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이든 대중이든 사회든 간에 대상에 대한 짐작이 애매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더욱 그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일을 목격하고 그 일이 설마 사실일 리가 없다고 생각되면, 그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일을 더더욱 믿고 싶게 만든다.

들판 전체가 그들을 속이고 밀고하고 비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방탕하다고 자책했으나 그 웃음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기력뿐이었다.

사이가 좋았던 시절 그는 아내 마리로르와 마주칠 때면 고정된 호칭 대신, "찬란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유년의 무의식, 두려움, 연대감에서 오는 이해는 성인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투르역에서 파니의 향수 냄새를 처음 맡은 후 뤼도빅에게는 이 세상에 여성용 향수는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사랑의 징후인 독점욕이 생겼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까끌까끌한 뺨의 감촉, 소리는 잘 들리지 않지만 내용은 너무나도 명백한 간헐적인 소근거림, 동시에 느껴지는 절박함과 두려움, 그런 것들이 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 차는 브랜드가 어디 건가요? 질문을 받은 마르탱은 얼굴이 거의 홍당무가 되어 ‘립톤’이라고 대답했다.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들이 때때로 그러듯이 제어할 수 없는 격렬한 충동에 떠밀렸던 것이다.

필립은 부정을 저지르는 남편을 둔 여자들이 ? 설사 그런 정황을 모르고 있다 해도 ? 소녀처럼 유치한 행동을 하곤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고자질을 한 이들은 ? 거기에는 그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 끝이 좋지 않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았다.

그 청년의 삶을 선물 같은 것으로 만들어 주려는 생각을 갖고 그를 지켜보아 준 사람은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 비해 지나치게 젊고 책임질 능력이 없는 연인을 잊으리라.

그들의 눈길은 그들의 육체만큼이나 긴밀하게 얽혀 있었지만, 밤에 그가 자신과 그녀가 피울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금지된 잘못을 저지르는 청소년처럼 목소리를 낮출 때면, 두 사람은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필립은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비밀을 지켜야 해서 화가 나 있었고, 마리로르는 사람들을 덮어놓고 비꼬는 버릇이 점점 더 심해졌지만,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누군가는 자신이 보기에도 좀 우스꽝스럽고 억눌려 있고 보잘것없는 또 다른 앙리 크레송 자신이었다.

그 불가능한 상황, 그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욕망이야말로 그녀의 연애사에서 가장 관능적인 기억이었다.

삶과 작품의 마디마디에 고인 생각을 풀어낸 『내 최고의 추억과 더불어』에는 소설이 담아내지 못한 ‘사강다움’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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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마음의 심연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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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강의 책을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당장 내려놓으라고, 그녀의 다른 책을 선택하라고 하고 싶다. 어떤 묘사는 좋다는 느낌이 들어 밑줄도 그었지만, 깊이가 느껴지지 않고 긴장감도 없다. 그나마 미완성 소설로 끝나서 다행. 처음부터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지 너무 뻔한 스토리는 읽는 즐거움을 앗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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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2-03-21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 때문에 사강 의 한달후 일년후를 집었다가 무미건조하게 읽어가지고 이후 관심이 멀어졌어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드라마때문에 읽고싶었는데 그때 반짝 관심갖다가 독서로 이어지질 않았고요;;

그러고보면 다른 작품들에 은근 영향을 준 작가는 맞는데ㅎ 제딴엔 딱히 이유를 알수 없어서 어떤 영향을 주는건가 궁금하고 그렇긴하네요

라로 2022-03-21 18:27   좋아요 1 | URL
저도 좀 많이 실망했어요, 이 책. 시간 좀 아까왔구요.^^;; 이왕 읽었으니까, 더구나 길지도 않고, 그래서 쭈욱 읽었는데 왜 사강에 열광하는지 잘 모르겠고요, 아마도 19세의 나이에 등단을 했기 때문에 어떤 아이콘 화가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어떤 자유로움에 대한 영감을 주지 않았을까요? 아무거나 쓰면 되겠다는? (아, 제가 넘 심했나요?^^;;;)가끔 괜찮은 부분이 보이긴 하는데 너무 짧고,,, 저도 앞으로 또 사강의 책을 집어 들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은 느낌.^^;;

곰곰생각하는발 2022-03-21 18:52   좋아요 2 | URL
저도 사강은 왜 유명한지 잘 이해를 못하는 1인입니다. 그냥 그래요. 딱히.. 뭐가 훌륭한 점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이름이 전부인 작가 같기도 하고...

