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렌트를 보고 싶었던 건 오로지 조승우 때문이었다. 조승우 출연 분은 티켓 박스 오픈 후 몇 분 내에 매진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나자 더 이상 렌트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공짜로 들어오는 초대권까지 마다할 건 아니고.

지난 일요일 오후 세시 공연을 보았다.
15분 전 쯤 입장했을 때 상당히 비어 있던 좌석은 공연 시작 바로 전에 다 찼다. 신씨네 소극장이 350석 정도라고 하던가. 설마 매회 매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꽤 많은 사람이 찾는 공연임은 틀림없는 듯 하다. 헤드윅과 마찬가지로 조승우의 인기 때문에 다른 출연자의 공연도 덩달아 인기를 끈 것인지, 전 공연(올해가 세 번째라고 한다.)이 워낙 인기가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용과 캐스팅에 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본 "렌트"의 총평을 하자면, 전체적으로 산만하다고 해야 할까, 지루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래저래 몰입이 잘 안되는 범작이랄 수 있겠다. 그러니까, 조승우 출연같은 이슈가 아니라면 굳이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은 아니라는 것.

일단 뉴욕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예술가들과 동성애자, 에이즈 환자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얼마만큼 매력적인 소재일까 궁금하다. 하기야 관객의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 내는 것은 소재 자체가 주는 친근함이나 매력이 아닐 터이니 이건 넘어가자.

원작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공연은 좀 산만하다. 두 세가지 사건이 동시에 벌어지는데, 소극장의 작은 무대가 시선을 집중시키는게 아니라 오히려 산만함을 부각시킨다. 다 해야 16명이 등장하는 군중씬도 그다지 조화롭지 못하다. 큰 무대라면 더 나을까.

'로저' 역할의 신동엽의 연기는 좀 밋밋하고 노래도 약하다. '마크' 역의 나성호(맞나?)는 '노을'이라는 그룹의 멤버라고 하던데, 오히려 뮤지컬 배우라고 해도 믿겠다. '머린' 역의 조서연은 조승우의 누나란다. 얼굴은 어려보이더만. 여튼, 별로다. 자유분방한 성적 매력과 넘치는 예술적 끼를 지닌 인물이라는 설정일텐데, 조서연의 머린은 어느 쪽도 아니다. 좀 신경질적이고 유아적으로 보인다.  

제일 훌륭한 배역은 게이 '엔젤'역의 김호영. 두어 씬이 끝날 때까지 남자인 줄 몰랐다. 내가 둔한건지. 늘씬하게 뻗은 다리랑 잘록한 허리를 움직이는 모습이 틀림없이 여자인 줄 알았다니까. 그러다 고음을 노래할 때 비로소, 어, 남자였어, 하고 놀랐다. 앞서 두 번의 공연에서도 '엔젤'역을 맡았을 뿐 아니라 연극 "이"에서 '공길'이었다고 하니, 예쁜 여장 남자 전문 배우라 아니할 수 없다.

가장 큰 불만은 의자다. 아무리 소극장이라지만 쿠션이 전혀 없는 딱딱한 의자라니, 너무했다. 총 2시간 반의 공연을 보고 나오니 엉덩이랑 다리가 엄청나게 쑤신다. 신씨네 소극장, 앞으로 엄청나게 매력적인 작품이 공연되는게 아니라면, 다시 가고 싶지 않다.

뮤지컬 영화 렌트도 개봉했다던데, 아직 하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되면 그 영화를 봐야겠다. 연출이 문제인지 작품 자체가 나랑 안 맞는건지 비교 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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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7-02-06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거 보고 싶었는데 표가 다 팔려버린 관계로 패스. 영화나 보려구요^^;;

바라 2007-02-06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뮤지컬은 못 보고 영화만 봤는데 생각보다 볼 만 하더라구요. 영화 연출의 장점을 잘 살린 것 같아서... 저저번주인가에 미로스페이스에서 하고 있던데 요새도 하는지는 모르겠네요;

