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혼자 뒹굴거리던 내서재에 낯선 이가 와락 등장을 했다. 무슨 뜻인지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를 닉네임과 번뜩이는 면도칼 사진을 옆에 끼고, 흔히 처음 서재에서 말문을 열 때 하게 되는 ‘안녕하세요’ 같은 인사도 완전 생략한 채, 세풀베다의 책을 받아보고 판형이 어쩌네 양장본이네 혼자 구시렁댄 내 페이퍼 밑에 ‘나는 구판을 가지고 있지롱’ 하는 내용을 달고는 훌쩍 사라진 urblue. 나는 익숙치 않은 누군가의 출현에 적잖이 긴장한데다 뭐라 대꾸를 해야할지 모르겠는 상황이라 그저 조용히 면도칼 사진을 눌러서 그 사람의 서재에 옮겨가 보았다. 심심한 나날, 심심한 서재라는 제목과 흑백의 사막. 간단명쾌한 페이퍼의 제목들. 그리고 독서일기와 CD목록을 슬금 살펴본 나는 urblue는 남자다, 그것도 지나치게 편중된 책 읽기 혹은 삶을 살아가는 나와 매우 상반된 사람일 것이다, 하는 내멋대로 추측결론을 도출하였는데, 곧 고개를 쳐든 생각은 이 사람, 어떻게 내 서재에 왔을까? 뭐 그런 거였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결코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스쳐가는 사람일거라 생각했던 그가, 댓글이든 방명록이든 단 한 번도 내게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를 건네지 않은 그 사람이, 내게 이렇게도 소중한 인연으로 새겨질거라는 걸 말이다.
사실 사람을 온라인 상으로 만나서 그저 그의 일부분인 글을 좀 읽고 취향과 성격을 조금 알았다고 해서 내가 그를 잘 안다고 말하기는 당연히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다양하고 세부적인 선입견들을 속속들이 잘 갖추고 있는 나라는 인간은 나중에 결국 깨질 것을 알면서도 일단 느낀 첫 인상에 상당히 강하게 사로잡힌다. 그런데 문체만 좀 건조하면 대번 글쓴이의 성별을 XY로 판단해버릴만큼 단순한 인간이라 그런가, 내가 그의 서재에서 받은 첫 느낌은 어떤 금속성의 차가움이었다. 지붕과 사진만 다양하게 다를 뿐 대부분의 서재화면은 모두 똑같은 색인데, 웬지 urblue의 서재를 클릭할 때면 순간 무광택의 매끈한 회색이, 마치 백화점의 거대한 엘리베이터 문처럼 스르르 눈 앞에 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단지 대문에 걸려있던 면도칼 사진 때문이라고 한다면 스스로를 단순계의 지존으로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므로 일단은 아니라고 둘러대야 할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나와 완전히 다른 냄새를 풍기는 강한 존재를 감지한 두렵고도 설레는 한기를 오스스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스무 살 무렵 내 바람은 ‘가볍게 살기’였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래 고민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느끼는 대로 표현하기.
그로부터 십여 년. 지금의 나는 예전에 내가 바라던, 딱 그 만큼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번 더 곱씹을 줄 모르고, 다른 방향에서 생각할 줄 모르고, 돌려 말할 줄 모르고, 그래서 융통성 없고 즉물적인 사람. < 가볍게 살기 > 中
내 성격은, 발끈에 시니컬.
내가 사랑하는 것은, 딱히 무언가를 사랑한다고 느껴본 적 없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딱히 두려운 것도 없는데.
내 친구는, 나를 참을 수 있는 인간. 물론 많지 않다.
나의 친구들은 나를, 뾰족하다고 한다.
나의 형제(자매)는 나를, 까칠하다고 한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 > 中
스스로 말하듯 그녀는 대단히 살가운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다. 허나 십년 전 자신이 바라던 모습을 현재 하고 있다 말하는 그 명쾌함이 나는 너무나 좋았고 내심 부럽기도 했다. 그녀는 딱히 사랑한 것도 두려운 것도 없다고 하고, ‘뾰족’ 이나 ‘까칠’ 같은 메마른 질감의 단어를 스스로에게 부여했지만 오히려 내가 느낀 것은, 혼자서 광합성을 하고 스스로 물을 뿜어올리는 것 같은 풍부한 존재감이었다. 스스로 충만함에서부터 비롯되는 자신감, 그녀는 그것을 획득하고 있는 듯 보였다.
