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2월 4주

 

   이주에 개봉하는 영화 중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만남만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기대와 사뭇 다르다. <반지의 제왕>시리즈나, <킹콩>같은 매끄러운 기성품의 느낌이 아니라, <데드 얼라이브>나 <프라이트너>같이 내러티브나 다른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덜그덕거리지만, 독특한 감성이 영화 전편을 지배하는 그런 영화가 나왔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가 현실과 판타지에 걸쳐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 포스터 헤드카피에도 당당하게 밝혔듯이, 이 영화는 14살의 소녀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소녀는 무참하게 살해당했고, 그녀의 가족들은 거의 붕괴 직전에 처한다. 그리고 소녀는 천국으로 가지 않고, 저승에 머물면서 그녀의 가족들을 지켜본다. 

   이 영화는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이다. 혈육의 죽음으로 생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가족이라는 틀을 단단하게 봉합시킨다. 가족주의의 환원. 하지만 영화는 죽은 소녀에게 떠 넘긴 부채를 해결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엔 해피엔딩 같지만, 결국엔 슬픈 결말. 소녀의 죽음으로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그들이 '가족'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을 뿐. 죽은 소녀는 다행히 천국으로 갔지만, 남은 가족들은 딸의 부채에 괴로워할 것이다. 그래도 자식이기 때문에 이만큼 괴로워하고 생각하는 것일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전혀 다른 얘기가 전개된다.

 

   "소화(昭和) 20년 9월 21일 밤, 나는 죽었다." 충격적인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다카하타 아사오 감독의 <반딧불의 묘>는 우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영화는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의 폭격과 일본의 패망 시기를 다룬 영화다. 주인공 세이타와 어린 여동생 세츠코는 폭격으로 엄마를 잃고 먼 친척을 찾아간다. 식량이 궁한 힘든 시절, 친척은 더부살이 하는 남매를 냉대하고, 남매는 집을 나와 방공호 생활을 한다. 

   이때의 일본은 무관심의 시대였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누가 죽어나가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생각했고, 그런 개인주의적인 생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이 두 남매가 "지금 현재(1988년)"의 일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 영화는 "태평양 전쟁 또한 일본도 피해자"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게 아니라, 각박해진 일본의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이다. 결국, 남매가 죽었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면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고 관심받지 못하고 그렇게 힘들게 시나브로 죽어갔다. 어른들의 부채는 전쟁을 지나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 그리고 이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영화가 나온 1988년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가 같이 나왔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반딧불의 묘>에서는 하나같이 무관심한 어른/이웃들이 나오는 반면,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다같이 친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공동체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특히 메이의 실종으로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메이를 찾는 장면은 감동을 넘어 뭉클함을 느낀다. 이것은 감독의 시선 차인데, 다카하타 아사오 감독은 그 당시 일본을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냉정하게 바라보았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그 때 그랬었으면 좋았을텐데"라는 희망의 시선으로 묘사한 것이다. 결국 부채는 해결되지 못하고, 냉정하게 바라보거나, 희망사항으로 끝날 뿐이다. 

  

   그렇기때문에, 안노 히데야키 감독이 <신세기 에반게리온:Death & Rebirth>에서 "그러니까 모두 다 죽어버리면 좋을텐데"라는 자멸의 희망까지 나온 게 아닐까? 싹 치워버리고 너와 나 둘이서 다시 시작하자는 그런 (무서운) 희망.

 

   하지만, 진짜 가슴아픈 부채는 바로 힘들 때 같이 있어주지 못한 것이 아닐까. 정태춘의 노래를 들을 때 마다, 가슴이 아프다. 나온지 20년여년이 지났지만, 이 노래들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슬프다.   

 

   맞벌이 영세 서민 부부가 방문을 잠그고 일을 나간 사이, 지하 셋방에서 불이나 방 안에서 놀던 어린 자녀들이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질식해 숨졌다.
   불이 났을 때 아버지 권씨는 경기도 부천의 직장으로 어머니 이씨는 합정동으로 파출부 일을 나가 있었으며, 아이들이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방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바깥 현관문도 잠가 둔 상태였다.
   연락을 받은 이씨가 달려와 문을 열였을 때, 다섯 살 혜영앙은 방 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군은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다.
   두 어린이가 숨진 방은 3평 크기로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와 비키니 옷장 등 가구류가 타다만 성냥과 함께 불에 그을려 있었다.
   이들 부부는 충남 계룡면 금대2리에서 논 900평에 농사를 짓다가 가난에 못이겨 지난 88년 서울로 올라왔으며, 지난해 10월 현재의 지하방을 전세 4백만원에 얻어 살아왔다.
   어머니 이씨는 경찰에서 "평소 파출부로 나가면서 부엌에는 부엌칼과 연탄불이 있어 위험스럽고 밖으로 나가면 길을 잃거나 유괴라도 당할 것 같아 방문을 채울 수 밖에 없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평소 이씨는 아이들이 먹을 점심상과 요강을 준비해 놓고 나가 일해 왔다고 말했다. 이들이 사는 주택에는 모두 6개의 지하방이 있으며,각각 독립 구조로 돼 있다.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에 어린 우리 둘이서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방문은 밖으로 자물쇠 잠겨있고 윗목에는 싸늘한 밥상과 요강이 
          엄마, 아빠가 돌아올 밤까지 우린 심심해도 할게 없었네
          낮엔 테레비도 안 하고 우린 켤줄도 몰라
          밤에 보는 테레비도 남의 나라 세상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안 나와 우리 집도 우리 동네도 안 나와
          조그만 창문의 햇볕도 스러지고 우린 종일 누워 천정만 바라보다
          잠이 들다 깨다 꿈인지도 모르게 또 성냥불 장난을 했었어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은 다 먹어치우고 
          오줌이 안 마려운데도 요강으로 
          우린 그런 것 밖엔 또 할 게 없었네 동생은 아직 말을 잘 못하니까
          후미진 계단엔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말야
          옆방에는 누가 사는지도 몰라 어쩌면 거긴 낭떠러인지도 몰라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 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여기저기 옮겨 붙고 휠 휠 타올라 우리 놀란 가슴 두 눈에도 휠~휠~

