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odlesAssociaton,WINA의 통계를 보면 우리 국민 한 명은 일 년에 75개의 라면을 소비하는데, 2위를 차지한 네팔이 57개, 3위인 베트남이 56개인 것을 보면 한국인의 유별난 라면 사랑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이른바 ‘꿀꿀이죽’은 한 미군부대에서 먹다 남은 음식들을 모아 끓인 음식인데 그나마 여기에는 햄 조각이나 소시지 같은 것들도 들어 있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나름 영양식으로 인기가 있었다.

지금에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라면이지만, 삼양라면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모양이나 이름, 조리법 등 모든 측면에서 당시 우리 국민에게 이상한 음식이었다. 꼬불꼬불한 모양과 라면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섬유나 옷감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딱딱한 모습 때문에 아예 플라스틱이 아닌가 하는 오해까지 받았다. 조상 대대로 쌀을 주식으로 삼아왔던 우리에게 밀가루로 만드는 면 음식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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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2-04-13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라면은 무척,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ㅎㅎㅎ

라로 2022-04-14 17:22   좋아요 0 | URL
저 요즘 꽃게라면 먹었는데 넘나 맛있네요!!!ㅎㅎㅎ
 
[eBook] 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3
디노 부차티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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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전쟁, 사막, 기다림, 불확실함 등과 같은 무척 지루하고 답답한 소재들이 은유로 시작해서 은유로 끝나는 한편의 인생 드라마. 우아하고 아름다운 문장은 그 모든 과정을 섬세하고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죽음을 마주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는 부차티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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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백양을 있게 만든 대표상품이 바로 흰색의 민소매 러닝셔츠다. 백양이 1958년 아염산소다를 활용한 표백기술을 국내 최초로 개발한 후 나온 상품인데, 이로 인해 비로소 우리 국민은 빨았는지 안 빨았는지 모를 누런색의 애매한 내의가 아닌 눈처럼 흰 깨끗한 속옷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960년대부터는 해외 수출로도 눈길을 돌린다. 우리나라 정부는 1960년대 들어 외화 획득 등을 위해 기업들에게 "수출만이 살 길"이라며 해외 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유했고, 백양 역시 이 시책에 호응했다. 백양의 첫 수출 대상국은 일본이었는데, 미쓰비시가 백양의 품질을 보고 먼저 수출 제안을 해왔다. 일반적이라면 환영할 만한 제안이지만, 한 회장은 아직 품질 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 품질을 속여서 수출해봤자 회사에도 좋지 않지만, 나라에도 망신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동안의 요리 실력 밑천이 들통 나기 전에 주부들은 미원을 부엌에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미원이라는 이름도 ‘맛의 근원’이라는 아지노모도의 의미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고, 신선로 마크와 패키지 디자인 역시 아지노모도와 구별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선발주자의 성공이 있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경쟁 제품이 등장할 차례다.

어느 제품도 미원을 넘어서진 못했지만, 이 경쟁을 통해 소비자들은 즐거워했고, 제품 경쟁력 또한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이 중에 백미는 ‘미풍’과의 경쟁이었다.

삼성그룹을 일군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세상에서 내 맘대로 안 되는 세 가지는 자식 농사와 골프, 그리고 미원"이라고 푸념하기도 했다.

종합 조미료 시장에서 45년이 넘게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조미료의 대명사인 다시다는 그렇게 미풍에서 얻은 실패를 딛고 시작되었다.

"따라하지 말 것."
"천연 지향적일 것."
새로운 조미료 개발을 시작하면서 이병철 회장이 주문한 내용이다. 1차 조미료 전쟁에서 패하면서 얻은 시장의 개념을 바꾸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는 사업가의 본능적 판단이었다.

다시다의 성공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브랜드 이름도 크게 한몫했다. 미원, 미풍 등 한자 브랜드 일색이었던 당시 시장에서, "입맛을 다시다"에서 출발한 우리말 이름은 새로움과 친근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기업이 하고 싶은 말을 담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 입장에서 맛있는 음식을 보면 반사적으로 나오는 본능적 행동을 브랜드 네이밍에 반영한 것도 당시로서는 꽤 신선한 접근이었다.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장수하는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제품력뿐 아니라 적절한 마케팅 활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혹시라도 어머니 손맛의 비밀이 미원과 다시다였음을 깨닫고 실망하지는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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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제품이지만 품질에 자신이 있다면 가장 먼저 해볼 일은 핵심 고객층에게 상품을 경험시켜주는 것.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샘플링이다.

