통해 자신의 경제적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관리할 때, 이력서가 아니라 스펙을 완비한 포트폴리오를 준비할 때, 이 모두는 미국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어떻게 구체적인 지식, 제도, 정책, 법률, 행위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직접적인 경제적 삶의 세계는 물론 교육, 보건, 복지와 같은 종래 사회적 삶의 세계로 생각되었던 영역을 모두 기업화(enterprising)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활동하고 살아가는 주체를 기업가적 주체(entrepreneur) 혹은 기업가적 정신(entrepreneurial spirit)에 따라 살아가는 개인, 집단, 조직, 사회체로 주체화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경제와 사회 사이에 놓인 거리는 사라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푸코가 자신의 오랜 권력 분석의 기획을 통치성에 관한 분석, 그 가운데서도 자유주의에 관한 분석으로 전환하며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주체화의 윤리, 그리고 이를 구성하고 중재하는 지식의 관계를 탐색한 푸코의 이론적 궤적을 극히 간략하게 짚어보았다. 이러한 푸코의 자유주의 분석으로부터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난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데 얻을 수 있는 이론적 정치적 교훈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신자유주의를 특정한 이념이나 좁은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로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고전파경제학이나 합리적 선택론이나 게임이론, 위험관리론 같은 다양한 ‘학술적’ 담론을 망라하고 심지어는 일상생활에서의 자기계발 담론과 그에 연관된 구체적인 언어적 생태계를 포괄한다. 그러나 이렇게 신자유주의를 단정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신자유주의가 제출하는 편향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염된 현실에 대한 표상을 넘어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제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한편 두 번째의 함정 역시 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를 언제부턴가의 역사적 시점부터 조성된 객관적이고 불가역적인 현실로서 사고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계화이든 아니면 자본의 고삐풀린 움직임이든 혹은 20 대 80의 세계이든, 신자유주의를 이러한 맹목적인 자본주의의 현실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으로 간주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이런 잘못을 바로잡는 즉 더 많은 사회적 연대의 가치, 더 많은 공공성, 더 많은 국가의 개입 같은 것에 머물고 말 것이다. 물론 이는 희극적인 결과를 낳기 일쑤이다. 이를테면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악몽을 물리칠 수 있는 유력한 진보적 대안으로 널리 선전되었고 급기야 그를 주도했던 인물을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까지 만들었던 ‘4조2교대 일자리 나누기’라는 캠페인을 생각해보자. 이는 마치 신자유주의적 폐단을 극복할 대안처럼 여겨졌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자기책임부여와 권한강화를 통해 생산적 주체를 형성하려는 지극히 신자유주의적인 실천의 한 갈래 일 뿐이다. 이는 이른바 사회운동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90년대 이후 활약했던 한국의 소문난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이 공공성의 기치 아래 벌여온 일들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인 ‘협치(governance)’, 국가가 시민사회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고 이를 자율화시킴으로써 시민사회가 자기 스스로 책임을 부여받고 자신의 문제를 관리하게 하는 새로운 통치 전략과 기술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아름다운재단’같은 시민사회운동단체야말로 가장 탁월한 형태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구성하는 직물의 한 씨줄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자유주의 분석, 정치적 합리성의 계보적 분석은 신자유주의의 정치학을 비판적으로 분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던져준다. 그것은 관념이나 지식으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경험적이고 실정적인 현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라 통치가능한(governable) 혹은 지배할 있는 현실을 구성하고 그와 관계 맺는 주체의 행위의 조건 혹은 행위 방식을 유도하고 평가하며 보상하는 지식과 테크놀로지, 윤리의 복합적인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를 가리키는 이름은 통치성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란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혹은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통치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미테랑 정권의 등장을 전후하여 푸코가 개탄했던 것처럼 우리는 사회주의적 통치성이라 할 만한 것을 고안하고 구상하는 데 착수해야 할까. 그러나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지난 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그러나 거의 믿기 어려우리만치 실종하여 버린 희귀한 정치적 사태를 생각해 보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산 수입쇠고기를 둘러싼 검역 문제에서 출발한 이른바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는 어쩌면 푸코의 통치성의 정치를 둘러싼 의구를 풀어볼 수 있는 제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법-정치적 문제설정 혹은 주권 담론의 주술적 유혹으로부터 벗어난 생정치적 주체를 통한 변혁의 전망을 내세우는 푸코의 끈질긴 주장을 되짚어 보는 데 아주 의미심장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우리는 촛불 시위에서 두 개의 대립적인 혹은 그것이 지나친 것이라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하나의 정치적 주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며 “헌법1조가”를 부른 사법적-주권적 주체이자 동시에 시민의 생명과 안녕을 보호하고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인구-주민으로서의 주체이다. 물론 이 두 주체는 동일한 공간에서 출현하였고 어쩌면 둘은 다르지 않은 인격체 속에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전연 다른 주체의 모습이다. 이는 사회적 삶의 운명 속에 살아가는 계급 혹은 주민과 어떤 사회적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 문자 그대로의 엄밀한 의미에서 무조건적으로 평등을 주장하는 인민 혹은 민중이라는 두 가지의 이질적인 정치적 주체이다. 그렇기에 푸코보다 더 푸코적인 자크 동즐로로의 표현, “주권을 가지고서 혁명을 할 수 있지만 하나의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는 유려하고 충격적인 단언에 대하여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회를 끝낼 수 있는 혁명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실은 사회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끈 그 결렬의 순간, 그 심연을 알 수 없는 공백이 더 결정적인 것 아닐까. 이를테면 동즐로 스스로 서술하듯이 프랑스 민주주의 혁명이 만들어낸 견딜 수 없는 민주주의적 평등을 자본주의 ‘사회’의 체계 속으로 길들이기 위하여 사회의 형성과 관리로 정치를 환원하는 것, 정의와 행복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정치를 안녕과 진보란 목표 속에 유폐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일 아닐까.
그렇다면 푸코가 말한 사회주의적 통치성이란 것도 혹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이후의 통치성이란 것도 결국은 푸코의 통치성이란 기획 속에서는 결국 발원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가 근대 국가의 계보학이란 이름으로 진행한 장기적인 이론적인 기획은 놀랍게도 권력의 분석이란 이름 아래에서 권력의 영도(零度)를 끊임없이 회피하려는 몸짓으로 둔갑하게 된다. 그 권력의 영도는 인민과 인구 사이에 구분이 사라지는, 푸코의 표현을 다시 빌자면 생정치적 주체와 주권적 주체가 결합하면서 만들어내는 희귀한 정치적 계기를 가리킨다. 물론 이를 우리는 투박하게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혹은 바디우같은 철학자의 시정적인 표현을 빌어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빵과 토지를 달라는 사회적 요구는 평등한 세계를 달라는 정치적 주장과 떼어놓을 수 없다. 둘 가운데 어느 하나 없이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러나 푸코는 이 둘 사이의 거리를 가능한 멀리 벌여 놓는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광란적 사태, 민주주의라는 미증유의 계기가 삭제된 즉 ‘본연의 정치’가 없는 정치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푸코를 기꺼이 반정치적 정치의 이론가로 규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푸코의 이론적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푸코로 인하여 우리는 거꾸로 다시금 민주주의적 정치의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에 관한 급진적 사유를 이끄는 주요한 사상가들이 드러나게 혹은 드러나지 않게 푸코와의 거리 속에서 사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랑시에르의 불화의 정치학은 푸코의 ‘행정관리(police)’란 개념을 정치의 존재론으로 사고함으로써 출발하지 않던가. 발리바르의 자유-평등의 정치학은 정치의 타율성을 사고한 마르크스-푸코의 짝으로부터 정치의 자율성과 정치의 타율성의 타율성을 준별하는 작업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하물며 바디우는 어떠한가. ■