라로 2022-03-24 15:06   좋아요 0 | URL
곰발님도 그렇죠!! 저도 넘 평범한데,,, 19살 때의 작품에 비교해서 잘은 모르지만 다른 작품들이 더 나아진 것이 안 느껴져요.^^;;
 

로지라는 캐릭터는 내가 오래전부터 궁리하던 인물이었다. 그녀에 대해 쓰고 싶은 생각은 진작에 있었지만 마땅한 기회가 나지를 않았다. 그녀가 자리를 잡을 적당한 배경이 통 떠오르지 않아서 아무래도 틀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작가의 머릿속에 쓰여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인물은 집착이 된다.

생각이 끊임없이 그것으로 회귀하면서 상상력이 점차 그것을 키워 가는 동안 작가는 누군가 그의 마음 한편에 살면서 그의 상상에 순종하면서도 그와는 동떨어진 기이하고 고집스러운 방식으로 다채롭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특별한 기쁨을 누린다.

하지만 일단 종이 위에 정착하는 순간 그 인물은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다. 작가는 그 인물을 잊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몽상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 일시에 잊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할 따름이다.

나의 메모가 시사하듯이 처음부터 나는 오랫동안 존경을 받아 온 작가라면 그 명성이 아직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작고 예민한 모험심과 갈등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았다.

나는 열여덟 살 때 『테스』를 읽고 젖 짜는 아가씨와 결혼하리라 결심할 만큼 그것에 열광했지만, 대부분의 동시대인들과 달리 하디의 다른 작품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문체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가졌던 관심은 한때 조지 메러디스와 이후 아나톨 프랑스에게 반짝 가졌던 관심을 넘어선 적이 없다.

셔벗(두 번째 아내를 맞이할 기회를 주는 음식)

숙녀들이 응접실로 물러갔을 때 나는 우연히 토머스 하디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억하기로 그는 작은 체구에 흙처럼 거친 얼굴의 남자였다.

풀을 먹인 하이칼라 셔츠의 야회복 차림이었는데도 이상하게 흙과 닮은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유쾌하고 온화했다. 그때 나는 그가 수줍음과 자신감이 절묘하게 조합된 사람이로구나 생각했다.

듣자 하니 작가 두세 명이 앨로이 키어라는 인물이 본인을 겨냥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것은 그들의 오해다. 이 인물은 여러 가지가 복합된 초상이다. 외모는 한 작가에게서 따왔고, 상류 사회에 대한 집착은 다른 작가에게서, 활력은 세 번째 작가에게서, 운동 능력의 자긍심은 네 번째 작가에게서, 그 외에 많은 부분은 나 자신에게서 빌려 왔다.

나는 나 자신의 흠결을 돌아보는 고약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나 자신에게서 자조할 수밖에 없는 면모를 많이 발견하곤 한다.

신이 그러하듯 작가가 본인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인물을 창조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저자로서는 작품에 자신의 분신을 실어 영원히 떠나보내는 일인데, 그것이 평론가의 미어터지는 책상과 서점의 빽빽한 책장 어딘가에 파묻힐 공산이 크다는 생각을 하면 참 가슴이 미어지는 노릇이다.

경험은 그에게 행동 지침이 된다. 어떻게든 공적 인물이 되어야 한다. 대중의 시야 안에 머물러야 한다. 인터뷰를 하고 사진이 신문에 실리도록 해야 한다. 《더 타임스》에 편지를 쓰고, 모임에서 연설하고,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만찬 후 연설을 해야 한다. 출판사들이 광고하는 책들을 추천해 주어야 하고, 적합한 시간과 적합한 장소에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절대 순순히 잊혀서는 안 된다. 한 번의 실수로 큰 대가를 치를 수 있기에 힘겹고 불안한 노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읽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책을 널리 세상에 읽히려 백방으로 애쓰는 작가를 친절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잔혹한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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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제대로 볼 줄 몰랐고 가질 줄도 몰랐다.

때때로 자신이 만들어 낸 감상적이고 소소한 의무를 제외하면 그는 어떠한 의무도 진 적이 없었고, 아버지의 돈을 펑펑 쓸 권리 외에는 그 어떤 권리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는 태평하고 안정된 인간이었을 뿐 행복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순조롭게 흘러가던 안이한 삶으로부터 뽑혀져 나와 혼란의 한가운데 내동댕이쳐졌고, 그 안에서 절망의 세월을 보내면서 어쩔 수 없이 고독을 받아들인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애정에 굶주린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불구자 같은 존재로 여겨 왔었는데, 그 사고로 인해 공식적으로 불구자가 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서 모든 것을 앗아 갔어요. 내가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까지요. 그 이후 나는 줄곧 굴욕감에 시달리고 있어요.

