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힘이 세죠. 사람의 세계관을 바꿔 놓기도 할 만큼요."

"우리 아버지는 현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너무 철저하게 격리되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보디워크스를 세웠어요.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죽은 육신을 동력이 끊긴 기계처럼 보도록 강제하는 방법을 써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싶었던 거예요. 아버지는 죽음을 우스꽝스럽고 절대적이지만 두렵지 않은 것으로 바꾸려 했어요."

"하지만 죽음을 너무 깊이 생각하다 보면 삶이 멈춰 버리기도 해요. 그건 플라스티네이션 자체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우리는 가끔 잊어버리는 사실이지만."

존은 진부한 위로는 한마디도 않고 그저 나를 안아 주기만 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한참 동안 이어지는 따뜻한 포옹은, 그가 나를 이해했다는 증거였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 구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용서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베풀곤 한다.

"하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어. 그래서 삶이 의미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여기가 스탠퍼드 대학교란 말이지. 그렇게 서른여덟이라는 나이에, 길고 긴 우회로를 굽이굽이 돌아서, 나는 마침내 대학교에 들어갔다.

동기들은 나를 큰언니처럼 대했다. 풋풋한 얼굴들에 잔뜩 둘러싸여 살다 보니 폭삭 늙은 기분과 한껏 어려진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그때껏 얼어붙은 껍데기 속에 삶을 멈춰 놓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동안 놓친 것들을 만회하고 싶었다. 누리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해 보고 싶은 것들도 너무나 많았다. 내가 만든 ‘죽기 전에 꼭 해 볼 일’ 목록은 갈수록 길어졌다.

으리으리한 선물을 받아 놓고선 포장지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있게 마련이지.

건강 보험은 특권이지 결코 권리가 아니었으니까.

부자는 사는 법도 죽는 법도 가난뱅이하고는 완전히 딴판이어서, 부와 권세는 얄따란 살갗에 보이는 흔적이 다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말 그대로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일찍이 죽음은 평등의 수호자로 위세가 대단했지만, 이제 그마저도 부자들은 피해 가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분노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당연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사랑을 만끽했다. 나를 해방시키고, 죄책감을 안기지 않고, 나를 짓누르는 일 없이 끌어올리는 사랑을. 당연히 행복해야 마땅했지만 내가 느낀 것은 무력감과 정체감,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어디로도 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결코 성숙하지 않았기에, 한편으로는 결코 호기심이 마르지 않았다

나는 역사와 문학, 경제학의 박사 학위를 잇달아 취득하고 나서 의대에 입학했다. 그냥 재미 삼아서 한 일이었다.

배울 것은 너무나 많았고, 나의 끝나지 않는 학생 생활은 언제나 시작을 눈앞에 둘 뿐 실제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삶이 아닐까? 나는 잠재력과 가능성과 첫걸음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았다. 악기를 배워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연습할 시간이 100년이라면 거장이 될 법도 했으니까.

그 남자의 나이를 가늠할 방법은 없다. 인종도 알 수 없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는 줄이고 또 줄인 끝에 ‘인간’의 정수만 남은 상태이니까.

애초에 빼앗아갈 속셈으로 영생이라는 약속을 내걸었던 무정한 신을 향하여.

모르는 사람이 아닌데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이들 곁에서 마음이 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무렵의 내가 행복하게 지냈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행복을 잃고 나서 뒤늦게 행복했던 것을 알아차리는 경우는 자주 있게 마련이다.

"네 인생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어. 너한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행세하기 싫어서."

혹시 지금 내 아들이 자식을 버린 여자를 똑같은 짓을 한 남자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비난하는 것은 아닐까?

미안. 나는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도 있으니까.

당신은 나에게 삶을 줬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소유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사랑은 중력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늘 존재하는 거라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선 안 돼요. 그러니까 나는 계속 그렇게 기다릴 게 아니라, 마땅히 내 손으로 삶을 개척해야 했던 거죠.

당신을 잊어버리고 싶었어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나 스스로를 동정하는 짓도 그만뒀고.

마법처럼 신비한 일, 세상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속에 온기를 느꼈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었다. 그치지 않고 흘러내리는 가녀린 물줄기 같은 사랑이.

내게 필요했던 것은 그저 삶을 견디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나는 남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배웠다.

이제 우리 인간들은 영원히 아는 사이로 지낼지도 모른다.

내가 아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 때, 내 아들은 어머니가 필요한 시기를 이미 한참 전에 지나 버린 어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더 순수하면서도 덜 확실하다고 느꼈다. 볕에 바래어 쉬이 바스러지는 모래톱의 동물 뼈처럼.

"존엄한 죽음이라는 건 우리가 죽음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지우려고 만든 미신이에요."

세상은 갖가지 크고 작은 방식으로 변해 버렸지만, 그중 어떤 것도 나를 바꾸지는 못했다.

어쩌면 나는 속으로 너무 늙어 버렸는지도 몰랐다. 늙지 않게 해 주는 시술을 그렇게 많이 받아 놓고도.

"난 보기보다 나이가 많아요." 내가 말했다.
"우리 모두 그렇잖아요."
남자는 그렇게 대꾸했고, 나는 배시시 벌어지는 그의 입술을 보며 마음이 녹아 내렸다. 이제 다시는 그러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방식으로.

"죽음이야말로 삶이 만들어 낸 가장 멋진 거예요. 나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내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두려운 일에 도전해요.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숨이 거칠어지게 하는 일들 말이에요. 그날 당신한테 다가갔던 것도 내가 언젠가는 늙어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되새겼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나는 존과 함께 보냈던 길고 긴 나날을 돌이켜보았다. 그런데 기억에 남은 날들은 너무도 적었다.

