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길사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연달아 이틀 째 독서모임. 이건 3년째 하는 모임이라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책이 쉽지 않아 고생을 했다. 읽으면서도 알았다, 이 글은 무척 아름다워, 이 책의 구성은 너무 매력있어. 읽고 나서도 마찬가지이다. 문장은 아름답고 한 사람의 생을 다섯 번의 죽음으로 나누어 구성한 방식은 여전히 매력있었다. 문제는 5권+막간극으로 구성된 각각이 챕터들을 집중력있게 읽을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내가 일을 너무 많이 벌여놔서 그런건가 싶기도 했는데 오늘 모여 보니 다들 한 번에 쉽게 읽지는 못한 듯 하다. 


그래서 평균 별점은 4점이었고 토론이 끝나고 난 후에 0.2점 정도 올라갔다. 토론은 발제자의 제안에 따라 내용, 구성, 언어로 나눠서 진행되었다. 첫번째 죽음은 생후 여덟달의 돌연사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그녀의 부모와 모의 모, 모의 모의 부모는 삶이 달라졌다. 두번째 죽음은 그녀의 수동적 자살이다. 어머니의 긴급 행동으로 목숨을 건진 그녀가 사랑과 외로움 때문에 목숨을 스스로 끊다니 이때 이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 그래도 둘째딸이 있어서 다행이었을까?

그녀는 첫째 아이를 한줌의 눈만으로 지옥에서 다시 데리고 나왔고, 일생동안 그것에 대한 보상을 치르며 살아왔는데, 이제 새삼 밝혀진 진실은, 인간의 대부분의 일에는 아예 가격이 없다는 것이다. (141)


세번째는 공산당에 입당한 그녀가 그녀의 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말을 바꿔가며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 그녀도 체포되어 죽게된다.  사실 내가 가장 집중하지 못한 챕터이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은 이 챕터가 가장 좋았다고 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이 챕터는 사상의 이야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언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건이 흥미롭지 않더라도 언어에 대한 관심이 높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부분이다. 인간의 행동의 실제보다 그것을 담은 언어의 중요성이 더 크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네번째 죽음 실족사인데 그녀는 그런 죽음이 수치스럽다고 했다. 그래, 그녀답지 않다. 죽어서도 억울할 죽음이다. 다섯번째 죽음은 아흔을 갓 넘겨 자연사한 것이다. 아들의 시점에서 이제는 자신과 멀어진 전쟁의 시대, 종교의 탄압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들어있다. 

인간이 무엇으로 인간을 알아보는지, 난 잘 모르겠다. (285, 300) 이 문장을 읽으며, 인간이 인간을 무엇으로 알아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했다. 


구성 면에서 이런 식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매우 매력을 크게 느꼈다. 화자가 이래저래 바뀌는 것이야 어려운 걸 내세우는 소설들의 특기이지만 한 사람의 생을 마감시키고 '만약에 그때 죽지 않았더라면'이라고 다시 생을 이어가는 다섯 번의 삶을 다룬 것이 내겐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분들도 대체로 큰 매력을 느꼈지만 더 흥미롭게 진행되는 소설도 있다고 추천을 받았다. 번역이 안 되어 못 읽을 뿐....각각의 생 사이에 '막간극'이라고 예고편처럼 들어가있는데 어떤 분들은 코스요리의 입가심이라고도 했고, 술을 바꿀 때 마시는 물이라고도 했다. 어떤 이름에서든 매력적인 구성인 것은 맞는데 분량 면에서 나는 좀 많게 느껴졌다. 문장은 간결했을지 모르나 문단은 결코 간결하지 않아서 읽기에 버거웠던 것 같다. 


소설에서는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그녀도 '그녀'고,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고, 그녀의 증조 할머니도 '그녀'다.  '어머니'라고도 부른다. 물론 아버지 쪽은 '그'나 '아버지'이다. 그녀가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겨우 H라는 이니셜이 붙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호프먼 부인이라 불린다. 아들은 이름이 있지만 자주 불리지는 않는다. 아들의 아버지 역시 이름이 없다. 김춘수의 '꽃'처럼 불려야 이름이 불려야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럼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이름이나 언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의 삶이 있었고 그 삶은 결코 어느 한 순간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


아마도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막 지나온 그 순간이 아니라, 모든 순간일 것이다. (149)

라는 말처럼 우리는 어떤 세계를 특별한 사건으로 기억하고, 누군가의 삶 역시 타인에 의해 규정된 어떤 사건이나 기록으로 기억한다. 호프만 부인의 삶이 마지막 죽음을 제외하고도 네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 사이를 들여다 보면 어느 삶 하나 사연이 깊은데 그녀의 삶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소설에 대한 느낌을 한두 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워 버벅거렸다. 누군가의 삶이 한 두 줄로 정리되지 않듯, 이 소설도 그랬다. 원제보다 뛰어난 제목이 여운이 남을 뿐이다.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 (24, 109)

세계 전체는, 그녀의 삶이 이제 종말을 맞게 되었으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녀가 살아 있을 수도 있고, 또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세계 전체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149)


그냥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 그 모든 순간이 세계를 만들어가는구나. 누군가의 삶은 더 크고, 누군가의 삶은 더 초라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누군가'로서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어떤 면으론 허무함을 어떤 면으로는 생의 의지를 느끼게 한다. 이야기거리가 많은 소설이었다. 물론 나는 지금 어쩌다보니 유대인에 대한 리뷰가 거의 없는데 우리는 꽤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었다. 또한 심플한 원제에 '저물 때'라는 말을 붙인 제목은 무척 아름다운데 동시에 혹시 본문에도 의역이 많이 들어간 것은 아닌가 우리는 좀 의심하며 오늘 모임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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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1-26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노우, 읽다만 책 ~!

그렇게혜윰 2022-01-26 17:57   좋아요 0 | URL
멋진 책인데 진도가 좀 안 나가긴 해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