 

          "엄마, 아빠! 우리가 그렇게 놀랐을 때
          엄마, 아빠가 우리와 함께 거기 있었다면..."

 

          방문은 꼭 꼭 잠겨서 안 열리고 하얀 연기는 방 안에 꽉 차고
          우린 서로 부퉁켜 안고 눈물만 흘렸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우린 그렇게 죽었어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 있었다면..
          아니, 엄마만이라도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 우리가 방 안의 연기와 불길 속에서 부둥켜 안고 떨기전에
          엄마, 아빠가 보고싶어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기 전에
          손톱에서 피가 나게 방 바닥을 긁어대기 전에
          그러다가 동생이 먼저 숨이 막혀 어푸러지기 전에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에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야, 우리가 어느 날 도망치듯 빠져나온 시골의 고향 마을에서도
          우리 네 식구 단란하게 살아 갈 수만 있었다면..
          아니, 여기가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내리는 그런 나라였다면...
          아니, 여기가 엄마, 아빠도 주인인 그런 세상이었다면..
          엄마, 아빠! 너무 슬퍼하지마
          이건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냐 
          여기, 불에 그을린 옷자락의 작은 몸둥이, 몸둥이를 두고 떠나지만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천사가 되어 하늘 나라로 가는 거야
          그런데 그 천사들은 이렇게 슬픈 세상에는 다시 내려 올 수가 없어
          언젠가 우린 다시 하늘나라에서 만나겠지
          엄마, 아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가장 예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이제, 안녕..
          안녕.."
 

- 정태춘 「우리들의 죽음」- 

 

 

* 덧붙임: 

 

다음주엔 부디 상큼한 영화를 선택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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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타씨의 행방불명>
               원작  박민규 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극본  이명숙
               연출  기민수
               방영일  2005년 5월 7일 

 

 

1. 들어가며 

   <낙타씨의 행방불명>은 내게 있어서 의미있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로 박민규 작가를 알게 됐으니까. 이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난 박민규라는 존재를 좀 더 늦게 알게 됐거나, 아니면 아직도 모르고 지냈을 거다. 뭐 박민규 작가야, "그랬거나 말거나" 했겠지만, 난, 그만큼 외롭고 우울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혹시 알어? 자살이라도 했을지. 농담이 아니다.

   원작 소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창작과 비평, 2004년 가을호)」 는 지금껏 두 번 영상화 됐다. 처음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낙타씨의 행방불명 (KBS 드라마시티, 2005년 5월 7일 방송)>이고, 다른 하나는 <카스테라 (TV 문학관, 2007년 3월 2일 방송)>다. <낙타씨의 행방불명>은 기본적인 설정과  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새로 쓴 이야기고, <카스테라>는 단편집 『카스테라』에 실린 작품 중,「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TV 문학관 답게 디테일한 묘사는 소설을 그대로 따라가지만, 그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원래는 원작 소설과 이 두 드라마를 같이 비교하려 했으나, 드라마 <카스테라>는 두 작품이 하나의 내러티브로 섞여 있어서 독립된 작품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기에,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낙타씨의 행방불명>만 이야기 하겠다. 

 

 

2. 이야기 

2-1. 소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소설은 박민규 특유의 문체로 가볍고, 엉뚱하고, 발랄하게 진행되지만, 그 내용은 참혹한 성장담이다.

   상고를 다니는 '나(승일)'는 수많은 아르바이트르 하며 생계를 돕는다. 그런 내가 이렇게 실리적으로 변한 이유는 중학교 때, <무슨 상사>라 불리우는 작은 회사에 식물처럼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난 이후부터다.