끝없는 시간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기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선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삶을 낭비했다. 그래서 기꺼이 내 삶에 플라스티네이션 처리를 했다. 고치 속에 숨은 누에처럼.

세계 곳곳에서 삶이 영원히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 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한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

나의 차례가 오면 죽음을 맞기로 했다.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이루지 못한 채로, 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한 채로,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배우지 못한 채로, 그러나 한 여자의 삶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린 채로. 내 인생은 하나의 기다란 호(弧)가 될 터였다. 시작과 끝이 있는.

뜻이었다.당신은 자유로워야 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돌아보았다. 나의 수월했던 방랑 생활과 험난했던 사랑을. 나의 자랑스러운 작품들과 후회들을. 나의 허장성세와 사소하고 질박한 즐거움들을.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내 팔다리 속에서 그것이 일으키는 진동이 느껴졌다. 다가오는 파도를 향해 총총거리며 백사장을 가로지르는 게의 걸음처럼.

"우리는 서로를 소유하지 않아. 서로를 위해 곁에 있기를 원하는 거지."

"죽음 없는 삶이 변하지 않는 삶이라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는 사랑에 빠질 때도 있고, 사랑에서 벗어날 때도 있어요. 연애든 결혼이든, 우정과 우연한 만남이든, 모든 관계에는 포물선이 있어요.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살아가는 시간과 죽음이 있는 거죠. 엄마가 찾는 게 상실이라면 그게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서지 못했듯이, 나는 영원한 시간을 감당하며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할 운명이었다.

내가 늙어 가다가 죽기로 마음먹은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 시작해야 하는 운명으로부터.

"나는 여러 번의 삶을 살면서 이미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어.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 법이란다."

믿음의 문제란 모름지기 그 끝에 이르면 합리에 기반한 주장으로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게 마련이고, 거기서는 도약을 하는 수밖에 없다.

나의 마지막 작품은 플라스티네이션이 아니었다. 정체(停滯)야말로 진정한 죽음이므로.

실존의 적나라한 진실에 덧씌워진 환상을 오랫동안 천천히 벗겨 가는 과정을. 그것은 낭만적이지 않다. 보기에 흐뭇하지도 않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자주 지루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삶이고, 그것이 진실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영원한 바다의 포효보다 더 커다랗게 나의 귓속에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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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22-04-15 0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자는 사는 법도 죽는 법도 가난뱅이하고는 완전히 딴판이어서, 부와 권세는 얄따란 살갗에 보이는 흔적이 다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말 그대로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여기 밑줄 긋게 되고 아 이것도 정말 증언과 고발(?)이 무한히 나와야 하는 주제다... 했는데 다른 문장들 보니까, 이 작가 여러 주제로 다 독특하고 심오한 작가일 거 같아요! 켄 리우. 사, 사랑합... (보자마자...;;;)

라로 2022-04-15 14:42   좋아요 1 | URL
아! 몰리님은 알아봐주실 줄 알았어요!!! 저 처음에 이 책(단편집)의 첫 이야기를 읽을 때 삐걱대고, 투박하고 평범해,,머 이러면서 불평을 하면서 읽었는데요,,점점 아 이거 정말 괜찮은데!!! 막 이러면서 다른 이야기 다 읽지도 않고 켄 리우의 다른 책을 주문;;;; 저 이젠 울 준비 되었어요,, 사랑의 눈물;;;;^^;;;
 
[eBook] 히트의 탄생 - 대한민국 브랜드 100년 분투기
유승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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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의 탄생이라는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 책은 한때 히트했거나 지금도 히트하고 있는 브랜드에 대한 개략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40대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정감 가는 제품에 대한 비하인드스토리가 많이 실려있어서 그런가 읽는 내내 추억에 잠길 수 있었던 즐거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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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14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라로님 추억이 몽글몽글 ㅎㅎ

라로 2022-04-14 19:22   좋아요 1 | URL
그죠! 저도 이 책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이런 책 또 나오면 좋겠어요. ㅎㅎ
 

내가 이야기 속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오히려 희망과 공포로 가득한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 확대경을 가져다 대는 것이다.

최신 경향을 토대로 추론하고 점차 흔해지는 패턴들을 상술하고 아직 덜 여문 혁신의 논리적 귀결을 제시함으로써, SF는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면면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강조하는 고성능 필터로서 기능한다.

‘사실주의’ 문학에서라면 너무 당연하거나 너무 모호해서 알아보기 힘든 것들이 사변과 상상의 세계에서는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변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더 자유롭다고, 더 현명하다고, 더 인간적이라고 느낄까? 아니면 역설적이게도 과거보다 더 혼란스럽고 더 답답하다고, 더 불안하다고, 그러면서도 덜 인간적이라고 느낄까?

지난날의 지혜가 설득력을 잃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선 이들은 상상도 못 했던 갖가지 선택과 직면한 시대에 한 개인이 만족스러운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 만물이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변하지 말아야 할/ 변하지 않아도 되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은 무엇인가?

전통과 정체성, 문화, 가족, 사랑(이 경우에는 다양한 형태를 모두 망라하여) 같은 것들의 가치는 무엇인가?

아니면 우리 발밑의 세상이 흔들리면서 그런 것들의 의미 자체도 변해 가는가?

내가 보기에 우리 인간이라는 종(種)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도록 진화했다.

