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에는 습진이 있다. 근원은 확실치 않으나, 기원은 확실하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부터 발병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동안 안녕했던 손가락에서 진물이 새어 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깜놀”할만한 일이었으니까. 이 습진은 환절기마다 약하게 발병했는데, 아주 심각해진 것은 (역시나) 군대에서였다. 당시 내 보직은 취사였는데, 기름과 물을 손에서 뗄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간 숨죽여있던 습진균들은 드디어 때를 만난 것처럼 창궐했었다. 마치 자해라도 한 것 같은, 찢어지다 못해 터져 입을 벌린 상처들, 그리고 그 벌린 상처 안에 낀 찌든 기름 때. 확 잘라버렸으면 시원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시 습진은 엄청난 고통을 가져왔었다. 제대한 후 습진은 많이 나아졌지만, 요즘도 환절기만 되면 손가락이 붓고 진물이 샌다.
하지만, 습진의 발병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가려움이다. 이 가려움은 인간 이성의 제어력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쉽게 증명하곤 하는데, 벅벅 긁다보면, 진물과 피가 한데 엉겨있는 것을 확인하는 지저분함을 늘 확인하게 된다. 근 10여 년간 몸에 지닌 질병이라, 어느 정도 대처법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최고는 뜨거운 물에 손가락을 지지는 것이다. 수도꼭지를 틀고 조금씩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물을 기다리며 손을 대고 있는 그 순간은 곧 닥쳐올 공포와 환희를 기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물이 적정 온도를 넘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손가락에서 시작된 짜릿한 소름이 팔과 어깨를 거쳐 바로 머리로 직행한다. 살이 익는 고통과 잠시나마 가려움에서 해방되는 쾌감! 물론 그 짜릿한 순간은 매우 짧고, 습진과 발진은 더 심해지지만, 환절기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난 아마도 그런 미련한 짓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내 이런 비이성적인 행위들이, 내가 백가흠의 소설을 읽는 것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백가흠의 소설은,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읽다가 책을 던져버리는, 늘 확실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소설엔 이상한 고통이 있다. 물론 백가흠의 인물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 문학에서 많이 봐 왔던 것들이고, 그보다 더 고통스러움을 감내하는 소설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유독 백가흠의 소설만 “책을 던져버리게(혹은 덮어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그의 소설은 읽는 이에게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전에 <시사IN>에서 『조대리의 트렁크』를 언급하면서 김기덕을 이야기했었는데, 이는 (어느 정도는) 맞는 표현이다. 김기덕의 영화와 백가흠의 소설엔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는 인물들이 하나 같이 모두 우리의 사회적 관계망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밑바닥 인생들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같은 밑바닥 인생들끼리 서로 가학-피학의 관계를 주고받는 것, 그리고 셋째로는 ‘나’와는 상관없는 이들끼리의 행동이 영화를 보는/책을 읽는 ‘나’로 하여금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물론 김기덕은 <빈 집>부터 인물(들)을 중산층 이상으로 설정했다. 그 이유는 인물들의 계급 때문에 자신의 영화가 오해받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더 자세히 들어가면 글이 산마저 벗어나 다른 행성으로 가버리니 이쯤에서.)
신문에서 조차도 “추잡하다”고 버릴만한 ‘소재’들을 이 둘은 자신만의 이야기로 가공해서 세상은 실제로 안녕하다고 생각하는 내 눈먼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이것은 언제나 세상(일)에 관찰자인 ‘나’의 위치를 ‘주체’로 돌려놓으려는 행동이다. 그러니까 백가흠의 인물들이 부서지는 모습은, 마치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과 같은 종교적 행위처럼 보인다. (그들의 행위가 순교적이라는 게 아니라, 그저 비유일 뿐이다.) 종교적 행위에서 비롯되는 죄의식. 바로 그 불편함.
백가흠의 소설들을 분류해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식의 ‘사회 고발 소설류’(마눌님의 표현대로라면 <긴급 출동 SOS>류 소설들)와 그의 일상을 모사해 낸 듯한 ‘사(私) 소설류’로 나눌 수 있다. 전자가 끔찍하다 못해 진저리친다면, 후자는 의외로 귀여운(?) 느낌이 들 정도로 발랄하다. 전자가 읽는 이의 사회적 위치를 주체로 바꾸는데 노력한다면, 후자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데 주력한다. 『귀뚜라미가 온다』가 전자에 치중했다면, 『힌트는 도련님』은 후자에 치중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가 계속해서 소설을 써가는 과정이 그 자신이 작가가 되고 싶은 ‘바람’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귀뚜라미가 온다』에서는 온갖 끔찍하고 역겹고 (가끔) 섹시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 기괴한 상상력의 끔직한 사건들을 가지고 백가흠은 서사를 구성하려고 ‘애쓴다.’ 소설들은 그럴듯하지만, 다분히(혹은 당연히) 위악적이고 소재주의적이다. 『귀뚜라미가 온다』만을 읽는다면, 아마도 백가흠이라는 이름은 센세이셔널리즘에 기대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대리의 트렁크』부터 무언가 달라졌다. 여전히 (그리고 더 지독하게) 끔찍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귀뚜라미가 온다』의 소설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차갑게 ‘바라보게’ 한다면, 『조대리의 트렁크』는 ‘(고개를 들어) 쳐다보게’ 한다. 이런 시도가 가능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 책에 수록된 「장밋빛 발톱」에서부터 시작한 사 소설들 때문일 것이다. 백가흠은 『힌트는 도련님』에 등장하는 ‘소설가 백’, ‘백 도령’, ‘P’를 통해 소설의 인물에 자기 자신을 투영한다. 이 등장인물들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같이 ‘욕망’에 집착해있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은 ‘소설의 서사를 완성’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 글을 써도 글자가 증발하는, 그래서 자신의 글이 원고지에 ‘새겨지길’ 바라는 소설가 백이나, 자기가 썼던 소설의 주인공에게 ‘그럴 듯한 이야기’를 부탁하지만, “(네가 써왔던 대로) 그냥 몇 죽여”라는 말을 듣는 백 도령, 소설을 쓰기위해 상대방을 압박/협박해 잊(으려 애쓰)고 있던 죄의식을 몽땅 끄집어내 결국 고해성사를 하게 만드는 P, 이들 모두 소설을 완성하지는 못한다. 작가가 되고 싶지만, 결국 되지 못하는, 혹은 탈고된 원고를 결코 보지 못하는, 하지만 독자들은 결국 보게 되는 이 이상야릇한 사 소설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너무 과장된 기대일까?
백가흠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그는 (적어도 내게는)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였다. 이번 『힌트는 도련님』을 읽었을 때 드는 생각 역시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다. 하지만, 단편들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그는 장편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 같아 보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들은 그의 작품 안에서 모두 완성되지 못했으니까. 나는 혹시라도 그가, 10년 후에도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로 남게 되는 게 아닐지 걱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임에 분명하다. 그는 소설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소설에 대한 “힌트”는 찾았으니까. 그의 다음 작품에서 “글자가 새겨지는” 것을 쳐다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피부과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손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방치했냐고 야단을 쳤다. “한순간의 짜릿한 쾌감 때문”이라고 차마 말을 못하고 처방과 약을 받았다. 앞으로 나는 내 고통스런 쾌락을 백가흠의 책에서 찾아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