"보고는 몰라요, 들어서도 몰라요 / 맛을 보면 맛을 아는 샘표간장"

"할머니 허리 굽은 것은 장독대 탓, 어머니 허리 안 굽은 것은 샘표 덕

왜간장은 메주를 쓰는 조선간장과 달리 콩 단백질을 분해해 만든 아미노산액에 간장 원액을 섞어 만드는 방법으로 생산했는데, 상대적으로 숙성기간이 짧고 비용이 덜해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일반적으로 개량간장은 다시 양조간장, 산분해간장, 효소분해간장, 혼합간장 등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를 닦는 것을 왜 양치養齒라고 할까? 옛날에는 치약 이전에 소금으로 이를 닦았다지만 소금도 귀한 것이었기에 그전에는 그냥 물로 입을 헹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때로는 가는 모래를 소금 대신 쓰거나, 나뭇가지를 얇게 만들어 지금의 이쑤시개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이때 버드나무 가지가 주로 쓰였는데, 끝을 솔처럼 뭉개서 이를 닦기도 했다. 여기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뜻하는 ‘양지楊枝’에 행위를 가리키는 접미사 ‘질’이 더해져 ‘양지질’로 칭하던 말이 점차 세월이 흐르며 개념이 변해 치아를 닦는 일이니까 ‘양지’에서 ‘양치’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전 국민이 치약으로 이를 닦기 시작한 지는 이제 60년 정도 된 셈이다.

소금 양치질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준 주인공이 ‘럭키치약’으로, 1954년 ‘락희화학’에서 만든 최초의 국산 치약이다.

칫솔은 이미 1952년부터 만들어 팔고 있었다.

최초의 국산 제품이었기에 당당히 한글로 ‘럭키치약’이라고 써서 자신 있게 시장에 내놓았지만 처음에는 국산 제품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에 "미국 원료, 미국 처방, 독일 기계로 만들어 품질이 미제와 똑같은 럭키치약"이라는 광고를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역시 이때는 ‘미제’라는 말이 먹혔는지, 본격적으로 럭키치약의 질주가 시작된다.

럭키치약 덕분에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집집마다 치약과 칫솔이 함께 놓이기 시작했다.

치약을 팔기 위해 TV·전축·미싱·라디오 등이 경품으로 등장했는데, 그중에 우일화학은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걸기도 했다. 치약에 다이아몬드까지 경품으로 줄 정도라면 당시 판매 경쟁이 얼마나 심했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럭키치약은 앞서 살펴본 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LG그룹을 낳은 훌륭한 산파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페리오와 죽염 등 또 다른 장수 브랜드의 기원이 되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양치질을 보급함으로써 전 국민의 치아건강에 이바지했으니, 이제부터라도 아침저녁으로 이를 닦을 때 가끔씩은 럭키치약을 떠올릴 듯하다.

난닝구보다 한 세대 더 앞선 단어로 ‘메리야스’가 있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한때는 내의를 만드는 회사 이름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던 말이었다. 러닝셔츠를 비롯한 남자들의 속옷 상의를 가리키던 이 말은, 그 유래를 찾다보면 뜻밖의 사실에 놀라게 된다. 우선 일본말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저 멀리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스페인어 ‘메디아스Medias’ 혹은 포르투갈어 ‘메이아스Meias’가 일본을 통해 전해지면서 일본식 발음이 더해져 지금의 메리야스로 불리게 되었다. 게다가 이 말은 상의나 내의와는 관계가 먼, ‘양말’ 또는 ‘스타킹’에 가까운 뜻을 가지고 있다. 어쩌다 지구 반대편 스페인에서 건너온 말이 그나마 원래 뜻과도 다른 말로 쓰이게 된 것일까? 구한말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식 복식과 1940년대부터 시작된 국내 토종 내의 기업들의 역사를 들춰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실을 가로와 세로로 교차시켜 만든 ‘직물’ 대비 편물은 신축성과 탄력성이 좋아서 잘 늘어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크고 작음의 ‘대소’ 앞에 ‘없다’는 뜻의 ‘막莫’을 붙여 ‘막대소莫大小’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크기에 관계 없이 줄었다 늘었다 한다’는 이 말은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어 메리야스 공장 이름에 ‘OO막대소’식으로 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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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2-04-13 0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군요!

라로 2022-04-14 16:47   좋아요 0 | URL
이 책 아주 재밌어요. 종이책이면 읽으시라고 보내드리고 싶은데 전자책이라.. 아쉽
우리가 일상에 접했던 다양한 제품들의 이야기를 ‘좀 더 심도있게 다룬 책이라 그런지
무척 재밌었어요.
 

어떤 브랜드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취향과 스타일, 관심사는 물론 경제 상황이나 특정 사회 이슈에 대한 태도 등 그 사람의 거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

가벼운 선택이었을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사용하는 모든 상품과 브랜드는 나의 생활모습과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개인에게 통용되는 이 원칙은 사회적·시대적으로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어떤 제품이 새로 만들어지고, 어떤 서비스와 상품이 인기를 얻는지, 어떤 브랜드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지 등을 보면 당시 경제상황이나 산업기술의 발전 정도, 시장경제의 성숙도는 물론 사회적 소비취향이나 생활방식 등 사회·경제·문화·정치에 걸친 우리 일상 모습 전부를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우리 근대화 역사가 서양의 산업기술, 상품 등을 통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생활문화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거꾸로 우리의 생활모습과 가치관, 사고방식 등이 투영된 상품과 브랜드가 세계 시장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과 생활 모습을 바꾸어 놓는 사례들도 어느덧 많이 존재한다.