사실과 숫자가 인간을 설득하지 못하는 것을 이제껏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그것은 오로지 이야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모든 나라와 문화권, 도시, 마을, 직업군, 가족, 심지어 한 개인에게조차도 기원 설화라는 것이 있다. 이 ‘자기 서사’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또어째서 지금의 자신이 되었는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는 ‘정직’이나 ‘공감’, ‘관용’, ‘애국심’ 같은 말의 의미를 사전에 실린 정의를 통해 배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린 시절에 동화를 읽으며, 또는 그런 말에 깃든 가치들을 상징하고 실천하는 영웅의 모험담을 읽으며 말의 의미를 머릿속에 새긴다(미국인이라면 ‘벚나무를 잘랐다고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고백한 조지 워싱턴’ 이야기나 ‘영국군에게 사형당하는 순간에도 조국에 바칠 목숨이 하나뿐이라 애통했던 네이선 헤일’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적잖은 경우에 우연과 돌발의 결과이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가 만든 장대한 판타지의 주인공이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또 원래 출발한 곳이 어디인지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목적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가며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지키고자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우리는 결국 누구도 아닌 자기만의 이야기를 쓴다. 이로써 우리는 자기 운명의 저자가 된다.

저의 이야기가 외국어로 번역되어 머나먼 나라에 사는 수많은 독자들의 손에서 또 다른 삶을 누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 언어, 문화를 넘어 쓰는 이와 읽는 이가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인간다워진다고, 저는 느낍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짓는 종(種)이니까요.

누가 내 친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때껏 딸 친구들한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채드를 만난 건 그때껏 나한테 일어난 최고의 행운이었는데, 어쩌면 나는 그 행운 속에 함정이 있을 거란 생각을 처음부터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입을 다문 것이 채드를 감싸는 짓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감히 꿈을 꾸려 한 대가. 자신이 누군지 감히 잊으려 한 대가.

내 머릿속에서 채드는 이 고결한 일에, 오래된 동시에 새롭기도 한 이 일에 관여할 권리를 이미 박탈당한 사람이었다.

나는 임신 중단이나 입양 같은 선택지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내 몸이고, 내 삶이고,내 아기였으니까.

나는 기다렸다. 찌릿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감각을,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줄 따사로움을.

하지만 나는 내 손으로 내리찍은 발등을 지켜보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처지였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증오스러웠다. 나는 내 아들이 미웠는데 그건 곧 내가 인간도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울었다. 온 우주에 나 혼자였고 내 힘으로 되는 일이라곤 우는 것뿐이었다.

아들 이름은 찰리로 지었다. 이름이 곧 힌트(‘찰리’와 ‘채드’는 둘 다 남자 이름 ‘찰스’의 애칭이다. ? 옮긴이)였지만 아빠는 이제 그런 힌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그 사람이 나타났다. 낡은 가죽 재킷을 입은, 담배 냄새가 풍기는, 햇빛을 받으면 회색 눈이 현란한 색조로 물드는데 그중 지루한 색은 단 하나도 없는, 그 남자가.

너를 옭아맬 덫 같은 건 없어. 너한테는 이 길밖에 없다고 제풀에 믿어 버리지 않는 한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순 없어. 너랑 나는 영원히 자유야.

친절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남자였지만, 제임스는 내게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꼭 잔디 마당이 딸린 집에서 살 필요는 없다는 것을, 돈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의무와 덫과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나날로 삶을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런 교훈을 남자들은 본능처럼 알지만 여자들은 배워야만 아는 듯싶었다.

제임스에게서 자유가 무엇인지 그토록 많이 배웠는데도, 나는 아침이면 그의 널따란 어깨가 뺨에 닿는 느낌이 그리웠고, 밤이면 그의 손이 허벅지에 닿는 느낌이 그리웠다. 결국 나는 그의 것이라고, 또 그는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사랑한다는 말은 서로 간에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 말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딱히 찾는 것이 있지는 않았다. 무언가 내 가슴에 뚫린 구멍을 막아 줄 것 말고는.

제임스와 살면서 배운 것은 자유만으로는, 또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사랑만으로도.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받고 싶지 않았다.

나 혼자서 편히 지낼 방이 있어야 했다. 그 방을 달팽이가 지고 다니는 집처럼 든든하게 유지하려면 꼬박꼬박 들어오는 수입이 있어야 했다. 그 수입을 얻으려면 내 두 손으로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플라스티네이션(plastination) 과정은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막는 방부 처리에서 시작한다. 그다음은 시신을 해부할 차례이다.

내가 알기로 에마는 요통으로 고생을 했으니 등받이 없는 스툴이 편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들이 자기 일로 호들갑 떠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묵묵히 작업에 열중했다.

에마는 사소한 잡담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내가 아는 플라스티네이션 기술을 모두 에마에게서 배웠고, 가르침은 대부분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에마가 말을 거의 무용지물로 여기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말은 생각의 그림자, 그 자체가 믿기 힘들고 잡기 힘들고 비현실적이었다.

육신은 플라스티네이션을 통해 보존되어 영생을 얻었다. 하지만 아세톤과 폴리머가 혈액과 수분의 자리를 차지할 때, 생각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에마는 말이 전하는 가짜 친밀감을 신뢰하지 않았다

에마는 오로지 나라는 물리적 존재, 내가 하는 작업, 내가 착실하게 출근하는지에만 관심을 보였다.

남의 양손을 해부하고 방부 처리까지 해서 자기 집 거실에 여봐란듯이 놔두다니,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 그런 생각을 할까? 그것 또한 덧없는 삶과 경이로운 인간의 육신을 관조하는 한 가지 방식일까?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라틴어로 ‘그대가 죽을 운명임을 명심하라’라는 뜻으로서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경구이다. ? 옮긴이)’를 중얼거리며 바라보았던 해골처럼, 저 손도 보는 이에게 필멸을 상기시키는 상징일까?

