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 대한 포부를 히로에가 묻자, 기리하라의 대답은, 한낮에 걷고 싶어, 라는 것이었다.
"기리하라 씨, 그렇게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요?"
"내 인생은 백야(白夜) 속을 걷는 것 같으니까.
박신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는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부터 말이 많았던 영화인데, 그 이유는 원작 소설의 독특함 때문이었죠. 소설은 1973년 10월부터 1992년 12월까,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점층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기간은 영화라는 매체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시간이죠. 게다가 소설은 총 3권, 11개의 챕터(chapter)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챕터의 화자가 각기 다릅니다. 이 책의 두 주인공은 가라시와 유키오와 기리하라 료지이지만, 작가는 이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이들 주위에 있는 주변인들의 관찰로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지요.
작가가 주력한 것은 시대상황입니다. 1973년부터 1992년의 시기에 일본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은 오일쇼크와 버블경제 성장 그리고 몰락의 시작입니다. 작가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저작권, 인베이더와 슈퍼마리오 게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즈 등 시시콜콜한 것들을 각 장에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작가가 관심을 둔 것은 컴퓨터라는 디지털 매체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마주해서 처리하던 아날로그 시대가 저물고 인간이 기계와 소통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인성은 텅 비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을 읽어낼 수 있지요. 이때의 범죄는 버튼 하나로 수백만의 사람을 학살하는 행위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지요. 료지가 범죄의 판을 크게 벌리기 시작하는 것도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를 접하고부터 입니다.
"그렇게 만든 카드는 물론 진짜와는 내용이 다르지. 비밀번호가 다르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것을 기계가 판정할 능력은 없어. 기계가 확인하는 것은 자기 테이프에 기록된 번호와 인간이 누르는 번호가 일치하는지 아닌지, 오직 그것뿐이야."
명백한 범죄였지만 도모히코에게 죄악감은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위조카드를 만들기까지의 경위가 너무나 게임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돈을 훔치는 상대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리하라로부터 늘 듣는 말이 머리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는 것을 줍는 것과 남의 것을 내 것과 바꿔치기 하는 것이 어디가 달라? 돈이 든 가방을 멍하니 놓고 가는 게 나쁜 거 아냐? 이 세상은 빈틈을 보이는 자가 지는 거야."
도모히코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전율과 함께 오싹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물론 『백야행』은 장르소설입니다. 그런데, 소설의 장르는 분명 ‘미스터리 추리극’이지만, 작가는 독자와 두뇌 싸움을 적극적으로 벌이지 않습니다. 소설은 이들의 범죄 사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습니다. 누구나 원작소설을 읽으면, 이들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렇다고 인물 묘사에 치중한 것도 아닙니다. 하가시노 게이고 작가는 유키오와 료지의 내면 묘사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고통에 빠져 사는지, 아니면 이렇게 벌이는 범죄를 즐기는지 도통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의 내면은 텅 비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이들은 가장 믿어왔고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했거든요.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 유키오와 료지를 둘러싼 어른들은 모두들 괴물이었고, 이들은 우연한 사건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갑니다. 소설 초반에 유키오와 료지가 읽던 소설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스칼렛 오하라의 억센 모습은 유키호에게는 롤모델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 설정은 영화에도 그대로 삽입됩니다.
이런 미완성의 소재는 영화나 TV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이지 매력적인 작품이 될 수밖에 없지요. 약간의 터치로 캐릭터에 살을 붙여 더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영화는 방대한 내용을 무리하게 압축하는 대신 현재의 이야기와 14년 전에 벌어진 사건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을 즐겼던 분들이라면, 이 설정에 심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2시간 분량의 영화에 원작의 그 방대한 에피소드를 다 담을 수는 없는 법이지요.
박신우 감독은 원작의 내용을 과감하게 가지치기한 후 원작에 없는 요소를 삽입했습니다. ‘어른들의 사과’가 바로 그것입니다. 원작에서 유키오와 료지의 부모들은 모두들 괴물들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스스럼없이 인륜을 저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돈과 욕망이 인륜보다 앞서기 시작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드러낸 것이지요. 영화에서도 이들은 괴물로 나오지만, 인성을 지닌 괴물들입니다. 반성을 할 줄 아는 괴물들이지요. 영화에 삽입된 사건을 수사하는 한동수 형사(한석규)의 아들 이야기는 뜬금없기는 하지만, 수사가 끝난 14년 전의 사건을 가슴에 묻어두는 계기가 됩니다. 그 사건은 그의 (사건 해결의) 욕망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피를 흘리며 요한(고수)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이 영화의 지향점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차이라면, 유미호(손예진)와 요한의 멜로입니다. 소설에서는 유미호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정확하게 지칭하고 있지 않습니다(언급하긴 하지만, 전 진짜인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녀가 사랑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돈’일지도).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연인의 사랑이라기보다는 근친간의 사랑처럼 보입니다. 한동수 형사도 이야기하지요. 이들은 샴쌍둥이 같은 존재들이라고. 박신우 감독은 원작의 이야기에(유사) 가족 이야기를 덮었습니다(삐뚤게 본다면, 이 이야기는 14년간 기다려온 남매간의 사랑을 말리려는 부모의 이야기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삐걱거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현재와 14년 전의 이야기를 오가는 구성이라 플래시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현재와 과거를 구분하는 씬이 좀 모호합니다. 소설의 서사를 알지 못하면 이 부분은 좀 불친절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미호와요한의성장에대한에피소드가없습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바로는 이들은 사건이 벌어진 후 14년간 조용히 지내오다가, 갑작스런 계기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모습은 너무나 능숙해 보입니다. 원작에서도 료지가 살인을 벌이긴 하지만 완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는데, 영화 오프닝에서 보여주는 요한의 살인과 뒷정리는 거의 해결사 수준입니다. 똑똑하기 보다는 즉흥적으로 일을 벌이는 감성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멜로로 보이는 것이 가능했겠지요.
