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허리가 아파 컴퓨터를 좀 멀리하고 있다보니 아무래도 리뷰도 덜 쓰게 된다. 읽는 거야 앉아서도 읽지만 서서도 읽고 누워서도 읽을 수 있으며 그저 읽고 밑줄 치고 조금씩 옮겨적기는 한다만 진득하니 앉아서 써야하는 리뷰는 쓰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아무 기록도 하지 않는다면 좀 서운하니 이렇게 페이퍼로 남겨둔다.

 

1. 레이먼드 챈들러의 책을 두 권 읽었다.

 

 

 

 

 

 

 

 

 

 

 

 

시작은 북스피어 사장님이신 마포 김사장님(@hongmin76)과 트윗을 주고 받으면서였고 결국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를 구입하게 되었고, 읽다보니 챈들러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근래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자주 접하게 된 이유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하루키가 챈들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특히 글쓰는 습관이 그러하다고 많이 알려져있다. 실제로 하루키가 인용한(하루키는 출처를 알지 못했던) 편지가 이 책에 실려 있으니 궁금했던 사람들은 아주 가려운 곳을 긁어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작품론, 작가론, 할리우드, 필립 말로, 일상으로 나누어진 편지들을 우선 일상을 먼저 읽고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읽었다. 나는 챈들러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잘한 것 같다. 가장 재밌었던 건 아무래도 생각과 감정을 포장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일종의 품평이 담긴 <작가론>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북스피어에서 출간중인 '박람강기 프로젝트'가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언젠가 내가 침을 꼴깍 삼켰던 책들이었다. 최근엔 마쓰모토 세이초의 책이 출간되었으니 역시나 침을 꼴깍 삼켜본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를 통해 그의 작품 중 최고라 불리는 것이 [기나긴 이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하기에 필립 말로를 만나는 첫 작품으로 그 책을 택했다. 두 말 할 것 뭐 있겠나? 나는 필립 말로에게 매력을 느꼈다. 챈들러의 탐정 소설은 마치 소설책 몇 권을 읽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머리도 마음도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조만간 [빅슬립]으로 두번째로 필립 말로를 만날 생각이다. 챈들러는 참 잘 쓴다.

 

2. 첫 독회의 책이었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다 읽었다.

 

난생 처음 '독회'라는 것을 해 보았다. 주변에서 책 좋아하는 사람 찾기 힘들고, 그 책이 나와 취향이 맞기는 더더욱 힘들고, 함께 읽기는 가능이나 할 것인가 했었는데 가능하게 되어 시작한 독회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잡담을 나누고 차도 마시다 어느 순간 '내가 먼저 읽을까?'하는 말로 시작하여 네 번의 만남 끝에 이 얇은 책을 함께 다 읽었다. 사강의 에세이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경험이 있어 이 책이 어떨까 싶었는데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있을 법한 모든 감정'들이 이 소설 안에 다 들어있다는 말로 정리하련다. 사강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섬세한 소설가이다. 그녀의 모든 묘사들을 이 책을 소리내어 읽은 우리 두 사람 모두의 가슴을 움직였다. 이 책 다음으로 밀란 쿤데라의 [느림]을 읽고 있는데 이 책보다는 읽으면서 좀더 집중을 해야하지만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의 매력을 새삼 느끼는 중이다. 

 