난 피아노를 잘 칠 줄 몰라. 사실 음악에 대해 잘 몰라…… 그저 몇몇 작곡가들을 사랑하는 것뿐이야……."

파니는 그를 밀어 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를 손으로 붙잡지도 만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자연스럽고 아련한 그 무엇, 감동적이고 고요한 그 무엇,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듯한 느낌을 이리저리 옮겨 놓는 것은 그의 입술뿐이었다.

파니는 상대의 남성성과 힘이 행사하는 압도적인 매력에 얼떨떨함과 감사 그리고 때 이른 소유욕이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거기에 정신적 사랑과 만났을 때 쾌락과 하나가 된 사랑이 주는 그 눈부신 공감이 더해졌다.

심지어 그녀의 가벼운 결점조차도 무슨 선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고마워했다.

그는 사랑의 징후에는 무지했지만 쾌락의 징후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파니와 뤼도빅 사이에 공감과 공모의 눈길이 오간 다음 파니가 짜증을 내는 것을 보고 필립의 의심은 거의 확신으로 바뀌었다.

예의를 차리고 있긴 해도 그녀가 자신을 하나의 정물 같은 존재로, 정착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여기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 자신조차 스스로를 그렇게 여겼다.

그녀는 막연히 자신이 그에게 속해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감동해 어쩔 줄 모르는 그를 보고 놀랐다. 뜻밖의 애정이 치밀어 올라 목이 죄어들었다.

처음에 파니는 뤼도빅을 딱하게 여겼으나, 이제는 자신이 딱하게 여겨졌다. 요컨대 책임감 없는 젊은 남자와 엮여 버린 자신, 남편 없이 스스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자신, 따뜻한 마음이라고는 없는 이 부르주아 집안에 귀중한 휴가를 바쳐 버린 자신이.

사랑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 내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사랑을 감출 줄 모르는 분별심 없는 남자를 사랑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편 파니는 그에게 욕망을 느끼며 떨고 있었다. 그의 매력적인 피부, 내리깐 긴 속눈썹, 불안한 눈빛, 핸들 위에 놓인 보기 좋고 커다란, 신기할 정도로 사내다운 손, 이제 그녀는 그 손이 얼마나 능숙하고 사려 깊은지 알고 있었다…….

앙리 크레송은 어째서 관광객들이 판에 박힌 것들을 한사코 보고 싶어 하는지, 따분한 데다가 뭐가 너무 많이 달린 정육면체 건물에 불과한 노트르담 대성당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앙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상드라의 꼴을 좀 생각해 봐…… 얼굴이 너무 익어 물러 터진 토마토 같고, 익히지 않은 말 뒷다리 같잖아…… 게다가 후식이 나올 때쯤에는 기절을 할지 누가 아냐고……! 아, 안 돼, 아, 안 돼, 아, 안 된다고! 그럼 파니는? 파니가 손님들을 맞기로 했잖아, 안 그래? 라 크레소나드에서 아름다운 여성이 손님들을 맞을 거라고 친구들한테 장담했단 말이야!" 그런 다음 그는 재빨리 이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상드라에게는 다른 장점들이 있지……."

파니가 충격을 받고 항의했다.
"자기 아내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우선 난 손님들을 맞을 권리를 기꺼이 부인께 돌려드리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사용한 단어 말인데요……."

"하지만 그건 전혀 나쁜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앙리가 사과했다. "아시다시피 사실 남자들은……." 그는 상어의 웃음 같은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는 정말이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가 자기 아내를 두고 말 뒷다리 운운하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익힌 것이든 날 것이든 말입니다. 경솔한 말일 수는 있지만 나쁜 뜻에서 한 말은 아닌 것이……."
"전 못 들어봤어요." 파니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익혔든 안 익혔든 간에 남자가 자기 아내를 말 뒷다리에 비유하는 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고요."

그는 자기 아버지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앙리는 아내에 대한 의무감과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격렬한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앙리는 자신이 파니의 나이에 대한 걸 잊고 있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어쨌든 내 눈엔 젊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쾌활하고 매혹적인 여인이오. 정말 매우 몹시 매혹적이지……."

"세상에." 마담 아멜은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다. ‘미친 건 바로 이 사람이잖아!’

"원래 아내가 바람피운 얘기는 오쟁이 진 남편이 제일 나중에 알게 되는 거라오. 오, 미안하오…… 파니가 날 유일하게 비난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바로 내 말버릇이라오."