로드무비님이 수첩 얘기를 꺼내셔서, 옛날 수첩들을 꺼내보았다……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내가 가장 많이 고민을 하고 가장 많이 생각을 한 건 아마 고 3 때였던 것 같다…… 글 사이사이, 시가 꽤 많이 눈에 띈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에 나는 상당한 피로감을 느꼈던 듯 하고, 시에서 내 심정인 듯 느껴지는 구절을 적어두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보면, 상당히 센서티브 했잖아.
3월 27일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4월 14일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하되 삼가 애련에 빠지지 않음은 ─ 그는 치욕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를 예비하였나니.
5월 9일
……눈으로만 먼 파도를 어루만진다. 오돌. 어느때나 푸른 새로 날아오르랴. 먼 위로 아득히 짙은 푸르름 온 몸에 속속들이 스미면 어느때나 다시 뿜는 입김을 받아 푸른새로 파닥이려 날아오르랴. 10월 24일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 수첩 > 中
상당히 센서티브 했잖아- 말하는 그녀, 웬지 불만인 듯 하다. 아니 그저 조금 놀란 것인가. 그런데 센서티브라는 것이 자신의 심정과 비슷한 시를 수첩에 옮겨적는 행위를 말한 것인지 아니면 시에 담겨 있는 심정 자체를 말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내가 보기에는 가장 예민하고 센서티브해질 확률이 높은 고3 시절 그녀가 옮겨 적은 시들이 그 자체로 참 그녀스럽다, 고 한다면 엇다대고 아는척, 이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힘든 순간을 겪는 동안 말랑말랑해진 마음 속을 파고드는 구절에서 웬지 어떤 결의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녀는 힘이 들수록 힘이 나는 사람인것일까? 그녀는 도대체 언제부터 저리도 ‘옳은 증오’를 가슴 속에 예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읽는 책들과 그녀가 관심있어 퍼온 글 목록을 보면 ‘옳은 증오’ 라는 말에 무게가 실리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밝은 눈으로 넓게 보고 깊게 본다. 그녀가 내게 깨닫게 해 준 것들은 전혀 몰랐던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이거나 혹은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저 외면하고 있었던 어제의 이야기였다.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밟아 올곧게 서 있는 그녀는 그 힘으로 세상을 두루 바라보고 관심을 표한다. 다리가 아프네 눈이 아프네 늘상 징징거리며 제 머리 속으로만 침잠하려는 나는 부끄러웠다. 한편 고맙기도 했다. 나를 깨워 주었으므로 그리고 나의 센서티브하다 못해 과도하게 질퍽거리는 성향을 그녀는 그저 좋다 말해주었으므로.
저는 지금 혼자 살고, 앞으로 쭉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쓸 만큼 돈 벌고, 좋아하는 취미 있고, 만나는 사람들 있고, 혼자 지내는 것도 좋아하고, 네, 사는 것도 그럭저럭 재미있습니다.
제가 버렸으니 뭐 미련도 아쉬움도 없어요. 다만 지나치게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기억이 있기는 하죠. 그치만 이젠 생각도 안나는걸요. 갑자기 꿈에 나타나서 오히려 놀래버렸다니까요. 사랑하면 보낼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네요.
그래, 나야 뭐 회사 일 널널하고, 6시면 칼퇴근하고(덕분에 월급은 많지 않지만), 술도 안 마시고, TV도 안 보니까 시간은 무진장하니 많다. 친구들은 주로 주말에 만나니, 평일 저녁은 온전히 내게 쏟아부을 수 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저 흐응, 웃고 만다. 뭐 한 마디 하자면, 냅둬라 이렇게 살다 죽을란다, 정도.