 3. 김연수

최근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 +]가 나와 많은 이들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 나는 어찌했겠는가? 가장 나답게 [청춘의 문장들]을 읽기 시작했다. 고민은 없었다. 김연수 작가의 책을 별로 읽지 않았고 그러하기에 굳이 [청춘의 문장들]이 있는데 +를 살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궁금했다. 좋아하는 분의 추천이 있던 책이라 그래도 왠만하면 이 책은 읽자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아, 이 분, 동양삘 나신다. 내 과다. 다만 의외였던 느낌은 있다. 강연회 때 뵙기론 그리 정적인 느낌이 아니었는데 한시를 마구 날려주시니 낯설면서도 기대되는 느낌이 있었다. 소설에도 도전해야겠다. 집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다행히 있다. 요즘 김연수 작가의 재번역으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그러니 나는 역시 나답게 조만간 구판 [대성당]을 읽을 것이다. 신간을 제때에 읽는다는 것이 내겐 참 낯선 일인데 언제부터인가 가끔 최신간을 읽고 있다. 불현듯 나답지 않다는 생각이 스친다. 영화도 늘 비디오로 나올 때 보지 않았던가!!!! 그래도 요샌 비디오 빌리기 힘드니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는 게 좋겠다며...

 

4. [피어나다]

 <도서관 문학작가 파견 작품집>이라는 타이틀로 출간된 세트 중 하나인데 알라딘 검색이 안된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피어나다]는 도서관 문학관 파견 시인들의 시를 모은 책으로 400쪽에 가까운 시들이 그득하다. 개인적으로는 반가운 이름 김산 시인의 이름 때문에 읽었는데 박판식, 문성해, 이길상, 이승희, 김일영 시인의 시도 좋아서 옮겨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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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읽고 있는 책

정민 [한시 미학 산책] - 난 그저 시를 원했는데 매우 전문적인 책.

지그문트바우만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사서 봤어야 하는 건데 싶은 마음!

김중혁 [당신의 그림자는 일요일]- 빨책에 맞춰서 읽기 시작.

시오노나나미 [생각의 궤적]- 역시나 솔직하신 여사님!

밀란쿤데라 [느림] - 나의 두번째 독회 도서. 한 4주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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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 거인 -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제인 서트클립 글, 존 셸리 그림, 이향순 옮김 / 북뱅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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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도서관에서 해주는 미술사 강좌를 듣고 있는데 그 주제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이다. 어제가 7강이었고 [대리석 거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의 주인공인 미켈란젤로에 관한 강의는 지지난 주에 듣게 되어 실로 관심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나만 알기는 아까운데 싶었는데 아들에게도 엄마의 현재를 공유할 거리를 이 책이 주었다고나 할까?

 

우리는 흔히 '르네상스맨 =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들은 강의에서도 그렇고 아무래도 르네상스라 불리운 시기에 오래 살고, 그 삶 속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던 미켈란젤로야 말로 진정한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주자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 포문이야 다빈치가 일찍 열었고 그는 누구 뭐라해도 천재라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미켈란젤로가 전 시기의 르네상스를 살면서 화가이자 조각가이고 건축가였던 점을 미루어볼 때 진짜 르네상스맨이 아닌가 싶다. ('르네상스맨' 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알베르티로 그 뜻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a man can do all things if he will") 

 

이 책은 특히 미켈란젤로의 주분야인 조각가로서의 미켈란젤로를 드러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아름다운 조각상인 [다비드 상]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미켈란젤로가 얼마나 뛰어난 조각가인지, 아무것도 아닌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었던 큰 대리석이 그의 손을 거쳐 얼마나 아름다운 피조물이 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려내고 있다. 특히 그림을 보자면, 작가가 의도했다지만 미켈란젤로의 스케치를 모작하고 그의 흔적을 은연 중에 느끼게 해 주려는 부분들이 좋았다.

 

 

 <다비드 상에 못지 않게 아름다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과 그의 스케치들을 그린 자국들 및 다비드 상을 만들며 미켈란젤로가 지어다는 짧은 시 : 새총을 든 다비드/ 돌 깨는 활을 든 나>

 