"익히지 않은 말 뒷다리라니, 그런 표현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 그녀는 딱한 앙리 앞에 화가 나 서 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앙리는 사실 그 표현이 경멸에 찬 것이 아니라 경솔한 것뿐이라고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았던가. 그 장면을 떠올리자 그녀는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내가 사랑한 사람은 남편 캉탱뿐이었어." 파니가 말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나를 보호해 줘서 나는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지…… 이제 난 혼자 살아. 돈도 그리 많이 벌지 못해. 하지만 돈보다 더 필요한 건 보호받는 느낌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녀는 『사회적 소외』, 『정신의 법칙과 질병』 등 책 몇 권을 사서 카페에 앉았다.

여전히 남편인 뤼도빅을 마리로르는 아무 가치 없는 물건처럼 취급했지만, 파니 자신은 새 연인의 매력을 알고 있었다.

구겨진 채 의자에 걸쳐져 있는 그 긴 연분홍 가운처럼 그를 기다려 주는 것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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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너무 짧은 잠옷 소매 밖으로 나와 있는 자신의 손목이 보였다. 과거의 우람한 팔뚝이 아니라 아이처럼 뼈가 앙상한 손목이었다. 집에 돌아온 후 느껴 온 외로움과 두려움과 환멸감의 정체가 마리로르의 설명으로 이제 밝혀진 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똑똑해도 남자들은 미묘한 뉘앙스 같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요즘은 아름답고 독창적인 물건들이 유행하지 않는 것 같아."

앙리 크레송은 잠에서 깨면서부터 기분이 저조했다. 가라앉은 기분은 그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그녀는 바를 청소하고 스툴 두 개를 다른 곳으로 치워 버렸다. 마치 사람이 앉도록 만들어진 그 나무 의자들이 원하지 않는 목격자가 될까 봐 두렵다는 듯이.

뭘 원할지 알 수 없었다. 남자들은 변덕스러운 종족이었다. 때로는 취향이 점점 더 괴상해지기도 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칭찬은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따분하게 들렸다.

"한 침대를 쓰는 것을 거부한다."라는 말은 그녀의 직업상 가장 끔찍한 말이었다.

"잘 아시겠지만 머리가 나빠서도 안 되고 신경이 너무 예민한 여자도 곤란하오."

그녀의 펜 끝에서 여자들의 이름이 봄에 나무에서 덜 영근 사과가 떨어지듯이 떨어져 내렸다.

뤼도빅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침묵뿐이었다.

예쁜 얼굴을 하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육체적으로는 우아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저속하기 짝이 없는 여자, 그 고르고노스13)를 반드시 때려눕혀야 했다.

발자크의 인물들은 종종 감상적이었고 좀 비겁해 보였다. 희생자와 후레자식과 야심가와 운 좋은 얼간이들로 이루어진 내적 재난의 세계, 포기의 세계가 거기 있었다.

필립에게는 돈이 없었고, 앙리가 보기에 가난은 대상포진이나 소아마비 같은 끔찍하고 딱한 질병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고 평판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그녀가 터득한 진리 중 하나였다. 누구에게든 신용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남자들을 위해서는 육체를, 여자들을 위해서는 마음을 돌보는 셈이었다.

실비아 아멜은 언제나 냉정한 표정과 차분한 태도 그리고 친절한 웃음을 내세웠는데, 그 웃음은 대개는 부자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끝장을 내거나 매수할 필요가 있을 때면 가난한 이들에게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순수함은 꾸며 낸 것이거나 정신적 나약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뤼도빅은 뒷좌석에서 짐 사이에 불편하게 끼어 앉은 채 앞에 앉은 파니의 우아하고 평온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옆얼굴과 목의 곡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운 건 아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퍼서였어.

"하지만…… 남자들은 잘 울지 않습니다." 앙리가 아이처럼 방어적인 어조로 말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듣기 좋은 말만 하려 드는데 그 두 사람은 누군가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이 별난 부르주아들의 성격에는 정상을 벗어나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시간과 시대와 도덕을 초월한 것으로 그녀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부르주아에 관한 일이었다.

이 저택과 청년 사이에는 부조화와 침묵만이 있을 뿐이었다. 괴물 같은 인물들이 서로 대치하는 모리아크의 소설보다 상황이 더 나쁜지도 몰랐다.

방문은 크레송가의 새 신랑 신부에게 맞추어 최근 새로 칠한 듯했다. 그들의 아이가, 아이의 아이가 결혼하면 그때마다 다시 새로 칠해질 것이다.