"질문이란 대개 쓸모없는 것들이야. 답이랍시고 돌아오는 것도 거짓말이거나, 믿고 싶지 않은 것들이고."

나는 에마를 안아 주려고 팔을 벌렸다. 내가 누구에게 그런 행동을 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래서 우리 둘 다 겸연쩍었다. 포옹을 풀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에마를 사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목적으로, 내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똑같이.

내가 포즈를 잡은 그 손 한 쌍은 말을 할 줄 알았다. 슬픈 이야기, 기쁜 이야기, 사색으로 이끄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보는 이를 유혹하듯 손짓했고, 경고했고, 꾸짖었다. 기도를 올리는 듯, 잠든 정신을 일깨우는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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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4-14 17: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도 읽다 말았네요 -

왠 놈의 읽다만 책들이 이리
도 많은지요.

군신 관우를 허겁지겁 읽던
기억이 나네요. 드디어 군신
관우가 아메리카까정 접수한
건가요 ㅋㅋ

라로 2022-04-14 18:06   좋아요 2 | URL
이 책 처음은 좀 별로에요.
너무 투박하고 평범하고,,
나름 유명한 작가인데
수준이(라기는 그렇지만) 라며
혼자 갸우뚱하면서 읽고 있는데
이제 겨우 시작이라...
시작은 대부분 인내를 가지고 읽어야지요.ㅠㅠ

라로 2022-04-15 14:38   좋아요 1 | URL
이 책 말씀드린대로 처음엔 좀 별로인데 갈수록 넘 좋아요!!
매냐님 어디까지 읽으셨어요?
저는 이 책 아주 좋아할 것 같아요.^^;;;
 

참고로 덧붙이자면, 쌍화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야 비로소 식약처 인증을 받은 일반의약품이다. ‘쌍화’라는 이름 앞뒤에 무언가를 덧붙여 ‘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제품들은 쌍화차 유의 혼합음료라고 하니, 기왕에 몸을 위해 마실 생각이라면 정확히 쌍화탕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제품을 마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단, 엄연한 의약품이니 과다복용 등으로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하길 바란다.

최수부 회장이 IMF 시절 닥친 부도 위기를 극복한 후 "시련은 산삼보다 더 좋은 보약"이라고 남긴 명언처럼, 각자 시련을 이기고 살아남은 거북표와 솔표가 나란히 한방 의약품의 과학화·대중화·세계화를 통해 계속해서 국민의 건강 지킴이가 되어주길 기대해본다.

"외출 전 안티푸라민을 코 밑이나 코 안쪽, 입술, 손 등에 얇게 펴 바르면 코로나19를 예방할 수 있다?"
온 세상이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와중에 이런 황당한 글이 인터넷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안티푸라민의 냄새를 세균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이 약을 발라놓으면 세균 침투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로 팩트를 확인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오랜 기간 동안 국민 상비약 자리를 지켜오며 많은 사람들을 다양한 통증으로부터 해방시켜준 공로를 인정하는 마음에 믿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 1970~80년대까지도 우리 어머니들은 안티푸라민을 만병통치약쯤으로 생각하고 온갖 자질구레한 통증치료에 동원했다. 멍든 데, 삔 데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에 발라주고, 코감기로 고생하고 있으면 코 밑에 발라주고, 벌레에 물려 가려워하면 벌레 물린 곳에 발라주는 식이었다.

브랜드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창업자와 기업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된다. 맨 바닥에서 빈손으로 시작해 큰 사업을 일구고 신상품을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것도 어렵지만 여러 고객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키며 오랜 기간 사랑받는 장수 브랜드로 성장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기업인 중에서도 유일한 박사는 매우 독보적이다. 그의 일대기와 기업가 정신을 좇아가보면 이처럼 훌륭한 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인물은 우리나라 기업사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 정도다.

미국 굴지의 회사에서 동양인이 회계사로 일하며 이런 고위직을 제안받았다는 것에서부터 그의 비범함이 드러나는데, 그가 이 제안을 뿌리치고 사업을 선택한 것은 하루바삐 경제적 기반을 갖춰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학자금과 생활비 마련을 위해 중국인과 동양인을 대상으로 중국에서 들여온 손수건, 카펫 등을 판매하며 돈을 벌었던 경험이 있었을 뿐 아니라, 미시간 대학 재학 시절 그는 한중 학생회 회장을 맡기도 했기 때문에 현지에 사는 중국인들의 생활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업을 본격화하기로 마음먹고, 대학 친구였던 월레스 스미스WallaceSmith의 도움을 받아 ‘라초이LaChoy 식품회사’를 세운다. 라초이는 프랑스어로 ‘중국’ 혹은 ‘고급요리’를 뜻한다. 이 회사는 1990년 미국의 식품기업인 ‘콘아그라 브랜즈ConagraBrands’에 인수되며 아직도 미국에서 아시안 식품을 생산, 유통하는 회사로 운영되고 있다. 유일한은 한국으로 귀국하며 라초이의 모든 지분을 정리했지만, 《위키피디아》에서는 그 설립자를 유일한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가 귀국 후 제약사업을 시작한 데는 의사였던 아내 호미리 여사의 영향도 있었지만 이때 접한 조선의 열악한 보건환경과 의료현실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기왕에 큰 공부를 했으면 큰일을 하라"는 말로 유일한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는 앞선 귀국에서 변변한 치료제 없이 질병에 고통받던 동포들을 보았고, 조선에 가장 시급한 분야가 의료분야라 판단했다.