특히 다비드 상을 만들며 지은 짧은 시에서는 다비드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깊은 애정을 드러낸 것이 느껴진다. 책에 다비드 상을 만드는 동안 가림막을 세웠다고 나와있듯이 그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누군가의 방해나 개입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비드 상을 만들 때에도 주문자측에서 어느 부분이 맘에 안드니 수정을 요구했다는데 돌가루를 집어 들고 올라가선 실제로는 고치지 않은 채 가루만 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 꽉 막힌 성격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타협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글을 읽으면서는 다비드 상이 만들어진 과정과 미켈란젤로의 업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림에서 느껴지는 당시의 느낌이 좋았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실제 미켈란젤로의 스케치인 듯 그려넣은 그림들이 자주 나오는 것도 그렇고 주로 군데군데 그 시대만의 문양들을 그려넣은 점도 그러하다. 유난히도 동그라미로 된 프레임이 많은 것은 낯설면서도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그 자체로 르네상스적인 것은 아닌가 하여 무척 인상 깊었다.

 

 

 


 매주 아이에게 한 권의 위인전을 읽히고 있고 그게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책을 읽다보니 한 권의 그림책 안에 한 사람의 생을 다 담는 것보다는 그의 삶을 한 부분이나마 이렇게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무척 의미 있는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엔 [대리석 거인2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나온다면 무척 특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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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 할머니가 손자에게
김초혜 지음 / 시공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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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팻말은 이 책의 저자인 시인 김초혜의 손자인 재면이가 초등학교 1학년 어버이날에 할머니에서 선물한 공작물이라고 한다. 아마 이 집안의 가장 큰 틀을 이루는 생각이 아닐까 싶었다.

 

  

 

 

 

며칠 전 아이의 유치원에서 급히 가훈을 적어오라길래 급히 만든 가훈이 '서로를 지켜줘요.'였는데 만들고 보니 딱 좋은 말 같아 진짜 가훈으로 쓰고 있다. 액자에 넣어 거실에 걸어두니 진짜 서로를 지켜주고픈 마음이 더 생기는 게 참 신기했다. 아마 <행복이>라는 팻말을 받은 그 순간부터 할머니 김초혜 시인은 아이로부터 느낀 행복감이 충만해져 이 책을 쓰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초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에 넘어가는 해2008년 1월1일부터 그 해 12월 31일까지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쪽 분량의 글을 써내려갔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할머니 김초혜의 마음은 그 내용에 못지 않다. 매일 1쪽의 글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매일 쓴다는 것은 보통의 마음가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사랑하는 손자에게 주는 글이니 그 내용 또한 얼마나 사랑과 정이 듬뿍 할 것인가.

 

재면이가 어린 나이에 이 글을 쓰기 시작하셨지만 이 책을 재면이에게 준 것은 중학교 입할 때였다고 한다. 아마 글을 쓰면서도 중학생이 될 손자를 떠올리며 썼다고 느껴지는 것이 내용이 아홉 살 아이에게는 어렵기도 하거니와, 성장의 의미를 깨우치게 할 목적의 글들이 많아 사춘기 손자에게 더 적합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면 너무 교과서적이고 지루할 수 있지만 이것이 재면이의 삶과 멀리 떨어진 한 어른의 글이 아니라 재면이와 가깝고 재면이를 많이 사랑하는 할머니의 글이기에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런 할머니를 둔 재면이가 어떻게 자랄지 흐뭇하게 기대하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친정엄마는 이 책을 읽으시곤 나도 써볼까?라고 하셨지만 며칠을 못 가셨다 ㅠㅠ 대신 좋은 글을 옮겨 적으시기로 하셨단다. 그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대신 내가 할머니가 된다면 기필코 이런 작업(?)을 해 보고 싶다. 대신 좀더 가볍게 쓰는 게 내겐 더 맞지 싶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책은 김초혜 시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꺼번에 읽는 것 보다는 일년을 두고 매일이면 좋겠지만 그런 부담 없이 생각날 때 한두쪽씩 읽어보면 참 좋을 것 같다. 비록 우리가 재면이는 아니지만 말이다.

 

오늘 날짜 5월 16일의 글을 옮겨 보는 것으로 마친다.

 

  사랑하는 재면아!

