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헤어짐이 아닌 만남의 인사이고 싶습니다.
나는
재일 교포의 메카로 불리우는 도시,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빠 셋의 귀여운 막내 여동생으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15살에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일본으로 오셨고 해방을 맞은 후 정세에 따라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첫눈에 반해 열렬히 프로포즈하여 결혼에 성공하셨다고 하는데, 평소 엄격한 성격의 아버지도 이 얘기가 나올 때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시곤 합니다. 부모님은 결혼 후 함께 열정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셨고, 오빠들이 청소년이 되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국인 북한으로 보낼 결심을 하셨습니다.
오빠들이 떠나던 날. 6살이었던 나는
귀국의 의미도 모른 채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오빠들을 태운 배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셨습니다. 나는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죽을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후 평양의 실정을 들은 어머니는 오빠들에게 물자를 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린 조카가 난방이 안된 학교에서 동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이런 짓은 어미 밖에 못해준다고 웃으시면서 겨울마다 큰 상자에 일회용 손난로를 가득 담아 보내주고 계십니다.

 

- 다음 영화 소개 중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양영희 감독은 수차례 평양을 방문했다고 한다. 열혈 조총련 활동가인 아버지와 어머니, 귀국자로서 평양에 살고 있는 오빠 셋을 두었으니, 당연한 방문일 터이다.

 

감독의 홈비디오에 담긴 원산항과 평양은 퇴락한 도시의 이미지를 풍긴다. 원산항에는 고층빌딩도 여럿 보이지만, 처음 방문할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화가 없다 하고, 오빠들이 살고 있는 평양의 아파트 단지에는 여기저기 깨져나간 도로가 방치되어 있다. 금이 간 아파트 벽 아래 보자기 두 장 깔아놓고 고추를 말리는 풍경은, 사람 사는 정겨움보다 스산함을 먼저 느끼게 한다.

철따라 아들 손주들을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는 어머니, 당신 돈으로 북한에서 진갑 잔치를 열고도 조국의 은혜, 김정일 장군의 배려 덕이라고, 충성을 다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아버지.

정체된 북한의 현실과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김일성 수령, 김정일 장군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아버지의 신념 사이에서 착잡할 수 밖에 없을 딸의 심경이 카메라를 통해 전해진다.

 

그러나 우울한 영화는 아니다. 장난스레, 고집스레 어려운 질문과 카메라를 들이미는 딸에게 일흔을 넘긴 아버지는 너털웃음과 진지한 대답과 바보라는 투정을 버무려 애정으로 돌려준다. 한동안은 아버지와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는데, 국적에 관한 문제는 절대 언급할 수 없는 금기였다는데, 노활동가는 이제 딸의 자유로운 삶을 인정한다. 직업다운 직업 한 번 가져본 적 없는 남편과 평양의 아들 손주들을 바라지하면서도 역시 활동가로 살아온, 하하하하 웃기 좋아하는 쾌활한 어머니의 모습도 보기 좋다. 북한의 손주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여느 곳의 아이들처럼 재롱이 많고, 큰 손자는 피아노를 정말 잘 친다. 오히려 유쾌할 정도다.

 

현재 아버지는 투병 중이다. 다시 평양을 방문할 수 있을까. 큰 손자의 멋진 피아노 연주를, 이 노부부는 다시 듣게 될까. 그럴 수 있기를, 그저 조그맣게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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