조선 사람들이 즐겨 입는 흰 옷은 쉽게 더러워져서 자주 빨아야 했기에, 색깔 있는 옷을 입으면 반대로 세탁일을 줄여 경제적·인적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해 염료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염료나 농기구 수입은 이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업이었지만 다른 사업에서 얻은 이익을 이 사업에 투자하며 꾸준히 이어갔다.

보장된 성공을 뒤로하고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이미 개인적 이익이나 성공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가벼운 상처에 바를 연고조차 귀하던 시절이라 사람들은 타박상이나 삐었을 때, 근육통은 물론 벌레에 물렸을 때나 손이 부르트고 동상에 걸렸을 때에도 안티푸라민을 찾았다. 바세린 성분이 포함되어 보습효과나 가려움증에도 효과가 있긴 했지만 반대로 유일한은 이처럼 특정 의약품이 본 효능과 달리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는 것을 꽤 경계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의약품의 정확한 성분이나 효능, 복용방법 등은 밝히지 않은 채 "이 약만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 식의 과대 과장광고와 서로를 향한 비방 등이 난무하던 시절이라 이렇게 가다간 한국제약 산업 전체가 공멸에 빠질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신문 사설이 나올 정도였다.

안티푸라민이라는 이름 역시 ‘염증을 일으키다’는 뜻의 ‘인플레임inflame’에 반대라는 ‘안티anti’를 더해 항염증제이자 진통소염제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고도 전해진다.

유한양행은 안티푸라민을 광고하며 제품 용도를 명확히 밝히며 의학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싣고 "사용 전 의사와 상의하라"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이는 안티푸라민 이전 유한양행의 다른 제품 광고에도 항상 보이는 모습이다.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1970~80년대를 살았던 40~50대들은 녹색의 철제캔에 간호사 모습이 그려진 안티푸라민을 기억할 것이다. 1961년에 리뉴얼된 제품으로, 이 간호사 모습은 유일한의 막내동생인 유순한을 모델로 했다는 설도 있다. 이 간호사 이미지로 인해 안티푸라민은 집집마다 꼭 갖춰놓아야 하는 상비약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이 시원하게 쉴 수 있는 사업을 하라’는 의미의 버드나무 목각화를 선물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그는 미 국무부의 제안을 받고 미군의 작전수행 한국담당고문으로 일하며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격파하는 데 공헌을 세웠을 뿐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지역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국방경비대(맹호대)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이와 함께 훗날 알려진 사실이지만 냅코 작전NAPCOProject(미국 육군전략처OSS가 주도하여, 재미한인으로 구성된 공작원을 침투시켜 국토를 수복하려 했던 작전)에 참가해 50세라는 나이로 고된 훈련을 소화하며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유한양행의 경영을 맡은 유일한은 모범기업인이자 교육자로서 우리 사회에 큰 족적을 남긴다. 기업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유한양행을 비롯해 다양한 사업을 크게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투명하고 정직한 경영을 통해 모범납세 기업인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중요하다고 여긴 그는 여러 개의 학교를 직접 설립해 무상교육을 실시하는 등 교육자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전문경영인제도를 도입하며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와 임직원의 것이라는 평소 신념을 실제로 실천했다.

"울타리를 치지 말고 학생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여 어린 학생들의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당시 박카스에는 카페인, 타우린, 비타민 성분이 첨가되어 금방 피로가 싹 가시게 하는 기분이 들어 인기를 끌었는데, 유일한 회장은 "이 박카스를 포함한 모든 드링크제는 인체의 전반적인 에너지를 향상시키는 게 아닌, 순간적으로 활력이 솟는 느낌만 주는 제품 같다"라고 생각해서 드링크제 개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창업자인 유일한의 정신이 후세 기업인들에게도 널리 퍼져서 훌륭한 기업과 기업인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 속에서 100년을 넘어 200년을 살아내는 멋진 브랜드들이 또 꽃을 피우지 않겠는가

"젊음, 지킬 것은 지킨다."

출시 당시 박카스의 슬로건은 "최신 종합강간제綜合强肝劑"였다.

아무리 한자라지만 지금 시절에 강간영양제라고 내세웠으면 어찌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빠른 성공만큼이나 위기도 바로 닥쳐왔다. 아직 미숙한 제조기술 탓이었는지 알약의 겉에 입힌 당의가 녹아내리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단순 소비자 불만을 넘어 대량 반품 현상으로 이어졌다.

(2005년에 기존1,000밀리그램이었던 타우린 함유량을2,000밀리그램으로 올리는데, 이때부터D는‘Drink’에서‘Double’을 의미한다).

유통분야에서도 역시 박카스만의 새로운 방식을 창조했다. 의약품은 일반적으로 도매상을 거쳐 소매약국으로 출시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제약시장은 제조사보다 도매상에 의해 성과가 좌지우지될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제약은 도매점을 벗어나 소매점과 직접 특약점 계약을 맺고 상품을 공급하는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도매상의 입김을 줄이고 자체 유통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지금도 박카스 루트카가 전국 2만 여개 약국에 직접 방문해 박카스를 공급하고 있다.

