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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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한다 >라는 부제에서 우리는 로 넘어올 수 있다. 어느 나라에 대입해도 가능한 타이틀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열 개의 단어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점에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어느 나라에나 대입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중국, 그리고 이상하게 거꾸로 가는 듯한 대한민국이 묘하게 일치한다. 그 단어들 보다 더 큰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덩어리가 더 아프게 느껴진다. 나름 책의 목차와 지금 우리 시대의 키워드를 즉흥적으로 끼워 정리해 본다.

 

 

 

 

 

인민 對 국민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되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39쪽)

 

며칠 전 본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도 시민 혁명단의 모습에서 광주를 비롯한 항쟁의 모습이 겹쳐졌다. 아팠지만 우리의 저항은 마음과 마음을 지나 빛보다 멀리 전달되는 그런 울림이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민됨'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내가 지금의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겸손함. 우리는 진정 우리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존경하고 보호해야 한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영수 對 대통령

"착취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갈등이 있기 마련이고,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있기 마련이다." (58쪽)

 

이런 철학을 좀 가지면 좋을텐데......물론 마오쩌둥처럼 절대 권력인 것도 요샌 웃긴 일이라는 점.

 

독서와 글쓰기 -금지된 것들

 우리 나라에도 일찌기 어이 없는 이유들로 금지된 노래와 책이 많다고 들었다. 그런 것들을 읽지도 못하게 할 세상이었으니 그런 글을 쓴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행위였으리라. 위화가 이야기 하는 것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서부터 한국의 현재까지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의 대자보와 현재 우리의 블로그라는 공간의 목적성이 그의 말처럼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것(115쪽)인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냈다고 해서 처벌하는 행위는 지금 한국이 거꾸로 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모두들 입 다물고 있어야 평화로운 건가? 아니다. 그건 누가 말한 것처럼 가짜 평화이다. 

 

루쉰 對 김지하

한 작가가 하나의 단어가 된다는 것은 사실 그 작가 본인에게 커다란 손해 (183쪽)

 

나는 루쉰도 김지하도 잘 모르지만, 아마 김지하는 하나의 단어가 되기는 싫었나 보다.

 

차이 對 차별

  차이를 인정하지 않다 보면 결국 차별로 이어지게 된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생활 양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은 채로 내가 권력을 가질 때 그들에게 가하는 차별이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빈곤과 기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빈곤과 기아 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215쪽)

 

왜 안그렇겠는가? 빈곤과 기아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마저 짓밟는 것이니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말이다.

 

폭력

중국 경제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으로 충분히 투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41쪽)

 

책에서는 정부의 폭력적 진압을 포함한 숱한 격한 행동들을 혁명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아마 우리의 혁명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인 것 같다. 아무리 읽어도 이것은 폭력의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정치적 불투명을 담보로 하고서라도 경제적 성장을 빠르게 일으키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그 단계를 지나왔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불투명하더라도 폭풍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것이라는 환상조차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니 부디 그런 말도 안되는 논리에 자신을 묶지 말자. 결국 갚아야 하는 것은 힘이 없는 그대들이다.

 

풀뿌리 對 개천의 용

  중국의 풀뿌리들은 기복도 극심한가 보다. 우리에겐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풀뿌리는 풀뿌리고 용은 용일 뿐인 세상이다.

 

산채와 홀유

참 재밌는 말들이다. 짝퉁이나 사기라고 하지 않고, 극구 그건 아니란다. 하긴 진짜가 진짜 구실을 못하니 진짜보다 나은 산채가 나오고, 정의가 정의롭지 못하니 속임수가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제대로 알기 위해선 산채도 홀유도 다 알고 있어야겠다. 언젠가 사회가 맑아지는 날, 사회의 염증인 산채와 홀유도 말끔히 떨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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