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에는 습진이 있다. 근원은 확실치 않으나, 기원은 확실하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부터 발병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동안 안녕했던 손가락에서 진물이 새어 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깜놀”할만한 일이었으니까. 이 습진은 환절기마다 약하게 발병했는데, 아주 심각해진 것은 (역시나) 군대에서였다. 당시 내 보직은 취사였는데, 기름과 물을 손에서 뗄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간 숨죽여있던 습진균들은 드디어 때를 만난 것처럼 창궐했었다. 마치 자해라도 한 것 같은, 찢어지다 못해 터져 입을 벌린 상처들, 그리고 그 벌린 상처 안에 낀 찌든 기름 때. 확 잘라버렸으면 시원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시 습진은 엄청난 고통을 가져왔었다. 제대한 후 습진은 많이 나아졌지만, 요즘도 환절기만 되면 손가락이 붓고 진물이 샌다.  

하지만, 습진의 발병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가려움이다. 이 가려움은 인간 이성의 제어력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쉽게 증명하곤 하는데, 벅벅 긁다보면, 진물과 피가 한데 엉겨있는 것을 확인하는 지저분함을 늘 확인하게 된다. 근 10여 년간 몸에 지닌 질병이라, 어느 정도 대처법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최고는 뜨거운 물에 손가락을 지지는 것이다. 수도꼭지를 틀고 조금씩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물을 기다리며 손을 대고 있는 그 순간은 곧 닥쳐올 공포와 환희를 기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물이 적정 온도를 넘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손가락에서 시작된 짜릿한 소름이 팔과 어깨를 거쳐 바로 머리로 직행한다. 살이 익는 고통과 잠시나마 가려움에서 해방되는 쾌감! 물론 그 짜릿한 순간은 매우 짧고, 습진과 발진은 더 심해지지만, 환절기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난 아마도 그런 미련한 짓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내 이런 비이성적인 행위들이, 내가 백가흠의 소설을 읽는 것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백가흠의 소설은,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읽다가 책을 던져버리는, 늘 확실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소설엔 이상한 고통이 있다. 물론 백가흠의 인물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 문학에서 많이 봐 왔던 것들이고, 그보다 더 고통스러움을 감내하는 소설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유독 백가흠의 소설만 “책을 던져버리게(혹은 덮어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그의 소설은 읽는 이에게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전에 <시사IN>에서 『조대리의 트렁크』를 언급하면서 김기덕을 이야기했었는데, 이는 (어느 정도는) 맞는 표현이다. 김기덕의 영화와 백가흠의 소설엔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는 인물들이 하나 같이 모두 우리의 사회적 관계망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밑바닥 인생들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같은 밑바닥 인생들끼리 서로 가학-피학의 관계를 주고받는 것, 그리고 셋째로는 ‘나’와는 상관없는 이들끼리의 행동이 영화를 보는/책을 읽는 ‘나’로 하여금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물론 김기덕은 <빈 집>부터 인물(들)을 중산층 이상으로 설정했다. 그 이유는 인물들의 계급 때문에 자신의 영화가 오해받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더 자세히 들어가면 글이 산마저 벗어나 다른 행성으로 가버리니 이쯤에서.)  

신문에서 조차도 “추잡하다”고 버릴만한 ‘소재’들을 이 둘은 자신만의 이야기로 가공해서 세상은 실제로 안녕하다고 생각하는 내 눈먼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이것은 언제나 세상(일)에 관찰자인 ‘나’의 위치를 ‘주체’로 돌려놓으려는 행동이다. 그러니까 백가흠의 인물들이 부서지는 모습은, 마치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과 같은 종교적 행위처럼 보인다. (그들의 행위가 순교적이라는 게 아니라, 그저 비유일 뿐이다.) 종교적 행위에서 비롯되는 죄의식. 바로 그 불편함.  

백가흠의 소설들을 분류해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식의 ‘사회 고발 소설류’(마눌님의 표현대로라면 <긴급 출동 SOS>류 소설들)와 그의 일상을 모사해 낸 듯한 ‘사(私) 소설류’로 나눌 수 있다. 전자가 끔찍하다 못해 진저리친다면, 후자는 의외로 귀여운(?) 느낌이 들 정도로 발랄하다. 전자가 읽는 이의 사회적 위치를 주체로 바꾸는데 노력한다면, 후자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데 주력한다. 『귀뚜라미가 온다』가 전자에 치중했다면, 『힌트는 도련님』은 후자에 치중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가 계속해서 소설을 써가는 과정이 그 자신이 작가가 되고 싶은 ‘바람’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귀뚜라미가 온다』에서는 온갖 끔찍하고 역겹고 (가끔) 섹시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 기괴한 상상력의 끔직한 사건들을 가지고 백가흠은 서사를 구성하려고 ‘애쓴다.’ 소설들은 그럴듯하지만, 다분히(혹은 당연히) 위악적이고 소재주의적이다. 『귀뚜라미가 온다』만을 읽는다면, 아마도 백가흠이라는 이름은 센세이셔널리즘에 기대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대리의 트렁크』부터 무언가 달라졌다. 여전히 (그리고 더 지독하게) 끔찍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귀뚜라미가 온다』의 소설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차갑게 ‘바라보게’ 한다면, 『조대리의 트렁크』는 ‘(고개를 들어) 쳐다보게’ 한다. 이런 시도가 가능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 책에 수록된 「장밋빛 발톱」에서부터 시작한 사 소설들 때문일 것이다. 백가흠은 『힌트는 도련님』에 등장하는 ‘소설가 백’, ‘백 도령’, ‘P’를 통해 소설의 인물에 자기 자신을 투영한다. 이 등장인물들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같이 ‘욕망’에 집착해있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은 ‘소설의 서사를 완성’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 글을 써도 글자가 증발하는, 그래서 자신의 글이 원고지에 ‘새겨지길’ 바라는 소설가 백이나, 자기가 썼던 소설의 주인공에게 ‘그럴 듯한 이야기’를 부탁하지만, “(네가 써왔던 대로) 그냥 몇 죽여”라는 말을 듣는 백 도령, 소설을 쓰기위해 상대방을 압박/협박해 잊(으려 애쓰)고 있던 죄의식을 몽땅 끄집어내 결국 고해성사를 하게 만드는 P, 이들 모두 소설을 완성하지는 못한다. 작가가 되고 싶지만, 결국 되지 못하는, 혹은 탈고된 원고를 결코 보지 못하는, 하지만 독자들은 결국 보게 되는 이 이상야릇한 사 소설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너무 과장된 기대일까?  