지금은 회사 분할과 경쟁 환경의 영향 등으로 1위 자리를 내줬지만, 여전히 동아제약이 우리나라 최대 제약업체로 인식되는 것은 오랫동안 차지한 1등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카스 한 병은 100원이었는데, 연탄 석 장 정도에 맞먹는 돈이었다. 이에 아직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국민이 많은데 굳이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인 박카스를 이렇게 온 국민이 마시라고 광고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고위층의 정서가 반영된 결과라는 ‘웃픈’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 번 벌어지기 시작한 균열은 웬만하면 멈추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떤가?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뿐, 소중한 땀의 현장엔 박카스"라며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보통 사람들의 소중함과 자부심을 일깨우며 박카스의 존재를 각인시킨 이 시리즈는 공익성 메시지를 상품 판매와 연계시킨 착한 광고의 효시로 지목되기도 한다.

2001년 발간한 《박카스 40년사》에서 "박카스의 성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광고"라며, "광고 없이는 박카스 신화는커녕 박카스라는 브랜드조차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상식과 공정을 지키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아낸 ‘젊음, 지킬 것은 지킨다’ 시리즈는 당시 국민에게 큰 공감을 얻어내며 박카스를 일약 온 국민이 사랑하는 브랜드로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시력이 낮아 군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할 위기에 처한 청년이 시력점검표를 외워가면서 "꼭 가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는 신체검사 편은 당시 군복무를 기피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꼬집으며 정직한 젊은이 편에 서서 이 시대의 보통 청년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박카스다"

진짜 몸이 피곤하다면? 지속적으로 적당한 영양을 공급하고 적절한 휴식을 취하는 게 정답이 아닐까.

2020년 6월 기준 우리나라에는 약 2,400만 대의 차량이 등록되어 있는데, 이는 인구 2.16명당 자동차 1대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도심의 교통정체와 아파트의 주차난을 본다면 금방 이해가 되는 숫자이긴 하다.

조선 땅에서 직접 타이어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일인데, 미국 등 서구에서도 타이어 대량생산이 이뤄진 것은 1910년대 즈음이니, 어찌 보면 비교적 일찍 받아들인 서구 문물 중 하나라고도 하겠다.

타이어의 원형인 바퀴는 인간 문명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발명품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고무로 타이어를 만들게 되면서 비로소 자동차나 심지어 비행기까지도 발전할 수 있었으니 타이어 역시 바퀴 못지않게 인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발명품이다.

존 보이드 던롭JohnBoydDunlop은 지금처럼 공기를 불어넣은 타이어를 최초로 개발했다. 원래 수의사였던 그는 딱딱한 바퀴로 된 자전거를 타던 아들이 튕겨나가 다치게 되면서 부드러운 타이어를 만들기 위해 고무에 바람을 불어넣는 방법을 고안했다. 1888년 처음 등장한 이 자전거용 공기압 타이어가 전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하면서 결국 타이어 브랜드 ‘던롭’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던롭이 만든 타이어는 휠에 고무 타이어를 본드로 직접 부착하는 방식이어서 교체할 때마다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프랑스의 앙드레 미슐랭AndreMichelin과 에두아르 미슐랭EdouardMichelin 형제가 손쉽게 탈부착이 가능한 방식으로 개선했는데, 1891년 자전거 타이어를 시작으로 1895년 자동차용 타이어 개발까지 성공했다. 이 타이어를 푸조 차량에 장착해 자동차 경주에도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경주 내내 타이어가 계속해서 펑크가 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는데, 이런 경험은 1934년 세계 최초로 런플랫 타이어를 발명하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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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4-13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참 다양한 책들을 섭렵하시는군요.

전 어제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
그래픽 노블을 읽었답니다.

원작은 두터워서 치트키를 사용
했습니다만. 그래픽 노블을 읽고
나니 원작이 읽고 싶어지더라구요 ㅋ

라로 2022-04-14 16:45   좋아요 2 | URL
저는 이렇게 쉽게 전달되는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근데 이 책 나름 아는 얘기가 많이
나와서
아니 아는 얘기라기보다
우리 주변에 있었던 제품 얘기가 대부분이라
아주 정감이 갔어요.
재밌어요.^^;

저는 작년인가 읽었었던 것 같은데 <킨>
좀 기대가 너무 컸던지
기대에 미치진 못했지만
그녀의 작가의 말인가를 읽고
막 존경심이 일기는 하더라구요.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은 아니지만
뭔가를 하려면 그렇게 해야지,, 뭐 그런
결심(?) 같은 것이 생긴 것 같긴 해요.^^;;;

레삭매냐 2022-04-14 17:54   좋아요 2 | URL
그래픽노블 <킨> 리뷰를 써야
하는데...

일종의 충격이라 그것 참.

라로 2022-04-14 18:04   좋아요 2 | URL
그래픽 노블로 보면 그럴 수 있겠어요!!
그런 말씀을 하시니 저는 그래픽 노블로
보고 싶어요!!^^;
그 전에 매냐님이 올려주시는 리뷰 먼저 보고 결정 하는 것으로. (너무 약아빠졌나요??^^;;;)
 

예로부터 화재와 재앙을 막아주는 영험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전해지며 경복궁 등 조선시대 궁궐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고증 자문위원이었던 박종화가 화재 예방을 위해 해태 동상을 건립하길 제안했는데, 2천여 만 원에 달하는 건립비용을 ‘해태제과’가 지원했다고 한다.

이 해태상의 해태제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제과전문 기업이자 브랜드다. 아쉽게도 IMF 파고를 넘지 못하고 크라운에 인수되어 주인이 바뀌었지만, 최고最古의 기업이자 브랜드임을 증명하듯 여전히 해태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장수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해태제과가 출발하면서 가장 먼저 만들었던 제품은 의외로 지금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 ‘양갱’이다.

