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CinDi영화제 섹션별 추천작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날씨 게릴라성 집중호우.  

영화제에 참석하면서 다짐했었던 한 가지는, 모든 영화에 열린 마음으로 대한다는 것이었다. 난, 영화에 대해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경쟁작들을 보면서, 내 마음이 열렸다는 것을 확인한 것 대신, 내 취향이 더 확고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난, 모든 영화에 대해 이미 나만의 기준을 정한 것이 아닐까? 성장했다는 점에서는 기쁜 발견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영화를 받아들이는 다양성에서는 갇힌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이번 신디 영화제를 통해서, 내 자신이 고착화 된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닐는지. 이제 영화에 대해 더 이상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은 힘든 일일까?  

 

츠보타 요시후미 감독의 <미요코(美代子阿佐ヶ谷気分)>는 아베 신이치의 동명 만화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만화가인 아베 신이치는 애인인 미요코를 주제로 만화를 창작한다. 그는 미요코의 일상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나, 그런 방법은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기 마련이다. 그의 만화를 위해서 미요코의 생활은 점점 끔찍하게 망가지기 시작하고, 아베는 정신 분열에 시달린다.  

츠보타 요시후미 감독은 창작자와 뮤즈의 끔찍한 관계를 무시무시할 정도로 그려낸다. 아베가 미요코의 일상을 만화로 끌고 왔을 때, 만화(라는 예술)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그와 미요코의 일상은 지옥이 된다. 이 이야기는 예술을 위해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가 점점 '재미있는' 만화를 그릴수록, 현실속의 미요코는 처참하게 망가진다. 영화 초반, 아베 신이치를 보면서 다자이 오사무를 언급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미요코>는 일정부분 매력적이고 매혹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을 관음증 혹은 도착증 환자로 끌어내려 버린다. 아베가 미요코의 친구인 미치코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이나, 미요코와 가와모토에게 억지로 섹스(라기 보다는 강간, 아니 윤간)를 하게 하는 모습은, 불편함을 넘어서 고통을 느끼게 한다. 창작자의 고통은 이렇게 힘든 것일까? 감상자는 예술가의 창작물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미요코>는 이 불편한 질문을 시종일관 내내 끌어안는다.  

한 가지 아쉬운 점. <미요코>는 순수 창작물이 아니라, 실제 아베 신이치(安部愼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 이 사실은 영화의 엔드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에서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난 실제 아베 신이치와 영화 속 아베 신이치 사이의 간극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영화 바깥의 영화, 텍스트 바깥의 영화임 동시에, 인터넷 검색의 영화이기도 하다.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영화가 도착하기 마련이지만, 아직까지, 이런 영화는 받아들이기 힘들게 느껴진다. 영화란, 정말 얼마나 따라가기 힘든 예술인가!  

 

왕 유린, 에세이 라우 감독의 <천국에서의 일주일(父後七日)>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겪으면서, 그 안에서 기억나는 아버지의 추억을 다룬 영화다. 감히 단언하건데, 이 영화는 15편의 경쟁작들 중, 가장 즉각적으로 눈물을 쏟게 만드는 영화다. 그렇다고 구질구질한 신파란 얘기는 아니다. 이 영화는 대만의 전통 장례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상실을 기억, 추억, 애도라는 형식으로 따스하게 감싸 안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화자인 메이는 아버지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떠올린다. 아버지의 딸에 대한 사랑은 별로 특별한 게 없다. 하지만, 신발을 벗었을 때 자신의 슬리퍼를 대신 주는 모습에서, 딸의 생일에 어머니가 힘들게 사주신 금쌈밥을 몰래 주는 모습에서, 이런 사소한 장면으로 이들 감독은 가슴 울리는 감정을 조금씩 쌓아 올린다. 영화 초반, 분향을 할 때 향 대신 담배를 태우며, 같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과, 영화의 마지막, 공항에서 아버지와 함께 담배를 태우는 모습은, 정말 눈물 없이 보기 힘든 명장면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영화는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과 임권택 감독의 <축제>였다. 이들 영화가 <천국에서의 일주일>과 같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세세한 감정을 다룬 것이 비슷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고나 할까. 관객과의 대화에서 내가 질문을 서툴게 해서, 감독님은 자신의 영화가 이들 영화의 모방이 아닌가 하는 뉘앙스로 잘못 받아들인 것 같았다. 이런 유의 질문은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쉽게 다가간 것이 아닌가 조금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고이데 유타카 감독의 <이토록 어두운 밤(こんなに暗い夜)>은 생존과 죄의식의 끊임없는 위치 이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얘기는 이렇다. 린코는 아이를 갖지 못해 불임 시술을 받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갖지 못하는 아이들을 증오한다. 어느 날, 그녀가 키우는 개 ‘본’이 실수로 자치회장의 손녀를 무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는 자신의 개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그녀는 본을 살리기 위해 비슷한 개를 훔치는데, 실수로 그 개의 주인인 아이를 죽이게 된다. 그녀는 쿄라는 남자와 불륜을 맺고 있었는데, 쿄의 부인이 남편을 불륜 물증을 잡기 위한 도청장치로 인해 본의 아니게 린코의 살인을 알게 된다. 그녀는 린코에게 자신의 남편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한다. 바꿔치기한 개를 죽인 후, 린코는 쿄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야기는 아직 절반 밖에 하지 않았다. 영화는 이런 기막힌 이야기들이 계속 진행된다. 이 영화는 희생자의 위치가 계속 바뀌면서 벌어지는 아이러니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불임 여성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고 뺐기고 혹은 죽이면서 얻는다. 그녀들은 분노와 증오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들의 죗값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녀들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있으나, 그녀들은 그런 위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들은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이 영화의 장르는 필름 느와르다. 이전의 느와르가 표면적인 빛과 어둠의 관계를 다루었다면, <이토록 어두운 밤>은 등장인물들의 어두운 심리 상태를 다루었다. 특히 여주인공 린코는 마치 험프리 보가트의 재림이라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무표정하고 시니컬한 모습을 영화 내내 수놓는다.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슬픈 델마와 루이스, 그 잔혹 버전.  

