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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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단편 소설들만 골라 읽었던 때가 있었다. 도서관 3층 정기 간행물실에 가서 문학잡지들에 실린 단편 소설들을 읽으며 맘에 든 소설의 작가 이름을 기억하기도 하며 단편 소설만이 주는 여운에 조금은 중독되기도 했었다. 정기구독을 하던 때이다. 아이를 키우며 이상하게 단편 소설들을 덜 읽게 되었다. 연달아 보지 못해 드라마도 안 보는 처지인데 짧은 단편을 못 읽을 게 무엇이랴만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여운을 충분히 만끽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결국엔 처지의 문제가 되었다. 핑계일 수도 있지만 단편 소설은 짧은 대신 곱씹는 맛이 있고 여운이 주는 느낌이 가장 큰데 그걸 못할 바에야 장편이 낫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나마 익숙한 느낌의 김영하 작가의 단편은 간간이 읽어왔다.

 

  그렇게 가장 최근에 읽은 단편 소설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었다. 나로선 모든 작품이 좋았다고 하기도 어려웠고 일부 작품은 몹시 안좋았고 무릎을 칠만한 작품은 한두편에 불과해 썩 좋은 느낌의 독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카버를 읽는다. 김승옥과 비슷한 연배였다.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김승옥의 어깨엔 뽕이 잔뜩 들어간 느낌이었는데 카버의 단편들은 나와 비슷한 처지가 아닌 인물들에게조차 밀착된 느낌을 받았다. 박완서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박완서의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상의 이야기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카버는 미국의 박완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봤다.

 

 처음 읽었을 땐 아무래도 표제작인 <대성당>을 먼저 읽었는데 그때 기억엔 그다지 대단한 느낌을 못받았기에 이번엔 순서대로 읽었다. <깃털들>은 추와 미를 대치시키면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세상에 못생긴 아기라니 설정이 너무 한 거 아닌가 싶은 엄마의 마음이었지만 결론을 보면 도대체 못생긴 게 무슨 의미냐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극락조라는 공작의 등장도 그렇고 배턴을 터치하듯 전해준 깃털들도 그렇고 강렬한 느낌이 들었던 작품이 처음에 등장해 신선했다. 독서모임으로 읽은 책인데 다른 회원들 역시 이 작품이 주는 느낌을 좋아했다. 다만 역시나 번역의 문제가 있어 우리끼리 원서를 보며 재해석한 부분이 있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말이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열>이었다. 전작의 경우 편집자의 편집본에서 2/3가 잘렸다는데 (<목욕>이라는 제목이다.) 도대체 어디를 잘라낼 수 있었을까? 문학동네에선 편집 전후의 단편집을 모두 출간한 상태이니 비교하실 분들은 비교해봐도 좋을 듯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원작이 더 내 취향에 맞는 것 같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앤이 프랭클린의 부모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장면이나 앤과 하워드의 이야기를 빵집 주인이 들어주는 장면을 통해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일상을 견디어 내듯이 우리는 서로에게 이야기를 하고 들으며 우리의 일상을 견디어 낼 수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열>도 마찬가지 이유로 좋았다. 나에게도 웹스터 부인 같은 존재가 있었더라면 싶은 건 두번째 마음이고 우선은 칼라일이 웹스터씨 부부에게 이야기를 하고 부부는 그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장면이 더없는 평온감을 주었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카버의 단편들을 읽으며 카버는 아이든 술이든 이혼이든 평범한 일상에 던져지는 균열들로 발생하는 삶의 굴절을 너무나 잘 표현하는 작가 같았다. 최근에 나온 황현산 평론가의 책 제목이 [잘 표현된 불행]이었던가, 딱 그 느낌이다. 그 불행들이 해결된다면 판타지겠지만 굴절된 채로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결론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라 이 맛에 카버의 소설을 읽는구나 절로 감탄하게 되었다. 어차피 세상은 내가 열심히 착하게 살아간다고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가는 것도 지극히 공감이 되었다. 비록 운명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내게도 힘이 있겠지 싶은 마음은 드는 것이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불러도 될까?

 

 12편의 적지 않은 이야기들이 모두 좋았다. 그런 단편집을 만나는 것은 엄청 어려운 일이다. 단편만 썼다는 작가의 삶을 엿보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로 그를 위로해 본다. 그렇게 당신은 한 고비 고비를 넘기려 애썼군요. 이제는 제 차례인가 봅니다. 그런 마음으로 다른 단편집도 읽어볼 생각이다.

 

그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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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9-10-21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걸로 다시 읽어야겠다!!

그렇게혜윰 2019-10-21 15:28   좋아요 1 | URL
대성당은 편집본이 아니라 좋더라구요. 다만 번역 논란은 좀 있어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