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태 전이던가, 간송 미술관에서 열린 ‘단원대전’을 보러 갔었다. 때이른 무더위에 미술관을 찾아 올라가는 길부터 벌써 지치기 시작했고, 미술관에 도착하니 주말이라고 마당까지 빽빽하게 늘어선 인파에 기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교통 불편한 그곳까지 이왕 찾아간 거 그냥 돌아설 수는 없다고, 줄 서 기다리다 전시장에 입장했다. 처음 가 본 간송 미술관의 전시장은 워낙 작은 규모인데다, ‘단원대전’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로 꽉 차서 그림을 보기는커녕 제대로 숨을 쉬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냉방이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에 치이면서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는데, 교과서에서 보거나 들은 유명한 작품들은 안 보이는 것이다. 힘들어, 재미없어 투덜대다 결국 다 보지도 않고 나와버렸다.
전시 공간 좁고 사람으로 북적대는 것이 간송 미술관만의 문제는 아니다. 주말에 전시장을 찾을 수 밖에 없는 형편상 어느 전시회를 가나 인파에 파묻힐 각오를 해야 하고, 좁고 동선 안 좋기로는 한가람 미술관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유독 ‘단원대전’이 불만스러웠던 것은 ‘작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훌륭한(유명한) 작품이 나오지 않은 탓이라고 말이다. 보통은 전시회를 찾기 앞서 관련된 책 한 두 권을 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그저 그림을 보고 느끼는 데 큰 지장은 없다.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생경한 화가의 작품을 대하면서도 간단하게 ‘이 그림이 좋아, 저건 마음에 안 들어.’ 정도는 말할 수 있는 법이다. 하물며 ‘단원대전’이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김홍도를 모르는 이 누가 있을까.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림을 볼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림 앞에 서면 그 아름다움과 뛰어남이 눈에 들어올 줄 알았다. 하지만 전시장에서 본 그림들은 낯설기만 했고, 좋기는커녕 어떤 흥미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니 작품 탓이라고 푸념할 밖에.
이 책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을 읽고 나서야, 전시된 작품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었음을, 그림을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변명하자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교육과 분위기 때문이랄까. 중고등학교 미술 책에 김홍도, 신윤복, 정선 등의 이름과 몇몇 그림이 등장했으나 짝 맞춰 제목 외우기에 급급했을 뿐 정작 그림들을 보고 즐기는 법은 배워본 적이 없다. 대학에 들어가서 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때 가장 쉽게 접했던 게 ‘서양 미술의 이해’ 같은 교양 수업과 ‘서양미술사’ 등의 책이었다. ‘동양 미술의 이해’나 ‘전통 미술의 이해’ 등의 수업은 아예 없었다. 이런저런 예술/미학 책들을 읽으면서 각종 사조와 화가들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고, 전시회 등을 통해 나름 그림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양화에 국한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옛 그림에 대한 지식이나 그림을 즐길만한 바탕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을만한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해골이 등장하면 바리타스 정물화라고, 인생무상을 말한다고 단박에 알아보면서 고양이와 나비가 곱게 그려진 옛 그림은 그저 고양이인가보다 하고 있으니, 생각해보면 좀 한심하다.
우리의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잘 알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말을 들으면, 솔직히 픽 웃고 만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급격하게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우리 전통 문화를 지나치게 홀대하지 않았던가. ‘서양 미술의 이해’는 가르쳐도 ‘전통 미술의 이해’를 가르칠 필요는 느끼지 못하는 것, 혹은 가르칠 만한 사람을 구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 아닌가. 켜켜이 쌓여온 사회적/문화적 바탕에서 단절된 채 '우리 것' 없이 어떻게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말 집어치우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 전시회를 보러 다니면서 느끼는 건데, 도판으로 보는 것과 실제 그림을 보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그림을 보는 순간 내가 아는 그림이 아니구나, 오해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다. 그래서인지 외국의 유명 그림들이 들어올 때마다 전시장에는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은 부모들이 엄청나게 몰려든다. 아이들에게 미술 작품을 감상하게 해 주고 예술적 소양을 길러주고 싶다면 외국 전시회가 열리길 기다리기보다 평상시에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림들을 찾아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우리 전통 그림에 대해 아는 바 없어 그럴 수 없다고 얘기한다면 지금 당장 두어 시간만 투자하라고 권하고 싶다. 책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질 정도로 재미있는 이 책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을 읽고 나면 틀림없이 생각이 바뀔 테니 말이다.
[특강]이라는 제목 그대로 오주석 선생의 강연을 옮겨 놓았는데, 내용이 어찌나 쉽고 재미있는지 정말 자리에 앉아 선생의 강연을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그림의 붓 놀림은 이렇고, 저 그림의 여백은 저렇고, 조곤조곤 설명을 들으며 하나하나의 그림을 보면, 아, 우리 옛 그림이 이다지도 재미있구나, 문자 그대로 무릎을 탁 칠만한 깨달음을 얻는다. 무엇보다 옛 사람의 마음으로 그림을 좋아하고 즐겨야 한다는 선생의 말씀대로 그림이 좋아지고 즐길 수 있게 된다. 왜 진작 몰랐을까 아쉽고, 그간 나만 모르고 있었나 괜히 억울하다. 좀 더 일찍 이 책을 알았더라면 ‘단원대전’을 잘 볼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어릴 때 이렇게 재미있는 설명을 들었더라면 훨씬 폭 넓은 문화 체험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전통 공예나 전통 예술의 계승자가 없어 곧 명맥이 끊길 거라는 뉴스를 가끔 듣는다. 전통 문화를 홀대했으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나마 최근 한복, 한옥, 전통 음식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라니 다행이랄까. 오주석 선생의 말씀처럼 마음으로 즐기지 못하면 관심은 곧 사라지고 우리 문화는 잊혀질지 모른다. 마땅히 즐기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잃어버리는 건 우리 모두에게 손해다. 이제까지 손해보고 살았으니 지금부터라도 그러지 않기 위해 욕심을 부릴 때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이 책을 읽어보시라.
옛 그림을 잘 보기 위한 팁. 오주석 선생은 옛 그림을 즐기기 위한 방법으로 세 가지를 말씀한다. 그림의 크기에 따라 보는 거리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과 시간을 가지고 여유롭게 봐야 한다는 건 동양화나 서양화를 가리지 않고 필요한 기본이다. 가장 중요한 건 옛 그림을 볼 때의 시선으로,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훑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그림의 구도와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책에 실린 도판을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도대체 이런 중요한 사실을 어째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