 

헤이워드 막 감독의 는 정말 귀여운 영화다. 영화는 첸 준 핑과 주이의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결국 이 영화는 주이의 이야기이다. 첸 준 핑은 시이와 사귀고 있고, 주이는 우디와 사귀고 있다. 첸 준 핑과 주이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다. 공항에서 이들은 우연히 만난다. 주이와 우디는 헤어지고, 갈곳이 없는 주이는 첸 준 핑과 시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30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동안, 주이는 예전에 첸 준 핑과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고, 그간 사귀었던 남자 친구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첸 준 핑 역시 주이와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는데, 이들의 기억은 현실과 과거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만다.  

참으로 뻔한 이야기의 연속이지만, 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감정을 불러오고, 첸과 주이는 반복과 익숙함 그리고 그리움 사이에서 방황하고 만다. 이 이야기는 명백히 시이의 성장담이다. 그녀는 지금껏 사귀었던 남자들을 추억하고 기억하고 그리워하면서, 지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녀는 항상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의 여행이 남자들에게 기댄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힘들 때, 그녀의 부모는 항상 곁에 없다. 마지막에 등장한 그녀의 어머니는 "이제는 혼자 여행을 다니"라는 조언을 한다. 물론, 이 영화, 참으로 감각적이고 도식적이다. 멋진 인테리어와 (잔소리를 하지 않는) 부모 없는 청춘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하지만, 영화는 딱 그만큼 비어있다. 왜 아시아에서는 (왕가위를 제외하고는) <줄 앤 짐>같은 청춘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일까? 왜 그들의 고민은 공허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는 딱 그 만큼의 영화로 내게 다가왔다. 이 영화는 시이가 전 남자 친구들에게 보내는 귀여운 연서(戀書)다. 하지만, 난 그 편지를 너무 늦게 받았다.  

 

이렇게 길고도 짧았던 CinDi 영화제의 공식적인 일정이 끝났다. 내일은 폐막식이 있을 예정이고, 각 심사위원단들의 수상작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들은 이 경쟁작들 중에서 어떤 점을 봤을까? 그들은 어떤 영화를 지지할까? 내가 지지하는 영화의 거리와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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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8 05: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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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8 09: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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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8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3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4회 CinDi영화제 섹션별 추천작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날씨 견딜만했음.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같습니다. 섹스에 대한 본성, 먹을 것에 대한 본성... 하지만, 문화적 차이로 이러한 본성은 달라집니다. 모든 영화는 (인간에 대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각기 고유한 문화적 특성의 차이로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저에게 루이스 부뉴엘 감독이 중요한 이유가, 홍상수 감독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과의 신디 토크에서 영화 평론가 샤를 테송은 (국가가 아닌) 문화에 따라 영화가 갈린다고 이야기했다. 하긴, 모든 영화의 시놉을 5줄로 요약하면, 언제나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같은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은, 그의 지적대로 문화의 차이에서 나온다.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것,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것. 영화제의 가장 큰 축복은 바로 영화를 통해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제스처를 보이는 친구들의 우정을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이더 라시드 감독의 <우울과 매혹(Tangled up in Blue)>은 영국에 사는 이라크 출신의 이민 2세(혹은 망명 2세)의 이야기이다. 남자는 아버지 라시드 자하이 교수가 이라크에서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에겐 아버지의 육성 원고가 있다. 그는 그 원고를 출판하려고 한다. 그에겐 친구 같은 여자 친구가 있는데, 어느 날 그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고백은 실패하고, 그는 아버지의 책을 출판할 생각을 버린다.  