  아무리 컴퓨터가 기승을 부리는 시대라고 하지만, 편지를 쓸 때는 꼭 펜으로 써서 보내는 것이 좋다. 할머니도 이메일을 주고받기는 한다만 길게 쓴 이메일보다는 짧게 쓴 자필 편지가 훨씬 정답고 감동을 주더라. 정성들여 잘 쓴 글씨로 상대방에게 편지를 보내면, 너의 의도가 제대로, 명확하게 잘 전달될 것이다. 편지는 마음의 교환이다. 글시를 잘못 쓰는 사람은 남 앞에서 사인을 하기도 거북해 하더라. 글씨를 쓸 일이 많이 있는데, 그런 수치심을 지니고 산다면 참으로 힘들 텐데도 왜 고칠 생각을 안하고 부끄러워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재면이는 글씨를 잘 쓸 수 있게 평소부터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할머니 세대는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이 일상화되었던 시대였다. 그런데 한자를 잘못 썼다거나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틀렸다 하면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이나 인격까지 의심되더라. 어른이 된 후에도 그 사람을 만나면 그 틀린 한자가 자꾸 생각나 그를 무시하게 되더구나. 잠깐의 부주의가 그런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평소부터 조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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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꼭 로쟈님 글 제목 같기도 하다만 아니라서 낚인 분들께 죄송. 또한 이 세 사람이 관련이 있나 싶어서 오신 분들께도 미리 죄송. 그저 어쩌다 보니 최근 세 권이 이 세 사람에 대한 책이었을 뿐이었나이다.

 

[중국행 슬로보트]를 읽고선 무라카미 하루키가 궁금해져  [하루키 스타일]을 읽다보니 하루키에 대한 작가의 느낌이 달달하여 에세이를 읽는 듯 했고 간간히 전해지는 필력이 좋아 그 전작인 [손석희 스타일]을 찾아 읽었다.

 

 

 

 

 

 

 

 

 

 

 

 

우선 [하루키 스타일]의 경우는 이 세상에 나온 하루키의 글과 거기에 담긴 생각을 한데 정리한 '하루키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루키에 대한 그 어떤 책들보다 하루키를 많이 알게 해 주었다. 세련된 책 표지와 편집과 더불어 주로 내 스타일의 글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많은 책을 써낸 작가인 만큼 필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와 같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멋진 말들도 많이 실려있지만 그것들에 연결 고리를 만들면서 쓴

단순히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는 '재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삶의 태도이자 철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향 감각이 있어야 한다.

과 같은 작가의 소리도 매력적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더구나 이런 책의 경우 중언부언인 때가 많은데 이 책에서는 그런 면에서도 담백했다.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굳이 [손석희 스타일]을 도서관 서가에서 찾아 읽었다.

 

[하루키 스타일]이 작년 초에 나오고, [손석희 스타일]이 2009년에 나온 만큼 제목은 비슷해도 모든 면에서 많이 차이가 났다. 물론 최근의 [하루키 스타일]이 훨씬 좋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에세이나 오마주의 느낌이 드는데 반해 [손석희 스타일]은 자기계발서의 냄새가 많이 난다. [하루키 스타일]을 읽으면서는 하루키가 내게 아주 가까워진 느낌인데 반해 [손석희 스타일]을 읽고 나서도 물론 손석희란 인물에 대한 호감은 있지만 가깝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성공'이라는 키워드에 주제를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다. 아마 그때엔 그런 책들이 유행이 아니었겠나 짐작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필력은 다소간 느낄 수 있었다

 

철학이 있는 준비가 철학이 있는 시작을 만들고, 철학이 있는 시작이 철학이 있는 변화를 만들고, 철학이 있는 변화가 철학이 있는 인생을 개척해 나간다.

라는 글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좋은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손석희는 말을 하는 사람인 만큼 손석희에게도 좋은 말들이 많이 흘러나왔다. 그것을 역시 저자는 놓치지 않는 것을 보면 진희정 작가의 정리 능력은 인정할 만 하다.