워낙 오래된 제품이라 한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드시는 간식으로 인식되면서 사라지는가 싶었지만, 최근에도 중장년층은 물론 어린아이들 간식으로도 폭넓게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껌은 단맛으로 허기를 달래주고 씹는 재미까지 주는 일종의 국민간식이었다.

맛동산이라는 이름은 제품을 뜯기도 전에 이미 머릿속이 맛있는 상상으로 가득 채워지는 행복감을 준다.

브랜드는 제품의 특징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비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오감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

영강제과는 해태제과의 뿌리가 되었고, 풍국제과는 오리온으로 이어진다.

여전히 인천시는 쫄면, 짜장면, 계란빵 등과 함께 인천에서 시작된 명물로 사이다를 소개하며 우리나라 사이다 발원지로서의 명성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창업자 7인의 성이 모두 달라 일곱 개의 성을 의미하는 ‘칠성七姓’사이다로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소비자들은 때로는 ‘더 맛있는 것’보다 함께한 시간, 그 안에 담긴 경험과 추억 등 ‘감성적 유대감’을 더 중시한다.

객관적 비교가 어려운 개인적 선호가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분야에서 특히 더 그렇다. 이 요소가 결국 브랜드의 힘이다.

브랜드 관리를 못 하면 친근함은 진부함으로 변해 독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이 과정을 이겨내면서 우리가 다 인정하는 장수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카테고리를 지배하는 대표 브랜드가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싸움의 룰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그 브랜드가 가진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해당 카테고리의 기준이 된다.

하지만 제품력만으로는 이렇게 오랜 기간 독보적 자리를 유지하긴 어렵다. 더군다나 코카콜라와 같은 거대 글로벌기업이 끊임없이 시장을 위협했다. 칠성사이다는 시의적절한 브랜드 메시지와 시대 흐름에 맞는 마케팅 캠페인을 통해 시장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근본은 변하지 않는 일관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통해 긴 호흡의 브랜드 자산을 축적해왔다. 사실 이런 효과적 마케팅과 일관된 브랜딩 전략이 오늘의 칠성사이다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아이스께끼를 건네받은 아이는 조바심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혀로 살살 녹이면서 빨아 먹기 시작한다. 안타깝지만 돈이 없던 아이는 그 친구 옆에 바짝 붙어 애타는 목소리로 "한 입만" 하며 맛보기를 청하고, 떨리는 손으로 보물 같은 아이스께끼를 건네면서 "빨아 먹어, 베어 먹으면 죽을 줄 알아"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렇게 서너 명의 아이들이 들러붙어 이 천국의 맛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아끼고 아끼며 빨아먹던 소중한 간식이었다.

아이스께끼는 1950년대 어린이들에게는 최고의 인기상품이었는데, 냉동시설이 어느 정도 갖춰진 이후에나 들어왔을 것 같지만 의외로 일찌감치 대한제국 말미에 이미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으로 전해진다.

1920년대에 신문을 보면 "산과 들이 차츰차츰 엷은 녹음으로 철을 옮겨감에 따라 한겨울에 살을 에일 듯한 추위에 밤도 가는 줄 모르고 팔든 가련한 그들의 장사는 이제부터 아이스크림이나 어름장사로 변해가게 된다"(《동아일보》,1924년4월30일자)며 인천에서만도 예년에 비추어볼 때 200여 명이나 되는 여름 아이스크림 행상이 활동할 것을 예측하고 있으니, 일제 강점기 시절 이미 아이스크림은 꽤 인기 있던 여름 군것질거리로 자리 잡고 있었던 듯하다.

언론에서는 예전부터 아이스크림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대중에게는 1950~60년대까지도 아이스께끼라는 말이 더 일반적이었다. 그보다 더 초기에는 ‘물뼉다귀’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삼강은 자사 브랜드인 쭈쭈바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프리미엄급 시장을 개척하면서 다른 브랜드의 추격도 방어하면서 전체 시장 크기도 키워가는 1등으로서의 전략을 펼쳐간다.

유럽을 돌면서 보았던 제품에는 아몬드가 뿌려져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당시 우리나라 실정에 아몬드는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사람들에게 익숙하지도 않았다. 짐작할 수 있듯이 땅콩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부라보콘은 아직도 건재하는 최장수 콘 브랜드다. 2010년에는 40억 개 매출 기록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이 40억 개를 늘어놓으면 경부고속도로를 800번, 지구를 15바퀴나 돌 수 있는 거리다.

50살이 된 2019년까지 46억 개가 판매되었다.

최근에 해태아이스크림 부분만 분할해 빙그레로 주인이 바뀌면서도 여전히 부라보콘이 ‘해태부라보콘’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 아이스크림 역사에서 갖는 해태와 부라보콘의 상징성과 브랜드 가치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두 개의 브랜드는 부라보콘과 함께 빙그레의 ‘투게더’라고 할 수 있다. 부라보콘이 아이스께끼에서 아이스콘 시대로의 전환을 가져왔다면, 투게더는 떠먹는 홈타입의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어떤 산업 카테고리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으면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브랜드나 제품을 보면 이처럼 한 발 앞선 무모한 결정과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도전이 첫 번째 조건인 듯하다.

월급날 아버지께서 투게더를 사 들고 오시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밥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다. 지금도 이런 추억이 남아 있는 50~60대 중년이 많이 있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맛과 모습이 예전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많은 소비자에게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일 듯하다

2015년을 기점으로 확연한 마이너스 상황이다. 핵심 고객인 어린이 인구가 감소하면서 기본적으로 시장의 정상이 멈춘데다가 수입 아이스크림의 시장 잠식도 있고, 아이스크림 말고 음료 시장의 팽창과도 연관이 있다. 긴 불황의 터널이 시작되면서 신규 브랜드는 종적을 감추고 1970~90년대 출시된 브랜드가 여전히 활약하고 있다.