<우울과 매혹>은 처음에는 이라크의 상황을 알리는 '정치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이야기는 그와 그녀의 사랑 이야기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른 감정은 통속극이다. 그런데 이 통속극 사이에 무언가 알지 못하는 불편한 감정이 끼어든다. 그 감정은 주인공 아버지의 육성 원고이기도 하고, 주인공을 둘러싼 숨 막힐 듯한 파랗고 우울한 빛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야기의 뼈대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감정을 느낄만한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쩌면, 자신의 나라에서 살지 못하고,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방인들 취급을 받는 이민 2세대들의 일상은 영화의 주인공처럼 그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영화는 심히 불편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영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같은 문화권에서 살면서 편하게 영화를 즐기는 우리들에게, 이런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하이더 라시드 감독의 진심어린 마음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한국의 관객들보다는 외국의 관객들에게 열띤 반응을 얻었다. 질의 응답도 대개는 그들에게 돌아간 편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여러 매체와 인터뷰하는 것을 잠깐 보니, 아무래도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화를 보고 한 가지 드는 의문. 주인공이 집으로 들어왔을 때 그의 방에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 감독의 <블루> 영화 포스터 액자가 걸려있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의 이야기는 <블루>의 판박이다. <블루>에서 안나는 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었다. 그녀는 남편의 미완성 악보를 발견하고, 남편의 동료와 그 악보를 완성하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그 악보는 유럽통합을 축하하는 진혼곡(!)이다. <우울과 매혹>에서 주인공은 아버지를 잃었지만, 그에게는 아버지의 육성 원고가 있다. 그러나 그는 육성 원고를 출판하지 않고, 여자 친구와의 사랑도 결국에는 이루지 못한다. 그는 왜 자신의 영화에 키에슬로브스키 감독을 끌어들인 것일까? 어쩌면 이 영화는 자유와 우울, 두 개의 블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홍상수 감독의 10번 째 장편 <하하하>를 두 번째로 스크린에서 보면서, 실컷 웃다가, 갑자기 불현 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에서 문경(김상경)과 중식(유준상)은 결국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느낌이 있었던 반면, 젊은 시인 김강호(김강우)는 계속 나쁜 상황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경은 꿈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나면서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중호는 애인인 연주(예지원)의 상황을 이해해보기도 하지만, 강호에게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그는 어둡고 슬픈 동굴 같은 예성아파트 506호에서 살아가면서 실존주의에 입각한 시를 계속 써나갈 것이다. 그런 그가 "나한테 왜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기지?" 하면서 호탕하게 웃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비애가 느껴졌다. "너만 지금 상황을 모르고 있구나." 이때쯤에 중호의 대사가 떠올랐다. "지금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도 알게 될 거야." 

홍상수 감독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다소 도식적으로 나누어 보면, 30대 이상과 30대 이하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나쁜 결과를 맞이하지만, 30대 이상의 인물들은 간혹 깨달음을 얻기도 하지만(<생활의 발견>, <극장전>, <해변의 여인>), 30대 이하의 등장인물들은 예외 없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왜 그는 젊은 캐릭터들에게 이렇게 가차 없는 것일까?  

이 질문을 관객과의 대화에서 홍상수 감독에게 했더니, 예의 심드렁한 (그러나 단호한) 대답을 했다. "저는 젊음을 싫어합니다. 20대에도 힘들었고, 30대에도 힘들었고 40대에도 힘들었지만, 다시는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시네 토크를 진행하는 정성일 평론가가 이 말을 듣고 보충 설명을 해줬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예술가적 자의식, 그럼으로써 지나간 과거를 그저 버린 시간이 아닌, 감싸 안을 수 있는 시간으로 삼는 것,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과의 싸움." 

