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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인권영화제를 보러 갔다. 5시 상영작은 <이반검열>과 <사레가마 송(Sa Re Ga Ma Song)> 4시 반쯤 영화관에 도착했는데 한산해보였다. 역시, 요즘 누가 이런데 관심을 가질까 싶었다.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으니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다. 요즘은 줄 서서 기다리는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다 들어갈 때까지 그냥 기다리기로 한다. 그런데 웬걸, 줄이 엄청 길다. 상영관이 아주 좁지도 않은데 거의 다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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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검열>은 학교 내의 이반(異般)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천재라는 중학생이 스스로 카메라를 들고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친구들과의 인터뷰를 담았다. 담배 핀 친구 때문에 가방 검사를 당했고,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가 발각되었는데,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제재를 가했단다. ‘너 이반이야? 걔랑 사귀어?’ 라며 교사가 아이들을 비웃고, 담배 피우거나 술 마신 아이들보다 훨씬 심한 처벌을 내리고, 부모를 불러 사실을 알리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한단다. 다른 친구들에게 소문이 나서 따돌림이나 린치를 당하기도 한다. 결국 대부분의 아이들은 전학을 택한다. 천재의 팔에는 흉터가 가득하다. 속상하고 화날 때마다 자해를 한 것이다. 천재도, 인터뷰를 한 다른 아이들도, 레즈비언이 뭐가 나쁘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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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처음 든 생각은 이 아이들이 과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여자 아이들끼리의 동성애적 우정은 존재했다. 6년을 여학교라는 닫힌 공간에서 지내면서, 간혹 남자 친구가 있는 애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여자 친구들끼리 좋아했다. 손 잡거나 팔짱 끼는 건 예사고, 학교 내의 보이시한 아이들은 잘 생긴 남자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내 경우에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여러 번 받았거니와 엉겁결에 뽀뽀를 당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여학교를 졸업하면서 이런 감정은 남자친구에게로 옮아갔다. 영화 속의 아이들도 이런 과정을 겪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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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동성애에 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여자 친구들끼리의 동성애적 우정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성애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로 이성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해지는 반면 동성 간의 애정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과도하게 반응하는 모양이다. 학교 내에서 교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을 아우팅시키고,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아이들을 처벌하고 억압한다는 사실이 낯설고 놀랍다. 그야말로 인권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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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다닐 때 학교에 동성애자 모임이 생겼다. 그 모임에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대자보로 써 붙이곤 했다. 상당한 이슈였으므로, 주의깊게 까지는 아니지만, 대자보는 거의 읽었고 주변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도 하곤 했다. 당시의 내 결론은 개인의 선택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므로 다른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손가락질 당하거나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원론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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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 보니 동성애를 바라보는 내 시각이 이미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고 있는 성인에 국한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성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었다는 것. 영화가 끝난 후 연단에 올라온 레즈비언 상담소의 직원은 정보가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알게 되면 성 정체성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여자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던 많은 아이들 중에 실제로 이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이제서야 한다. 영화 속 아이들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저 애들이 뭘 알고 저러는 걸까.’라고 생각했던 걸 반성한다. 그런 감정은 누구나 겪는 한때의 감정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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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내게 커밍아웃을 한 사람이 있다. 며칠 동안 같은 방(더블 침대)에서 생활했는데, 마지막 날 그녀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말했다. 그때 난 놀라우리 만치 담담했다. 그녀가 망설이면서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짐작을 했는지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다. 그 얘기를 듣고도 한 침대에서 자는 걸 어색해하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난 심정적으로는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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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분짜리 짧은 영화를 보고 이런 저런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서, 사실 전혀 정리가 안 된다. 일단은 떠오르는 대로 거칠게나마 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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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 Re Ga Ma Song>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레미송을 네팔식으로 바꾼 것이다. 네팔의 초등학교 아이들이 가사를 쓰고, <사운드 오브 뮤직>을 흉내내어 일종의 뮤직 비디오를 만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이해를 못했다. 어색해하는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이 보기에 영 불편했다. 저런 식으로 외국 영화를 흉내내는 영화를 제작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싶었다.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후반에 네팔의 노래를 부르면서 훨씬 즐거워하는 아이들이 나온다. 차라리 저런 모습을 영화로 만들지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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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영화의 제작 이유를 설명한다. 네팔에서는 초등학교가 의무 교육이지만 실제 취학 아동은 전체 아동의 50% 수준이라고 한다. 그런데다 사립학교와 공립학교의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공립학교 교사의 월급이 우리나라 돈으로 4만원 정도인데 사립학교의 한 학기 등록금이 600만원이란다. 공립학교는 예산 부족으로 예체능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짧은 영화는 초등학교 음악 교육용으로 쓰일 거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서야 그렇다면, 이라고 이해했다. 빈부 격차는 전세계를 막론하고 점점 커지는 모양이다.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