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LOVE 오다기리 죠> 마지막 상영일인 어제 <밝은 미래>를 보러 갔다. 미로스페이스의 아담한 상영관은 분위기가 좋았고, 의자도 편했다. 혼자 보러 온 사람이 많아 조용조용한 것도 특징일까.
오다기리 죠가 출연하는 작품들은 별다른 정보 없이도 쉽게 믿음이 가는데, 그건 그가 매우 잘생겨서 보기만해도 좋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매우 영리한 배우인데다 시나리오를 읽는 눈도 좋고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철저히 관리하는 타입인 듯하다. 언젠가 씨네21에 실린 그의 인터뷰를 읽고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받은 느낌이 그렇게 남아 있다.
<밝은 미래>는, 뭐랄까, 아주 열광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꽤나 흥미롭다. 초반 마모루(아사노 타다노부)와 니무라(오다기리 죠)가 해파리 수조가 있는 마모루의 방에서 뒹굴거릴 때부터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둘이 일하는 세탁 공장 사장과의 관계도, 사장 가족끼리의 관계도, 마모루와 니무라 사이에도, 별다른 일은 없지만 폭풍전야 같은 고요함이랄까, 톡 건드리기만 해도 ‘쾅’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으로 심장이 조여든다. 니무라의 반항적이면서도 나른한 몸짓, 그런 그를 말리며 갈 때와 기다릴 때가 있다고 충고하는 마모루의 어쩐지 공허한 눈빛. 분명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을 때 느껴지는 초조함이 쌓이다가 움찔움찔 지레 놀랄 무렵, 마침내, 때가 되었다는 듯 살인사건이 터진다. 그런데 막상 거기까지 가면, 이젠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 이건 감독의 의도인 것인지.
마모루는 키우던 맹독성 붉은 해파리를 니무라에게 넘겨주고는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다. 니무라에게 전해진 해파리는, 니무라가 꿈에 보곤 했던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일까. 마모루는, 스스로는 통제할 수 없었던 삶과 희망을 니무라에게 건네주고 싶었던 것일까. ‘가라’는 사인은 자기처럼 막 살라는 뜻은 아닐텐데. 마모루의 행동은 무엇하나 이치에 닿지 않을 뿐더러 의미를 짐작도 할 수 없다. 소위 청춘의 방황과 불안함이라 일컫는다면 이해를 할까.
마모루가 죽은 후 니무라는 마모루의 아버지를 만난다. 가라는 사인은 받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한 니무라와 아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가족과 단절된 아버지의 만남은, 상투적인 ‘가족적’ 결말을 짐작하게 한다. 뭐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이어서 내심 안도했다.
민물에 적응한 해파리 떼가 붉은 빛을 내뿜으며 개천을 따라 바다로 나아가는 장면에 이르면, 드디어 ‘밝은 미래’를 본 듯 싶어진다. 원래 바다에서 밖에 살 수 없는 붉은 해파리를 민물에 적응시킨 것을 이 청춘들이 사회에 적응해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읽는다면, 결국 해파리들이 바다로 이동하는 것은 못나고 엇나간 청춘들에게도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테니까. (근데 이건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인가.)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를 맞춰 입고 장난치며 거리를 걷는 ‘불량’ 청소년들을 잡은 롱테이크씬이 마무리라는 건 좀 황당하지만 유머러스하기도하다.
너덜너덜 구멍나고 찢어진 옷을 입어도, 어쩜 그리 멋진 것이냐, 오다기리 죠!
미로 스페이스의 다음 상영작(오늘 개봉)도 오다기리 죠가 등장하는 <헤저드>이다. 2002년작이라니까 거의 초기작인 셈이다. 또 봐줘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