아마도 이번 영화제의 하이라이트는 홍상수 감독과 평론가 샤를 테송과의 대담이 아니었을까? 이 대담은 <하하하>의 상영 후에 이루어졌다. 홍상수 감독이야 워낙에 눌변이라 큰 기대는 안했지만, 샤를 테송도 만만치 않은 눌변을 자랑해서, 대담은 다소 지루한 면이 보인 것도 사실이다. 물론 샤를 테송이 (확실치 않은) 영어로 대담을 진행해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분위기가 조금 늘어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들 감독과 평론가의 대화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영화제의 가장 큰 축복일 것이다.  

 

리우 지앤 감독의 <나를 찔러봐(刺痛我)>는 중국의 현실을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순박한 청년 장 사오준은 도둑으로 오인되어 폭행을 당한다. 상점 사장의 사장은 장 사오준을 잘 구슬려 대중 합의하고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그가 다니는 신발 공장이 부도로 문을 닫게 되어 그는 고향으로 갈 결심을 한다. 기차를 타기 전, 어느 할머니가 오토바이에 치인다. 그는 조금 고민하다가 병원에 연락을 한다. 그러나 피해자의 가족인 경찰이 장 사오준을 범인으로 몰고, 그는 경찰서에서 갖은 모욕과 폭행을 당한다. 오해가 풀려 나온 장 사오준은 친구에게 연락을 해, 이 모든 일에 대한 정신적 합의금을 받을 결심을 한다.  

성인군자 소리를 듣는 장 사오준에게 벌어지는 고난은 모두 돈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경제 위기는 모든 것을 변하게 했다. 대학 교육을 마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장에서 신발을 만드는 일 뿐이다. 그리고 그나마 할 수 있던 일조차도 경제위기로 없어지고 만다. 그가 오해를 받아 경찰에 잡혀갔을 때, 그를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경제위기로 인해 다 사라지고 말았다. 돈은 인간을 증명해주는 구실마저도 한다.  

경쟁작들 중 가장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나를 찔러봐>는 쉴 새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와 인물들로 긴장을 놓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후반부에 한 장소에 모든 등장인물이 모이는 순간은 마치 타란티노 감독 초기작의 경쾌함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그 장면을 얼마나 장르적인지, 보는 내내 웃음과 긴장을 끊임없이 요구하게 한다.  

이 내용은 극영화로 찍어도 상관없었을 작품이기도 하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다루면서 무언가 독특한 감정을 발산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은 대부분이 스틸사진처럼 멈춰 있다. 아무래도 제작비 절감을 위해 그대로 화면을 정지시킨 것 같은데, 오히려 그런 효과가 이 영화에서는 미학적으로 느껴졌다. 화면이 멈춤으로써 생기는, 마치 유령 도시 같은, 아니 유령 국가 같은 느낌. <나를 찔러봐>는 현대 중국을 가장 살벌하면서도 미학적으로 다룬 작품임에 분명하다. 이 장면들만으로도 이 영화는 논의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  

 

어느새 영화제도 종반을 향해 달려간다. 결국 흐르는 것은 시간뿐이고, 그 안에서 아등바등하는 것은 인간뿐인가. 즐거운 와중에도 허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이제 작별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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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CinDi영화제 섹션별 추천작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날씨 뜨거움.  

"최근의 영화는 모두 문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개미촌>을 연출한 가오 원동 감독은 관객과의 질의 시간에 이런 탄식을 했다. 원래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 구경거리로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경거리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여러 예술을 빌려 쓰기 시작하면서, 예술성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회화의 구도, 음악의 사운드, 연극의 배우, 그리고 소설의 이야기. 영화는 영화 고유의 것을 만들어가기 보다는 다른 예술이 이룩한 정수를 훔쳐 쓰기에 바빴다. 영화는 서사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한국 영화계에서는 이명세 감독이 어느 정도 실험을 해봤지만,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완전히 오해받았다. 오늘 신디에서 본 4편의 영화들은 영화의 형식에서 서사를 극복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겠다.  

 

양 루이 감독의 <크로싱 마운틴(翻山)>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공간에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놉에는 중국과 미얀마 국경 근처에 사는 와(瓦)족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그들에 대한 어떤 정보도 나오지 않는다. (이 지역의) 가도산에는 예전에 이상한 풍습이 있었다. 농사의 풍요를 빌기 위해 남자들의 머리를 잘라 제물로 바친 것이다. 영화 속에 비치는 다큐멘터리 팀들이 실제로 남편의 머리를 자르고, 남편의 살을 먹은 할머니를 인터뷰하는 내용에 나오는 이야기다. 농사의 풍요는 생존의 절실함일 수도 있고 인간 욕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영화는 이 끔찍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난 후, 수퇘지의 거세 장면을 보여준다. 수퇘지를 거세하는 농부는 마치 주술을 외듯, 돼지에게 이야기한다. "교미는 그만하고, 살코기가 많이 붙어라."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지만, 영화는 계속 다른 사건으로 점핑을 한다.  