백가흠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그는 (적어도 내게는)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였다. 이번 『힌트는 도련님』을 읽었을 때 드는 생각 역시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다. 하지만, 단편들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그는 장편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 같아 보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들은 그의 작품 안에서 모두 완성되지 못했으니까. 나는 혹시라도 그가, 10년 후에도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로 남게 되는 게 아닐지 걱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임에 분명하다. 그는 소설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소설에 대한 “힌트”는 찾았으니까. 그의 다음 작품에서 “글자가 새겨지는” 것을 쳐다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피부과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손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방치했냐고 야단을 쳤다. “한순간의 짜릿한 쾌감 때문”이라고 차마 말을 못하고 처방과 약을 받았다. 앞으로 나는 내 고통스런 쾌락을 백가흠의 책에서 찾아도 될 것 같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amtext 2011-09-0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도 편혜영보다는 백가흠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트윈픽스 연재 잘봤어요. 십몇년전쯤, 칭구들하고, 트윈픽스MT라는걸 했습죠. 아침9시에 만나 라면만 먹으며 1박2일동안 비디오 서른몇개 다보기. 토론, 혹은 뒤풀이 따위도 없었습니다. 트윈픽스면 충분하니까. 십몇년만에, 어찌나 우울하던지 다시 트윈픽스를 보기 시작했는데 파일 검색하다가 우연히 연재글을 봤어요. 좋았어요!

Tomek 2011-09-01 15:48   좋아요 0 | URL
제겐 백가흠만으로도 벅찹니다! 제게 있어 여성 작가 중에서는 (아직까지는) 신경숙 작가를 넘어서는 "끔직함"을 보여준 예가 없는 듯해요.

트윈 픽스! 정말 좋죠! 고맙습니다.
:D

iamtext 2011-09-02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인생 몇개의 중요 프로젝트 중에 하나가 '신경숙과 그를 둘러싼 운동권 가부장들'연구인데... ㅋㅋ. 지금 당면한 프로젝트는, 둘째 기저귀떼기-_-. 어린이 집에서 젤 나이가 많은데, 기저귀차고 다니니...

Tomek 2011-09-02 16:54   좋아요 0 | URL
신.경.숙. 제겐 정말 무서운 이름입니다!

:)

novio 2011-12-30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손은 물론 팔꿈치에 습진이 있습니다. 약을 발라도 계속 낫지 않았는데 올해 큰 맘 먹고 약을 계속 발랐습니다. 올 봄부터 발라서 지금까지 바르고 있는데 이제 조금 습진이 없어지네요. 그래도 재발은 쉽기 때문에 언제나 주의합니다. 겨울 때면 역시나 습진으로 손가락 습진이 갈라져서 고생인데 그런 고약한 습진을 갖고 이렇게 책을 예시하시니 정말 필력 하나는 최고시네요. 부럽습니다^^

Tomek 2012-01-01 06:43   좋아요 0 | URL
병원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전 병원다니고 샴푸와 비누는 모두 끊고 설겆이나 빨래 할 때는 비닐장갑+면장갑+고무장갑끼고 하니까 많이 사라졌어요. 문제는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한다는 게 힘이 들지만... 뭐 어쩔 수 없죠. NOVIO님도 약보다는 병원가셔서 진단 받으셔요. 치료 받으시는 게 병을 키우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12년 새해에는 항상 기쁘고 즐거운 일만 일어나길 기원합니다. :)

말랑흰둥 2012-08-22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백가흠 작가님 첫 장편소설 <나프탈렌> 낭독회 소식 알려드려요.
9월 1일 (토) EBS라디오연재소설 낭독의 힘!
좋은 정보가 됐으면 좋겠네요. ^^
http://home.ebs.co.kr/radionovel/index.html

Tomek 2012-08-28 13:33   좋아요 0 | URL
신청했습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
 
제5회 CinDi영화제 프로그램 및 상영작 (8.17~23)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9. 23일과 24일은 영화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작 이틀동안 장편 4편 단편 8편의 영화만을 보았는데도, 이유 모를 피로감이 갑자기 닥쳐왔기 때문이다. 축제에 탐닉하려는 지독한 욕심(혹은 욕망)때문일까? 아니면, 2년 연속으로 내리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만 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뜨거운 영화광들의 열기에 지쳤기 때문일까? 영화에 탐닉할수록 점점 영화가 시시해지는 이유는 무얼까? 

 

10. 김수현 감독의 <창피해>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지 난감하다.

