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덧붙이자면, 쌍화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야 비로소 식약처 인증을 받은 일반의약품이다. ‘쌍화’라는 이름 앞뒤에 무언가를 덧붙여 ‘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제품들은 쌍화차 유의 혼합음료라고 하니, 기왕에 몸을 위해 마실 생각이라면 정확히 쌍화탕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제품을 마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단, 엄연한 의약품이니 과다복용 등으로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하길 바란다.

최수부 회장이 IMF 시절 닥친 부도 위기를 극복한 후 "시련은 산삼보다 더 좋은 보약"이라고 남긴 명언처럼, 각자 시련을 이기고 살아남은 거북표와 솔표가 나란히 한방 의약품의 과학화·대중화·세계화를 통해 계속해서 국민의 건강 지킴이가 되어주길 기대해본다.

"외출 전 안티푸라민을 코 밑이나 코 안쪽, 입술, 손 등에 얇게 펴 바르면 코로나19를 예방할 수 있다?"
온 세상이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와중에 이런 황당한 글이 인터넷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안티푸라민의 냄새를 세균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이 약을 발라놓으면 세균 침투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로 팩트를 확인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오랜 기간 동안 국민 상비약 자리를 지켜오며 많은 사람들을 다양한 통증으로부터 해방시켜준 공로를 인정하는 마음에 믿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 1970~80년대까지도 우리 어머니들은 안티푸라민을 만병통치약쯤으로 생각하고 온갖 자질구레한 통증치료에 동원했다. 멍든 데, 삔 데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에 발라주고, 코감기로 고생하고 있으면 코 밑에 발라주고, 벌레에 물려 가려워하면 벌레 물린 곳에 발라주는 식이었다.

브랜드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창업자와 기업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된다. 맨 바닥에서 빈손으로 시작해 큰 사업을 일구고 신상품을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것도 어렵지만 여러 고객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키며 오랜 기간 사랑받는 장수 브랜드로 성장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기업인 중에서도 유일한 박사는 매우 독보적이다. 그의 일대기와 기업가 정신을 좇아가보면 이처럼 훌륭한 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인물은 우리나라 기업사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 정도다.

미국 굴지의 회사에서 동양인이 회계사로 일하며 이런 고위직을 제안받았다는 것에서부터 그의 비범함이 드러나는데, 그가 이 제안을 뿌리치고 사업을 선택한 것은 하루바삐 경제적 기반을 갖춰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학자금과 생활비 마련을 위해 중국인과 동양인을 대상으로 중국에서 들여온 손수건, 카펫 등을 판매하며 돈을 벌었던 경험이 있었을 뿐 아니라, 미시간 대학 재학 시절 그는 한중 학생회 회장을 맡기도 했기 때문에 현지에 사는 중국인들의 생활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업을 본격화하기로 마음먹고, 대학 친구였던 월레스 스미스WallaceSmith의 도움을 받아 ‘라초이LaChoy 식품회사’를 세운다. 라초이는 프랑스어로 ‘중국’ 혹은 ‘고급요리’를 뜻한다. 이 회사는 1990년 미국의 식품기업인 ‘콘아그라 브랜즈ConagraBrands’에 인수되며 아직도 미국에서 아시안 식품을 생산, 유통하는 회사로 운영되고 있다. 유일한은 한국으로 귀국하며 라초이의 모든 지분을 정리했지만, 《위키피디아》에서는 그 설립자를 유일한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가 귀국 후 제약사업을 시작한 데는 의사였던 아내 호미리 여사의 영향도 있었지만 이때 접한 조선의 열악한 보건환경과 의료현실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기왕에 큰 공부를 했으면 큰일을 하라"는 말로 유일한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는 앞선 귀국에서 변변한 치료제 없이 질병에 고통받던 동포들을 보았고, 조선에 가장 시급한 분야가 의료분야라 판단했다.

조선 사람들이 즐겨 입는 흰 옷은 쉽게 더러워져서 자주 빨아야 했기에, 색깔 있는 옷을 입으면 반대로 세탁일을 줄여 경제적·인적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해 염료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염료나 농기구 수입은 이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업이었지만 다른 사업에서 얻은 이익을 이 사업에 투자하며 꾸준히 이어갔다.

보장된 성공을 뒤로하고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이미 개인적 이익이나 성공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가벼운 상처에 바를 연고조차 귀하던 시절이라 사람들은 타박상이나 삐었을 때, 근육통은 물론 벌레에 물렸을 때나 손이 부르트고 동상에 걸렸을 때에도 안티푸라민을 찾았다. 바세린 성분이 포함되어 보습효과나 가려움증에도 효과가 있긴 했지만 반대로 유일한은 이처럼 특정 의약품이 본 효능과 달리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는 것을 꽤 경계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의약품의 정확한 성분이나 효능, 복용방법 등은 밝히지 않은 채 "이 약만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 식의 과대 과장광고와 서로를 향한 비방 등이 난무하던 시절이라 이렇게 가다간 한국제약 산업 전체가 공멸에 빠질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신문 사설이 나올 정도였다.