라로 2007-02-06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나 봐야겠어요~.
서울지역과 지방의 문화체험 양적(일단) 차이가 크네요~.
암튼 팬티 사진은 님이 댓글다셨던 페이퍼 바로 위 페이퍼에 있어요.
이벤트에 참여하셔서 이벤트의 질을 높여주시면 어떨지???ㅎㅎㅎ

urblue 2007-02-07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신동엽 출연 회도 표가 없나보죠? 전 초대권 받아서 갔습니다. ^^v

바라님, 뮤지컬 본 사람들 중에서 영화가 더 낫더라는 평도 꽤 많아서 저도 보고 싶습니다. 얼른 찾아봐야겠어요.

nabi님, 지방에 거주하면 가장 나쁜 점이 문화 생활을 누리지 못한다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진 구경 했어요. 정말 내용도 상품도 기발한 이벤트입니다. 참가하도록 노력해봅지요. ㅎㅎ
 



원작 만화야 워낙 재미있었지만, 과연 영화로 옮겨도 그 재미를 유지할 수 있을까? 주진모는 좋아하지 않는 배우(가 아니라 싫어하는 얼굴)이고, 김아중은 CF 외에는 뭘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고, 근데 감독은 대체 누구야? 이런 악조건임에도 친구가 보고 싶다고 한 <조용한 세상> 대신 이 영화를 고른 건 그 전에 본 예고편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택은 옳았다. (<조용한 세상>의 평이 아주 안 좋다. 김상경과 박용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감독을 탓하는 목소리가 크다.)

 

일단 김아중. 연기도 잘 하고 노래도 잘 한다. 노래를 손질했으리란 건 당연히 짐작할 수 있으나 그건 소위 가수들도 마찬가지이므로, 가수보다 낫다. 뚱뚱하고 못생겼고(내 보기엔 절대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만), 그렇지만 인지 혹은 그래서 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어리숙하고 착하고 순진한 강한나에 제대로 어울린다. 그런데 이건 실리콘을 붙여 만든 때문인지도 모른다. 분장 후에 거리를 나갔더니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뿐더러, 실제 뚱뚱한 사람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고 하지 않나. 연기이기보다는 단지 분장 덕을 본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전신 성형 후 제니로 탈바꿈한 모습을 보면서 사라진다. 완벽한 미녀로 변신했지만 남들이 눈치채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뚱뚱했을 때의 습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그녀, 제니의 모습 아래로 한나가 겹친다. 그래, 그 느낌이라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감독 이름을 보지 못해서 나중에 찾아보니 전에 <오! 브라더스>를 연출한 사람이라고 한다. 코믹 전문인가. 하여간 이 영화만 놓고 보자면 감독은 꽤나 영리한 사람이다. 오락 영화답게 관객을 웃겨주다가 클라이맥스에서 감동 모드로 밀어넣는데, 좀 억지스럽긴하지만 못 봐 줄 정도는 아니다. 어차피 만화를 그대로 영화로 옮길 수는 없으니(그런 건 일본에서만 가능한 일인듯.) 만화의 설정과 느낌만 따왔고, 그래서 원작 만화와는 별개로 영화로서의 힘을 가진다. 만화적인 캐릭터도 살아있고, 각각의 에피소드들도 재미있다.

 

한가지 흠이라면 상준씨(주진모)의 캐릭터이다. 초반에 소주 마시기 싫다고, 위스키 계속 마시기 위해서는 한나를 철저히 이용해야 한다고 야비한 얼굴로 말했던 사람이, 어째서 한나를 밀어주게 되었을까. 한번쯤은 너 자신을 위해서 노래하라고 격려해줄 수 있을까. 뭐 한 인간이 한가지 고정된 면만 가지는 건 아니라는 듯 왔다갔다하는 이중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넘어가려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주진모에 대한 비호감이 좀 없어졌다.

 

한나의 가장 친한 친구 역이 출산드라를 했던 김현숙이라고 한다. 이 친구도 노래 잘하고 연기 된다.