아무도 나서서 방문을 두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무기력한 모습에 짜증이 난 앙리가 팔을 들어 문을 한 차례 주먹으로 쾅 쳤다.

칼처럼 베일 것 같은 침묵이 모두를 얼어붙게 했다.

달라진 나날들이 펼쳐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시간, 곧 그와 당신의 관계가 사라진 시간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제 당신을 삶에 연결해 주는 것은 다른 어떤 존재, 다른 어떤 사건, 다른 어떤 행복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 생겨나 삶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엘뤼아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속하겠다는 힘겨운 욕망’뿐이다.

그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당신 자신에 대한 애도로, 기억에, 심지어 행복한 나날에 대한 기억에도 휘둘려서는 안 된다. 당신 자신에 대한 이 음울하고 지속적인 혐오는 무슨 고통을 만들어내는 기계처럼 당신으로 하여금 밤마다 이불 속에서 짐승처럼 신음하게 만들고, 낮이면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참게 만든다. 당신은 저항하고 싸운다. 그러다 보면 울적함이 무슨 눈가림이나 당연함처럼 당신을 도와준다. 당신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는데, 그런 사람을 막연하게 존중하는 분위기 덕분에 존중을 받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의 슬픔과 당신의 거절에 충분히 관심을 갖는다면, 당신의 거절을 지나치게 모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상처 입은 가슴에도 피가 뛰고 있음을 안다면, 그 모든 것이 다시 아름다운 가을날 오후 테라스로 통하는 열린 창문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뭇잎이 당신의 뺨에 와 닿을 때 과거가 따귀를 후려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가 갑자기 부인할 수 없게 되어 버린 행복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 행복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 간에.

욕실에는 오래된 대형 욕조가 있었다

마리로르는 어머니보다 5센티미터 정도 작았는데 마리로르로서는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가족 관계 같은 정형화된 관계 속에 반드시 인간성이나 진실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엄마도 아시잖아요. 병의 경과를 예측하고 질문을 던지면서 삼 년을 보내고 나면 어떤 진단이 내려진다 해도 확실한 게 아니라는 걸요……."

‘누구보다 엄마한테는 할 수 없겠지.’ 파니가 주저도 서글픔도 없이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에 자기 딸을, 딸에 대한 모성애를 포기하지 않았던가.

파니는 태어나면서부터 온정이 거세된,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인 마리로르의 얼음장 같은 마음을 놀라워했고, 마리로르는 어머니의 선의와 감수성과 따듯한 마음과 좋은 품성을 놀라워했다.

저녁 공기와 함께 어머니의 향수 냄새가 훅 끼치면서, 그 냄새가 감돌던 우울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 냄새를 맡으면 언제나 방치되어 자랐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 울적한 느낌이 남곤 했다

‘의상실에서 일하면서 성모 마리아처럼 사는 우리 엄마는 이제 어떻게 될까? 미래도 없고, 인간관계도 없는데!’

‘이제 저 애는 어떻게 살려는 걸까? 저 나이에는 용감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 수 있는데.’

성공과 돈을 좇느라 귀중한 젊음의 시간을 잃고 있는 마리로르에 대해 그녀는 한순간 책임감을 느꼈다.

파니와 뤼도빅이 함께 정원이나 거실을 거니는 것이 그에게 의미심장하게 여겨졌다. 전혀 현실적인 근거가 없었음에도 욕망이 그런 느낌을 들게 했고, 질투가 그것을 부채질했다.

앙리 크레송은 거칠고 소유욕이 강하고 여러 면에서 무자비한 사내로, 첫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결핍감과 슬픔 이외에는 스스로의 감정을 참고 견딘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돌연 질투에 휩싸였는데, 그것을 내색할 수도 드러내 말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자신들이 괴물이라는 것을 털어놓지 못하는, 괴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시안들뿐이었다.

사실 다른 이들을 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사랑을 의무로 느끼고 순수를 권리로 여기는 사람들은 삶 속에서 막연히라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이곳에서는 일가 전체가 고의적으로 소통 불능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그것이 그녀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각자 자기 재산과 권위를 틀어쥔 채 상대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이곳에는 그런 불통의 기운이 떠돌고 있었고, 불어오는 초원의 바람이 이따금 그것을 흩어 놓을 뿐이었다.

그는 자기 말이 예의에 맞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교계 신사처럼 웃음을 곁들였는데, 그 웃음 때문에 오히려 저속해 보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저속성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감추고자 할 때에만 드러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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