<크로싱 마운틴>의 장르는 극영화이지만, 감독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섞어서, 영화에서 서사를 지워버렸다. 영화가 어느 정도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 시작하면, 감독은 갑자기 컷을 나누어 쇼트와 반응 쇼트를 보여준다. 어느 정도 인물들의 감정에 이입되기 시작하면, 영화는 어느새 시침 뚝 떼고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양 루이 감독은 가능한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가능한 모든 것을 소외시킨다. 관객들은 모든 것을 영화를 통해 보지만, 때로 일부러 거세시키는 사운드와, 때로 자막을 보여주지 않는 마을 주민들 간의 대화로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중국 소수 민족의 실상을 알리려는 영화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삶을 느끼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 의도는 존중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난, 이 영화를 따라갈 수 없었고, 이들의 삶을 느낄 수 없었다. 새로운 형식이고 새로운 감정을 이끌어내지만, 정작 이 영화는 너무 표면을 겉도는 느낌이 있다. 물론 내가 따라갈 수 없었다고 해서 이 영화가 졸작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단지, 새로운 영화가 되기에는 아직까지는 힘에 부쳐 보인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내가 준비가 되지 않은 관객임에는 분명하지만 말이다.  

 

이나바 유스케 감독의 <너와 엄마와 카우보이(君とママとカウボーイ)>는 조지(Geroge)라는 이름을 가진 한 (일본인) 청년의 이야기이다. 그의 이름이 그런 것은 그의 아버지 때문이며, 그는 홀로 살고 있다. 영화는 조지의 무료한 일상생활을 따라다닌다. 그가 카우보이모자를 쓴 아버지를 만나면서 조지의 삶이 조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나' 대신에 '너'라는 인칭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이 영화의 인물에 온전히 감정이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1인칭인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칭은 다 타인이다. 그들의 감정을 (슬프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조지라는 인물의 내면을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이렇게 드러난 한계는 오히려 장점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조지의 내면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영화는 더욱 차갑고 슬프게 느껴진다.  

<너와 엄마와 카우보이>는 1.85:1의 비율로 시작한다. 한 여인의 걷는 모습. 그리고 여자의 (시시콜콜한) 내레이션이 끝나면, 우리는 주인공이 이 여자가 아니라, 이 여인을 스치는 한 사내임을 알게 된다. 그러고 나서 화면은 1.33:1의 비율로 바뀐다. 1.85:1 대 1.33:1, 비스타 비전 대 스탠더드, 영화적인 화면의 비율과 일상적인 화면의 비율. 이나바 유스케 감독은 이 영화가 극(劇)적으로 보이기보다는 일상처럼 보이길 원했던 것일까? 극(劇)적인 일상 혹은 일상 같은 극(劇). 영화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은 등장인물의 감정이다.  

 

가오 원동 감독의 <개미촌(螞蟻村)>은, 이제는 개발로 사라져 가는 다롄(大連)에서 찍은 영화다. 가오 원동 감독은 실제의 지명을 쓰는 대신 허구의 지명을 빌려왔는데, 그 이유는 개발이 끝난 수 다롄의 모습을 영화에서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개미촌>은 대학을 졸업한 안안의 이야기이다. 안안은 남자친구 이샹과 결혼해 아기를 갖고 싶은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소박한 꿈을 갖지 못하게 한다. 그녀는 아샹을 만나면서 린 사장과 불륜을 맺고 있다. 그녀는 그 돈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아샹을 돌볼 수 있었다. 아샹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직업도, 돈도 없이 그냥 지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린 사장과 아샹이 동시에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리고 린 사장 부인이 남편과 안안의 관계를 알아내고, 아샹도 그 안안의 양다리를 알아챈다. 린 사장과는 헤어지고 아샹은 사라진 상황에서 안안은 자신이 임신을 했음을 알아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모골이 송연한 장면. 안안이 린 사장과 아샹의 병간호를 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그 화면이 광장의 전광판에 보인다. (물론 다른 장면에 입힌 것이다.) 사람들은 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그리고 카메라도 정확히 그들의 위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녀의 안쓰러운 모습은 그 사람들에게나,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나 구경거리로 전락되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스포일러라 내용을 밝히지 못한다) TV를 보고 있던 안안이 갑자기 카메라를 쳐다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 잠깐 지나가는 장면이었지만, 안안의 젖은 눈시울은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재미있게 잘 보셨나요? 이제 만족하시나요?" 마치 타인의 삶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킨 것 같은 반성과 죄스러움. 세상은 점점 나빠져가고, 그녀와 같은 사람들은 점점 변두리로 밀려날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그저 구경거리로 여길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 당신의 인생도 언젠가 광장의 스크린에서 상영될지도 모른다. 그 때 카메라를 향해 울어봤자, 그 땐 늦는 것이다. <개미촌>은 가오 원둥 감독이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인 것이다.  

