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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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단숨에 다 읽어버릴 줄은 몰랐다. 더구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내게 아버지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되도록이면 건드리고 싶지 않은 주제인데 아니에르노의 냉담한 듯 무덤덤한 듯 쓰여진 아버지 이야기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요즘 말로 이 무슨 129?


나의 아버지도 그녀의 아버지도 가난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그 시대 많은 아버지들이 그러했듯 못 배웠지만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고 나의 아버지는 당시 흔치 않게 대학 교육까지 받아 그 시대에 쓰임이 많았음에도 무엇 한 가지 끝을 보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리라. 사춘기 소녀 시절엔 못 배운 아버지에게 느끼는 부끄러움이 무책임한 아버지에게 느끼는 부끄러움보다 크겠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전자의 경우 부끄러워한 자신이 더 부끄러워지게 된다. 다음 세대에겐 천하게 느껴지는 삶이어도 그 세대의 삶에서 그것은 어떤 대표성을 띨 만한 삶이므로 그에 대한 명예회복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하기에 아니 에르노는 이 소설을 쓸 수 있었고 나는 나의 아버지에 대해 아무 것도 쓸 수 없다. 


가진 것이 없는 집안에 태어나 갈수록 머리는 굵어져 눈에 보이는 것도 많아진 딸에게 아버지의 천박함이란 얼마나 멸시하고픈 대상이었을까? 그 멸시는 실제로 아버지에게 닿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때로는 모르는 척,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어가며 끝까지 아버지와 딸로서 남았고, 한 세대가 저물고 나서야 다음 세대로서 앞 세대를 위해 '당신 잘 살았구려!'하는 마음의 헌사를 바치고 싶어진 것이리라. 어쩌면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내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기억 하나가 있는데 사춘기 시절 파란 슬리퍼를 신고 마주오는 엄마를 못 본 척 한 것으로 그 죄책감이 지금껏 나를 누르고 있다. 그런데 정작 엄마는 먹고 살기 바빠 그런 것은 예민하게 느끼지 못했다. 아마 아니에르노의 아버지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자녀들이 자신들을 부끄러워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나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이런 마음으로. 그저 예민함은 다음 세대로 넘어가야 하는 자녀들의 몫일 뿐.  그래서 참 다행이기도 하다. 상처를 준 사람은 있는데 상처를 준 사람만 상처를 받는 거니까. 그러니 이 소설은 아버지에 대한 헌사이지만 아버지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만약 이 소설을 읽는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무척 기쁠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가난하고 천박했던 세계에서 부유하고 교양있는 세계로 넘어가는 자신이 그 문턱에 내려놓을 유산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소설로 썼다. 어쩌면 다음 세대에게 똑같이 멸시의 대상이 될 세계로 들어간 것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넘어가는 그 문턱에 내려놓을 유산이 있는 아니 에르노가 부러웠을까 나는 왜 이 책을 그토록 빨리 읽었나? 내 아버지의 유산은 그 흔한 '아버지처럼 살긴 싫었어!' 뿐인데 그것을 내려놓고 그렇게 문턱을 넘어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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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1-06-07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은 너무 쓰기 힘들 것 같아요. 이걸 썼다는 그 자체로 작가는 정신적으로 어느 지점을 넘어선 성장을 이루지 않았을까 싶네요. 저도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렇게혜윰 2021-06-07 07:04   좋아요 1 | URL
심지어 글이 아름답기까지하니 대단한 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