제품은 필요한 기능을 제공하지만 브랜드는 욕망까지 담고 있다.

시장에 나와 있는 제품들 대부분이 그렇게 어느 순간 옛 모습은 사라지고 때로는 완전히 다른 제품으로 뒤바뀌기도 하지만, 브랜드 속에 그 DNA를 남겨 세대를 만들고 그 종을 보존하며 진화한다. 제품의 생애는 유한하지만 브랜드는 불사의 생명을 가질 수 있다.

개항과 함께 자전거, 안경, 사진기, 망원경, 펜, 양복, 화장품, 양장 등 신식 문물을 상징하는 상품들이 조선인의 눈길을 끌었다.

1905년에는 조선에 직접 연초 공장이 설립되고, 여기에서 ‘이글(매표)’담배가 생산된다. 최초의 ‘메이드 인 코리아madeinKorea’ 담배 브랜드였다.

초록색의 팔각형 케이스로 기억되는 ‘유엔성냥’이 가장 유명하다.

지금은 기억 저편으로 아련히 사라진 제품이 바로 고무신이다. 192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고무신 제조업체 ‘대륙고무’가 ‘대장군’ 고무신을 선보인다. 당시로서는 최신식 하이패션상품이었는지, "대륙고무가 고무신을 출매함에 있어 이왕純宗(순종)께서 이용하심에 황감함을 비롯하여 여관女官 각 위의 애용을 수하야"라고 황제까지 들먹여 가며 신문광고를 집행하기도 했다.

산업의 발전과 시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브랜드가 얼마나 치열하게 자기변신을 하고 트렌드에 맞춰 지속적 발전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사례들이다.

1960년대 후반을 지나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나라 경제와 산업은 비약적 발전기를 맞이한다. 오랜 역사를 지닌 장수 브랜드 중 대부분이 이 시기에 태어난다.

앞으로 살펴볼, 지금까지 사랑받는 수많은 장수 브랜드들이 대부분 1960~70년대 생들이다.

1980년대부터는 광고나 마케팅 기업의 발전으로 오히려 단명한 브랜드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기술 발달로 나타난 첨단제품들은 반대로 더 빠르게 발전하는 신기술에 의해 사라지는 경우들이 잦았다. 삐삐, 씨티폰, 천리안, 하이텔 등 PC통신, 컴퓨터나 라디오카세트 등의 전자제품, 자동차 등 기술발전이 빠르고 첨단 영역일 수록 그런 경향이 많았다.

브랜드는 단순한 상품 이름이 아니라 그 얼굴은 물론 의미와 경험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생명체나 다름없다.

지금의 두산은 중공업 중심의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초기에는 오비맥주를 비롯한 식음료와 생활소비재, 유통 중심이었는데, 그 첫 시작은 의외로 화장품이었다.

분가루라는 설명을 듣고 찾는 사람이 많은가 물었더니 할머니는 "예뻐지기 싫어하는 여인도 있나?"라고 대답했다. 어찌 보면 화장품 사업의 본질을 명쾌하게 설명한 한마디인데, 이 말을 들은 정정숙은 부업 삼아 백분을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1920년에는 ‘박朴’ 자를 동그라미 안에 넣어 만든 상표와 함께 특허청에 정식상품으로 등록, 국산 화장품 1호라는 기록을 갖게 된다.

박가분 이전에 화장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쌀즙을 말린 가루를 물에 개어 바르던 분백분 등이 있었는데, 접착력이 약해 얼굴에 잘 붙지 않는데다가 비린내까지 풍겼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여성 미용 상품의 광고모델이라고 하면 당대 아름다움의 기준을 적용하기 마련이니 당시 흰 얼굴이 어느 정도 유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아름다움을 좇는 인간의 욕망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반복되는가 보다.

"조선 부인의 얼굴에 맞도록 만든 새로운 제품, 절대로 납이 안 든, 분쇠독 없는 고급원료와 고상순결한 향료로 만든 제품"

장 담그기는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 중 하나였고, 장 담그는 날이 정해지면 불경스러운 일을 피하며 조심했다. 장 담그는 날 아침에는 목욕을 다시 하고 정갈한 마음과 몸으로 임하는 것은 물론 장 담그는 동안에는 음기의 발산을 막는다는 이유로 한지로 입을 막기까지 했다. 장맛 좋기로 소문난 집은 그것만으로도 자랑이자 자부심이었다. 장은 그만큼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식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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