 

성지혜 감독의 <여덟 번의 감정>은 뻔한 내용과 새로운 경지를 한꺼번에 보여준다. 미술관 큐레이터인 중호는 선영과 헤어진 후에 은주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중호는 선영과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이내 취소하고 은주와 결혼할 생각을 한다. 결국 그들은 결혼을 하지만, 중호는 이 삶이 자신이 원한 것이었는가를 회의하기 시작한다.  

<여덟 번의 감정>은 정말 뻔한 이야기이다. 너무나 뻔해서 영화가 시작한지 10분도 안 돼 결말을 알아챌 정도다. 감히 도식적으로 표현해본다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경유한 연애학 보고서라 할까? 그런데 이 뻔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감정의 점핑을 한다. 마치 연속극의 영화 같다고나할까? 등장하는 인물은 같은데, 매 씬마다 그들의 감정은 각기 다르다. 일주일과 일 년이라는 시간의 경과, 서울과 부산 그리고 피지라는 전혀 다른 공간 사이에서 인물들의 감정은 계속 자리를 바꾸어가며 넘나든다. 사랑의 생성과 소멸로 인한 인간사의 고통 속에서, 시간은 묵묵히 제 갈 길을 간다. 사랑의 고통은 부처님도 하나님도 해결을 못한다. 중호의 구원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서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화는 정말 가능할까? 영화를 영화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영화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성을 찾아낼 수 있을까? 영화제 3일 째 날에 4편의 영화에서 질문을 발견했지만, 아쉽게도 답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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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CinDi영화제 섹션별 추천작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날씨 여전히 더움.  

영화제의 가장 좋은 점은 영화계의 명사들을 직접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이 유명한 사람들은 저 멀리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와 같은 극장에서 나와 같은 영화를 보고 있다는, 동질감을 넘어선 우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라는 이름으로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설레고 또 황홀한 일인가!  

 

로샨느 새드나타 감독의 <살아남아라>는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비극, 킬링필드를 다루는 영화다. 로샨느 새드나타 감독은 10살 때 이 비극을 직접 겪었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이모와 이모부를 잃었다. 당시 이모는 임신 6개월이었다. 감독과 어머니는 밤중에 당시 거주하고 있던 마을에 도망가 프랑스로 망명을 한다. 이 영화는 당시 학살을 경험했던 감독이 30년 만에 캄보디아에 돌아가, 당시 학살의 중심에 있던 민주 캄푸치아 대통령이었던 키우 삼판을 인터뷰하고, 자신이 10살 때 겪었던 일을 회상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미덕은 역사의 비극이라는 거대담론을 다루는 대신, 감독이 10살에 겪었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이다. 로샨느 감독은 키우 삼판에게 그 때 왜 그랬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키우 삼판은 자신의 신념을 믿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민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다.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는 그릇된 신념 위에 있었다. 그 당시 캄보디아에는 이데올로기는 있었으나, 인간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정부의 선동을 이해하지 못한 농촌의 '옛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을 숙청한다. 감독의 삼촌은 금지된 감정인 사랑을 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사람을 죽여 비료로 쓰는 것은 기본인 세상이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모골이 송연한 장면. 감독과 어머니는 그들이 도망쳤던 마을에 가본다. 그 마을은 변한 것 없이 그대로 있었고, '옛 사람들'도 나이를 먹은 채로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갑자기 사운드가 죽고, 내레이션의 목소리는 공포를 느낀 것처럼 변한다. "저기 옛 사람들이 몰려온다. 우리를 죽인, 우리를 감시한.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킬링필드를 직접 경험한 10살의 로샨느 감독은 우리에게 묻는다. 저 순박한 사람들이 악마가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키우 삼판의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그릇된 신념은 커다란 비극을 만들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캄보디아의 역사는 과거형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가능태를 지닌 역사다. 우리 역시 비슷한 현대사의 비극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 대통령 역시, 자신의 그릇된 신념으로 얼마나 많은 존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가! <살아남아라>는 캄보디아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감독 자신의 개인사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우리의 역사까지도 껴안는 흔치 않은 영화다.  

