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오페라'라는 걸 봤다.
간간이 뮤지컬은 보러 다녀도 오페라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 '한러교류축제'의 공연작이 얼마 전 읽은 니콜라이 레스코프 원작의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였기에 호기심이 발동했다고나 할까.
쇼스타코비치가 쓴 오페라로, 1934년 초연 이후 200회 이상 공연되는 대인기를 누렸다고 하는데, 1936년 이 작품을 본 스탈린이 중간에 자리를 떠 버리자 이후에 공연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9월 23일 토요일 저녁, 공연장 성남아트센터로 향했다.
공연장 입구는 한산했다. 인기있는 뮤지컬의 경우 공연 시작 30분 전쯤이면 로비가 관객들로 꽉 차기 마련인데, 이쪽은 이거, 객석이 텅텅 비는 거 아니야, 싶을 정도였다. 입장해보니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빈 좌석이 꽤 눈에 띄었다. 물론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 돈 내고 표를 끊었는지 몹시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말이다. (중간 휴식 시간 이후에 앞 자리가 텅 비어 버려 좀 놀랐다. 역시 돈 안 낸 사람들인게야.)
관람 총평을 말하자면, '기대 이상'이라고 해야겠다. 사실 이 공연이 아주 좋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오페라가 어느 정도는 지루할 것이라는 내 예상이 제법 빗나갔으므로 어쨌거나 '기대 이상'이 된다.
이 날 주인공 카테리나 역할을 맡은 카린 그리고리안은 이 오페라단의 대표 가수는 아니라고 한다. 22일과 24일에 공연한 스베틀라나 소즈다텔레바가 사실상의 주인공. 하지만 보지 않았으니 역시 비교 불가. 카린 그리고리안의 연기와 노래는 나름 훌륭했다. 자리가 좀 멀어 표정까지 자세히 볼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지루한 일상에 몸부림치다 하인과 눈이 맞고, 그에게 집착하는 귀부인의 모습은 충분히 표현했다.
남자주인공 세르게이 역할의 가수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음색도 평범하고. 극 전개 상 윗옷을 자주 벗어던지고 맨살을 드러내는데 배가 좀 나왔단 말이지. 이런 바람둥이 역할이라면 좀 더 몸이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 ^^;
원작에선 비중이 작은 시아버지 보리스의 역할이 조금 더 커졌다. 기 보다 많이 바뀌었다. 젊었을 적 좀 놀았던 이 할아버지는 세르게이만 아니었으면 며느리의 방에 뛰어들었을, 늙은 난봉꾼에 가깝다.
농가가 배경이었던 원작에 비해 무대는 기계실 같이 꾸며져 있다. 이 배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바뀌지 않는데, 3막까지는 꽤 괜찮았지만 4막에서는 좀 바꿔주었으면 어떨까 싶다. 일꾼들은 검정색의 가죽 앞치마를 입고 등장하는데 훨씬 투박하고 거친 느낌을 준다. 그런 가운데 붉은 드레스를 입은 카테리나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사진에 보이는, 일꾼(죄수)들이 앉은 의자는 카테리나의 결혼식 장면에서는 흰색 비닐커버가 씌워진 채 만찬 장면을 표현한다. 커버를 벗겨내고 순식간에 감옥 장면을 만들어내는 아이디어가 꽤 괜찮다.
4막에서 등장하는 카테리나의 연적 소네트카는 카테리나가 1막에서 입었던 붉은 드레스를 입고 나온다. 물론 유형을 가는 사람들이 붉은 드레스나 웨딩 드레스를 입을 리 만무지만, 세르게이를 중심으로 예전 카테리나의 자리를 꿰 찬 소네트카를 대비하여 표현한 것은 인상적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오페라를 만들때부터의 문제인지, 이번 공연의 각색 혹은 번역의 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내 보기에 꽤 중대한 오류는 아기에 관한 것이다. 카테리나는 세르게이의 아이를 갖는데, 극 중 전혀 언급이 없다가 갑자기 아기 인형을 치마 속에서 꺼내 분질러버리는 장면이 나왔다. 내용을 모르고 보는 관객이라면 어안이 벙벙할 듯. 하긴, 그 장면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 원작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카테리나와 세르게이가 유형을 떠나는 것도, 카테리나가 연적 소네트카와 함께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성 싶다. 원래 노래 가사가 그런지 번역이 엉망인지 알 수 없으나 제대로 표현을 못 해 준데다가 번역의 화면이 무대랑 맞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었으니. 이런 진행상의 실수는 없어야 하는 거 아닌지.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의외로 흥겹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더라.
2시간이 넘는 공연이 지루한 줄을 몰랐다. 오히려 좀 더 가까이에서 배우들의 표정까지 볼 수 있었으면 훨씬 더 재미있었을 것 같았다. 다른 오페라를 또 보게 될 지(너무 비싸서 말이지!) 모르겠지만 오페라도 흥미롭게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경험이긴 하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