   방학을 맞이해 신도림역에서 푸쉬맨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아버지와 '나'는 생계외에 어머니의 병원비까지 벌어야한다. 힘든 나날이 지속되던 중, 신도림역에 도착한 전철에서 튕겨나온 아버지와 조우하는 일이 발생되고, 나는 짐짝처럼 아버지를 열차에 구겨 넣는다. 그러던 아버지가 말없이 집을 나갔다.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깨어나 자신의 병원비를 벌고, 할머니를 요양소에 보내고, 우리집은 조금씩 생기를 찾고 있다. 어느날 나는 러시아워가 끝난 신도림역 벤치에 누워 있다가 기린을 보게 된다. 그 기린은 아버지의 양복을 입었다. 나는 기린을 붙잡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운다. "아버지, 그럼 한 마디만 해주세요. 네? 아버지 맞죠?" 그러자 멀뚱히 듣고 있던 기린의 끔찍한 대답이 이어지고 소설은 끝난다.

 

2-2. 드라마 <낙타씨의 행방불명>

   드라마 역시 주인공 이정식(문지윤)의 시점으로 진행한다. 정식은 학교에서 달리기 선수로 재능이 있지만, 그 외의 일에는 무관심한 편이다. 그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박승태), 아버지(기주봉), 어머니(김선화), 누나(송지영)와 함께 곧 재개발이 이루어질 달동네에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명석형(서동원)의 소개로 경마장에서 인형탈을 뒤집어쓰고 일하는 아르바이트를 얻는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누나는 빛때문에 가출을 한다. 정식은 누나를 '업소'에서 만난다. 정식은 아버지를 경마장에서 만나고, 아버지는 정식에게 밥을 사준 후, 가출을 한다. 정식은 생계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지만, 육상부 코치(이한위)의 부탁으로 이번 시합에는 나가기로 한다.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돌아오던 날, 재개발이 시작되고 정식의 집은 사라진다. 정식은 그 폐허위에 텐트를 치고, 아버지, 엄마, 누나가 돌아오길 기대한다. 정식에게 호감이 있던 미주(정구연)가 정식을 위로하러 동물원에 같이 간다. 정식은 동물원에서 아버지를 보는데, 자세히보니, 그것은 아버지가 아닌, 외로워 보이는 낙타였다.  

   시합 당일, 정식은 앞서나갔으나, 실수로 넘어지고 만다. 그때 고개를 들어보니, 할머니, 어머니, 누나, 그리고 동물원에서 봤던 낙타의 모습이 보인다. 다시 보니, 결승선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누나가 정식을 기다리고 있다. 정식은 일어서서 가족이 있는 결승선을 향해 달린다. 

 

   

3. 소설과 드라마

   미안하구나.   

   아버진 그렇게 얘기했다. 또 그 소리. 내가 일만 한다하면 늘 같은 소리였다. 처음엔 들을 만했는데, 결국 들으나마나가 돼버린 지 오래다. 나이 마흔다섯에 시간당 삼천오백원, 즉 그것이 아버지의 산수였다. 여하튼 무슨 상사(商社)에 다녔는데, 여하튼 <무슨 상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직장이었다. 딱 한 번 나는 그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 중학생 때의 일인데 도시락을 갖다주는 심부름이었다. 약도가 틀렸나? 엄마가 그려준 약도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근처의 골목을 서성이고 서성였다. 간신히 찾아낸 아버지의 사무실은 - 여하튼 그곳에 있기는 한, 그런 사무실이었다. 쥐들이 다닐 것 같은 어둑한 복도와, 형광등과, 칠이 벗겨진 목조의 문. 혹시 외국(外國)인가? 라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깜짝이야, 그런 단어가 머리 속에 있었다니 넉넉한 환경은 아니어도, 제법 메탈리카 같은 걸 듣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세상은 뭔가 ESP 플라잉브이(메탈리카가 사용한 기타의 모델명)와 같은 게 아닐까, 막연한 생각을 나는 했었다. 했는데, 해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꼬박꼬박 도시락만 먹어온 얼굴의 아버지가 가냘픈 표정으로 사무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주인공 '나'가 어떻게 또래에 비해 얌전하고 현실적인 '산수'를 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어린아이의 세계'에서 살다가 '어른들의 세계'를 알게되고, '아버지의 힘듦'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는 이 부분을 정식의 환상 부분으로 처리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된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정식은 놀란다. 이 전에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도왔지만, 이 장면 이후로 정식은 더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체력적으로 힘들어한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數學)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즉,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 -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 디 엔드다. 어쩌면 그날 나는 <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했거나, 그 연산(演算)의 답을 보았거나, 혹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런 셈이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았다. 그리고 느낌만으로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참으로, 나의 산수란. 

   드라마에서 수학 시간은 총 두 번 나온다. 첫 장면에서 정식은 선생님의 설명을 이해못해 선생님 얼굴을 뻔히 쳐다보다가 무안을 당한다. 정식에겐 산수만으로도 벅찬데, 선생님의 수학은 이해 못하는 성질의 형이상학이다. 두 번째 장면은, 어머니가 입원하시고, 생계를 위해 무리하게 아르바이트를 해 수업시간에 자는 장면이다. 정식에겐 더 이상 수학은 이해 못할 차원의 학문이 아니라, 상관없는 학문이 된다.  