 

캐스팅과 시나리오와 연출이 잘 맞아떨어진, 웰메이드 오락 영화. 연말에 가볍게 웃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다만, 성형수술을 할까 고민하는 분이라면 비추. 전신 성형이라도 하겠다고 덤비면 곤란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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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12-18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무실 막내가 시사회 당첨되서 공짜로 보고 왔다고 하더군요..
"김아중"만큼은 대단히 이쁘게 나와요..하더니..영화에 대해 별반 말이
없더라구요.^^

sooninara 2006-12-18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고가 땡기더라구요. 만화도 재미있었는데..

sudan 2006-12-1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연말 보너스 받아서 가볍게 성형이나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보면 안되겠어요. (이렇게 말하면 정말 믿으시나? ㅎㅎㅎ)
만화는 재미있게 봤는데, 그 개그가 영화에서도 통하긴 힘들거라고 생각했었어요. 노래 연기가 어슬프면 가수로 성공하는 스토리도 너무 억지스러울 것 같았구요. 그런데, 얼블루님 리뷰 의외세요. 노래도 제법 되고, 원작의 느낌도 살렸다는거잖아요.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인데, 보고싶다는 생각 드는걸요?

urblue 2006-12-19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보다 더 재미있지는 않구요, 만화적인 영화이긴하지요.
제가 생각해도 좀 의외에요. 제법 재미있었다니까요.

김아중이 못생겼을 때의 기분을 잘 알거라고 하신 님, 처음에 무슨 말씀이신가 했답니다. ㅋㄷㅋㄷ
 



박찬욱 감독은 인터뷰에서 "논리를 들이대면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단다. 이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비판하는 관객들에 대한 나름의 방어일텐데. 그 말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사랑은 논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도 논리가 필요없다? 

영화나 소설에 필요한 것 중 하나가 개연성이다. 대상이 논리적이거나 그렇지않거나간에, 일단 보는 사람이 그 얘기를 납득하고 공감할 수 있으려면, 그럴 듯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는 관객들의 비판에 대해 "논리를 들이대면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라거나 "순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영군과 일순이 정신병원으로 오게 된 이유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서 하필 '사랑'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순수하지 못해서 사랑을 모르는건가.

임수정도 정지훈(이라고 해야 한단다. '비'가 아니라. -_-)도 하는 짓이 귀엽다. 그런데 지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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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12-12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감독이 그런 말을 했군요. 저의 경우 이 영화 별로 안 댕겼음에도 불구하고 옆지기가 보자하고, 감독이 박찬욱이라 봤었는데 정말 힘겨웠어요. 너무 지루해서.... 연기를 그렇게 잘 하는데도 영화가 그렇게 보기힘들고 보기 싶은 때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니까요. ^^

urblue 2006-12-12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알라딘 이벤트에서 예매권 받아서 봤습니다. 아까울게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

Mephistopheles 2006-12-12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혹자는 "박찬욱이니까 괜찮아" 라고 할지도....^^
어쩌면 "정지훈나오니까 괜찮아" 일지도 모르고요..^^

nada 2006-12-12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댓글이 재미있어요. 그런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발언, 좀 무책임하네요. 니 눈에 안 보이는 건 니가 순수하지 못해서다..?

urblue 2006-12-12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제 친구가 아마 그렇게 얘기할 것 같습니다. "정지훈 보는 걸로 만족~"이라구요. ^^

꽃양배추님, 차라리, 내 맘대로 만들었으니까 알아서 봐라,라고 말하는 편이 낫겟다 싶어요.

sandcat 2006-12-1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보그여도 괜찮아, 인 줄 알았어요. 하여간에 안 볼래요. -_-

chaire 2006-12-1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무척 흥미는 가는데, 지루할 거 같더라고요. 저도 4천원 할인쿠폰 받았으니 속는셈치고 한번 봐볼까요. (근데, 게을러서 안 가게 될 거 같아요 :)

urblue 2006-12-12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드캣님, 그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사로는 '(네가) 싸이보그여도 (난) 괜찮아'가 아니라 '(네가) 싸이보그지만 (~해도) 괜찮아' 랍니다.

카이레님, 저만 지루한가 했더니, 제 옆에 앉았던 사람들(세 명이 왔는데)은 일어서면서, '거봐, 재미없잖아~' 어쩌구 떠들더라구요. 그 사람들 말에 의하면 중간에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네요. 전 못 봤지만.