 

10-1. 시시한 미대교수(김상현)는 싸가지 없는 신입생 희진(서현진)과의 유치찬란한(하지만 무시무시한) 육탄전을 벌이더니, 희진의 친구 지우(김효진)를 모델로 발탁하고 사진을 촬영하러 바다로 간다. 그곳에서 지우는 교수에게 자신의 옛사랑(김꽃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후부터 이야기는 마치 라운지 소설처럼, 화자를 바꿔가며 계속 건너뛰기 시작한다. 

전작 <귀여워>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참으로 지독하고 끔찍한 이야기이다. 불편한 금기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도 갑작스레 튀어나오지만, 김수현 감독은 예의 따스한 터치로 그 끔찍함을 감싸안는다. 우린 그런 그의 능력을 <귀여워>에서 확인한바 있다. 

 

10-2. <귀여워>는 제목과는 달리 정말 끔찍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씨를 뿌려대는" 박수무당 아버지와 그의 배다른 형제들이 꾸린 가족 안에 한 여자 순이가 들어오는데, 그녀는 집 안의 모든 남자들과 관계를 하고, 심지어는 방석집에 팔리기도 한다. 그들이 살고 있는 동네는 "철거가 진행되고 있는" 청계천 황학동 시민아파트다. 그곳에 사는 여자 "아이"는 둘째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남자 "아이"들은 깡패들에게 돈을 받고 방화 용역을 벌인다. 그 와중에 건달인 셋째는 직업적/개인적인 이유로 살인도 행하고 다닌다. 참으로 지옥이 따로없다.

<귀여워>의 놀라운 점은 이런 끔찍하고 위악적인 이야기가 참으로 "귀엽게" 보인다는 것이다. 김수현 감독은 이 끔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하는, 이 보잘것 없고 초라한 인간 군상들을 시종일관 "귀엽게" 위로한다. 영화의 온갖 효과-음악, 미술, 심지어 CG조차-가 유치해보이지만, 그래도 시종일관 우직하게 밀고나가는 감독의 뚝심 때문에 영화는 어떤 독특한 느낌을 얻는다. 환상과 실제가 서로 섞이는 기이한 현상들의 연속.

 

10-3. <창피해> 역시 환상과 실제가 서로 섞이는 근사한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김수현 감독은 이제는 그런 것에 흥미를 잃은 듯 하다. 대신 그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에 빠진 듯 하다. <창피해>의 이야기는 단선적인 이야기를 이상하게 풀어놓아(베베 꼬았다는 게 아니다!) 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교수와 희진의 이야기는 희진과 지우의 이야기로, 지우와 옛사랑, 옛사랑의 가족, 형사(최민용!)와 후배(우승민!), 옛사랑과 옛사랑의 애인, 옛사랑과 옛사랑의 아버지, 지우와 교수, 서현과 선배 등으로 "종횡무진" 넘나든다. 

이런 형식은 소설에서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아마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에서는 이런 형식은 피로감을 불러 일으킨다. 책은 독자 스스로 끊을 수 있지만, 영화는 한번에 봐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감독이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찍었을까?  

 

10-4. <귀여워>를 보면, 어쩐지 이야기가 부족해보이는 느낌이 든다. 영화에는 굉장히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인물들의 이야기가 "잘린" 것을 느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둘째 "개코"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세 아들 중 가장 적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영화의 흐름을 위해 감독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잘렸을" 확률이 높다. 어쨌든 그 영화에는 다른이의 "자본"이 들어간 상업 영화이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가장 최소한의 자본으로 자신이 시나리오로 만들었던 모든 장면들을 다 붙인 게 아니었을까? 

그 시도는 높이 사지만, 영화를 보는 나는 보는 내내 어리둥절하고 힘들었다. 영화의 지난란 리듬 때문에 결국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창피함"의 감정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무언가를 보긴 했는데, 마음을 울리지 못한 "아쉬움". 위악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만큼 에너지도 잃어버린 듯한 "안타까움". 지난 7년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1. 선타르 지올 감독의 <태양의 길목>은 보는이의 절창을 뜯는 영화다. 영화는 기나긴 길을 걷는 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고행을 하는 듯한 모습. 그의 뒤를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집에 가는 한 노인이 쫓는다. 알고보니 청년은 사고로 어머니가 죽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라사로 속죄의 순례를 떠난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바로 목격한 자식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섭다. 청년은 그 엄청난 감정을 속에 묻고 걷고 또 걷는다.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속죄의 마음을 지닌채로 걸었는지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알지 못한다. (물론 영화가 끝날 즈음에야 알 수 있지만.)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태양처럼, 어머니의 죽음을 비로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작별을 하기 위해, 그만큼의 시간은 필요했던 것이었겠지.  

 

12. 그런데 영화에 대한 이런 끼적임은 어떤 행위일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즈라더 2011-08-23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창피해>를 예의주시해야겠네요. +_+

Tomek 2011-08-24 08:14   좋아요 0 | URL
음... 제겐 좀 혼란스러웠던 영화였어요.

이하 감독의 두 번째 작품처럼, 김수현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역시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novio 2011-08-24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객원기자로 뽑혔었는데 그만 일이 생겨서 (생존은 해야 하니까ㅠㅠ) 그만 기자 역할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제, 매우 인상적인 영화들로 가득했나 보네요. 매우 아쉽고 유감입니다. 그냥 이 글로 대충 느끼는 수밖에 없겠네요 ㅠㅠ

Tomek 2011-08-25 09:11   좋아요 0 | URL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특성상(?) 인상적인 영화들은 많지만, 여러편 계속해서 보면 좀 피로감을 느낄만한 영화제인 것 같아요. 그냥 편하게 몇 편 골라 관람하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아요.
 
