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3일 연휴에 뭘 할까 고민고민하다 하루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체험 여행 코스 중 하나가 <감 와이너리 투어>. 일제 시대 만들어진 폐터널을 와인 보관 창고로 이용한다는 곳이다. 밀양의 영남루, 청도 와인터널, 청도 운문사를 하루에 들르게 된다. 거기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와인 터널에서 음악회가 있단다.
7시에 광화문에서 출발하여 11시 30분 쯤에야 청도 운문사에 도착했다. 음악회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와인 터널에서 가까운 운문사에 먼저 들르는 것으로 순서가 바뀌었다. 정말 먼 길이다. 고향에 가는 것 말고 이렇게 멀리 길 떠나본 게 얼마만인지.
운문사를 감싸고 있는 산은 호랑이가 편안하게 앉아있는 형세라고 가이드가 알려줬는데, 우리는 물론이고 가이드조차 대체 어떻게 호랑이 모양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빙 둘러 산이니 상쾌하긴 하더라만.
담이 낮아서 밖에서 대웅전 건물이 잘 보인다.
한 그루의 소나무가 저리 넓게 퍼져있다. 일년에 한 번, 소나무 잘 자라라고 막걸리를 열두 말이나 부어준단다.
근처의 평범한 식당에서 평범한 점심을 먹었다. 남들은 아침을 안 먹고 왔는지 여기저기서 밥 더 달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는 든든하게 먹었으므로 평소 먹던 만큼으로 끝. 덕분에 일찍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카운터 위에 말린 감 조각들이 바구니에 담겨 있다(감말랭이라고 부른단다). 청도, 밀양 등에 감이 유명하다지. 주인 아저씨가 감 맛보라고 하셔서 하나씩 집어들었는데, 이런, 엄청 맛있다! 슬금슬금 먹다보니 대여섯개씩은 먹었나보다. 더 먹고 싶었지만 뒷 사람들 생각해서 참았다. 흑흑.
2시 반에 시작한다던 와인 터널의 음악회는 3시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일단 짜증이 났는데, 뭔 놈의 말들은 그렇게 많은지. 촌 동네 사람들 촌스러운 거 알아줘야 한다. 와인 터널 대표가 인사하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음악회에서 노래 부를 지방 대학 교수라는 사람이 자기 자랑에, 와인 회사 대표에게 하는 인사치레에, 심지어 하나마나한 곡 해설까지 하고 계신다. 기다리다 못한 관객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니까 좋은 음악회는 관객이 만드는거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또 떠든다. 제발 좀!
아무튼, 음악회가 진행되는 동안 시음용 감 와인을 따라준다. 감으로 만든 것도 와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했는데, '와인'에는 포도주라는 의미도, 과실주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잔을 받아들고 살짝 코 끝에 대보니, 음, 감식초같은 향이 난다. 식초 종류 엄청 싫어하는데. 그렇지만 향과는 다르게 맛은 제법 괜찮네. 두 번째 잔은 병을 따 두었기 때문에 향이 좀 날아간 상태여서 마시기 더 편했다.
여기서는 구입한 와인을 보관해 주기도 한단다. 직접 만든 라벨을 붙여서 1년이고 2년이고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찾을 수 있다는 얘기. 우리는 뭐, 그런거 귀찮아 하니까, 1병만 구입해서 들고 왔지만.
늦게 시작한 탓에 늦게 끝났고, 가이드는 마지막 코스인 밀양의 영남루를 생략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누군가가 거길 꼭 가야겠다고 했다.
영남루에서 내려다 본 밀양강. 요 앞 대나무 숲에는 하인에게 겁탈당할 뻔한 아가씨가 자결했다는 전설이 있대나 어쨌대나.
영남루에서 도로로 내려가는 계단. 계단과 경사로를 섞어서 재미있는 모양이다.
광화문에 도착한 시각이 밤 10시 쯤. 기사님이 엄청 밟아대더라니.
근데 시내에 들어와서 많이 밀린다. 아무리 크리스마스 이브라지만 대체 다들 차 끌고 나와서 뭘 하겠다는거야! 광화문에도 청계천에도 인파가 굉장하다. 뭐 루미나리에가 제법 볼 만하긴 하더라만.
하루 종일 좌석 비좁은 버스를 타고 다니려니 무지 힘들더라. 다음 번엔 여기 저기 들르는 거 말고 임실 치즈 만들기랑 영동 와인 터널이랑 두 군데만 들르는 걸로 가 볼까 싶다. 영동에선 산머루로 와인을 만든다고 하니까. (영동은 포도였나. 기억이 잘 안 나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