패스해도 괜찮아님, 실은 저도 셋 다 그저 그렇지만, 어쨌거나 정지훈이랑 임수정은 귀엽습니다. ^^

merced 2006-12-1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그래요, 왜. 난 안 지루하고 재미있었는데... 하지만 박찬욱 감독이 한 말은 맘에 참 안 드느네요. 게다가 난 또 주제가 사랑인지도 몰랐다는... 일순은 측은지심 강하고 적당히 착하잖아요. 밥 안먹는 영군이 안타까워 마음쓰다가 정들었다, 그 부분은 그냥 이렇게 보아넘겼다구요.

예의바름을 훔친다거나 훔쳤던 탁구실력을 돌려준다거나 - 성격이나 재능을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다는 상상, 내가 싸이보그라면? 이라는 상상. 누구나 하는 잠깐의 백일몽을 풀어놓은 것이랄까요,
그러니까 보통 "아, 내가 싸이보그라면 ... 할 텐데" "저 사람의 재능을 내가 가질 수 있다면... 할 텐데" 로 그치는 1분짜리 1인칭 백일몽을 계속 이어나가서, 그 두 상상이 만나서 관계를 맺으면 어떻게 되는지, 90분짜리 3인칭 백일몽, 남일 구경해보자...

가 이 영화의 소재고 주제라고 (소집단의 서사를 계속 풀어내면 어느 영화 어느 소설에라도 우정이나 사랑은 싹틀 수밖에 없는 거니까) 감독의 말도 영화 평도 들어본적 없이 혼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믿으면 정신병이죠" 라는 설정이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재밌게 봤다는 거 아닙니까... ㅎㅎ

merced 2006-12-13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 개념상 영군은 안드로이드죠. 순전히 "싸이코가 아니라 싸이보근데요" 라는 대사를 넣으려고, 싸이보그라고 한 것 같아요.

urblue 2006-12-13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영군은 안드로이드지, 싸이보그가 아니라. 그건 생각도 안 하고 봤지만.
네 말대로 상상이나 하나하나의 에피소드가 나쁜 건 아닌데, 그걸 죽 나열해놓으니 보다 지겹더만. 그리고 심지어 엄마 사진까지 땅에 묻을 정도로(집 나간 엄마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를 벗어버릴 정도로) 영군이 일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된 이유를 모르겠다는거야. 그냥 정든걸로는 설명이 안 되지 않나.
암튼, 너랑은 영화 취향이 틀리다는 걸 다시 느낀다. 전에 네가 재미있다고 한 영화들이 나는 별로였단 말이지. 너도 그랬지? ㅎㅎ
 



<판의 미로>를 판타지라고 할 수 있을까. 판타지의 기본 전제는 ‘다른 세계’가 실재한다는 믿음이다. <해리포터>의 호그와트와 <나니아 연대기>의 나니아는, 적어도 작품 속에서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데 <판의 미로>에서는 이 점이 불분명하다. 요정들이 사는 지하 왕국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단지 오필리아의 환상인 것일까.

 

이 영화가 다른 판타지 영화들과 구분되는 또 다른 점은 역사성에 있다. 1944년, 내전이 끝나고 프랑코가 정권을 잡았으나 곳곳에서 게릴라들의 반정부 저항이 계속되고 있던 스페인, 그것도 게릴라와 정부군이 대치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삼았으니, 애초에 아동용 판타지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필리아가 처한 상황을 보면 이모 부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해리 포터의 고통 따위는 감히 고통이라고 언급할 수도 없다. 차라리 커트 보네거트의 <제 5도살장>을 떠올릴 수 있다.

 

왜 재혼을 했느냐고 묻는 오필리아에게 엄마는 혼자 살기가 힘들었다고, 너도 크면 이해할 거라고 대답한다. 세상은 냉정하고 잔혹한 곳이니까. 엄마의 말 그대로 오필리아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무섭다. 게릴라 토벌대 대장인 새아버지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군인이다. 포로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산 속에 숨어 있는 게릴라들은 식량도 의약품도 부족하여, 마취도 하지 못한 채 상처 입은 다리를 톱으로 잘라내야 한다. 이런 일들이 모두 오필리아의 시야에 잡히는 것은 아니지만, 새아버지의 싸늘한 눈빛과 게릴라를 돕는 사람들의 비밀스럽고 조심스러운 몸짓에서 일찌감치 세상에 대한 공포를 느낄 법 하다.