유미호의 모습은 소설보다 더 애매합니다. 유미호의 웃음은 본심을 숨긴 억지웃음입니다. 물론 그녀는 지옥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진짜 웃음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에필로그에서 유미호의 자연스러운 웃음과 이전의 억지웃음을 구분할 수 있는 어떤 ‘차이’가 필요한데, 아쉽게도 그 구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요한에게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하는 장면조차, 저게 진심인지, 그냥 떠보는 것인지 좀 애매합니다.
"난 말이지……. 태양 아래에서 산 적이 없어. (…) 내 위에는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지. 나는 그 빛으로 인해 밤을 낮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었어. 알겠어? 내게는 처음부터 태양 같은 건 없었어. 그러니까 잃을 공포도 없지."
하얀 밤. 유미호의 인생은 태양이 없는, 언제나 밤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빛을 만들어 지금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원작에서 그녀의 빛이 그녀의 삶을 포장해줄 ‘돈’이었다면, 영화에서 그 빛은 ‘요한’입니다. 사회적 함의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영화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문제로 좁혀놓은 것 같아 아쉽지만, 전 이 설정도 마음에 듭니다. 소설의 유키오는 여전히 하얀 밤을 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유미호는 어둠속을 걸을 것입니다.
유미호 역할을 맡은 손예진 씨는 원작의 이미지와 거의 흡사합니다. 원작의 유키오가 우아함과 청순함 속에서 가끔 천박함을 드러냈다면, 영화의 유미호는 천박함 대신 슬픔을 드러냈습니다.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은 관객들이 그녀에게 심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어린 시절의 유미호(이지아) 역할을 맡은 주다영 양은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연기를 합니다. 특히 한동수 형사와의 눈치싸움은 소설에도 언급되어있지만, 영화만의 매력을 듬뿍 드러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요한을 맡은 고수 씨 또한 냉혹함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단, 원작의 료지의 눈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어둠 그 자체였다면, 요한의 눈은 좀 더 깊은 슬픔과 회한의 감정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한동수 역할의 한석규씨는 (<쉬리>까지 포함한다면) 무려 일곱 번째 형사 역할을 맡았습니다. 본인도 매너리즘에 빠질 것을 우려해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박신우 감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제는 좀 뻔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석규 씨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다른 성격의 영화가 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냉철하면서도 감성 있는 연기로 유미호와요한, 두 아이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연기자는 한석규 씨 외에 생각이 나지 않으니까요. 실제로 소설을 읽으면서도 사사가키 준죠 형사의 대사를 읽으면 이상하게 한석규 씨 톤이 머릿속에 떠오를만큼 정말이지 딱 들어맞는 역할이었습니다.
약통(임지규)은 원작의 소노무라 도모히코를 차용했습니다. 원래는 약통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상영 시간 때문에 삭제된 불운한 캐릭터입니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가장 개연성 없는 캐릭터가 되었지요. 삭제된 장면은 삭제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미호와 결혼할 예정인 대기업 총수의 후계자인 차승조(박성웅)는 원작의 시노즈카 가즈나리, 시노즈카 야스하루, 다카미야 마코토를 합친 인물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다들 돈이 많다는 점이겠지요. ㅡ.ㅡ;;;
차승조의 딸 차영은(홍지희)은 원작의 시즈노카 미카와 후지무라 미야코를 합친 인물입니다. 덕분에 차영은의 행동은 소설에서 보다 더‘지독스러워’ 졌습니다.
그 외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들은 소설의 캐릭터를 합치거나 나눈 경우입니다. 영화에 등장한 캐릭터에서 원작소설의 캐릭터를 비교해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가 될 것 같습니다.
원작의 너비를 생각한다면,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지만, 원작의 분위기를 살리는 흥미로운 작품이 나온 것 같습니다. 열광할 작품은 아니지만, 그냥 넘길 작품 또한 아닙니다. 이제 32세인 신인감독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덧붙임:
1. DVD는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디스크에는 본편과 감독, 배우들의 음성해설이 수록되어 있고, 두 번째 디스크에는 다양한 서플먼트가 들어있습니다.
2. 음성해설은 박신우 감독, 이창재 촬영감독, 손예진 씨, 고수 씨가 참여했습니다. 촬영에 대한 뒷얘기와 영화 제작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로 풀어나가지만, 서플먼트의 다큐멘터리와 대부분이 겹치는 내용입니다.
3. <백야행>은 극장 상영 시에 디지털 버전과 필름 버전으로 상영했었는데, 디지털 버전이 필름 버전보다 10분 정도 깁니다. 이번에 발매된 DVD는 디지털 버전이 수록되었습니다.
4. DVD 서플먼트 중 가장 눈여겨봐야 할 작품은 박신우 감독의 단편 <미성년자 관람불가>입니다. 약 10분간의 짧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마치 『백야행』을 모티프로 한 작품 같습니다. 이 영화 때문에 박신우 감독이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편을 찍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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