제5회 CinDi영화제 프로그램 및 상영작 (8.17~23)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5-1. 박종철 감독의 <수선火>는 보는 내내 불편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종근은 좁은 동네 안에서 사사건건 가게 주인들과 일을 벌인다. 종근의 말이나 행동은 언뜻 보면 다 옳은 소리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소비자- 중심의 우격다짐이다. 종근은 "앞에선 찍소리 못하고 뒤에서 호박씨 까는 한국 놈들"을 경멸하는, 그래서 초지일관 앞에서 호박씨를 까는 "인간 말종"이다.  

종근의 이런 행동은 영화를 보는, 일상에서 찍소리 못하고 대부분 "참고 사는" 우리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켜야 하지만, 그저 이해하지 못할 답답함과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함만을 느낀다. "4년제 대학을 나온 고급 인력"의 분노 표출? 하지만 그의 분노는 조그마한 동네의 영세 상인들을 벗어나지 못한다. 시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끼리의 싸움. 그렇게 종근의 인생은 한심하게 흘러간다. 

 

 

5-2. 이창희 감독의 <소굴>은 정말 잘 짜여진 스릴러다. 한 여기자가 기사 송고를 위해 시골의 PC방에 간다. 밤이 깊자 그 곳엔 단 몇 명의 남자들만 남고, 기자는 자신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들의 "소굴"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시도를 벌인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영화란, 지금 보여지는 상황이 "말이 돼냐 안 돼냐" 보다는, "그럴 듯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 같다. <소굴>의 이야기 전개는 가끔 불필요한 장면들이 나와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그 모든 장면들의 분위기와 이야기 전개가 정말로 그럴듯해 보여, 그런 사소한 장면들은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특히나 단 한마디의 대사 -"시끄럽다잖니."-로 평범한 공간을 단숨에 공포로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 감독의 발군의 센스는 정말로 뛰어나다. 

<소굴>에서 여기자와 같이 있는 남자들은 모두 범죄자임이 분명한 인물들이지만, 이들이 정말로 여기자에게 범죄를 저지르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오히려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은 여기자이고, 이들 남자들의 행동들은 정당방위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마지막 장면의 여기자의 목에 잔뜩 묻은 피조차 남자의 피가 아닌가. 

별 곳 아닌 장소에서 별 것 아닌 행동들만으로 보는이의 긴장을 한껏 끌어올린 이창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을 진심으로 기대한다. 

 

  

5-3.  최진성 감독의 <이상,한 가역반응>은 1936년, 동경으로 어떻게든 건너가려는 천재 이상의 시도를 그리고 있다. 인물들의 대사나 사운드는 차단되어 있고, 마치 무성영화처럼 음악과 이상의 시가 내레이션+자막으로 나오고 있다. 영화에서 나오는 모든 내레이션은 이상의 작품에서 따와 가뜩이나 몽롱한 영화에 기이한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계속 특정 장면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시도들은 마치 이상의 시(詩)들을 영상으로 찍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처럼 보이는데, 마치 예전에 일본에서 출시한 무르나우의 무성영화 <노스페라투> DVD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로운 시도이긴 하지만, 마치 예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랄까? 물론 내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다른 쪽으로 이해의 촉수가 뻗어나간 경우이겠지만 말이다.  

 

5-4. <수선火>, <소굴>, <이상,한 가역반응>은 8월 21일 13시 30분, 8월 23일 17시, 두 번 더 묶음 상영한다. 

 

 

6. 비묵티 자야훈다라 감독의 <버섯>을 상영 리스트에 넣은 이유는 단 하나, "인도 영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디를 경험한 이후로는 영화를 국가별로 나눈다는 것이 별 의미 없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편의상 그렇게 나누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춤추고 노래하고 가끔 대책 없이 느껴지기도 하는 지독한 낙천성이 빠진 인도 영화가 존재하기는 할까?"하는 이 단순한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버섯>은 지금껏 봐왔던 인도 영화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영화다.  

영화의 진행은 친절하지 않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숲에 오고, 한 남자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도망친다. 그리고 그 숲에서 (아마도 유럽 출신의) 탈영한 군인이 마치 유령처럼 등장한다. 그는 국경을 넘는 100명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숲에 고백한다. 그는 숲에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하지만, 숲은 그 비밀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갑자기 영화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고층빌딩 숲(!)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건축사 라훌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는 미친 동생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가 동생이 숲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동생을 찾으러 숲으로 간다. 

자연의 숲과 (거대 건물로 이루어진) 인공의 숲, 미친 동생과 정상인 형. 영화는 대비를 하지만,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동생의 관점으로는 도시에 살고 있는 형은 공포의 대상이다. 형은 미친 동생을 자신의 품에 가두고 싶어한다. 숲의 관점에서는 거대 빌딩으로 이루어진 도시는 필요악이다. 하지만, 우리는 도시 없이는 살 수 없다. 비묵티 자야훈다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공존"을 이야기하고자 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그는 다양한 언어, 종교, 인종이 서로 어우리져 하나의 거대한 국가를 이루는 인도에서 영화를 찍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스리랑카 태생이다.) 