 

 
   처음 열차가 들어오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열차라기보다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동물이 파아, 하아, 플랫폼에 기어와 마치 구토물을 쏟아내듯 옆구리를 찢고 사람들을 토해냈다. 아아,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뭔가 댐 같은 것이 무너지는 광경이었고, 눈과 귀와 코를 통해 머리 속 가득 구토물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야! 코치 형이 고함을 질러주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놈의 먹이가 되었을 테지. 정신이 들고 보니, 놈의 옆구리가 흥건히 고여 있던 구토물을 다시금 빨아들이고 있었다. 발전(發電)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힘! 그때 코치 형이 고함을 질렀다. 해서, 엉겹결에 - 영차, 영차 무언가 물컹하거나 딱딱한 것들을 맘구마구 밀어넣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어찌 내 입으로 그것이 인류(人類)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원작에서는 지하철역, 게다가 악명 높기로 유명한 신도림역을 주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로 삼았다. 3분마다 들어오는 지하철,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과 타려는 사람들의 아비규환. 박민규 작가는 아마도 열차를 하나의 세상으로 본 게 아니었을까. 180명 정원에 400명이 들어가는, 그것을 '특권'이라고 허용해주는 잔인한 세상. 그 세상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나'와 그 세상에서 튕겨져 나오는 '아버지'를 다시 (세상 속으로) '우겨 넣는' 나. 지하철역이라는 공간은 세상을 환유하는 공간이다.  

   드라마에서는 지하철역 대신 경마장을 택했다. 카메라가 비추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 그렇기에 다시 그 세상에 편입하기 위해 한탕을 원하는 사람들을 비춘다. 누구나 부자를 꿈꾸지만 결국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정식은 아버지를 만난다.  
 
 

 
   병실에 들어서자,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만 어때? 대답 대신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초원의 복판에서 갑자기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타조처럼 - 멍하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실은  그 동안 그나마 아주 잘 걸어왔다는, 아니 달려온 거라는 생각이 나도 들었다. 사라질 엄마의 봉급, 여전한 할머니의 약값, 발생될 엄마의 치료비... 아버지의 눈동자가 그토록 잿빛이었단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뭐랄까, 전지가 떨어진 계산기의 꺼진 액정과 같은, 그런 잿빛이었다. 이제, 계산이 안 나온다. 나도, 계산이 서질 않았다. 불 꺼진 병원의 비상계단에서, 나는 코치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의 절망 부분은 드라마쪽이 더 울림이 컸다. 기주봉 씨라는 대배우가 이 역을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활자의 묘사보다는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크게 느껴진다. 이 장면 이후로 아버지는 가출한다. 아버지가 가출하기 전, 중국집 화장실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한탄을 한다. 

   "구질구질해? 진짜 구질구질한 게 뭔 줄이나 아냐? 죽어라고 휴가 한 번 제 때 못내고 입 꽉 깨물고 일했어. 딴 눈 한 번 안 팔고, 살았는데, 그랬는데 결국, 여기 밖에 못 온거야.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여기 요만큼. 결국 제자리지 뭐."

 

   끝내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대신 어머니의 의식이 기적처럼 돌아왔다. 의식이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도, 퇴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 나는 울었다. 글쎄 그 정도의 서러운 이유라면 누구나 눈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

   그렇게 우리집은, 다시금 숨을 트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졌지만 할머니란 짐을 덜게 된 까닭으로, 또 엄마가 스스로 자신의 병원비를 번 까닭으로 그대로, 그렇게. 근처의 지붕에서 지켜본다면, 아마도 그것은 잔디의 작은 싹이 움을 튼 모습과 비슷한 관경이었을 것이다. 살아, 있다. 무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유사한 산수를 할 수 있단 것은 얼마나 큰 삶의 축복인가. 사라지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소설과 드라마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희망보다는 '암담함'의 분위기에 가깝다. 책은 "무사하진 않았지만", "살아, 있다"는 표현처럼,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삶의 질을 따지기 대신, '생존' 그 자체에 대한 안도감을 피력하고 있다. 이제 18세인 고등학교 2학년 생에게 이것을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드라마는 더 처절하다. 마지막 생존의 보루인 집까지 없어진 상태다. 할머니는 요양원에, 아버지는 가출, 어머니는 병원, 누나는 업소에 뿔뿔이 흩어져있다. 정식은 무너진 집 폐허 위에 텐트를 세우고 가족을 기다린다. 여름이 오면 가족들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무너진 집 위에서 정식은 멀리 있는 아파트를 바라본다. 정식은 가족들과 저 앞에 보이는 아파트-Home, Sweet Home-에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된 거예요? 기린의 무릎을 흔들던 나는, 결국 반응을 포기하고 이런저런 집안의 근황을 들려주었다. 할머니의 소식과 어머니의 회복, 그리고 나는 부동산 일을 배울 수도 있다, 선배가 자꾸 함께 일을 하자고 한다, 자리가, 자리가 있다고 한다. 경제도 차차 좋아질 거라고 한다, 무디슨가 어디서 우리의 신용등급이 또 한 계단 올라셨대요, 좋아졌어요. 그러니 돌아오세요.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구름의 그림자가 또 빠르게 지나갔다. 아버지, 그럼 한마디만 해주세요. 네? 아버지 맞죠? 그것만 얘기해줘요. 