- 문화과학 2009년 봄 호에 기고한 글의 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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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원이 시민불복종을 재판할 수 있을까?

2009/03/21 23:25 | Posted by 몽똘
'인권연구소 창'이 주관하는 철학과 인권 세미나(http://www.khrrc.org/index.php)에 참여하며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글을 다시 읽고 있다. 아렌트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으로 1, 2차 세계대전을 몸소 겪었고,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말, 70년대 초의 정치상황을 관찰하기도 했다. 아렌트가 말한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라는 개념이 현대적인 인권 개념의 재구성과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다.



아렌트가 인권을 자기 철학의 핵심주제로 다루지는 않았지만(아렌트는 인권보다 시민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이 아렌트의 인권 개념을 비판하며 자기 얘기를 꺼내면서 아렌트의 사상이 자연스레 인권의 주제로 옮겨진 듯하다. 그런데 아렌트의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방식이 아렌트의 사상 전체를 살피고 그 속에서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자연스런 과정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래서 인권활동가나 인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렌트의 여러 책을 함께 읽으며 그 개념의 흔적을 찾아보는 세미나를 하고 있다.

그와 관련해 아렌트가 쓴 [공화국의 위기]를 읽고 있다. 이 책은 60, 70년대 미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인데, 현재 우리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시민불복종'이라는 글에서 아렌트는 당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과 흑인민권운동을 벌이던 시민불복종운동을 다룬다. 아렌트는 어떤 정치적 의견이 공동체 내에서 소통되며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정치라 보고 그런 소통과 관계의 장을 보장하는 것을 권력의 역할이라 봤다.

아렌트는 어떤 사안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을 경계하는데, 가령 양심적 병역거부는 법을 어기는 행위의 정당성을 개인의 양심에서 찾기 때문에 정치적인 사안을 비정치적인 문제로 환원시킨다. 그러다보니 어떤 개인의 양심과 다른 개인의 양심이 충돌할 때(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흑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킹 목사의 양심과 미시시피의 인종주의자의 양심이 충돌할 때), 그 주장은 타당성을 가지기 어렵다. 더구나 그런 양심이 정당화되려면 그 사람이 선과 악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능력은 자연적으로 타고날 수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봤고 그 근거를 양심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서 찾기를 바랬다.


