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야님과는 도쿄에 도착한 첫 날 오후에 사야님이 사시는 건물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아침 9시 비행기이므로 체크인을 하고도 아오야마 지역을 둘러볼 시간이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공항에서도 호텔을 찾는 것도 예상외로 늦어져 아오야마행은 포기해야했다. 대신 신주쿠의 오다큐백화점에서 사야님께 선물할 와인을 사고 위층 서점에 들르는 것으로 만족했다. 한층 전체가 서점이니 꽤 넓다. 그러나 알아볼 수 있는 건 고작 만화책 정도. <신의 물방울> 최신호가 나왔더라.
전에 도쿄에 가 본 적도 있고 해서 전철 갈아타는 걸 헛갈리지 않을거라 자신했지만, 웬걸, 초장부터 이리저리 헤매고 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애인으로 말하자면 거의 완벽한 길치인데(하이드님과 막상막하랄까. -_-), 위기상황에서 작동하는 안테나가 켜졌다나, 의외로 나보다 먼저 길을 알아내 나를 놀래켰다. '애인의 재발견'이라나 뭐라나. 흠.
아무튼, 결국 15분 가량 늦고 말았다. 비는 내리지, 벌써 어둑해졌지(도쿄는 놀랍도록 빨리 해가 진다), 입구에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안 보이지, 이를 어쩌나 걱정했다. Information에 가서 전화를 쓸 수 있냐고 물었는데, 멀끔하게 생긴 아저씨, 여긴 공중전화가 없다, 저 뒤쪽 호텔에 가 봐라, 라고 웃는 얼굴로 모른척한다. 혹시 몇 호인지 알면 연락해주겠다지만 내가 가진 건 전화번호 뿐. 아저씨, 미워요!
밖으로 나와서 공중전화를 찾으러 갈까 어쩔까 하고 있는데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온다. 딱 보니 사야님인줄 알겠다. 우와, 반가워라!
비가 오지만 원래 계획대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사야님이 사오신 샴페인과 우리가 들고간 와인을 Information에 맡기러 들어갔다. 아까 그 아저씨 있으면 친구 만났다고 '흥!' 해 줄랬는데, 그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더라. 칫.
여기는 사야님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절이다. 이 사진을 찍은 때가 아직 5시가 안 되었을 무렵이다. 저렇게나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나온다. (실은 야간촬영 모드로 바꾸질 않았다. -_-;) 한국의 시간이 도쿄에 맞춰져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사야님 말씀으로는 도쿄 사람들은 교토 시간에 맞춰 생활한다고 불평한단다. 도쿄에서 몇일 지내보니 시간이 잘못된게 맞는 듯 하다. 5시면 벌써 서울의 7시 분위기다. 그러니 8시만 되어도 어디 갈 생각이 안 든다.
사야님이 사는 동네는 정말 훌륭하다! 도심 한가운데에 사야님 집은 초고층 건물인데, 조금만 나서면 나무도 많고 골목길로 들어가면 옛날 풍경을 간직한 집들도 그대로 있다. 조용하고 옛스런 멋이 나는 에도 시대의 뒷골목같은 느낌이다.
시바 공원과 도쿄 타워 근처를 지났다. 그런대로 이 사진만은 잘 나왔다. 저 반짝이는 것들은 빗방울.
원래 2시간 코스라고 말씀하셨지만 비가 점점 많이 쏟아져서 일단 건물로 피신. 사야님네 건물 꼭대기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맥주 한 잔 하고, 남편분과 만나기로 한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가기 전에 사야님께서 털어놓은 깜짝 소식은, 그날이 바로 두 분의 13주년 결혼기념일이라는 것! 와우! 결혼한지 하루 된 부부와 13년된 부부라니, 이 또한 멋진 조화다.
옮겨간 식당에서 사야님의 남편을 뵈었다. 사진에서 보던 거랑 똑같다. ^^ 우리 둘 다 영어가 제대로 안 되는 관계로 사야님께서 혼자 바쁘시다. 일어로 주문하시고, 우리랑 한국말로 대화하시고, 남편분이랑은 독일어 영어를 섞어쓰시고. 중국에서부터 내 그러셨다니, 대단하시다. 전에 중국여행 페이퍼 올리셨을 때, 남편분이 중국어를 잘 하시는 줄 알았더랬다. 그런데 아니라는 말씀. ㅋㅋ
이 식당은 '야쿠자'들이 드나드는 맛있는 식당이라고 한다. 별로 넓지 않은 방에서 지나치게 깍듯하게 써빙하는 젊은 처자가 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맛만은 예술이다. 사진 찍은 거 외에도 여러가지가 나왔는데,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먹었다. -_-v 마지막 사진의 유리병은 1인용 술병. 가운데가 비어서 얼음을 넣게 되어 있다. 넷이서 각자 한 병씩 앞에 두고 알아서 따라 마셨다. 훗카이도산 사케가 꽤 맛있어서 술 안 마시는 나도 오랜만에 과음.
저녁 먹고 사야님 댁으로 이동. 샴페인과 와인파티다.
도쿄타워가 보이는 사야님 댁의 전망. 사진을 여러장 찍었는데 모조리 흔들렸다. 역시 취했던게야.
사야님은, 글과 사진에서 풍기던 이미지와 꼭 같은 분이셨다. 쓸쓸하면서도 소녀같은 분위기. 사람사는거야 저마다 나름의 천국과 지옥을 가지고 있을테고, 누구 사는 모습이 부럽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적어도 사야님과 남편분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은, 우리 부부가 닮았으면 하는 부분이다.
사야님과 알라딘에 관해 얘기하면서 알게 된 것, 난 역시 엄청나게 둔하고 믿을 수 없게 눈치없는 사람이라는 것. 뭐 그런 점이 나름대로 매력이라는데 사야님과 애인이 공감. 참. -_-;
어쨌거나, 사야님 덕분에 이번 여행의 목적 중 하나였던 도쿄 뒷골목 산보와 맛 기행을 동시에 이룬데다, 무엇보다 보고픈 분을 만났으니, 그 고마움과 즐거움이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사야님,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