   무관심한, 그러나 잿빛의 눈동자가 이윽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소설과 드라마 모두 마지막은 주인공의 '환상'으로 끝난다. 소설의 '나'는 환상에서조차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지만, 드라마의 '정식'은 아버지는 물론, 흩어졌던 가족을 모두 만난다. 소설의 '나'나 드라마의 '정식'이나 깨어나면 결국엔 '혼자'일 것이다. 소설과 드라마 각기 결말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은, 말 그대로 '참혹한 성장담'이다. 어떤 결말이 더 나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은 소설대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감정의 울림이 있었으니까. 개인적으론 소설의 울림이 조금 더 크게 느껴졌다.

 

 

4. 드라마 

   정식이 사는 곳은 재개발이 부분적으로 들어간 달동네다. 용역깡패들은 수시로 등장해 이곳 주민들을 위협하고 공포에 질리게 한다. 동네가 부서지면서 정식의 가족들은 흩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정식의 가족이 모두 흩어졌을 때, 정식의 집은 헐린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아버지와 주인공에게 '짐'이 되는 역할이다. 단, 소설에서는 어머니가 의식을 잃은 것으로 처리해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드라마에서는 병원에 있는 것을 핑계로 '집안 일'에서 아예 신경을 꺼버리고 주인공 정식에게 모든 짐을 지게하는 '무책임한 엄마'로 나온다. 어찌보면 조금 다르게 갈 수도 있는 역할이었을텐데, 어머니 역을 맡은 김선화 씨가 워낙에 악역을 많이 맡아 어쩔 수 없이 스테레오 타입으로 비친 것 같기도 하다.  

 

   소설에 없고 드라마에 추가된 누나(송지영) 역은 어머니와 비슷한 역이다. 가족의 붕괴를 나타내는 한 축이자, 소년인 정식이 처음으로 '가장'의 관점으로 가족(누나)을 바라보고, 세상과 현실을 깨닫게 하는 역할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나'에게 여러 아르바이트를 소개하고, 인생에 대해 설교(조언)도 해주는 '코치 형' 역은 드라마에서 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소설에서 '코치 형'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최명석(서동원)'으로, 다른 하나는 학교에서 육상을 가르치는 '코치 선생님(이한위)'이다. 이 둘은 각기 여러 의미에서 정식의 인생에 개입한다. 명석은 정식에게 세상(사회)을 알려주고, 코치는 정식에게 "정식아, 네가 희망이다"라는 말을 한다.

 

   소설에는 없는 주인공의 '여자친구' 송미주(정구연)가 드라마에선 추가 됐다. 큰 역할을 하진 않지만, 정식이 힘들 때마다 도움을 - 도시락을 싸온다거나, 동물원에 같이 간다거나, 노래를 녹음해 준다거나 - 준다.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 동네가 철거에 들어가자, 허둥지둥 짐을 싸던 정식이 갑자기 다 포기한 듯 주저앉고 미주가 선물해준 노래를 듣는다. 

   "거칠은 벌판으로 달려가자. 내일의 희망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 너머 내일의 희망이 우리를 부른다." 

  

 

5. 맺음 - 희망

   드라마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희망. 희망이 정말 있을까? 희망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달리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끝까지 달리는 것? 하지만 그 결과가 단지 '환상'이라면, 희망이란, 얼마나 잔혹한가. 

 

 

6. 덧붙임 

a. 언급하지 않으려 했으나 조금만 이야기한다면, <낙타씨의 행방불명>과 <카스테라>의 차이는 '분위기'에서 납니다. <낙타씨의 행방불명>은 (비록 내용은 끔찍하더라도) 박민규 작가의 문체처럼 발랄하게 진행하지만, <카스테라>는 그 발랄함을 걷어내서 굉장히 어둡고 무겁습니다.

위 <낙타씨의 행방불명>, 아래 <카스테라>    

 

b. 기민수 PD는 <그저 바라만 보다가>, <굿바이 솔로>, <꽃보다 아름다워> 등을 연출했습니다.  

c. 짧게 쓰려 했는데, 또 길어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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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2010-02-23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민규의 '그렇습니까기린입니다' 저도 정말 좋아하는데, 드라마가 있었는지는 몰랐네요. 일상에서 묻어나는 고단함과 위로를 잘 표현해 준 작품이었어요. 특히 저는 "조금씩, 열차는 흔들렸고, 조금씩, 마음도 흔들렸다.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 것이었다." 라는 구절을 좋아했었는데.. 여튼 이렇게 영상으로 소개를 받으니 또 묘하네요. 글 잘 읽고갑니다 :)


