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의 평범성 ㅣ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평점 :
20210830 #시라는별 53
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
꽃이 대충 피더냐.
이 세상에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소리 내며 피더냐.
이 세상에 시끄러운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어떻게 생겼더냐.
이 세상에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모두 아름답더냐.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언제 피고 지더냐.
이 세상의 꽃들은 모두
언제나 최초로 피고 최후로 진다.
이산하 시인이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이후 22년만에 꽃으로 피어 올린 『악의 평범성』 은 시인이 말하듯 "산 자들에 대한 한결같은 그리움으로" 쓴 추도 시집이다. 이 시집은 나에게 올해 최고의 시집으로 자리 잡을 듯하다. 그리고 이 시집을 읽는 독자라면 자우메 카브레의 『나는 고백한다』를, 『나는 고백한다』를 읽는 독자라면 이 시집을 읽으라고 강력 추천하고 싶다. 앞서도 말했듯 이 시집은 시로 읽는 『나는 고백한다』 같기 때문이다. 두 책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는 악이란 무엇인가, 악은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그 묵직한 주제를 역사와 인간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이리 엮고 저리 엮어 비장하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시집에 수록된 71편의 시를 느리게 곱씹어가며 읽는 동안 제주 4.3 항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라산』으로 숱한 고초를 겪은 시인이 세상을 향한 관심과 인간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온 것이 놀라웠다. 시인은 굵직한 역사의 어둠에 지워졌거나 그늘에 가려진 사건들과 인물들을 서사적 형태로 전면에 되살려 놓았다. 그의 펜 끝에서 나치와 아우슈비츠, 6.25 전쟁, 제주 4.3, 5.18 광주, 세월호, 동백꽃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세월호 등등의 크고작은 사건들이 내가 몰랐던 다른 이야기들과 맞물려 다른 시각으로 펼쳐진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그랬단 말이야? 이게 말이 돼?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내가 알고 있는 역사란 얼마나 좁쌀 만한가 라는 사실을 거듭거듭 확인할 수밖에 없어 입 안 가득 씁쓸함이 고이곤 했다.
'지퍼헤드'(Zipperhead)가 한국전쟁 때 미군지프에 깔려 죽은
북한 인민군들 머리와 몸의 바퀴자국이 마치 지퍼무늬 같다고 해서
<플래툰> 영화에도 나오듯 미군이 한국인들을 경멸할 때 쓰는
가장 잔인하면서도 가장 슬픈 말이란 걸 한참 뒤에 알았다. (<지퍼헤드 2> 중)
이산하 시인의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얼떨결에 북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당한 친구를 등에 업고 후퇴하던 중에 포로가 되었던 모양이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중립국을 선택했지만 행정착오로(인생은 정말 알 수가 없다) 남한에 잔류하게 되어 주왕산 오지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혼자 밭을 일구고 덤으로 목수 노릇도 하며"
자기 손에 죽어간 자들의 십자가로 오두막집 울타리를 쳤다.
그렇게 청년은 날마다 비루한 생의 껍집을 대패로 밀고
미리 짜놓은 자기 관짝에 못을 박으며 전쟁의 악몽을 잊어갔다. (<지퍼헤드 1> 중)
이런 피도 대물림되는 것일까. 한평생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쨌건 사는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이든 겪을 수 있다. 이승에서 지옥을 만났을 때, 인간에게서 악마를 보았을 때, 양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을 때, 그런 경험을 한 후 인간의 태도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의 아버지와 시인이 택한 길은 구도자의 삶 같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속이고 속여도, 그럼에도 대쪽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그래서 더 대견하고, 그래서 더 아프다.
끝을 뾰족하게 깎으면
날카로운 창이 되고
끝을 살짝 구부리면
밭을 매는 호미가 되고
몸통에 구멍을 뚫으면
아름다운 피리가 되고
바람 불어 흔들리면
안을 비워 더욱 단단해지고
그리하여
60년 만에 처음으로
단 한 번 꽃을 피운 다음
숨을 딱 끊어버리는
그런 대나무가 되고 싶다.(<대나무처럼> 전문)
2015년 제65주기 의성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를 맞아 시인은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을 위무하는 추도시 <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를 썼다. 죽은 아비가 시인의 입을 빌어 말한다.
그리고 이 아비의 제사상을 차리는 데 60년이나 걸렸다고 비통해하지 말거라.
600년 이상 걸려도 사과 하나, 배 하나
구경 못하는 넋들이 얼마나 많더냐.
그리고 나의 손주들아, 이 야만의 세월을 탓하거나 저주하지 말거라.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죽은 자보다
더 말이 없지 않더냐.
. . . .
. (중략)
그대들이 어디에 있든 작고 낮고 가볍고
그리고 아주 느린 것들의 두 손을 번쩍 들어주며
그들 이름을 크게 불러주는 사람이 되거라.
역사의 정수리에 우뚝 선 자,
그가 곧 깨달은 자가 아니겠느냐.