버섯은 잔균류로 다른 생물에 기생하며 자란다.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고층 빌딩들은 우리 시대의 "버섯"들이다. 버섯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자연이 존재해야 버섯이 존재할 수 있다. 무분별한 개발의 시대에 우리는 너무 당연한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게 아닐까. <버섯>은 이런 당연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8월 21일 17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7-1. 토니 힐 감독의 <교차로의 오아시스(North Cross)>는 영국 플리머스의 북부 교차로에서 찍은 영상이다. 이 교차로의 윗부분은 차가 다니고 아랫부분은 보행자 통로로 사용된다. 감독은 아주 카메라 조작을 통해 윗부분과 아랫부분, 차량의 흐름과 사람의 흐름을 다른 속도로 담아낸다.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서로 다른 감흥-리듬을 느낀다. 마치 속도에서 튕겨져 나갈 듯한 차량들과, 한없이 느려져 누군가가 끌어 당기는 듯한 사람들의 걸음 걸이. 단순한 조작만으로도 세상의 시간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할 수 있는 영화만의 연금술. 

 

7-2. 토니 힐 감독의 <라반 댄스(Laban Manoeuvres)>는 프레임의 장난이다. 감독은 프레임 구조물에 카메라를 달고 영상을 찍는데, 그는 카메라의 프레임 조차 나누어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상들은 미셜 공드리가 작업한 뮤직비디오나 CF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미셸 공드리가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나온 탄성을 자아낸다면, 토니 힐의 작업은 우연성에 기댄 듯한 느낌이 든다. 카메라와 거울을 통한 데칼코마니? CG가 아닌, 단순한 카메라의 고전적 조작으로 이런 감흥을 불러 일으키기란 쉽지 않다. 

 

  

7-3. 밥 세비스턴 감독의 <디지털 로토스코프 놀이공원(The Even More Fun Trip)>은 새로운 체험이다. 이 영화는 친구들과 함께 놀이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는 짧은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밥 세비스턴은 이 평범한 다큐멘터리에 로토스코프 기법-영상 위에 그림을 그린 기법-을 사용해 전혀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로토스코프를 통해 이 개인적인 영상 기록은 감독의 주관적인 느낌이 깊이 베어들게 되고, 그 당시 상황의 느낌을 그림을 통해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같은 기법을 사용한, 그리고 감독이 참여하기도 한 <웨이킹 라이프>, <스캐너 다클리>가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들의 연기를 낯설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면, <디지털 로토스코프 놀이공원>은 평범한 것을 새롭게 보이게 한다. 애니메이션처럼 완벽한 창조와 통제가 아닌, 배우들이 이루어 놓은 상황을 감독의 의도에 맞게 수정/강조하는 로토스코프 작업은 아마도 아직도 진행 중인 새로운 효과임은 분명하다. 

 

  

7-4. 우로 피코프 감독의 <몸의 기억(Kehamälu)>은 무시무시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다. 기차 화물칸 안, 그 안에 털실 모양의 인간들이 있다. 열차 바깥의 거대한 힘이 이들의 털실을 하나씩 잡아당기기 시작하고, 한 명씩 털실이 당겨짐에 따라 형체를 잃어가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절규하기 시작한다. <몸의 기억>은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즉각적으로는 몸의 고통을 느끼게 한다. 천천히 그러나 고통스럽게 진행되는 죽음, 그 고통을 안고 사는 우리들, 그리고 그저 지켜만보는 우리들 그리고 결국에는 모두 사라지고 말 우리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향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고통은 순전히 우리의 몸이 느끼고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7-5. 고시마 카즈히로 감독의 <3D 입체 도쿄 풍속도(東京浮絵百景)>는 도쿄의 일상을 3D로 보여준다. 3D의 효과는 굉장한 것이 아니고, 어렸을 때 장난감 카메라에서 봤음직한 간단하지만 독특한 기술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아바타>로 시작된 3D 효과에 대한 광풍이, 실은 이렇게 간단한 것이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3D라는 효과는 신기루도 엄청난 기술도 아닌, 우리가 예전부터 봐왔었던, 이런 단순한 효과가 아니었을까? 이 영화는 우리에게 3D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야기의 개입으로서의 3D가 아닌, 그저 바라보는 풍경으로서의 3D.  

 

7-6. <교차로의 오아시스>, <라반 댄스>, <디지털 로토스코프 놀이공원>, <몸의 기억>, <3D 입체 도쿄 풍속도>는 <익스트림 3>이라는 이름으로 8월 22일 20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8. 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라이프 인 어 데이(Life in a Day)>는  2010년 7월 24일 하루 동안 자신들의 일상을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린 전 세계 192개국 8만편 이상의 비디오들을 다시 편집해 한 편의 영화로 완성한 영화다. 7월 24일, 전 세계의 평범한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영화는 우리들이 찍은, 우리들의 희노애락, 생노병사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지만, 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하루. 그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그냥 보는 순간만으로도 가슴 찡하다. 이 영화의 위대함은 우리가 지구라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삶은 살아지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이기에. 

<라이프 인 어 데이>는 아쉽게도 신디에서의 상영이 모두 끝났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12-04-19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영화 창피해를 봤던 사람으로
간만에 검색하다 (우연히)블로그 방문하게됐어요.
포스팅하신거에 창피해를 보고싶단 언급이 몇구절있더군요..

(갑작스런말일수도있지만)
실제 동성애에 대해 혹 편견없이
열린맘으로 이해하시나요?
저는 이반(동성애자)을 개인의 개성이고, 취향이라 생각하며 이해해요. 편견이나 이상하게 생각하는거야말로
이상하다생각해요. 왜냐면 육체적인성이 아닌 마음이나 영혼에 끌리는게 진정한 사랑이라생각하니까요.
여튼 제가 쪽지드린이유는, 편견과닫힌맘이 많은 사람들중에서 혹시 열린맘을 가지신분이면 소통하는 친구되고싶어서요.