 

 

쉬 퉁 감독의 <점술가(算命)>는 점술가 리 바이청에 관한 이야기다. 리 바이청은 점술가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앞날을 봐준다. 액운은 피하게 하고, 길한 일을 얻기를 바라며 그는 점을 쳐준다. 그의 부인은 귀머거리에 벙어리이고 절름발이다. 그는 16년 전, 아내와 결혼했다. 그의 점을 보러 오는 단골손님들은 매춘부들이다. 그의 주변에는 소외되고 약자인 사람들만 가득하다. 리 바이청은 선인(善人)이지만, 성인(聖人)은 아니다. 그는 때때로 욕망을 발산하기도 하고, 물욕적인 욕심을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점술을 통해 그와 마찬가지인 사람들을 위로해준다.  

쉬 통 감독은 대학을 마친 인텔리전트다. 그런 그가 점술이라는 비이성적 행위를 믿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쉬 통 감독은 리 바이청의 점술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것을 믿는다. 그는 평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봐주면서 살아왔다. <점술가>는 한 평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봐준 리 바이청의 삶을 위로해주는 영화다. 한 편의 영화가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오롯이 담아내면서, 또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다니! 감히 이야기하자면, <점술가>는 지금껏 내가 봐 온 영화들 중 가장 따듯한 영화다.  

  

총 펑 감독의 <미완성 생활사>는 중국 서북부 황양촨의 교사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에는 굉장히 많은 교사들이 나오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은 리우 동야오 선생이다. 그는 미술 선생으로 부임했지만, 체육 과목을 맡기 시작하고 최근에는 음악 과목까지 맡았다. 선생들의 일상은 너무나 따분해서,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며 지낸다. 지루한 일상에서 가장 활기찬 시간은 술을 마시는 시간일 때다. 이들이 마시는 술은, 현실을 잊기 위한 취생몽사다. 그들은 계속 취한 상태로 깨어있고, 혹은 깨어있는 채로 취해있다.  

영화는 207분(3시간 27분!)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 시시콜콜한 일상을 보여준다. 변화도 없고, 변하고 싶은 마음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죽이며 살아가는 중국의 교사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완성 생활사>의 놀라운 점은 별로 특별하지 않는 내용으로 영화가 꽉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이런 평범하고 시시콜콜한 일상을 찍고 기록해서 모은 것이 영화가 될 수 있고,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총 펑 감독은 직접 증명했다. 어쩌면 이런 것이 진짜 영화의 힘이 아닐까?  

<미완성 생활사>는 디지털 영화라는 화두를 직접 몸으로 부딪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이제 시스템 없이도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총 펑 감독은 직접 증명해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가 소개되어질 수 있는 플랫폼이 아닐까? CinDi 영화제는 어쩌면 디지털 영화의 플랫폼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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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1 0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1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4회 CinDi영화제 섹션별 추천작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날씨 더웠음.  

영화제에 참석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언제나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설렘이 주가 된다. 어떤 작품은 잘 알고 있는 감독의 새로운 작품일 수도 있고, 어떤 작품은 여러 영화제를 거치며 입소문을 탄 작품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신디에서 만난 작품들은 (한 편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작품들이었다. 이런 작품들을 만난 내 느낌은, 정말이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든다. "음, 영화, 내가 좀 알지!"하는 오만한 생각이 아주 박살이 난다고 할까. 이런 부끄러움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난 지금까지 할리우드와 충무로, 그리고 유럽에서 제작되어 한국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에 얼마나 많이 길들여져 왔던가. <인셉션>의 표현을 조금 빌리자면, 영화제의 영화들은 주류 영화 속에 잠들어 있는 나를 깨워주는 킥이다. 오늘 본 영화들은 충분히 그럴만한 위치에 있는 영화들이다.  

 

리 홍치 감독의 <겨울방학(寒假)>은 시간으로 다루면, 겨울방학이 끝나는 이틀간에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아이들은 할 일 없이 거리를 방황하고 친구 집에 놀러간다. 새로운 일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게 반복되는 쳇바퀴 도는 일들의 연속이다. 개학이 되도 달라진 것은 없다.  