거듭 말하노니,
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
현대사 앞에서 우리 모두 문상객이 아니라 상주이거늘
끝까지 그대들이 그대들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그대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모두 숨쉴 때마다 언제나 '최후의 한 사람'이다.
"작고 낮고 가볍고 그리고 아주 느린 것들의 두 손을 번쩍 들어주"는 사람. 그러니까 약자의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사람이 되자고 시인은 말한다. 이 시집에는 그렇게 살았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던 벤야민,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운 니체, 아우슈비츠에서 금지된 베토벤 곡을 연주했다가 바이올린과 함께 교수대에 매달린 어린 소녀, 매장의 모든 식료품을 예멘 난민 구호품으로 보낸 독일 마트 주인, 자본의 위선과 기만을 거부하다 심야극장에서 심장이 멈춘 기형도 시인, 좁은 독방에 잠시 머물다 가는 "한 줌 햇빛"으로 20년 감옥살이를 버틴 신형복 선생님(진정 그리운 이름이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를 노래한 전우익 선생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친구를 위해 같이 넘어져준 이산하의 초등 친구,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다 영면한 법정 스님, 젊은 사형수가 "조금이라도 햇볕을 더 쬐고 가라고" "일부러 신발을 헐렁하도록 찢어놓"은 이산하. 그리고 수배 중인 이산하를 "은닉" 혹은 "묵인"해준 119명의 은인들까지.
목수 아버지가 숫돌에 간 칼은 언제나 푸른빛이 어리는 것을 보고 시인은
약 40년이나 시를 썼지만
아직도 내 언어의 날에는 푸른빛이 어리지 않았다. (<푸른빛> 중)
라고 썼지만, 한 명의 독자로서 내게 읽힌 이 시집의 시들은 푸른빛 투성이였다. 저녁노을처럼 지고 말 인생이지만, "좀더 잘 지기 위해 / 잘 지기 위해 잘 써야지" (<베로니카> 중) 라는 바람을 시인이 이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산하의 『악의 평범성』 은 "세상을 간절히 본 자의 저문 눈빛"(<길상사> 중) 같은 풍경이 담겨 있다. 뭉근하게저릿한 통증을 동반하는 이 시집에서 딱 한 번 웃음을 유발한 시가 있었다. 강의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수면 위로 떠오른 시신의 얼굴은 눈을 반쯤 감은 불상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고 한다.(<바닥>) 이산하 시인이 나중 가는 길이 그런 미소 띤 길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국가기밀>의 일부를 마지막으로 올린다.
서울시경 체포조에 검거돼 계속 고문받으며 지쳐 있던 어느날
고향인 부산의 대공과 요원들이 불쑥 찾아와 한 시간쯤 면담했다.
27살의 짧은 생애 중 가장 긴 악몽의 나날 속에서
난 농담 반 진담 반처럼 얘기하며 딱 한 번 긴장을 풀었다.
"아이고 ㅡ 이왕 잡히는 거 우리한테 잡혀줬으며 얼마나 좋노. 누이 좋고 매부 좋고 . . . . . "
. . . . . . (중략)
"진짜 말도 마이소. 우리가 당신 한 번 잡아볼라꼬
몇년 간이나 새빠지게 고생하며 별 지랄을 다 떨었다 아이요."
"아니, 뭔 지랄을 그렇게 떨었십니꺼?"
"아, 나중에는 부산 경남에 신통하다는 점쟁이들 모조리 찾아가
점까지 봤다는 거 아이요!"
"예? 점을 봐요? 허허 ㅡ 소매치기 잡범도 아이고
빨갱이 잡는다카는 대공요원들이 과학수사는 안하고 . . . "
. . . . . . (중략).
"근데 점쟁이들은 뭐랍디까?"
"다들 절대 못 잡는대요."
"와요?"
"빨갱이 주제에 인복, 여복이 억수로 많다고 . . . . . "
"우하하하 . . . . . .!"
"근데 . . . . . . 진짜 여복이 많았어예? 밥도 주고 양말도 빨아주는 . . . . . ."
. . . . . . (중략)
"그건 마 . . . . . . 국가기밀이라예."
"국가기밀? 허허 ㅡ 이 양반 진짜 골 때리구마. 그나저나 우찌 잡혔십니꺼?"
"아마 프락치 덫에 걸린 것 같네요. 쯧쯧, 짭새님들도 점쟁이 대신
프락치를 썼으면 잡았을 텐데, 다음엔 그렇게 해보이소."
"다음에요? 언, 언제요?"
"아이고 . . . . . "
"아, 그기 아이고 그냥 농담 한 번 . . . . . . 하아."
"근데 점 보고 복채는 다 냈십니꺼?"
"그건 마 . . . . . . 국가기밀이라예!"
"예휴 ㅡ 국가가 좇 같으니까 점쟁이 돈 떼먹는 것도 국가기밀이구나 . . . . . .
다음엔 복채 꼭 주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