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는 대체로 감상적이며 일상적인 것도 특이하고 대단히 좋거나 나쁜 것으로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에서 뒤적거려본 많은 여행기가 그러하고, 그도 그럴 것이 여행은 설렘과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반하며 여행자에게는 일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야 아무려면 어때, 하지만 짜증이 날 때는 책이 호들갑 감상 일색인 경우 -- 바라보는 풍경마저 쓸쓸하고 외롭다거나, 현지인과 잠시 나눈 몇마디에 많이 감동받고 대단한 인연인 척 한다거나, 화려한 낮거리의 이면에 빈민가의 풍경이 가슴을 저민다거나 (어딜 가도 그렇지 않나요? 당신이 사는 곳의 대조적인 사람살이를 들여다보고 그렇게 가슴아파한 적이 있나요? 라고 쏘아주고 싶다) -- 그런데 웬만한 여행기가 이러고보니 여행서는 인터넷 서점에서 고르기가 무섭고, 반대로 좋은 여행기를 읽으면 많이 반갑다. 예를 들면:
느린희망, 유재현 지음, 그린비, 2006
사색기행,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4
에세이 온 아메리카, 이윤기 지음, 월간에세이, 1997
김영하의 여행자 - 하이델베르크 (아트북스)는 반가운, 재미있는 책이다. 책은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 조금을 곁들인 단편소설과, 하이델베르크의 이런저런 풍경 사진들과, 그 사진들을 찍은 카메라에 대한 에세이.
1. Short Story 밀회
작가가 소설가니까 소설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 없으면 실망이지.
주인공(=화자)은 하이델베르크에 간 "여행자"이다. 첫 세장을 읽는 동안은 어? 이것도 에세이인가 했었다. 화자의 시선이 좀 이상하다 싶더니 결말에 이르면 숨이 턱 막힌다. 바로 첫페이지로 돌아와 두 번 읽게 되는, 가슴이 미어지는 이야기.
홍콩 같은 데서 쇼핑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일주일씩 잘 놀고 오는 친구가 있다. 친구는 "여행한다" 가 아니라 거기서 "살아보는" 거라고 한다. 나는 "거기서 밥벌이를 하지 않고 일주일 후건 한달 후건 돌아갈 집이 있는 경우에는 거기서 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여전히 이방인의 여행일 뿐이지" 라고 말했었다.
서사-플롯의 호흡이 좋은 소설가이고보니 거기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욕심내지 않을까 별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작가가 하이델베르크를 짧게 여행했는데, 사는 사람인 척 이야기를 썼다면 다음 시리즈는 안 읽었을 것이다. (허구라고 해서 삶의 무게를 가벼이 재거나 현실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앞으로의 시리즈에도 계속 재미있는 "여행자"의 이야기가 있기를 바란다.
2. Eyes Wide Shots in Heidelberg 내가 만난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의 전경을, 도시의 대표적인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 아니고, 카페에 앉아서 한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고성에 오르고 상점을 기웃거리는 여행자의 눈이 가닿은 이런저런 풍경이다. 방금 읽은 소설의 사진 버전이라 해도 좋다.
3. Essay 콘탁스G1과 장 보드리야르
사진기와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8개의 카메라로 8개의 다른 도시를 담는다 한다. 사진기와 별로 친하지 않은 나는, 여행 자체에 대해 쓴 세번째 파트가 좀 더 길었으면 좋겠지만.
이 책을 읽고 하이델베르크에 가고 싶은가 하면, 그건 아니다. 하이델베르크에 간대도 나는 "죽음을 생각하기에 좋은 곳"과는 다른 생각을 할 것이고, 무서우니까 공동묘지는 절대로 안 간다. 소설가 김영하의 팬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여행자>를 좋아한다. 여행자니까 할 수 있는 말들 볼 수 있는 것들을, 여행자의 한계를 넘지 않고, 독특한 구성으로 맛있게 풀어낸 책.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하이델베르크를 둥실 떠다니다 온 것 같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몰래 빌려온 것만 같은,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가본 도쿄, 나도 가고 친구들도 가서 들은 이야기도 본 사진도 많은 도쿄, 거기서 <여행자>는 무슨 색다른 이야기를 할까, 다음 책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