양심적인 거부자와는 달리 불복종 시민은 한 집단의 성원이며 싫든 좋든 이 집단은 자발적 결사를 이루는 것과 같은 정신에 따라 형성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논의에서 가장 큰 오류는 우리가 개인들―그들은 자신을 주관적이며 양심에 따라 사회의 습관과 법에 도전한다―을 다루고 있다는 가정이다.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을 구분하면서 시민불복종을 중요한 정치행위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불복종 시민의 실상은 조직된 소수집단이며, 공동이익이라기보다는 공동의견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고, 정부의 정책이 다수에 의해 지지받을 것을 알 경우라도 그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서리라는 결의를 갖는다. 그들의 일치된 행동은 그들의 일치된 의견에서 나온다.
시민불복종은 자신의 행위가 현재의 법질서를 해치거나 다수의 상식과 반대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여러 시민들이 힘을 모으는 정치행위이다. 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법질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거나 정부가 적법하고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고 음모를 꾸밀 때에, 시민불복종은 변화를 이룰 유일한 수단이다. 아렌트는 당시 미국사회가 이런 상태(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전쟁을 벌이고 정보기관이 은밀히 활약하는)였다고 보고 시민불복종 행위를 미국의 건국행위만큼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미국의 건국행위란 따져보면 식민지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시민불복종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시민불복종은 공개적으로 법에 도전하기 때문에 일종의 딜레마를 가진다. 사회가 유지되고 정치가 이루어지려면 그 경계를 짓는 법이 필요한데, 시민불복종은 그 법의 경계를 넘어서려 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렌트는 법조문보다 법의 정신이 중요하고 준법정신이 입법자의 태도를 가질 때, 즉 내가 곧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자 스스로 그 법에 복종하는 사람(인민주권이라고 해야 할까)일 때 가능하기 때문에 시민불복종이 정당하다고 본다. 특히 새롭게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합의하지 않은 그 사회의 질서에 도전하고 문제를 제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불복종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렌트는 그런 불복종이 약속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람의 행동이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간의 합의와 약속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민은 불복종을 하는 만큼 자신이 시민으로서 따를 수 있고 따라야 하는 것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이 글에서 흥미로운 내용은 시민불복종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법률가들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법률가들은 이런 시민공동체의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인 행동을 개인의 범죄행위로 다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복종 시민을 한 집단의 성원으로 인정하기보다는 법정에서 피고가 될 개인적 범법자로 간주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개인에 대한 정의의 할당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다른 모든 것―피고는 다른 자들과 함께 뜻을 하며 법정에서 그를 진술하려 한다는 여론이나 시대정신(Zeitgeist)―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재판절차의 위풍이다.
법은 법에 대한 불복종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는 시민불복종의 권리가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 권리(결사의 권리)와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치제도는 불복종하는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도록 보장해야 한다. 아렌트는 로비스트들이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시민불복종하는 단체들이 압력단체를 만들어 정부를 압박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헌법 제 1조가 보장하는 결사의 권리가 현실에서 제대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위기에 빠졌다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이런 분석은 지금 한국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이 사회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요즘은 이런 방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자신의 주장을 더이상 받아주지 않는다고 여긴 시민들이 곳곳에서 촛불을 들고 저항하고 있다. 정부는 이 저항을 법으로 가로막으려 하지만 아렌트가 얘기하듯 촛불시민들의 불복종 행위에 대한 판단은 법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정치행위는 기존의 정치질서가 가진 문제점 때문에 비롯된 것이고 시민들은 불복종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위기는 아주 심각하다.

국회의원이나 관료들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들을 자꾸 법원으로 가져가서 해결하려 하는데, 그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법원은 그 의제를 사회와 소통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려 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기에 적절하지 않은 기관이다. 그리고 그 사법적인 판단의 잣대는 이미 낡은 것으로 새로이 나타나는 것을 규정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의 사법계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충원되지도 않고 그 작동과정 역시 민주적이지 않다(최근에는 아예 대놓고 판결에 개입하기도 하니).

아마도 이명박 정부는 이런 정치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게 뻔하다. 시민불복종의 권리는 짓밟히고 그와 함께 결사의 권리,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단체를 자유로이 만들 권리도 무기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어쩌면 이제 저항은 아주 근본적인 수준으로 진행되어야 할지 모른다. 권력이 정치를 포기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때, 저항은 건국행위 수준의 정치행위를 지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단순히 법에 복종하지 않고 정부에 저항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사람들이 맺을 새로운 약속, 새로운 결사들을 만들며, 그들의 국가를 버리고 우리들의 공동체를 조금씩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비폭력 불복종의 정신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터져나와야 한다.

공동체가 무기력하고 정치가 왜곡되었으니 그것을 버릴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 개인으로 흩어지지 말고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정치행위는 국가가 보장하는 시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근본적인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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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9-04-19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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