Tomek 2012-04-19 14:54   좋아요 0 | URL
이 세상에서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갑습니다.

:)

2012-04-19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1 0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라딘happy 2012-04-2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모쪼록 제얘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담에또 들(려도되죠?)^^ 늘행복하시길바래요.

Tomek 2012-04-23 09:47   좋아요 0 | URL
네. 볼 건 없지만 종종 놀러오세요~
:)

저 역시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제5회 CinDi영화제 프로그램 및 상영작 (8.17~23)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0. 그러니까 이건 작년에 썼던 "제 4회 신디 영화제 ~"의 연장선상 혹은 속편격 되겠다. 

 

1. 작년에는 정말 "멋모르고" 참석해 "정신없이" 영화들을 즐겼었다면, 올해는 작년과는 달리, 좀 더 자유롭게 - 멀찍하니 떨어져서 영화제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작년과 똑같은 장소에서 행해지는 영화제이지만, 이번 영화제는 어떤 "센세이션"이나 "스캔들"이 없는 관계로, 조금 그 열기가 식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신디의 이번 모토는 "필름과 디지털의 공존(맞나?)"인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는 "필름" 영화들도 다수 상영한다."디지털"이라는 단어에는 "새로움"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번 5번째 신디는 그 "새로움"을 잠시 접어두고, "공존"을 모색한다. 이 행보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좀 더 두고봐야 할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퇴보/정체"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밀려들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은 이번에 초대된 100편의 영화들이 답해줄 것이다. 

  

2. 알란 자마니 에스마티 감독의 <오리온(The Orion)>은 이란 영화다. 지금까지 내가 봐온 이란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자파 파니히 감독의 "동화" 같은, 당대의 현실을 교묘히 피해간 영화들이었다. 그나마 이란의 사회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마르얀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정도였을까? 현실에선 손목을 자르고 코를 베어가는 끔찍한 모습이 벌어지지만, 영화에선 짝궁의 공책을 돌려주려는 웃음이 베어나는 아름다운 모습만을 보아온 내게 <오리온>은 묵직한 충격을 전해주었다. 

영화는 여주인공 엘함을 중심으로 진행한다. 처음에 영화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엘함은 무슨 수술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그녀의 애인인 아미르는 "불법" 수술 준비에 분주하다. 하지만, 이웃의 신고로 이들은 체포된다. 

우리의 기준으로는 엘함이 행하려는 수술은 정말 "어이가 없는" 수술이다. 하지만 이 "어이없음"이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여성들"에게만 피해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엘함"과 "아미르" 쌍방간의 합의에 비롯된 일이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엘함에게 돌아간다. 아미르는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지만, 그 책임은 엘함의 아버지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황무지에서의 무시무시한 소동극은 안타깝기 보다는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아미르와 친구들이 "불법 수술" 때문에 구치소에 머물러 있을 때,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밖을 보기 위해 창문을 만들었는데 왜 그 위에 커튼을 다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종교가 만들어졌을 것인데, 지금의 이란은 종교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그로 인해 생기는 이 웃지못할 끔찍한 아이러니들. 이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창문은 왜 만든 것이었을까? 

8월 21일 14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3. 쉬통 감독의 <풍비박산>은 -감독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초여름>, <점술가>에 이은 "유민 3부작"으로 그는 연속적으로 중국의 최하층민-농민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풍비박산>의 원제는 탕 씨 노인(老唐頭)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풍비박산"이라는 제목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탕노인을 중심으로 한 가족들이 모조리 "풍비박산"나는 과정을 찬찬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냥 그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들의 삶이 정치적/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어찌됐든 삶을 견뎌내야 한다. 그 안에서 아버지와 자식간에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의절을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삶의 방법일 뿐, 그것을 윤리적으로 재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영화 중간에 돼지를 도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굉장히 사실적으로(잔인하게) 찍혔는데, 이상한 것은 이 장면이 굳이 영화의 내러티브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독은 왜 이 장면을 넣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깔끔하게 도축된 고기를 정육점에서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를 찍는 감독들은, 그 깔끔한 고기를 만들기 위해 돼지를 죽이고 털을 밀고 부위별로 분류하는 고통 아닌 고통을 겪는다. 쉬통 감독은 자신의 다큐멘터리 작업이, 그만큼 고통스러움을 직접적으로 알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편안한 객석에 앉아 그들의 고통을 음미하는 우리들의 행위는 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8월 22일 13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4. 오영두 감독의 <에일리언 비키니>에 대해 할 말은 많지않다. 아니, 솔직히 많긴 한데 하지 않으련다. 악평은 누구나 쉽게 쓸 수 있지만, 그만큼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내가 지지하지 않는다/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에게 그 영화가 엉망일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이 영화는 "임성한 작가가 <지구를 지켜라>를 썼다면 나올법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진짜 임성한 작가가 썼다면, 훨씬 재미있고 찰지게 썼을 것이다. 지나친 임성한식 정보 나열은 가뜩이나 짧은 영화를 진저리나게 질리게 만든다. 온갖 금기는 다 튀어나오지만, 그저 나열에 그치고 만다. 만약 이 영화가 "무의미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찍은 영화라면, 영화는 100% 그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무의미의 의미"가 "무의미"인 것을 굳이 75분의 시간을 버려가면서 깨달을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저 무의미한 것일 뿐인 것을. 

8월 22일 17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4-1. 한마디 더 보탠다면, 원래 일정은 어제 한 편 더 볼 예정이었으나, <에일리언 비키니>를 보고 그냥 집에 와버렸다. 