 

이런 상황에서 오필리아가 지하 왕국의 공주였다고, 보름달이 뜨기 전에 세 가지 임무를 마치고 지하 왕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요정 판은, 오필리아의 공포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도망치기 위한 출구였을지도 모른다. 오필리아가 갇혀 있던 방에서 탈출한 것을 제외하면 지하 왕국이나 요정의 존재, 마법 등이 실재한다고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영화는 상당히 도식적으로 진행된다. 한 쪽에는 끔찍한 전쟁 상황이, 다른 한 쪽에는 동화 같은 판타지의 세계가 펼쳐지지만, 양쪽 모두 딱 정해진 틀을 따라 움직인다. 오필리어에게 주어진 임무조차 용기, 인내, 희생이므로, 어떤 식으로 결말을 향해 나아갈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오필리어가 임수 수행 중 실수를 하는 것도 배우의 표정과 동작만 리얼할 뿐 설득력 있는 이유는 없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이 내게는 엄청나게 충격적이다. 어째서? 이미 충분히 예상한 결말인데. 그랬다. 알고 있었는데도, 심장이 아프고 눈물이 차오르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을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진 힘일까. 지독히도 끔찍스런 현실의 장면들(피튀기거나 잔인한 묘사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과 햇빛이 들지 않는 평화롭고 고요한 지하 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오필리아의 모험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보여주며 끝을 향해 마구 몰아가는 용기. 그리하여 그 불행한 혹은 행복한 결말을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 목격하고 판단하게 하는 냉정함.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힘겨웠지만, 올해 본 영화들 중 최고라고 꼽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이 작품을 ‘아름답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한 번 더 보고 싶고, DVD를 구입하여 소장할 생각이지만, 다시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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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12-04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독이 감독인지라...그 분위기만큼은 대단할 꺼라고 생각되는군요..^^

BRINY 2006-12-0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단순한 애들 영화가 아닌가봐요. 보러가기!

merced 2006-12-04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볼까 했는데, 아닌게아니라 어제 보고 온 사람이, 잔인하다고 해서, 또 단숨에 말까 하고 있는데, 헷갈려요.

urblue 2006-12-04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전 <헬보이>를 대강 본 거 밖에 없는데, 이거 보고 나니 이 감독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집니다. 현실 부분은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세고, 판타지 부분은 모든 판타지가 비교되고 마는 <반지의 제왕>과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네요.

BRINY님, 이 영화에 대한 악평이 많던데, 애들용 판타지인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아마 끔찍했을지도 모릅니다. 절대 애들 영화 아니에요. 15세 이상이던데, 사실 그것도 좀 약한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urblue 2006-12-04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rced, 엄청 잔인하더라. 눈뜨고 보기 힘들다. 근데, 영화 자체는 꽤나 훌륭하단 말이지. 그니까, 다시 보고 싶은데, 다시 못 보겠다고. -_-

Mephistopheles 2006-12-04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로노스, 미믹, 헬보이, 그리고 블레이드 2까지..영화의 색채가 좀 진했다고나
할까요. 약간의 고딕스러운 분위기가 지배적인 영화들이였던 기억이 납니다.^^

아영엄마 2006-12-04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제목에 혹해서 보고 싶은 마음은 드는데....잔인한 장면들은 안 보고 판타지 쪽만 보고 싶지만 그래서는 이 영화를 봤다고 할 수는 없는 거겠죠? ^^:

sudan 2006-12-05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앗. 얼블루님. 켄로치와 반지의 제왕이 함께 거론되는 영화는 대체 어떤거죠!! 전 유난히 끔찍한거 잘 못 보는데, 이러시면 곤란해요. ㅠㅠ

urblue 2006-12-05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아, 블레이드 2도 있었군요. 고딕스러운 분위기라... 그런 것도 같네요. ^^

아영엄마님, 잔인한 장면들을 안 보면 영화가 엄청 짧을텐데요. ^^;;