리 홍치 감독은 고정된 카메라에 일상의 권태와 을씨년스러운 공간을 잡는다. 이런 것은 마치 늘어지는 시간의 흔적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이들은 시간을 버린다. 어른들도 시간을 버린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르지만, 모두들 시간을 죽이기만 한다. 아이들에겐 꿈이 없다. 그들의 꿈은 여자 친구와 결혼해서 자신의 씨를 자손만대로 퍼뜨린다거나, 혹은 이 지긋지긋한 가족들에게 벗어나 고아가 되는 것이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 영화에 나오는 어른들(그들의 부모들)처럼, 이혼을 하거나, 정신이 나가거나, 모든 일에 무심해질 것이다. 영화에서 모든 행동들이 두 번씩 반복됐듯이.  

개학이 되어도 여전히 죽어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리 홍치 감독은 절규와 탄식을 오간다. 아쉬운 점은, 이 모든 것이 탄식하는 것에서 멈춰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세상에 개입할 수 없고, 결국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리우 용홍 감독의 <올가미(夜郎)>는 두 쥔이라는 한 경찰의 이야기다. 그에겐 만삭의 아내가 있다. 아내는 곧 출산할 예정이다. 그는 양 밍이라는 옛 애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녀의 동생 양 즈를 경찰로 취직시켜 같이 일한다. 두 쥔은 동생 두 리를 데리고 병원에 가 낙태를 시킨다. 모든 게 잘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모든 사건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두 쥔은 이성을 잃는다.  

영화에서 주인공 두 쥔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한 번에 설명되지 않는다. 처음에 양 밍이 등장했을 때, 그녀가 두 쥔의 동료 형사인지, 아니면 범인인지, 아니면 아내인지, 아니면 애인인지를 보는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두 쥔의 동생 두 리가 등장했을 때, 그녀가 창녀인지 부인 몰래 만나는 애인이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이런 내러티브의 전개는 관객들에게 서사의 흐름을 뺏는 대신에 인물간의 관계와 인물 그 자체에 더 몰두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이야기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게 함으로써, 우리는 두 쥔의 삶을 구경거리로 보지 않고 그 내면에 다가가기 위해 더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암울하고 어둡다. 머리는 깨어나지만, 가슴은 (아직까진) 울리지 않는다.  

 

<신디 익스트림 2: 퍼스널 아카이브>는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7편의 단편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 목록을 열거하자면, <0116643225059>, <빛을 찾는 사람들>, <우리 어머니의 정원>, <창문>, <아시아의 유령>, <에메랄드>, <뱀파이어>다.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을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한다면, 바로 데이빗 린치다. <0116643225059>는 <6명의 아픈 사람들>이 떠오르고, <우리 어머니의 정원>은 <할머니>가 감히 떠오를 정도다. 확실히 데이빗 린치와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빛과 어둠, 꿈과 무의식, 그리고 미지의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효과는 사뭇 다르다. 데이빗 린치는 무의식의 공포를 다루지만, 아피차퐁 감독은 애도와 그리움을 다룬다. 특히나 그의 작품 중 가장 무시무시한 <뱀파이어> 조차도 공포를 다루기보다는 미지의 존재를 소환하는 것 같은 주술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가장 기대했었던 <에메랄드>는, 글쎄, 내 허접한 안목으로는 입에 거품을 물 정도는 아니었고, 짧게 "아!"하는 감탄사를 뱉는 정도랄까. 오히려 모르고 봤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를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의 내가 그를 따라잡기에는, 그는 너무 멀리 가 있다는 거다. <창문>에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그 황홀한 빛의 윤무를 생각해보면, 감탄을 넘어 탄식을 불러일으킨다. 갑자기 그의 전작들을 모두 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쳐 오른다.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해원(지성원)의 이야기이다. 해원은 서울에서 은행 일을 하고 있다.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그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은행에서의 실수로 그녀는 휴가를 구실로 회사에서 쫓겨나고, 그녀는 계속 연락이 오는 복남(서영희)에게 간다. 무도에서 살고 있는 복남은 마을 사람들에게 개, 돼지 같은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다. 복남은 딸과 함께 서울로 도망가려 하지만, 남편에게 잡히고, 딸도 죽게 되는 비극을 맞는다.  

영화의 주인공은 복남이라기 보다는 그녀를 지켜보고 방관하는 해원이다. 복남의 살인으로 해원은 타인의 위험을 외면하지 않는다. 복남이 낫을 들었던 것처럼, 해원은 볼펜을 든다. 하지만, 해원이 세상과 맞서기 위해, 복남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나!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선 그만큼의 많은 피가 필요한 것일까? 깨달음은 쉽게 얻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정리하니 벌써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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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8-20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작품을 만나보고 발가벗겨진 느낌이라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새롭게 알게 되는 것에 대한 채움의 강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겠거니 생각합니다. ^^

Tomek 2010-08-21 01:05   좋아요 0 | URL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