Tomek 2010-02-24 09:2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알로하, 오예" 저는 이 구절을 가장 좋아합니다. ^.^; 박민규 작가의 특징은 농담같은 말들이 나중에 다시 언급되면서 묘한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화성인, 금성인, 지하철, 은하철도, 화단에서 꽃잎 뜯어먹는 남자 하와이 티셔츠를 입은 성추행범... 뭐 이런 농담들이 나중에 다시 반복될 때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stella.K 2010-02-2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2005년이요? 이런 거 했는 줄 몰랐네요. 함 봐야겠습니다.^^

Tomek 2010-02-26 18:09   좋아요 0 | URL
소설과 상관없이 재밌지만, 소설을 읽으셨으면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

밍키 2021-10-2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라서 검색하다가 여기까지 오게됐네요ㅠㅠㅠ
혹시 이거 어디서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2월 3주

   중앙씨네마에서 기획한 [마지막 스크린 추억을 만나다]를 보러 중앙극장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야 알았다. 중앙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중앙극장은 중앙씨네마로 이름을 바꿨지만, 아직도 내겐 중앙극장으로 남아있다. 그곳에서 처음 본 영화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가족들과 <쥬라기 공원>을 봤었다. 청계고가 밑 어두 컴컴한 분위기, 쏜살같이 달리는 자동차와 매연과 경적소리를 뚫고 들어간 극장은 재개봉관같은 허름한 분위기였다. 시설에 실망을 했지만, 영화가 시작되고나서 그런 생각은 접어두게 되었다. 마법같은 순간. 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공룡들을 보고 감탄하고, 티라노가 나왔을 때 같이 소리를 질렀던, 93년 여름을 보냈던 그때 그사람들은 그 순간을 기억을 할까?  

   중앙극장은 내게 어떤 내세우기는 뭣하지만, 간직하고 있는, 은밀한 기억과도 같은 곳이다. 그런데 그곳이 없어진다니. 도시는 나날이 발전하지만, 추억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사라진다. 몇 십년 후, 이곳 서울은 내게 있어서 어떤 공간으로 남을까? 추억은 사라지고 현실만 남은 삭막한 공간으로 남지 않을까? 이번주는 사라지는 극장, 사라지는 추억을 생각하며 그와 관련한 영화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 싶다. 

 

   극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다루는 영화 중 이 영화를 능가하는 영화가 있을까? 영화에 대한 사랑, 극장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던 추억들. 이탈리아 시실리 섬의 '씨네마 파라디소' 극장은 단순히 영화가 상영되는 곳이 아닌, 그곳 작은 섬에 머물렀던 모든 사람들의 추억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주인공 토토에게는 아버지같은 존재인 알프레도와의 추억과 첫사랑의 기억이 머물러있는 곳이기도 하다. 

   결국 극장은 부서지고, 남아있는 노인들은 그들의 부재함을 인정하고 슬퍼한다. 극장이 없어진 자리엔 쇼핑몰이 들어설 것이고, 그 장소는 추억의 장소가 아닌, 실용의 장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존재하는한, 또 극장이 존재하는한,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할 것이고, 그들은 그 추억을 간직하며, 들쳐보고 살아갈 것이다. 

 

   차이 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또한 사라져가는 극장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의 주인공(!)인 복화극장은 내일 문을 닫을 예정이다. 이 극장의 마지막 상영 영화는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이고 밖엔 폭우가 내리고 있다. 폭우를 뚫고, 젊은 일본인 남자가 동성애 파트너를 찾기 위해 극장에 오지만, 극장안은 텅 비었다. 그런데 그 때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나타난다. 

   차이 밍량은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것을 기억해두기 위해 영화를 찍는 것 같다. <애정만세>를 봤을 때도 그랬고, <구멍>을 봤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 <안녕, 용문객잔>또한, 이제는 사라져가는 변두리 구석의 극장을 회환에 찬 눈길로 따스하게 바라본다. 영화는 극장 구석구석을 마치 잊지 않으려는 듯 보여주고, 그 안에서 다리를 저는 여자 매표원과 젊은 영사기사의 애틋한 감정도 보여준다. 결국 영화는 끝나고, 내일이면 극장은 문을 닫을 것이다. 이 모든 풍경들이 추억속에 사라져간다. 

 

   이야기를 너무 감상적으로 끌었다. 람베르토 바바의 <데몬스>는 극장이라는 공간이 악몽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는 비디오나 DVD로 보면 결코 그 매력을 느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의 '악령(혹은 좀비)'들이 극장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환상이 극장이라는 현실로 들어오는 순간. 영화 속 상황과 영화 밖 실제 상황과 겹쳐져, 이 영화는 독특한 아우라로 상영시간 내내 보는이를 옥죈다. 아마도 이 영화를 상영한 극장은 다시는 영화를 상영할 수 없을 것이다. 추억과 아쉬움이 아닌, 끔찍한 기억으로서의 공간. <데몬스>는 다른 방법으로 극장이라는 공간을 환기시킨다.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이나 추억과 이별을 하게 될까? 청춘은 추억을 쌓는다. 청춘이 끝나면 추억을 꺼내보고, 하나씩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청춘은 끝났다. 