안티푸라민이라는 이름 역시 ‘염증을 일으키다’는 뜻의 ‘인플레임inflame’에 반대라는 ‘안티anti’를 더해 항염증제이자 진통소염제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고도 전해진다.

유한양행은 안티푸라민을 광고하며 제품 용도를 명확히 밝히며 의학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싣고 "사용 전 의사와 상의하라"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이는 안티푸라민 이전 유한양행의 다른 제품 광고에도 항상 보이는 모습이다.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1970~80년대를 살았던 40~50대들은 녹색의 철제캔에 간호사 모습이 그려진 안티푸라민을 기억할 것이다. 1961년에 리뉴얼된 제품으로, 이 간호사 모습은 유일한의 막내동생인 유순한을 모델로 했다는 설도 있다. 이 간호사 이미지로 인해 안티푸라민은 집집마다 꼭 갖춰놓아야 하는 상비약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이 시원하게 쉴 수 있는 사업을 하라’는 의미의 버드나무 목각화를 선물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그는 미 국무부의 제안을 받고 미군의 작전수행 한국담당고문으로 일하며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격파하는 데 공헌을 세웠을 뿐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지역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국방경비대(맹호대)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이와 함께 훗날 알려진 사실이지만 냅코 작전NAPCOProject(미국 육군전략처OSS가 주도하여, 재미한인으로 구성된 공작원을 침투시켜 국토를 수복하려 했던 작전)에 참가해 50세라는 나이로 고된 훈련을 소화하며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유한양행의 경영을 맡은 유일한은 모범기업인이자 교육자로서 우리 사회에 큰 족적을 남긴다. 기업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유한양행을 비롯해 다양한 사업을 크게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투명하고 정직한 경영을 통해 모범납세 기업인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중요하다고 여긴 그는 여러 개의 학교를 직접 설립해 무상교육을 실시하는 등 교육자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전문경영인제도를 도입하며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와 임직원의 것이라는 평소 신념을 실제로 실천했다.

"울타리를 치지 말고 학생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여 어린 학생들의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당시 박카스에는 카페인, 타우린, 비타민 성분이 첨가되어 금방 피로가 싹 가시게 하는 기분이 들어 인기를 끌었는데, 유일한 회장은 "이 박카스를 포함한 모든 드링크제는 인체의 전반적인 에너지를 향상시키는 게 아닌, 순간적으로 활력이 솟는 느낌만 주는 제품 같다"라고 생각해서 드링크제 개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창업자인 유일한의 정신이 후세 기업인들에게도 널리 퍼져서 훌륭한 기업과 기업인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 속에서 100년을 넘어 200년을 살아내는 멋진 브랜드들이 또 꽃을 피우지 않겠는가

"젊음, 지킬 것은 지킨다."

출시 당시 박카스의 슬로건은 "최신 종합강간제綜合强肝劑"였다.

아무리 한자라지만 지금 시절에 강간영양제라고 내세웠으면 어찌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빠른 성공만큼이나 위기도 바로 닥쳐왔다. 아직 미숙한 제조기술 탓이었는지 알약의 겉에 입힌 당의가 녹아내리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단순 소비자 불만을 넘어 대량 반품 현상으로 이어졌다.

(2005년에 기존1,000밀리그램이었던 타우린 함유량을2,000밀리그램으로 올리는데, 이때부터D는‘Drink’에서‘Double’을 의미한다).

유통분야에서도 역시 박카스만의 새로운 방식을 창조했다. 의약품은 일반적으로 도매상을 거쳐 소매약국으로 출시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제약시장은 제조사보다 도매상에 의해 성과가 좌지우지될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제약은 도매점을 벗어나 소매점과 직접 특약점 계약을 맺고 상품을 공급하는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도매상의 입김을 줄이고 자체 유통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지금도 박카스 루트카가 전국 2만 여개 약국에 직접 방문해 박카스를 공급하고 있다.

지금은 회사 분할과 경쟁 환경의 영향 등으로 1위 자리를 내줬지만, 여전히 동아제약이 우리나라 최대 제약업체로 인식되는 것은 오랫동안 차지한 1등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카스 한 병은 100원이었는데, 연탄 석 장 정도에 맞먹는 돈이었다. 이에 아직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국민이 많은데 굳이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인 박카스를 이렇게 온 국민이 마시라고 광고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고위층의 정서가 반영된 결과라는 ‘웃픈’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 번 벌어지기 시작한 균열은 웬만하면 멈추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떤가?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뿐, 소중한 땀의 현장엔 박카스"라며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보통 사람들의 소중함과 자부심을 일깨우며 박카스의 존재를 각인시킨 이 시리즈는 공익성 메시지를 상품 판매와 연계시킨 착한 광고의 효시로 지목되기도 한다.

