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임의적이고 잡다한 인용들. 예전 노트에서 인터넷에서 기타 등등
그러나 이런 조각들을 연애편지에 써 먹을 수는 없겠지
"사랑이란 선한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고 한다면 불사(不死)라는 것이 자연히 선과 함께 욕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필연적으로 불사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플라톤,『향연』, 최현 옮김, 범우문고, 1987, 88쪽)
"만일 어떤 자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표상하며, 더욱이 자기는 사랑받을 아무런 원인도 부여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제 3부의 정리 15의 보충과 정리 16에 의하여 가능하다) 그는 도리어 그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스피노자,『에티카』제 3부 정리 41)
“사랑의 감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항상 당신으로부터 도망가는 사람으로부터, 막상 당신은 도망가지 못하는 것이다”(알렝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권유현 옮김, 동문선, 1998, 57쪽)
"사랑이란 곧 모순을 낳는 것이면서 동시에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모순을 지양, 해소한다는 점에서 사랑은 곧 인륜적 결합을 뜻하는 것이 된다."(헤겔,『법철학』, 임석진 역, 지식산업사, 1989, 278쪽)
"자신을 한 여자에 대한 사랑 속으로 시화(詩化)시키는 것은 입신(入神)의 경지"(키에르케고르, 『유혹자의 일기』, 임규정·연희원 옮김, 한길사, 2001, 170쪽)
“사랑에 관한 진리는 타자가 당신 안에 있는 당신 자신보다 더한 어떤 것을 위해 당신을 사랑해야 만 한다는 것이다......우리는 타자 속에서 그/녀 자신이 아니라 그/녀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본다. 이것이 사랑의 바로 그 조건이다. 히스테리적 주체의 자리는 언제나 커튼 뒤에 무엇이 있는 지를 추측해야만 하는 자리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통상 그와 같은 주체는 - 사랑을 전적으로 단념함으로써-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레나타 살레클,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3, 53쪽)'
“당신의 파트너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사랑에 대한 증거가 아닙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오로지 우리가 분열된 주체이기 때문에, 즉 오로지 우리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 때문에 꽃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가능성이 부착되지 않은 사랑이란 없는 것이다. 또한 사랑 속에서 우리는, 종국에 가서 '그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수세기동안 사람들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즉 그것의 결여를 메우려는 시도 속에서 최고의 예술 작품을 창조해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위의 책, 279-280쪽)
"사랑하기의 달콤함은 사랑스럽도록 유의함을 중단시킨다."(미란 보조비치, 『암흑지점』, 이성민 옮김, 2004, 81쪽)
"사랑하기는 언제나, '우스꽝스러운 대상', 땀흘리고, 코골고, 방귀뀌고, 이상한 버릇들을 가진 한 대상과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함을 뜻한다.... 이 틈 또는 어긋남을 지각함을, 그리고 그것에 대해 웃을 수 있음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웃으려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을 뜻한다."(알렌카 주판치치, 『정오의 그림자』, 조창호 옮김, 도서출판b, 2005, 259쪽)
"우리가 '진정한 사랑'과 조우할 때, 이는 우리가 평생을 기다려 온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의 이전의 삶 전체가 이 조우로 이끌리게 된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 . . '사랑'이란 실재의 무의미한 외적 우연성이 '내부화'되고, 상징화되고,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 . . 순수하게 형식적인 전환 행위에 대한 이름들 가운데 하나다." (S. Zizek, The Indivisible Remainder, p. 94.)
“불가능한 것은 진정 일어난다, 사랑과 같은 ”기적“(혹은 정치 혁명: 레닌이 1921년에 말했듯이 ”몇 가지 면에서 혁명은 기적이다.“)은 진정 일어난다.”(슬라보예 지젝, 『믿음에 대하여』, 최생열 옮김, 동문선, 2003, 91쪽)
"사랑은 상상적 층위에서 발생하는, 그리고 상징적인 것의 틀림없는 정복을, 자아이상의 기능의 일종의 무화, 교란을 유발하는 현상이다."(Jacques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I, New York: Norton, 1991, p. 142.)
"사랑이란, 하나(통일적 원리)의 지배의 균열 하에서, 비록 그 하나(통일적 원리)의 형상을 지속시키면서라도, 둘이 생각되는 장소라는 것이다. 우리는 라깡이 양성(兩性)의 둘로부터 일종의 논리적 연역을 전개시켰음을 알고 있다. 양성의 둘이란 주체의 여자 '부분'과 남자 '부분'이며, 여자를 '부분부정(pas-toute)'으로 정의하고 남성적 극을 손상된 전체(Tout)의 벡터로 정의하기 위한, 부정과 양화기호들(量化記號들, quantific-ateurs)을 조합하는 배분이다. 사랑이란, 그 자체가 비(非)관계와 탈(脫)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실재성이다. 사랑이란 그러한 둘에의 '접근'이다. 만남의 사건-그 '갑작스러움'을 플라톤은 힘주어 강조한다-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은, 이 둘이 이미 하나의 법칙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초과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무한한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 나의 언어로 말한다면, 사랑이란, 지식으로부터 당연히 벗어나는, 특히 서로 사랑하고 있는 자들의 지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진리인 성차(性差)에 대한 진리를 이름 없는 또는 산출적인 배수성(倍數性)으로 도래시키는 것이다. 사랑이란 만남의 사건에의 충실성 속에서의, 둘에 대한 진리의 생산이다."(알랭 바디우,『철학을 위한 선언』, 이종영 옮김, 백의, 1995, 105-6쪽)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던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부재에는 항상 그 사람의 부재만이 존재한다.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고 남아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 사람은 끊임없는 출발, 여행의 상태에 있다. 그의 천직은 철새 사라지는 자이다. 그런데 사랑하고 있는 나, 나의 천직은 그 반대로 칩거자,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않고 미결 상태로 앉아 있는, 마치 역 한구석에 내팽개쳐진 수화물마냥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사랑의 부재는 일방통행이다. 그것은 남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말해질 수 있는 것이지 떠나는 사람으로 부터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항상 현존하는 나의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그 사람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中-)
"충족된 연인은 글을 쓸 필요도, 전달하거나 재생할 필요도 없다.....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그 어떤 것도 보상하거나 승화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 (바르트, 사랑의 단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