 

 

*덧붙임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전계수 감독의 <삼거리 극장>은 <안녕, 용문객잔>과 <데몬스>를 섞은 듯한 느낌의 영화였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꼭 찾아보시길... 정말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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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 2010-02-19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씨네마, 혹시 스폰지 하우스 중앙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 그곳에서 영화(솔직히 시사회가 대부분이었지만)를 많이 봤었는데... 저간의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극장에서 경험과 추억, 그리고 환상을 살찌우고 있는 많은 영화인들에게 이 소식은 큰 충격이 될 것 같네요. ㅠㅠㅠ

Tomek 2010-02-19 17:44   좋아요 0 | URL
스폰지 중앙은 작년(벌써 작년이네요)에 정리를 했고, 중앙씨네마만 남은 상황이었는데, 그 중앙극장도 문을 닫는다고 하더군요. 스폰지는 광화문 하나만 남고 다 정리한 상황입니다.

이젠 메가박스나 CGV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ㅠㅠ

2010-02-22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2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3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3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2월 2주

   2월 11일부터 24일까지, 중앙 시네마에서 <마지막 스크린, 추억을 만나다>란 기획전을 진행한다. 2년 전, 크리스마스에 <화양연화>를 재상영하더니, 올해 초엔 더 특별한 기획으로 '지난 10년간' 개봉했던 영화 중, 다시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엄선해 상영한다고 한다(아니 이미 하고 있다). 

   홈씨어터나, TV, 컴퓨터 모니터, 휴대 전화 등, 요즘엔 여러 경로로 쉽고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 영화를 꼭 극장에서 돈내고, 시간들이고, 불편한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서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꼭 그래야할 영화들이 있다. 커다란 스크린, 온 몸을 떨리게 하는 음향 효과, 불이 꺼지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신비로운 경험. 아마도 이제는 회고전이 아니면, 결코 극장에서 볼 수 없을 영화들. 중앙 시네마가 준비한 13편의 영화들은 다 나름 볼 가치가 있으나, 어디 그게 쉬운가? 그 중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세 편의 목록을 골라봤다. 

 

   데이빗 린치의 영화는 '무조건' 스크린에서 봐야한다. TV나, 컴퓨터 모니터, 혹은 PMP같은 것으로 본다면, 그의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첫 번째 이유. 그는 시네마 스코프 사이즈(2.35:1)의 영화를 즐겨 찍는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굉장히 뛰어하다. 씨네마 스코프 사이즈는 TV에서 구현되기 힘들다. 위아래 블랙바가 화면을 절반이나 잡아먹던가, 아니면 영화 양 옆이 잘려나가던가.  

   두 번째 이유. 그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사운드를 직접 믹싱한다. 그의 영화에서 사운드는 영상과 거의 동등하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요소다. 만약 그의 영화를 집에서 본다면, 최대한 모니터의 볼륨을 한껏 높여서 감상해 볼 것. 별별 희한한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얼마나 보는이를 '떨리게' 만드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원주택에 살지 않는 한, 옆집의 항의를 무시하며 영화를 감상할 순 없는 일이다.  

   굳이 이런 환경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진짜와 가짜, 현실과 환상이 정신없이 넘나드는 이 영화는, '결과가 원인을 규정해버리는' 경악할만한 30여분의 결말 때문이라도 꼭 한 번쯤은 볼 가치가 있다. DVD로 본 것은 이 영화를 절반만 감상한 셈이다. 이 영화는 오감으로 체험할 영화다. 

 

   <지옥의 묵시룩:리덕스>는 전쟁영화 답게 스펙터클한 장면이 꽤나 많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전쟁영화와 달리 스펙터클의 쾌감을 느끼지는 못한다. 발퀴리처럼 수많은 네이팜탄을 쏟아붓는 엄청난 화력의 미군들이 오히려 '정글'이라는 거대한 자연 앞에 눌리는 느낌이 든다.  

   미군의 통제를 벗어나 캄보디아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을 제거하라는 임무를 받은 윌리엄 대위(마틴 쉰)와 그의 부하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마치 오디세이아처럼 수많은 전장터에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점차 알 수 없는 공포로 인해 이성을 잃는다. 

   이 영화는 베트남전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오히려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공포'가 어떻게 이성을 망각시키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원작이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이니 당연하다). 알 수 없는 공포가 물리적으로 눌려지는 듯한 느낌은 TV에서는 절대 체험할 수 없는 효과다. 여러 장면이 있지만, 미군 폭격 장면과 커츠 대령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꼭 스크린에서 봐야할 장면이기도 하다. 조그마한 TV에서도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면, 스크린에서는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볼 일이다. 

 

   마치 <엘 토포>의 PG-13 버전(!) 같은, 이 영화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몇 컷의 이미지만으로 대신한다. 타셈 심 감독은 거의 CG를 사용하지 않고, 실제로 이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스크린이 아니면, 이것은 제대로 감상한 셈이 아니다. 