"전 지도층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민주사회에서 지도층은 없으니까요."

2005년 <시선집중>에서 한 말이라는데 지금 그의 행동을 보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생각은 한결같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한 말처럼 손석희의 방송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한결같고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의 방송은 늘 의미 있는 변화와 흐름의 중심에 놓여 있다.

 

하루키건 손석희건 누군가는 좋아할 수도 누군가는 시큰둥할 수도 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이 책들이 더 확고해지는 역할을 해 줄 것 같다. [손석희 스타일]에서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심리학자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좋은 경험을 나눈 사람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루키는 책으로 우리와 좋은 경험을 나누었지만 안타깝게도 선인세 문제로 인해 나쁜 경험도 함께 갖고 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호불호가 더더욱 갈리게 되기도 하였다. 손석희의 경우 JTBC 사자으로 취임하면서 사람들에게 실망과 걱정과 기대를 동시에 받았지만 이번 세월호 보도로 인해 그는 우리와 경험을 바른 방식으로 공유했다. 그래서 우리는 손석희에 열광했다. 우리와 최악의 경험을 공유하는 스스로가 지도층이라고 여기는 그 사람들을 떠올릴 때 누가 당신들의 이름을 걸고 [000 스타일]이라고 불러주기나 하려나 묻고 싶다.

 

문득 시오노나나미가 [남자들에게]라는 에세이에서 쓴 '스타일'의 정의가 생각난다.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그런 줄 아는 것이 스타일이다.

 

이 두 책의 사이에서 읽은 책도 우연히 사람에 대한 책이다. 지금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가 아닌 16세기에 살았던 기생 매창에 관한 학술서 [이매창 평전]이다.

 

  [매창 시집]은 들어봤지만 그녀에 대한 평전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것도 교육대학의 국어교육과 교수가 쓴 기생의 평전이라니 조금 의외이긴 했다. 하지만 김준형 교수는 이매창에 대하여 모든 것을 이 책에 실은 듯 했다. 매창이 기생인지라 그녀와 에피소드가 있는 남성의 입장에서 그녀가 조연 혹은 여주인공처럼 등장한 경우는 왕왕 봤지만 이렇게 그녀가 원톱으로 나머지 모든 남성들이 조연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처음이라 신선했다. 더욱이 학술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라 자뭇 진지한 책의 성격이 매창을 좀더 고귀한 인물로 느끼게 해 주었다. 더더욱 김준형 교수는 글을 쉽게 잘 풀어쓰는 능력이 있으신 듯 인물에 대한 정보와 흥미를 모두 만족시켜주었다. 특히 그 자신은 후대의 사람들이 매창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고 남말 하듯 하였지마는 그 역시 그러한 오류에 대해서는 한발짝 물러나 있었지만 매창에 대한 애정만큼은 숨기지 못하였다. 애정으로 가득 찬 평전의 느낌은 좋다. 위의 두 책처럼 가볍지 않지만 읽으면서 좋았더랬다.

 

매창과 당시 문인들의 좋은 시도 읽을 수 있고,

-매창 <스스로 한스러워1>

 

기생의 삶에 대한 각종 사료들도 접할 수 있었고 당시 조선 시대의 흐름도 살짝 짚어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트위터로 허균의 천재적인 시 비평을 올렸더니 한 출판사에서 허균에 대한 책도 곧 나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기대해 본다.

"권필의 시는 화장을 하지 않은 절대가인이 알운성으로 등불 아래에서 우조와 계면조를 번갈아 부르다가 곡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문득 일어나서 가버리는것과 같다"니!