문득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서재의 제목처럼 정말 심심한 것은 아닐까,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자신에게 쏟아부을 수 있는 그녀, 오래 사귀다 헤어진 아니 버린 남자에 대해 미련도 아쉬움도 없다 담담히 말하는 그녀, 뭐 그럭저럭 사는 것이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 그녀의 삶이 너무 순조롭고 평평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런 생각은 평탄하고 아름다운 삶에 대한 단순한 시기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지만 누구인들 질곡 많은 삶을 일부러 선택하겠나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심장이 터질 듯이 슬프기도 하고 미친년마냥 웃기도 하는 것이 더 삶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허나 이것 또한 어쩌면 부드럽게 흘러가는 삶에 대한 질투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뻣뻣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온 몸을 바닥에 부려놓고 쳐져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저 가벼운 걸음으로 삶이라는 ㄹ 과 ㅁ의 꼬이고 닫힌 길들을 여유롭고 즐겁게 통과하고 있는 것일 뿐이니, 나는 그것이 못내 배가 아픈 가 보다.
허나 나는 이제 그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해야겠다.
1시간 늦은 퇴근 길, 핸드폰이 '딩동' 울린다. '저녁 맛있게 먹었어요?' '이제 퇴근해요. ㅠ.ㅠ' 전화가 오고, 저녁을 먹기로 하고, 홍대 앞으로 향했다. 기다리는 동안 서점에서 <헌법의 풍경> 앞 부분을 읽었는데 예상보다 재밌다. <남자의 탄생>이 생각난다. 어쨌거나 사야할 책 한 권 늘었다. 한식집에서 갈비찜과 찌개로 푸지게 밥을 먹고, 차를 마시러 갔다. 책 많이 읽은 사람을 만나니 할 얘기도 들을 얘기도 많다. 요즘 읽는 책, 좋아하는 작가, 예전에 본 소설, 번역가, 출판사 등등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 데이트 > 中
오랜만에 보는 장이라 이것저것 한보따리를 들고서 돌아오다, 뭐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나이 서른 넘어 아직도 넘어지다니, 한심해하면서, 찢어진 비닐 봉지를 그러모으며, 그래도 깨질만한 건 사지 않았다고 흐뭇해했더니, 이런, 무릎이 깨졌다. 원피스 아래 두 다리는 시멘트 바닥에서 묻어난 먼지로 뿌옇고, 오른쪽 무릎에 오백원짜리 동전보다 크게, 왼쪽 발목에는 1원짜리 동전만하게 피가 맺혀있다. < 칠칠맞지 못한 > 中
나는 <헌법의 풍경>을 모른다. 그녀처럼 서점에서 언뜻 보았다해도 결코 재밌다 여길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남자의 탄생>도 읽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 비해서는 물론 누구에 비해서도 결코 책을 많이 읽지 않았으며 번역가, 출판사 같은 것 잘 모른다. 한 술 더 떠서 나는 말수도 적고 말주변도 없으며 낯선 이와 둘이 있으면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한참을 덤벙인다. 하지만 나도 그녀와 만나서 목이 아플 때까지, 차가 끊겨 택시를 타고 돌아가야 할 때까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내가 ‘듣는 역할’ 을 낼름 먼저 꿰 차고 앉아서 넙죽넙죽 듣기만 하더라도, 그녀가 이야기하는 책이며 음악들을 잘 몰라서 무구를 가장한 무지한 표정을 짓고 있게 되더라도 나는 그녀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조금은 즐겨준다면 참 좋겠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영화를 보고 책을 고르고 밥을 먹고, 두 사람이 만나서 할 수 있는 그런 사소하고 정겨운 일들이 쌓이게 된다면 언젠가는 그녀를 따라 장을 보러 갔으면 좋겠다. 필요도 없는데 우겨서 따라가는 꼬마처럼 나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지도 않은 채 그저 호떡이나 하나 얻어먹고 실실 쪼개다가 서른 넘은 그녀가 철푸덕 넘어지기라도 하면 일으켜 세워 주지도 않고 그저 크흐흐 웃을 것이다. 그리고 실컷 약을 올리면서 느릿느릿 집에 도착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걱정을 하면서 무릎을 살살 소독하고 빨간 약을 척척 발라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그저 글이고 이야기고 상상이고 바람이다.
어쩌면 내일이면 까먹고 말 쌩구라일지도 모른다. 허나 단 한가지,
그녀가 고마운 존재라는 고백만큼은 최소 3년간 잊지 않을, 오래라면 오래일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