기업과 브랜드는 소비자 선택과 생존을 위해 계속해서 변신하고 경쟁해야 하는 것이 숙명이다.

해태의 부라보콘이 새로운 아이스크림 시대를 열었다면 새우깡은 우리나라에 스낵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든 주인공이다.

깡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우깡 개발 당시 이름을 고민하던 신춘호 회장이 어린 딸이 아리랑을 "아리깡 아리깡 아라리요"로 부르는 것을 듣고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새우에 깡을 붙여 만든 이름이었다.

50년이 넘은 브랜드이지만 여전히 700억 원이상의 연매출을 올리며 농심의 효자 역할을 해왔는데, 최근에는 가수 비의 ‘깡’ 관련 이슈가 SNS에 퍼지면서 ‘1일 1깡’, ‘식후깡’ 등의 해시태그와 함께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지금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세상에 없던 제품을 처음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완전 독창적 방식으로 호빵을 만들어낸 것이나, 세상에 없던 새로운 빙과류 아이차 등의 사례를 보면 당시 삼립식품은 꽤 혁신적이고 도전적 아이디어로 가득 찼던 기업이 아니었나 싶다.

창업도 어렵지만 수성 역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여러 사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상표등록으로 시작하는 브랜드 보호와 관리에 소홀했던 게 문제였다.

브랜드는 식별(부를 수 있는)과 차별(남들과 다른)이라는 기본적 기능과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가치를 축적하는 도구다.

특히 차별적 가치와 오랜 역사로 쌓아올린 브랜드 자산은 모방과 대체가 불가하기에 요즘에는 기업이 갖는 최고 중요한 자산 중 하나로 인정된다.

브랜드의 독점성을 잃어버리며 위기에 처했지만, 마케팅 캠페인을 통해 기존 브랜드 자산을 이어받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자산적 요소를 더했던, 성공 사례라 볼 수 있다.

특징적인 배불뚝이 항아리 모양은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1970년대 우리 사회 분위기상 아직 디자인의 차별성이나 심미성보다는 비용 관점의 실용성이나 기능성을 더 중시했을 텐데, 분명히 손에 잡기도 어려운 데다가 제작비용은 물론 운반이나 보관에도 더 큰 비용이 들 수밖에 없는 이 불편한 디자인을 차별화와 브랜드를 위해 감수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놀라운 결정이다.

반대 의견을 설득하기 위해 용기 허리춤에 돌출 턱을 만들어 손에 걸리게 하고, 그 아래위로 작은 돌기들을 만들어서 더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했다. 한국에서는 생산하기 어려워 독일에서 용기를 만들고 공수해왔다고 하니, 빙그레가 이 용기 디자인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이제는 오히려 젊은 고객들이 ‘뚱바(뚱뚱한 바나나맛우유)’로 부르며 친근함을 표시한다. ‘오디맛우유, 귤맛우유, 바닐라맛우유’ 등 바나나와는 관계 없는 전혀 새로운 맛의 우유라 해도 항아리 모양의 그 용기에 들어 있는 순간, 뚱바의 형제인 게 인증되고 그것만으로 바나나맛우유에서 가졌던 친근함과 기억, 품질에 대한 인식 모두를 그대로 인정해준다. 디자인을 통한 브랜드 확장의 대표적인 사례다.

코카콜라는 펩시 등 경쟁사의 추격이 거세지면서 차별화를 위해 1915년 공모전을 내걸어 새로운 병 디자인을 채택했는데, 그게 바로 컨투어병이었다. 이 디자인만으로도 약 4조 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생라면에 라면수프를 뿌려서 간식으로 먹는 아이들 모습을 보고 아예 라면과자를 만들었는데, 그게 뽀빠이로 이어졌다. 고소한 과자 사이사이에 들어 있던 달콤한 별사탕의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달콤함 하면 농심의 ‘꿀꽈배기’를 빼놓을 수 없다. 새우깡의 뒤를 잇는 히트 제품으로, 화려하지 않지만 조용히 세월을 버티며 아직도 소비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신제품과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고 시장에 내놓는 작업은 힘겨운 일이다. 오랜 준비와 투자를 바탕으로 시장에 대한 인사이트와 함께 때로는 무모해보이는 도전, 과감한 결정이 필요하다. 또한 당시 소비자들의 기호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욕구를 잘 읽어야 한다. 그렇게 어렵게 태어나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이미 세상에 있는 다른 제품이나 브랜드와 치러야 하는 목숨을 건 경쟁이다. 그렇게 살아남아야 성장할 수 있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자기혁신과 변신을 거듭하며 우리 곁에 함께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 과정을 겪으며 장수 브랜드로 성장한다.

이름 그대로 ‘목숨을 살리는 물活命水’로 알려지자 누구나 체했다 싶으면 활명수를 찾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품의 본질을 잘 반영한 브랜드였다.

모방상표의 난립을 막기 위해 ‘활명액’ 등 유사상표를 선제적으로 등록하기도 했다. 브랜드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을 이 시기에 브랜드 권리 보호를 위해 비슷한 이름을 함께 출원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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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2-04-13 0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익숙한 이름들이 나와 반갑네요. 부라더콘, 새우깡, 투게더 ㅎㅎ

라로 2022-04-14 20:02   좋아요 1 | URL
모나미펜, 삼립빵, 포니 자동차, 안티프라민 등등 아주 많아요.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