 

4-2. 한마디 더 보탠다면, 원래 어제 바로 정리할 글이었으나, 이 영화의 충격으로 폭음하고 오늘 아침에야 멍한 정신으로 끼적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월 14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 감독의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 6부작을 한꺼번에 봤다. 2부작씩 묶어서 총 3회에 걸쳐 상영했고, 1, 2부 206분, 3, 4부 177분, 5, 6부 189분, 총 9시간 32분의 말 그대로 대작이었다. 아침 10시 30분에 상영을 시작해 밤 9시 50분에 끝났으니, 14일 하루를 온전히 이 영화에 쏟은 셈이다.  

내가 이 영화에 끌린 이유는 단 하나, 긴 상영시간 때문이었다. TV 드라마가 아직 제대로 태동하지 못했던 시기의 "연속극으로서의 영화"를 기대했기 때문이랄까? (그러고 보면 나란 “인간”은 참 단순하다.) 물론 긴 상영시간의 영화는 다수 존재하지만, "거대 자본이 들어간 상업 영화"의 틀 안에서, 에피소드별로 끊는 게 아니라 하나의 호흡으로 길게 꾸려가는 경우는 <반지의 제왕> 3부작을 제외하고는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영화는 지난 "3K 기획전(지금 하는 것은 앙코르다!)"에서 본 <사무라이 반란>이 처음이었다. 액션 활극의 쾌감을 버리고, 봉건 시대의 억압에 맞서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몇 몇 군상들의 처절한 드라마는, 솔직히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으나, 그 울림만큼은 정말 굉장했었다. 시대의 아이러니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 안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준 감독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주제 - 이 영화는 고미카와 준페이(五味川純平)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 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에 대한 설렘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영화의 내용은, 기나긴 이야기를 단 몇 줄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주인공인 가지(나카다이 타츠야)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2부) 1943년, 남만주. 식민지를 착취해 부를 이룬 대기업에서 종사하고 있는 가지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부인인 미치코와 함께 광산에 가 군대에 납품할 광물들을 생산하는 일을 맡는다. "인간애"로 똘똘 뭉친 가지는 그곳에서 일본인에게 당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생활개선과 동시에 포로로 잡혀온 중국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생활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일본군과 광산의 다른 간부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결국 일본군에 눈 밖에 나 징집을 당한다. (3, 4부) 이등병이 된 가지는 매번 군대의 부조리한 상황에 반항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인간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선임 신조에게 끌린다. 신조의 탈영을 돕다 부상을 당한 가지는 의무대에 입원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단게 일병을 만나 마음의 위안을 가진다. 퇴원 후, 능력 있는 신지는 상병으로 진급되고 신병들을 훈련하는 직책을 맡는다. 옛 친구인 신임 소대장 가케야마의 도움을 통해 신병들을 자신의 방법대로 인간적인 방법을 통하여 훈련시키게 되지만 이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선임들에게 매번 당하고 지내지만, 가지는 포기하지 않는다.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대패를 하게 되고 가지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군을 죽인다. 그는 살인의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5, 6부) 전쟁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가지는 한 무리의 병사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선다. 집으로 향하는 도중 난민들 무리를 만나며 그들까지 자신의 무리에 받아들여 목적지까지 향한다. 그들은 여행 중 여기저기에 있는 중국군과 소련군들의 공격을 받지만, 가지는 자신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랑스러운 부인 미치코를 생각하며 힘든 걸음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결국 가지의 무리는 소련군에 잡혀 포로가 된다. 한 때 일본군이었지만 소련 포로수용소 안에서 포로관리인이 된 옛 동료의 억압을 참지 못해 가지는 그를 살해하고 소련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자신의 고향으로 향한다.  

가지는 이상주의자다. 이 "이상주의(理想主義)"라는 말은 영화 내내 상대에 따라서 "공산주의(共産主義)" 혹은 "사회주의(社會主義)"로 불리기도 한다. 생산량을 극대화하기위해 착취를 일삼는 것이 목표인 식민주의 시대에, 가지는 피지배민들이 인간답게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려고 애쓴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도구로 보는 일본인 감독관들에게, 가지의 행동은 자신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처음부터 가지가 “휴머니스트”인 것은 아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 역시 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바꾸려하기 보다는, 주어진 세상 속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도출하려할 뿐이다. 잘못된 세계 안에서 바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 하지만, 가지의 행위는 그런 모순율조차 이루지 못한다. 애초에 전제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 문득 모골이 송연해졌던 순간이 있다. 가지의 “휴머니스트”적인 행동들은 종종 답답함을 불러일으킨다. “저렇게 힘들게 살아서 뭐하나. 그냥 적당히 녹아들지.” 식민지를 경험했던 나라의 국민이 비인간적인 식민정책을 옹호하다니. 인간은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일까? 그 현실이 이렇게도 끔찍할지라도.  

가지의 행위는 인간적이지만, 수용소에 갇혀있는 중국인 포로들은 가지를 믿지 않는다. 한 개인의 “믿음”이 전체 일본인의 “불신”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전기가 흐르는 수용소 안에 갇혀 지내면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저녁에 위안부 여성들에게 짐승처럼 배설을 하며 서서히 동물처럼 길들여지는 이런 생활 속에서 믿음이 생길리는 만무하다. 자유를 갈구하는 피지배민들, 자유를 억압하는 지배자들 사이에서 “인간적인 삶”을 강조하는 가지의 행동은 그 둘 어느 하나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지는 인간 자체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규정짓는 “시스템”에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탐색은 중단되고, 그는 징집되어 군대에 간다.  