2001년 발간한 《박카스 40년사》에서 "박카스의 성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광고"라며, "광고 없이는 박카스 신화는커녕 박카스라는 브랜드조차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상식과 공정을 지키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아낸 ‘젊음, 지킬 것은 지킨다’ 시리즈는 당시 국민에게 큰 공감을 얻어내며 박카스를 일약 온 국민이 사랑하는 브랜드로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시력이 낮아 군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할 위기에 처한 청년이 시력점검표를 외워가면서 "꼭 가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는 신체검사 편은 당시 군복무를 기피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꼬집으며 정직한 젊은이 편에 서서 이 시대의 보통 청년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박카스다"

진짜 몸이 피곤하다면? 지속적으로 적당한 영양을 공급하고 적절한 휴식을 취하는 게 정답이 아닐까.

2020년 6월 기준 우리나라에는 약 2,400만 대의 차량이 등록되어 있는데, 이는 인구 2.16명당 자동차 1대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도심의 교통정체와 아파트의 주차난을 본다면 금방 이해가 되는 숫자이긴 하다.

조선 땅에서 직접 타이어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일인데, 미국 등 서구에서도 타이어 대량생산이 이뤄진 것은 1910년대 즈음이니, 어찌 보면 비교적 일찍 받아들인 서구 문물 중 하나라고도 하겠다.

타이어의 원형인 바퀴는 인간 문명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발명품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고무로 타이어를 만들게 되면서 비로소 자동차나 심지어 비행기까지도 발전할 수 있었으니 타이어 역시 바퀴 못지않게 인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발명품이다.

존 보이드 던롭JohnBoydDunlop은 지금처럼 공기를 불어넣은 타이어를 최초로 개발했다. 원래 수의사였던 그는 딱딱한 바퀴로 된 자전거를 타던 아들이 튕겨나가 다치게 되면서 부드러운 타이어를 만들기 위해 고무에 바람을 불어넣는 방법을 고안했다. 1888년 처음 등장한 이 자전거용 공기압 타이어가 전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하면서 결국 타이어 브랜드 ‘던롭’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던롭이 만든 타이어는 휠에 고무 타이어를 본드로 직접 부착하는 방식이어서 교체할 때마다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프랑스의 앙드레 미슐랭AndreMichelin과 에두아르 미슐랭EdouardMichelin 형제가 손쉽게 탈부착이 가능한 방식으로 개선했는데, 1891년 자전거 타이어를 시작으로 1895년 자동차용 타이어 개발까지 성공했다. 이 타이어를 푸조 차량에 장착해 자동차 경주에도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경주 내내 타이어가 계속해서 펑크가 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는데, 이런 경험은 1934년 세계 최초로 런플랫 타이어를 발명하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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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4-13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참 다양한 책들을 섭렵하시는군요.

전 어제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
그래픽 노블을 읽었답니다.

원작은 두터워서 치트키를 사용
했습니다만. 그래픽 노블을 읽고
나니 원작이 읽고 싶어지더라구요 ㅋ

라로 2022-04-14 16:45   좋아요 2 | URL
저는 이렇게 쉽게 전달되는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근데 이 책 나름 아는 얘기가 많이
나와서
아니 아는 얘기라기보다
우리 주변에 있었던 제품 얘기가 대부분이라
아주 정감이 갔어요.
재밌어요.^^;

저는 작년인가 읽었었던 것 같은데 <킨>
좀 기대가 너무 컸던지
기대에 미치진 못했지만
그녀의 작가의 말인가를 읽고
막 존경심이 일기는 하더라구요.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은 아니지만
뭔가를 하려면 그렇게 해야지,, 뭐 그런
결심(?) 같은 것이 생긴 것 같긴 해요.^^;;;

레삭매냐 2022-04-14 17:54   좋아요 2 | URL
그래픽노블 <킨> 리뷰를 써야
하는데...

일종의 충격이라 그것 참.

라로 2022-04-14 18:04   좋아요 2 | URL
그래픽 노블로 보면 그럴 수 있겠어요!!
그런 말씀을 하시니 저는 그래픽 노블로
보고 싶어요!!^^;
그 전에 매냐님이 올려주시는 리뷰 먼저 보고 결정 하는 것으로. (너무 약아빠졌나요??^^;;;)