 

   이 외에도 10편의 영화가 더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여기(클릭)로 가서 자신만의 영화를 선택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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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 2010-02-13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 폴, 정말 매력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이죠^^

Tomek 2010-02-16 09:13   좋아요 0 | URL
그 밖에 좋은 영화가 많이 재상영하죠.

^.^;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2월 1주

 

   이번 주 개봉하는 영화 중 관심있는 영화는 단연 <의형제>이다. 송강호, 강동원 두 배우의 앙상불도 관심있고, 장훈 감독이 김기덕 감독의 시나리오가 아닌, 자신의 시나리오로 얼마나 매끈한 영화를 만들었을지 또한 관심이지만, 진짜 관심있는 것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남파간첩과 국정원 직원간의 이야기라는데 있다. 간첩이라니! 간첩이라니!

   53년 휴전 이후 계속, '간첩'이란 단어는 늘 우리와 함께 따라다녔다. 북에서 친히 내려온 황태성같은 거물 간첩도 있었고, 때로는 정권 유지를 위해 국가가 무고한 시민들을 간첩으로 만들기도 했었다. 간첩은 분명히 지금 이곳에 우리들과 함께 있으나, 우리의 눈에 띄지는 않는다. 김훈의 표현을 빌려, 간첩이란 우리에게 있어 '길삼봉이란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어찌보면, '간첩'이란 참으로 매력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적국의 비밀을 캐가거나, 그 체제를 불안하게 만드는 선동을 하는 자들. 외국영화에서 '스파이'이란 존재는, 그들의 행동이 비록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거나 비윤리적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매력적이었는가.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휴전 중인 분단국가에 살고 있고, 그런 매력적인 캐릭터를 상업영화에 그리는 것은 아직까지도 금기시 되고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해적 이야기가 인기를 끌더라도, 왜구(倭寇)영화는 한국에서 상영되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첩 영화 혹은 북파 공작원 영화는 반공영화의 영역에서만 다뤄졌다. 북한 사람을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90년대 말에서야 시작 됐다.  

 

   그런 의미에서 장진 감독의 <간첩 리철진>은 가히 충격이었다. 살인기계로 훈련을 받은 리철진 동무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택시강도에게 총과 공작금을 빼앗긴다. 겨우 어찌해서 접선한 고정간첩은 이미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무늬만 사회주의자'가 된지 오래고, 그들의 가족은 부모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개의치도 않는다.  

   리철진이 접선한 고정간첩의 모습은 지금껏 여러 매체에서 떠들어 댄 이미지가 아니었다. 장진 감독이 묘사한대로, 아마 이들은 소련의 붕괴와 독일 통일을 TV로 시청했을 것이고, 또 IMF로 인해 대한민국의 지배 이념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돈'이라는 사실을 뼛속까지 체험했을 것이다. 변절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세상에 물들어 간 게 아닐까. '주체사상'이란 종교를 가진, 대한민국을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 그게 장진 감독이 묘사한 간첩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적 호불호나 완성도를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남한에서 만들어진 간첩 영화 중 가장 발랄한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에, 얼짱 간첩이라니. 남북 화해무드로 이런 영화도 만들어 질 수 있구나. 물론 이당시 만들어진 기획 영화 중 가장 기막힌 영화는 <휘파람 공주>였지만... 그저 발랄한 간첩을 다룬 영화라 올려봤다. 이 영화에 대해선 솔직히 '할 말 없음'이다. 

 

         

   <쉬리>와 <이중간첩>에서 그린 간첩은 너무나 전형적이었다.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각 영화에서 간첩역을 맡은 김윤진, 한석규의 연기는 뛰어났으나, 그들의 고통, 고뇌에는 이입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너무 익숙한 소재를 너무 익숙하게 풀어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쉬리>는 간첩의 기존 이미지를 잘 활용하고 버무려 매끈한 상업영화로 만들었지만, <이중간첩>은 간첩을 두 개의 삶을 사는 분열증을 겪는 자아의 이야기로 풀었기때문에, 관객들이 지루해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언더커버이야기는 흥미롭지만, 액션을 동반하지 않는 언더커버 이야기는 지루하다.  

 

   영화는 아니지만, 근래 접했던 '간첩'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김영하 작가의 『빛의 제국』이었다. 미드같은 빠른 템포와 적절한 플래시백, 손에 땀을 쥐게하는 추적과 하루키를 능가하는 베드씬 등, 정말 엄청난 이야기였다. 이번주는 간첩과 같이 보내는 게 어떨런지? 그들도 이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직장생활이란, 어디나 다 힘든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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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 2010-02-06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첩, 스파이... 참 매력적인 존재이군요.

Tomek 2010-02-08 09:32   좋아요 0 | URL
제3자의 입장에서는 매력적이겠지만, 당사국 입장에서는 아니겠죠.

novio 2010-02-11 02:10   좋아요 0 | URL
당사국 입장 ㅎㅎㅎㅎ

2010-02-09 0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9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