군대라는 시스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군대-라기 보다는 내무 생활-의 부조리는 결국 가지의 “휴머니즘”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순간을 보여준다. 개인의 잘못이나 실수가 전체의 책임으로 떠넘겨지는 이 무시무시한 연대의식. 그리고 선임과 후임 사이의 끔찍한 상명하복과 그에 따른 구타. 이들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군대”자체가 없어져야 하고,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지 개인이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가지는 보통의 인간이라면 포기하고 말았을, 초인적인 의지와 집념으로 조금씩 군대를 바꾸어 나가지만, 그 또한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전쟁은 가지에게 남아있던 조금의 “휴머니즘”조차도 앗아가 버리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그는 살기 위해 적을 죽이고, 심지어 전우를 죽인다. 하지만, 가지는 이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 적응해나간다.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인은 피할 수 없다. 전쟁이란 (내가) 죽거나 (상대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간이 만들어낸 그 모든 것 중, 인간성을 말살하는 가장 끔찍한 “시스템”이다. 전쟁 안에서 “인간”에 대한 물음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시스템이 인간을 규정하지만 결국 그 시스템 또한 인간이 만든 것임을 가지는 포로수용소에서 깨닫는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를 억압하는, 옛 동료였던 포로 관리인을 살인한다. 그의 휴머니즘은 먼 길을 경유해 전혀 다른 지점에 도착했다. 결국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도 모두 “인간”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은 “이기심”과 “이타심”이다. “이타심”을 “휴머니즘” 또는 “사랑”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이런 것들이 있어야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다운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테니까. 가지가 자신의 휴머니즘을 버리고 “의도적인” 살인을 행한 것은, 그 포로 관리인에게선 “이기심”은 있어도 “이타심”은 발견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그 살인으로, 가지 역시 부처나 예수가 아닌, 불완전한 “인간”임을 증명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낸 불완전한 시스템 안에서,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선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그 이기심이 결국 “휴머니즘”의 포기를 부른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2.35:1 시네마스코프 비율에 흑백이다. 언어는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가 상황과 배우에 맞게 적절하게 나와 현실성을 배가시켜준다. 단 하나 아쉬웠던 점은, 음악의 사용이다. 당시의 대작 할리우드 영화들처럼, 감성에 치우친 "좀 뻔한" 음악들의 사용은 이 영화의 유일한 "옥에 티"랄까. 하지만, “인간”과 “시스템”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으로도 <인간의 조건>은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체험”이었다. 10여 시간의 상영 시간은 몸이 피로했을망정,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이런 위대한 작가를 이제야 만나게 된 것을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지 복잡한 심정이다. 영화는 길긴 했지만, 한 휴머니스트가 “인간”과 “시스템”으로 어떻게 부서지는지를 “체험”하기 위해선 이 정도의 시간은 필요했다고 본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나아가려고 했던 가지의 모습이 환영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무엇으로 불리길 원했을까? 이상주의자, 휴머니스트, 빨갱이, 사회주의자... 그 어떤 단어로도 그를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단어들 조차 인간들이 "분류"를 위해 편의적으로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니까. 만약, 인간이 만들어낸 단어 중 하나로 그를 규정해야 한다면, "인간" 이외의 단어를 찾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PS:

피디엔터테인먼트에서 출시한, 그리고 지금 알라딘에서도 팔고 있는 <인간의 조건>DVD는, 정말 뻔뻔하게도 크라이테리언의 DVD를 그대로 복사한 제품이다. 제작한지 50년이 지나 판권이 풀린 영화이지만, 이 DVD는 누군가가 힘들게 작업한 것을 그대로 훔쳐온 것이다. 책으로 따지자면, 김화영 교수가 번역한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을 그대로 복사해 다른 출판사에서 출판한 경우와 같다. 최소한의 상도의를 지키지 않은 이런 행위는 명백한 범죄행위다. 절대 동조하시 마시길.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1-08-1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대작을 보셨군요.대단합니다.소설의 마지막은 가지가 죽는데 영화는 다르군요.소설로 인상깊게 읽었습니다.저희 아버지 세대들이 많이 읽고 감동했다고 하죠.이젠 서점에서도 잘 안 팔린다는데...
저도 시간 내서 감상하고 싶군요.

Tomek 2011-08-17 18:18   좋아요 0 | URL
아, 영화에서도 가지는 죽습니다. 나름 스포일러라 피해보려고 두리뭉실하게 쓴 게 의미가 모호해진 것 같네요. 눈 덮인 길에서 쓰러지는데, 발은 계속 나아가려고 꿈틀꿈틀 거리는 장면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영화를 보니까 소설도 관심이 생기는데, 소설은 절판이라 이젠 구할수도 없네요. 영화가 소설을 뛰어넘을 수는 없지만, 몇 몇 장면에서는 영화가 소설을 뛰어넘는다고 하니 한 번 확인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D

노이에자이트 2011-08-1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러면 소설과 마지막 장면이 동일합니다.소설에선 죽은 가지 위로 눈이 계속 쌓이는 장면을 아주 간결하게 묘사합니다.그러면서 끝...

가끔 새책방에도 10여년 전에 나온 <인간의 조건>이 다른 제목으로 나와있으니 한번 찾아보십시오.

카스피 2011-08-18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조건이라 저도 헌책방에서 이 책을 봤던 기억이 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08-18 22:50   좋아요 0 | URL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은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죠.그러고 보니 이 소설도 중국이 배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