수단님, 음. 켄 로치와 반지의 제왕을 함께 거론하는 건 저 뿐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 )a 우리처럼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경우, 하다못해 애들 위인전에도 손톱 뽑는 고문 이야기가 등장하잖아요. 근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서는, 서양 애들은 이런 정도로도 충격받나, 싶은거죠. 그에 비해 <판의 미로>는 사실감이 넘칩니다. 실제로 오필리아의 새아버지같은 군인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아우, 그 장면들 생각만해도 얼굴이 찌푸려지고 울컥해요. ㅜ.ㅜ

BRINY 2006-12-05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근데 이거 하는 극장이 별로 없네요. 여긴 서울이 아니라 더더욱.

urblue 2006-12-05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고를 많이 하길래 극장을 좀 잡은 줄 알았더니 아닌가 보네요. 보시면 좋을텐데.
 



안녕! 헤어짐이 아닌 만남의 인사이고 싶습니다.
나는
재일 교포의 메카로 불리우는 도시,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빠 셋의 귀여운 막내 여동생으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15살에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일본으로 오셨고 해방을 맞은 후 정세에 따라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첫눈에 반해 열렬히 프로포즈하여 결혼에 성공하셨다고 하는데, 평소 엄격한 성격의 아버지도 이 얘기가 나올 때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시곤 합니다. 부모님은 결혼 후 함께 열정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셨고, 오빠들이 청소년이 되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국인 북한으로 보낼 결심을 하셨습니다.
오빠들이 떠나던 날. 6살이었던 나는
귀국의 의미도 모른 채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오빠들을 태운 배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셨습니다. 나는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죽을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후 평양의 실정을 들은 어머니는 오빠들에게 물자를 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린 조카가 난방이 안된 학교에서 동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이런 짓은 어미 밖에 못해준다고 웃으시면서 겨울마다 큰 상자에 일회용 손난로를 가득 담아 보내주고 계십니다.

 

- 다음 영화 소개 중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양영희 감독은 수차례 평양을 방문했다고 한다. 열혈 조총련 활동가인 아버지와 어머니, 귀국자로서 평양에 살고 있는 오빠 셋을 두었으니, 당연한 방문일 터이다.

 

감독의 홈비디오에 담긴 원산항과 평양은 퇴락한 도시의 이미지를 풍긴다. 원산항에는 고층빌딩도 여럿 보이지만, 처음 방문할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화가 없다 하고, 오빠들이 살고 있는 평양의 아파트 단지에는 여기저기 깨져나간 도로가 방치되어 있다. 금이 간 아파트 벽 아래 보자기 두 장 깔아놓고 고추를 말리는 풍경은, 사람 사는 정겨움보다 스산함을 먼저 느끼게 한다.

철따라 아들 손주들을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는 어머니, 당신 돈으로 북한에서 진갑 잔치를 열고도 조국의 은혜, 김정일 장군의 배려 덕이라고, 충성을 다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아버지.

정체된 북한의 현실과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김일성 수령, 김정일 장군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아버지의 신념 사이에서 착잡할 수 밖에 없을 딸의 심경이 카메라를 통해 전해진다.

 

그러나 우울한 영화는 아니다. 장난스레, 고집스레 어려운 질문과 카메라를 들이미는 딸에게 일흔을 넘긴 아버지는 너털웃음과 진지한 대답과 바보라는 투정을 버무려 애정으로 돌려준다. 한동안은 아버지와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는데, 국적에 관한 문제는 절대 언급할 수 없는 금기였다는데, 노활동가는 이제 딸의 자유로운 삶을 인정한다. 직업다운 직업 한 번 가져본 적 없는 남편과 평양의 아들 손주들을 바라지하면서도 역시 활동가로 살아온, 하하하하 웃기 좋아하는 쾌활한 어머니의 모습도 보기 좋다. 북한의 손주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여느 곳의 아이들처럼 재롱이 많고, 큰 손자는 피아노를 정말 잘 친다. 오히려 유쾌할 정도다.

 

현재 아버지는 투병 중이다. 다시 평양을 방문할 수 있을까. 큰 손자의 멋진 피아노 연주를, 이 노부부는 다시 듣게 될까. 그럴 수 있기를, 그저 조그맣게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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