 

이젠 이야기를 읽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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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6-08-13 0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준형 교수님 수업을 이번 여름에 들었는데 어찌나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시던지요. 이게 전형적인 스토리텔링 수업입니다~~~ 하시더라고요! 이매창 책 검색하다가 살까말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마음의 결정을 내리게 해 주셨어요. ^^
 
일러스트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책세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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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움 출판사의 [이방인]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나도 한 번 사 보았고 이번에 책세상 판을 읽으며 그 책의 역자 노트도 읽고 야외에서 읽을 때에는 그 책으로도 읽었다. 책세상 판은 새움 출판사의 역자인 이정서가 주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는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반 차이를 못 느끼겠다. 나는 불어를 전혀 모르고, 작품을 문장 하나하나까지 애정을 가지며 읽은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두 번역본이 둘 다 흥미롭게 잘 읽혔다.

 

 

이정서가 비판한 김화영 번역의 책은 민음사 판이고 그 이후에 책세상에서 일러스트 판으로 출간된 것이라 이미 김화영 번역은 또 한 차례 수정이 된 터인 모양이다. 물론 시기상 이정서의 번역본과는 무관하게 출간되었으리라. 그렇다면 한 개인의 번역은 한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부던히 수정에 수정을 하는 일을 하게 되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서의 행위가 불필요했다거나 무의미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역자 노트를 보면 굳이 중요해 보이지 않는 점을 꼬투리 잡는 듯 보이는 부분도 있고 일리가 있어 비교하며 읽어보아 이정서의 번역이 더 좋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도 몇 번이고 수정을 하게 될 터 이렇게 일이 커진 망극함을 어찌할 지 지켜보는 내가 다 염려스러울 뿐이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77쪽)

 

가장 큰 논란이 된 부분은 위의 내용이다. 뫼르소가 속눈썹을 쑤시는 듯함이 결국 첫번째 총을 쏜 계기가 되니 뭐 해석의 개별화라치고 심리적(법적으로는 안되겠지만) 정당방위로 보는 것도 가능할 듯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게 정당방위인가 아닌가 왜 네 발을 더 쐈나하는 문제보다는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뫼르소의 태도에 집중하게 된다. 아마 이정서 논란이 아니었다면 굳이 거기까지 신경 안쓰고 읽었을 것 같은데 책을 나의 흐름대로 읽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한 원망감이 불쑥 생긴다.

 

책세상 판을 읽으며 새움판의 역자노트를 보다보면 그가 민음사판을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가 같은 역자임에도 해당이 안되는 곳이 있어 대충 읽어도 역자노트가 개인적으로는 공감이 많이 되는 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책세상의 [이방인]은 일러스트가 정말 흥미를 배가 시킨다. 그림을 보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하여 남들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여 사형 선고를 받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그것이 정당해 보이는데도) 어떤 제스처를 취하지 않은 뫼르소를 보며 어쩌면 그는 죽음을 살기 위해 생을 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순간 그 어떤 제스처라도 취하게 되기에 그의 태도는 의문인 동시에 경외감이 들고, 일면 놀랍다가도 질투마저 난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산다는 건 뭐지? 이런 원론적인 질문마저. 답은 물론 없다. 머리만 복잡해졌지만 살면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살아야 하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번역의 논란과 무관하게 나는 어쩌면 그가 실은 '태양 때문에' 살인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태양은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태양이 아니다. 그가 살인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쩌면 사람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그러니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며, 타인의 생각과 행동이 도대체 무슨 의미라는 말인가. 그저 내가 있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할 뿐이다. 그리하여 내가 살고 내가 죽는 것이 아닐까?

 

[이방인]의 문장 하나 하나가 하나의 섬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따라가지 못했고 단 한 번의 독서로 이 책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그것은 그것대로의 가치가 있지 싶다. 다만 나의 상태를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살짝 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인]이라는 제목은 내키지 않는다는 정도로만. 행여 누군가 [일러스트 이방인]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투썸! 

 

 

* 덧붙임 : 새삼 글을 쓴다는 게 무척 어려운 일임을 느낀다. 그림을 가지곤 아무도 딴지를 안 거니 말이다!!! 누군가 [이방인]을 글 없이 일러스트로만 번역을 해야할라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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